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스트 코요테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4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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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 마이클 코넬리를 처음 알게 된 작품이 라스트 코요테였습니다.

그 뒤로 팬이 되어 출간순서 같은 거 따지지 않고 닥치는대로 읽어왔는데,

거의 10년만에 다시 만난 라스트 코요테는 첫 인상 때와 마찬가지로 명품 그 자체였습니다.

 

메인 스토리는 33년 전 어머니 마저리 로우를 살해한 범인을 찾는 보슈의 고된 여정입니다.

LA를 휩쓴 지진으로 집은 붕괴될 위기에 처하고 보슈 본인은 무기 정직을 당한 상태입니다.

경찰국의 명령으로 정신과 치료까지 받게 된 보슈는

더는 늦출 수 없는 자신의 사명, 즉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로 결심합니다.

배지와 총을 반납한 상태에서 보슈는 과거 수사 자료를 확보하는 것조차 어려움을 겪지만

누가 봐도 납득하기 어려운 엉터리 방식으로 수사가 진행됐음을 알게 됐고,

매춘부였던 어머니와 관련 있는 인물들(검사, 후원자, 포주, 친구)의 행적까지 파악합니다.

보슈는 생각보다 빨리, 명확하게 진실을 캐낼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하지만 늘 그랬듯 그의 앞엔 수많은 함정과 덫과 반전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보슈의 처지는 그야말로 사방에 적 또는 낭떠러지만 존재하는 위기일발그 자체입니다.

지진으로 집을 잃게 생겼고, 상관 폭행혐의로 무기한 정직을 선고받은데다

정신과 의사와의 면담은 오히려 보슈의 스트레스와 분노를 자극할 뿐입니다.

지진으로 터전을 잃은 삐쩍 마른 코요테 한 마리에게 동정심과 동질감을 느낄 정도로

보슈의 삶이 더 이상 피폐해질 수 없는 지경에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33년 전의 살인사건을 추적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지만,

그것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보슈에게는 주저할 것도 두려워할 일도 없습니다.

정직상태의 불리함을 회피하기 위해 상관의 신분을 도용하기도 하고,

어머니와 함께 매춘부 생활을 했던 여인에게 결정적인 정보를 얻어내기도 하고,

엉터리 수사를 했던 당시 담당형사를 만나기 위해 플로리다까지 날아가기도 하고,

지문 대조를 위해 그답지 않은 애걸복걸과 그다운 무자비한 압박을 겸비하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함으로 똘똘 뭉친 보슈의 모습을 목격할 수 있었는데,

아무래도 어머니의 죽음의 진실이라는 더 이상 무거울 수 없는 주제가 깔려있다 보니

어느 한 대목도 가볍게 읽을 수 없었습니다.

더구나 상관 폭행으로 드러난 그의 폭발적 스트레스에 대해

정신과 의사로부터 블루 앙스트(우울한 고뇌)’라는 진단까지 받게 된 것은 물론,

수사 과정에서 적잖은 희생이 벌어지고 그것이 자기 탓이라는 자괴감에 빠진 보슈가

자신의 삶과 직업을 저주하는 듯한 태도를 보일 때는 한없이 안쓰럽고 안타깝기만 합니다.

심지어 보슈는 이 사명을 시작조차 하지 말았어야 했다, 라는 자책에 이르기도 합니다.

 

모든 진실이 밝혀진 뒤 보슈가 조금도 마음의 안식을 찾지 못한 것은 물론

오히려 더 큰 고통과 회한에 빠지게 되는 것도 바로 이런 점 때문인데,

그래선지 작가가 이 작품 뒤에 바로 보슈의 다음 이야기를 이어가지 않고

잭 매커보이라는 새 주인공을 앞세워 시인이란 작품을 내놓은 것은

어쩌면 보슈에게 휴식을 주기 위한 게 아니었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번 작품에서도 보슈는 사랑을 합니다.

옛 담당형사를 만나기 위해 날아간 플로리다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또다시!) 어딘가 보슈와 닮은 구석이 있어 보이는, ‘그림 그리는 여자재스민 코리언입니다.

어머니의 진실을 찾는 고달프고 고통스러운 여정 가운데 유일한 안식을 준 인물이지만,

그녀 역시 보슈가 짐작조차 못한 비밀을 지니고 있었다는 게 뒤늦게 밝혀집니다.

