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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틸 키스 ㅣ 링컨 라임 시리즈 12
제프리 디버 지음, 유소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0년 5월
평점 :
에스컬레이터 패널 뚜껑이 갑자기 열리고 추락한 승객은 피투성이가 되어 죽는다.
이유도 모른 채 잔혹하게 숨지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경찰은 헛다리만 짚는데...
사물인터넷 냉장고, 자동차, 오븐 등의 온갖 스마트 제품이 어느 날 살인 무기로 돌변한다면?
스마트 네트워크 시대에 한 번쯤 떠올려 보는 아찔한 상상이 소설에서 대담하게 펼쳐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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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하자면, 하루가 다르게 진보하는 문명이 여러 가지로 못마땅한 1인입니다.
문명이 결코 인간의 편에만 서지 않을 것이라는, 막연하지만 꽤나 불길한 예감 때문입니다.
나의 생활, 나의 공간, 나의 물건들이 타인에 의해 조작된 끝에 흉기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건
이제 더 이상 영화나 SF소설 속에서만 접할 수 있는 허황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제프리 디버는 ‘스틸 키스’를 통해 이미 현실이 된 끔찍한 악몽에 대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초반부터 정체가 공개된 범인 버넌 그리피스는 태블릿으로 스마트 컨트롤러를 조작하여
뉴욕 곳곳에서 끔찍한 살인극을 벌입니다.
전혀 연관 없어 보이던 살인극들이 동일범의 소행임을 짐작한 아멜리아 색스는
파트너이자 연인인 링컨 라임에게 도움을 청하지만
더 이상 뉴욕 경찰을 위해 일하지 않기로 결심한 라임은 색스의 부탁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각각 다루고 있던 사건이 같은 뿌리에서 파생된 것임을 알게 된 뒤
라임과 색스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미량증거물에 몰두하며 조사를 진행합니다.
버넌 그리피스의 범행과 그를 추적하는 라임과 색스의 이야기가 메인 스토리지만,
‘스틸 키스’에는 그 외에도 다채로운 이야기가 동시에 전개되고 있습니다.
색스의 전 연인이자 죄를 짓고 교도소에 다녀온 전직 경찰 닉 카렐리의 무죄 주장,
라임과 색스의 팀원이면서 수사 대신 딴짓에만 전념하는 뉴욕경찰 론 풀라스키의 행보 등
메인 스토리 못잖은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가 ‘동시상영’ 되는데,
이 이야기들은 각각 색스와 라임에게 굉장히 중요한 영향을 미치고 있어서
단순한 곁가지로만 여겨지지 않는 나름의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라임의 오랜 파트너인 론 셀리토와 충직한 조수 톰 레스턴, 최고의 법과학 분석관 멜 쿠퍼 등
‘링컨 라임 시리즈’를 읽어오는 동안 친숙해진 조연들의 활약도 여전했지만
‘스틸 키스’ 최고의 조연은 라임의 제자이자 인턴이 된 ‘뉴 페이스’ 줄리엣 아처입니다.
경찰 일을 그만두고 강단에 선 라임은 수십 명의 제작 가운데
줄리엣 아처가 그 누구보다 뛰어난 촉을 지닌 것을 눈치 채고 인턴직을 허락했는데,
중요한 건 그녀 역시 라임처럼 휠체어에 의지해야만 하는 장애인이란 점입니다.
라임은 아직 자신만큼 휠체어 생활에 익숙해지지 않은 아처를 연민어린 시선으로 보지만
아처는 조금도 개의치 않고 인턴 이상의 역할을 수행하여 라임과 색스의 수사를 돕습니다.
특히 라임조차 놓친 미세한 단서를 파악하고 뛰어난 추리를 발휘하는데
그녀의 활약을 지켜보는 것도 무척 흥미진진하고 짜릿한 일이었습니다.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중반 정도까지의 다소 느리고 동어반복적인 전개였는데,
알맹이만 660여 페이지에 달하는 점을 감안할 때 서론이 무척 길었다는 생각입니다.
(별 0.5개가 빠진 결정적 이유입니다.)
물론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닉 카렐리와 론 풀라스키의 이야기가 등장한 것 같은데,
그렇다 해도 라임과 색스의 팬이라면 조금은 더 빠른 호흡을 기대했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마지막 200페이지에서 최고의 긴장감과 함께 폭주하듯 이야기가 전개됐고,
또 크고 작은 반전들이 폭죽처럼 연이어 터지면서 독자의 뒤통수를 얼얼하게 만들었는데,
덕분에 앞부분의 느슨함을 까맣게 잊고도 남을 정도였습니다.
신혼여행 이야기까지 거론된 라임과 색스의 가까운 미래도 궁금해지고,
인턴을 넘어 파트너로서도 손색없는 줄리엣 아처가 계속 한 팀으로 활약할지도 궁금합니다.
아직 출간되지 않은 ‘The Burial Hour’(2017), ‘The Cutting Edge’(2018)가
어떤 이야기들을 담고 있을지, 언제쯤 국내에 소개될지 사뭇 기대될 수밖에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