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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폭조항 ㅣ LL 시리즈
쓰키무라 료에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평점 :
절판
항구에서 발생한 살인과 기갑병장 밀수 사건을 조사하던 경시청 특수부는
북아일랜드 테러 조직이 연루됐음을 포착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수사중지 명령이 떨어진다.
한편 특수부에 소속된 외인 용병이자 조국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라이저 라드너의 앞에
그녀의 옛 동료이자 북아일랜드의 거물 테러리스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 영국 고위관료를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 외에 두 개의 감춰진 목적이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라이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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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2월에 출간된 ‘기룡경찰’의 후속작입니다.
시간적 배경은 근접 전투에 맞게 개발된 2족 보행형 병기인 기갑병장이 발달한 근미래이며,
주인공들이 몸담은 경시청 특수부는 신형 기갑병장인 세 기의 ‘드래군’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드래군’을 조종하는 역할은 프리랜서 용병, 전직 모스크바 경찰, 전직 테러리스트 등
어딘가 수상쩍은, 하지만 엄청난 계약금을 받은 ‘이상한 인간’들이 맡고 있습니다.
파격적인 조치에 의해 꾸려진 팀인데다 최신형 기갑병장까지 보유하고 있는 특수부지만
경찰 조직 안에서의 위상은 전혀 딴판입니다.
어딜 가나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 그곳으로의 발령 자체를 좌천으로 여깁니다.
특수부를 이렇듯 왕따로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세 명의 정체불명의 용병 때문이지만
그에 못잖게 특수부의 수장을 맡고 있는 오키쓰 부장의 존재도 한몫 거듭니다.
경찰 출신이 아닌 전직 외무성 관료이기에 당연히 경찰이 동료로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직을 장악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데,
그런 점이 오히려 안 그래도 밉상인 특수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대략 이런 배경 하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번 작품의 핵심 사건은 IRF, 즉 북아일랜드 테러조직의 영국 고위관료 암살입니다.
특수부 입장에서 이 사건이 더욱 특별하고 위험하게 보인 것은
세 용병 중 한 명인 라이저 라드너가 바로 IRF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IRF의 리더인 킬리언 퀸은 영국 고위관료 암살이라는 첫 번째 목적과 함께
조국과 조직을 배신한 라이저를 처단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힙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전체 분량 중 약 1/3이 라이저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됩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갈등과 피의 역사가 서술되고,
대대로 ‘배신자’로 비난받아온 라이저 집안의 이야기가 제법 장황하게 설명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킬리언 퀸에 의해 킬러로 성장했는지,
또, 왜 그녀가 킬리언 퀸과 IRF를 배신했는지 등이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한편,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키쓰 부장의 수완 덕분에 수사에 참여하게 된 특수부는
IRF의 테러에 중국이 개입된 사실을 눈치 채곤 그쪽으로 수사력을 집중합니다.
하지만 IRF와 중국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던 특수부는
막판에 이르러서야 IRF의 ‘세 번째 목적’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기갑병장이 등장하는 근미래의 배경에 일본에서 벌어지는 국제적 테러까지 동원된 탓에
이야기의 스케일도 꽤 크고, 구성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다단합니다.
거기에 평범한 소녀에서 사신(死神)이란 별명의 잔혹한 테러리스트로 성장했다가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조직을 등지게 된 라이저 라드너의 일대기까지 포함돼서
경찰 조직 내의 갈등과 충돌에 중점을 둔 전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작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기룡경찰’ 서평에서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 또는 사사키 조가 집필한
‘신세기 에반게리온’ 또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초기 버전”이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그만큼 특수부와 경찰의 갈등, 특수부 내 경찰과 용병의 갈등이 매력적으로 그려졌고,
기갑병장을 이용한 테러에 대처하는 방식 역시 근미래라는 배경이 전혀 낯설지 않을 정도로
무척 사실적이고 공감을 얻게끔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자폭조항’은 뭐랄까, 겉포장 또는 스케일에 너무 집착했다고 할까요?
美日의 갈등, 영국의 특사, 세계적 테러조직 IRF, 중국 측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등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방대한 설정이 깔려있는데,
더 문제는 그 방대함을 제대로 독자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특수부의 주된 수사 목표가 내내 중국 측에 쏠려있는데
이 대목은 전작을 읽은 입장에서도 통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또, 이 수사를 놓고 특수부와 경찰, 특수부와 정부 부처가 여러 차례 정치적 거래를 하는데
뭔가 선문답 같은 이야기가 오가긴 하지만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난감했습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1/3씩이나 차지한 라이저의 스토리인데,
과연 그만한 분량과 깊이를 차지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주인공이 라이저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덧붙여, ‘자폭조항’이라는 제목이 라이저에 초점이 맞춰진 건 거의 막판에야 알게 됐지만,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 뜻을 알고 나면 무척 매력적인 제목이란 느낌이 들지만
그러려면 애초 이 작품의 핵심 스토리가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결과적으로, 주인공과 제목이 작품의 주된 내용과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기룡경찰’을 재미있게 읽어서, 또 말미에 ‘경찰 내부의 적은 누구인가?’가 숙제로 던져져서
당연히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제법 컸던 게 사실입니다.
아마 이 작품을 먼저 읽은 독자라면 다소 혼란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는데,
오키쓰 부장이나 세 용병에 관심이 생겼다면 ‘기룡경찰’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다음 작품에서는 첫 작품 때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