출간연도로만 보면 라스트 코요테이후 2년 뒤에나 다음 작품인 트렁크 뮤직이 나왔는데,

과연 그때까지 재스민과의 인연이 이어질지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트렁크 뮤직역시 오래 전에 읽었지만 전혀 기억이 없네요.)

 

보슈의 캐릭터를 규정하는 세 가지 요소 가운데 베트남전쟁은 거의 등장하지 않은 반면

어머니내부의 적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렬하게 그려진 작품입니다.

어머니가 보슈의 깊은 슬픔과 고통의 서사를 전하고 있다면,

내부의 적들은 독자로 하여금 분노와 통쾌함을 번갈아 느끼게 만들어줍니다.

, 스릴러에서 맛볼 수 있는 두 가지 최고의 맛을 만끽할 수 있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뒤죽박죽 순서 없이 읽은 해리 보슈 시리즈가운데

(내용은 다 까먹었지만) 가장 강한 인상을 남겼다고 기억하고 있던 게 이 작품이었는데,

그 기억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인한 인상적인 시간이었습니다.

 

사족으로...

번역에 관해 몇 군데 애매하거나 아쉬움이 느껴진 대목이 있었는데,

제가 읽은 건 구판이라 표지가 바뀐 개정판에서는 수정됐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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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 - 김희재 장편소설
김희재 지음 / CABINET(캐비넷)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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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에 이 작품의 중요한 내용과 설정들이 꽤 많이 공개돼있는데,

살짝 의아한 생각이 들긴 했지만 일단 그 범위 안에서 이 작품을 소개하겠습니다.

 

지난 몇 년간 윤색작가 서원의 삶은 롤러코스터 그 자체였습니다.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연인이던 건축디자이너 승우는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그제야 뱃속에 자신과 승우의 2세가 자리 잡았음을 깨달았습니다.

어느 날,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에서 정진의 도움으로 큰 위기를 넘긴 서원은

그의 진심어린 구애에도 승우에 대한 그리움 때문에 번번이 거절했지만,

정진의 집이 오래 전 승우가 자신을 위해 설계했던 바로 그 집임을 알게 되곤

오로지 승우의 흔적을 느끼기 위해 정진의 마음을 받아들이기로 합니다.

완벽한 IOT(사물인터넷)가 구현된 정진의 집은 겉으로는 이상적인 집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현재 그 집 2층에는 서원과 정진 외에 또 한 사람의 남자가 머물고 있습니다.

그는 서원이 정진 몰래 끌어들인 옛 연인 승우입니다.

 

영화감독 김성호의 추천의 말을 좀 축약 편집해서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집착에 관한 심오한 심리소설, 남녀 성인의 설레는 에로틱 소설,

그런데 거기에 SF에 나올 법한 판타지와 결합된 공포소설이나 스릴러를 좋아한다면

하우스는 이러한 복합장르 소설로서는 독보적인 존재일 것이다.”

 

요약한 줄거리만 보면 집착, 심리, 에로틱까지는 누구나 쉽게 예상이 가지만

SF, 판타지, 공포 같은 코드가 어떻게 결합됐다는 건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 대목까지 서평에서 소개할 순 없는 노릇이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스티븐 킹의 중단편의 향기가 물씬 배어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외딴 언덕에 자리 잡은 그림 같은 외경에 완벽한 IOT가 구현된 꿈에 그린 집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집을 감도는 분위기는 무척 불편하거나 음울하거나 서늘하기까지 합니다.

사라진 연인의 흔적을 느끼기 위해 그의 아기를 임신한 채 사랑도 없는 결혼을 한 서원과

도무지 정을 줄 수 없는 아기는 물론 늘 예민한 서원 때문에 마음이 아픈 정진의 관계는

완벽한 외경과 인테리어, IOT의 편안함과는 달리 집 전체에 싸한 분위기만 맴돌게 만듭니다.

 

하지만 집의 분위기는 정진이 출근함과 동시에 180도 바뀝니다.

아기를 안은 승우가 2층에서 내려오면 서원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기 때문입니다.

마치 갓 연애를 시작한 뜨거운 열정에 휩싸인 모습이랄까요?

그렇지만 위태위태한 세 사람의 동거는 예정된 파국을 향해 치닫게 됩니다.

