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나무가 우는 섬
송시우 지음 / 시공사 / 201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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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세차게 부는 태풍전야, 대나무로 가득한 남해의 외딴섬 호죽도에 서로 알지 못하는 8명의 사람들이 개장을 앞둔 연수원 시설의 모니터 요원으로 초대받는다. 이튿날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방법으로 살해된 시체가 발견되고, 태풍으로 고립된 연수원에는 기이한 피리 소리가 울려 퍼진다. 2년차 신참 경찰 한 명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람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미스터리를 파헤치고, 그 과정에서 40년 전 호죽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 밀접히 연관됐음을 알곤 충격에 빠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나오는 작품마다 찾아 읽는 한국 장르물 작가 중에 한 명이 송시우입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 ‘달리는 조사관’, ‘아이의 뼈’, ‘검은 개가 온다등 그동안 발표된 장편과 단편집을 모두 읽었는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체로 사회적 문제를 미스터리와 배합해왔던 전작들에 비해 이번 작품은 전형적인 본격미스터리, 즉 고립된 섬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초반에 기이하게 살해된 희생자가 등장하자마자 시마다 소지의 작품들이 떠올랐는데, 후기에 실린 작가의 말을 보니 송시우는 시마다 소지의 열혈 팬이며, ‘대나무가 우는 섬은 본격 또는 신본격에 대한 열광이 구현된 작품임을 알게 됐습니다. 미지의 인물로부터 초대장을 받은 사람들, 태풍으로 인해 외부와 단절된 섬, 섬 전체를 휘감고 있는 대나무 숲이 발산하는 서늘함, 거기다 잔인함과 애틋함을 곁들인 오싹한 구전 민담까지 가세함으로써 다소 상투적이긴 해도 매력적인 클로즈드 서클이 완성된 것입니다.

 

섬에 들어온 사람들 가운데 탐정 역할을 맡은 건 21살의 물리학 전공 대학생 임하랑입니다. 살인사건이 벌어진 뒤 그녀는 오류투성이인 다른 사람들의 추리를 반박하는 한편, 40년 전의 살인사건이 현재 벌어진 사건과 밀접한 연관이 있음을 눈치 채고 자신만의 특유한 촉과 몇몇 협력자들의 도움으로 사건의 진상에 다가갑니다. 똑똑하고 무례한 캐릭터는 시마다 소지의 대표 캐릭터 미타라이 기요시를 떠올리게 했고, 상상력과 물리학을 이용한 추리는 (다소 거친 감은 있지만) 리얼리티에 충실합니다.

 

페이지도 술술 잘 넘어가고, 사건과 소재와 캐릭터들도 재미있고 긴장감 있게 배치됐지만, 뼈대가 되는 기본 설정에서 위화감을 느낀 탓인지 읽는 내내 약간 불편했던 것도 사실입니다. “탐정을 포함한 8명의 인물들은 왜 미지의 인물의 초대에 응해 남해 외딴섬까지 왔는가?” “범인은 왜 그토록 (무지막지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공을 들여 살인을 저질렀는가?” , 범인과 탐정과 조연들 모두 첫 출발점부터 납득하기 어려운 행동과 결정을 했다는 뜻인데 작가는 작품 곳곳에서 이에 대한 변호를 하지만 역시 다소 무리한 설정으로 보였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상황이 전제돼야 고립된 섬에서의 살인사건이란 소재가 빛나게 되는데 그 부분에서 시마다 소지의 일부 작품에서 느꼈던 불만이 고스란히 재현되는 느낌이었습니다.

