그 거울은 거짓말을 한다 나츠메 형사 시리즈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8월
평점 :
품절


아무 정보도 없이 띠지나 뒷표지도 안 보고 본문부터 읽어가던 중에

1/3쯤 된 지점에서 갑자기 !” 소리가 저절로 나왔습니다.

알고 보니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형사인 이 작품의 주인공 나츠메 노부히토가

작년에 출간된 단편집 형사의 눈빛의 주인공이란 걸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어디에도 이 작품이 나츠메 노부히토 시리즈라는 설명은 없었는데,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됐음에도 왜 그에 관한 카피가 한 줄도 없을까, 무척 궁금했고,

본문에서도 나츠메에 대한 좀더 상세한 소개가 없어서 한편으로 아쉽기까지 했습니다.

 

아무튼... 다소 특이한 제목이라 다 읽고 확인해봤는데 원제 그대로 번역된 제목이었습니다.

묘한 제목의 뉘앙스 때문에 처음엔 밀실 트릭이나 본격미스터리가 아닐까 추측해봤지만

사회파 미스터리에 주력하는 야쿠마루 가쿠가 갑자기 작풍을 틀진 않았을 것 같아서

무슨 이야기가 전개될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대학병원 외과의사인 스가 쿠니하루가 거울로 둘러싸인 방에서 목을 맨 사체로 발견됩니다.

성추행범으로 몰렸다가 불기소처분을 받은 그가 수치심과 좌절감에 자살했다고 여겨졌지만

정작 그의 성추행혐의를 조사했던 검사 키요마사는 타살 가능성을 엿보고 재조사에 나섭니다.

한편 히가시 이케부쿠로 경찰서 형사인 나츠메는 막내 여형사 아다치 료코와 함께

행방불명된 의대 입시학원생 아사카와 미키오의 행방을 찾던 중

키요마사 검사의 호출을 받곤 두 사건이 한 가닥으로 이어져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스가가 혹시 억울하게 성추행 혐의를 뒤집어쓴 것인지, 또 정말 타살된 게 맞는지,

그렇다면 누가, 무슨 이유로 스가를 그토록 증오했던 것인지,

, 행방불명된 미키오는 스가의 죽음과 어떤 식으로 연관돼있는 것인지,

검사 키요마사와 형사 나츠메는 각 의문에 대해 전혀 다른 답을 내놓은 채 수사에 임합니다.

 

인터넷 서점을 보면 출판사가 워낙 인색하게(?) 작품 소개를 하고 있는데,

400페이지 안팎의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등장인물이나 서사가 꽤 방대해서 그럴 수도 있고,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있는 대목들이 사방에 흩어져 있어서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제 나름대로 정리한 줄거리가 초반부 소개에 불과한 것도 그 때문인데,

거꾸로 이야기하면, 그만큼 이 작품이 복잡하고 정교하게 설계됐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자신의 의심과 추리를 100% 확신하며 돌직구처럼 용의자를 밀어붙이는 검사 키요마사와 달리

형사 나츠메는 어딘가 한량 같기도 하고, 형사답지 않은 젠틀함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서로 의견이 다른 검사와 형사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수사를 펼치다 보니

가끔은 이 두 인물의 선의의 대결같은 인상을 받기도 하는데,

어쩌면 두 인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나츠메 & 키요마사 시리즈가 나올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만, 검사 키요마사는 지나치게 자기 확신에 빠진 나머지 다소 억지스러워 보였고,

형사 나츠메는 천재 스타일의 과도한 비약적 추리를 펼친 탓에 공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 일본에선 당연한 일인지 몰라도 검사가 아랫사람 부리듯 관할서 형사를 다루는 대목이나

바쁜 와중에 상관의 지시와 무관하게 제멋대로 사건을 골라 수사를 하는 나츠메의 태도는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치곤 어딘가 현실감이 많이 결여된 느낌이 강했습니다.

 

, 기름기라곤 전혀 맛볼 수 없는, 마치 줄거리 요약처럼 읽힌 건조하고 단편적인 문장들은

야쿠마루 가쿠 특유의 하드보일드 스타일을 감안하더라도 여러 번 불편하게 느껴졌습니다.

