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증거 범죄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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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3년째 미제 상태인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은 살인현장에 자신의 뚜렷한 지문과 함께

나를 잡아주십시오라는 메시지를 남겨 경찰 당국을 당혹스럽게 만든다.

새롭게 특별수사팀을 맡은 자오톄민은 범죄논리학 전문가 옌량에게 도움을 청한다.

한편, 8년 전 실종된 아내와 딸을 찾는 일을 포기하지 않은 전직 법의학자 뤄원은

선량한 두 남녀가 우발적으로 불량배를 죽이는 장면을 목격하곤

고민 끝에 이들의 행위를 무증거 범죄로 완벽하게 포장해주기로 결심한다.

무관해 보이던 두 사건이 연결되면서 최고 법의학자와 천재 범죄논리학자의 대결이 시작되고,

마침내 상상하기 힘든 연쇄살인범의 동기가 드러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쯔진천은 동트기 힘든 긴 밤이라는 독특한 제목의 작품으로 처음 만난 중국 작가입니다.

대하드라마 급의 묵직한 서사에 꽤 놀라운 엔딩까지 겸비한 작품이었는데,

1년도 채 안 돼서 그의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있어 무척 반가웠습니다.

이 작품은 나쁜 아이’(미출간), ‘동트기 힘든 긴 밤과 함께 추리의 왕 시리즈로 불리는데,

이 시리즈의 주인공은 전형적인 능력자 형사 자오톄민과 천재적인 범죄논리학자 옌량입니다.

두 권밖에 못 읽어서 단정하긴 어렵지만, 대체로 실질적인 사건 해결은 옌량의 몫이고,

자오톄민은 바쁘게 뛰어다니긴 하지만 그다지 개성 있는 인물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무증거 범죄에서 실질적으로 대립하는 주인공은 옌량 VS 뤄안입니다.

옌량은 과거 뛰어난 경찰이었지만 불명예 퇴직 후 지금은 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칩니다.

뤄안 역시 법의학자로서 명성이 대단한 인물이었지만 아내와 딸이 실종된 뒤 경찰을 그만뒀고

지금은 민간기업에 적을 둔 채 여전히 아내와 딸을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옌량이 용의자의 진술속의 논리적 모순을 찾아내는 범죄논리학 전문가라면,

뤄안은 사건 현장과 시신이 남긴 단서를 통해 진상을 파악하는 물증 전문가입니다.

두 사람은 한때 절친이자 경찰 동료였지만,

논리로 진상을 밝히려는 경찰 VS 물증을 조작하여 무증거 범죄를 꾸미려는 용의자로 만나

그야말로 모든 것을 건 한판 승부를 펼치게 됩니다.

 

한쪽에선 3년째 활개를 치고 다니는 연쇄살인범을 쫓는 자오톄민과 옌량의 이야기가,

다른 한쪽에선 선량한 살인자를 위해 무증거 범죄를 만드는 뤄안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두 이야기는 우연히 발견된 단서 하나 때문에 한줄기의 이야기로 합쳐집니다.

그리고 옌량의 집요한 추리와 심문 끝에 연쇄살인범의 정체는 물론

범인이 왜 3년 동안 특이한 방식으로 단서를 남겨가며 살인을 저질렀는지도 밝혀집니다.

 

사회파 미스터리, 사적 복수, 증거의 조작, 이성보다 감성이 앞선 천재적 인물 등

꽤 다양하고 묵직한 코드들이 작품 전반에 깔려있고,

특히 진상이 밝혀지는 후반부 막판은 독자로 하여금 여러 번 한숨을 내쉬게 할 정도로

안타까움과 동정심과 비장미를 곁들이고 있습니다.

이런 느낌은 앞서 읽은 동트기 힘든 긴 밤에서도 비슷하게 받았는데,

덕분에 벌써부터 쯔진천의 신작 소식이 언제쯤 들려오나, 기다리게 될 것 같습니다.

 

굳이 아쉬웠던 점을 두 가지만 꼽자면,

가끔 이게 뭐지?”라는 의아함이 들 정도로 허술한 설명이 눈에 띄기도 하지만

(주로 다혈질 형사 자오톄민의 수사 부분에서 이런 대목들이 발견됩니다.)