, 마지막에 이 거대한 살인극에 여러 사람을 초대한 이유가 밝혀지는데, 그 대목 역시 다분히 작위적으로 읽혔습니다. 굳이 그렇게 안 해도 범인은 얼마든지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었을 거란 생각과 함께 조연들이 소모적으로 활용됐다는 아쉬움이 남기도 했습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작품들과는 결이 확연히 달라서 반갑기도 했고, 조금은 기대에 못 미치는 부분들이 있어서 아쉬움도 함께 남은 작품입니다. 그래도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작가의 성실함과 진정성은 진하게 느낄 수 있었는데, 그래선지 많이 쓰진 못해도 꾸준히 쓰고 싶다.”는 송시우의 바람을 진심으로 응원하고 싶고, 그런 마음으로 다음 작품을 기다려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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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덕의 윤무곡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4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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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 시절, 잔혹한 토막살인을 저질러 시체배달부란 별명을 얻었지만 지금은 악명 높은 막강 변호사가 된 미코시바 레이지. 그의 여동생 아즈사가 30년 만에 찾아와 친어머니 이쿠미의 변호를 의뢰한다. 이쿠미가 재혼한 남편을 자살로 위장해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것. 평소와 다르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던 미코시바는 갈등 끝에 의뢰를 받아들이기로 한다. 이쿠미는 구치소에 접견 온 아들 미코시바에게 혐의를 부인한다. 미코시바는 30년 만에 마주한 친어머니이자 피고인 이쿠미를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짊어진 가해자 가족의 비참한 과거와 마주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처음으로 나카야마 시치리를 만난 건 2014살인마 잭의 고백이었지만, 본격적으로 그의 작품을 탐독하기 시작한 건 2017년 겨울 연쇄 살인마 개구리 남자부터입니다. 그때부터 24개월 만에 12번째 작품을 읽게 됐는데, 정말 어마어마한 생산력(?)의 소유자라고 할 수밖에 없는 작가입니다.

 

악덕의 윤무곡은 그의 대표 시리즈인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매 작품마다 그의 참혹한 과거, 즉 어린 소녀를 잔혹하게 토막살해한 시체배달부라는 점이 사건 자체 또는 사건 해결과정에서 중요한 배경으로 등장하곤 했지만, 이번처럼 그 사건으로 인해 절연했던 그의 가족이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처음입니다. 물론 전작인 은수의 레퀴엠에서 그가 자신을 키워준 진짜 부모라고 여기는 의료소년원의 교도관 이나미 교도관을 변호한 적은 있지만, 친가족의 등장은 아무래도 무게감이나 긴장감 면에서 더욱 압도적일 수밖에 없는 설정입니다.

 

사건을 의뢰한 여동생 아즈사는 말할 것도 없고 재혼한 남자를 자살로 위장해 살해한 혐의를 받는 친어머니 이쿠미와의 만남은 미코시바에게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애써 냉정함을 유지하려 하지만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의 범죄로 인해 가족은 파탄 났고 아버지는 자살에 이르렀으며 이쿠미와 아즈사 모녀는 가는 곳마다 비난에 시달리며 고된 삶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단서만 놓고 보면 유죄임이 분명해 보이는 어머니 이쿠미를 지켜보면서 미코시바는 소위 소시오패스는 유전되는 것인가?”라는 질문과 진지하게 마주합니다. 더구나 29년 전 아버지의 자살마저 의심스러운 눈길로 바라보게 되면서 지금까지 유지해온 자기 안의 짐승과의 싸움에서 처음으로 나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합니다.

 

나카야마 시치리답게 막판 거듭된 반전 덕분에 미스터리의 완성도와 재미는 분명 쏠쏠합니다. 다만, (이 시리즈를 처음부터 읽은 독자라야 100% 이해할 수 있겠지만) 이번 작품에서의 미코시바의 캐릭터는 아무래도 여러 면에서 위화감을 느끼게 만들었는데, 특히 시체배달부라는 용서받지 못할 어린 시절의 죄에 대한 그의 태도가 전작들과는 사뭇 다른 뉘앙스를 풍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첫 편인 속죄의 소나타엔 자신이 죽인 소녀의 가족에게 매달 거금을 보냈다는 설명이 있고, 이후 작품들에서도 속죄라는 그의 운명이 나름 진정성 있게 그려지곤 했는데, 이번 작품에서의 미코시바는 시체배달부를 비난하는 자들에게 원색적인 비아냥과 함께 정의를 외치지만 실은 위선적인 악인들이라는 궤변에 가까운 논리를 펼치고 있습니다.

