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러디 프로젝트 - 로더릭 맥레이 사건 문서
그레임 맥레이 버넷 지음, 조영학 옮김 / 열린책들 / 2019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꽤 잔혹한 이야기를 다룬 것 같은 분위기의 제목과 달리

블러디 프로젝트는 살인사건을 다룬 소설이면서도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로더릭 맥레이 사건 문서라는 부제 역시 이 작품의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1869년 스코틀랜드의 한 소작지에서 벌어진 참혹한 살인사건이 메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목격자들의 진술, 범인 스스로 범행을 자술한 비망록, 범죄인류학자의 정신감정 보고서,

그리고 검사와 변호사의 공방과 증인들의 증언을 담은 재판일지 등으로 구성돼있어서

비밀과 추리와 반전이 생명이라 할 수 있는 범죄소설로 보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번역하신 조영학 님도 옮긴이의 말에서,

곧바로 범인이 자수하며, 범인이 바뀔 정도의 갈등이나 반전은 어디에도 없는 듯했다.

처음 번역 작업을 한 후 당황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 왜 이렇게 밋밋하지?’”, 라며

이 작품에 대한 첫인상을 서술할 정도였습니다.

 

지주와 마름과 소작인이라는 계급이 존재하던 1869년의 스코틀랜드 북부의 작은 마을 컬두이.

아홉 가구에 55명밖에 살지 않는 이 작고 빈곤한 마을에 살던 17살 소년 로더릭 맥레이는

부당한 완장질을 휘두르며 자신의 가족들을 괴롭히던 라클런 매켄지 일가를 살해합니다.

체포 직후 범행을 자인한 그는 변호사의 권유로 사건 관련 이야기를 비망록으로 작성합니다.

한편, 변호사는 맥레이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었음을 입증하려고 애쓰고,

그를 위해 범죄인류학의 권위자까지 초빙하는 등 온갖 노력을 기울입니다.

하지만 정작 맥레이는 재판정에서마저 특별히 선처를 바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습니다.

 

고백하자면, 중반쯤 이르렀을 때 이 작품이 평범한 범죄소설이 아니라는 점 때문에,

, 비밀과 반전과는 무관한 보고서같은 이야기라는 확신이 들면서

몇 번이고 중도 포기할까 고민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묘하게 시선을 끄는 맥레이의 불행한 개인사 때문에 결국 끝까지 읽게 됐는데,

극빈층에 가까운 19세기 말 스코틀랜드 소작농의 비참한 삶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라든가,

지주-마름-소작인으로 이어지는 계급사회의 비정함과 잔혹함,

17살 소년의 소극적이면서도 어찌할 수 없는 욕망 등이 매력적으로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다만, 역시 비밀과 반전이 없는 보고서에 가까운 소설이란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번역하신 조영학 님은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 아니라 범죄에 대한 소설이다.

누가 범인이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왜 범죄를 저질렀으며,

맥레이를 비롯해 어느 증인의 말을 믿을 수 있느냐가 소설의 핵심.”이라고 변호(?)하셨지만,

?’는 그다지 신선하거나 충격적이지 않았고,

누구 말을 믿을 수 있느냐?’ 역시 단선적인 묘사에 그친 탓에

이 작품만의 미덕이 무엇인지 잘 알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작품은 크게 보면 두 개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자신의 성장기와 범행 전후의 정황을 고백한 맥레이의 비망록이고,

또 하나는 맥레이의 정신적 이상을 입증하려는 변호사의 고군분투기입니다.

하지만 범인은 여러 차례에 걸쳐 자신의 범행을 인정하고 있고,

변호사는 범인과 특별한 관계도 아니고 범인의 정신적 이상을 확신하는 것도 아닌데다,

대중들의 시선을 끈 이 사건을 통해 변호사로서 성공하겠다는 욕망을 지닌 것도 아니다 보니

두 개의 이야기가 아무런 접점 없이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밖에 받을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2016년 맨부커상 최종 후보로 지명된 것은 물론

다수의 매체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된 걸 보면 특별한 미덕이 있는 건 분명해 보입니다.

