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렁크 뮤직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5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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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렁크 뮤직해리 보슈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마이클 코넬리는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라스트 코요테출간 이후

잭 매커보이가 주인공인 시인을 먼저 발표하면서 해리 보슈에게 휴식시간을 줬습니다.

근거라곤 하나도 없는 순전히 제 멋대로의 상상일 뿐이지만,

라스트 코요테에서 그토록 알고 싶어 했던 33년 전 어머니의 죽음의 진상을 알아냈지만

보슈는 조금도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더 큰 고통과 회한에 빠졌는데,

그런 상태에서 또 다시 살인사건 수사에 뛰어드는 보슈를 보는 일은

쓰는 작가나 읽는 독자 모두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결국 18개월만에 다시 할리우드 경찰서로 돌아온 보슈는

(전직 상관 파운즈와는 180도 다른) 새로운 상관 그레이스 빌리츠 경위,

미워할 수 없는 파트너 제리 에드거, 그리고 아직 신참 티를 못 벗은 키즈민 라이더와 함께

의욕적으로 살인사건 수사에 뛰어듭니다. 그것도 팀장이라는 직책을 떠안고 말이죠.

 

보슈의 복귀작은 롤스로이스 트렁크에서 발견된 한 백인의 피살 사건입니다.

범인의 것으로 보이는 지문도 발견되고 사건 정황도 금세 밝혀져 쉽게 해결될 듯 보였지만

보슈는 여기저기에서 크고 작은 위화감을 연이어 느낍니다.

조직폭력단이 개입됐음이 분명한데 정작 조직범죄수사계에서는 관심 없다는 태도를 보이고,

유력한 용의자를 체포하자마자 FBI와 감찰계가 보슈의 부적절한 수사를 조사하고 나섭니다.

피살된 남자의 행적을 쫓아 라스베이거스까지 갔지만 관할서의 태도도 어딘가 의심스럽고,

뭔가 알고 있으면서도 감추는 기색이 역력한 피살자의 아내 역시 수상할 따름입니다.

 

그동안 보슈가 다뤄온 사건들에 비해 다소 단선적으로 보였던 초반부를 넘어가면서

사건은 점점 규모와 깊이가 심각해지는 것은 물론 복잡한 양상을 띠기 시작합니다.

특히 그 어느 때보다 보슈는 내부의 적들에게 심각한 위협을 당하기에 이르는데,

그 위협의 단초를 제공한 건 아이러니하게도 5년 만에 재회한 옛 연인 엘리노어 위시입니다.

(엘리노어는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보슈의 연인이자 악연이었던 인물입니다.)

경찰 규정상 중죄인과의 교제가 금지된 탓에 엘리노어와의 만남은 보슈의 발목을 잡습니다.

문제는 이 발목잡기가 보슈의 수사를 방해하는 듯한 타이밍에 딱 맞춰 벌어졌다는 점인데,

그 때문에 보슈는 또 다시 수사를 중지당하고 내근을 지시받는 처지에 빠지기도 합니다.

 

엘리노어는 이 작품에서 단지 오랜만에 재회한 보슈의 연인이상의 역할을 맡습니다.

그녀는 보슈가 맡은 사건의 배후 또는 배경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는 것은 물론

그로 인해 그녀 자신과 보슈를 위기에 빠뜨리기도 합니다.

물론 두 사람의 로맨스 역시 눈요깃거리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어서

사건 못잖게 독자의 시선과 관심을 잡아끕니다.

 

해리 보슈를 규정하는 세 가지 중요한 코드가 있는데,

그것은 어머니’, ‘베트남전쟁’, 그리고 내부의 적들입니다.

트렁크 뮤직을 읽는 내내 전작들에 비해 꽤 건조하고 하드보일드 냄새가 진하다고 느꼈는데

그것은 세 가지 코드 중 어머니베트남전쟁이 거의 언급되지 않았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이 두 코드는 보슈를 고뇌와 악몽에 빠뜨리곤 해서 매 작품마다 그에 관한 묘사가 많았는데

내부의 적들만 강조된 이번 작품에선 그런 묘사들이 거의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라스트 코요테에서 절정에 이르렀던 보슈의 고뇌와 악몽이 사라진건 반가운 일이었지만

어쩐지 살과 기름기 없이 뼈대만 튼튼한 이야기를 읽는 것 같아 아쉽기도 했습니다.

