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디더블 - 판타스틱 픽션 블랙 BLACK 6-4 리졸리 & 아일스 시리즈 4
테스 게리첸 지음, 박아람 옮김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8년 7월
평점 :
절판


보스턴경찰서 강력반 형사 제인 리졸리와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 콤비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바디 더블은 사전적 의미로는 대역이란 뜻인데, 무척 중의적인 의미를 지닌 제목입니다.

법의관 마우라 아일스는 자신의 집 앞에서 살해된 여자가 자신과 똑같이 생긴 것은 물론

혈액형과 생일까지 똑같다는 것을 알곤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리고 조사과정에서 입양아였던 자신의 과거 속에 큰 비밀이 숨어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또 어쩌면 애초 범인이 노린 건 자신이었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과 공포에 빠집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이 작품의 제목 바디 더블대역이라는 사전적 의미보다는

분신’, ‘일심동체’, ‘쌍둥이같은 여러 가지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한편 리졸리는 아일스와 꼭 닮은 여자의 살인사건을 수사하는 과정에서

아일스의 비극적인 가족사는 물론 수십 년간 이어져온 끔찍한 살인사건과 마주칩니다.

임신 8개월의 리졸리에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이었는데,

그 이유는 희생자들이 모두 만삭의 임산부였다는 점 때문입니다.

, 유력한 용의자가 아일스와 밀접히 연관된 인물일지도 모른다는 점 때문에

리졸리는 수시로 아일스와 충돌하는 상황을 연출하곤 합니다.

아무리 엽기적인 연쇄살인 수사라 해도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 제3자인만큼

리졸리와 아일스는 어떻게든 냉정하고 객관적인 태도와 시야를 견지해왔지만

콤비 중 한 사람의 과거와 가족이 얽혀 있을지도 모르는 사건이다 보니

그 어느 때보다도 시한폭탄 같은 긴장감이 작품 내내 흐르고 있습니다.

 

테스 게리첸의 사건들은 하나 같이 상상을 뛰어넘는 엽기성을 띄고 있습니다.

사건 정황을 묘사하는 문장들은 정갈하지만 동시에 악마적인(?) 디테일을 띄고 있습니다.

주로 칼과 메스를 이용하는 범인들의 행태는 영상을 보는 듯한 느낌을 줄 정도입니다.

, 법의관 아일스의 검시 장면들 역시 너무 리얼해서 마치 옆에서 지켜보는 듯한 느낌,

즉 금세 얼굴이 창백해지고 구토가 일어날 것 같은 생생함을 전해줍니다.

이 모든 것이 전직 의사인 테스 게리첸의 경험과 지식에서 나온 것은 분명하지만,

그녀의 진짜 매력은 이 엽기성과 리얼리티를 매력적인 스토리에 잘 녹여 넣었다는 점입니다.

북유럽이나 영미권의 일부 작가들이 테스 게리첸 못잖은 엽기성을 자랑하면서도

정작 가장 중요한 스토리에서 힘이 빠지는 경우들과는 사뭇 대조적인 모습입니다.

 

시리즈 초반에 강철 갑옷을 두른 채 절대 약한 모습을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던 리졸리가

임신 8개월의 몸으로 종횡무진 활약하는 모습은 위태로우면서도 매력적이고,

죽은 자들의 여왕이란 별명과 함께 얼음장 같은 법의관으로 유명세를 떨쳤지만

자신의 비극적인 과거와 직면해야 하는 아일스는 처연하다 못해 연민을 자아냅니다.

 

오래 전에 읽었음에도 부족한 기억력 덕분에 마치 새 작품을 읽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몸과 마음의 큰 고비를 넘긴 두 콤비의 다음 이야기(‘소멸’) 역시

충격적인 초반부 외에는 거의 백지상태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래서인지, 벌써부터 리졸리와 아일스의 다음 활약이 무척이나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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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8월
평점 :
품절


야마시로 아사코라는 필명으로 출간된 작품까지 치면 다섯 편의 오츠이치의 작품을 읽었는데,

두 단편이 수록된 이 작품집은 그가 17세에 쓴 데뷔작이 실려 있어서 더욱 관심이 갔습니다.