대세에 지장을 줄 정도는 아니라서 크게 흠 잡을 약점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다만, 실질적 주인공인 옌량의 추리가 너무 비약적으로 점프하는 점은 많이 아쉬웠는데,

그가 진범에게 심증을 갖기 시작한 계기는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고,

용의자를 먼저 특정해놓고 논리를 통해 혐의를 입증한다는 그만의 고차방정식 이론역시

설득력이 좀 약했다는 느낌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얼개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용의자 X의 헌신과 유사하다는 논란이 많았다는데,

워낙 오래 전에 읽은 작품이라 기억이 확실하진 않지만,

큰 틀이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을 수는 있어도 논란이 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덕분에 용의자 X의 헌신을 다시 읽어보고 싶어졌는데,

캐릭터나 사건을 비교하면서 읽어보는 것도 색다른 재미가 될 것 같아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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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몬 - 권여선 장편소설
권여선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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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월드컵으로 떠들썩했던 여름, ‘미모의 여고생 살인사건이라 불렸던 비극이 벌어지고,

이 사건을 둘러싼 모든 인물의 삶이 방향을 잃고 흔들린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세 여성의 목소리가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끌고 가는 이 작품은

애도되지 못한 죽음이 어떤 파장을 남기는지 집요하게 파고들어가며

삶의 의미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진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그동안 읽은 여러 문학상 수상집에서 한번쯤은 만나봤을 것이 분명하지만

이렇게 단독 장편소설로 권여선을 만난 건 처음입니다.

미스터리 서사가 깔려 있긴 해도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라는 건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런 이유 때문에 호기심과 궁금증이 생긴 게 사실이고,

결론부터 말하자면 반쯤은 만족, 반쯤은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이었습니다.

 

출판사 소개글만 봐도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지척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으로 인해

인생의 방향이 엉망진창이 됐거나 또는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흘러가버린

몇몇 사람들의 오랜, 그리고 고통스런 시간을 그리고 있습니다.

누가 범인?’이라는 미스터리가 내내 독자의 궁금증을 상기시키긴 하지만

작가의 방점은 살아남은 자들의 혼란과 방황과 죄책감 또는 무력감에 찍혀 있습니다.

 

딸이 살해된 뒤 엄마는 굳이 딸의 이름을 태명으로 바꾸려 애쓰지만 무위로 돌아갑니다.

언니가 살해된 뒤 동생은 견딜 수 없는 압박감에 언니의 모습으로 성형을 합니다.

그리고 대학 졸업 후 갑자기 언니의 죽음의 진실을 알고 싶어 관련자들을 찾아 나섭니다.

용의자였던 또래 고교생은 무혐의로 풀려나긴 했지만 사건과는 무관하게 비참한 삶을 삽니다.

또 다른 용의자였던 고교생과 결혼한 여자는 시간이 흘러도 사건에서 헤어나지 못한 채

정신과 의사에게 상담을 받으며 자기도 모를 소리를 횡설수설 할 뿐입니다.

 

하지만 이들 누구에게도 후련하고 깔끔한 엔딩은 주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상투적인 비극이 부여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렇기에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이야기가 끝났다는 느낌보다는

앞으로 이 인물들은 언제까지든 질곡에서 헤어나지 못하겠다는,

결코 마침표를 찍을 수 없는 소설속에서 계속 살아가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사건은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앞으로도 끝나지 않을 것이다.

다언의 삶이 끝날 때까지, 어쩌면 다언의 삶이 끝난 후에도 끝없이 계속 될 것이다.

끔직한 무엇을 멈출 수 없다는 것,

그게 한 인간의 삶에서 어떤 무게일지 나는 상상조차 할 수 없다.” (p190)

 

사적 복수나 무한정 무거운 참회록에 비해 훨씬 더 현실감이 느껴져서 좋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아간다는 억지스러운 엔딩이 아니어서 더 좋기도 했습니다.

다만, 좀 어려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특별히 멋을 부린 건 아닌데, 각 인물마다 어떤 감정으로 이입해야 할지 잘 알 수 없었고,

특히 살해된 자의 동생인 다언의 행동과 감정의 변화는 난해하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어려움을 해소하고 싶어서 후기에 실린 작가의 말을 얼른 펼쳐봤는데,

거기에는 정말 이해하기 어려운 난해한 문장들만 실려 있어서 무척 실망스러웠습니다.

 

고민하고 생각할 확실한 여지를 남겼다면 꽤 긴 여운을 만끽했을 작품인데,

결국엔 ‘So what?’이라는, 이도 저도 아닌 애매모호함만 남았고,

다 읽고도 화자 가운데 (시간이 흘러도 다들 힘들겠구나, 라는 생각은 들어도)

어느 누구의 소설 뒤의 삶도 딱히 궁금해지지 않았습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무척 인상적인 작품이 될 것 같은 기대를 가졌지만,

개인적으로는 마무리 과정이 너무 관념적이거나 현학적이었다는 생각입니다.