덕분에 속도감은 엄청나게 빨라졌지만 감정이입을 할 만한 여지가 너무 부족했던 나머지

다 읽고도 사회파 미스터리의 미덕이라든가 비극의 여운을 맛보기 어려웠던 게 사실입니다.

 

개인적으론 형사의 눈빛에서 설정된 나츠메의 캐릭터가 일관성 없어 보인 점도 아쉬웠는데

묻지마 범죄로 딸을 잃은 뒤 남들보다 한참 많은 나이에 경찰에 투신한 비극적 이력도,

그런 탓에 사람을 의심할 줄 모르던 사람모두를 의심해야 하는 사람으로 변한 사연도,

그래서 저에게 있어 수사란 항상 괴롭습니다.”라고 고백하던 그의 애잔한 내면도

이 작품 어디에서도 발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야쿠마루 가쿠의 팬임에도 중반까지만 해도 별 세 개만 줄 생각이었지만,

중후반부터 몰아친 그의 특유의 반전과 설계 덕분에 가까스로(?) 별 하나를 추가했습니다.

사실, 서평도 이렇게까지 길게 쓸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내용 소개는 별로 없고, 안 읽은 독자에게 의문만 잔뜩 던진 장황한 글이 되고 말았습니다.

강력하게 추천하기도, 영 아니라고 비추하기도 애매한 작품이라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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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배틀 케이스릴러
주영하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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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2017청계산장의 재판’(박은우)을 시작으로 곤충’(장민혜), ‘붉은 열대어’(김나영),

그리고 현장검증’(이종관)까지 네 편의 케이스릴러를 읽었습니다.

인터넷서점을 찾아보니 11월에 출간될 언노운 피플’(김나영)19번째 케이스릴러인데,

5년도 안 된 시점에 낸 기대 이상의 파이팅에 정말 박수라도 쳐주고 싶은 마음입니다.

개인적으론 행복배틀이 겨우 다섯 번째 만난 케이스릴러라 민망하지만,

한국 장르물에 이처럼 꾸준히 투자와 노력을 기울이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행복배틀은 기대 이상의 매력적인 작품이었습니다.

처음엔 “SNS에서 행복배틀을 겨루던 강남 영어유치원생 엄마 살인사건이라는 카피 때문에

읽을까 말까 고민하며 살짝 주저했던 게 사실입니다.

SNS를 하지 않는데다 스릴러 소재로서 SNS에 별 매력을 못 느꼈고,

살인사건 피해자가 부유한 강남 영어유치원생 엄마란 점도 호기심을 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읽게 돼있는 책은 어떻게든 인연이 닿게 되는 건지 어찌어찌 행복배틀을 읽게 됐고,

생각지도 못하게 첫 장을 열자마자 마지막 장까지 한 번에 완주하게 됐습니다.

 

행복배틀은 독자에 따라 무척 가벼운 이야기가 담겼다고 오해할 수 있는 제목이지만

사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오랜 상처와 악몽에 시달려 온 불행한 사람들이거나

그 불행을 잊거나 보상받기 위해 실재하지도 않는 행복에 매달리는 사람들이거나

또는 누군가의 행복을 파괴함으로써 희열을 맛보는 칼만 안 든 사이코패스들입니다.

강남 부유층들의 얄팍한 SNS 놀이를 바탕으로 한 이야기라고 멋대로 예상했던 탓에

초반부터 묵직하게 전개되는 비극에 사뭇 놀라면서 페이지를 넘기게 됐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17년 전 3총사처럼 어울려 지냈던 미호, 유진, 세경이 겪은 참혹한 비극이고,

또 하나는 현재 강남 부촌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상 사건 미스터리입니다.

 

기억 속에서 지워버렸던 유진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미호는 스스로 진실 찾기에 나서지만

그와 함께 17년 전 사건에 대한 죄책감과 자책감에 시달리게 됩니다.

3총사의 비극은 실은 처음부터 싹을 잘라낼 수도 있었던 작은 사건에서 잉태됐습니다.

반항기 섞인 불장난, 엉겁결의 거짓말 한마디, 그리고 사악한 악의 등

어디선가 분명 끊어낼 수 있었던 작은 사건들이 탄탄한 고리에 연결된 듯 연이어 벌어졌고

그로 인해 3총사의 짧았던 행복한 시간들은 17년 전 완전히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현재, 행복배틀이라는, 유치하지만 악의로 가득 차있는 부유층들의 SNS 놀이는

더 이상 물질적인 자랑거리가 무의미해진 자들이 벌인 행복 자랑질이 그 실체입니다.

