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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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제키 다이의 데뷔작이자 에도가와 란포상 수장작인 재회는 꽤 인상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덕분에 후속작을 기다렸는데,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가 출간되기까지 무려 5년이 걸렸습니다.

하지만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는 같은 해(2019) 출간된 루팡의 딸과 함께

기대했던 것보다 더 큰 실망감만 안겨 주고 말았습니다.

두 작품 모두 중도 포기할 정도로 아쉬움이 많았고,

그런 탓에 데뷔작=최고작?’이라는 의구심과 함께 인연을 끊어야 할지 고민한 게 사실인데,

주위에서 그녀들의 범죄에 대한 호평을 듣곤 딱 한 번만 더!” 도전해보기로 했습니다.

 

심하게 훼손된 30대 여자의 사체가 이토 시 바다에서 발견됩니다.

이내 그녀의 신원은 진노 유카리로 밝혀지는데,

그녀의 남편은 부자에, 미남에,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의사인 진노 도모아키입니다.

자살로 종결된 뒤 장례와 화장까지 마친 직후 타살의 가능성이 제기되고,

남편인 도모아키는 유력한 용의자로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됩니다.

대학 후배와 불륜 중이던 도모아키가 유카리로부터 이혼을 요구받았다는 사실이 드러난데다

그를 궁지에 빠뜨릴 목격자와 단서가 연이어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사의 종결을 앞두고 위화감을 느낀 도쿄의 형사 우에하라는

모두가 당연하다고 여겼던 지점에서부터 재조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합니다.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 속의 범죄는 그녀들의 몫입니다.

말하자면 작가가 처음부터 범인을 공개하고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인 셈인데,

그녀들은 하나같이 타고난 금수저 진노 도모아키의 주변을 맴돌던 인물들입니다.

그의 아내 또는 불륜녀 또는 연인이()그녀들

때론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거나 살의를 느끼기도 하는 묘한 관계로 묶여있습니다.

그런 그녀들이 과연 합심해서 도모아키를 향한 모종의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그랬다면 그녀들을 하나로 뭉치게 한 동기는 무엇일까요?

아니면 도모아키를 놓고 시기와 질투의 대상인 서로를 향해 범죄를 저질렀을까요?

그랬다면 그 범죄를 통해 얻는 이익은 뭘까요?

 

이야기의 배경은 1988~1989년입니다.

말하자면, 현재에 비하면 말도 안 되는 가부장적 사고방식이 지배하던 시기였고,

여자에게 있어 결혼이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으며

이왕이면 안락한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조건 좋은 남자를 잡으려는욕망이

그리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던 시기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에서 격이 맞지 않는 결혼을 선택한 여자는 하녀취급만 받게 되는 불행에 빠지고,

그런 하녀에게 식상한 남자는 당연한 듯 불륜의 상대를 찾아 나섭니다.

불륜녀는 그 남자를 사랑해서라기보다는 그 남자가 가진 부와 명예에 탐닉한 나머지

남자의 아내가 불행해지기만을 바라거나 직접 손을 쓰고 싶어 합니다.

요약하면, 20세기의 전형적인 통속극 속 가족관계와 남녀관계가 총출동했다고 할까요?

이런 배경 속에서 도모아키 주변을 맴돌던 그녀들

각자의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또는 끓어오르는 욕망을 채우기 위해 범죄를 저지릅니다.

 

마지막 장을 덮었을 때의 인상은 가볍고, 쉽고, 얕고, 무미건조하다.”입니다.

그녀들하나하나는 모두 치유되기 어려운 상처와 채워지기 어려운 욕망을 갖고 있는데

그 상처와 욕망들은 몇 번씩 거듭 강조되긴 하지만 통 이입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뻔한 설정과 기계적인 강조 때문에 정작 감정이란 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 미스터리는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거나 다음 전개가 쉽게 엿보인 탓에

긴장감도, 반전의 맛도, 씁쓸한 여운이나 속 시원한 마무리도 제공하지 못합니다.