물론 30년 만에 나타난, 살인혐의를 받는 친어머니를 변호하는 입장이 되다 보니 미코시바 스스로 예민해지고 날이 설 수밖에 없는 상황이란 건 이해되지만, 이전 작품들을 읽을 때완 달리 이런 인물이 제대로 된 벌을 받지 않고 변호사가 돼있는 게 올바른 현실인가?”, 라는 의구심이 들기까지 했습니다.

 

, 메인 테마는 아니지만, “소시오패스는 유전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 작가의 의도가 자연스럽게 작품에 녹아있다기 보다는 어딘가 억지스럽고 인공적인 느낌도 들었습니다. 더불어, 마지막에 밝혀지는 어머니의 살인의 진상 역시 다소 납득하기 어렵게 설명되고 있어서 맥이 빠졌던 것도 사실입니다.

 

살인용의자인 친어머니를 변호한다는 건 이전 작품들에 비해 무척 세고 독한 설정이지만, 이야기 자체가 자연스럽게 흐르지 못하고 마치 어떤 주장을 위해 의도적으로 꾸며진 듯 해서 실망감이 많이 든 게 사실입니다.

시체배달부였던 미코시바의 캐릭터가 이 시리즈에서 가장 중요한 설정인 건 분명하지만, 개인적으론 더는 그 과거 자체가 이야기의 중심을 차지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계속 그 과거에만 함몰된다면 어떤 사건이 등장하든 동어반복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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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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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독특하고 기발하고 폭발력 넘치는 스릴러입니다.

주인공 캐릭터 설정부터 이야기 구성까지 독자의 예상을 계속 배신하는 미덕도 갖췄습니다.

미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작품이 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됐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물론 어떤 독자는 별 2개와 함께 혹평을 남기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이만큼 재미있는 스릴러는 보기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주인공은 16세 소녀입니다.

합리적 판단과 계획을 담당하는 뇌의 전두엽이 상위 1%를 넘어설 정도로 큰 그녀는

스스로 여러 종류의 감정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말하자면 소시오패스입니다.

유치원 시절엔 총기난사범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히 신고전화를 했었고,

16살에 임신을 하고도 놀라기는커녕 부모에게 거리낌 없이 그 사실을 알렸는가 하면,

임신 7개월의 몸으로 등굣길에 납치를 당한 뒤에도

냉정하고 차분하게 납치범을 응징할 계획을 세우는 인물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은 FBI요원 로저 리우입니다.

그는 어릴 적 겪은 끔찍한 사고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FBI요원이 됐습니다.

뛰어난 기억력과 엄청난 시력을 지닌 그는 저격수 임무를 마다하고 유괴사건에 헌신했고,

지난해부터 똑같은 패턴으로 벌어지고 있는 연쇄 10대 소녀 납치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러프하게 정리하면, 납치된 소녀가 자신의 힘으로 납치범을 처치하고 탈출하는 이야기에,

FBI요원이 추리와 천운(?)의 힘으로 극적으로 소녀의 탈출을 지원한다는 줄거리입니다.

사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납치극 자체가 17년 전의 일에 대한 회상이라는 게 소개돼서,

독자들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주인공의 미션이 성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의외의 맥 빠진 시작은 얼마 안 가 전혀 다른 전개를 맞이하게 됩니다.

, 이 작품의 백미는 결과가 아니라 복수의 과정이란 뜻입니다.

납치된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차근차근 복수와 탈출을 계획하는 모습이라든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막판 클라이맥스의 짜릿함이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데,

특히 돌직구처럼 독자를 향해 날아드는 직설적인 문장들은

묘한 흥분과 쾌감까지 전해주고 있어서 소녀의 복수의 과정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듭니다.

 

재미있는 건, 정말 긴박한 상황의 와중에 갑자기 등장하는 훈훈한(?) 과거 이야기들입니다.