 

요즘 유행하는 영미권 심리스릴러가 생각나는 독자들이 많을 텐데,

저 역시 그런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예상하고 있었지만,

작가는 전혀 예상치 못한 방식으로 독자의 뒤통수를 후려치며 기막힌 후반부를 내놓습니다.

물론 이 대목에 대해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낯설 수도, 억지 같아 보일 수도, , 앞서 읽은 이야기가 허무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반면

영화감독 김성호의 추천의 말대로 복합장르의 신선함에 매력을 느낄 수도,

스티븐 킹의 공포물이 전해주는 막판의 짜릿함 때문에 환호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전작인 소실점을 무척 재미있게 읽은 덕분에 김희재의 다음 이야기가 무척 기대됐고,

역시 대단한 이야기꾼이라는 점을 작품 곳곳에서 여러 번 느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작가에 대한 호감을 상기시키며 호평을 써보자고 스스로를 설득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호불호의 경계선에서 어느 쪽도 택하기 어렵게 만든 클라이맥스와 엔딩 때문에

고민 끝에 꽤 야박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별 3.5개에 그치고 말았습니다.

그래도 김희재의 신작이라면 앞으로도 계속 기대하고 주목할 것은 분명합니다.

이 작품으로 김희재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소실점을 꼭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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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크리트 블론드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3
마이클 코넬리 지음, 이창식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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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년 전, 거리의 여인들을 잔혹하게 살해하곤 진하게 화장(化粧)을 시킨 기행 때문에

인형사라는 별명을 얻었던 연쇄살인마를 사살한 해리 보슈.

하지만 지원요청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무방비 상태의 용의자를 사살했다는 이유만으로

보슈는 LA의 시궁창이라 불리는 할리우드 경찰서로 좌천됐습니다.

그리고 현재, ‘인형사의 미망인이 제기한 민사소송의 피고인이 된 보슈는

잘 해야 과잉진압, 잘못하면 엉뚱한 시민을 살해한 혐의를 뒤집어쓸 위기에 처합니다.

문제는, ‘인형사와 동일한 수법에 의해 살해된 시신이 재판 도중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 4년 전 보슈가 사살한 건 연쇄살인마 인형사가 아닐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 ● ●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이번 작품은 보슈의 추락 전 과거추락중인 현재가 동시에 등장하는데다,

치열한 법정 대결, 모방살인범 찾기, 보슈의 애틋한 로맨스까지

세 가지 서사가 함께 전개되는 풍성하고 다채로운 이야기로 채워져 있습니다.

 

제목인 콘크리트 블론드인형사와 동일한 수법에 의해 살해된 뒤

무너진 건물 아래에서 발견된 새로운 희생자를 지칭하는 말입니다.

금발과 큰 가슴과 매력적인 몸매를 가진 시신이 콘크리트 아래 매장됐다는 뜻인데,

자신이 사살한 인형사가 되살아났을 리 만무하다고 생각한 보슈는

100% ‘인형사의 수법을 잘 아는 모방범의 범행이라 확신합니다.

하지만 거꾸로 이 사건은 “‘인형사는 원고 측 주장대로 무고한 시민이었으며

진범은 아직도 LA를 무대로 살인을 저지르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도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보슈는 법정과 사건현장을 오가며 몸이 두 개라도 모자랄 지경에 이르는데,

이 와중에 전작 블랙 아이스를 통해 연인이 된 실비아 무어와의 관계마저 위태로워집니다.

살인사건 수사도 그것을 사명으로 아는 형사에겐 예술이라고 생각하는보슈는

지독한 워커홀릭에 고독한 코요테를 닮은, 소위 철벽을 친 남자입니다.

그런 보슈의 사랑이 보통 사람들의 그것처럼 순탄하고 열정적으로 흘러갈 수는 없다 보니

처음으로 사랑이란 것에 빠져 몸뿐 아니라 마음과 일상까지 나눈 실비아에게

모든 것을 내어주고 바칠 수 없는 것이 보슈의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보슈의 모방범 이론을 받아들인 LA경찰국은 특수팀을 꾸리는 한편

특정된 용의자들의 행태를 물샐 틈 없이 추적하지만 좀처럼 단서는 손에 잡히지 않습니다.

더구나 주포(主砲)인 보슈가 법정에 매인 상태라 더더욱 난감한 상황만 이어질 뿐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보슈는 경찰 조직의 부패와 무능에 대해 지독한 독설을 날립니다.

