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년 봄의 제사 - 무녀주의 살인사건
루추차 지음, 한수희 옮김 / 스핑크스 / 2019년 3월
평점 :
절판


한무제 원년, 옛 초나라 땅 운몽의 관씨 집안을 찾은 장안 호족의 딸이자 무녀 오릉규는

초나라의 대부라 불리던 굴원이 실은 무녀였으며 일생 남장여자였다.”라는 대담한 학설로

한때 초나라 국가 제사를 맡았던 관씨 일가를 발칵 뒤집어놓는다.

안 그래도 제사를 얼마 앞두지 않은 시점이라 오릉규와 관씨 집안 사이에는 긴장감이 맴돈다.

그런데 다음 날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나고 이는 연쇄살인으로 이어지고 만다.

관씨 집안은 천재에 가까운 해박함을 지닌 오릉규에게 사건 조사를 부탁하지만,

관씨 집안의 막내딸이자 오릉규와 사사건건 충돌하던 노신은 오릉규를 범인으로 지목한다.

 

● ● ●

 

기원전 100년 한나라 무제 시절이라는 시대적 배경도 독특하지만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고대 중국의 다양한 시문과 경전, 예법과 문화가

방대한 분량에 걸쳐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물론 기본적으로는 미스터리 작품이지만 다소 낯설고 복잡한 설명들이 곁들여진 탓에

독자에 따라 꽤 골치 아프거나 혼란스러운 책읽기가 될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이런 성향 때문에 중국에서도 현학 기서’ ‘현학 추리서라는 별칭이 붙었다는데,

작가의 전공이 고전문헌학임을 감안하면 어느 정도 이해가 되긴 합니다.

 

이야기를 끌어가는 주요 인물 대부분이 10대 소녀라는 점도 눈에 띄는데,

호족의 딸이지만 장녀란 이유로 결혼도 못하고 무녀가 되어 제사를 주재해야 하는 오릉규,

옛 귀족 집안의 막내딸로 고향인 운몽을 벗어나 본 적 없이 소극적 삶을 살아온 관노신,

하인 신분이지만 주인인 오릉규보다 더 보수적이고 원론적인 가치관을 지닌 소휴,

4년 전 끔찍한 살인사건으로 가족을 잃은 뒤 피폐해진 채 목숨을 이어가는 관약영 등

기원전 100년이라는 시대가 무색할 정도로 버라이어티한 소녀 캐릭터들이 등장합니다.

이들은 무녀, 제사, 권력, 여성의 지위, 살인사건 등 다양한 코드들과 연관돼있는데,

막판에 밝혀지는 각각의 세계관이나 가치관은 캐릭터 이상으로 놀라움을 느끼게 만듭니다.

 

4년의 시차를 두고 관씨 집안에서 벌어진 두 개의 연쇄살인사건이 미스터리의 핵심인데,

기본적으로 오릉규와 관노신이 대립과 협력을 반복하며 진범 찾기에 나서는 구조입니다.

대부분 현장에서 발견된 증거와 단서, 알리바이나 목격담 등에 의존하긴 하지만,

이들의 추론은 비단 물질적인 증거나 단서에 국한되지 않고,

난해한 시문과 경전, 복잡다단한 제사예법과 문화, 무녀의 역할 등

꽤 고차원적이거나 추상적인 관념까지 동원하곤 합니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들의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인데,

안 그래도 복잡한 고대 중국의 명멸의 역사는 물론 각종 시문과 경전까지 끌어들인데다

정확히 어떤 개념인지 알 수 없는 제사무녀가 꽤 중요한 소재로 설정돼있어서

솔직히 말하면 절반도 채 이해하지 못한 채 미스터리만 쫓아다니기 급급했던 게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꽤 중요한 의미를 가진 인물 굴원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다 보니

마치 기초 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고난도의 시험문제를 접한 기분이 들기도 했습니다.

 

밀실에 가까운 상황에서 여러 희생자가 등장하면서 미스터리의 외연이 확대된 건 맞지만,

마지막에 드러난 진실 역시 앞서 언급한 난해한 소재들을 이해 못한 채 페이지를 넘겨왔다면

다소 난감하게 읽힐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왕성한 지식욕을 자랑하기 위한 설정이 아니었다.”고 언급했지만,

역시 당대의 사회와 문화를 제대로 모르고선 제 맛을 만끽하기 쉬운 작품이 아닙니다.

 

중화권 미스터리는 접할 때마다 개성들이 워낙 강해서 무척 인상 깊게 남곤 하는데,

이 작품 역시 전례도 없고 다시 만나보기도 어려울 정도로 독특한 작품입니다.

