몬스터 1 스토리콜렉터 114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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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세 소녀 리시가 교살당한 시신으로 발견되고, 유전자 감식 결과 아프가니스탄 난민 파바드 마흐무디가 수사선상에 오릅니다. 하지만 파바드는 거주지에서 종적을 감췄고 독일 전역에서 난민 정책을 비난하는 목소리가 고조됩니다. 피아 산더와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이 이끄는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은 리시 사건의 작은 단서 하나 찾지 못한 상태에서 용의자도 아닌 파바드가 비난의 대상이 되자 당황합니다. 한편 한 남자가 숲에서 달려 나오다가 차에 치여 죽은 사건까지 맡게 된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피해자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의문을 품게 됩니다. 복역을 마친 범죄자들이 갑자기 실종되거나 살해당한 사건들이 미제로 남은 경우가 많았는데, 차에 치여 죽은 남자 역시 최근 출소한 범죄자였기 때문입니다.


 

몬스터는 호프하임 경찰서 강력11반의 피아 산더와 올리버 폰 보덴슈타인의 활약을 그린 타우누스 시리즈의 열한 번째 작품입니다. 강력11반은 16세 소녀가 교살당한 사건과 정체불명의 집단에 의해 자행되는 사적 제재 사건을 동시에 맡습니다. 두 사건 모두 좀처럼 실마리를 드러내지 않은 탓도 있지만, 주인공인 피아와 보덴슈타인이 개인적인 이유들 때문에 사건에 집중하지 못하다 보니 강력11반은 그 어느 때보다도 어수선한 분위기와 엄청난 스트레스 속에 수사를 진행합니다.

 

전혀 무관해 보이던 두 사건이 뜻밖의 접점을 통해 연관을 갖게 되긴 하지만, 이야기는 사적 제재 사건에 좀더 큰 비중을 두고 전개됩니다. 범행을 저지른 인물 또는 복역을 마친 범죄자를 대상으로 한 사적 제재는 오래전부터 은밀하게 자행돼왔지만 범행방식도 제각각인데다 단순 실종으로 처리된 적이 많아서 동일범에 의한 소행으로 여겨지지 않았고, 그런 탓에 한 남자가 기이한 모습으로 차에 치여 죽은 사건이 벌어질 때까지 단 한 번도 수사선상에 오른 적이 없습니다. 피아와 보덴슈타인을 비롯한 강력11반도 처음엔 자신들이 발견한 패턴을 의심했지만, 동료의 죽음을 초래한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지면서 사적 제재의 전모가 드러나자 말 그대로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결국 외부에서 투입된 인물이 특별수사팀장을 맡는 전대미문의 사태에 직면한 강력11반은 혼란과 내분 속에 두 사건의 진실을 밝혀내는데 전력을 다합니다.

 

사실 사적 제재라는 소재 자체도 그렇고, ‘범죄피해자 유족에게 접근하여 복수를 도와주겠다는 정체불명의 집단이라는 설정 역시 다소 진부하고 상투적이어서 과연 넬레 노이하우스가 어떻게 자신만의 스타일로 요리할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그녀만의 특별한 돌파구가 없다면 진부함과 상투성에서 벗어나기 어려워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무색하게 만드는 진짜 특별한 돌파구1권 후반쯤 등장했고, 그때부터 이야기의 긴장감과 속도감은 엄청나게 고조됩니다. 모르긴 해도 타우누스 시리즈를 계속 지켜봐온 독자라면 그 돌파구의 장면에서 한동안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을 게 분명합니다. 저 역시 혹시 잘못 읽은 게 아닐까?”라는 생각에 두세 번 되읽었는데, 어쨌든 (진부함과 상투성을 모조리 불식시킨 건 아니지만) 그 돌파구 덕분에 몇 배는 더 이야기에 몰입할 수 있었습니다.

 

한편 타우누스 시리즈의 공식처럼 이번에도 두 주인공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개인적인 문제로 큰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피아는 남편과의 미묘한 갈등에다 치매 증세를 보이는 어머니 때문에 일에 집중하지 못했고, 퇴직이 얼마 안 남은 보덴슈타인은 자신의 자리를 노리는 외부인사가 있다는 소문에 부담감을 느끼는 와중에 오랫동안 함께 일해 온 동료의 충격적인 비밀을 알게 되면서 회복 불가능한 수준의 트라우마를 안게 됩니다. 언제나처럼 피아와 보덴슈타인은 수사에 몰입하는 것으로 자신들의 스트레스와 트라우마를 견뎌내지만 그 과정은 (역시 언제나처럼) 고통스럽고 안쓰러울 뿐입니다.