하지만 자신보다 더 행복해 보이는 타인에게 무한한 시기와 질투심을 느낀 자들은

타인의 삶을 흠집 내거나 그들의 행복을 파괴하면서 더 큰 희열을 만끽했고,

그것은 더 이상 장난 같은 배틀이 아닌 피비린내 나는 살상극을 초래하고 맙니다.

유진의 죽음을 조사하던 미호가 발견한 부유층의 시궁창 같은 SNS 놀이 속에는

행복 따위와는 무관한, 누군가를 향한 증오와 살의만 가득했을 뿐입니다.

 

살상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정작 경찰이나 형사는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호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와 스릴러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17년에 걸친 불행에 마음 아파하면서, 또 사악한 자들의 악의에 분노하면서 읽다 보면

작가가 얼마나 정교하고 섬세하게 이야기를 설계했는지 여러 번 깨닫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점에서 별 0.5개를 뺀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최종 반전 때문입니다.

 

이 반전은 개인적으로 너무 아쉬웠습니다.

오히려 없었더라면, 아니, 없었어야 이 작품의 여운을 길게 간직할 수 있었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 사족과도 같은 최종 반전을 설정한 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앞서 읽은 이야기들을 다소 허망하게 만들 정도로 억지스러웠고,

아무리 이해하려 해도 작가의 과욕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마지막의 아쉬움이 있긴 했지만

처음 만난 주영하라는 한국 장르물 작가에게 주목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읽는 내내 페이지는 거부감이나 위화감 없이 술술 넘어갔고,

설계와 문장 모두 탄탄함 이상의 힘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그의 후속작 소식이 너무 오래 걸리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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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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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제키 다이의 데뷔작이자 에도가와 란포상 수장작인 재회는 꽤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후속작을 기다렸는데,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가 출간되기까지 무려 5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는 같은 해(2019) 출간된 루팡의 딸과 함께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실망감만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

두 작품 모두 중도 포기할 정도로 아쉬움이 많았고,

그런 탓에 데뷔작=최고작?’이라는 의구심과 함께 인연을 끊어야 할지 고민한 게 사실인데,

주위에서 그녀들의 범죄에 대한 호평을 듣곤 딱 한 번만 더!”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심하게 훼손된 30대 여자의 사체가 이토 시 바다에서 발견됩니다.

이내 그녀의 신원은 진노 유카리로 밝혀지는데,

그녀의 남편은 부자에, 미남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의사인 진노 도모아키입니다.

자살로 종결된 뒤 장례와 화장까지 마친 직후 타살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남편인 도모아키는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대학 후배와 불륜 중이던 도모아키가 유카리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데다

그를 궁지에 빠뜨릴 목격자와 단서가 연이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사의 종결을 앞두고 위화감을 느낀 도쿄의 형사 우에하라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지점에서부터 재조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 속의 범죄는 그녀들의 몫입니다.

말하자면 작가가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하고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인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타고난 금수저 진노 도모아키의 주변을 맴돌던 인물들입니다.

그의 아내 또는 불륜녀 또는 연인이()그녀들

때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살의를 느끼기도 하는 묘한 관계로 묶여있습니다.

그런 그녀들이 과연 합심해서 도모아키를 향한 모종의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그랬다면 그녀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동기는 무엇일까요?

아니면 도모아키를 놓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서로를 향해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그랬다면 그 범죄를 통해 얻는 이익은 뭘까요?

 

이야기의 배경은 1988~1989년입니다.

말하자면, 현재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던 시기였고,

여자에게 있어 결혼이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으며

이왕이면 안락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조건 좋은 남자를 잡으려는욕망이

그리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을 선택한 여자는 하녀취급만 받게 되는 불행에 빠지고,

그런 하녀에게 식상한 남자는 당연한 듯 불륜의 상대를 찾아 나섭니다.

불륜녀는 그 남자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 남자가 가진 부와 명예에 탐닉한 나머지

남자의 아내가 불행해지기만을 바라거나 직접 손을 쓰고 싶어 합니다.

요약하면, 20세기의 전형적인 통속극 속 가족관계와 남녀관계가 총출동했다고 할까요?

