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웃는 숙녀 비웃는 숙녀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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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 초,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네 번째 작품인 악덕의 윤무곡을 읽은 뒤

당분간은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좀 멀리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작품 제목에 클래식 작곡가의 이름이 들어간 미사키 요스케 시리즈

주인공 캐릭터가 그다지 구미가 당기지 않은 시즈카 할머니 시리즈’,

그리고 초기 소개작이라 잘 몰랐던 법의학 교실 시리즈를 제외하곤

스탠드얼론을 포함 국내 출간작 23편 중 12편을 읽은 셈이었는데,

악덕의 윤무곡을 읽곤 왠지 나카야마 시치리에 대한 피로도가 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묘한 분위기를 내뿜는 핑크빛 표지와 비웃는 숙녀라는 다소 도발적인 제목 탓에

또 다시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을 집어 들고 말았습니다.

이것까지만, 그리고 한 1년은 나카야마 시치리는 쉬자, 라고 생각하며 말이죠.

하지만... 결과부터 얘기하자면, 속도감, 긴장감, 다소 과한 폭력성과 선정성, 막판 반전 등

재미 면에서 보면 나카야마 시치리의 장점이 가장 잘 살아있는 작품이라

이 작품까지 제가 읽은 13편 가운데 Top3에 꼽아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까지는 아니지만 주인공 캐릭터에 대한 설명이 포함돼있습니다.

미리 봐도 별 문제는 없지만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뛰어난 미모와 화술, 상대의 존경심을 불러일으키는 극강의 카리스마를 지닌 가모우 미치루는

중학생 시절 자신의 첫 사냥을 시작한 이래 순탄하게 소시오패스로서 진화를 거듭합니다.

그녀의 사냥감은 대부분 필요와 목적에 따라 선정되기지만,

때론 즉흥적으로 또는 우연히 선정되기도 하는데,

중요한 건 그녀의 진정한 악마성은 사냥을 위해 누군가를 완벽히 조종하는데 있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대부분의 사냥에서 그녀는 자신의 피에 손을 묻히는 일이 없습니다.

대신 자신에게 흠뻑 빠져든 누군가로 하여금 자발적으로 사냥하게 만든다는 얘깁니다.

 

이 대목에서 아마도 도나토 카리시의 속삭이는 자 시리즈를 떠올리는 독자가 있을 텐데,

사실, 그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무시무시한 정신 조종자가 다소 호러 느낌이 들기도 하고

독자에 따라 저게 가능해?”라며 비현실적이라 여기는 경우도 적지 않은데 반해,

나카야마 시치리가 창조한 진정한 악녀 가오루 미치루의 조종은 너무나도 현실적입니다.

물론 그녀의 사냥을 위해 선택된 누군가는 대부분 벼랑 끝에 선 위태로운 사람들입니다.

 

학교폭력에 시달린 나머지 살의에 물든 여중생,

직장에서 받은 스트레스 때문에 쇼핑 중독에 빠진 나머지 감당 못할 횡령을 저지른 은행원,

취업 문제 때문에 가족에게 바보 취급을 받은 나머지 극도의 스트레스에 빠진 청년,

그리고 해고된 후 소설가가 되겠다는 공상에 빠진 채 가족을 내팽개친 남편을 둔 주부 등

옆에서 누군가 버튼 하나만 눌러주면 그대로 폭발하고도 남을 임계점에 이른 인물들입니다.

이들은 진심으로 자신을 위해 고민해주는 미치루에게 모든 것을 의지할 정도로 빠져드는데,

결국 미치루의 친절한 조언한마디에 겨우 붙잡고 있던 정신줄을 놓고 마는 것입니다.

 

소소한 이야기 몇 가지만 더 하자면...