말 그대로 사건에 충실한 유능한 형사 보슈만 바라보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물론 내부의 적들을 향한 보슈의 통쾌한 보복은 언제나처럼 짜릿하기 그지없었습니다.)

 

엘리노어뿐 아니라 보슈 주변에 등장한 두 명의 여성 캐릭터도 눈길을 끕니다.

꽉 막힌 관료였던 파운즈와 달리 합리적이고 융통성 풍부한 새 상관 그레이스 빌리츠 경위와

그녀가 점찍어 할리우드 경찰서로 데려온 유망한 신예 형사 키즈민 라이더가 그들인데,

보슈를 향한 내부의 적들의 공격이 심상치 않을 정도로 거세진 와중에도

두 사람은 보슈를 지키고 돕기 위해 자신들만의 소신을 갖고 수사에 임합니다.

키즈민 라이더가 이후 작품에서도 간간이 이름을 본 기억이 나는 반면,

그레이스 빌리츠의 이름은 다소 생소하게 들렸는데 이후의 행보가 궁금할 따름입니다.

 

정작 보슈가 맡은 살인사건 수사에 관해서는 별로 언급을 하지 못했는데,

단순해 보이면서도 복잡하게 얽힌데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들이 많았기 때문입니다.

단순 살인사건에서 시작됐지만 복잡미묘하게 확장되는 이야기의 참맛은 직접 만끽하시기 바랍니다.

5년 만에 재회한 연인 엘리노어와의 애틋하고 위태로운 로맨스의 향방도 함께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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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로하이츠의 신 1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이정민 옮김 / 몽실북스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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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인기작가 지요다 고키의 소설에 영향을 받은 집단 자살사건이 벌어지고, 이 사건으로 언론과 여론은 고키와 고키의 소설에 비난을 쏟아 붇는다. 절망감에 빠져 펜을 놓았던 고키는 한 신문에 실린 독자의 편지를 계기로 부활에 성공한다. 그 편지를 보낸 건 고키의 천사로 불린 익명의 소녀로, 그에 대한 유일한 옹호의 메시지였다. 사건이 벌어진 지 10년 후, 한때 도쿄의 전통여관이었던 낡은 3층 건물 슬로하이츠에는 집주인인 각본가 아카바네 다마키와 그녀의 친구들, 그리고 지요다 고키가 모여 살고 있다. 어느 날, 미소녀 가가미 리리아가 나타나자 모두 그녀를 10년 전 고키의 천사라 추측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고백하자면, 이 작품에 관심을 가진 첫 번째 이유는 일본 미스터리였기 때문입니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인데다 인터넷서점에서 그렇게 장르를 구분해놓았고, 첫눈에 띈 카피가 지요다 고키의 소설 때문에 사람들이 죽은 그날의 날씨는 더없이 맑았다. 소노미야 쇼고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자살 게임. 참가자 열다섯 명은 전원 사망했다.”라서 아무런 의심(?)없이 제가 좋아하는 일본 미스터리라고 확신했다는 뜻입니다. 그런 탓에, 1권 중반부까지만 해도 도대체 미스터리는 언제 시작되는 거지?”라며, 슬로하이츠 멤버들의 크고 작은 일상만을 다루는 이야기에 살짝 의구심을 갖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2권까지 모두 읽고 난 지금, 그 어느 매력적인 미스터리 이상의 충족감을 느낍니다.

 

엄밀히 말하면, ‘슬로하이츠의 신은 미스터리 장르로 구분하긴 어려운 작품입니다. “자신이 믿는 세계를 완성하려는 젊은 창작가들의, 치열하기 때문에 더없이 눈부신 날들이라는 출판사의 홍보카피가 이 작품의 진짜 화두이자 주제이기 때문입니다. ‘뭔가가 되고 싶지만 아직 부화조차 못한, 아니, 부화할 가능성조차 불투명한 지망생들이 서로에게 때론 따끔한 채찍을, 때론 구원의 손길을 내밀며 한 지붕 아래에서 살아가는, 그러면서 밝음과 어두움을 번갈아 겪으며 조금씩 성장하고 변화하는 이야기, 또 오랫동안 가슴 속에 묻어둔 과거 때문에 아프기도 웃기도 사랑하게 되기도 하는 이야기,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숨어있는,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몇 개의 미스터리들... 이것이 슬로하이츠의 신의 진면목입니다.

