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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잉 가든 ㅣ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정세윤 옮김 / 오픈하우스 / 2020년 5월
평점 :
품절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를 무대로 한 ‘존 리버스 시리즈’의 아홉 번째 작품입니다.
1987년에 출간된 시리즈 첫 편 ‘매듭과 십자가’가 2015년에 한국에 처음 소개된 후로
지금까지 만 5년 동안 꾸준히 아홉 번째 작품까지 출간된 걸 보면
나름대로 대중적 성공을 거뒀거나 혹은 출판사의 고집이나 신념이 반영된 덕분일 것입니다.
아직도 책장에 갇혀있기만 한 유수의 시리즈들이 즐비함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아홉 편의 작품을 꾸준히 읽어온 것은 물론 재미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였지만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번역가이자 네이버 카페 ‘러니의 스릴러월드’ 주인장이자
시리즈 7편 ‘렛 잇 블리드’까지 번역하신 최필원 님을 응원하는 마음도 컸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8편 ‘블랙 앤 블루’부터 이 작품까지 연이어 다른 분이 번역을 맡으셨는데,
공교롭게도 그 두 작품 때문에 “이제는 존 리버스와 작별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다른 작품들에 비해 이번 작품에서 존 리버스는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고 또 바쁩니다.
에든버러의 신구 조직은 물론 일본 야쿠자까지 개입한 잔혹한 전쟁의 틈바구니에 낀 리버스는
살인용의자로 몰리기도 하고, 폭력조직의 수하로 오해받기도 하지만
어떻게든 에든버러를 지키고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막기 위해 분투합니다.
그런데 그의 딸 새미가 끔찍한 사건에 휘말리면서 리버스는 말 그대로 패닉에 빠집니다.
거기에 더해 리버스는 2차 대전 말기 프랑스에서 학살을 저지른 전범 수사까지 맡게 되는데,
정말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랄 정도로 리버스는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대활약을 펼칩니다.
이렇게 여러 갈래로 펼쳐놓은 이야기들은 후반으로 가면서 점차 한 갈래로 수렴됩니다.
하지만 각각의 이야기는 너무도 굵고 뚜렷한 자기만의 서사를 가지고 있었고,
그런 탓에 한 갈래로 수렴되는 과정은 억지스럽고 납득하기 힘든 우연으로 포장됐습니다.
에든버러의 마약-매춘-폭력을 장악하려는 신구 조직 간의 전쟁은
그동안 리버스와 오랜 인연을 맺어온 교도소 안의 거물 캐퍼티가 전면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과연 이들이 연대할 것인지 파국을 맞을 것인지 사뭇 기대를 갖게 한 게 사실이었는데,
거기에 엉뚱하게도 2차 대전 전범 이야기가 끼어들면서 정체성이 모호해졌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그 두 이야기를 하나로 묶으려다 보니 ‘기막힌 우연’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는데,
각자 한 작품의 주제가 되고도 남을 물과 기름 같은 두 서사가
누가 봐도 이상하기만 한 방식으로 섞이는 과정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앞부분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면
애초 작가가 모티브를 구한 출발점은 프랑스에서 벌어진 나치의 대량학살이었고,
죗값을 치르지 않은 전범이 정치적 이유로 편안한 여생을 살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였는데,
정작 그 부분은 조연급 서사에만 머물고 있어서 더욱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작가가 이 민감하고도 정의로운 주제를 존 리버스의 카리스마와 섞고 싶었다면
넬레 노이하우스의 ‘깊은 상처’ 같은 방식이 훨씬 더 어울렸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행잉 가든’에 국한된 이야기는 아니지만 ‘존 리버스 시리즈’는 읽기 편한 작품들은 아닙니다.
스코틀랜드 식 블랙 유머까지는 다소 낯설긴 해도 나름 참신하게 읽히는 대목이지만,
비유와 은유로 도배된 인명과 지명, 조금은 불친절하거나 과하게 꼬인 상황 설명,
들어본 적 없는 독자에겐 그 정서가 전달 될 리 없는 LP판 속의 노래 등
독자의 짐작과 추론으로 읽어내야만 하는 분량이 적지 않은 작품이란 뜻입니다.
모든 게 명쾌하고 눈에 쏙쏙 들어오게 만드는 마이클 코널리의 팬이라면
좀처럼 적응하기 쉽지 않은 게 ‘존 리버스 시리즈’인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입니다.
첫 편인 ‘매듭과 십자가’를 읽은 뒤에도 같은 이유로 이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되나, 고민했는데,
“조금만 더 견뎌보라.”는 번역가 최필원 님의 댓글에 나름 인내심을 가져봤고,
결국 다섯 번째 작품인 ‘검은 수첩’에 이르러서 시리즈의 진가를 맛보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직전에 출간된 ‘블랙 앤 블루’와 이 작품을 읽곤
더는 이 모호함과 불편함을 견디지 못하겠다는 결론을 내리기에 이르렀습니다.
하필이면 출판사에서는 이 두 작품을 ‘시리즈의 백미’라고 소개하고 있고,
작가 자신도 부와 명예를 가져다 준 작품으로 자평하고 있다는 게 아이러니이긴 합니다.
5년 동안 꽤 애정을 갖고 읽어왔던 시리즈를 접는 게 쉬운 일은 아닙니다.
또 사람 일이란 건 장담한대로 흘러가는 게 아니라서
언젠가 불쑥 존 리버스가 그리워져서 외면했던 신작들을 몰아 읽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이혼’까진 아니라도 ‘당분간 결별’을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