절반도 이해하지 못한 당대의 역사적 배경에 대해 공부를 한 뒤 다시 읽어본다면

어쩌면 미처 생각지도 못한 지적 즐거움을 맛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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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리적 의심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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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인 사이인 남녀가 모텔에 체크인했다.

얼마 후, 여자는 남자친구가 젤리를 먹다가 목에 걸려 숨을 못 쉰다며 119 신고를 요청한다.

남자는 병원으로 옮겨졌지만 결국 죽었고, 여자에게 거액의 보험금이 지급되었다.

검찰은 계획적인 보험 살인으로 보고 사형을 구형했다.

사건 정황과 법의학자들의 증언을 청취한 부장판사 현민우는 여자의 범행을 확신하지만,

좌우 배석판사들은 합의과정에서 그와는 반대 의견을 내놓으며 이렇게 반박한다.

그것이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을 거친 판결이냐?”...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소위 국민들의 법 감정이란 말을 언론에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습니다.

지은 죄에 비해 터무니없이 적은 형량이 선고됐을 때나

명백히 유죄라고 생각했던 피고인에 대해 무죄 또는 집행유예 등의 판결이 나올 때면

일반인들은 도대체 판사들은 무슨 생각으로 저런 판결을 내렸을까?”라며 공분하고,

언론은 국민들의 법 감정과 거리가 먼 판결입니다.”라는 코멘트를 달곤 합니다.

 

이런 판결이 나오는 이유 중 하나가 이른바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입니다.

요점은 피고가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면 유죄를 선고할 수 없다.”인데

말하자면 거의 100%에 가까운 확실한 증거가 있을 때만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세 명의 판사는 이 원칙에 대해 서로 상이한 입장을 견지합니다.

주인공인 부장판사 현민우는 설령 범인이 아닐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더라도

정황과 추론이 타당하고 설득력이 있다면 충분히 유죄 선고가 가능하다는 입장입니다.

배석판사 정남희는 피고가 명백히 범인으로 보이긴 하지만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유죄를 선고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고,

또 다른 배석판사 민지욱은 합리적 의심이 존재하는 이상

피고는 무죄일 뿐만 아니라 이 사건의 범인이 아니라는 입장입니다.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있는 사건만 존재한다면 판사는 참 편한 직업일 것입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 등장하는 사건은 판사라면 절대 맡고 싶지 않은 골칫덩어리입니다.

사건은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모텔방에서 벌어졌고,

애초 사고로 여겨졌기 때문에 부검 없이 시신이 화장된 뒤였고,

시간도 많이 흘러서 관련자들이나 의사들조차 명확한 기억이 없는데다

무엇보다 피해자의 몸에 살인의 흔적이 있었는지조차 불분명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혼란 때문에 피고인의 유무죄에 대해 혼란을 겪던 부장판사 현민우는

법정에서 피고인이 보인 모습이나 피해자 가족의 진술 등 정서적인 면에 더 끌리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배석판사들과 갈등을 빚게 됩니다.

 

사실, 판사는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특히 100% 확실한 증거와 단서가 없는 이런 사건의 경우는 더 말할 나위도 없겠죠.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누군가에게 떠맡기고 도망치고 싶을 정도로 괴로운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고뇌를 덜어주기 위해 소위 몇 가지 원칙이란 게 만들어졌고,

그 중 하나가 합리적 의심 없는 입증의 원칙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원칙은 경우에 따라 판사에게는 곤란함을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회피의 도구로,

흉악범에게는 극적인 면죄부로 작동할 수 있다는 게 문제입니다.

물론 거꾸로 무고한 피고인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도구이기도 하죠.

결국 이 원칙을 누가 어떻게 휘두르느냐에 따라 한 사람의 인생이 결정된다는 점에서

신의 영역에 들어간 유일한 인간인 판사의 역할은 그만큼 막중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런 주제 때문에 이 작품은 피고는 유죄? 무죄?”, “진범은 따로 있나?” 등의 미스터리 대신

오히려 판사에 가까울 정도로 판사들의 고뇌와 다양한 모습들에 더 집중하고 있습니다.

도진기의 극적인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놀라운 반전들 덕분에 무척 재미있게 읽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다만, 조금은 불친절하거나 납득하기 어려운 엔딩 때문에 아쉬움이 남았는데,

젤리 살인사건을 통해 성장과 변화를 겪은 부장판사 현민우가

에필로그처럼 그려진 재판에서 보인 모습이 무엇을 의미하는 건지 통 이해하기 어려웠고,

마지막에 그가 받은 편지 속 사연(스포일러라 이 정도만^^)은 다소 억지처럼 느껴졌습니다.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가 아닌 현실감 있는 판사의 이야기는 색다른 맛이 있었지만,

아무래도 도진기의 매력은 역시 꼴통(?) 캐릭터와 독한 미스터리의 조합인 게 분명합니다.

