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과 저녁의 범죄 가노 라이타 시리즈 2
후루타 덴 지음, 문지원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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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살 소년 아사히는 피가 섞이지 않은 동생 유히와 함께 아버지의 낡은 차를 타고 전국을 떠돌며 좀도둑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던 중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동보호소에 들어간 두 사람은 다른 집에 입양되며 헤어집니다. 이후 10년 만에 유히와 재회한 아사히는 유히가 꾸민 납치 자작극에 가담하게 되는데, 범행은 계획대로 진행됐지만 뜻밖의 사태에 직면하고 맙니다. 그로부터 8년 후, 가미쿠라에서 엄마가 방치한 어린 남매 중 여동생이 아사하고 오빠가 탈진 상태로 발견되는 사건이 벌어집니다. 가나가와 현경의 가라스마는 체포된 엄마를 취조하지만 그녀의 본명조차 알아내지 못한 채 고전합니다. 남매를 발견했던 파출소 순경 가노 라이타는 수사에 개입할 순 없었지만 관련자들의 언행을 통해 사건의 진상과 이면을 조금씩 눈치 챕니다.

 

단편집 거짓의 봄에 이은 가노 라이타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가노는 미스터리 주인공치곤 독특한 캐릭터를 지녔는데, 그는 가나가와 현경 수사1과에서 자백 전문 가노라는 별명을 얻을 만큼 탁월한 능력자였지만 불의의 사건으로 인해 지금은 가미쿠라 역전 파출소에서 근무하는 46살의 순경입니다. 그는 단서나 증거보다 면대면 대화를 통해 용의자 스스로 무너지게 하거나 자백하게 만드는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거짓의 봄서평에 쓴 내용을 인용하면) 용의자들은 가노의 허허실실 작전에 휘말려 자기도 모르게 진실과 거짓을 반복하다가 어느새 깊은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게 됩니다. 가노는 표정 하나, 땀방울 하나를 통해 진술의 허점을 파악하면서 코너로 몰아가다가 결정적인 한 방으로 용의자를 무너뜨립니다.

 

가노 라이타 시리즈의 또 다른 특징은 도서(倒敍)추리’, 즉 처음부터 범인이 공개되는 것은 물론 시점 자체도 범인 입장에서 전개된다는 점입니다. ‘아침과 저녁의 범죄의 경우 전체가 3인칭 시점이긴 하지만, 1부에서 납치 자작극을 벌인 아사히와 유히의 죄가 2부에서 주인공 가노에 의해 밝혀지는 구조라서 넓은 의미의 도서추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독자로선 주인공이 어떻게 범인의 정체와 사건의 진상을 알아내는가?’에 집중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누가 범인?’이 초점인 일반 미스터리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빈틈없는 설계가 필요한 장르입니다.

 

아침과 저녁의 범죄에는 18년에 걸쳐 세 개의 사건이 등장합니다. 간단하게 요약하면,

2001. 아버지의 죽음으로 아사히와 유히는 서로 다른 인생을 살게 된다. , 아버지의 죽음은 결코 평범하지 않았다.

2011. 우연히 재회한 아사히와 유히는 명문가의 딸인 고1 마쓰마 미오리와 함께 납치 자작극을 실행한다. 자작극은 예상치 못한 재앙에 가까운 사태를 초래한다.

2019. 남매 사건을 담당한 현경 수사1과 가라스마가 막다른 골목에 부딪힌 사이, 파출소 순경인 가노가 남매 사건의 진상은 물론 과거 사건들과의 접점을 포착한다.

 

등장인물도 많고, 이야기도 워낙 복잡한데다 도서추리라는 난이도 높은 형식까지 가미돼있어서 읽는 내내 작가의 필력에 여러 번 감탄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건들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는 클라이맥스와 엔딩에선 많은 복선들이 빠짐없이 회수되는 짜릿함을 맛볼 수 있었고, 등장인물들의 복잡하고 불행했던 과거사들과 현재 사건의 연결점 역시 설득력 있게 그려져서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지곤 했습니다. 그 덕분에 이 작품의 중요한 소재인 아동학대와 가정폭력의 무게감이나 비극성이 더욱 도드라져 보이기도 했습니다.