사실 읽으면서 히가시노 게이고의 백야행이 여러 번 떠오르기도 했는데,

두 작품 사이에는 확연히 다른 차이점들도 여럿 있기 때문에

비교해보면서 읽는 것도 색다른 재미를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 번역하신 문지원 님은 이 작품을 이야미스 계열로 설명했는데,

(이야미스 = 인간 내면에 존재하는 음습한 심리를 섬세하고 노골적으로 표현해서

읽고 나면 어딘지 모르게 기분이 찝찝해지는 장르)

개인적으론 오히려 독자 대부분이 그 반대의 감상을 경험하게 될 거란 생각입니다.

, 희대의 악녀 가오루 미치루를 적극적으로 응원하게 되는 이상한 감상이라고 할까요?

 

다만, 가오루 미치루가 재판을 받는 마지막 챕터의 반전은 다소 작위적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카야마 시치리 식 반전의 맛이 충분히 살아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초반부에 이 반전의 트릭을 눈치 챌 수도 있는데,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대목이 등장하면 곰곰이 이후의 전개를 예측해보기 바랍니다.

 

나카야마 시치리는 이후 가오루 미치루가 주인공인 후속편(‘또다시 비웃는 숙녀’)은 물론,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한 인물과 미치루가 2인조로 활약하는 작품도 출간한다고 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에 대한 피로도가 극에 달한 건 사실이지만,

다른 시리즈는 몰라도 이 두 작품만큼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습니다.

그만큼 희대의 악녀 가오루 미치루에게 저도 푹 빠져 있는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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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죄 : 교화장 심리죄 시리즈
레이미 지음, 이연희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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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천재적인 프로파일링 실력으로 경찰을 도와 사건을 해결해온 대학원생 팡무.

J시에서 현장이 마치 연극의 한 장면처럼 조작된 살인사건이 연이어 일어난다.

별개의 사건처럼 보였지만 팡무는 프로파일링을 통해 사건들이 서로 관련되어 있으며

동일 범죄집단에 의해 저질러졌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살인 자체보다 살인현장을 공들여 꾸미는 데에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파헤치던 팡무는

십여 년 전 이뤄진 극비 심리실험 교화장 프로젝트에 대해 알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심리죄 : 프로파일링에서 끔찍한 연쇄살인을 해결했던 대학원생 팡무는

이 작품에선 성() 공안청 범죄심리연구실 소속인 경찰로 성장해있습니다.

이번에 팡무가 맞닥뜨린 사건은 전작만큼이나 기이하고 참혹한 살인사건입니다.

모두들 별개의 사건으로 여겼지만 팡무는 의식(儀式)의 제물처럼 살해된 희생자들을 보며

어쩌면 동일범에 의한 소행일 수도 있다는 확신에 가까운 추정을 합니다.

그리고 범인과 희생자 모두 10여 년 전에 이뤄진 심리실험 관계자들임을 알아냅니다.

 

책 뒷표지를 보면 이런 카피가 있습니다.

그들은 우리가 선택한 인생을 살게 될 거야.”

징벌로 인간 행동을 통제하려는 심리실험 교화장 프로젝트’.

십여 년 후, 관계자들이 실험 방식대로 살해당한다!

 

스포일러는 아니지만 이야기가 꽤 진행되다 공개되는 내용이라 서평에 써도 될까 우려했는데

다행히도(?) 출판사 소개글과 뒷표지에 실린 덕분에 마음 편하게 인용하기로 했습니다.

쉽게 연상할 수 있겠지만, 인간 행동을 통제하려는 무리한 심리실험이 부작용을 낳았고

그 부작용이 오랜 시간이 지난 뒤 참혹한 연쇄살인을 불러일으켰다는 내용입니다.