꽤 오래 소식이 없는 고진 시리즈진구 시리즈를 올해는 꼭 만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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봉제인형 살인사건 봉제인형 살인사건
다니엘 콜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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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의 아파트에서 서로 다른 여섯 사람의 신체 부위를 꿰매서 이어 붙인 시신이 발견된다.

희생자들의 정체도, 그들의 공통점도 찾아내지 못한 채 수사가 미궁에 빠질 무렵,

런던 경시청의 울프 형사에게 편지 한 통이 전달된다.

그 편지는 또 다른 여섯 명의 이름과 날짜가 적힌 살인예고장.

울프는 희생자들의 신원을 찾으면서 동시에 살인예고장 속 인물들을 보호하려 분투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새로운 희생자만 늘어날 뿐 범인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던 중 작은 단서에서 찾아낸 희생자들 사이의 공통점은 울프를 충격에 빠지게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언뜻 시마다 소지의 점성술 살인사건을 떠오르게 하는 설정입니다.

물론 이야기 자체는 물론 사건의 성격이나 범인의 캐릭터 등 서사는 전혀 다르지만,

여섯 명의 사체를 훼손하여 봉제인형처럼 만든 범인의 광기는

시마다 소지의 작품에서 느낀 으스스함과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인 울프는 본명인 윌리엄 폭스 대신 약칭으로 더 자주 불리는 런던 경시청 형사입니다.

유능한 경찰이긴 하지만 강박증에 가까울 정도로 일에 매몰되는 캐릭터인데,

4년 전에는 자신이 체포한 연쇄 방화살인범이 무죄판결을 받자 법정에서 그를 폭행했고,

그로 인해 정신병원 감금과 강등까지 감내해야 했던 인물입니다.

 

봉제인형 살인사건이 일어나자 울프의 강박증이 또다시 도지기 시작했는데,

무엇보다 봉제인형이 자신이 사는 아파트 맞은 편 건물에서 발견된데다

봉제인형의 손가락이 자신의 아파트를 정확하게 가리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특히 그의 파트너였던 백스터와 풋내기 형사인 에드워즈의 집요한 탐문은

봉제인형이 된 희생자들이 과거 울프가 다뤘던 사건과 연관이 있음을 밝혀내는데,

문제는 그 시점부터 울프 본인마저 용의선상에 오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진범의 정체와 사건의 경위가 모두 밝혀지는 2/3지점까지는 대체로 재미있게 읽힙니다.

봉제인형처럼 끔찍하게 꿰매어진 시체, 그 봉제인형을 구성하는 희생자들의 신원 찾기,

살인예고장 속에 거론된 인물들의 정체와 그들을 놓고 대치하는 범인과 경찰의 대결,

주인공 울프를 둘러싼 런던 경시청 내의 정치적 갈등과 부당한 압력,

그리고 다채로운 경찰 캐릭터에 더해 선정적으로 사건을 보도하는 언론의 행태 등

다소 고전적이면서도 잔혹성과 속도감을 겸비한 설정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별 3개라는 제법 짠 평점을 준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울프라는 주인공이 있지만 정작 그는 잘 보이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 중요한 탐문과 단서는 울프보다 조연들이 더 열심히 다니고 찾아낸다는 얘깁니다.

울프와는 연인인 듯 아닌 듯 애매한 관계에 있는 다혈질 형사 백스터를 비롯

어리바리한 듯 보이지만 나름 집요함과 추리력을 지닌 신참 형사 에드워즈,

울프와 함께 현장을 뛰었던 관리직 시몬스, 정년이 얼마 안 남은 핀레이 등이 그들인데,

그렇다고 올프가 그 시간에 좀더 중요한 미션을 수행하는가 하면, 그것도 아닙니다.

(물론 엔딩을 보면 울프가 왜 그리 안 보였는지 이해가 되지만 그래도 납득하긴 어렵네요.)

 

잘 보이지도 않던 주인공이 갑작스레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서 주인공 역할을 자처하고 나서면

아무래도 그 대목은 가장 중요한 부분임에도 불구하고 억지스럽게 읽힐 가능성이 높은데,

바로 그 점이 짠 평점의 두 번째 이유입니다.