 

다 읽은 뒤 아쉽게 느껴진 점들이 대부분 주인공 가노와 관련됐다는 건 무척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우선 도서추리의 특성 상 가노의 역할이 선발투수보다는 마무리투수에 가까운 건 당연한 일이지만, 분량과 비중 모두 기대에 못 미친 게 사실입니다. 또한 거짓의 봄에선 용의자를 스스로 무너지게 하거나 자백하게 만드는 가노의 특별한 능력이 일목요연하고 리얼하게 그려졌지만, 이번에는 다소 작위적이거나 비약적으로 느껴지곤 했습니다. “저걸 한눈에 알아봤다고?”라는 의아함과 함께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천재적인 명탐정으로 갑자기 업그레이드 된 듯한 위화감은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점이었습니다.

 

아침과 저녁의 범죄’(2021) 이후 아직까진 일본에서도 시리즈 신작 소식이 없습니다. 가노에 관한 아쉬움이 진하게 남긴 했지만 아침과 저녁의 범죄는 미스터리 자체로는 무척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신작 소식이 들리면 주저하지 않고 찾아 읽을 예정인데, 신작에선 가노의 분량과 비중도 좀 높아지고, 그의 특별한 능력도 의아함이나 위화감 없이 그려지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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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이노키 마음 클리닉
구보 미스미 지음, 이소담 옮김 / 은행나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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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일본소설 가운데 문구점, 도서관, 서점, 카페 등을 무대로 한 힐링 소설이 쏟아지고 있는데, 개인적으론 그다지 좋아하는 장르가 아니라서 기피해온 게 사실입니다.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역시 비슷한 경향의 작품이 분명해 보였지만, 지금껏 한 편도 빼놓지 않고 읽어온 구보 미스미라면 조금은 다른 느낌을 전해주지 않을까, 라는 기대감을 가져보기로 했습니다.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이라는 간판이 없다면 누구도 병원으로 여기지 않을 작은 마당이 있는 2층짜리 단독주택. 이곳을 운영하는 건 시이노키 준과 사오리 부부입니다. 준은 진찰을 담당하는 의사이고, 사오리는 문진과 상담을 맡은 상담사입니다. 부부는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사람들을 진심으로 대하며 그들의 새로운 시작을 위한 치료에 전력을 다합니다. 한편 인근의 찻집 준은 이혼 후 아버지의 찻집을 물려받은 미조구치 준이 운영하는 노포로, 시이노키 부부는 물론 클리닉을 다녀가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입니다. 마음의 병 때문에 힘들어하던 사람들은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과 찻집 준덕분에 치유 이상의 위로와 안식을 얻습니다.

 

우울증, ADHD, 공황장애, 산후우울증, 육아 노이로제 등 갖가지 마음의 병을 앓는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성별이나 나이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언제든지 걸릴 수 있는 것이 마음의 병이지만 요즘 세상에도 그 병에 대해 거리낌 없이 털어놓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여섯 편의 수록작에 등장하는 인물들 역시 자신의 병을 인정하는 데에도,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의 문을 여는 데에도 꽤 큰 각오와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클리닉을 운영하는 시이노키 부부는 결코 신비한 명의가 아닙니다. 필요한 약물을 처방하고 적절한 타이밍에 상담을 해주는 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클리닉을 찾은 사람들은 부부에게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따뜻함과 진정성을 느낍니다. 실은 부부 역시 큰 비극이 남긴 마음의 병으로 오랜 시간 고통스러워했던 이력이 있는데, 바로 그런 이력이 환자들에게 선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작용하는 것입니다. ‘찻집 준의 주인 준도 심각한 공황장애와 노이로제를 겪은 바 있어서 비슷한 처지의 사람들에게 크고 작은 도움을 주곤 합니다.