 

타우누스 시리즈가운데 평점 별 4개를 준 건 시리즈 1편과 2편인 사랑받지 못한 여자너무 친한 친구들이후 처음입니다. 보통 서평 첫머리에 줄거리를 쓰면서 곤란한 적이 거의 없었는데, ‘몬스터는 줄거리 구상에 꽤 애를 먹기도 했고, 기껏 정리한 줄거리도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두 사건 모두 무척 산만하고, 사족도 많고, 방향성 없이 빙빙 돌다가 갑자기 엔딩에 도달한 느낌이 강했는데, 그런 탓에 읽는 동안 집중이 잘 안 됐고, 일목요연한 줄거리 정리 역시 어려웠던 것 같습니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두툼한 분량에 걸맞게 등장인물도 많고 사건도 복잡하게 설정돼서 머릿속을 어질어질하게 만들긴 하지만 그래도 독자를 헤매게 한 적은 거의 없습니다. 수십 명의 인물, 최소 2개 이상의 사건, 묵직한 주제 등 적잖은 요소들이 선명한 구도 속에 적절하게 배치돼있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몬스터에서는 그런 요소들이 마구 어질러져 있거나 아니면 따로 노는 듯한 인상을 자주 받았습니다. “과연 누가 괴물인가?”라는 이 작품의 진정한 화두보다 수사 도중 벌어진 충격적인 사건 탓에 혼란, 의문, 배신감 등 복잡한 심경에 사로잡힌 강력11반 멤버들의 위기가 더 기억에 남은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전작인 영원한 우정으로에서 보덴슈타인이 58세로 소개됐는데, 내용 상 1년 후인 2019년 배경의 몬스터에서 57세로 나옵니다. 그는 1961년생이니 두 작품에서의 나이가 뒤바뀐 것 아닐까요? 정확히 어떤 작품부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조연을 막론하고 꽤 많은 인물이 아이고라는 말을 자주 쓰기 시작했습니다. 원작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지만 갑작스레 인물의 격과 분위기를 떨어뜨리는 느낌이라 매번 눈에 거슬렸습니다. 다른 적당한 표현이 없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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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0 - 새로운 시작 아르테 오리지널 10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백지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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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카르테 1~3’은 나가노 현의 소도시 마쓰모토에 위치한 혼조병원의 소화기내과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가 주인공인 따뜻하고 감동적인 메디컬 소설입니다. 구리하라는 어딘가 4차원 같은 인상이 짙은 인물입니다. 근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으로 그의 소설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것은 물론 말투까지 고풍스럽기 그지없고, 뛰어난 의술과 함께 오직 환자의 미소만 생각하는 선한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입이 험하고 차림새도 영 허술한데다 자신을 근면성실의 전형이라 자화자찬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환자를 끌어들이는 구리하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외래든 응급실이든 그가 나타나는 곳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환자가 몰려들어서 동료의사와 간호사들로부터 장난기 섞인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신의 카르테 0’는 구리하라가 아직 의사가 되기 전, 그러니까 시나노 의대 졸업반 시절부터 혼조병원에 레지던트로 들어와 첫 환자를 담당하게 된 무렵까지의 이야기를 담은 프리퀄입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비단 구리하라와 그의 절친 동기생들의 과거뿐 아니라 그가 몸담고 있는 혼조병원이 급변하는 의료 환경을 헤쳐 온 이야기, 산악 사진가이자 훗날 구리하라와 결혼하는 하루나의 사연도 함께 실려 있어서 단순한 프리퀄 이상의 재미와 감동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동틀 무렵

구리하라가 절친인 신도 다쓰야, 스나야마 지로 등과 함께 시나노 의대 기숙사 아리아케에서 보낸 날들을 그린 이야기로, 예비의사로서의 고민과 청춘물의 재미를 함께 맛볼 수 있습니다.