막판에 드러난 봉제인형 살인사건의 실체와 거기에 울프가 연루된 정황에 대한 설명은

아무리 되읽고 다시 생각해봐도 반전을 위한 반전 또는 납득하기 어려운 억지였습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설명은 어렵지만,

미스터리나 스릴러에서 가장 기피해야 할 방식의 클라이맥스와 엔딩이란 느낌이었고,

결국 울프라는 인물을 통해 작가가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는지도 알 수 없었습니다.

 

2016년 런던도서전에서 가장 주목받은 작품이라고 하니 후한 평점을 준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잘 만들어진 캐릭터에 비해 마무리가 허술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알라딘 평균 평점이 별 4개인 걸 보면 재미있게 읽은 독자도 있다는 뜻이니

저의 짠 평점 때문에 미리 실망하지 말고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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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수전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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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에도 시대, 마을 하나가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에 괴멸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집들은 남김없이 파손되었고 사람들은 전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것이다.

게다가 이를 기이하게 여기고 조사하러 간 무사들까지 연락이 두절된 가운데,

화상을 입은 채로 겨우 목숨을 건진 이 마을 소년에 의해 사건의 실마리가 풀린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이 작품의 원제는 황신(荒神)입니다.

네이버에서 한중일 사전을 다 뒤져봐도 나오지 않는 단어인데,

굳이 따지자면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신이라고 할까요?

낯설기도 하고 애매해서 그런지 몰라도 번역 제목은 다소 직설적인 괴수전이 됐는데,

이 작품에는 원제와 번역 제목 그대로 모든 것을 황폐하게 만드는 괴수가 나옵니다.

이 세상에 절대 존재하지 않을 것 같은 흉측한 모습과 극강의 파괴력을 지닌 괴수는

일본 동북지방에서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는 두 마을에 나타나

수많은 인명을 앗은 것은 물론 마을 자체를 초토화시켜버립니다.

 

작가 본인도 인터뷰에서 밝혔지만 이 작품에는 한국영화 괴물이 적잖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개인적으로는 최고의 시리즈 중 하나로 꼽는 영화 에일리언도 자주 떠올랐는데,

이 두 작품은 물론 괴수전에 등장하는 괴물들은 똑같은 출생의 비밀(?)을 지니고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그릇된 탐욕과 악의가 그것입니다.

100여 년 전, 상대를 궤멸하기 위해 주술과 신의 힘을 빌려 괴물을 만든 이들은

자신들의 후대에 이 괴물이 어떤 비극을 만들어낼지 감히 상상도 하지 못했습니다.

괴물은 오로지 인간에 대한 악의로 가득 찬 채 무차별적인 식인과 파괴를 자행하고

서로를 원수처럼 여기던 두 마을을 황폐하게 만듭니다.

물론 괴물을 만든 이들은 혹시라도 벌어질 비극을 막기 위해 마지막 방어선을 준비해놓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인명이 살상되는 참극을 미리 막아낼 순 없었습니다.

 

670여 페이지에 달하는 엄청난 분량에는 괴물과 인간의 대결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인간과 인간의 갈등, 100년 넘게 서로를 원수처럼 여겨온 두 마을의 갈등은

괴물 못잖게 이야기의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설정입니다.

왕래는커녕 살짝 경계만 넘어와도 피비린내 나는 살육을 벌이던 고야마 번과 나가쓰노 번은

괴물의 등장으로 인해 큰 혼란에 빠지지만 서로 협력하기보다는 더 큰 갈등을 빚습니다.

하지만 각 번에서 괴물에 저항하려는 인물들이 등장하고 이들이 우여곡절 끝에 힘을 모으면서

이야기는 극적인 변곡점을 맞이합니다.

거기에 더해 (괴물의 탄생에 개입했던) 가문의 저주를 물려받은 인물들의 비극이 드러나면서

클라이맥스에 도달한 이야기는 한치 앞도 내다보지 못할 정도로 복잡하게 전개됩니다.

 

분량도 어마어마하고 인물이나 서사 역시 쉽게 정리할 수 없는 두께를 자랑하지만

괴수전은 한 번 잡으면 좀처럼 중간에 쉬어가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주술과 신의 힘으로 탄생한 괴물이라는 설정 자체를 못 받아들이는 독자라면 모르겠지만,

설령 그런 취향이라 해도 괴수전황당한 괴물이상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작품이라

한번쯤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아이러니한 점은 미야베 미유키의 근작이자 현대를 배경으로 괴물이 등장하는 비탄의 문

분권된 1~2권 중 1권만 읽고 접었다는 사실입니다.