표제작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이 그것인데,

다 읽은 뒤에 다른 독자의 서평을 찾아보다가 딱 제 느낌을 대변한 한 줄을 발견했습니다.

 

열일곱이라는 나이에 이런 작품을 썼다니, 라는 생각보다

열일곱이기에 이런 작품을 쓸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름 아닌 물만두 님의 서평 속 한 줄인데, 굳이 따지자면 에둘러 칭찬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실제로 여름과 불꽃과 나의 사체는 어른이라 불리는 연배의 작가라면 떠올리기 쉽지 않은,

그 또래의 상상력만이 자아낼 수 있는 독특한 이야기를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에는 치정에 얽힌 살인, 사람들의 눈길을 피하기 위한 엽기적인 시체 유기,

그리고 끔찍한 연쇄 납치살인사건과 함께 희대의 소시오패스들이 등장합니다.

그런데 특이한 건 이 무시무시한 설정 속 주인공들이 9, 11살 소년소녀라는 점,

, “그해 여름, 나는 죽어버렸다. 나의 사체는 어디 있을까?”라는 홍보 카피대로

이야기를 끌고 가는 1인칭 화자가 살해된 소녀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제목에 나의 사체라는 명백히 모순된 문구가 들어간 것입니다.)

더구나 오츠이치가 구사한 단어와 문장들은 초등학생인 등장인물들에게 어울리는

순진무구하고 따뜻한 느낌을 주는 것들이라 오히려 더 으스스한 분위기를 자아냅니다.

 

독자는 살해된 뒤에도 모든 상황을 전지적 시점으로 바라보는 소녀의 1인칭 화법에 이끌려

자기도 모르게 이 소녀가 살아날 수만 있다면..”이란 헛된 희망을 갖게 됩니다.

동시에 살해된 소녀의 시신을 유기하려는 소시오패스의 대담하고도 위험한 행동들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지 않기를 바라게 되는, 참으로 모순적인 상황에 놓이게 됩니다.

읽는 내내 내가 지금 누구를 응원해야 되는 거야?”라며 난감해지고 마는데,

뒤통수를 세게 치는 마지막 장의 반전에 이르러서는

‘17살 작가 오츠이치의 기막힌 상상력과 기이한 정신세계에 다시 한 번 반하게 됩니다.

 

두 번째 수록작인 유코는 근현대를 배경으로 한 호러판타지인데,

솔직히 다 읽고도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지 몰라서 무척 난감한 작품이었습니다.

이해가 안 되니 뭐라고 서평 쓰기도 곤란해서 다른 독자의 서평을 참고해보려고 합니다.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오츠이치는 데뷔작부터 딱 그다운 매력을 발산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작품에 따라 살짝 만족도의 편차가 있는 건 사실이지만

‘GOTH’, ‘ZOO’, ‘엠브리오 기담은 이런 ‘17세 오츠이치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명품들입니다.

(최근 출간된 일곱 번째 방은 신작이 아니라 ‘ZOO’의 개정판입니다.)

아직 못 읽은 그의 미스터리와 호러 작품이 여섯 편 정도 남았는데,

한 번에 읽기보다는 두고두고 특별한 간식처럼 음미할 계획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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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 이브 2 - 노 투모로
루크 제닝스 지음, 황금진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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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재미있게 1편을 읽은 지 1년도 훌쩍 넘었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제작된 화제의 드라마는 아직도 보지 못했습니다.

책을 통해 사이코패스 킬러 빌라넬과 그녀를 쫓는 추격자 이브의 뒷이야기를 읽고 싶어서

일부러 안 봤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겁니다.

하지만 건망증인지 게으름인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2편을 이제야 읽게 됐습니다.

 

2편에서도 빌라넬의 사이코패스 킬러로서의 기질은 유감없이 발휘됩니다.

베니스, 파리, 오스트리아를 종횡무진 가르며 사방에 피와 뼈를 뿌리고 다닙니다.

그런 빌라넬을 쫓는 이브의 활약상도 만만치 않은데,

원래 경호 리스트 작성이라는 말단 사무직에서 어느 날 갑자기 현장 스파이가 된 그녀는

이젠 꽤 능숙해진 모습으로 빌라넬을 턱밑까지 쫓는데 성공합니다.