 

시이노키 부부가 환자들에게 들려준 이야기 가운데 가장 공감이 된 건 피난처로 삼을 사람이나 장소를 찾아둘 것입니다. 각 수록작의 주인공들은 부부의 처방과 상담 덕분에 병세가 완화되지만, 그에 못잖게 친구, 가족, 동료의 응원과 도움을 통해 큰 힘을 얻기도 합니다. 또 찻집, 공원, 거리 등 좋아하는 장소에서 좋은 기운을 얻기도 합니다. 말하자면 내 상태를 솔직히 털어놓을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그곳에 가면 조금이라도 편하게 숨을 쉴 수 있는 장소는 마음의 병에 대처하는 가장 현명하고 확실한 피난처라는 뜻입니다.

 

마음이 지쳤을 때, 도저히 견디지 못할 때, 그때 이 책이 여러분에게 힘이 될지도 몰라요.”라는 작가의 말처럼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소설로 쓰인 마음의 병 처방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또한 마음의 병을 겪어보지 않은 사람도, 또 그 병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을 가까이에서 지켜본 적 없는 사람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이라 힐링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기도 합니다. 덧붙여, 등장인물들의 마음의 병이 치유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 다행이다.”라는 안도감과 함께 눈가가 뜨끈해지는 경험을 여러 차례 겪게 되는데, 덤처럼 따라온 이 감동은 꽤 깊고 오랜 여운을 남겨줍니다.

 

사실 마음의 병은 소설 속 인물들처럼 쉽고 무난하게 완화되거나 치유되지 않습니다. 어쩌면 마음의 병을 지독하게 앓아본 사람이라면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을 두고 거짓말 혹은 터무니없는 판타지라고 비난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저 역시 비슷한 이유로 힐링 소설에 거리를 둬온 게 사실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병이 생겨 작은 돌파구라도 간절하게 찾는 사람에겐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같은 소설이 (약효가 얼마 안 가는 거짓 판타지라 해도) 안정과 위안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여기저기에서 기억해두고 싶은 문장들을 찾아냈는데, 딱 하나만 인용하며 서평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말하자면 제가 시이노키 부부에게 받은 예방을 위한 처방전이라고 할까요?

 

인생은 안 되는 일이 더 많은데 다들 그걸 잘 감추고 있죠. 저는요, 인생은 되는 일이 없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기로 했어요. 그렇게 생각했더니 조금 좋은 일이 생기면 아주 기뻐요.” (p224)

 

 

- 좀 긴 사족으로, 구보 미스미의 작품들에 대해 정리해보면...

일본에선 2023년까지 스물네 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한국에 소개된 구보 미스미의 작품은 시이노키 마음 클리닉까지 여섯 편뿐입니다. 파격적인 성애묘사 때문에 19금 판정을 받은 한심한 나는 하늘을 보았다부터 길 잃은 고래가 있는 저녁’, ‘밤의 팽창’, ‘가만히 손을 보다까지 네 편이 (수위의 차이는 있지만) ()을 코드 삼아 상처투성이 인물들의 이야기를 그렸다면, 최근작인 밤하늘에 별을 뿌리다시이노키 마음 클리닉은 희망과 힐링이라는 (그녀의 초기작들을 좋아했던 저로서는 다소 아쉬울 수밖에 없는)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두 작품 속 인물들은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상처와 상실에 잠식되거나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상태로 등장합니다. 다만 전작들이 상처와 상실과 마음의 병을 구보 미스미 특유의 지독한 후벼 파기를 통해 밑바닥까지 절절하게 그려낸 뒤 아주 작은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방식이었다면, 최근 두 작품은 상대적으로 나이브한 전개를 보이다가 마치 판타지와도 같은 긍정과 낙관의 메시지를 남기는 방식을 취하고 있습니다. 한국 출간작밖에 읽지 못했으니 이런 변화가 추세적인 건지 일시적인 건지 알 수 없지만, 개인적으론 초기 구보 미스미의 지독한 후벼 파기를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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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리플 세븐 킬러 시리즈 3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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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당벌레라는 별명을 가진 나나오는 달리는 신칸센에서 벌어진 킬러들의 살육전(‘마리아비틀’) 속에서 살아남은 뒤 업계에서 전설적인 존재로 회자되고 있지만, 실은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질 정도로 지지리도 운이 없는, 그야말로 머피의 법칙의 산 증인이라 할 수 있는 소심남입니다. 그런 그에게 중개업자 마리아가 아주 쉽고 간단한 임무를 맡깁니다. 호텔 투숙객에게 그림액자 하나를 배달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들러붙은 불운에 치를 떨던 나나오도 이번 임무만큼은 마음 편하게 마칠 수 있으리라 기대했지만, 호텔 20층 객실의 문을 여는 순간 불운은 또다시 나나오에게 큰 시련을 안깁니다. 그리고 그로부터 몇 시간동안 호텔엔 수많은 시체들이 수북이 쌓이고, 나나오는 영문도 모른 채 숱한 죽음의 위기를 겪게 됩니다.