 

이 작품을 딱히 사회파 미스터리라고 볼 수는 없지만,

그 시절에 통용됐던 가부장적, 여성비하 인식에 대한 비판 역시 흐지부지된 듯 해서

마지막 장면을 보면서도 별 감흥을 느낄 수 없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덧붙이면, 수사를 맡은 형사들에게서도 특별한 사명감이나 운명같은 걸 전혀 못 느꼈는데,

이 역시 그들에게 부여된 미션 대부분이 단순하고 기계적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끝까지 읽은 걸 보면 가면의 너에게 고한다루팡의 딸의 아쉬움은 극복한 셈인데

데뷔작인 재회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작가에 대한 기대감은 충족되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읽은 터라 책을 덮은 지금 뭔가 결론을 내려야 할 것 같긴 한데

솔직히 말하면, “정말,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정도가 지금의 진심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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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드 문 - 달이 숨는 시간,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7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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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만의 독서계획 해리 보슈+@ 다시 읽기의 세 번째 “+@”보이드 문입니다.

(“+@”시인’, ‘블러드 워크’, ‘보이드 문’, ‘허수아비입니다.)

보슈 시리즈를 다시 읽는 계획에 정작 보슈가 등장하지 않는 “+@”가 포함된 것은

이 작품들 속 주인공들이 이후 보슈 시리즈에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보이드 문의 주인공 캐시 블랙은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다른 작품에도 등장한다고 하는데, 아직 다 못 읽었거나 읽었더라도 기억을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스탠드얼론이지만 보슈 시리즈의 외전이라고도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부제인 달이 숨는 시간은 점성학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즉 달이 어느 별자리에도 속하지 않는 30분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을 가리키는데

이 작품에서 그 시간은 불운 또는 불행을 야기하는 불길함의 징조로 설명됩니다.

 

운명 같은 만남을 통해 연인이며 동시에 특수절도 파트너가 된 캐시 블랙과 맥스 프릴링.

보이드 문이 뜬 5년 전 어느 밤, 라스베이거스에서 마지막 대형 절도를 계획했던 두 사람은

예기치 못한 사태에 직면한 끝에 맥스는 목숨을 잃고 캐시는 현장에서 체포됐습니다.

현재 가석방 상태인 캐시는 LA에 살며 어떻게든 평범한 생활을 이어나가려 하지만

운명은 또다시 그녀를 큰돈과 위조여권을 구해야만 하는 절박한 상황으로 몰아붙입니다.

라스베이거스, 그것도 맥스가 죽은 호텔에서 벌여야 하는 큰 건수를 제안 받은 캐시는

우여곡절 끝에 미션에 성공하지만 사소한 실수 하나 때문에 참극에 휘말리고 맙니다.

몸을 숨긴 캐시를 뒤쫓기 시작한 인물은 라스베이거스의 사이코패스 해결사 잭 카치이며,

그는 가는 곳마다 피비린내 나는 무차별 살상을 벌이며 캐시를 패닉상태에 빠뜨립니다.

 

큰 틀만 보면 이야기의 구조는 단순합니다.

자기도 모르게 함정에 빠진 캐시와 그녀를 쫓는 잭 카치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는데,

거기에 드라마틱한 설정들이 첨가되면서 속도감과 긴장감 만점의 스릴러가 완성됩니다.

LA를 벗어나기만 해도 다시 교도소로 끌려가야 하는 처지지만

그런 위험을 무릅쓰고 또다시 큰돈을 위해 범죄를 저질러야만 하는 캐시의 안타까운 사연,

캐시가 훔치려 했던, 시카고 마피아와 마이애미 조직폭력배가 개입된 검은 돈의 비밀,

라스베이거스의 나쁜 기운의 결정체 같은 사이코패스 해결사 잭 카치의 무자비한 살육 등

마지막 페이지까지 조금도 마음을 놓을 수 없게끔 만드는 다양한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사실, 캐시가 큰 위험을 겪어가며 가까스로 검은 돈을 수중에 넣는 1/3지점까지는

지나칠 정도로 디테일한 범죄수법 설명에 많은 페이지가 할애되고 있어서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답지 않게 조금은 답답하고 지루하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이 점 때문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하지만 잭 카치가 등장하고 살벌한 추격전이 시작되면서 본격적인 롤러코스터가 시작되는데,

그 속도와 낙차는 어지간한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능가할 정도의 짜릿함을 자랑합니다.