이런 배경 속에서 도모아키 주변을 맴돌던 그녀들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인상은 가볍고, 쉽고, 얕고, 무미건조하다.”입니다.

그녀들하나하나는 모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와 채워지기 어려운 욕망을 갖고 있는데

그 상처와 욕망들은 몇 번씩 거듭 강조되긴 하지만 통 이입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뻔한 설정과 기계적인 강조 때문에 정작 감정이란 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미스터리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다음 전개가 쉽게 엿보인 탓에

긴장감도, 반전의 맛도, 씁쓸한 여운이나 속 시원한 마무리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 작품을 딱히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시절에 통용됐던 가부장적, 여성비하 인식에 대한 비판 역시 흐지부지된 듯 해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덧붙이면, 수사를 맡은 형사들에게서도 특별한 사명감이나 운명같은 걸 전혀 못 느꼈는데,

이 역시 그들에게 부여된 미션 대부분이 단순하고 기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은 걸 보면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루팡의 딸의 아쉬움은 극복한 셈인데

데뷔작인 재회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작가에 대한 기대감은 충족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읽은 터라 책을 덮은 지금 뭔가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정도가 지금의 진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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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 문 - 달이 숨는 시간,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7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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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의 독서계획 해리 보슈+@ 다시 읽기의 세 번째 “+@”보이드 문입니다.

(“+@”시인’, ‘블러드 워크’, ‘보이드 문’, ‘허수아비입니다.)

보슈 시리즈를 다시 읽는 계획에 정작 보슈가 등장하지 않는 “+@”가 포함된 것은

이 작품들 속 주인공들이 이후 보슈 시리즈에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보이드 문의 주인공 캐시 블랙은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다른 작품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아직 다 못 읽었거나 읽었더라도 기억을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스탠드얼론이지만 보슈 시리즈의 외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부제인 달이 숨는 시간은 점성학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달이 어느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3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데

이 작품에서 그 시간은 불운 또는 불행을 야기하는 불길함의 징조로 설명됩니다.

 

운명 같은 만남을 통해 연인이며 동시에 특수절도 파트너가 된 캐시 블랙과 맥스 프릴링.

보이드 문이 뜬 5년 전 어느 밤, 라스베이거스에서 마지막 대형 절도를 계획했던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 끝에 맥스는 목숨을 잃고 캐시는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현재 가석방 상태인 캐시는 LA에 살며 어떻게든 평범한 생활을 이어나가려 하지만

운명은 또다시 그녀를 큰돈과 위조여권을 구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으로 몰아붙입니다.

라스베이거스, 그것도 맥스가 죽은 호텔에서 벌여야 하는 큰 건수를 제안 받은 캐시는

우여곡절 끝에 미션에 성공하지만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참극에 휘말리고 맙니다.

몸을 숨긴 캐시를 뒤쫓기 시작한 인물은 라스베이거스의 사이코패스 해결사 잭 카치이며,

그는 가는 곳마다 피비린내 나는 무차별 살상을 벌이며 캐시를 패닉상태에 빠뜨립니다.

 

큰 틀만 보면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 캐시와 그녀를 쫓는 잭 카치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드라마틱한 설정들이 첨가되면서 속도감과 긴장감 만점의 스릴러가 완성됩니다.

LA를 벗어나기만 해도 다시 교도소로 끌려가야 하는 처지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또다시 큰돈을 위해 범죄를 저질러야만 하는 캐시의 안타까운 사연,

캐시가 훔치려 했던, 시카고 마피아와 마이애미 조직폭력배가 개입된 검은 돈의 비밀,

라스베이거스의 나쁜 기운의 결정체 같은 사이코패스 해결사 잭 카치의 무자비한 살육 등

마지막 페이지까지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끔 만드는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사실, 캐시가 큰 위험을 겪어가며 가까스로 검은 돈을 수중에 넣는 1/3지점까지는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한 범죄수법 설명에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고 있어서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답지 않게 조금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이 점 때문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하지만 잭 카치가 등장하고 살벌한 추격전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롤러코스터가 시작되는데,

그 속도와 낙차는 어지간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능가할 정도의 짜릿함을 자랑합니다.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게 이해 안 될 정도로 비주얼도 뛰어나고

