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기억 못하겠지만 아르테 미스터리 1
후지마루 지음, 김은모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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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등학생 사쿠라 신지는 동급생 하나모리 유키에게서 사신(死神)’ 아르바이트를 제안받는다.

사신은 미련이 남아 이 세상을 떠나지 못하는 사자(死者)’와 교류하며

그의 소원을 들어주거나 미련을 해소하게 해준 뒤 저세상으로 보내주는 일을 한다.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에 사쿠라는 사이비종교가 아닐까 의심을 품지만

당장 급한 목돈과 함께 근무기간을 채우면 소원을 들어준다는 말에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초기작 원더풀 라이프라든가 이사카 고타로의 사신 치바처럼

삶과 죽음 사이에 존재하는 시공간 또는 그것을 관장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 덕에 원제가 시급 300엔의 사신인 이 작품이 무슨 이야기를 풀어낼지,

사신 아르바이트를 하게 된 남자와 그를 스카웃(?)한 여자는 어떤 존재일지 꽤 궁금했습니다.

 

사신인 사쿠라와 하나모리는 어딘가에서 내려오는 지시를 받고 배정된 사자를 만납니다.

명분은 남은 미련을 해소할 수 있게 도와준 뒤 편안한 마음으로 저세상으로 보내준다지만,

그들이 맡은 사자들 대부분은 쉽게 해소되기 힘든 미련 또는 어두운 사연을 갖고 있습니다.

심지어 자신을 맡은 사신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사쿠라와 하나모리는 때론 어두운 사연의 이면을 캐는 탐정 역할을 할 때도 있고,

때론 사자들의 고백을 이끌어내기 위해 그들의 삶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깊은 상처를 갖고 있는 사쿠라는 사자들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스스로 위로하고 치유하며 조금씩 성장해갑니다.

 

설정 자체는 흥미롭습니다.

사자들은 유령이나 귀신이 아니라 육체를 갖고 죽음 전의 일상을 멀쩡히(?) 유지합니다.

말하자면 그들은 그들 고유의 평행세계 속에서 소위 추가시간을 보낸다는 뜻입니다.

덧붙이면, 현실세계에서는 자신이 죽은 뒤의 일상이 흐르고 있지만,

자신만의 평행세계 속 추가시간 안에서는 죽음 이전의 일상이 그대로 유지되는데

문제는, 추가시간이 끝나고(미련이 해소되고) 저세상으로 떠나고 나면

그 추가시간동안 벌어진 모든 일들은 누구의 기억에도 남지 못한 채 소멸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사자를 담당했던 사신들은 그 추가시간의 일들을 기억하고 물건 등의 흔적도 보관하지만

6개월의 아르바이트 기간이 끝나면 사신 본인 역시 그 일들을 모두 잊게 됩니다.

 

꽤 무거울 수 있는 이야기임에도 고등학생인 사쿠라와 하나모리의 좌충우돌 캐릭터 때문에

이야기는 (이 작가의 전공인) 라이트노블에 가까운 통통 튀는 분위기를 유지합니다.

물론 사자들의 사연 대부분이 가족으로 인한 안타깝거나 고통스런 기억이기 때문에,

죽은 자들과의 교류라는 기본 설정 때문에 이야기가 늘 밝고 튀는 것만은 아닙니다.

말하자면 너무 무겁지도, 너무 날아가지도 않는 적절한 균형을 갖추고 있다고 할까요?

 

라이트노블을 좋아하거나 힐링이란 주제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호평을 줄 작품인 건 맞지만,

개인적으로는 장르나 주제에 대한 취향을 떠나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가장 큰 이유는 모호한 판타지 규칙주인공의 감정을 강요하는 작가의 태도인데,

이런 장르에서 가장 중요하고 정교하고 공감을 사야 할 이 요소들이 다소 부족해보였습니다.

사신의 역할과 한계, 평행세계의 존재방식, 저세상으로의 소멸의 계기와 방식 등

판타지 규칙 대부분이 너무 모호해서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던 것은 물론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머릿속에 명확히 정리하기 어려웠습니다.

 

, 주인공 사쿠라를 통해 작가는 속죄, 구원, 기적, 감사, 행복 등 여러 감정을 전달하는데,

그 과정이 자연스럽다기보다 대체로 억지스러워 보이곤 했습니다.

주인공의 감정이란 스스로 말과 행동으로 설명하고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상황 속에서 자연스럽게 독자나 시청자나 관객에게 전달돼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하지만 사쿠라는 사자들과의 만남이 거듭될수록 자주 자신의 감정과 성장을 설명합니다.

