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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수해 기억해 ㅣ 모중석 스릴러 클럽 48
섀넌 커크 지음, 김지현 옮김 / 비채 / 2019년 10월
평점 :
정말 독특하고 기발하고 폭발력 넘치는 스릴러입니다.
주인공 캐릭터 설정부터 이야기 구성까지 독자의 예상을 계속 배신하는 미덕도 갖췄습니다.
미국에서 2015년에 출간된 작품이 왜 이제야 한국에 소개됐는지 의아할 따름입니다.
물론 어떤 독자는 별 2개와 함께 혹평을 남기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이만큼 ‘재미있는 스릴러’는 보기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주인공은 16세 소녀입니다.
합리적 판단과 계획을 담당하는 뇌의 전두엽이 상위 1%를 넘어설 정도로 큰 그녀는
스스로 여러 종류의 감정의 ‘스위치’를 켰다, 껐다 할 수 있는, 말하자면 소시오패스입니다.
유치원 시절엔 총기난사범 앞에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히 신고전화를 했었고,
16살에 임신을 하고도 놀라기는커녕 부모에게 거리낌 없이 그 사실을 알렸는가 하면,
임신 7개월의 몸으로 등굣길에 납치를 당한 뒤에도
냉정하고 차분하게 납치범을 응징할 계획을 세우는 인물입니다.
또 다른 주인공은 FBI요원 로저 리우입니다.
그는 어릴 적 겪은 끔찍한 사고 때문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FBI요원이 됐습니다.
뛰어난 기억력과 엄청난 시력을 지닌 그는 저격수 임무를 마다하고 유괴사건에 헌신했고,
지난해부터 똑같은 패턴으로 벌어지고 있는 연쇄 10대 소녀 납치사건을 담당하고 있습니다.
러프하게 정리하면, 납치된 소녀가 자신의 힘으로 납치범을 처치하고 탈출하는 이야기에,
FBI요원이 추리와 천운(?)의 힘으로 극적으로 소녀의 탈출을 지원한다는 줄거리입니다.
사실, 이야기 시작과 동시에 납치극 자체가 17년 전의 일에 대한 회상이라는 게 소개돼서,
독자들은 (너무나 당연한 얘기지만) 주인공의 미션이 성공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의외의 ‘맥 빠진 시작’은 얼마 안 가 전혀 다른 전개를 맞이하게 됩니다.
즉, 이 작품의 백미는 결과가 아니라 ‘복수의 과정’이란 뜻입니다.
납치된 상황에서도 조금도 흔들림 없이 차근차근 복수와 탈출을 계획하는 모습이라든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는 막판 클라이맥스의 짜릿함이 독자의 오감을 자극하는데,
특히 돌직구처럼 독자를 향해 날아드는 직설적인 문장들은
묘한 흥분과 쾌감까지 전해주고 있어서 소녀의 복수의 과정을 더욱 매혹적으로 만듭니다.
재미있는 건, 정말 긴박한 상황의 와중에 갑자기 등장하는 ‘훈훈한(?) 과거 이야기들’입니다.
소녀도 FBI요원도 뜬금없이 자신들의 과거를 툭툭 내뱉어서 독자를 피식 웃게 만들곤 하는데,
어딘가 나사 하나가 빠진 듯한, 또는 제 갈 길을 잃은 듯한 이 어이없는 구성 자체가
마치 영국식 코미디처럼 독자를 유쾌하게 만드는 대목에선 작가의 기발함을 엿볼수 있습니다.
물론 그중에선 끔찍한 비극도, 착잡한 추억도 있긴 하지만
어쨌든 시종 무겁고 음습한 이야기만 전개될 것 같은 납치사건 스릴러에서
이런 재미를 맛볼 수 있다는 건 정말 특이한 경험이 아닐 수 없습니다.
17년이 지난 현재에도 소녀와 FBI요원의 복수는 끝나지 않습니다.
그 대목에서 독자들은 더욱 큰 통쾌함을 만끽할 수도 있는데,
동시에 한 팀이 된 두 사람의 후속 이야기를 자연스레 기대하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미국에서 후속작이 나왔는지는 잘 모르지만,
만일 나왔다면 하루라도 빨리 만나보고 싶은 생각뿐입니다.
솔직히 작가의 이름도 낯설고, 소녀가 주인공인 이야기라 큰 기대 없이 읽었던 작품인데,
예상치 못한 선물을 받은 듯한 기분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