 

1편에 비하면 2편은 좀 심심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1편이 빌라넬의 과거와 현재를 소개하고 이브의 현장 스파이로의 변신 과정을 그리면서

독자에게 잠시의 숨 쉴 틈조차 주지 않고 돌직구처럼 폭주했다면

2편은 빌라넬과 이브의 심리를 그리는데 적잖은 분량을 할애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킬러와 추격자라는,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죽어야 하는 두 여자의 관계가

어느 시점인가부터 상대방에 대한 미묘한 호기심과 갈망비슷하게 변주되면서

이야기는 큰 변곡점을 맞이하게 되는데,

문제는 이 대목이 독자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건 분명하지만

개연성이란 면에서 보면 도대체 왜?”라는 의문을 자아내는 것 역시 사실이란 점입니다.

감정이란 게 개연성으로 설명되나?”라고 반문하면 할 말이 없지만,

아무튼 갑작스레 적과 아군이라는 경계가 모호해진 그녀들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빌라넬은 킬러로서의 전성기에 비해 제법 흔들리는 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불필요하게 화려한 액션을 즐기느라 사방에 단서를 남기기도 하고

중요한 미션에선 그녀답지 않은 실수로 큰 위기를 맞이하기도 합니다.

이브 역시 다소 과잉된 자신감만 믿다가 죽음의 위기를 자초하기도 합니다.

그렇게 자신들의 정상 궤도에서 이탈한 빌라넬과 이브는

(띠지의 홍보카피대로) 결국 서로를 향해 총을 겨누는 상황에 이르고 맙니다.

그리고 쉽게 예상하기 힘든 대단한 반전을 맞이합니다.

 

어쩌면 이 결정적 반전은 드라마에서는 이미 공개됐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책으로만 보면 이제 기승전결의 가 마무리된 느낌인데,

말하자면 다음 작품에서부터 이 시리즈의 진짜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다만, 1, 2편이 각각 20191월과 4월에 출간된 후 1년이 넘도록 신간 소식이 없는 걸 보면

이 뒤로 이어지는 이야기는 드라마로만 만날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신간 소식은 올해 말까지만 기다려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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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어하우스 플라주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90
혼다 데쓰야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2019년 초, ‘마스야마 초능력사 사무소가 한국에 출간됐을 때

어딘가 라노벨 같은 표지에 초능력사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는 점 때문에

정말 혼다 데쓰야 작품 맞아?”라는 의문이 들었던 게 사실입니다.

일본 출간이 2013년이니 그의 작품 경향이 최근 들어 바뀐 건 아니라는 뜻이지만

이어서 출간된 작품의 제목이 셰어하우스 플라주’(일본 출간 2015)인 탓에

아무래도 그의 독하고 센 작품들은 이미 한국에서 전부 출간된 건가, 궁금해지기도 했습니다.

혼다 테쓰야가 셰어하우스를 무대로 끔찍한 연쇄살인 이야기라도 풀어낸 게 아니라면

과연 무슨 이야기를 담아냈을지 기대 반, 우려 반의 마음이었는데,

띠지에 적힌 홍보카피를 봤을 땐 솔직히 우려가 조금 더 컸던 게 사실입니다.

 

월세 5만엔, 청소는 교대, 세 끼 식사 제공. , 전과자일 것.

어딘지 독특하고 어딘지 수상쩍은 셰어하우스.“

 

우려의 원인은, 전과자만 수용하는 셰어하우스라고는 해도 역시 그의 전공과는 거리가 먼,

밝진 않아도 왠지 상당히 따뜻하고 훈훈한 이야기일 것 같은 예감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려는 예상한 대로였지만 다 읽은 후의 느낌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전과자들만 모여 사는 곳임에도 시트콤의 무대 같은 시끌벅적한 셰어하우스 플라주에

각성제 복용 혐의로 집행유예를 받은 요시무라 다카오가 신입으로 들어옵니다.