 

25살의 나이에 일본에서 각광받는 각본가가 된 집주인 아카바네 다마키와 엄청난 사건을 딛고 다시 인기작가로 왕성하게 활동 중인 지요다 고키를 제외하곤 슬로하이츠의 멤버들은 아직 채 무엇이 되지 못한 20대 중반 지망생들에 불과합니다. 아동만화가를 꿈꾸지만 너무 착한 이야기만 만드는 탓에 늘 편집자에게 퇴짜 맞는 가노 소타, 영화감독을 꿈꾸지만 주장감정도 없는 기획만 내놓는다고 비판 받는 나가노 마사요시, 화가를 꿈꾸지만 의존적인 성격 탓에 그림도, 일상도 엉망이 된 모리나가 스미레, 누구보다 다마키를 존중하지만 그녀의 성공을 견디다 못해 슬로하이츠를 뛰쳐나간 엔야 등 아무 것도 확실하지 않은 미래 앞에 툭 던져진 다양한 군상의 20대들이 그들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단지 치열하고 눈부신 청춘들의 이야기란 뜻은 아닙니다. 앞서 크다면 크고 작다면 작은 몇 개의 미스터리들이 들어있다고 했는데, ‘누가? ?’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현실적인 미스터리들이 있는가 하면, 막판에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덩치는 작지만 폭발력은 엄청난 미스터리도 포함돼있습니다.

 

사실, 이 미스터리들은 그리 어렵지 않기 때문에 결과를 예측하는 것도 어렵지 않지만, 독자는 그보다 어떻게그 미스터리의 진실들이 풀리게 될지에 더 촉각을 곤두세우게 됩니다. 이 대목에서 츠지무라 미즈키의 진면목을 만날 수 있는데 통쾌했으면 좋겠다, 싶은 지점에선 여지없이 속 시원한 장면들이 등장하고, 안쓰러워 죽겠다, 싶은 지점에선 그에 어울리는 따뜻한 해법이 등장하는가 하면, 예측 가능하고 신파 스타일로 이야기가 풀리는 대목에서조차 눈가를 뜨끈하게 만듭니다. 아직 못 읽은 그녀의 작품이 많지만, 개인적으론 가장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고, 이 작품을 인생작이라고 말한 일본 독자들의 평가에도 저절로 수긍할 수 있었습니다.

 

장황하게 호의적인 서평을 쓰고도 기어이 별 0.5개를 뺀 유일한 이유는 분량때문입니다. 일본 작품들 가운데 연재물인 경우 단행본으로 묶으면 분량이 과해지곤 하는데, ‘슬로하이츠의 신도 그런 경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1~2권 합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은 이야기의 규모나 서사에 비해 다소 길고 넘쳐 보인 게 사실입니다.

 

독자에 따라 이 작품을 판타지로 여길 수도 있습니다. 슬로하이츠 멤버들은 시고 떫고 씁쓸한 여정을 거쳐 나름의 해피엔딩을 맞이하지만 현실의 지망생들이 이들처럼 자신만의 세계를 구축하기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게 따지면 픽션 대신 뉴스나 다큐멘터리를 보란 말밖엔 해줄 수가 없습니다. 판타지라 하더라도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힘과 미덕을 지녔다면, 또 그 힘과 미덕이 누군가에게 조금이라도 긍정의 힘이 된다면 그걸로 충분하지 않을까요? “정성껏, 천천히, 시간을 들여란 뜻을 담아 집 이름을 슬로하이츠로 삼은 다마키의 마음 역시 그 힘과 미덕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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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 자살 노트를 쓰는 살인자,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22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김승욱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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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사건 기획기사 전문기자인 잭 매커보이는 경찰인 쌍둥이 형 션의 자살 소식을 듣습니다.

