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번째 원숭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9
J. D. 바커 지음, 조호근 옮김 / 비채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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납치한 희생자의 귀, , 혀를 차례로 적출해 가족에게 보내다가

마지막에는 시체를 공공장소에 전시하는 연쇄살인마 4MK(네 마리 원숭이 킬러).

5년째 그를 추적해온 4MK 전담반의 형사 샘 포터는

어느 날 4MK로 추정되는 자가 교통사고로 사망했다는 연락을 받고 급히 출동한다.

버스에 치여 얼굴이 뭉개진 신원불명의 사망자는 한쪽 귀가 담긴 상자를 들고 있었다.

이제 샘 포터와 4MK 전담반은 어디선가 귀를 잃고 죽어가는 마지막 피해자를 찾아야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모처럼 제 취향에 맞는 짜릿한 고속 스릴러 한 편을 읽었습니다.

살짝 도가 높은 폭력성, 책갈피를 낄 틈을 주지 않는 밀도와 속도감을 갖춘 이야기,

매력적인 형사와 범인 캐릭터 등 스릴러의 미덕을 아주 잘 갖춘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나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을 좋아하는데

네 번째 원숭이는 그 작품들과 거의 맞먹는 재미와 만족도를 지녔습니다.

(물론 아쉬운 점도 있어서 별 0.5개를 뺐지만 그 이유는 뒤에 설명하겠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소시오패스인 부모로부터 제대로 된 살인과 고문 교육을 받은 범인은

말 그대로 청출어람(?)이란 표현에 걸맞을 정도로 완벽한 소시오패스로 성장했고,

그만의 정의로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참혹한 연쇄살인극을 벌입니다.

지난 5년 동안 범인을 추적해온 중년의 시카고 경찰 샘 포터는

교통사고로 사망한 4MK의 마지막 희생자를 찾는데 열을 올리는 동시에

4MK가 남긴 일기장 소시오패스로 성장하는 과정을 기록한 유년의 기록 에 몰두합니다.

어쩌면 그곳에 마지막 희생자를 찾을 수 있는 단서가 있을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한편, 4MK의 마지막 희생자인 10대 소녀 에머리는 한쪽 귀가 잘린 상태에서

어딘지 모를 공간에 감금된 채 끔찍한 공포와 맞서 싸우는 중입니다.

 

샘 포터의 수사, 범인의 일기, 에머리의 공포 등이 한 챕터씩 번갈아 전개되는데,

챕터의 길이가 그리 길지 않은 덕분에 안 그래도 빠른 이야기가 더 빠르게 느껴집니다.

특히 범인의 일기 속 내용은 워낙 충격적이고 잔혹한데다

부모에 의해 철저하고 견고하게 키워진 소시오패스라는 전례 없는 설정 때문에

주인공 샘 포터의 수사보다 더 긴장감을 발산합니다.

다만 독자에 따라 꽤 불편하게 여길 수도 있는 끔찍하고 잔혹한 내용들이 많아서

작품의 완성도와 무관하게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렇듯 개인적으로 만족스러운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별 0.5개를 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550여 페이지의 분량 가운데 동어반복 또는 정체된 내용들이 적지 않다는 점입니다.

다 읽고 보면 샘 포터와 전담반의 수사 과정은 그리 역동적이지도 빠르지도 않습니다.

미궁에 빠지고, 위기에 빠지고, 돌파구를 찾는 등 전형적인 시퀀스들은 전부 등장하지만

어쩐지 계속 제자리걸음을 하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 감금된 마지막 희생자 에머리의 챕터는 비중에 비해 너무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고,

범인의 일기 역시 내용은 충격적이지만 필요 이상의 분량이 할애됐다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는 주인공 샘 포터의 캐릭터인데, 자세히 쓰면 길어질 수 있어서 간단히 비유만 하면,

샘 포터는 실은 요 네스뵈가 창조한 상처투성이 형사 해리 홀레 같았어야 합니다.

중반에 드러난 그의 비극적인 개인사는 좀처럼 헤어나기 어려운 깊은 상처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초반부의 그는 이언 랜킨이 창조한 유쾌하고 삐딱한 존 리버스처럼 보였습니다.

이런 건 반전이 아니라 주인공에게 몰입하기 어렵게 만든 잘못된 설계라는 생각입니다.

아무리 심각한 상황이 나와도 초반의 웃고 농담하는 샘 포터가 자꾸 생각이 나서

그의 비극과 상처에 공감하며 따라가기가 무척 어려웠다는 얘깁니다.