영화로 만들어지지 않은 게 이해 안 될 정도로 비주얼도 뛰어나고

팔색조 같은 주인공 캐시 블랙 역시 할리우드 여배우라면 탐낼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동양철학과 점성학의 산물인 보이드 문이란 제목은 영미권 스릴러와는 안 어울려 보이지만

달이 숨은 그 시간 동안 발산된 불길한 운명에 지배당한 듯한 캐시의 과거와 현재를 생각하면

그 어느 제목보다도 이 작품의 서사를 잘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불꽃 튀는 운명처럼 만났지만 최악의 타이밍에 캐시의 곁을 떠나버린 맥스의 일도,

고생 끝에 손에 넣은 큰돈이 오히려 재앙을 초래하게 됐다는 점도,

또 자신을 뒤쫓는 잭 카치가 실은 오래전부터 악연 중의 악연으로 엮인 사이코패스란 점도

캐시에겐 달이 숨은 시간이 아니었다면 피할 수 있었던 일들이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선지 잔혹한 현실이 빚어낸 처연함과 애틋함으로 가득 찬 해리 보슈 시리즈와는 달리

어딘가 운명론적인 비극의 냄새가 진동하는 특별한 정서가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캐시 블랙은 해리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다시 등장합니다.

워낙 오래 전에 읽은 탓에 그녀가 어떤 모습으로,

그것도 해리 보슈 시리즈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조만간 다시 읽게 될 시인의 계곡은 캐시 블랙 때문에라도 더욱 기대감이 높아졌습니다.

불운에 휘둘리기도 하지만 그 불운을 자신의 힘으로 산산조각 낸 캐시 블랙의 이야기는

빠르고 팽팽한 액션스릴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쾌감 이상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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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죄의 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2
하야미 가즈마사 지음, 박승후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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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여성 다나카 유키노는 옛 애인에게 원한을 품고 집에 불을 질러

그의 아내와 두 아이를 죽인 죄로 사형을 선고받는다.

세상은 이 악마를 당장 교수대에 세우기 바라지만

정작 유키노는 한마디 변명도 반성도 없이 교도소에서 묵묵히 하루하루를 보낸다.

그녀는 억울한 희생양일까 희대의 괴물일까?

가족부터 학교 동창, 애인의 친구, 동네 주민, 담당 의사, 교도관까지

유키노를 아는 사람들의 증언과 고백이 쌓여갈수록 무서운 진실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재판과 언론을 통해 세상에 공개된 다나카 유키노는 분명 희대의 악녀입니다.

자신을 버린 연인을 증오하며 스토킹하다가 그 일가족을 몰살시켰다는 죄목 외에도

악마의 본색을 드러내기까지 그녀가 얼마나 사악한 삶을 살아왔는지에 대한 언론 보도는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진실 따윈 상관없이 그녀를 비난하고 손가락질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법정에서 단 한마디도 자신을 변호하지 않은 것은 물론 항소조차 포기했던 그녀는

교도소 수감 중에도 억울하단 말도, 반성의 기미도 보이지 않아 관련자들을 놀라게 만듭니다.

이어 작가는 그녀의 출생부터 사건 당일까지의 긴 시간을 꼼꼼한 연대기처럼 풀어놓습니다.

 

소개글이나 책 뒷표지의 카피를 보면 언뜻 사형제도에 대한 논쟁을 다룬 작품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이 작품은 스스로 사형을 원하는 한 여자의 기구한 일대기를

주변 사람들의 시각을 통해 촘촘하게 그려낸 안타깝고 비극적인 휴먼드라마에 가깝습니다.

 

재미있는 건 각 챕터에 붙은 부제들입니다.

책임감을 갖추지 못한 열일곱 살 어머니 밑에서”, “양부의 거친 폭력에 시달렸으며”,

중학교 시절에는 강도치사 사건을”, “죄 없는 과거 교제 상대를”,

최종판결문에서 그녀의 사악하고 부도덕한 성장 과정을 강조한 문장들을 부제로 삼았는데,

각 챕터마다 출생에서 성인에 이르기까지 유키노 가까이에 있던 인물들이 화자로 등장하여

유키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그 무렵 실제로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상세하게 서술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의 서술이 각 챕터의 부제,

즉 최종판결문과는 전혀 다른 내용을 품고 있다는 점입니다.

 

오래 전에 본 일본드라마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을 떠올리게 하는 다나카 유키노의 일생은

한 사람의 운명이란 게 얼마나 쉽게 부서지거나 망가질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작품의 원제 イノセントデイズ’(Innocent days)는 번역하면 순수의 날들정도입니다.