충격에 빠진 가운데 잭은 형의 죽음을 계기로 경찰 자살에 관한 기획기사를 준비하는데,

그 과정에서 형의 사인이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문을 품게 된 것은 물론

다른 경찰관의 죽음에서도 유사한 패턴이 발견되자 연쇄살인 가능성을 의심하기 시작합니다.

본격적인 조사를 위해 불법과 합법의 경계에서 위태롭게 줄타기를 하며 자료를 모으던 잭은

갑자기 끼어든 FBI로부터 자료조사는 물론 취재와 보도마저 중지하라는 요구를 받지만,

피해자의 동생이자 첫 단서를 잡은 기자라는 입장을 앞세워 끝내 FBI 수사팀에 합류한 뒤

수석요원 레이첼 월링과 파트너가 되어 시인으로 불리는 연쇄살인범 체포와 함께

형의 죽음의 진실을 찾는 길고 고통스런 여정을 시작합니다.

 

저만의 독서계획 해리 보슈+@ 다시 읽기의 첫 번째 “+@”시인입니다.

(이어질 “+@”블러드 워크’, ‘보이드 문’, ‘허수아비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를 다시 읽는 계획에 정작 보슈가 등장하지 않는 “+@”들이 들어간 것은

이 작품들 속 주인공들이 이후 보슈 시리즈의 몇몇 작품에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인데,

시인의 경우 주인공인 잭 매커보이와 레이철 월링이 거기에 해당됩니다.

잭 맥커보이는 보슈 시리즈 7편인 다크니스 모어 댄 나잇

(이 작품의 후속편이자) 보슈 시리즈 10편인 시인의 계곡에 중요한 역할로 등장합니다.

레이철 월링은 나중에 보슈와 특별한 관계로 발전하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그런 점에서 시인은 외형만 놓고 보면 잭 매커보이 시리즈의 첫 번째 작품이지만

동시에 해리 보슈 시리즈의 외전이라고 봐도 큰 무리가 없다는 생각입니다.

(링크?)

 

형의 죽음의 진실을 파헤치는 잭의 여정은 실은 형사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살인사건 전문기자라는 캐릭터 덕분에 잭은 자료조사는 물론 뛰어난 추리능력까지 갖췄고,

FBI에 합류한 뒤로도 그들의 고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신만의 행보를 고집스레 이어갑니다.

말싸움으론 으뜸이고, 적당한 반골 기질과 함께 적절한 타협 타이밍도 아는 인물입니다.

다행히도(?) 뛰어난 몸싸움 능력까지 지닌 슈퍼 히어로는 아니지만 말입니다.

 

하지만 (많은 스릴러 주인공들이 그렇듯) 잭은 이런저런 기구한 사연들을 부여받았는데,

그의 어린 시절을 불행하게 만든 누이의 죽음과 그 이후 벽을 친 듯 소원해진 가족 관계,

예나 지금이나 상처받을 일이 두려워 좋아하는 마음을 표현하지 못하는 자괴감 어린 소심함,

형을 죽인 범인을 잡으려면 특종을 포기해야만 하는 기자로서의 딜레마 등이 그것인데,

굳이 마이클 코넬리의 캐릭터들로 비교하면 해리 보슈와 미키 할러의 중간쯤 된다고 할까요?

너무 무겁거나 어둡지도 않고, 어딘가 뺀질뺀질 날라리(?) 같지도 않은 게 잭의 특징입니다.

 

FBI에 합류하긴 했어도 기자라는 한계 때문에 잭은 대놓고 수사를 할 수는 없는 처지인데,

그래선지 파트너인 레이철 월링의 역할이 잭 못잖게 비중 있게 그려집니다.

액션에도 능하고 당차면서도 매력적인 FBI 행동과학국 요원 레이철의 카리스마는

남성미라는 면에서는 다소 약해 보이는 잭의 캐릭터와 희한하게 잘 맞아 떨어지는데,

마치 좌충우돌 후 로맨스라는 로맨틱 코미디 공식을 위한 캐릭터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레이철이 잭과의 로맨스에 방점을 둔 인물이란 뜻은 절대 아닙니다.

FBI 특수팀장이 수석요원으로 삼을 정도로 그녀에 대한 신뢰와 기대는 대단한 수준입니다.