 

타고난 프로파일러지만 직접 겪은 끔찍한 살인사건들의 트라우마를 안고 살아가는 팡무는

이젠 당당한 경찰의 신분으로 사건 현장에 공식적으로 투입되고,

그의 천재적 능력을 인정하는 분위기 덕분에 신참임에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특히 이상심리를 지닌 범인의 소행이 분명해 보이는 사건들이다 보니

그의 프로파일링과 추리는 경찰 수사의 향방을 결정짓는 중요한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전작인 심리죄 : 프로파일링은 아쉬운 점이 있긴 해도 무척 재미있게 읽힌 작품이었는데,

그에 비해 이번 작품은 전체적으로 평하자면 다소 산만하고 억지스런 대목이 꽤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사건의 발단이 된 교화장 프로젝트라는, 인간 행동을 통제하려는 심리실험 자체가

가설도, 실험도, 결과도 너무 모호하게 설정된 탓에 무슨 내용인지 파악하기 어려웠습니다.

, 그 프로젝트를 통해 돈과 명예를 거머쥐려는 자들의 욕망 역시 이해하기 어려웠는데,

징벌로 인간 행동을 통제하려는 심리실험이 무슨 의미가 있는 건지도 모르겠고,

그 실험이 심리학의 대가 스키너의 연구에 필적한다고 여기는 설정은 납득할 수 없었습니다.

 

그 외에도, 살인에 가담한 자들의 심리와 동기는 허약하거나 빈약해서 공감하기 어려웠고,

별개의 이야기처럼 전개되다가 중후반부에 가서야 메인 사건과 연결되는 고아원 이야기는

설득력이 부족한 나머지 억지스러운 조합으로밖에 보이지 않았습니다.

후속편을 염두에 둔 듯한 고아원 소녀 랴오야판의 이야기는 적잖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왜 굳이 이 작품에 등장한 것인지 이유를 알기 어려웠는데,

사실, 랴오야판 이야기 외에도 사족처럼 보이는 설정들이 곳곳에 눈에 띄곤 했습니다.

 

결국 다 읽은 뒤에도 이야기의 큰 그림이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고

모든 게 다 억지스럽고 인공적이란 인상만 깊이 남게 됐습니다.

논리적 설명이나 합리적 전개가 어려운 심리라는 소재가 난해할 수밖에 없는 건 사실이지만

팡무가 프로파일러로서의 재능을 십분 발휘했던 전작이 충분한 소구력을 지녔던 것에 비해

이번 작품은 설정, 과정, 해법 모두 독자의 눈길을 잡기에는 무리수가 많았다는 생각입니다.

 

책 뒷날개를 보니 이 다음 작품은 검은 강이라고 소개돼있습니다.

기대했던 (팡무의 대학시절을 그린) 프리퀄 일곱 번째 독자가 아니라서 아쉬웠는데

검은 강을 읽을지, 건너뛰고 일곱 번째 독자를 기다릴지는 좀더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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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벽 위에서 춤추다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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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풍신 블레이드라는 악덕 기업의 피해자들은

스스로 확신범이 되어 관계자들에게 직접 철퇴를 가하고자 한다.

제각기 사연이 있는 피해자들이 직접 경영진들을 살해함으로써 복수를 실행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생긴 피해자 모임 안에서 예기치 않게 연쇄 살인 사건이 벌어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그의 전공은 본격 미스터리라고 하는데

앞서 읽은 두 작품은 그가 잠시 외도(?)한 작품들이지만 무척 재미있게 읽었다는 점,

그리고 뒤늦게 접한 그의 전공은 앞선 작품들에 비해 아쉬움이 컸다는 점입니다.

 

절벽 위에서 춤추다는 띠지의 홍보글대로 복수극과 클로즈드 서클이 믹스된 작품입니다.

폭발적인 판매를 기록한 가정용 풍력발전기의 부작용으로 인해

가족을 잃었거나 스스로 큰 피해를 본 사람들이 사적 복수를 위해 모입니다.

교묘하게 법망을 피해갈 것이 분명한 경영진들을 직접 죽이겠다는 게 그들의 목표입니다.

살인을 위해 그들이 선택한 아지트는 해당 기업의 직원 리조트.