실제로 유키노의 일생에도 잠시나마 순수의 날들이라는 빛나는 시절이 있었고

만일 그런 날들이 계속 이어졌다면 그녀는 평범하더라도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사건 하나로 인해 시작된 악몽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그녀를 망가뜨렸고

끝내는 자기 자신도 어찌할 수 없는 심연을 자처하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쉴 새 없이 그녀를 몰아쳤던 불행은 안타까움을 넘어 분노를 자아내게 만듭니다.

, 저항도 반성도 없이 사형집행만 기다리는 그녀를 지켜보는 일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한때 유키노와 함께 순수의 날들을 공유했던 친구들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분투합니다.

판결 후 6년이란 시간이 지났고, 사형제도를 찬성하는 법무장관이 들어선 상황에서

유키노 본인조차 거부하는 진실 찾기에 나선 친구들의 노력이 어떤 결과를 이끌어낼지

마지막 장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읽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만, 어떤 엔딩이 나오더라도 착잡한 심경이 될 수밖에 없다는 건 분명한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한 동명의 일본드라마가 제작됐다고 하는데,

앞서 언급한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처럼 무척 보기 불편한 드라마이긴 하겠지만

왠지 그 불편함 때문에 일부러라도 찾아보고 싶다는 역설적인 호기심이 생겼습니다.

어쩌면 유키노의 인생을 조금 더 절실한 마음으로 들여다볼 수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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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사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이영미 옮김 / 밝은세상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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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좋은 기억을 갖고 있던 책을 오랜만에 다시 읽었을 때 다소 당황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 이런 이야기였나?” 아니면 내가 간직했던 여운과는 너무 많이 다르네.” 등등...

어지간해선 자주 있는 일이 아니지만,

나가사키는 옛 기억과는 사뭇 다른, 아쉬움이 더 많이 느껴진 작품이었습니다.

 

패전 직후 우후죽순처럼 조직된 고만고만한 야쿠자 가운데 하나인 나가사키의 미무라 .

아버지가 사고로 죽은 뒤 어머니, 동생과 함께 야쿠자인 외숙에게 의탁한 주인공 미무라 슌이

초등학교 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 겪은 다사다난하고 일그러진 성장통을 그린 작품입니다.

 

한때 위세를 떨쳤지만 초라하게 무너져가는 야쿠자 집안의 명멸을 지켜보며 성장한 슌은

그 또래들과는 차원이 다른 경험들과 조숙한 삶을 받아들여야만 했습니다.

밤마다 벌어지는 흉포한 문신 사내들의 질펀한 술자리를 지켜봐야 했고,

거기에 호응하는 여자들의 음란한 목소리와 웃음을 들어야만 했고,

칼에 맞거나 그보다 더 위험한 처지에 빠진 야쿠자들의 모습에 무방비로 노출돼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슌이 자신이 처한 환경에 순하게 전염된 것만은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이 미무라 가의 사람이란 걸 드러내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은 물론

어릴 때부터 나가사키를 떠나고 싶은 욕망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자의든 타의든 번번이 그 욕망이 좌절되긴 하지만 말입니다.

다만, 동경까지는 아니어도 야쿠자라는 족속들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순 없었고,

그런 탓에 그는 한쪽 발은 거친 세계에, 한쪽 발은 자신만의 세계에 담근 채

혼란스러운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낼 수밖에 없는 불행한 인물이었습니다.

 

오래 전 기억으로는 이 작품을 다 읽은 뒤 애틋한 여운이 꽤 남았던 것 같은데,

이번엔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라기보다는 토막토막 끊긴 미무라 슌의 일기장처럼 읽힌 탓에

나가사키의 느낌은 굉장히 건조하고 무색무취에 더 가까웠습니다.

물론 자신이 의지하거나 사랑하는 사람들이 차례로 자신의 곁을 떠나는 걸 지켜보면서도

정작 본인은 나가사키에 발목이 잡힌 채 쇠락한 미무라 가에 남게 된 슌의 이야기는

호기심도 충분히 자아내고 긴장감도 팽팽하게 유지하고 있어서

그의 생각과 감정을 따라가는 게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그의 내면에 가까이 갈만하면 툭툭 끊기는 이야기 때문에 좀처럼 이입이 쉽지 않았습니다.