다만, 대중적인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 입장에선

(번역자와 마찬가지로) 다소 당혹스런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꽤 호불호가 갈릴 이 작품에 대해 다른 독자들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무척 궁금한데,

그래서인지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의 서평을 꼭 찾아보고 싶은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8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2019년 독서 목표인 미야베 월드 2막 완전정복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앞선 3작품(‘말하는 검’, ‘흔들리는 바위’, ‘미인’)이 신비한 능력의 소녀 오하쓰 시리즈였다면

이 작품은 혼조 일대를 담당하는 오캇피키인 모시치가 주인공인 작품입니다.

하지만 오하쓰 시리즈와는 달리 모시치는 적극적인 주인공이라기보다는

매 작품마다 설명역또는 차분한 조연정도로만 등장하고 있습니다.

(실제 일본 출간일 기준으로는 이 작품이 미야베 월드 2의 첫 작품입니다.)

 

모두 일곱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현재 도쿄 스미다 구에 해당하는 혼조 일대에 떠돌던 일곱 가지 불가사의를 소재로

무척이나 애잔하고 가슴 아픈 사연들을 미스터리와 함께 녹여내고 있습니다.

미스터리 자체도 그다지 긴박하거나 대단한 반전을 지니지 않았고,

주인공 모시치 역시 (능력자인 건 분명하지만) 그 캐릭터가 예리한 명탐정보다는

마음씨 좋고 정의로운 이웃집 아저씨에 가깝습니다.

그래서인지 매 작품마다 살인, 강도 등 강력사건이 등장함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의 관심은 (후기에 실린 편집자의 말대로)

미스터리보다는 사건을 겪은 사람들의 사연과 안부에 더 집중될 수밖에 없습니다.

 

어릴 적 먹을 것을 적선해줬던 생명의 은인에 대한 흠모와 감사의 마음을 잊지 않는 남자,

어처구니없는 사건으로 남편을 잃은 뒤 하루하루 고통스러운 날들을 보내는 아내,

너무나도 아름다운 새어머니를 흠모했지만 그녀의 과거와 비밀을 알게 된 후 충격에 빠진 딸,

사랑하는 마음이 너무 깊은 나머지 집착과 의심에 이르지만 뒤늦게 진실을 알게 되는 처녀,

어린 딸을 잃은 뒤 서로에게 깊은 상처만 남기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온 부부 등

남녀노소는 물론 빈부의 격차와 상관없이 각자의 지난한 사연들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합니다.

 

거기에 미스터리와 판타지(혼조의 일곱 가지 불가사의)가 끼어들면서

각자의 오랜 사연들은 더 절절하고 애틋하게 현실의 수면 위로 떠오르기 시작합니다.

홀로 밤길을 떠다니는 등롱, 지나는 어부에게 말을 거는 해자, 꺼지지 않는 사방등,

연주자 없이 밤새 울리는 축제 음악 등 모두 일곱 개의 불가사의가 등장하는데,

대단하거나 기괴하진 않아도 이야기 규모에 알맞은 소소한 판타지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미야베 월드 2의 전반적인 느낌이 높은 수위의 미스터리와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시리즈의 포문을 연 이 작품의 분위기는 대체로 차분하고 애잔한 편에 가까운데,

그런 탓에 독자에 따라 좀 간이 덜 된 심심한 느낌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랑, 흠모, 집착, 증오, 회한 등 다양한 감정과 사연들이

소소한 미스터리와 판타지 속에 잘 녹아 있는데다

어수룩해 보이면서도 결정적인 순간마다 기지를 발휘하는 오캇피키 모시치의 캐릭터 덕분에

안 그래도 짧은 단편들이 더 짧고 속도감 있게 읽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 작품으로 미야베 월드 2을 처음 접한 독자라면 다소 실망할지도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 매력적인 시리즈를 성급하게 예단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작품마다 편차는 있지만 에도 시대의 미스터리와 판타지가 절묘하게 그려진,

즉 미미 여사의 진면목이 드러나는 작품이 훨씬 더 많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 경우, 다시 읽은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혼조 후카가와의 기이한 이야기

미야베 월드 2중에도 나름 고유한 미덕이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지만 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인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이규원 옮김 / 북스피어 / 201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미야베 월드 2가운데 신비한 능력을 지닌 소녀 오하쓰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17살의 소녀 오하쓰는 남들은 보거나 듣지 못하는 것을 보고 듣는 영험한 능력을 지녔는데,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뛰어난 사이코메트리라고 할 수 있는 인물입니다.