팔색조 같은 주인공 캐시 블랙 역시 할리우드 여배우라면 탐낼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동양철학과 점성학의 산물인 보이드 문이란 제목은 영미권 스릴러와는 안 어울려 보이지만

달이 숨은 그 시간 동안 발산된 불길한 운명에 지배당한 듯한 캐시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면

그 어느 제목보다도 이 작품의 서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불꽃 튀는 운명처럼 만났지만 최악의 타이밍에 캐시의 곁을 떠나버린 맥스의 일도,

고생 끝에 손에 넣은 큰돈이 오히려 재앙을 초래하게 됐다는 점도,

또 자신을 뒤쫓는 잭 카치가 실은 오래전부터 악연 중의 악연으로 엮인 사이코패스란 점도

캐시에겐 달이 숨은 시간이 아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잔혹한 현실이 빚어낸 처연함과 애틋함으로 가득 찬 해리 보슈 시리즈와는 달리

어딘가 운명론적인 비극의 냄새가 진동하는 특별한 정서가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캐시 블랙은 해리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다시 등장합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은 탓에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그것도 해리 보슈 시리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조만간 다시 읽게 될 시인의 계곡은 캐시 블랙 때문에라도 더욱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불운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그 불운을 자신의 힘으로 산산조각 낸 캐시 블랙의 이야기는

빠르고 팽팽한 액션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쾌감 이상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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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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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여성 다나카 유키노는 옛 애인에게 원한을 품고 집에 불을 질러

그의 아내와 두 아이를 죽인 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세상은 이 악마를 당장 교수대에 세우기 바라지만

정작 유키노는 한마디 변명도 반성도 없이 교도소에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녀는 억울한 희생양일까 희대의 괴물일까?

가족부터 학교 동창, 애인의 친구, 동네 주민, 담당 의사, 교도관까지

유키노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과 고백이 쌓여갈수록 무서운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재판과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다나카 유키노는 분명 희대의 악녀입니다.

자신을 버린 연인을 증오하며 스토킹하다가 그 일가족을 몰살시켰다는 죄목 외에도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사악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언론 보도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 따윈 상관없이 그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단 한마디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항소조차 포기했던 그녀는

교도소 수감 중에도 억울하단 말도,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아 관련자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이어 작가는 그녀의 출생부터 사건 당일까지의 긴 시간을 꼼꼼한 연대기처럼 풀어놓습니다.

 

소개글이나 책 뒷표지의 카피를 보면 언뜻 사형제도에 대한 논쟁을 다룬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스스로 사형을 원하는 한 여자의 기구한 일대기를

주변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촘촘하게 그려낸 안타깝고 비극적인 휴먼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재미있는 건 각 챕터에 붙은 부제들입니다.

책임감을 갖추지 못한 열일곱 살 어머니 밑에서”, “양부의 거친 폭력에 시달렸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강도치사 사건을”, “죄 없는 과거 교제 상대를”,

최종판결문에서 그녀의 사악하고 부도덕한 성장 과정을 강조한 문장들을 부제로 삼았는데,

각 챕터마다 출생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유키노 가까이에 있던 인물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유키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무렵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의 서술이 각 챕터의 부제,

즉 최종판결문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에 본 일본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리게 하는 다나카 유키노의 일생은

한 사람의 운명이란 게 얼마나 쉽게 부서지거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원제 イノセントデイズ’(Innocent days)는 번역하면 순수의 날들정도입니다.

실제로 유키노의 일생에도 잠시나마 순수의 날들이라는 빛나는 시절이 있었고

만일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면 그녀는 평범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 하나로 인해 시작된 악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녀를 망가뜨렸고

끝내는 자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심연을 자처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쉴 새 없이 그녀를 몰아쳤던 불행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게 만듭니다.

, 저항도 반성도 없이 사형집행만 기다리는 그녀를 지켜보는 일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한때 유키노와 함께 순수의 날들을 공유했던 친구들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판결 후 6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법무장관이 들어선 상황에서

유키노 본인조차 거부하는 진실 찾기에 나선 친구들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지

마지막 장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어떤 엔딩이 나오더라도 착잡한 심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일본드라마가 제작됐다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무척 보기 불편한 드라마이긴 하겠지만

왠지 그 불편함 때문에 일부러라도 찾아보고 싶다는 역설적인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유키노의 인생을 조금 더 절실한 마음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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