사쿠라와 하나모리가 10대 고등학생이란 점을 감안한다고 해도

때로는 감동마저 강요한다는 느낌이 들었던 건 사실입니다.

 

사신이라는 소재를 좋아하는 입장에서 새롭고 신선한 사신을 만난 건 매력적이었지만,

이런저런 아쉬움 때문에 완벽하게 호감을 갖긴 어려웠습니다.

어쩌면 제 감정이 무척 메말랐거나 너무 엄격한 잣대로 판타지를 들여다본 탓일 수도 있으니

사신 이야기나 라이트노블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한번쯤 사쿠라와 하나모리의 이야기에 관심을 가져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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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폭조항 LL 시리즈
쓰키무라 료에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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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항구에서 발생한 살인과 기갑병장 밀수 사건을 조사하던 경시청 특수부는

북아일랜드 테러 조직이 연루됐음을 포착하지만, 납득하기 어려운 수사중지 명령이 떨어진다.

한편 특수부에 소속된 외인 용병이자 조국에서 배신자로 낙인찍힌 라이저 라드너의 앞에

그녀의 옛 동료이자 북아일랜드의 거물 테러리스트들이 모습을 드러낸다.

그들은 표면적으로는 일본을 방문할 예정인 영국 고위관료를 암살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그 외에 두 개의 감춰진 목적이 있었고 그 중 하나는 라이저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201712월에 출간된 기룡경찰의 후속작입니다.

시간적 배경은 근접 전투에 맞게 개발된 2족 보행형 병기인 기갑병장이 발달한 근미래이며,

주인공들이 몸담은 경시청 특수부는 신형 기갑병장인 세 기의 드래군을 보유하고 있는데,

드래군을 조종하는 역할은 프리랜서 용병, 전직 모스크바 경찰, 전직 테러리스트 등

어딘가 수상쩍은, 하지만 엄청난 계약금을 받은 이상한 인간들이 맡고 있습니다.

 

파격적인 조치에 의해 꾸려진 팀인데다 최신형 기갑병장까지 보유하고 있는 특수부지만

경찰 조직 안에서의 위상은 전혀 딴판입니다.

어딜 가나 배신자라는 소리를 듣는 것은 물론 그곳으로의 발령 자체를 좌천으로 여깁니다.

특수부를 이렇듯 왕따로 만든 가장 큰 이유는 세 명의 정체불명의 용병 때문이지만

그에 못잖게 특수부의 수장을 맡고 있는 오키쓰 부장의 존재도 한몫 거듭니다.

경찰 출신이 아닌 전직 외무성 관료이기에 당연히 경찰이 동료로 인정할 리가 없습니다.

하지만 조직을 장악하고 임무를 수행하는 능력만큼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데,

그런 점이 오히려 안 그래도 밉상인 특수부를 더욱 곤란하게 만든 것도 사실입니다.

 

대략 이런 배경 하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번 작품의 핵심 사건은 IRF, 즉 북아일랜드 테러조직의 영국 고위관료 암살입니다.

특수부 입장에서 이 사건이 더욱 특별하고 위험하게 보인 것은

세 용병 중 한 명인 라이저 라드너가 바로 IRF 출신이기 때문입니다.

IRF의 리더인 킬리언 퀸은 영국 고위관료 암살이라는 첫 번째 목적과 함께

조국과 조직을 배신한 라이저를 처단하겠다는 뜻을 공개적으로 밝힙니다.

이런 설정 때문에 전체 분량 중 약 1/3이 라이저의 과거를 설명하기 위해 할애됩니다.

북아일랜드의 오랜 갈등과 피의 역사가 서술되고,

대대로 배신자로 비난받아온 라이저 집안의 이야기가 제법 장황하게 설명됩니다.

그리고 그녀가 어떻게 킬리언 퀸에 의해 킬러로 성장했는지,

, 왜 그녀가 킬리언 퀸과 IRF를 배신했는지 등이 상세하게 묘사됩니다.

 

한편, 갖은 방해에도 불구하고 오키쓰 부장의 수완 덕분에 수사에 참여하게 된 특수부는

IRF의 테러에 중국이 개입된 사실을 눈치 채곤 그쪽으로 수사력을 집중합니다.

하지만 IRF와 중국의 접점을 찾지 못한 채 제자리를 맴돌던 특수부는

막판에 이르러서야 IRF세 번째 목적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기갑병장이 등장하는 근미래의 배경에 일본에서 벌어지는 국제적 테러까지 동원된 탓에

이야기의 스케일도 꽤 크고, 구성은 머리가 아플 정도로 복잡다단합니다.