 

전작인 흔들리는 바위가 시비토쓰키, 즉 시체에 나쁜 영이 깃드는 현상을 소재 삼아,

오랜 원념을 발산하여 끔찍한 살인사건을 일으킨 사령(死靈)의 이야기를 다뤘다면,

미인은 망집에 사로잡힌 잡귀가 일으킨 수수께끼 같은 실종사건을

가미카쿠시(神隠), 불가지한 이유로 사람이 사라지는 현상이란 관점에서 다룹니다.

망집과 원념으로 똘똘 뭉친 사령이 현실의 사람들에게 화를 일으킨다는 점에서는 유사하지만

미인은 제목 그대로 망집과 원념의 근저에 아름다움이라는,

끔찍한 사건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역설적인 가치가 자리 잡고 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오하쓰가 마주친 사건은 아름다운 10대 소녀들의 연이은 실종인데,

그녀들이 사라질 때마다 핏빛 같은 아침놀이 하늘을 뒤덮고

세상 모든 것을 날려버릴 듯한 강한 바람이 몰아쳤다는 진술을 들은 오하쓰는

소녀들의 실종이 납치나 가출 등 현실적인 범죄가 아니라

덴구(天狗, 전설의 요괴) 등에 의한 가미카쿠시라고 확신합니다.

실종된 소녀들이 그 아름다움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원망과 증오를 산 적이 있고,

하나같이 실종 직전 벚꽃이 만발한 숲이 등장하는 악몽을 꾸었으며,

그 꿈속에서 관음보살의 모습을 한 신비한 존재를 본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오하쓰는

자신의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여 소녀들의 실종 당시 상황을 추리하는 것은 물론,

갖은 위험을 무릅쓰고 탐문과 조사를 진행합니다.

그리고, 결국 관음보살의 외형을 띤, 망집에 사로잡힌 끔찍한 원령과 마주치게 됩니다.

 

미인흔들리는 바위에 비해 호러와 판타지 서사가 훨씬 더 강한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현실 속 인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가미카쿠시를 당연한현상으로 여겼고,

그 결과 이승과 저승 사이에 원령이 지배하는 또 다른 세계가 있음을 설정했기 때문입니다.

, 관음보살을 닮은 원령은 오하쓰 외에도 누구나 목격할 수 있는 존재라 현실감이 강했고,

오하쓰의 사건 해결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역할을 고양이가 맡고 있다는 점 등 때문입니다.

물론 가미카쿠시를 역이용한 갈취범이라든가 아편 매매를 일삼는 조직적 범죄 등

현실적인 범죄 수사가 동시에 진행되긴 하지만,

독자의 시선은 역시 호러 판타지를 기반으로 한 인물들과 사건에 주목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天狗風’, 즉 일본의 전승 요괴인 덴구(天狗)가 일으키는 바람이란 뜻인데,

개인적으로는 미인이라는 번역 제목이 훨씬 더 작품과 잘 맞는다는 생각입니다.

아름다움에 대한 비정상적인 집착, 그 집착이 초래한 파멸에 가까운 비극,

그리고 그 비극으로 인해 태어난 원령이 젊고 아름다운 소녀들을 향해 내뿜는 저주 등

작품 전반에 걸쳐 아름다움’, ‘미인’, ‘화려함등이 강조되기 때문인데,

그런 코드들이 공포 서사와 맞닿으면서 이야기의 폭발력이 더욱 커진 느낌이 들었습니다.

 

더불어, 핏빛 아침놀, 가미카쿠시가 이뤄진 화려한 벚나무 숲, 원념이 깃든 화려한 기모노 등

유독 다채롭고 원색에 가까운 색상들에 대한 묘사가 두드러지는데,

그래서인지 이 작품을 애니메이션이나 영화로 제작했다면

정말 시각적으로 화려한 결과물이 나왔을 거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문득 일본 애니메이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이 떠오르기도 했는데,

재미있는 건 그 작품의 원제가 센과 치히로의 가미카쿠시라는 점입니다.

호러라는 점만 제외하면 소재도 화려함도 무척 닮은꼴의 작품처럼 여겨졌습니다.)