이런 작품일수록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 무척 궁금해지는데,

조만간 인터넷 서점이나 카페를 통해 레몬에 대한 후기를 찾아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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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의 재구성 - 유전무죄만 아니면 괜찮은 걸까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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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도진기의 합리적 의심을 읽었는데,

그 작품이 판사들이 겪는 여러 딜레마 중 하나인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

(실제 발생했던 사건을 각색한) 미스터리 픽션을 통해 그렸다면,

이 작품은 실제 사건들의 판결 논리에 대한 도진기의 재해석을 담은 논픽션 작품입니다.

 

듀스 김성재의 사망, 이태원 살인사건, 낙지 살인사건, 삼례 나라슈퍼 사건 등

일반인들이 많이 들어본 30여개의 실제 사건들의 판결문을 낱낱이 분석하는 것은 물론,

문화와 예술에 있어 법의 잣대라든가 상고법원을 비롯한 판사 조직 내부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한때 판사였으며 이젠 변호사로서 외부에서 판사 조직을 바라볼 수 있게 된 도진기가

그만의 비판적인 논리와 시각으로 속 시원하고 통렬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

단순히 판결 결과에 대한 설명 또는 비판이라면 도진기 개인의 취향수준에 그쳤겠지만,

이 작품은 판결이 아니라 판결 논리를 분석하고 따지고 비평하고 있습니다.

 

사법부의 결정은 따라야 한다. 하지만 판결 안의 추론 과정마저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건 늘 옳다는 보장이 없고, 얼마든지 헤집어볼 수 있다.

그래야 판결이 졸지 않고, 외곬 논리는 도태된다.

 

한 건을 제외하곤 모든 사건의 1, 2, 3심 판결문을 다 구해 읽어보았다.”는 말대로,

도진기는 일반인들이 납득할 수 없었던 판결들의 이면을 꼼꼼히 설명합니다.

어떤 이유로 하급심과 상급심이 다른 판결을 내린 건지,

다른 판결의 근거는 무엇이며 과연 절차와 원칙에 충실한 판결이었는지,

그것이 국민의 법 감정과 충돌할 수밖에 없었던 사연은 무엇인지 등을 설명하는데,

간혹 여기서 소설적인 상상을 더해본다.”라는 코멘트와 함께

다소 못마땅하거나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된 판결에 대해 자신만의 추론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물론 분량의 제한 때문에 한 사건 당 할애된 페이지는 그리 길지는 않지만,

새삼 하나의 판결이 나오기까지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이해하는 데는 큰 도움이 됐습니다.

무엇보다 판사들이 겪는 여러 가지 딜레마,

, 심신상실(미약), 정당방위, 합리적 의심, 양날의 검과 같은 엄격한 절차등과 함께

일사부재리, 배심원제, 상고법원 문제, 태부족한 판사 수 등

판사 조직의 현실적인 문제까지 친절하면서도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어서

지금까지는 다소 부정적으로만 바라보던 판사 조직을 새로운 시각으로 볼 수 있게 해줍니다.

 

특히, 심정적으로는 유죄라고 생각하지만, 절차와 원칙을 따르면 무죄를 선고할 수밖에 없는,

, ‘생활인으로서의 자아와 판사로서의 자아가 충돌하는 상황이 제법 자주 등장하는데,

결국 그들 역시 사람이고, 일반인들과 똑같은 딜레마를 겪는다는 사실을 새삼 알게 됐습니다.

100% 명확한 증거와 단서 없이 누군가의 인생을 박살낼 수도 있는 판결을 내린다는 것은

일반인들이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엄청난 공포를 수반하게 될 것이고,

그런 상황과 마주한다면 역시 절차와 원칙에 기댈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판사 조직 안에도 게으르거나 부정하거나 영달에만 관심 있는 자들이 있을 것이고,

목소리가 크거나, 트러블 없이 무리 없이 사건을 처리하거나,

일보다는 인간관계에 열중하는 사람들이 혜택과 이익을 보는 것도 사실일 것입니다.