거기에 평범한 소녀에서 사신(死神)이란 별명의 잔혹한 테러리스트로 성장했다가

비극적 사건으로 인해 조직을 등지게 된 라이저 라드너의 일대기까지 포함돼서

경찰 조직 내의 갈등과 충돌에 중점을 둔 전작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전작에 비해 아쉬움이 많이 남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기룡경찰서평에서 경찰소설의 대가 요코야마 히데오 또는 사사키 조가 집필한

신세기 에반게리온또는 기동경찰 패트레이버의 초기 버전이라고 평한 적이 있는데,

그만큼 특수부와 경찰의 갈등, 특수부 내 경찰과 용병의 갈등이 매력적으로 그려졌고,

기갑병장을 이용한 테러에 대처하는 방식 역시 근미래라는 배경이 전혀 낯설지 않을 정도로

무척 사실적이고 공감을 얻게끔 그려졌기 때문입니다.

 

그에 비해 자폭조항은 뭐랄까, 겉포장 또는 스케일에 너무 집착했다고 할까요?

美日의 갈등, 영국의 특사, 세계적 테러조직 IRF, 중국 측의 심상치 않은 움직임 등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방대한 설정이 깔려있는데,

더 문제는 그 방대함을 제대로 독자에게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특히 주인공이나 다름없는 특수부의 주된 수사 목표가 내내 중국 측에 쏠려있는데

이 대목은 전작을 읽은 입장에서도 통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 이 수사를 놓고 특수부와 경찰, 특수부와 정부 부처가 여러 차례 정치적 거래를 하는데

뭔가 선문답 같은 이야기가 오가긴 하지만 그 실체를 파악하기가 난감했습니다.

 

또 한 가지 아쉬운 점은, 1/3씩이나 차지한 라이저의 스토리인데,

과연 그만한 분량과 깊이를 차지할 필요가 있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의 주인공이 라이저로 보이지 않았다는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덧붙여, ‘자폭조항이라는 제목이 라이저에 초점이 맞춰진 건 거의 막판에야 알게 됐지만,

이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제목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습니다.

그 뜻을 알고 나면 무척 매력적인 제목이란 느낌이 들지만

그러려면 애초 이 작품의 핵심 스토리가 다른 방향에서 접근했어야 했다는 생각입니다.

결과적으로, 주인공과 제목이 작품의 주된 내용과 따로 놀고 있다는 느낌이랄까요?

 

기룡경찰을 재미있게 읽어서, 또 말미에 경찰 내부의 적은 누구인가?’가 숙제로 던져져서

당연히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제법 컸던 게 사실입니다.

아마 이 작품을 먼저 읽은 독자라면 다소 혼란을 느꼈을 것으로 보이는데,

오키쓰 부장이나 세 용병에 관심이 생겼다면 기룡경찰을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아울러 다음 작품에서는 첫 작품 때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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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 수를 죽이고 - 환몽 컬렉션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0
오쓰이치 외 지음, 김선영 옮김, 아다치 히로타카 / 비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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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에는 모두 5명의 필진이 등장합니다.

대표 저자인 오쓰이치 외에 나카타 에이이치, 야마시로 아사코, 에치젠 마타로,

그리고 해설을 맡은 아다치 히로타카가 그들입니다.

그런데 오쓰이치의 팬이라면 다 알겠지만 이들은 모두 같은 사람, 즉 오쓰이치입니다.

실은 저도 엠브리오 기담을 쓴 야마시로 아사코의 이름 외엔 모두 낯설지만,

아무튼 ‘4차원 천재라고 부를만한 오쓰이치의 매력이 담뿍 담긴 작품집입니다.

 

여러 필명이 동시에 등장해서 그런지 작품들 경향도 모두 제각각입니다.

성장기 또는 자전적 느낌이 드는 사랑스러운 원숭이의 일기’, ‘메리 수 죽이기

전형적인 미스터리 작품인 염소자리 친구’, ‘소년 무나카타와 만년필 사건’,

오쓰이치 특유의 괴담 느낌이 강한 어느 인쇄물의 행방’, ‘에바 마리 크로스’,

그리고 동일본대지진을 소재로 한 감동적인 판타지 트랜스시버등이 그것입니다.

 

출판사에서는 이른바 환몽컬렉션이라는 홍보카피를 달았는데,

굳이 따지자면 각 작품마다 크고 작은 환몽이 그려지곤 있지만

혹시나 오쓰이치 특유의 중독성 강한 환몽으로 채워졌다는 편견(?)을 가질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오쓰이치의 필명으로 발표된 작품과 엠브리오 기담도 재미있게 읽은 저로서는

그만의 독특한 환몽이 그려진 작품들을 기대했던 게 사실인데,

살짝 아쉽긴 해도 가지각색의 반찬이 들어있는 맛난 도시락을 먹은 듯 만족스러웠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 작품인 염소자리 친구가 가장 인상적이었는데,

번역하신 김선영 님도 그 작품이 기억에 남았다는 후기를 남기셨습니다.