 

시속 200km로 달리는 모리오카 행 신칸센을 시체열차로 만든 전현직 킬러들의 희대의 살육극을 그린 마리아비틀의 후속작이자 킬러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피범벅이 된 열차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아 전설이 된 나나오가 이번에는 그림액자 배달 차 들렀던 고급호텔에서 벌어지는 킬러들의 대결에 휘말립니다. 객실만 제대로 찾아갔다면, 또 로비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만 제대로 탔다면 아무 문제없이 평온한 하루를 보냈겠지만, 불운과 악운의 신이 나나오를 다시 한 번 구렁텅이로 몰아넣었기 때문입니다.

 

외형만 보면 냉혹한 킬러들이 벌이는 피비린내 진동하는 하드코어 액션물 같지만, 이사카 고타로의 킬러 시리즈는 아이러니하게도 코믹한 요소가 훨씬 더 강한 독특한 작품입니다. 나나오의 별명인 무당벌레를 비롯하여 트리플 세븐에는 콜라, 소다, 베개, 담요, 코코 등 특이한 별명과 함께 별난 캐릭터를 지닌 킬러들이 등장합니다. 무자비한 폭탄 전문가였지만 예기치 못한 식중독 사고 후 자기계발서에 빠져든 인물도 있고, 어려서부터 내내 외모지상주의에 억눌렸다가 특별한 계기를 통해 재치 있는 킬러 콤비가 된 여성이나 60대지만 뛰어난 해킹 실력을 지닌 할머니 업자도 있습니다. 그야말로 킬러 같지 않은 킬러들이 종횡무진 활약을 펼친다고 할까요?