요리를 좋아하는 외유내강형 집주인 준코를 시작으로

어딘가 사연 많아 보이는 분위기메이커 기타리스트, 사기꾼 기질이 농후해 보이는 중년남,

시도 때도 없이 성적 농담을 날리는 30대 여자, 도무지 속내를 알아챌 수 없는 사이코패스 등

다카오는 이름과 외양만큼이나 독특한 셰어하우스 멤버들 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셰어하우스 멤버들이 돌아가며 한 챕터씩을 맡아 이야기를 전개시키는데,

전과자로 전락한 각자의 과거 사연과 함께 셰어하우스에서의 현재의 삶이 함께 소개됩니다.

살인, 폭력, 약물 등 전과자가 된 죄목과 사연은 다양하지만

셰어하우스에서의 현재의 그들의 삶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유쾌하고 평화롭습니다.

하지만 수시로 그들이 전과자임을 드러내게 만드는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하기도 하고

심지어 그들을 다시금 과거 속으로 끌고 들어가는 충격적인 사건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 전과자라는 낙인 때문에 제대로 된 삶을 꾸리는 것이 불가능한 현실도 묘사됩니다.

 

인생이 그렇게 간단히 리셋되진 않아. 과거는 언제까지고 따라다녀.

속죄는 할 수 있어도 실수를 저지른 과거를 지울 순 없어. 그건 어쩔 수 없는 거야.” (p145)

 

작가는 전과자에 대한 부당한 차별과 리셋을 허용하지 않는 현실을 지적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교훈과 계몽을 목적으로 한 뻔한 이야기로 읽히진 않습니다.

분명 셰어하우스 멤버들이 현실 속 전과자와 달리 다소 판타지처럼 그려진 게 사실이고,

그들이 삶을 리셋하는 과정 역시 조금은 이상적으로 묘사된 것 역시 사실이지만,

작가는 어떤 주장을 한다기보다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대안을 제시했다는 생각입니다.

 

다소 교훈적일 수 있는 이야기지만 마지막 페이지까지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었던 건

중간중간 끼어든 모종의 목적을 가진 음험한 기자의 시각으로 묘사된 챕터들 덕분입니다.

셰어하우스 멤버 중 한 명을 먹잇감으로 삼아 자신의 욕심을 채우려는 기자의 행동은

마지막까지 미스터리의 힘을 발휘하며 예상치 못한 반전을 일으키는데

바로 이 대목에 이르면 과연 혼다 데쓰야!”라는 감탄이 저절로 나오게 됩니다.

 

셰어하우스 플라주는 어쩌면 이상주의자들이나 떠올릴 법한 판타지 공간일지도 모릅니다.

작품 속에서 전과자인 셰어하우스 멤버들을 차별하는 인물들을 얄밉게 여겼으면서도

정작 내 옆집에 이런 셰어하우스가 있다면?”이란 생각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기도 합니다.

하지만 책을 덮을 때쯤 그들을 바라보는 시각이 아주 조금은 달라진 것도 사실입니다.

소설은 소설이고, 현실은 현실이지만 그래도 좋은 느낌으로 책을 마무리했다는 생각입니다.

미스터리 픽션과 다소 이상적인 다큐멘터리의 미덕이 잘 섞인 이 작품이

다른 독자들에게 어떻게 읽혔는지 무척 궁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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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호실의 원고
카티 보니당 지음, 안은주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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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양지 브르타뉴 해변의 호텔 128호실에서 소설 원고를 발견한 안느 리즈는

원고 안에 적힌 주소로 원고와 발견 정황을 담은 편지를 발송한다.

이를 받은 회사원 실베스트르는 그 원고가 자신이 33년 전 캐나다에서 잃어버린 것이며,

뒷부분의 내용은 자기가 쓴 게 아니라는 답장을 보낸다.

독특한 사연에 호기심이 생긴 안느 리즈는 128호실의 이전 숙박객에서부터 조사를 시작해

원고가 어쩌다 캐나다에서 한적한 프랑스의 해변 호텔까지 오게 되었는지 알아내고자 한다.

원고를 가지고 있었던 사람들과 편지로, 또 직접 만나 원고를 얻게 된 사연을 들으며

안느 리즈는 이 원고가 잠시라도 그걸 소유했던 이들의 삶을 바꿔놓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어쩌면 제가 이 작품을 읽게 된 계기 자체가 이 작품 속 사연과 비슷한지도 모르겠습니다.