사람들의 죄를 대신 뒤집어쓴 채 신에게 바쳐졌던 고대 제의 속 염소를 모티브 삼아

학교폭력, 복수, 살인, 우정, 진실 찾기 등 다양한 코드들이 맛깔나게 버무려졌기 때문입니다.

반전과 씁쓸함을 동시에 맛볼 수 있고 소소하지만 결정적인 판타지도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사실, 아직 읽지 않은 채 책장에 방치된 오쓰이치의 작품이 몇 권 있는데,

매번 읽으려 하다가도 다 읽어버리면 아까워서다음 기회로 넘기곤 한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이렇게 신간이 나오면 반가운 마음에 얼른 찾아 읽는 건 참 모순된 일이긴 하죠.

책장 속에 방치된 책 구하기를 올해 목표 중 하나로 설정했으니

올해는 어떻게든 오쓰이치의 작품 한두 편이라도 책장에서 구해줘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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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와 밤
기욤 뮈소 지음, 양영란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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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오래 전 기욤 뮈소의 작품을 처음 접했다가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아 포기한 적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 직후 지인에게 기욤 뮈소 양장본 전집 세트를 선물 받았는데,

첫 만남부터 어그러진 터라 그다지 읽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아

결국 몇 년째 책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2018년에 출간된 장르물 중 놓친 작품들 목록을 정리하다가

어찌 된 일인지 아가씨와 밤이 불쑥 눈에 들어왔고,

큰 기대 없이 언제라도 중도 포기할 생각으로 기욤 뮈소에게 재도전해보기로 결심했습니다.

 

1992, 생텍쥐페리 고등학교에서 벌어진 살인과 실종이 이야기의 출발점이고,

25년 후인 2017년에 개시된 누군가의 복수누군가의 진실 찾기가 이야기의 몸통입니다.

25년 전의 살인에 연루된 토마와 막심은 누군가로부터 복수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성공한 소설가인 토마와 전도유망한 정치인 막심은 누군가를 찾는 것과 동시에

자신들이 미처 몰랐던 그날의 진실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그러던 중 토마는 복수의 메시지를 받은 사람들이 더 있음을 알게 됩니다.

더불어, 25년 전 그날의 진실 가운데 자신이 알고 있는 건 일부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일단 재미있습니다.

미스터리 서사도 탄탄하고, 전쟁 같은 삶을 살아온 여러 인물들의 캐릭터도 매력적인데다,

소위 막장에 가까운 다양한 코드들이 난무해서 끝까지 눈길을 사로잡는 힘이 있습니다.

작품 속에 등장하는 막장 코드를 소개하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라 자세한 언급은 못하지만,

“‘오이디프스 왕에 대해 막장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는 경우는 드물다.”라는 번역자의 말대로

이 작품 역시 인물, 사건, 구성, 개연성 등 여러 토대들이 정교하고 튼튼하게 설정돼있어서

단순한 막장극으로는 보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리스 비극이 품고 있는 원초적인 매력이 더 돋보였다고 할 수 있는데,

25년 전, 치명적인 매력을 발산하며 주위 사람들을 파국으로 이끈 것은 물론

자신도 실종사건의 주인공으로 전락해버린 10대 소녀 빙카 로크웰과

그녀를 숭배하다시피 사모했던, 하지만 그로 인해 자기 손에 피를 묻혔던 주인공 토마는

스스로 파국을 자초하는 인물을 그린 그리스 비극에 딱 어울리는 어린 주인공들이었고,

두 사람 주위의 인물들 친구, 가족, 이웃 역시 비밀과 거짓말을 잔뜩 내재하고 있는

매력적인 조연 역할을 해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꿔서 말하면 무척 통속적인 이야기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원래 기욤 뮈소의 작품이 이런 스타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상보다 강한 통속적 서사에 살짝 놀란 것도 사실입니다.

어쨌든 그만큼 페이지는 잘 넘어가고, 거듭된 반전도 상투적이긴 해도 흥미롭습니다.

다만, 막판에 불꽃놀이처럼 연이어 폭로되는 몇몇 진실은 역시 막장을 떠올리게 했고,

진범은 왜 25년이 지난 후에야 복수를 시작했는가?’에 대한 대답은 다소 억지스러웠습니다.