 

오하쓰 시리즈는 아쉽게도 이 작품을 끝으로 (현재까지) 더는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무사 집안의 후손이지만 산학(算學)에 빠진 채 오하쓰의 이 된 우쿄노스케도,

오하쓰의 오빠이자 범죄수사를 담당하는 오캇피키인 로쿠조도 더는 만날 수 없어 서운하지만,

언젠가는 오하쓰 시리즈가 다시 한 번 출간되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해보게 됩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별사탕 내리는 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9년 1월
평점 :
절판


2000년대 초반, ‘웨하스 의자’, ‘반짝반짝 빛나는’, ‘울 준비는 되어 있다등 에쿠니 가오리의 그야말로 반짝반짝 빛나는 작품들에 빠져 허우적대기 시작한 이후로 그녀의 신간 소식이 들려오면 이번엔 어떤 사람들의 어떤 관계들이 그려질까?”, , “어떤 형태로 일그러지고 비틀린 출구 없는 감정들이 그려질까?” 기대하곤 했습니다.

별사탕 내리는 밤은 크게 보면 두 자매의 이야기, 좀더 나눠보면 여섯 남녀의 이야기인데, 에쿠니 가오리의 그 어느 작품들보다 파격적이고 센 설정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늘 그렇듯 에쿠니 가오리는 간결하고 평범한 문장들로 그 독한 설정들을 직조했는데, 덕분에 역설적으로 사랑, 욕망, 회한, 질투 등 다양한 감정 덩어리들의 폭발력은 더 강력했고 다 읽은 뒤의 여운 역시 아주 긴 꼬리를 물고 기억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사와코와 미카엘라는 아르헨티나의 일본인 거주지에서 태어나고 자란 자매입니다. 어릴 적부터 남자마저 공유할 정도로 일심동체 같던 그녀들이었지만, 일본 유학 중 알게 된 남자 다쓰야 때문에 갈라섭니다. ‘다쓰야의 공유를 거부한 사와코가 그와 결혼 후 일본에 자리 잡은 반면, 두 사람에게 분노한 미카엘라는 스무 살의 나이에 임신한 채로 아르헨티나로 돌아갑니다.

결혼 10년이 된 해, 사와코는 연극 같았던 삶을 정리합니다. 다쓰야에게 이혼을 통보하곤 아내와 아들을 버린 남자 다부치와 함께 아르헨티나로 떠납니다. 사와코를 찾아 아르헨티나에 온 다쓰야는 처제인 미카엘라의 도움을 받아 사와코를 만나지만 예상치 못한 사와코의 반응에 혼란을 느낍니다. 더불어, 여전히 자신을 형부 이상의 존재로 여기는 미카엘라로부터 상상도 못했던 비밀 이야기를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에쿠니 가오리가 그리는 상식 밖의 인물과 감정들을 비현실적이라 여기거나 심지어는 아주 불쾌하게 여기는 독자를 종종 목격한 적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현실 속에는 그런 인물과 감정들이 훨씬 더 많이 존재한다고, 그래서 그녀의 작품이 리얼하고, 애틋하고, 가슴 한쪽을 콕콕 찌르는 힘을 가졌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현실에는 사와코, 미카엘라, 다쓰야 같은 인물들이 더 많을지도 모르고, 그들이 품고 있는 감정들 역시 너무나 내밀한 나머지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 실은 많은 사람들이 닮거나 엇비슷한 형태로라도 품어봤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내가 만일 사와코라면, 미카엘라라면, 다쓰야라면...” 이런 식으로 인물 하나하나에 깊숙이 이입하다 보면, 객관적으로 봤을 때는 크든 작든 위화감이 들던 감정들이 점차 익숙해지거나 내 것처럼 자연스럽게 느껴지기 시작하고, 그들이 한 어떤 행동들도 쉽사리 비난하거나 틀리다고 말할 수 없음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캐릭터마다 이입의 깊이나 농도는 전혀 다르지만, 결국엔 마음이 하는 일이란 타인은 물론 자신도 통제하기 힘들기에,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안쓰럽고 애틋하게 여겨지는 것 역시 사실입니다.

 

다만, ‘별사탕 내리는 밤리얼+애틋+공감이란 기준에서 그녀의 초기 수작들과 비교하면 다소 아쉬움이 느껴지는 작품이라는 게 솔직한 소감입니다. 여기저기서 옅긴 해도 인공미가 느껴진다고 할까요? 애초 하나였던 몸과 마음을 정확하게 반으로 나눠놓은 듯한 두 자매의 캐릭터, 지극히 쿨하고 현실적인 것 같으면서도 어딘가 판타지 속 남주 캐릭터 같던 다쓰야와 다부치, 그리고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계된 듯한 미카엘라의 10대 딸 아젤렌과 50대 파쿤도의 불륜은 초기 수작들 속의 소름 돋을 듯한 리얼리티에는 못 미쳐 보였기 때문입니다.