 

약속이 지켜질 때

혼조병원이 ‘24시간 365일 진료간판을 처음 달았던 무렵의 이야기로, 이타가키(왕너구리), 나이토(늙은여우), 이누이 등의 의료진과 수익만 앞세우는 사무장 가나야마가 사사건건 충돌하는 에피소드와 함께 구리하라가 면접을 통해 혼조병원의 일원이 되는 과정이 그려집니다.

 

신의 카르테

레지던트 4개월차를 맞이한 구리하라가 드디어 첫 내시경 진찰과 첫 담당환자를 경험하는 이야기로, 이타가키(왕너구리)의 지도 아래 조금씩 성장해나가는 구리하라를 지켜볼 수 있습니다.

 

겨울 산의 기록

하루나가 겨울 산에서 조난당한 남자를 구한 뒤 오두막에서 만난 부부와 대화를 나누며 자신의 과거를 조금씩 들려줍니다. 구리하라와 사귄 지 1년쯤 된 시절의 하루나의 이야기입니다.

 

전작들을 읽어 온 독자에겐 무척 각별하게 읽힐 만한 이야기들이지만, 프리퀄이란 특성 상 전작들을 안 읽은 경우 이해하기도, 공감하기도 어려운 내용들인 게 사실입니다. 물론 시리즈에 따라 프리퀄을 먼저 읽고 본편을 읽는 것도 괜찮은 경우가 있긴 하지만, ‘신의 카르테 0’는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를 단편 형식으로 꾸민 작품이라 아무래도 전작들이 선행필수라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 뒤에 이어지는 시리즈 마지막 작품 신의 카르테 4’(일본에서 2019년에 출간됐는데 지금까지 새 작품 소식이 없어서 마지막이라는 표현을 썼습니다)는 혼조병원을 떠나 시나노 대학 의학부에 들어간 구리하라의 이야기를 그립니다. 3년 전쯤 이미 읽은 작품이긴 한데, 1편부터 순서대로 정주행하다 보니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구리하라가 어떤 인물인지도 제대로 모른 채 읽었을 때와는 달리 새롭고 특별한 감흥을 느낄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신의 카르테는 비록 현실에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의사 구리하라가 등장하는 판타지에 가깝지만 재미와 감동을 동시에 맛볼 수 있는 보기 드문 메디컬 소설입니다. 혹시 이 서평을 보고 궁금증을 느낀 독자라면 시리즈 첫 편부터 찬찬히 그 재미와 감동을 느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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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라토 : 거세당한 자
표창원 지음 / &(앤드)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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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주 금요일 밤마다 도심 한복판 곳곳에서 절단된 남성 신체의 일부가 발견됩니다. 자극적인 언론에 의해 카스트라토 사건이란 이름까지 붙은 가운데 피해자들이 성범죄자였다는 사실까지 밝혀지면서 여론은 들끓기 시작합니다. 단서 하나 못 잡아 궁지에 몰린 경찰은 결국 강력사건 수사역량 강화를 위해 특별히 설치된 ACAT까지 동원하며 각 분야의 전문가와 베테랑을 투입합니다. 하지만 밝혀진 거라곤 범인이 여러 명이라는 점, 성범죄자를 노린 주도면밀한 사적 복수라는 점, 피해자들의 생사가 불확실하다는 점뿐입니다. 첫 사건을 맡았던 인왕경찰서 강력5팀장이자 프로파일러 이맥은 ACAT와의 협업을 통해 조금씩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내는데, 문제는 그 과정에서 자신의 과거 속 불편한 사실들과 자꾸만 마주치게 된다는 점입니다.


 

카스트라토(변성기 이전에 거세되어 고음역대를 소화할 수 있게 된 남성 가수)라는 소재 자체도 눈길을 끌었지만,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첫 소설이라 관심을 갖게 된 작품입니다. 의사가 쓴 메디컬 소설이나 변호사가 쓴 법정물처럼 좀더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을 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프로파일러의 활약이나 사적 복수 모두 좋아하는 소재들이라 주인공 이맥의 행보도, 범인들의 정체와 범행 전반에 관한 묘사도 무척 기대가 됐습니다. 특히 거세라는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성범죄자를 사적으로 응징하는 범인들에게 곧바로 이입이 되어 응원하는(?) 마음까지 들면서 과연 이 이야기가 어떻게 마무리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더불어 적잖은 분량을 통해 소개되는 이맥의 불행했던 과거들이 카스트라토 사건과 어떤 식으로 접점을 갖게 될지도 호기심을 자극한 요인 중 하나입니다.