소개글에 따르면 프랑스에서 드라마로 만들어질 예정이라고 하는데,

아무래도 영상물로 보면 막장성과 억지스러움이 더 배가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작품 덕분에 책장 속의 기욤 뮈소 양장본 전집 세트를 꺼내볼 마음이 생긴 건 사실인데

과연 어떤 작품들이 제게 호평을 얻게 될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첫 만남 때의 실망감을 다시 맛볼 수도 있고,

기욤 뮈소를 완전히 재발견하는 경험을 하게 될 수도 있지만,

아가씨와 밤만 놓고 생각해보면 일단은 약간의 기대감을 가져도 될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을 읽을 생각이라면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은 미리 읽지 말기를 권합니다.

대략의 스토리를 넘어 크고 작은 스포일러를 출판사 스스로 너무 많이 공개했기 때문입니다.

, 어딘가 20세기 냄새를 폴폴 풍기는 표지 디자인도 굉장히 거슬렸는데,

주제도 미덕도 어느 하나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 채 올드한 선정성에만 기댔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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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소녀 일본 추리소설 시리즈 2
오카모토 기도 외 지음, 신주혜 옮김 / 이상미디어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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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접하기 힘든 일본 미스터리의 초창기 작품들이 수록된 단편집입니다.

1889년에서 1930년대 후반 사이에 발표된 작품들이니

출판사 소개대로 일본에 서양 추리소설이 유입된 시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그래서인지 내용이나 형식 모두 꽤 파격적인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이 작품에 앞서 출간된 세 가닥의 머리카락이 시리즈 첫 작품이고,

이후 일본의 패전 직후까지의 추리소설을 담은 작품이 한 편 더 나올 거라고 하는데,

각 작품마다 나름의 테마를 갖고 편집됐다고 하니 기호에 따라 골라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 명의 작가가 발표한 아홉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직접 읽어보진 못했어도 들어본 적은 많은 한시치 체포록의 작가 오카모토 기도는

표제작인 단발머리 소녀를 비롯해 세 편의 작품으로 만날 수 있습니다.

주인공 한시치와 아들 젠파치가 기기묘묘한 사건들을 해결하는 이야기들인데,

얼마 전 읽은 교고쿠 나츠히코의 후 항설백물어()’를 연상시키는 그의 작품들은

미스터리와 괴담이 적절히 뒤섞여서 개인적으로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다섯 편의 작품이 실린 사토 하루오는 처음 들어본 이름이었지만

에도가와 란포가 칭송한 미스터리 작가라고 해서 꽤 놀랐습니다.

미스터리보다는 그로테스크+판타지 스타일이 대부분이었고 대체로 흥미로운 내용이긴 한데

아무래도 딱 떨어지는 엔딩이 아니라 모호하고 기괴한 결말들이 대부분이라

말 그대로 고전으로서의 맛은 느낄 수 있었지만 딱히 호감 가는 스타일은 아니었습니다.

 

한 편밖에 수록되지 않아서 그 스타일을 파악하기 어려웠던 고다 로한은

무성영화의 변사 말투 같은 독특한 문장이 시선을 끌었는데,

미스터리이긴 해도 고전적인 권선징악이라는 주제에 좀더 방점을 찍은 느낌이라

그야말로 전형적인 19세기 작가의 작품이라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접하기 힘든 초창기 일본 추리소설을 편집한 기획 자체는 무척 흥미로웠는데,

개인적으로는 좀더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을 선정했더라면, 하는 바람이 남았습니다.

특히 다섯 편이 수록된 사토 하루오의 경우 꽤 파격적인 서사를 다루는 작가인 건 맞지만

초창기 일본 추리소설을 음미하려던 독자에겐 호불호가 크게 갈릴 것 같습니다.

상대적으로 오카모토 기도의 작품들이 신기한 골동품처럼 재미있게 읽힌 건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거란 생각입니다.

 

이 시리즈의 첫 편인 세 가닥의 머리카락이 번역, 번안 추리소설 위주였고,

이후 출간될 작품이 순문학 작가에 의한 예술적 경향의 탐정소설위주라고 하는데,

희귀한 작품들을 접할 수 있는 기회이니 만큼 관심을 가져보려고 합니다.

가능하다면 이 특별한 기획이 좀더 확장돼서

그 시대의 정통 미스터리에 가까운 작품들을 더 많이 만나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무엇보다 요즘 표현에 맞게 가독성을 중시하며 재번역을 시도했다.”는 출판사 소개글대로

전혀 올드한 티가 나지 않는 깔끔한 번역 덕분에 큰 불편이나 거북함 없이 읽을 수 있었던 건

특별한 기획만큼이나 칭찬해주고 싶은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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