1년 내내 장르물만 찾는 제가 낯선 프랑스 작가의 순문학을 읽을 일은 거의 없기 때문인데,

(무슨 책을 선물로 받을지 알 수 없었던) 한스미디어 카페의 소소한 이벤트 덕분에

(안 그랬다면 읽을 가능성이 거의 없던) 따뜻하고 뭉클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었습니다.

 

안느 리즈의 조사에 따르면 원고는 우연과 운명처럼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게 됐는데,

특이한 건, 크고 작은 상처로 아프고 힘든 삶을 살아가던 그들이

누군가에게 전해 받은 그 원고 덕분에 기운을 내거나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됐다는 점입니다.

33년이란 시간이 말해주듯 그들은 대부분 젊은 시절에 이 원고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편지를 주고받는 지금은 과거를 찬찬히 돌아볼 수 있는 50대 이상이 되어 있습니다.

그들 대부분 우연히 또는 운명처럼 내 손에 들어온 그 원고 덕분에...”라는 말과 함께

안느 리즈의 조사에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도움을 줍니다.

 

‘128호실의 원고는 처음부터 마지막 장까지 모두 서간체로 쓰인 작품입니다.

원고를 찾아낸 안느 리주와 원고의 원작자인 실베스트르가 주고받은 편지뿐 아니라

이 원고와 조금이라도 관련 있는 사람들이 서로 주고받은 편지도 포함돼있습니다.

그 편지들 속엔 원고의 이력에 관한 미스터리만 실린 게 아닙니다.

이 원고로 인해 새 인연을 맺게 된 사람들의 두렵지만 심장을 뛰게 하는 흥분과 감정,

이 원고 때문에 잊고 있던 과거의 상처, 또는 새롭게 알게 된 진실과 직면한 사람들의 충격,

또 이 원고 덕분에 세상 또는 사람들을 향한 철벽을 거두게 된 사람들의 크고 작은 변화 등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만 해도 생각지도 못한 이야기가 매력적인 편지들 속에 담겨있습니다.

 

원작자가 쓰지 않은 후반부를 채워 넣은 또 다른 작가를 찾는 여정은

예상 밖의 반전과 함께 ‘33년간의 우연과 운명이 낳은 따뜻한 엔딩으로 마무리되는데,

이 대목에서는 감동적인 이야기가 전하는 훈훈함은 말할 것도 없고

미스터리의 엔딩 못잖은 짜릿함까지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 작품은 판타지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한 편의 원고가, 그것도 책으로 만들어지지도 않은 무명작가가 쓴 소설 원고 한 편이

그토록 많은 사람들의 삶을 바꾸어놓는다는 건 현실에서는 쉽지 않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비현실성에 대한 의심이 조금도 끼어들 틈이 없을 정도로

원고를 소유했던 사람들, 편지를 주고받는 사람들의 사연에 훈기와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정교하기 이를 데 없는 설계와 그에 걸맞은 인물들의 풍부한 사연과 감정들은

다 읽은 뒤에도 여전히 내가 그 편지들을 주고받은 사람들 가운데 한 명으로 느껴지게끔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생생한 리얼리티와 감동을 남겨줬습니다.

 

고백하자면, 받고 보니 미스터리가 아니네, 라는 생각에 책장에 고이 묻어두려 한 게 사실인데

장르물 독자 손에 우연히 들어온 낯선 프랑스 순문학 한 편의 여운은 꽤 오래 갈 듯 합니다.

300페이지를 갓 넘기는 분량인데다 매력적이고 빠른 템포의 편지체라 금세 읽을 수 있으니

덥고 습한 날씨에 짜증이 나있거나 사람 때문이든 일 때문이든 심신이 지쳐있다면

‘128호실의 원고를 통해 조금이나마 따뜻함과 힘과 위안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첫 페이지에 등장인물 소개가 나오는데, 앞의 세 사람 정도까지만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그 외에는 대부분 원고를 소유했던 인물들에 대한 소개인데

자칫 읽는 재미를 떨어뜨릴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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