 

정치성 박테리아에 감염된 조직의 상부에는 관리자들이 넘치는 반면,

하부는 인원이 모자라고 허약하여, 거리로 나간 말단 경찰들은

자신들이 봉사하는 시민들을 만나기 위해 자동차에서 내릴 겨를도 없었다.”

 

재미있는 건, 늘 보슈를 잡아먹을 기회만 엿보던 부국장 어빈 S. 어빙이

이 작품에서는 꽤 보슈를 챙겨주고 지원한다는 점인데,

그는 과거 인형사 사건을 핑계로 보슈를 할리우드 경찰서로 내친 주역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보슈가 소송에서 지거나 모방범의 범행이란 점을 밝혀내지 못할 경우

자신이 입게 될 치명적인 상처 때문에 어빙은 전에 없는 모습을 보입니다.

물론, 전작인 블랙 아이스에서 보슈에게 잡힌 결정적인 약점 탓도 있겠지만,

이 작품에서 밝혀지는 (보슈와 관련된) 그의 과거역시 태도 변화의 한 원인이기도합니다.

 

이 작품에서 보슈 못잖게 매력적인 캐릭터는 원고 측 변호인 허니 챈들러입니다.

지독한데다 능력과 욕망까지 갖춰서 머니 챈들러라는 별명까지 얻은 그녀는

보슈로 하여금 증오와 존경이라는 양립 불가능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인데,

거리의 여자들을 사냥했던 인형사를 어떤 이유에서든 기어이 사살한 보슈의 행동을

매춘부였던 그의 어머니의 죽음과 결부시킬 정도로 잔인하고 지독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빈틈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완벽하고 냉정한 논리를 갖췄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덕분에 독자로 하여금 이후에도 보슈와 악연을 이어가길 바라게 만드는 매력을 발산하는데,

그녀의 캐릭터와 스토리를 따라가는 것 자체도 꽤나 흥미로운 일이 될 것입니다.

 

스토리와 관련돼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다소 작위적으로 보인 진범의 정체입니다.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 끝에 보슈는 예상외의 진범을 지목하고 체포하는데 성공하지만,

왠지 반전을 위한 반전이라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독자에 따라 끝내준다!”라는 반응이 나올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론 좀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스토리 외적으로는 번역의 아쉬움을 언급하고 싶은데,

시리즈 초반 세 작품의 번역가가 전부 다른 탓에 다소 혼란스러운 부분들,

, 직책과 부서명, 또는 인물들간의 관계나 대화체가 제각각인 경우가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이 세 분의 번역가가 이후에도 번갈아 시리즈를 맡은 것으로 아는데,

1년에 한두 편 정도 띄엄띄엄 읽을 때는 몰랐지만 연이어 다시 읽기를 하다 보니

어쩔 수 없이 위화감이나 불편함을 느끼게 된 것 같습니다.

이런 부분의 교통정리를 위해 편집자가 있는 걸로 아는데

제가 읽은 구판만 그런 건지 새 표지의 개정판도 그대로인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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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아이스 RHK 형사 해리 보슈 시리즈 2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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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됐던 마약수사팀장 칼렉시코 무어가 모텔에서 자살한 상태로 발견됩니다.

비리 혐의가 의심되던 무어의 죽음을 덮기 위해 경찰국은 신속하게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지만

해리 보슈는 사건 현장의 모습과 여러 단서들 때문에 자살 자체를 의심합니다.

한편, 수사 성과에 광분하던 파운즈 과장은 보슈에게 미결 사건의 조기해결을 독촉하는데,

문제는 그렇게 맡게 된 사건 중에 자살한 무어와 연관된 것들이 발견됐다는 점입니다.

특히, 무어의 불행했던 과거와 최근 행적이 멕시코에 집중돼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보슈는

정직(停職) 이상의 처분을 감내하고 모든 연락을 끊은 채 홀로 국경선을 넘어갑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이 작품의 제목 블랙 아이스는 두 가지 의미를 담고 있는데,

하나는 메인 사건에 등장하는 강력한 신종 마약이고,

또 하나는 겨울철이면 수많은 사고를 일으키는 도로 위의 결빙 상태,

, 눈에 보이지 않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낳을 수 있는 위험을 뜻합니다.

보슈는 무어의 죽음 이전부터 신종 마약인 블랙 아이스의 유통 경로를 조사하고 있었고,

무어는 마약수사팀장으로서 어떤 식으로든 블랙 아이스와 연관돼있습니다.