앞서 말한대로 분명 매력적인 주인공이긴 하지만,

잘못된 설계는 제겐 마지막 장까지 목에 걸린 가시처럼 너무도 불편하게 여겨졌습니다.

 

작가는 후속편을 염두에 둔 듯한 꽤나 큰 떡밥을 남겨놓은 채 작품을 마무리했습니다.

미국에서 이 작품이 2017년에 출간됐으니 어쩌면 후속편이 이미 나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샘 포터의 활약은 물론 매력적인 전담반 동료들과의 팀플레이도 기대되는데

부디 빠른 시간 안에 후속편 소식이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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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명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권남희 옮김 / ㈜소미미디어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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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전산의 새 대표이사가 이전 대표였던 우류 나오아키의 유품인 석궁에 의해 살해당했다.

관할서 형사 유사쿠는 우류 나오아키의 아들인 아키히코와 재회하며 기묘한 운명을 느낀다.

초중고교 내내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바로 그 아키히코가 사건에 연루됐기 때문.

또 첫사랑이었지만 비극적으로 헤어졌던 미사코가 그의 아내라는 사실에 더욱 충격을 받는다.

세 사람 사이에 얽힌 끈질긴 숙명, 그 실체는 과연 무엇인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국내 출간 기준으로) 히가시노의 초기작에 속하는 숙명10여년 만에 다시 읽었습니다.

1993년에 발표됐고 2007년에 국내에 소개됐는데,

그 무렵은 용의자 X의 헌신’, ‘붉은 손가락등 히가시노에게 미쳐 있던 시절이었고

마지막 장을 덮은 작품의 여운을 음미하기도 전에 다음 작품을 허겁지겁 찾아 읽느라

좀 심하게 말하면, 머릿속에서 여러 작품의 줄거리들끼리 뒤죽박죽인 상태이기도 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숙명은 히가시노의 이야기에 흠뻑 빠져있던 그 시절을 떠올리게 했는데,

최근 억지스러운 과학 소재나 너무 가벼운 서사 때문에 다소 멀리하기 시작한 히가시노 대신

타고난 이야기꾼 히가시노의 초창기 매력을 추억처럼 음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작품에도 뇌과학이라는 소재가 등장하긴 하지만

미스터리를 혼란스럽게 할 정도로 복잡하거나 전문적이지 않아서 불편함이 없었고,

무엇보다 등장인물들의 과거사를 비극적으로 묘사하는데 적절하게 차용된 느낌이라

오히려 작품에 몰입하는데 알맞은 촉매제로 쓰였다는 생각입니다.

 

숙명이란 제목이 뜻하는대로 이 작품의 핵심은 미스터리보다는 운명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어릴 적부터 악연으로 맺어진 유사쿠와 나오아키의 관계는

20년이 지나 각각 형사와 용의자로 재회하면서 다시 한 번 운명처럼 충돌합니다.

더구나 지금도 잊지 못하는 첫사랑 미사코가 나오아키의 아내임을 알게 된 유사쿠는

공정한 수사가 가능할까 싶을 정도로 사적인 감정에 휘둘리게 되는데,

그래서인지 유사쿠는 범인=나오아키라는 확신 또는 그렇기를 바라는 기대를 갖게 됩니다.

 

유사쿠-나오아키의 갈등만큼 독자의 호기심을 이끄는 대목은 미사코의 과거와 현재입니다.

고교시절 이후 미사코는 스스로 실에 의해 조종되는 듯한삶을 살아왔다고 생각합니다.

가정, 경제, 취업, 결혼 등 모든 것이 남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순조로웠지만

그녀는 그 모든 것들이 결코 우연이거나 자신의 노력의 산물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이 혹시 시아버지가 대표였던 UR전산일지도 모른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UR전산의 새 대표가 살해되자 미사코 역시 사건의 후폭풍에 휘말리게 됩니다.

 

뇌과학, 운명 같은 악연, 살인사건 미스터리 등이 잘 조합된 숙명

히가시노의 초기작 가운데 손에 꼽을 만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붉은 손가락을 비롯한 가가 시리즈를 가장 좋아하고,

그 외 미스터리 중에는 용의자 X의 헌신방황하는 칼날,

미스터리 중에는 백야행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을 최애 작품으로 꼽는데,

다소 거칠거나 조급함이 엿보이긴 해도 이야기꾼으로서의 저력이 담긴 그의 초기작들 역시

지금 읽어도 매력이 뚝뚝 넘쳐흐르는 게 사실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 너무 급하게 읽은 탓에 기억조차 가물가물한 그의 초기작들이 많은데

숙명덕분에 언젠가 순서대로 한 편씩 제대로 음미해봐야겠다는 욕심을 갖게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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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립 잭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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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든버러의 명망 높은 하원의원 그레고르 잭이 매음굴 불시 단속에 나선 경찰에 적발된다.