물론 이들의 대척점에는 그야말로 전형적인 하드코어 액션물에 어울리는 킬러들도 등장합니다. 바람총을 이용하는 가학적인 6인조, 어깨를 탈구시킨 뒤 잔인한 고문 끝에 사람을 죽이는 킬러, 전신마취 상태의 피해자를 산 채로 해부하는 사이코패스 등이 그들인데, 독자 입장에선 주인공 나나오가 뜻하지 않게 휘말린 이 무시무시한 킬러들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살아남게 될지 웃음과 긴장감을 번갈아 느끼며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마리아비틀이 무작위로 상대를 죽이는 킬러들의 풀 리그 게임이었다면, ‘트리플 세븐은 비교적 적과 아군이 명료하게 구분되는 구도를 지닙니다. 치명적인 비밀번호를 알고 있는 탓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빠진 가미노 유카라는 한 여성을 사이에 두고 나나오 팀‘6인조 팀이 벌이는 살육극이 기본 뼈대입니다. 엉겁결에 가미노의 보호자가 된 나나오가 사방에서 등장하는 킬러들의 틈바구니에서 숱한 사선을 넘나드는 한편 저주와도 같은 불운과도 싸워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리는 장면은 말 그대로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아이러니 그 자체입니다. 마지막 반전에 이르기까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격전이 벌어지는데, 그래선지 360페이지라는, 안 그래도 짧아 보이는 분량이 더 짧게 느껴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사카 고타로의 킬러 시리즈그래스호퍼’ - ‘마리아비틀’ - ‘악스’ - ‘트리플 세븐으로 이어지는데, 재미있는 건 각 작품의 일본 출간연도가 2004, 2010, 2017, 2023년이란 점입니다. 거의 6~7년에 한 편씩 나온 셈인데, 나나오가 주인공을 맡은 마리아비틀트리플 세븐은 내용 상으론 대략 1년 사이에 벌어진 일이지만, 출간연도 기준으로는 무려 13년이란 간격이 있습니다. 조연들의 경우 네 작품에 걸쳐 직접 등장하거나 간접적으로 언급되는 경우도 종종 있어서 마치 불로불사의 존재로 보이기도 하는데, 이 역시 시리즈를 이어 읽다 보면 맛볼 수 있는 소소한 재미이기도 합니다. 물론 이런 설정은 굳이 시대적 배경이나 문명의 발전을 이야기에 녹여 넣을 필요 없는, 순수한 킬러들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킬러 시리즈의 다음 작품이 언제 출간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유쾌한 킬러 이야기가 너무 오랜 공백 없이 독자들을 찾아와주기를 바랄 뿐입니다. 한 가지 더 바람이 있다면 다음 편의 주인공 역시 불운의 화신인 나나오가 맡아줬으면 하는 점인데, ‘마리아비틀트리플 세븐을 뛰어넘는 참신하고 새로운 설정과 함께 제대로 폼 나는 킬러 나나오로 컴백해주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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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전미궁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4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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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도조대학 의학부 3학년 덴마 다이키치는 어느 날 거듭된 불운으로 인해 터무니없는 임무를 맡게 됩니다. 100년이 넘는 역사를 지닌 의료법인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에 자원봉사자로 위장잠입하여 그곳에서 종적을 감춘 한 남자를 찾는 일입니다. 인근의 도조대학병원과 달리 주로 종말기 의료를 담당하고 있던 그곳엔 안 그래도 최근 불온한 소문이 돌고 있어서 덴마를 더욱 긴장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잠입 직후 덴마는 아무리 종말기 의료기관이라곤 해도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상황을 목도하고 충격에 빠집니다. 한편 도조대학에서 파견된 간호사 히메미야의 연이은 실수로 덴마는 자원봉사는커녕 환자신세가 되고 마는데, 그의 치료를 맡은 건 어딘가 수상쩍어 보이는 피부과 의사 시라토리입니다.

 

나전미궁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외전으로, 시리즈 1편인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직후에 출간됐지만 내용상으로는 시리즈 3편인 제너럴 루주의 개선과 연결되는 작품입니다. 따라서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나전미궁의 알맹이를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주인공 덴마의 미션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에서 종적을 감춘 한 남자를 찾는 것이고, 또 하나는 종말기 의료로 유명한 이 병원의 시스템을 조사하는 일입니다. 거듭된 사고로 환자신세가 되고 만 덴마는 어떻게든 미션을 완수하려 애쓰지만 그 전에 보통 병원과는 너무나도 다른 사쿠라노미야 병원의 운영방식과 기이한 캐릭터를 지닌 의료진들 때문에 연이어 큰 충격을 받습니다. 그런 와중에 수상쩍은 간호사 히메미야와 더 수상쩍은 피부과 의사 시라토리를 만난 덴마는 그들에게서 병원의 실체와 의료진의 비밀을 들은 뒤 과연 자신이 이곳에서 살아 돌아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게 됩니다.

 

내용도 복잡한데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물론 주 무대인 헤키스이인 사쿠라노미야 병원 자체가 비범하다 못해 기괴하거나 판타지처럼 설정돼서 보통의 메디컬 미스터리와 달리 쉽게 페이지를 넘기기 어려운 작품입니다. 다만 이 작품의 방점은 종말기 의료의 현실과 폐해에 대한 비판’, 그리고 효율성과 수익만 중시하느라 종말기 의료를 도외시하는 의료계와 정부에 대한 비난에 맞춰져있어서 사회파 서사와 메디컬 미스터리의 조합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흥미를 가질 만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의학이란 원래 출신성분이 형편없는 존재인데도 지금은 귀부인처럼 행세하고 있어. 웃기지도 않지. 의학이란 시체를 먹고 살아온 빌어먹을 학문이야. 그걸 잊지 말게.” (p297)

 

정부와 의료계가 돈에 눈이 멀어 정작 세심하게 보살펴야 할 종말기 의료를 외면하고 있다는 점을 통렬히 비판하는 사쿠라노미야 병원장 이와오의 일갈입니다. 이는 제너럴 루주의 개선에서 주인공 하야미가 적자를 줄이기 위해 돈이 안 되는 구급구명센터, 소아과, 산부인과를 축출하려는 병원 경영진과 충돌하는 이야기와 비슷한 흐름인데, 현직 의사이자 의료개혁 급진론자인 가이도 다케루의 주제의식이 함축적으로 깃든 문장이기도 합니다.