또 무어가 눈에 보이지 않는 치명적인 위험때문에 인생 최악의 위기를 겪었다면,

보슈는 무어의 진실을 찾기 위해 역시 그 치명적인 위험과 맞닥뜨린다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 외에도 보슈와 무어는 불행한 어린 시절비정한 아버지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는데,

그래선지 보슈는 자신의 임무에 최선을 다했던 무어에게서 동질감을 느낀 끝에

다소 무모해 보일 정도로 수사 과정에 감정을 앞세우는 것은 물론

상관과 충돌해가면서까지 무어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는데 전력을 기울입니다.

 

이 과정에서 보슈의 과거사의 단면이 소개되는데,

임종 순간에야 처음 만난 아버지 할러’ (보슈의 이복형제인 미키 할러의 아버지),

어느 날 갑자기 길거리에서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 어머니,

그리고 보호시설과 위탁가정을 전전했던 씁쓸한 어린 시절에 대한 묘사가 그것입니다.

(어떤 작품인지는 확실히 기억나지 않지만 보슈의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는

이후 다른 작품에서 좀더 상세하게 그려집니다.)

 

보슈가 무어의 미망인인 실비아에게 연민 이상의 감정을 느끼는 것 역시

보슈와 무어 사이의 불가해한 동질감을 그리기 위한 장치로 설정됐는데,

이렇게 여러 겹으로 포장된 보슈와 무어의 교집합덕분에

이 작품의 엔딩은 독자들의 예상과 기대를 벗어난,

하지만 동시에 비극성이 강하고 그만큼 여운도 길게 남는 서사를 담아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랙 아이스는 전작인 블랙 에코에 비해 다소 건조해 보입니다.

가장 큰 이유는 멕시코로 달려간 보슈가 거의 단독행동으로 수사를 진행하는데다

사건 자체가 비교적 단선적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멕시코에서 임시 파트너를 만나기도 하고, 마약단속국과 갈등 섞인 협업도 하고,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방불케하는 대규모 액션 장면을 연출하기도 하지만,

아무래도 LA와 멀리 떨어진 멕시코에서의 단독행동은 긴장감을 떨어뜨린 게 사실입니다.

 

그렇지만 사소한 단서를 통해 무어의 죽음의 진실을 알아내고

그것을 자기만의 방식으로 종결짓는 막판 반전은 매력적입니다.

, 자신을 시궁창 밑바닥으로 내치려는 LA경찰국 상부를 엿 먹이는대목 역시

이 시리즈의 최고의 재미 중 하나답게 멋지고 속 시원한 통쾌함을 전해줍니다.

바람둥이는 아니지만 외로운 여자들의 손쉬운 먹잇감이란 소리까지 듣는 보슈가

여러 여자들과 잠자리를 거듭하는 장면은 오히려 쓸쓸하고 처연하게 읽히기도 합니다.

 

보슈의 미래(전부는 아니더라도) 많이 알고 있는 상태에서 다시 읽은 시리즈 1~2편은

희미해진 기억 덕분에 마치 새 이야기를 읽는 듯한 감흥을 주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사람은 젊은 날부터 평생 블랙 아이스속에서 살았구나.”라는,

미래를 아는 자만이 느낄 수 있는 안타까움도 함께 전해줬습니다.

이런 느낌은 앞으로 해리 보슈 다시 읽기내내 계속 될 텐데,

그런 와중에도 보슈가 잠깐이나마 행복을 맛보는 순간들이 찾아온다면

그 못잖게 저 역시 기뻐하고 안심하게 될 것만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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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명의 술래잡기 스토리콜렉터 14
미쓰다 신조 지음, 현정수 옮김 / 북로드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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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생명의 전화상담원 누마타 야에는 어느 날 중년남자 다몬 에이스케의 전화를 받는다.

자살을 앞두고 지난 며칠간 어릴 적 친구들과 통화를 해왔다는 이야기를 들은 야에는

관계기관에 연락하여 그를 구하려 하지만 절벽에서 투신한 흔적만 남긴 채 그는 종적을 감춘다.