피 냄새를 맡은 언론은 거물 정치인을 무너뜨리는 데 혈안이 된다.

더구나 잭의 아내가 실종되면서 정치인으로서의 명성은 회복 불가능할 정도로 무너지고 만다.

잭은 함정에 빠진 것일까? 잭의 아내는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존 리버스는 잭은 물론 그의 아내 리즈의 오랜 동창들에게서 불온한 기운을 느낀다.

사업가, 서점주인, 배우, 살인마 등 제각각의 인생을 살고 있는 그들을 탐문하며

존 리버스는 그들 사이의 시기와 질투, 애증과 불륜 등에 주목하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한 달 전쯤, ‘존 리버스 시리즈의 최근작이자 여덟 번째 작품인 블랙 앤 블루를 읽었습니다.

여덟 편의 시리즈 중 유일하게 못 읽은 게 네 번째 작품인 스트립 잭이었는데,

노련한 형사로 성장하여 복잡다단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존 리버스의 모습을 쭉 지켜보다가

갑자기 과거로 돌아가 그를 지켜보고 있자니 어딘가 풋풋한 느낌까지 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작품 뒤로 이어진 검은 수첩’, ‘치명적 이유’, ‘렛 잇 블리드’, ‘블랙 앤 블루

사건의 스케일도 크고 등장인물도 꽤 많은데다 그만큼 죽음의 숫자도 적지 않습니다.

하지만 스트립 잭은 그 작품들에 비하면 다소 소품처럼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 매번 동시다발적으로 터지는 여러 사건에 동분서주하던 리버스지만,

이번에는 거의 하나의 사건에 올인 한다고 해도 과언은 아닙니다.

물론 메인 사건에 얽힌 곁가지 사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리 복잡하고 어렵진 않습니다.

 

매음굴 사건과 아내의 실종으로 정치 생명이 꺼져가는 그레고리 잭을 조사하던 리버스는

모두가 그를 비난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음모론이 더 설득력 있게 느껴지고,

누군가 그를 함정에 빠뜨리려 한 게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특히 잭과 그의 아내 리즈 주변을 조사하면서

그들의 동창생들이 단순히 우정때문에 오랜 인연을 유지해온 게 아니란 걸 알게 되자

리버스는 그들이 벌인 난잡한 파티, 그들 사이의 불편한 관계들에 주목하게 됩니다.

 

사실, (살인사건이 벌어지긴 했지만) 사건은 소소하고, 위험한 상황도 그리 많지 않습니다.

밝혀진 진실이나 범행 동기 역시 영화보다는 TV 단막극에 어울릴 법한 사이즈인데,

시리즈를 모두 읽은 입장에서 총평하자면 재미 면에서는 여느 작품보다 월등하다는 생각입니다.

이 시리즈의 가장 큰 매력 중 하나는 존 리버스의 캐릭터 플레이인데,

까칠하고 완벽해 보이지만 실은 어딘가 구멍이 숭숭 뚫린 것 같은 무척이나 인간적인 면모,

수시로 말장난을 벌이며 위아래 할 것 없이 당황하게 만드는 재치와 센스,

게다가 마초 기질과 공생하는 순정남 캐릭터 때문에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는 일이 사건을 따라가는 것만큼 재미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후 작품에서도 리버스의 캐릭터는 여전하지만

아무래도 사건도 커지고, 이야기도 복잡해지면서 그런 재미가 줄어든 게 사실인데,

모처럼 이 작품을 통해 리버스의 매력을 만끽한 것 같아서,

스릴러로서의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하고도 남았다는 느낌입니다.

 

독자에 따라 존 리버스 시리즈에 살짝 거부감을 가진 경우가 있습니다.

스코틀랜드 특유의 블랙 유머라든가 어딘가 명쾌하지 않은 미스터리 해법 때문으로 보이는데,

저 역시 시리즈 가운데 일부 작품에선 그런 불만을 크든 작든 느껴본 게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덟 편이나 되는 시리즈를 놓치지 않고 읽는 이유는

역시 뭔가 따라가지 않을 수 없는 매력이 분명히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고백하자면 최근작인 블랙 앤 블루를 읽은 뒤 이 시리즈를 계속 읽어야 하나 고민했는데,

신작 소식(‘행잉 가든’)을 듣자마자 저도 모르게 존 리버스의 활약이 궁금해진 걸 보면

저에게 이 시리즈는 피할 수 없는 애증 섞인 대상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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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의 쌍곡선
니시무라 교타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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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신년 연휴, 여섯 명의 남녀가 초대장을 받고 도호쿠의 외딴 호텔 관설장으로 향한다.