소녀도 FBI요원도 뜬금없이 자신들의 과거를 툭툭 내뱉어서 독자를 피식 웃게 만들곤 하는데,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또는 제 갈 길을 잃은 듯한 이 어이없는 구성 자체가

마치 영국식 코미디처럼 독자를 유쾌하게 만드는 대목에선 작가의 기발함을 엿볼수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선 끔찍한 비극도, 착잡한 추억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시종 무겁고 음습한 이야기만 전개될 것 같은 납치사건 스릴러에서

이런 재미를 맛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특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17년이 지난 현재에도 소녀와 FBI요원의 복수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대목에서 독자들은 더욱 큰 통쾌함을 만끽할 수도 있는데,

동시에 한 팀이 된 두 사람의 후속 이야기를 자연스레 기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후속작이 나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만일 나왔다면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솔직히 작가의 이름도 낯설고, 소녀가 주인공인 이야기라 큰 기대 없이 읽었던 작품인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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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 붙잡힌 살인귀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시가 아키라 지음, 김진환 옮김 / 아르누보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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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인 2018년 초에 읽은 이 시리즈의 첫 작품은 꽤나 흥미롭고 독특한 인상을 줬습니다.

택시에 두고 내린 스마트폰이 한 사람의 인생을 괴멸시키는 이야기를 다뤘는데,

스마트폰에 무심코 저장한 개인정보와 무분별한 SNS 활동이

악의를 가진 자에 의해 어떻게 흉기로 돌변할 수 있는지를 리얼하게 그린 작품입니다.

 

이 작품은 전작의 범인이 등장할 뿐 주인공도 다르고 소재도 다르지만

(책 표지도 비슷하고) 어쨌든 시리즈처럼 포장을 하고 출간됐는데,

알고 보니 국내 출판사도 다르고 단지 작가가 같은 사람이란 것 외엔 공통점이 없습니다.

처음엔 국내 출판사에서 전작의 인기에 편승하기 위해 길디 긴 제목을 붙인 줄 알았는데

도서정보를 보니 원제 자체가 번역 제목과 동일하더군요.

, 작가 본인이 무슨 이유에선지 이런 제목을 붙였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전작에 비해 한참 부족하고 어설픈 이야기라는 생각입니다.

 

이 작품의 주된 소재는 다크웹, 해킹, 랜섬웨어, 가상화폐입니다.

산속에서 암매장된 여자들의 사체가 발견되고 유력한 용의자가 체포되지만,

그는 유독 한 사체에 관해서만큼은 모르는 일이라 발뺌합니다.

그리고 3년 전 다크웹에서 자신의 멘토였던 M의 소행일 수 있다는 묘한 진술을 합니다.

가나가와 현경 사이버범죄대책과의 키리노는 FBI도 탐내는 IT전문가입니다.

상부의 요구로 이 사건에 투입된 그는 뛰어난 실력으로 수사를 진행시키지만

M의 살인행각은 그치지 않고, 도리어 자신의 연인까지 위험에 빠뜨리고 맙니다.

 

모든 것이 컴퓨터와 스마트폰으로 제어되는 세상에서 벌어질 수 있는

상상 가능한 최악의 상황들이 총출동합니다.

불법적인 영상이나 마약의 거래는 물론 살인청부까지 벌어지는 다크웹의 심연,

타인의 컴퓨터는 물론 스마트폰까지 탈탈 털 수 있으며

심지어 경찰 네트워크를 마비시키고 도시를 아수라장으로 만들 수 있는 악의적 해킹 기술 등

문명의 발전이 개인과 사회를 어디까지 파멸시킬 수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거기에, 연이어 벌어지는 끔찍한 납치와 살인까지 곁들여져서

독자에 따라 무척이나 불편한 감정으로 읽을 수밖에 없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전작이 정말 현실에서 벌어질 것 같은 인터넷 세상의 참극을 리얼하게 그렸다면,

이 작품은 캐릭터 설정은 물론 고도의 IT 기술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도 꽤나 어설퍼 보입니다.

경찰이 된지 6개월밖에 안 된 IT 전문가가 베테랑 형사처럼 활약하는 장면은 애교라고 쳐도,

아마추어라도 쉽게 추리하고 연상할 수 있는 IT 수사기법을 마치 대단한 기술처럼 묘사하거나

극강의 해커를 상대하면서 쉽고 단순한 테크닉을 구사하곤 자화자찬하는 듯한 대목에선

한숨과 함께 웃음까지 나왔습니다.