 

특히 그를 나가사키에 눌러 앉힌 그 무엇에 대한 추상적이고 친절하지 못한 설명은

마지막 장을 덮는 순간 누군가의 일기장을 몰래 훔쳐본 이상의 여운을 남기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제게 여운을 남겼던 건 1960~80년대라는 시간과 나가사키라는 공간이었던 것 같은데

다시 읽어보니 그 시간과 공간이 예전의 기억만큼 매력적으로 그려지진 않았습니다.

 

작품마다 꽤 호불호가 갈리는 요시다 슈이치지만 이런 정서의 작품은 대체로 좋아하는 편인데

기대가 너무 컸던 탓인지 오랜만의 다시 읽기가 아쉬움만 남기고 말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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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차별 살인법
저우둥 지음, 이연희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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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제목에서 드러나듯 이 작품은 이른바 묻지마 살인을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 이유도 없이 그야말로 눈앞에 있는 아무나를 죽이고 체포된 용의자들은

말도 안 되는 황당무계한 범행이유를 대며 사람들을 분노하게 만듭니다.

세상이 미워서, 나만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아무라도 죽이면 기분 좋아질 것 같아서...

실제로 한국에서도 이런 범죄들이 심심찮게 벌어지고 있고 그 양상도 점점 더 잔혹해진 탓에

과연 어떤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갈까 무척 궁금해졌던 게 사실입니다.

 

주인공은 대만의 변호사 위윈즈인데, 사랑하는 연인을 묻지마 살인으로 잃었던 그가

아이러니하게도 사형당하고 싶어 어린이를 살해한 묻지마 살인범을 변호하게 됩니다.

사형이 능사가 아니라 그를 변호하여 살려놓은 뒤 같은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범인의 심리를 연구해야 한다는 심리상담가의 요청을 받은 그는

고민 끝에 변호가 아니라 비극을 막기 위한 노력이라 자위하며 의뢰를 수락합니다.

 

법정 장면이 꽤 많이 나오긴 하지만 그렇다고 치열한 공방이 펼쳐지는 건 아닙니다.

오히려 재판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위윈즈가 묻지마 살인범의 심리에 대해 고민하거나

또는 여러 전문가로부터 동종 범죄의 사례와 학설에 대해 경청하는 장면이 더 많습니다.

그래서인지 중반부쯤엔 논픽션 소설을 읽는 듯한 느낌도 받게 되는데,

사실, 그다지 새로운 정보들은 아니어서 다소 지루하게 읽히기도 했습니다.

 

위윈즈의 변호가 성공해도 소위 심신미약을 내세운 면죄부가 되는 셈이니 찜찜할 것 같고,

실패한다면 결국 그는 뭘 위해 이 고통스런 변호를 맡았던 건가, 역시 찜찜할 것 같았는데,

작가는 막판에 이르러 최근 벌어진 묻지마 살인의 감춰졌던 진실을 폭로하면서

이야기를 미스터리의 영역으로 극적으로 급회전시킵니다.

 

하지만 이 막판 급회전이 확실히 좋은 전략이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묻지마 살인에 대한 사회적 논쟁,

, 여론과 언론에 의한 마녀재판의 가능성, 심신미약이라는 처벌 회피를 위한 법망의 구멍,

제대로 처벌받지 않은 범인의 사회 복귀에 대한 대중의 공포 등

앞서 끌고 온 주제들이 이 막판 급회전때문에 갑자기 다 휘발돼버린 듯 보였기 때문입니다.

물론 고지식한 방식으로만 주제를 다루다가 이야기가 끝났다면 특색 없는 작품이 됐겠지만,

원래 주제와 결이 다른 억지 미스터리가 등장하면서 전혀 다른 이야기로 급마무리된 것 역시

어딘가 자연스럽지도 못하고 인공적으로 보여서 공감하기 어렵게 되고 말았습니다.

 

중화권 미스터리가 꾸준히 출간되고는 있지만

극히 일부 작품을 제외하곤 대체로 만족도가 그리 높지 않았습니다.

다소 허술해 보이는 디테일이나 설정들도 눈에 자주 띄고,

작품 속 인물과 배경도 영미권이나 일본 작품들에 비해 낯설게 느껴지곤 하는데,

개인의 취향 탓일 수도 있지만 이 작품 역시 그런 느낌을 수시로 받은 게 사실입니다.

주제는 매력적이었지만 전개와 마무리에서 모두 아쉬움이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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