하지만 그들의 복수극이 절반도 진행되지 않은 상태에서

역시 띠지의 홍보글대로 동료가 동료를 죽이는충격적인 상황이 벌어집니다.

경찰에 알릴 수도 없고, 찾아오는 이도 없어 저절로 클로즈드 서클이 된 리조트 안에서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두 명의 화자가 범인을 찾아내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징벌적 손해배상 제도가 거론될 만큼 악덕 기업의 문제가 심각하지만

그 피해자들이 살인이라는 방법으로 직접 응징을 다짐한 설정이라 무척 흥미로웠습니다.

가끔 뉴스를 통해 피해자들의 안타까운 소식을 들을 때면

그들 마음속에 살의가 생겨도 전혀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여러 번 해봤기 때문인데,

정작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는 피해자들, 아군사이에 벌어진 참혹한 살인극입니다.

 

리조트 안에 모인 피해자 모임의 멤버들은 말 그대로 평범한 사람들입니다.

연이어 시신이 발견되지만 단서나 증거를 통한 조사 같은 건 할 수도 없고

그저 누가, ?”라는 것에 대해 논쟁을 벌이는 게 그들이 할 수 있는 전부입니다.

그래서인지 중반까지는 나름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페이지를 넘길 수 있지만

그 후로는 논리 대결과 추정의 동어반복이 대부분이라 다소 지루하게 읽힌 게 사실입니다.

 

사실, 죽은 자는 말이 없고, 산 자들의 추정은 대체로 공상 그 이상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그 공상에 힘을 얹어줄 단서 같은 건 아예 없고,

난 이쪽 말이 맞는 것 같아.”, “난 그렇게 생각 안 해.” 식의 공허한 논쟁들이 대부분입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어느 쪽 주장이 그럴 듯 한지 촉각이 곤두서게 되지만,

희생자가 계속 나오는데도 논쟁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만 맴돕니다.

 

옮긴이의 말을 보니 작가 스스로 등장인물들의 난상토론을 통해 진상을 밝히는 것

자신만의 클로즈드 서클 미스터리의 특징이라고 말했다는데,

난상토론과 논리 싸움이라는 독특한 해법은 둘째 치고

막판에 밝혀진 범인의 동기가 다소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모호하고 추상적이어서

앞서 벌어진 그 숱한 난상토론 자체의 무게감도 많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이시모치 아사미의 본격 미스터리 대표작 문은 아직 닫혀 있는데는 아직 못 읽었는데,

읽게 된다면 그의 전공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 이 작품으로 이시모치 아사미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절대 실망부터 하지 말고,

귀를 막고 밤을 달리다’, ‘청부살인, 하고 있습니다를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톤과 성격이 전혀 다르지만 정말 매력적으로 읽을 수 있는 미스터리이기 때문입니다.

 

(사족이지만, 작품 내용과 조금도 연관 없어 보이는 표지 디자인은 정말 이해하기 어렵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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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잔 진구 시리즈 5
도진기 지음 / 시공사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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픽션으로는 합리적 의심이후 1년 여 만에 나온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지만

진구 시리즈로는 모래바람이후 무려 3년 만에 나온 시리즈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작가 후기에서 급격히 나빠진 눈 때문에 집필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고백을 보곤

신간이 늦어진 이유를 알게 된 것은 물론 너무나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는데,

집필을 많이 늦추는 한이 있더라도 부디 쾌차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전작이자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모래바람을 읽고 썼던 서평 말미를 잠깐 인용하면...

마지막 페이지에서 묘사된 진구와 연부의 만남은

이후에도 계속 이어질 두 사람의 서글픈 악연을 예고하는 것 같아

한편으론 기대감을, 또 한편으론 안쓰러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다음의 진구 시리즈에 또다시 연부가 등장한다면 꽤나 센 비극이 등장할 것 같습니다.”