속이 텅 빈 여자라는 전 남편의 비난대로 인간미만 놓고 보면 다소 딱딱해 보이기도 하지만,

적어도 FBI 요원이 갖춰야 할 미덕은 모두 갖춘 아주 매력적인 캐릭터임에 분명합니다.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아동성애자로 보이는 위험한 인물이 도피극을 벌이며 살인을 저지르는 것은 물론

n번방 사건을 연상시키는 네트워크 속에서 끔찍한 거래를 하는 모습이 초반부터 그려집니다.

하지만 잔혹한 살인마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쉽게 범인을 독자에게 노출시킨다는 건

누가 봐도 작가에게 자신만만하고 든든한 히든카드가 있다는 걸 짐작하게 만듭니다.

실제로 막판 100여 페이지에 걸쳐 거듭되는 반전은

(다소 복잡해 보이긴 해도) 조금도 책에서 눈을 뗄 수 없게끔 폭발적으로 전개됩니다.

이미 범인이 노출됐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누군가 숨어있다는 긴장감을 떨칠 수 없는 덕분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임에도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상태에서 책장을 넘기게 되는 것입니다.

 

해리 보슈 시리즈는 아니지만 이 작품엔 시리즈의 흔적들이 곳곳에 보입니다.

무엇보다 도주 중인 범인의 행적을 상세히 보도한 LA타임스의 기사가 눈에 먼저 띄었는데,

그 기사를 쓴 기자는 직전 작품인 라스트 코요테에서 보슈와 인연을 맺은 케이샤 러셀입니다.

, 막판에 등장하는 LA지진 주택역시 라스트 코요테에서 지진으로 큰 손상을 입은 뒤

결국 철거되고 만 보슈의 집을 연상시켜서 애처로운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보슈가 근무하는 할리우드 경찰서가 잠깐 등장해서 반가웠는데

혹시나 보슈가(또는 그의 동료라도) 잠깐이라도 보이지 않을까 기대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시인보슈 시리즈는 아니지만 마이클 코넬리 작품 가운데 걸작으로 꼽히는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론 중반부쯤 살짝 분량이 과했다는 느낌이 아쉬움으로 남긴 했지만

그 외엔 (오랜만에 다시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모든 게 매력덩어리인 스릴러라는 생각입니다.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후속편인 시인의 계곡을 읽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지만,

그 욕심을 꾹 참고 원래 계획대로 차근차근 읽어나가려고 합니다.

다음은 시리즈 첫 편인 블랙 에코에서 강렬하게 등장했던 보슈의 여인엘리노어 위시가

오랜만에 다시 모습을 드러내는 시리즈 5트렁크 뮤직입니다.

과연 엘리노어가 어떤 모습으로 보슈 앞에 다시 나타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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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외활동
이시우 지음 / 황금가지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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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돼있지만 인터넷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벗어나진 않았습니다.)

 

같은 고등학교, 같은 반이지만 성적도 인격도 외모도 극과 극인 이영과 김세연은

어느 날 등굣길에 아파트 담벼락에 버려진 여고생의 시체를 함께 발견합니다.

이영은 CCTV에 찍힌 시체 앞 자신의 모습이 인터넷에 돌면서 범인으로 오인받기 시작하자

어딘가 수상쩍은 CCTV 관리자의 휴대폰으로 전화를 걸어 항의를 하지만,

그로 인해 이영은 물론 김세연까지 피비린내 진동하는 엄청난 살육전에 휘말리게 됩니다.

 

화재로 부모를 잃었지만 인터넷에서 부모를 죽인 패륜아라는 오명을 뒤집어썼던 이영은

툭하면 싸움질이나 크고 작은 문제를 일으켜 왕따 아닌 왕따로 지내는 남학생인 반면,

김세연은 중학생 시절 세계 해커대회를 휩쓴 경력과 함께

뛰어난 미모, 압도적인 성적, 극강의 카리스마를 지니고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런 캐릭터 때문에 역시 왕따 아닌 왕따가 된 여학생입니다.

 

이들이 상대하는 은 살인을 취미로 삼는 미스터리한 집단 동호회입니다.