한편, 다몬이 통화했다는 어릴 적 친구 중 한 명인 호러 미스터리 작가 하야미 고이치는

옛 친구의 기묘한 증발에 의문을 느끼고 독자적으로 사건에 대해 조사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다몬의 실종 이후 연이어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지고

그것이 자신과 친구들의 30년 전 봉인된 기억과 연관 있음을 깨달은 하야미 고이치는

불길한 예감에도 불구하고 유년기를 보낸 마다테 의 다루마 신사를 찾아간다.

 

● ● ●

 

비록 작품마다 편차는 있지만 미쓰다 신조의 호러물은 늘 즐겨 찾는 애독서 중 하나입니다.

특히 도조 겐야 시리즈작가 시리즈처럼 호러와 미스터리가 잘 결합된 작품들은

적절한 수준의 공포심과 짜릿한 반전을 맛볼 수 있는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일곱 명의 술래잡기역시 그런 매력이 잘 배어있는데,

굳이 따지자면 호러와 미스터리가 ‘3 7’ 정도로 배합된 작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에는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와 똑같은 놀이인 다레마가 죽였다가 등장합니다.

하야미 고이치와 그의 친구들은 초등학교 3학년이던 30년 전 하나 같이 아웃사이더들이었고,

그들은 다른 아이들이나 마을사람들은 찾아오지 않는 표주박산에 자리 한 낡은 신사 마당에서

누구의 방해도 받지 않고 즐겁게 이 놀이를 즐겼습니다.

하지만 어느 날, 그들 모두의 기억을 휘발시키고 봉인할 만큼 끔찍한 사건이 벌어졌고,

하야미를 비롯한 어느 누구도 지금까지 그날 자신들이 목격한 일을 기억해내지 못합니다.

그러나 자살을 예고한 다몬 에이스케가 바로 그 신사 마당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이어 벌어진 유년기 친구들의 참혹한 죽음마다 어린 시절 술래가 외쳤던

다레마가 죽였다라는 메시지가 개입된 걸 알게 된 하야미는

어떻게든 봉인된 기억을 해제해보려 하지만 좀처럼 뜻대로 되지 않자

결국 30년 만에 문제의 그 장소를 찾아가기로 한 것입니다.

 

이런 설정만 보면 호러 성향이 굉장히 강한 작품일 것 같은데,

진실 찾기에 나선 주인공 하야미 고이치가 호러 미스터리 작가로 설정된데다

어딘가 불길해 보이는 표주박 모양의 산(미쓰다 신조가 즐겨 설정하는 공간이죠)

그보다 더 불길한 기운을 내뿜는 폐허 같은 신사가 주 무대이다 보니

역시 이번에도 합리적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호러 서사가 펼쳐지지 않을까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사건 자체만 놓고 보면 실체가 있는 살인사건이 분명해 보이기에

과연 물과 기름 같은 호러와 미스터리가 어떤 식으로 결합될까 궁금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지막 100여 페이지를 남겨놓고 벌어지는 하야미의 추리의 향연과 반전은

호러와 미스터리는 물론 치유될 수 없는 오랜 상처가 낳은 비극의 서사까지 담아냅니다.

미스터리는 예상 밖의 범인을 지목하면서 깔끔하고 선명한 엔딩을 장식하지만,

미쓰다 신조는 진실의 일부만큼은 설명 불가능한 호러의 영역에 남겨놓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그게 말이 돼?”라고 의아해 할 수도 있지만

이런 점이 미쓰다 신조 표 호러 미스터리의 매력인 건 분명한 사실입니다.

덧붙여, 우연과 운명이 조화를 부린 끝에 여러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지만

가해자와 피해자의 경계는 모호하고 누구도 원망할 수 없는 아이러니한 엔딩이 기다립니다.

 

하야미 고이치의 추리와 수사는 미쓰다 신조의 대표 주인공 도조 겐야와 많이 닮았습니다.

홀로 사방팔방을 돌아다니고 들쑤시며 천천히 진실에 다가가는 모습도 그렇고,

갖가지 추리를 늘어놓으며 독자를 헷갈리게 만들다가 막판에 정답을 내놓은 방식도 그런데,

실제로 본문 속에서 하야미는 자신이 도조 겐야를 좋아해서 따라하는 것이라고 진술합니다.

이 대목을 읽다 보니 한국에 오랫동안 소개되지 않고 있는 도조 겐야 시리즈가 생각났는데,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이후 7년 동안 무소식이라 이젠 기대를 접을 때가 된 것도 같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소식에 대한 헛된 희망을 아주 내버리지는 않으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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