 

진구의 프리퀄을 다룬 모래바람에서 중학생으로 등장한 진구와 유연부는

라이벌이면서도 살짝 로맨스 분위기까지 풍긴 10대들이었지만,

외국의 사막에서 벌어진 아버지들의 참극으로 인해 돌이킬 수 없는 사이가 되고 맙니다.

10년이 지나 엉뚱한 사건에서 재회한 진구와 연부는 또다시 악연을 반복하게 되고

결국 연부는 깊은 증오심을 감추지 않은 채 진구에게 등을 돌리고 맙니다.

그리고 (‘모래바람서평에서의 예상대로) 둘은 또다시 악몽 같은 재회를 겪게 됩니다.

(유연부에 대해 더 언급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이쯤에서 멈추겠지만,

이 작품의 맛을 좀더 제대로 만끽하려면 모래바람을 먼저 읽어볼 것을 추천합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출판사 소개글을 확인해보니 웬만큼 중요한 내용은 모두 감춰놓았습니다.

본문 가운데 48페이지까지의 상황, 즉 사건이 벌어지기 직전까지의 내용만 소개해놓았는데

덕분에 서평 쓰는 입장에서 아주 난감해지고 말았습니다.

더 이상 소개하자니 스포일러가 될 것 같고, 안 하자니 쓸 이야기가 거의 없기 때문이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에서 두루뭉술하게만 소개하자면...

 

진구는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을 것 같은 큰 위기에 빠진 끝에 구치소에 갇히고 마는데,

자신을 함정에 빠뜨린 조직의 실체와 목적을 알아내곤 목숨을 건 도박을 감행하기로 합니다.

그리고 번득이는 추리와 무모해 보이는 정면대결을 통해 가까스로 자신을 구해냅니다.

하지만 그 끝은 결코 개운하지도, 해피하지도 않은 씁쓸함만 가득 남게 됩니다.

 

, 과하게 두루뭉술한가요?

아무튼... ‘진구 시리즈를 읽어온 독자라면 진구와 연부의 재회가 궁금할 것이고,

고진 시리즈까지 읽은 독자라면 이탁오 박사의 등장 소식에 귀가 솔깃해질 것이 분명합니다.

특히 이탁오 박사의 경우 그다지 많은 분량도 아니지만 이야기의 큰 흐름을 좌지우지하는데다

적인지 아군인지조차 불분명한,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아주 잠깐 등장하긴 하지만 변호사 고진 역시 빛나는 카메오로서 활약하고 있고,

진구의 연인 해미는 묵직하고 빠른 스릴러 속에서 균형감을 잡아주는 매력적인 캐릭터입니다.

 

여느 진구 시리즈보다 액션물의 성격이 강한 점도 매력적이고,

철저히 감춰진 비밀을 집요하게 캐내는 진구의 명탐정 캐릭터도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작가는 진구를 비롯, 고진이나 이탁오의 마무리를 위해 갈 길이 멀다는 후기를 남겼는데,

부디 이들의 이야기가 오랫동안 진행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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웨스트코스트 블루스
장파트리크 망셰트 지음, 박나리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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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파트리크 망셰트는 한국 독자에겐 다소 생소한 작가지만

프랑스 누아르 장르를 혁신했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고 합니다.

1976년에 출간된 이 작품은 누아르 혹은 범죄소설이라고도, 복수 스릴러라고도 할 수 있는데

간략하게 요약하면, 범죄와는 전혀 무관하게 살아가던 한 평범한 남자가

본의 아니게 킬러들의 타깃이 되어 죽을 고비를 넘기다가 멋지게 복수하는 이야기입니다.

 

화려한 액션과 반전을 거듭하는 스토리, 카리스마 넘치는 주인공 등

온갖 현란한 누아르와 범죄물에 익숙해진 2020년의 독자에게

웨스트코스트 블루스는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고전의 맛이라든가 작품 자체가 갖는 특별한 위상을 음미하는 것도 유의미한 경험이라

1970년대의 시대상과 함께 프랑스 누아르를 혁신했다는 이 작품의 가치를 맛보기로 했습니다.