 

나름 여러 면에서 기대를 가진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꽤 야박한 평점을 주고 말았는데, 첫 번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인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입니다. 단적으로 말하면 소설이 아니라 프로파일러 개론을 강의하는 교수의 강의노트를 읽는 듯한 느낌을 여러 곳에서 받았다는 뜻입니다. 전문성도 디테일도 좋지만 이야기의 흐름을 방해할 정도로 과도했던 탓에 스킵하듯 건너 뛴 페이지가 적지 않았습니다.

두 번째는 이맥의 과거와 현재의 사건 사이의 접점이 다소 억지스러울 정도의 우연들로 채워진 점입니다. 좀 심하게 말하면 사건에 연루된 적잖은 인물들이 이맥의 과거에 한번쯤은 등장했던 자들이며, 그야말로 오랜만에 그것도 난데없이 이맥 앞에 나타나곤 합니다.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이르면 이 억지스러운 우연들이 반드시 필요했던 설정이란 걸 알게 되긴 하지만, 독자조차 매번 ?”라며 의아하게 여길 그 우연들을 정작 당사자인 이맥이 눈치 채지 못한 점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세 번째는 이맥과 ACAT가 용의자를 선정하는 과정이 어이없을 정도로 쉽고 단순하다는 점입니다. 드넓은 모래사장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작은 바늘 하나를 찾아낸 느낌이랄까요? 심지어 사건 자체와 아무 연관 없는 특정인물을 오로지 감 때문에용의선상에 올리는 대목에선 웃음이 날 정도였습니다. 이어지는 수사 과정 역시 곳곳에서 허술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비약으로 채워져 있어서 긴장감을 오히려 떨어뜨리곤 했습니다.

 

여러 이유를 대긴 했지만 야박한 평점의 변()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소설로서의 재미와 완성도가 떨어진다.”입니다. 확실하게 기억에 남은 건 프로파일러 개론뿐이고, 주인공 이맥의 캐릭터나 사적 복수극의 긴장감이나 범죄스릴러 서사의 매력은 그다지 와 닿지 않았습니다. 특히 이맥의 경우 불행했던 과거사 외에는 단편적인 정보들만 산발적으로 소개돼서(가령 이맥의 지독한 우울증은 초반에 딱 한 줄만 언급된 뒤론 그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생생한 인물상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작가의 말을 보면 이맥을 주인공으로 한 시리즈를 구상 중인 것 같은데, 다음 작품에선 프로파일러 표창원의 전문적인 묘사와 꼼꼼한 디테일보다는 이야기 자체에 좀더 공을 들였으면 좋겠습니다. 겉모습과 스펙은 완벽하지만 인간미보다는 인공미가 더 강해 보였던 이맥에 대해서도 좀더 많은 고민이 필요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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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바닥
조 R. 랜스데일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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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933, 미국 텍사스 동부의 작은 마을 마블 크리크에 사는 12살 소년 해리는 참혹하게 살해당한 뒤 강가에 유기된 흑인여성의 시신을 발견합니다. 지역경관인 아버지 제이컵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수사과정에 어떻게든 따라다니던 해리는 이후 유사한 사건들이 연이어 벌어지자 마블 크리크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염소인간의 소행이 아닐까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 가운데 제이컵의 수사를 방해하려는 백인들의 움직임이 감지되고, 덩달아 그동안 흑인들과 우호적으로 지내온 제이컵 가족에 대한 비난과 압박도 거세지기 시작합니다. 그러던 중 백인여성의 시신이 발견되자 마을은 광기에 사로잡히고, 얼마 후 한 흑인이 범인으로 매도당한 뒤 백인들에게 참살당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링컨이 흑인들을 해방시킨 지 한참 되었지만 당시 흑인들의 삶은 남북전쟁 이전과 별다르지 않았다.” (p79)

 

미국 남북전쟁이 1865년에 끝났으니 밑바닥의 시간적 배경은 그로부터 7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난 뒤입니다. 뿌리 깊은 노예제가 완전히 청산되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만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남북전쟁 이전과 별다르지 않은 무자비한 인종차별이 버젓이 자행됐다는 사실은 그 시대가 얼마나 참혹하고 폭력적이었는지, 또 그런 야만적인 세상에서 양심과 선량함이 얼마나 지독한 시련을 겪어야만 했는지 새삼 피부에 와 닿도록 실감하게 만듭니다.