하지만 이내 교통과 통신이 마비되면서 호텔은 고립되고, 숙박객들이 살해당하기 시작한다.

피해자 옆에는 범인의 메시지와 함께 묘한 마크가 그려진 카드가 놓여 있고,

사람 수가 줄어드는 것에 따라 오락실의 볼링 핀이 하나씩 사라진다.

한편 도쿄에서는 쌍둥이인 점을 악용한 형제의 강도 행각이 이어진다.

쌍곡선처럼 영원히 마주치지 않을 것 같던 두 사건은 마지막에 충격적인 결말을 만들어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이 작품의 시간적 배경은 1969년에서 1970년으로 넘어가는 연말연시입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게 1971년이니 무려 50년 전인데,

고전적인 클로즈드 서클에 쌍둥이 트릭까지 가세한, 그야말로 클래식 그 자체인 작품입니다.

관 시리즈의 아야츠지 유키토가 추앙해 마지않는 작가라서 그런지

출판사의 홍보카피도 “‘십각관의 살인이전에 살인의 쌍곡선이 있었다!”라는,

다소 파격적으로 보이기까지 하는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습니다.

 

첫 페이지를 열자마자 작가의 도전장이 눈에 띕니다.

, 독자에게 이 작품에서 쌍둥이 트릭을 쓰겠다는 선언과 함께

이로써 출발점이 같아졌습니다.”라는 대담한 도전을 하는 것입니다.

사실 쌍둥이 트릭은 자칫 막판에 김이 확 빠지게 만들 수 있는 위험한 트릭인데,

과연 작가가 이렇듯 공개선언까지 한 마당에 어떻게 이야기를 풀어갈지 궁금해졌습니다.

 

도쿄에 사는 것 외엔 공통점 하나 없는 사람들이 깊은 산속 호텔에서 한 명씩 살해됩니다.

희생자가 늘어갈수록 왜 우리인가?’라는 추리를 펼쳐보지만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생존자들간에 서로를 의심하는 마음까지 생겨나며 호텔은 생지옥으로 변합니다.

같은 시각, 도쿄에서는 쌍둥이 형제가 경찰을 농락하며 연쇄강도를 벌이는데,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그 당시 아날로그 경찰이 안쓰러워 보일 정도였습니다.

별개로 보이던 두 사건은 막판에 접점이 만들어지면서 한 갈래로 모이게 되지만,

경찰은 마지막까지 쌍둥이 트릭에 빠져 허우적대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호텔에 온 한 인물은 끊임없이 애거사 크리스티의 명작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를 언급합니다.

자신들의 상황이 그 작품 속 설정과 비슷하지 않냐, 라는 불길한 예감을 피력한 건데,

이건 애거사 크리스티에 대한 오마주 혹은 일종의 도전이라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설정입니다.

아마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와 비교하며 읽는다면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막판에 공개된 쌍둥이 트릭은 고전에 어울리는 수준 아닐까?’라는

독자의 섣부른 예감을 훌쩍 뛰어넘는, 다소 놀라운 엔딩을 만들어냅니다.

물론 온갖 기이한 트릭에 익숙해진 2020년의 프로페셔널 독자에겐 살짝 밍밍할 수도 있지만

작가의 도전장에 나름 투지를 가졌던 일반 독자라면 충분히 감탄하고도 남을 엔딩입니다.

1963년 데뷔 이후 지금도 왕성한 활동을 한다는 작가의 내공이 새삼 느껴지는 대목입니다.

 

다만, 범인의 범행동기와 희생자들의 선택 과정은 조금은 공감하기 어려웠고,

쌍둥이 트릭에 대한 설명은 납득은 돼도 한 방에 이해하기엔 좀 혼란스러웠습니다.

꽤 공을 들인 범행인데, 범인에게 좀더 강렬한 동기가 부여됐더라면,

, 희생자들이 자신들이 왜 선택됐는지 조금씩 깨달아가는 과정이 설명됐더라면,

그리고, 트릭에 대한 설명이 좀더 친절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은 저만의 것은 아닐 것입니다.