 

주인공 조르주 제르포는 음습한 뒷골목이나 흉악한 범죄와는 무관한 기업 임원입니다.

어느 날 밤 우연히 누군가를 도운 일로 인해 그의 일상은 순식간에 악몽으로 변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수차례나 킬러들에게 쫓기다가 살해당할 뻔 한 조르주는

끝내 자신의 힘으로 모든 진실을 알아내고 복수에 성공합니다.

 

그다지 복잡하지도 않고 화려함과는 거리가 먼 독특한 작품입니다.

위기는 쉴 새 없이 닥쳐오고, 생존을 위한 조르주의 투쟁은 가련하고 가혹하지만

복수를 위한 그의 여정은 다소 무리없이 예상대로 전개될 뿐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은 접하기 힘든 프랑스 범죄소설이라는 특별함과 함께

역시 프랑스답군!”이란 말이 저절로 튀어나오게 만드는 낯선 서사에 있습니다.

 

어딘가 일상적이지 않아 보이는 독특한 말투와 행동,

분위기 묘사를 위해 동원되는 묘한 뉘앙스의 음악과 술과 음식들,

그리고 바로 앞까지 전개된 맥락을 파괴하며 느닷없이 튀어나오는 깜놀할 만한 문장 등

영미권 장르물을 읽을 때와는 전혀 다른 낯선 서사들이 작품 전반에 배어있다는 뜻입니다.

 

다소 의외인 점은 난해한 문장과 전위적(?) 묘사가 먼저 떠오르는 프랑스 작품답지 않게

아주 심플하고 슬림하고 선명한 알맹이만 잔뜩 든 작품이란 점인데,

분위기나 배경 묘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지만

워낙 쉴 틈 없이 빠른 속도로 이야기가 전개되기 때문에 그런 인상을 받은 것 같습니다.

김용언 미스테리아편집장의 군살이 조금도 없이 뼈만 발라낸 듯한 날렵한 이야기

아마도 이런 특징을 잘 포착한 평이란 생각입니다.

 

서문옮긴이의 말에 대실 해밋과 레이먼드 챈들러가 언급되는데,

각각 말타의 매’, ‘안녕 내 사랑한 편씩 밖에 못 읽어서 자세한 비교는 하기 어렵지만,

이 작품을 통해 소위 하드보일드 스타일이 연상되는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물론 미국의 하드보일드와는 전혀 결이 다른 작품이긴 하지만

두 작가의 스타일이나 주인공 캐릭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의외로 장파트리크 망셰트과 궁합이 잘 맞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아쉬웠던 점은 주인공 조르주를 위기에 빠뜨리는 킬러들과 그 배후의 캐릭터였는데,

작가의 의도가 무엇이었던 간에 악당 치곤 조금은 싱겁고 가볍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그런 탓에 조르주의 위기가 나이브하게 읽히기도 했고,

마지막 복수의 과정 역시 다소 쉬워 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 가지만 더 얘기하자면,

1970년대 유럽의 사회경제적 분위기가 이 작품의 저변에 깔려 있다는 소개글을 봤는데,

너무 알맹이 위주의 군살 없는 서사라서 그런지

수정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의 물결 같은 시대적 배경이 제대로 읽히지 않았습니다.

그랬다면 주인공 조르주의 위기가 좀더 입체적일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영화로 만들면 괜찮았겠다, 는 생각을 했는데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실제로 1980년에 알랭 들롱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다고 합니다.

주인공 조르주가 두 번 다시 이런 악몽을 겪을 리는 없을 테니 후속작은 없었을 것 같지만

장파트리크 망셰트의 작품이 추가로 한국에 소개된다면 한번쯤 더 만나봤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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