이 작품이 판사 조직 안에서 어떤 반향을 일으킬지는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켕기는 데가 하나라도 있는 자에게는 서늘한 교훈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부록처럼 실린 가벼운 글들도 눈에 띄었는데,

특히 최인훈의 광장’, 오츠이치의 ‘GOTH’, 교고쿠 나츠히코의 망량의 상자

도진기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소설들에 대한 소개가 흥미로웠고,

자신의 데뷔작 홍보카피로 히가시노 게이고를 지옥으로 보내버리겠다.”를 제안했었다는 고백은

비록 농담이었다고는 해도 도진기의 일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재미있는 일화였습니다.

 

논픽션이긴 해도 미스터리처럼 읽을 수 있는 작품이라

도진기의 팬뿐 아니라 일반 독자들도 재미와 지식을 함께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변호사로 변신한 이후 오히려 신작 소식이 뜸한 게 무척 아쉬웠는데,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든 그의 픽션 소식이 얼른 들려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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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이 총총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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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후한 컬러와 얌전한 디자인의 표지에 새겨진 미묘한 뉘앙스의 제목 호텔 로열에 끌려

사쿠라기 시노와 처음 만난 이후로 벌써 다섯 번째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예전에 읽은 작품들이 대부분 훗카이도 동부의 소도시 구시로를 배경으로 했다면,

별이 총총은 삿포로, 아사히카와, 오비히로, 구시로, 네무로, 루모이, 오타루 등

거의 훗카이도 전역을 무대로 삼고 있습니다.

시간적 배경 역시 1970년대부터 2010년대까지 50여년이란 길고 묵직한 외양을 지니고 있고,

그 위로 사키코-지하루-야야코로 이어지는 모녀 3대의 이야기가 펼쳐집니다.

 

하지만 수록작 9편 가운데 어머니 사키코가 첫 챕터를, 딸 야야코가 마지막 챕터를 장식할 뿐

나머지 이야기의 몸통은 쓰카모토 지하루의 일생입니다.

더구나 지하루는 어머니 사키코, 딸 야야코와는 아주 미미한 분량을 통해서만 만날 뿐이라,

모녀 3대 이야기라고 지칭하기도 어려운 작품인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지하루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정작 그녀의 시점에서 서술된 수록작은 단 한 편도 없다는 점입니다.

지하루는 매 작품마다 나이를 먹어가며 크고 작은 조연 정도로만 등장합니다.

, 길든 짧든, 깊든 얕든 지하루와 인연을 맺었던 사람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자신만의 이야기는 물론 그들이 지하루에게, 지하루가 그들에게 미친 영향을 들려줍니다.

이런 방식의 주인공 묘사는 오히려 궁금증과 몰입감을 더 고양시키는 효과를 내는데,

독자 입장에서 제3자의 시선을 통해 주인공의 심리와 감정을 추정해야 하는 것도,

행간 그리고 챕터와 챕터 사이의 공백에 숨은 그녀의 이야기를 상상하는 일도,

종이 위에 인쇄된 활자를 읽는 것보다 더 깊고 짙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게 만들어줍니다.

 

자신의 욕망에 눈이 멀어 어린 딸 지하루를 친정에 맡긴 채 방치한 친엄마,

이웃의 여고생 지하루를 임신시킨 철없는 대학생 아들 때문에 멘탈이 붕괴된 어머니,

스트립댄서가 되겠다는 지하루에게 자신의 물건들을 물려주는 스트립클럽의 간판 댄서,

자존심도 명예욕도 없이 살다가 자신보다 20살 가까이 어린 지하루와 결혼한 남자,

지하루의 두 번째 결혼상대인 연하남과 지하루가 낳은 딸 야야코를 키우게 된 시어머니,

30대가 된 지하루의 시() 스승이자 지하루에게 묘한 감정을 느끼는 공무원 출신 시인,

지하루의 친엄마의 마지막을 지키는 인물로 40대가 된 지하루와 비극적인 만남을 가진 남자,

지하루에게서 소설적 영감을 받아 하룻밤동안 그녀의 과거를 듣게 된 남자 등이 그들입니다.

 

작품 속 지하루는 13살 중학교 1년생부터 40대 중반에 이르는 인생을 보여줍니다.

짧게는 5, 길게는 10년 주기로 그녀의 인생을 뒤흔드는 인물들과 만나게 되는데,

그들의 공통점을 뭉뚱그려 이야기하면 대체로 고립또는 단절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지하루가 만난 사람들뿐 아니라 사키코-지하루-야야코 3대 모녀도 마찬가지입니다.

작품 속 문장들 가운데 일부를 뽑아내 이 모호한 고립, 단절의 개념을 설명해보면,

도리를 일탈하고, 정이 희박하고, 서로가 서로를 순순히 버리고 버려지는 관계이며,

애정이라는 저주 같은 강요는 원치 않는 사람들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이 작품 속 인물들은 대체로 끈끈함이나 질척거림이란 것과는 거리가 멉니다.