, 마지막에 나름 배배 꼬아놓은 반전은 다소 뜬금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진범의 사연은 그가 저지른 범죄에 비해 어이없을 정도로 감상적으로 묘사됐습니다.

 

전작만큼의 독특함과 충격을 기대하고 읽은 터라 아쉬움이 너무 컸던 건 사실이지만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지배하는 세상이 얼마나 허술하고 치명적일 수 있는지 궁금한 독자라면

잠시 짬을 내서 읽어보는 것도 나쁜 선택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적어도 인터넷과 스마트폰을 이렇게 쓰면 안 되는구나, 라는,

그동안 막연하게만 알고 있던 교훈을 소름 돋을 정도로 생생히 배울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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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오게네스 변주곡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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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그해의 손꼽을만한 대작이자 찬호께이의 한국 첫 출간작인 ‘13.67’으로 시작으로,

기억나지 않음, 형사’, ‘망내인’, ‘풍선인간까지 그의 작품은 놓치지 않고 계속 읽어왔습니다.

염소가 웃는 순간만 못 읽었는데 실은 조금은 상투적인 호러물처럼 보인데다

다른 이도 아닌 찬호께이의 호러라 역설적이게도 외면하고 싶은 마음이 든 게 사실입니다.

(그래도 언젠가는 꼭 읽게 될 것 같긴 하네요.^^;)

 

아무 정보도 없이 집어든 뒤에야 디오게네스 변주곡이 단편집이란 걸 알게 됐는데,

목차를 보니 무려 17편이나 수록돼있어서 반쯤은 놀랐고, 반쯤은 아쉬움이 들기도 했습니다.

수록작이 너무 많아서 놀란 건 당연한 일이지만,

찬호께이만의 묵직한 서사가 담긴 장편을 기대했던 탓에 아쉬움을 느꼈던 건데,

다 읽고 보니 나름 찬호께이를 새롭게 바라볼 수 있는 특별한 계기가 돼준 작품이었습니다.

 

짧은 중편부터 단편, 장편(掌篇)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형식들은 물론

도시괴담, 환상특급, SF 등 여러 장르를 한데 맛볼 수 있었고,

미스터리를 그린 단편들 역시 제각각 독특한 개성을 자랑하는 작품들이었습니다.

새삼 찬호께이의 내공이 얼마나 강한지, 또 작품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은지 깨닫게 됐는데,

아직까지 그의 최고작으로 꼽는 ‘13.67’을 읽었을 때만 해도

경찰소설의 대가가 홍콩에서도 등장했구나!”, 라는 기대만 들었을 뿐

이토록 다양한 소재와 장르에 관심을 가진 작가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13.67’ 이후에 출간된 작품들 가운데 기대했던(?) 정통 경찰물은 찾아볼 수 없었고

매 작품마다 소재가 됐든, 캐릭터가 됐든, 전개가 됐든 무척 특이한 경향을 내비쳐왔기에

그런 이력을 생각해보면 디오게네스 변주곡이 크게 놀랄 작품은 아닌 게 사실입니다.

다만, 여전히 ‘13.67’의 여운이 잊히지 않는 걸 보면

개인적으로 그에 버금가는 장대한 서사의 경찰물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수록작 모두 워낙 개성이 강한 작품이라 호불호를 따지기는 어렵지만,

아무래도 정통 미스터리 쪽 작품들이 기억에 남는 것 같습니다.

다크웹과 연쇄살인을 소재로 독자의 눈을 속이는 기묘한 트릭이 빛나는 파랑을 엿보는 파랑’,

추리소설가로 입문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는 한 청년의 이야기 추리소설가의 등단 살인’,

짧은 분량에도 반전의 임팩트가 강한 내 사랑, 엘리’,

미스터리는 아니지만 환상특급 같은 매력을 지닌 시간이 곧 금등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찬호께이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그의 다채로운 단편들을 만나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고,

찬호께이를 처음 만나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시작으로 그의 명품들을 찾아다니게 될

좋은 계기가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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