아무래도 현대에 등장하는 괴물이라면 괴물에일리언처럼 개연성이 필요하다는 생각인데

비탄의 문은 제가 볼 때는 그와는 다소 거리가 먼 순도 높은 판타지 설정이었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주술과 신의 힘으로 탄생한 괴물이라는 설정이 훨씬 더 황당할 수도 있지만,

그런 설정에 빨려 들어간 건 역시 에도 시대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스터리로서의 미덕들(재미와 반전 등)이 다소 편차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미야베 월드 2의 모든 작품들을 애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인데,

시대물의 아날로그 정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미야베 월드 2을 놓치지 않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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맏물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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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들을 보면 오캇피키라는 직책명이 자주 눈에 띄곤 합니다.

작품 속 각주를 그대로 옮기면,

치안을 담당하는 하급 관리인 요리키나 도신 밑에서 범인의 수색, 체포를 맡았던 직책인데,

공식적인 관리가 아니라 민간인으로서의 성격도 강해서 비교적 운신의 폭이 자유롭고,

특히 관할 주민들과 좀더 밀착 가능한 캐릭터라 시대물 미스터리에 단골손님이 된 듯 합니다.

 

주인공 모시치는 혼조 후카가와 일대를 맡고 있으며 일명 에코인의 나리라고도 불리는데,

56세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관할지역에서 벌어지는 대소사에 열정적으로 임하는 인물입니다.

사실 모시치는 시리즈물의 주인공치곤 너무 소탈해서 아쉬운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시치 시리즈첫 편인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나 이 작품 모두

뭔가 대단한 미스터리를 다루는 것도 아니고, 충격적인 반전을 다룬 것도 아닌,

말하자면, 소소한 일상 미스터리나 평범한 사람들의 기구한 사연을 소재로 한 작품들이라

어쩌면 모시치 같은 인물이 훨씬 더 주인공에 잘 어울린다고 할 수도 있습니다.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가 일대에 떠도는 7개의 불가사의를 소재로 삼았다면,

맏물 이야기는 절기(節氣), 음식, 기구한 사연 등이 버무려진 현실적 일상 미스터리입니다.

초봄의 뱅어, 여름의 가다랑어, 가을의 단감 등 다양함 음식들이 이야기 속에 잘 녹아있고,

절기마다 행해지는 전통적인 놀이나 관습들도 미스터리 곳곳에 흥미롭게 배치돼있습니다.

모시치가 마주친 사건들 역시 소소한 해프닝부터 잔혹한 살인사건까지 다양하지만

대부분은 나름 기구하고 불가피한 사연들이 깔려 있어서 안쓰러움을 자아냅니다.

그래서인지 사건을 해결한 모시치가 통쾌해 하거나 한바탕 웃는 일도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돈도, 권력도, 비빌 언덕도 없는 서민들에게 위안이 되고 의지가 되는 모시치는

그 존재 자체만으로도 혼조 후카가와의 수호신 같은 존재입니다.

영웅적인 주인공은 아니지만 모시치는 늘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다 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인지 맏물 이야기는 미스터리로서의 충격적인 재미는 상대적으로 덜 한 편이지만,

모시치라는 인물을 통해 에도 시대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들여다보는 일은

개인적으로는 어지간한 미스터리 읽기보다 훨씬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이 작품에서 모시치 만큼 흥미를 유발하는 세 명의 인물이 있는데,

영험한 능력을 지닌 기도사로 추앙받는(하지만 모시치에겐 영 못마땅한) 10살 소년 니치도,

전직 무사로 추정되지만 지금은 다리 위에서 밤새 유부초밥을 파는 수상쩍은 노점 주인,

그리고 그 노점 주인과 뭔가 특별한 사연이 있어 보이는 폭력배 두목 가쓰조가 그들입니다.

이들은 아홉 편의 단편 대부분에 게스트처럼 잠깐씩만 등장할 뿐이지만,

모시치와 이런저런 인연을 맺으면서 궁금증을 한껏 증폭시킵니다.

 

수록된 작품들은 1994년부터 2003년에 걸쳐 몇몇 잡지를 통해 연재됐다고 하는데,

덕분에 미야베 미유키의 10년에 걸친 성장과 변화를 엿볼 수 있기도 합니다.

다만, “, 이 시리즈는 이렇게 끝나는구나.”라는 제대로 된 마침표 없이

모시치 시리즈가 더는 이어지지 않은 점은 무척 아쉬운 대목입니다.

개인적으로는 모시치를 비롯 흥미유발자인 세 인물에게 제대로 된 엔딩을 부여할 수 있는

멋진 후속작(이왕이면 장편이면 최고겠지만)이 뒤늦게라도 나와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 수록작이 2003년에 발표됐으니 벌써 16년이나 지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시치 시리즈의 멋진 완결을 바라는 건 저만의 기대는 아닐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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