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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 ㅣ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11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20년 9월
평점 :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툼한 분량은 ‘해리 홀레 시리즈’에서는 더는 낯선 경험이 아니지만,
역시 첫 페이지를 펼치기 전부터 꽤 마음의 부담(?)을 안게 되는 건 사실입니다.
깔끔하고 속도감 있는 전개보다는 깊고 묵직하고 비장한 서사와 마주해야 하는 탓에
읽기 전부터 여느 작품을 대할 때와는 마음가짐 자체가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전작인 ‘폴리스’에서 경찰만 노리는 최악의 살인범과 사투를 벌였던 해리 홀레는
복직 대신 경찰대학의 교수로서, 라켈의 남편으로서, 올레그의 아버지로서 살기를 택했지만,
쇠이빨로 여자의 목을 물어뜯어 살해하는, 이른바 뱀파이어病 연쇄살인마가 등장하면서
또 다시 심연과도 같은 살인사건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그가 꾸린 비공식 수사팀에는 뱀파이어病 전문가인 심리학자와 갓 2년차인 신참 경찰 등
어딘가 엉성해 보이고 믿음직스럽지 않은 멤버들이 포진하게 되지만,
이들은 공식 수사팀 못잖은 열정과 노력으로 해리의 조력자로 활약합니다.
사실, 엽기적인 범행수법과 함께 뱀파이어病 전문가인 심리학자까지 등장한 덕분에
가끔 ‘해리가 정말 뱀파이어와 싸우고 있는 건가?’라는 착각이 들기도 합니다.
동시에, 극도로 감정적인데다 피에 대한 갈망에 좌지우지되는 듯한 범행수법에 비해
정교하고 치밀하게 계산되고 계획된 듯한 사건 정황으로 인해
(해리와 경찰이 그랬듯이) 독자는 범인의 이미지를 떠올리는 것조차 쉽지 않게 됩니다.
전대미문의 엽기적인 연쇄살인범 수사가 이야기의 한 축이라면,
안온하고 행복한 삶을 바라면서도 ‘술과 살인사건’의 유혹에 시달리는 해리의 갈등이
그에 못잖은 중요한 축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라켈과 함께 하는 작고 소중한 행복에 하루하루 감사한 마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술과 살인사건을 향한 해리의 ‘목마름’은 도무지 사라질 줄 모릅니다.
그 ‘목마름’이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 할지라도
해리가 겪는 내면의 갈등과 고뇌는 지독하고 고통스럽고 외로울 수밖에 없는데,
자신의 ‘목마름’이 피와 살인을 갈망하는 연쇄살인마의 그것과 겹쳐 보이는 걸 깨달은 해리는
라켈과 올레그를 떠나는 것이 그들을 위한 길이 아닐까 생각하는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 외에도 해리의 천적이자 차기 법무장관을 노리는 미카엘 벨만의 정치적 행보,
부패경찰이지만 미카엘 벨만의 약점을 쥔 채 강력반의 한 자리를 틀어쥔 트룰스의 야욕,
새로 살인사건 수사책임자가 된 카트리네 브라트의 좌충우돌,
이기적이고 비뚤어진 직업의식에 사로잡혀 수사를 혼선에 빠뜨리는 언론,
학계의 주변부만 맴돌다가 쇠이빨의 연쇄살인마 덕에 스포트라이트를 받게 된 심리학자,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아버지’ 해리를 따라 경찰대학생이 된 올레그의 활약 등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700페이지의 분량을 꽉꽉 채워주고 있습니다.
전작인 ‘폴리스’를 읽어야 ‘목마름’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게 사실인데,
주요 등장인물의 행동과 상황이 ‘폴리스’에서 다뤄졌던 사건들의 연장선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나름 요 네스뵈가 작품 이곳저곳에서 부연설명을 많이 해줘서 ‘필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기회가 된다면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에서 ‘폴리스’의 서평이라도 읽어보길 권합니다.
읽기 전에 마지막 장의 페이지 수를 확인하곤 대략 이런 예상을 했습니다.
500페이지 정도는 사건에 충실한 내용이겠지만,
나머지 200페이지는 해리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고뇌와 갈등의 묘사를 위해,
또, 집요하다 싶을 정도로 디테일한 풍경이나 소품에 대한 묘사로 채워질 게 분명하다고.
예상과 크게 틀리지 않았는데, 문제는, 그 묘사들이 때로 묵직한 두통을 일으킨다는 점입니다.
해리 홀레라는 캐릭터를 너무 좋아해서 11편의 시리즈 중 한 편을 제외하곤 모두 읽었지만,
매번 똑같이 겪게 되는 곤혹스러움은 ‘목마름’에서도 여전했습니다.
곳곳에서 발견되는 모호하고 이해하기 어렵고 지나치게 축약된 표현과 문장들이 그것인데,
대세(?)에 지장 없는 경우에는 그냥 모르는 척 넘어가기도 하지만,
캐릭터나 사건과 직결된 상황에서 그런 표현과 문장들을 만나면 참 난감해집니다.
물론, 그런 난감함이 어쩌면 ‘해리 홀레 시리즈’의 특별한 매력일 수도 있겠지만요.
요 네스뵈는 ‘폴리스’와 마찬가지로 이 작품의 말미에 또 다시 대형 떡밥을 투척합니다.
말하자면, 다음 작품에서 해리 홀레가 마주해야 할 더 잔혹하고 끔찍한 범인을 예고하는데,
이번에도 여지없이 생과 사의 아슬아슬한 경계선까지 내몰렸던 해리 홀레가
‘목마름’의 범인보다 모든 면에서 한 수 위로 보이는 그 자와 어떻게 사투를 벌일지
벌써부터 궁금증과 기대를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