정 따위는 주고받기도 싫고, 버리거나 버림받아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는 점에서

어찌 보면 지독히도 이기적이거나 냉정하거나 관계 부적응자처럼 같지만,

달리 보면 그만큼 외롭고 안쓰러운 존재들이기도 합니다.

, 모녀 3대는 물론 지하루가 만난 모든 사람들 가운데 악인은 없습니다.

다들 자기 나름의 사정이 있었고, 그중에는 오히려 지하루에게 상처받은 사람도 있습니다.

다만, 그 관계들로부터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큰 영향을 받은 지하루의 일생은

곁에서 지켜만 보기에도 너무 힘들고 지난해 보여서,

예전 사쿠라기 시노의 작품 속 인물들처럼 애틋함과 연민의 감정이 담긴

안쓰러운 시선으로만 바라볼 수 없는, 막장에 가까운 일그러진 삶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래서인지 (홍보카피로도 활용된) “일그러졌어도 너무 슬퍼도 인간은 살아간다.”,

다소 낙관적이고 희망이 깃든 문장이 도무지 이입되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이 작품을 대표하는 문장 - “다 잘 됐다는 마음이 들었어. 모든 것이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고

각자 자신이 선택한 자리에서 원하는대로 살다가 죽었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거야.” - 역시

같은 맥락에서 좀처럼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 번역가 양윤옥은 모든 관계의 끈을 놓쳤거나 놓아버린 사람이 깊은 상처를 긍정하고

그 속을 마음대로 훨훨 걸어간 이야기다.”라고 요약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역시 긍정마음대로 훨훨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마치 혐오스런 마츠코의 일생이란 일본 드라마를 본 뒤의 안타까움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재미없다는 뜻도 아니고, 읽기 힘든 소설이란 뜻도 아닙니다.

오히려 재미면에서만 보자면 정반대로 사쿠라기 시노의 여느 작품보다 뛰어납니다.

전작들이 소도시 구시로를 뒤엎은 안개 속 풍경처럼 애잔하고 먹먹한 느낌을 전해줬다면,

별이 총총은 캐릭터나 스토리 모두 통속적이거나 사건성이 강한 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지, 지하루의 삶을 지켜보는 와중에 너무 심난한 여운을 느낀 나머지

긍정희망이란 정리와 해석이 마음에 안 들어서 이런 불평을 늘어놓은 것 같습니다.

 

매번 신작 소식이 들릴 때마다 가슴이 설레는 작가 중 한 명이 사쿠라기 시노입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 아직 못 읽은 작품이 두 편 남아있지만,

아까워서 나중에 먹어야지, 하는 특별한 음식처럼 마냥 뒤로만 미뤄두고 있습니다.

그런데, ‘옮긴이의 말을 보니 201812월에 일본에서 빛까지 5이란 신작이 나왔고,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다른 곳도 아닌 무려(!) 오키나와가 배경이란 소식이었습니다.

무슨 사연에선지 삿포로에서 오키나와로 옮겨간 인물의 이야기라는데,

과연 훗카이도를 벗어난 사쿠라기 시노의 문장이 어떤 을 발할지 너무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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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곡
윤재성 지음 / 새움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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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찰 시험을 준비하던 형진은 늦은 밤 집 앞에서 수상한 사내와 마주친다.

사내는 갑자기 형진에게 불을 뿜고, 형진 가족이 살던 원룸 건물까지 송두리째 태워버린다.

흉측한 몰골이 된 채 가까스로 살아남은 형진은 경찰과 언론에 도움을 요청하지만,

누구 하나 입에서 불을 뿜는방화범의 존재를 믿어주지 않는다.

결국 형진은 화상을 입은 몸으로 노숙 생활을 전전하며 홀로 범인을 뒤쫓는 신세가 된다.

그리고 8년이 지난 후, 진실 찾기를 돕겠다는 기자 김정혜와 함께

정체불명의 방화범은 물론 악랄한 모방범을 잡기 위한 사투에 돌입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한국에서는 보기 드문 방화범을 소재로 한 스릴러 작품입니다.

멀쩡한 청년이 졸지에 방화로 인해 집과 동생을 잃고 괴물 같은 화상 자국만 얻게 됐는데,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 진실을 찾기 위해 홀로 고통스런 시간을 보낸 끝에

8년 만에 진범의 단서를 잡아내곤 목숨을 건 싸움을 벌인다는 이야기입니다.