 

한동안 에쿠니 가오리의 작품에서 동어반복, 자기복제가 느껴진 탓에 꽤 오랜 공백을 뒀는데 이 작품 역시 완전히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어도 그녀의 전공을 오랜만에 제대로 맛본 느낌이라 대체로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읽는 동안 문득문득 그녀의 초기 수작들을 다시 읽어보고 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인공미라곤 찾아볼 수 없던, 갑작스레 울컥하게 만들곤 했던 그 작품들이 오랜 시간이 지난 지금에 와서는 어떤 느낌을 줄지 사뭇 궁금해집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살인의 방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3
다니자키 준이치로 외 지음, 김효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9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초창기 추리소설을 맛볼 수 있는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가운데 세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단발머리 소녀를 무척 흥미롭게 읽어서 연이어 찾게 됐는데,

이 작품은 다이쇼 시대, 그러니까 20세기 초반에 집필된 아홉 편의 단편을 수록했습니다.

특히 탐미주의와 그로테스크한 문체로 유명한 다니자키 준이치로와

일본의 유명한 문학상인 아쿠타가와 상을 낳게 한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 작품이 수록돼서

호기심과 기대감이 전작에 비해 남달랐던 것이 사실입니다.

 

표제작인 다니자키 준이치로의 살인의 방100여 페이지 분량이고,

나머지 여덟 작품은 엽편이라고 해도 될 만큼 짧은 20~30페이지 분량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꽤 다양한 주제와 소재를 나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습니다.

괴담의 분위기와 미스터리가 잘 조합된 살인의 방’,

우연과 필연의 아이러니를 속사포 같은 대화로 풀어가는 길 위에서’,

다분히 신파적인 설정이지만 목숨을 건 사랑에 대해 논하고 있는 개화의 살인’,

대지진의 참극 속에 벌어진 끔찍한 살인에 대한 윤리적 판단을 묻는 의혹’,

(영화 라쇼몽을 떠올리게 하는) 살인사건에 대한 제각각의 관점을 서술한 덤불 속’,

그리고 피해자 유족의 고통, 국가의 느슨한 사법체계에 대한 고발을 다룬 어떤 항의서

현대 일본 미스터리의 맹아기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다채로운 작품들이 수록돼있습니다.

 

출판사 소개에 따르면 이번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은

순문학 문단에서 작가적 지위를 확보하였던 작가들이면서

동시에 탐정소설 중흥의 원조로 평가받는 작가들의 추리소설이라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출판사의 이런 소개글과 함께

탐미주의 소설인 미친 사랑’, ‘열쇠등으로 만났던 다니자키 준이치로라든가

순문학 작가로 알고 있는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등이 포함된 필진을 보곤

미스터리 서사에 대한 기대감이 상대적으로 크지 않았던 게 사실인데,

전작인 단발머리 소녀와 비교해보면 오히려 더 만족감이 높았다는 생각입니다.

 

100여년 전에 집필된 작품들이다 보니 요즘 눈높이로 보면 단순하고 직설적일 수밖에 없지만

본격적인 추리소설 시대가 열리기 직전의 여명기를 장식한 작품들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그만의 미덕과 가치는 물론 거칠지만 그래서 더 특별한 맛을 지닌 작품들이라는 생각입니다.

, 작품마다 편차도 다소 있었고, 좀더 세련된 작품이 수록됐더라면, 하는 아쉬움도 있었지만

좀처럼 만나보기 힘든 희귀한 작가와 작품들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도 했습니다.

 

이 작품을 읽는 동안 문득 한국 추리소설의 태동기가 궁금해졌고,

이 시리즈처럼 그 태동기의 작품들을 선별한 시리즈가 나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완성도나 서사의 밀도와 무관하게 태동기의 작품만이 갖는 특별함이 있을 것 같고,

한국 추리소설의 토대를 이룬 작가들의 면면도 무척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상업적으로는 성사되기 쉽지 않겠지만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 아닐까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