이와오 원장이 마주한 적은 사쿠라노미야 병원을 위성병원 취급하며 종말기 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을 떠넘겨온 도조대학병원과 부조리한 정책으로 대형의료기관의 편의만 봐주는 후생노동성입니다. 그리고 이 전쟁의 선봉에는 이와오 원장의 쌍둥이 딸이자 부원장인 사유리와 스미레가 나섭니다. 서로 판이한 성격인 사유리와 스미레는 시체를 먹고 살아온 빌어먹을 의학의 본질을 지키기 위해 배수의 진을 치고 마지막 결전을 다짐합니다.

 

종말기 의료를 소재로 정부와 의료계를 비판한다는 이야기 자체는 너무나도 구미가 당기지만 나전미궁은 이야기를 너무나도 비틀고 비튼 탓에 재미와 주제의식 모두 작가의 의도만큼 전달되지 않은 아쉬운 작품입니다. 미션의 주인공 덴마는 코미디 캐릭터 이상의 매력을 발휘하지 못했고, 소소한 미스터리 해결 외에는 오히려 방관자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이와오 원장으로 대표되는 사쿠라노미야 병원 사람들 역시 지나치게 희화화 또는 불가사의한 캐릭터로 포장된 탓에 정작 그들의 진심이 뭔지 제대로 그려지지 않았다는 생각입니다. 특히 도조대학병원과 결전을 벌이는 이유도, 굳이 비극적인 결말로 폭주하는 이유도 이해불가 또는 공감불가였는데, 그래선지 평범하더라도 선명하고 현실적인 전개가 아쉽기만 했습니다.

 

名品再讀이라는 이름으로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를 다시 읽었는데, 한국에 마지막으로 소개된 아리아드네의 탄환’(일본출간 기준으로 시리즈 6)은 다시 읽을 계획이 없습니다. 이야기 자체가 실망감이 크기도 했고, 이 시리즈의 미덕에서 많이 벗어나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는 처음 읽었을 때만큼의 긴장과 흥분을 전해주진 못했지만 그래도 역시 명불허전이라는 생각입니다. 출간된 지 한참 된 작품들이긴 하지만 독특한 메디컬 미스터리를 찾는 독자라면 도서관이나 중고서점을 통해서라도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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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너럴 루주의 개선 가이도 다케루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 3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0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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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名品再讀은 오래 전에 읽었지만 서평을 남기지 않았던 작품들을 다시 읽으면서 제가 갖다 붙인 조잡한 타이틀입니다. 대부분 명작으로 기억하던 작품들이지만 다시 읽었을 때의 감흥은 조금씩 달랐습니다.)

 

피를 보기 싫어해서 내과를 선택한 다구치는 병원 내 권력투쟁이나 승진 경쟁이 싫어서 건물 한 구석에 자리한 부정수소외래(不定愁訴外來)에서 환자들의 하소연을 들어주는 한직 중의 한직에 근무 중입니다. 안하무인에 지독한 독설가인 시라토리는 후생노동성의 꽉 막힌 관료 시스템에 반발하다가 한직으로 내쳐졌지만 각종 의료면허는 물론이고 뛰어난 논리력과 추리력까지 갖춘 이른바 로지컬 몬스터입니다. 두 사람은 무수한 충돌을 겪으면서도 묘하게 시너지 효과를 내면서 도조대학 부속병원에서 벌어지는 특이한 사건들을 해결하곤 합니다. (시리즈 2편인 나이팅게일의 침묵서평에 쓴 인물평을 인용했습니다)

 