 

침대특급 하야부사 1/60초의 벽’, ‘북의 유즈루, 저녁하늘을 나는 학’, ‘이즈모 특급 살인

열차가 사건의 주 무대인 시마다 소지의 요시키 형사 시리즈를 좋아하는데,

(다소 황당한 해법이 종종 등장해서 늘 아쉬움이 남은 것도 사실입니다.^^;)

니시무라 교타로의 대표작 역시 철도를 무대로 한 트래블 미스터리라고 해서

과연 어떤 식의 열차 미스터리를 만들어냈을지 새삼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살인의 쌍곡선이 선전한다면 그 작품들을 만나볼 기회가 분명 생기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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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없는 여자들 스토리콜렉터 82
아나 그루에 지음, 송경은 옮김 / 북로드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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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을 읽을 때 출판사 홍보글은 물론, 가능하면 띠지나 뒷표지의 카피도 안 보는 편입니다.

아무래도 선입견이 생길 수밖에 없고 책읽기의 재미를 떨어뜨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처럼 작가의 이름이 생소할 땐 도리 없이 몇몇 정보를 확인하곤 합니다.

대략 출판사 이름, 제목과 표지가 풍기는 뉘앙스, 번역가 등의 순으로 확인하는데,

일단 북로드에서 낸 작품이라 믿음이 갔고,

책 앞날개의 작가 소개를 얼핏 보니 덴마크 작가라 더 구미가 당겼습니다.

차갑고 잔혹한 북유럽 스릴러의 새 작가와 만날 수 있겠구나, 하고 말이죠.

 

그런데...

초중반까지 읽는 동안 뭔가 기대와 어긋난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오프닝을 장식한 살인사건은 무척이나 흥미진진했는데,

사건을 수사하는 두 주인공만 놓고 보면 왠지 코믹하고 가볍고 좌충우돌의 느낌이 드는,

말하자면 코지 미스터리의 냄새가 강하게 진동했기 때문입니다.

다 읽고 확인한 띠지와 뒷표지,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콧대 높고 깐깐한 고교 동창이자 내 여자를 빼앗아간 단 소메르달과의 공동수사라니!”

연륜을 자랑하는 수사관 플레밍 토르프와 동물적 감각이 번득이는 광고쟁이 단 소메르달,

평생 절친이자 라이벌이었던 두 사람의 7일간의 공동 수사!”

 

아마 이 홍보글을 먼저 봤다면 전 이 작품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주인공들 캐릭터가 전형적인 코지 미스터리 스타일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겨우 견뎌낸(?) 초중반을 지나면 이 작품의 미덕이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북유럽으로 유입된 제3세계 여성 노동자들의 참혹한 현실과 그녀들을 향한 추악한 마수들,

그리고 거기서 파생된 끔찍한 살인극과 정교한 미스터리가 흥미진진하게 전개됩니다.

소개글만 보고 선택하지 않았다면 분명 후회했을 작품인데,

물론 주인공들 캐릭터 때문에 만점을 주진 못했지만 충분히 매력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피오르에 인접한 소도시 크리스티안순에서 외국인 여성 노동자의 시신이 연이어 발견됩니다.

자신이 다니던 광고회사에서 첫 사건이 벌어진 탓에 엉겁결에 수사에 끼어든 단 소메르달은

절친이지만 한때 지금의 아내를 놓고 경쟁했던 수사과장 플레밍을 돕는 처지가 되는데,

문제는 아마추어인 소메르달의 이 워낙 뛰어나서 경찰의 입장이 곤란해졌다는 점입니다.

결국 소메르달과 플레밍은 본의 아니게 각자 수사를 진행하게 되고,

막판에 자신들이 획득한 정보와 추리를 공유함으로써 멋지게 사건을 해결합니다.

 

사감(私感)으로 얽힌 두 주인공의 미묘한 상황을 지켜보는 일은 코지 미스터리의 재미를,

외국인 여성 노동자에 얽힌 비극적인 사건을 지켜보는 일은 스릴러의 재미를 주는 작품인데,

다소 과한 우연처럼 얽힌 등장인물 간의 관계만 제외하면 딱히 흠잡을 곳이 없는 이야기라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의 소개에 따르면 이 콤비의 활약상을 그린 시리즈가 7편이나 나왔다고 합니다.

(이 작품이 2007년에 출간됐으니 국내 소개는 많이 늦은 편이긴 합니다.)

북로드에서 이 시리즈를 계속 출간할 계획인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코지 미스터리 취향도 아니고, 차갑고 잔혹한 북유럽 스릴러의 냄새도 덜하지만

아무래도 아나 그루에라는 작가 이름을 계속 기억하게 될 것 같습니다.

뭐라고 딱 꼬집을 순 없지만 독자의 흥미를 끌어당기는 묘한 매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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