그들은 치밀한 계획을 짠 후 돌아가며 무고한 여성들을 살해해온 쾌락 살인마 집단이며,

선생이라 불리는 자가 모든 악을 설계하고 조종하는 최고위 배후입니다.

 

3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에 사건이 벌어진 기간 역시 만 이틀 정도에 불과하지만

이영-김세연 콤비가 동호회와 벌이는 전쟁은 최소 몇 배 이상의 스케일로 펼쳐집니다.

희대의 연쇄살인집단과의 대결이라는 전형적인 구도를 갖고 있지만,

CCTV를 통한 사냥, 최고보안등급의 메신저, 기상천외한 해킹, 흉기로 돌변한 무인자동차 등

양측이 보유한 전투력은 마치 첨단 기술전쟁을 방불케 할 정도이고,

액션 장면 역시 천재 미소녀와 왕따 꼴찌 콤비가 펼치는 거침없는 청춘 액션 스릴러라는,

어딘가 가볍고 코믹한 분위기를 풍기는 홍보카피와는 거리가 먼,

피와 뼈가 난무하는 잔혹한 장면들을 엄청난 물량으로 쏟아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대로 순수하게 재미를 추구하는 킬링타임용 스릴러로서 매력도 있고,

길지 않은 분량 때문에 첫 장을 열면 단숨에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영과 김세연의 캐릭터도 살짝 판타지처럼 보이긴 해도

액션물 주인공으로서의 카리스마와 매력을 지니고 있어서 흥미롭게 지켜보게 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은 바로 살인집단 동호회의 모호함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의사, 교사, 사장, 공무원 등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서

각자의 능력을 활용해 계획을 짠 후 돌아가며 살인을 저지르고

서로 알리바이를 증언하는 방식으로 수많은 여자들을 살해해 온 쾌락 살인마집단이라는데,

정작 이런 정체성은 누군가의 짧은 설명 또는 인용으로만 묘사될 뿐입니다.

물론 이영과 김세연이 형사가 아닌데다 작가의 목표 역시 단순한 범인잡기가 아닌 탓에

동호회의 그간의 범행들을 현재 시점에서 상세히 보여줄 필요는 없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로만 설명되고 마는 동호회의 악행은 별로 현실감이 없어 보였습니다.

개인적으론 기승전결 중 이 쏙 빠진 채 에서 바로 로 점프한 느낌이었는데

바로 이 자리에 동호회의 정체성과 악행이 그려졌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어반 판타지로 불린다는 작가의 전작 이계리 판타지아를 읽어보진 못했지만

다음 작품이 역시 엔터테인먼트 스릴러라면 충분히 기대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또 한 명의 새로운 한국 장르물 작가를 만나게 돼서 반가운 시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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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는 이에몬
교고쿠 나쓰히코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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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본문 마지막 줄을 읽자마자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서평을 써야 되나, 말아야 되나... 쓴다면 뭘 써야 되나?”

그런데, 말미에 실린 역자후기를 보곤 다소 안도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역자 역시 후기를 쓰기가 몹시 껄끄럽네요. (처음엔 편집부의 후기 요청을 거절했는데)

정말이지 이 후기가 책에 안 실렸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999리입니다. .”라며,

진심으로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입니다.

 

일본에서 가장 유명한 괴담 중 하나인 요쓰야 괴담을 재해석해서 새롭게 그려냈으며

교고쿠 나쓰히코가 그리는 기괴한 사랑 이야기라는 부제가 달린 이 작품은

전직 무사 이에몬과 무가의 딸 이와 사이의 기괴한 사랑 이야기를 다룬 건 맞지만,

번갈아 한 챕터씩 이끄는 조연들의 역할과 그들만의 스토리도 주인공 못잖게 비중이 커서

굳이 정리하면 에도 시대 한 마을에서 벌어진 광기의 향연이라고 하는 게 맞을 것 같습니다.

 

가문의 몰락 이후 목수가 된 전직 무사 이에몬은 웃음 따윈 모르는 무뚝뚝한 인물입니다.

그런 이에몬이 중매를 통해 하급무가의 딸 이와의 남편이 됩니다.

거침없는 돌직구 스타일의 이와는 한때 뛰어난 미모를 자랑하며 혼담을 독차지했지만

뒤늦게 걸린 포창(천연두) 때문에 몸과 얼굴이 모조리 망가진 상태입니다.