의사 같지 않은 의사 다구치와 공무원 같지 않은 공무원 시라토리를 앞세운 가이도 다케루의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두 작품들과 달리 이번에는 다구치-시라토리의 콤비 플레이에 기반한 미스터리보다는 일명 제너럴 루주로 불리는 도조대학병원 구명구급센터 부장 하야미를 앞세워 구급의료현장이 처한 가혹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폭로하는 서사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도조대학 부속병원의 오렌지 신관은 건립 당시의 기대와 달리 엄청난 적자만 내는 애물단지가 된 상태입니다. 구급구명센터, 소아과, 산부인과 등 돈이 안 되는 진료과목들이 몰려있는데다 그 수장인 하야미 부장은 천문학적 비용이 드는 닥터 헬리(콥터) 도입을 끊임없이 주장하고 있어서 병원 경영을 더 중시 여기는 자들에겐 눈엣가시나 다름없는 존재입니다. 그러던 와중에 누군가 익명의 투서로 하야미 부장의 리베이트 수뢰혐의를 고발해왔고, 능구렁이 같은 병원장의 꼼수에 넘어간 다구치는 대학동기인 하야미의 혐의를 조사하는 처지에 빠지고 맙니다. 다소 거칠고 독재적이긴 해도 나를 심판할 수 있는 건 환자뿐이다.”라며 순수할 정도로 의료행위에만 골몰해온 하야미의 부정을 도저히 믿을 수 없지만, 다구치는 이번 일을 빌미삼아 어떻게든 하야미를 쫓아내려는 병원 내 세력들과 일전을 불사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연이은 의료사고의 진실을 다룬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소아환자 보호자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사건을 다룬 나이팅게일의 침묵등 도조대학 부속병원을 무대로 한 메디컬 미스터리를 그린 전작들과 달리 제너럴 루주의 개선(억지로 이름을 붙인다면) 사회파 메디컬 소설로 분류할 수 있습니다. 15년 전 대참사 당시 신참 의사였음에도 불구하고 구급구명센터를 지휘하여 이른바 살아있는 전설로 칭송받는 하야미 부장의 수뢰사건을 파헤치는 이야기가 전개되긴 하지만 익명의 투서를 보낸 게 누군지, 하야미 부장이 실제로 부정한 돈을 받은 게 맞는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진짜 알맹이는 구급구명센터가 추구해야 하는 것이 환자의 구명인지 수익 창출인지의 논란, 대학병원임에도 불구하고 열악한 환경에 내몰린 구급구명센터의 현실, 권력투쟁에 골몰하는 의사와 환자에게만 몰두하는 의사 사이의 대립과 충돌, 의료행위에 있어 윤리의 문제, 그리고 진짜 의사가 나아가야 할 길 등 의사 출신인 작가가 세상을 향해 내던진 긴급하고도 절실한 화두들입니다.

 

주인공인 하야미 부장은 여러 면에서 이국종 교수를 떠올리게 하는 인물입니다. 긴급환자 이송을 위한 응급의료 전용헬기라는 공통점도 있는데다 , 이 사람은 진짜 의사구나.”라는 생각을 저절로 들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시리즈 주인공인 다구치와 시라토리의 활약이 상대적으로 축소된 점은 아쉬웠지만, 사회파 메디컬 소설의 미덕이 진하게 녹아있어서 미스터리 서사를 앞세운 전작들보다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습니다. 최근 읽고 있는 신의 카르테 시리즈가 소도시의 지역의료기관을 무대로 선하고 소시민적인 의사의 감동적인 고군분투를 그렸다면 제너럴 루주의 개선은 총탄이 날아다니는 살벌한 전쟁터 같은 구급구명센터를 이끄는 피투성이 장군하야미 부장의 혈투를 그리고 있어서 차별화된 재미를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제너럴 루주의 개선과 전작인 나이팅게일의 침묵은 같은 시간대를 배경으로 이야기가 흘러갑니다. 말하자면 다구치와 시라토리가 두 사건을 동시에 해결하느라 분주하게 뛰어다녔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순서대로 두 작품을 읽어야 이야기의 맥락도 쉽게 이해할 수 있고, 감흥도 더 진하게 느낄 수 있습니다.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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