 

밑바닥은 연쇄살인마의 실체를 밝혀내는 미스터리 스릴러이자 인종차별에 관한 생생한 고발소설이기도 합니다. 이 무거운 서사의 주인공이 12살 백인 소년이란 점은 안쓰러움과 비극성을 더욱 고조시키는데, 작가는 인종차별 이야기의 주인공은 으레 선한 백인이라는 도식적인 설정의 위험에도 불구하고, 껍데기뿐인 정의감보다는 의무감과 호기심에 사로잡힌 12살 소년 해리를 앞세움으로써 자칫 뻔하게 흘러갈 수 있는 이야기를 새로운 방식으로 전개시킵니다.

 

과학수사는 아직도 먼 미래의 일이고, 목격자나 단서 하나 없는 상황에서 이뤄지는 제이컵의 수사는 범인이 자수하지 않는 한 100% 실패가 확실해 보입니다. 12살 소년 해리가 나름대로 벌이는 조사 역시 판타지가 아닌 다음에야 결실을 이룰 리 없어 보입니다. 중간에 투입되는 해리의 외할머니가 잠시 명탐정 흉내를 내긴 하지만 흔적도 남기지 않은 잔혹한 연쇄살인마의 꼬리가 쉽게 잡힐 리는 없습니다. 무엇보다 살인사건 피해자가 흑인일 경우 아무 것도 안 하고 그냥 놔두는것이 당연한 관행인 현실 때문에 제이컵과 해리의 조사는 넘어설 수 없는 장벽 앞에 내동댕이쳐진 거나 다름없습니다. 독자 입장에선 과연 연쇄살인마가 잡히긴 잡힐까, 라는 우려 속에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원조 프로파일러라 불릴 만한 인물이 등장하여 연쇄살인마의 특징과 그가 남긴 서명을 분석하는 장면은 무척 흥미로웠고, 범인이 아닐까 의심되는 여러 인물들을 놓고 해리가 나름 추리를 이어가는 장면도 기특함(?) 이상의 기대를 갖게 만들었습니다. 무엇보다 백인여성의 시신이 발견되고 무고한 흑인이 참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면서 잠시 주춤했던 이야기가 긴장감과 속도감을 되찾는 대목부터는 다시금 미스터리 스릴러 본연의 서사가 매력적으로 전개돼서 마지막에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게 만들어줍니다.

 

R. 랜스데일은 2022년에 읽은 빅 티켓으로 처음 만난 작가입니다. 19세기 말 텍사스를 배경으로 강도들에게 납치당한 여동생을 구하려는 16세 소년과 추적자 집단의 이야기가 너무 매력적이어서 읽자마자 팬이 됐지만, 앤솔로지 외에 한국에 출간된 건 (2024년 현재) ‘밑바닥이 유일한 작품이라 너무 아쉬울 뿐입니다. ‘빅 티켓밑바닥모두 시대적 상황과 스릴러 서사를 절묘하게 조합한 작품들이라 재미 이상의 여운을 느낄 수 있는 작품들이니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번쯤 검색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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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 1
오쿠다 히데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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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마현과 도치기현을 흐르는 와타라세강에서 두 구의 젊은 여성 시신이 발견됩니다. 문제는 시신의 상태와 시신을 유기한 장소가 10년 전 벌어진 미제 연쇄살인사건과 판박이처럼 동일하다는 점입니다. 당시 체포된 유력한 용의자 이케다는 증거불충분으로 풀려났고, 이후 10년 동안 그 사건은 군마현경과 도치키현경의 수치이자 숙제로 남아있습니다. 그런데 동일범인지 모방범인지 가늠할 수 없는 사건이 재발하자 두 현경은 남다른 각오로 수사에 임합니다. 그리고 집요한 탐문과 제보 덕분에 세 명의 남자를 용의선상에 올립니다. 하지만 모두 심증만 있을 뿐 확실한 물증이 없다 보니 수사는 좀처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합니다.