하지만 그 뒤로도 이와의 대쪽 같은 성격은 전혀 변함이 없었는데,

그런 탓에 자신의 의지보다는 아버지의 고집 때문에 이뤄진 이에몬과의 결혼생활은

말 그대로 엉망진창, 좌충우돌, 끝없는 싸움과 시비의 연속으로 점철됩니다.

그리고 여기에, 당대 최악의 소시오패스인 이토 기헤이가 끼어들면서

두 사람의 악연은 파국으로 치닫게 되고 동시에 끔찍한 죽음들을 야기하기에 이릅니다.

 

꽤 많은 인물들이 각자의 기구한 사연들을 풀어내다가 대부분 그 사연으로 죽음을 맞이하지만

실은 그 모든 사연들과 죽음은 같은 뿌리에서 기인한 것들입니다.

아직 이와가 남자들의 관심과 혼담을 독차지하던 시절,

상급관리인 소시오패스 이토 기헤이가 이와를 욕심냈지만 거절당한 바 있습니다.

이후 이토는 자신의 수하들과 함께 지역민들을 향해 참혹한 만행을 저지르기 시작했고,

급기야 이와가 이에몬과 결혼하자 이토는 두 사람의 파멸까지 획책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이토의 만행으로 가족이나 지인을 잃은 자들의 복수극까지 개입되면서

이야기는 기괴한 사랑 이야기를 넘어 피로 얼룩진 괴담으로까지 확장됩니다.

 

최애 시리즈 중 하나인 미야베 미유키의 미야베 월드 2과 같은 시대를 다루고 있고,

이야기 역시 비슷한 궤적을 그리고 있다 보니 초반부터 흥미롭게 읽힌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교고쿠 나쓰히코 특유의 의도된 모호함이 계속 발목을 잡았는데,

가장 두드러진 건 완결되지 않은, 그래서 독자 스스로 해석하고 이해해야 하는 문장들이고,

또 하나는 좀더 세세히 그려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던 이에몬과 이와의 사랑입니다.

 

교고쿠 나쓰히코를 두세 편밖에 읽지 않았으니 그의 특유함을 잘 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생략과 축약이 과도한 나머지 통 이해하지 못하고 넘어간 문장들이 너무 많은 건 사실입니다.

, 이에몬과 이와의 사랑 역시 ?’라는 의문을 자주 자아낼 만큼 모호하고 난해했는데,

그들은 정말 사랑했을까?”, “이에몬은 왜 저럴까?”, “이와는 왜 저럴까?” 등에 대해

교고쿠 나쓰히코는 대체로 불친절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습니다.

저의 독해력이나 이해력이 떨어진 탓도 있겠지만,

어쨌든 애잔하면서도 불멸의 향기를 지닌 듯한 두 사람의 엔딩이 쉽게 납득되진 않았습니다.

 

오히려 가장 이해가 쉽고 선명하게 그려진 인물은 소시오패스 이토 기헤이였는데,

이 작품의 모든 불길한 기운과 참혹한 비극이 그에게서 비롯됐기 때문입니다.

술도, 돈도, 권력도, 여자도 그를 만족시키지 못합니다.

그가 희열을 느끼는 유일한 순간은 타인의 슬픔과 고통과 절망을 만끽할 때뿐입니다.

극단적인 예를 들자면, 아이를 잃은 상중(喪中)의 여인을 겁탈하며 만족을 느끼는 정도이니,

소시오패스 중에도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이에몬과 이와가 처음부터 끝까지 모호한 캐릭터와 이야기를 풀어낸 반면,

확실한 악행의 주인공 이토 기헤이는 오히려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은 캐릭터였습니다.

 

주위에서 이 작품을 교고쿠 나쓰히코의 최고작이라고 평한 이야기를 들은 적 있는데,

다른 건 논외로 하더라도 이에몬과 이와가 조금만 더 이해하기 쉽게 그려졌더라면

저 역시 분명 그런 평가를 내렸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만큼 매력적인 설정과 서사를 지닌 작품이란 뜻인데,

제게는 동시에 그만큼 아쉬움이 깊게 남은 작품이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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