 

주인공 형진은 방화사건 이후 극과 극의 삶을 살아갑니다.

애초 주민의 실화로 판정된데다 경찰과 언론 모두 자신의 진술을 허황된 거짓으로만 여기자

형진은 스스로 소방관이 되어 방화범을 찾을 생각도 하지만 번번이 고배를 마시곤 합니다.

자신을 벼랑 끝으로만 몰아세우는 세상에 대해 증오심을 키우던 형진은

스스로 방화범이 되어 세상에게 복수하고픈 유혹을 강렬히 느끼기도 합니다.

그런 형진에게 협업을 제안한 건 한때 잘 나갔던 기자 김정혜입니다.

형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분명 특종을 따낼 수 있을 것으로 보였고,

그건 곧 바닥까지 추락한 기자로서의 위상을 복구시켜줄 무기가 될 거라 믿었기 때문입니다.

 

한편, 형진에겐 상대해야 할 두 명의 악당이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삶을 박살낸 방화범이고, 또 하나는 방화범 못잖게 끔직한 모방범입니다.

방화범이 일련의 목표물을 설정하고 완벽한 준비를 통해 참사를 일으킨다면,

모방범은 그야말로 제멋대로 서울 시내 곳곳에서 불쇼를 벌이고 다닙니다.

그 외에 형진과 동고동락했던 노숙자들과 형진의 형 형문이 중요한 조연으로 등장합니다.

특히 형문은 철든 이후 단 한 번도 형진을 사람 취급한 적이 없는 것은 물론

방화사건 이후 거의 의절한 채 홀로 법조인으로 성공의 길을 간 인물입니다.

그런 형문에게 괴물 같은 형상을 한데다 방화범으로까지 몰린 동생 형진은

말 그대로 호적에서 파내서라도 지워버리고 싶은존재입니다.

 

벼랑 끝까지 몰린 주인공이 조력자들과 함께 갖은 고난 끝에 악당을 응징한다는 설정은

가장 일반적이고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가장 힘이 있는 서사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인물이든 사건이든 반전이든 뭔가 한 가지 신선한 설정만 있다면

어느 정도는 독자의 흥미나 만족감을 이끌어낼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게 다소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오직 하나, ‘개연성의 부족때문입니다.

, ‘그럴 듯 해보여야 하는 대목들에서 전혀 혹은 다소 그럴 듯 해보이지 않았다는 얘긴데,

이 작품에는 가장 중요한 변곡점마다 ?’라는 의문이 들게 할 정도의 허술함이 엿보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언급은 하지 않겠지만 몇 가지만 두루뭉술하게라도 뽑아보면...

철근까지 녹일 정도의 특별한 물질을 사용한 방화의 흔적이 있을 텐데

왜 경찰과 소방당국은 형진이 살던 원룸 건물의 화재를 주민의 실화로 단정했을까?

왜 모 방송사는 누구도 믿지 않는 형진을 소재로 개국 기념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을까?

아무리 특종이 간절해도 왜 정혜는 아무도 믿지 않는 형진을 특종의 계기로 선택했을까?

방화사건을 이용하여 낮은 지지율을 끌어올리고 서울시장 자리를 노리겠다는 정치인 설정은

과연 2019년이라는 시점에 어느 정도의 현실감이 있는가?

형진과 동고동락했던 노숙자들과 형진을 인간 이하로 취급하던 잘 나가는 로펌변호사 형이

클라이맥스에서 보여준 갑작스럽고 뜬금없는 모습은 과연 개연성이나 현실감이 있나?

 

꽤 어려운 과정을 거쳐 출간된 작품이라고 출판사도 소개하고 있고,

한국작가에 대한 기본적인 애정 때문에 가능하면 격려의 서평을 하고 싶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허술한 지점에 대한 정확한 지적이 더 약이 될 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분명히 문장 하나하나의 디테일은 힘도 있고 매력도 있지만,

보다 거시적인 부분, 즉 이야기의 설계 과정에서 좀더 현실감을 고민해야 될 것 같고,

특히 스릴러라면 인물과 사건 모두 도구적으로, 작위적으로 설정해선 안 된다는 생각입니다.

소위 글빨이 느껴지는 작가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졌는지도 모를 일입니다.

설계개연성만 탄탄해진다면 얼마든지 다음 작품을 기대해도 좋을 것 같은데,

작가 스스로 이 작품에 대한 다양한 서평을 통해 좀더 강하게 단련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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