 

“‘양들의 테러리스트’(구판 제목 올림픽의 몸값’)죄의 궤적에 이어 쏘아 올린 홈런이라는 출판사 소개글 때문에 혹시 두 작품의 주인공인 경시청 수사15계의 오치아이 마사오가 등장하는 1960년대 배경의 미스터리가 아닐까, 기대했는데 리버는 경찰소설+범죄미스터리+군상극이라는 큰 틀은 앞선 두 작품과 비슷하지만 주인공도 시대적 배경도 전혀 다른 스탠드얼론입니다.

 

10년 전, 두 시신 모두 동일범의 소행이라 확신한 두 현경은 합동수사본부를 설치했지만, 경쟁심과 경계심이 지나쳤던 탓에 오히려 부작용만 일으켰습니다. 그 와중에 도치기현경이 무리한 수사를 진행하다가 모든 걸 망쳐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런 전력 때문에 10년 만에 재발한 사건을 대하는 두 현경의 태도는 말 그대로 죽을 각오그 자체입니다. 무엇보다 동일범의 소행이라면 왜 10년의 공백이 있었으며 굳이 같은 장소에 같은 모양새로 시신을 유기한 이유는 무엇인지, 혹시 모방범의 소행이라면 어떻게 자세한 범행 정황을 알아낼 수 있었는지 등 모든 것이 모호함 투성이라 두 현경의 수사는 각오와 달리 초반부터 지지부진할 따름입니다.

 

리버1~2권 합쳐 800페이지가 넘는 방대한 분량의 작품인데, 사건의 규모에 비해 다소 과한 분량이 필요했던 건 누가 범인?’보다도 사건에 연루된 여러 인물들의 복잡다단한 감정과 태도에 더 주력한 군상극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비슷한 스케일을 지닌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이 원톱 주인공을 내세워 극적이고 감정적인 스토리를 자아냈다면, ‘리버는 서로 다른 생각과 집념에 사로잡힌 여러 주인공이 이끄는 냉정한 하드보일드 스타일의 군상극이라 할 수 있습니다. 10년 전 사건을 맡았던 전직 형사, 10년 전 사건 피해자의 아버지, 첫 살인사건 취재에 바짝 긴장한 신참 기자, 범죄심리학에 능통한 대학 조교수, 그리고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 세 명의 남자 등 다양한 인물들의 일거수일투족이 두 현경의 수사과정 못잖게 큰 비중을 차지합니다.


 

몰입하며 따라갈 원톱 주인공도 없고, 일찌감치 세 명의 용의자가 대두돼서 누가 범인?’이라는 흥미가 반감된 듯 보이지만, 오쿠다 히데오 범죄미스터리 특유의 집요한 디테일 속에 흐르는 불온한 긴장감은 훨씬 더 강렬한 흡인력을 지니고 있어서 미야베 미유키의 모방범과는 전혀 다른 스타일의 매력을 발산합니다.

집요한 디테일10년 전의 실패를 만회하려는 두 현경의 절박한 수사 과정을 꼼꼼하게 그린 대목뿐 아니라 각기 다른 이유로, 또 각기 다른 용의자에 주목하며 진범 찾기에 집착하는 여러 주인공들의 행적에서도 목격됩니다. 다소 느슨하게 읽힐 여지도 있지만 독자는 페이지를 넘길수록 디테일의 힘에 빠져들게 되고, 그 안에 흐르는 불온한 긴장감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 긴장감의 이유 중 하나는 세 명의 용의자 중 누가 범인이냐에 따라 여러 주인공들이 맞이하게 될 엔딩이 제각각이란 점, 즉 자신이 주목한 용의자가 범인이 아니라면 설령 사건이 해결된다 해도 조금도 만족스럽거나 행복한 엔딩을 맞이하지 못할 인물도 있다는 점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진실보다도 자신의 집착에 더 몰두하는 인물들이 펼치는 군상극이야말로 리버의 가장 큰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말초적인 재미나 감정에 호소하는 짜릿함을 찾아볼 순 없지만 건조하고 냉정하면서도 묵직하게 밀어붙이는 범죄미스터리의 기본을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리버를 비롯한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들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1960년대 경시청 수사1과 오치아이 마사오의 세 번째 이야기도 좋고, ‘리버에 등장한 군마현경과 도치기현경의 인물들의 두 번째 활약도 좋으니 머잖아 오쿠다 히데오의 새 범죄 미스터리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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