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소리나무가 물었다
조선희 지음 / 네오픽션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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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홉 개의 소리나무를 두드려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인 '그것'을 불러내는 놀이.

15년 전 이 놀이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실종되면서 놀이에 감춰진 무서운 진실이 드러난다.

놀이에서 이기지 못하면, 자신의 얼굴과 자리를 내주고 세상에서 영원히 사라져야 한다는 것.

전통 가옥촌 도동 마을로 진입하는 국도변 갓길에서 빈 택시가 발견된다.

실종자 수사 전담 형사 차강효는 사라진 운전자 정국수의 행적을 추적하다가

그와 관련된 인물들 중 이미 실종자가 여럿임을 알게 되고 이상함을 감지한다.

실종자들이 모두 같은 마을 출신의 친구들이라는 실마리를 따라 도동 마을로 찾아간 그는

15년 전에 마을에서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에 대해 듣게 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발상도 독특하고, 거기에서 확장된 공포 서사 역시 특별함과 신선함이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친구의 죽음을 복수하고 싶은 마음에 악마와의 거래를 받아들인 주인공과 그 친구들이

결국 그 거래로 인해 오랫동안 고통 받던 끝에 참혹한 비극을 맞이하게 되고,

애초 악마와의 거래를 이끌었던 주인공이 더 이상의 비극을 막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지만

오히려 사태는 점점 악화되고 파국은 시시각각 주인공과 친구들을 막장으로 몰아갑니다.

 

아홉 개의 소리나무를 두드려 특별한 힘을 가진 존재인 그것을 불러낸다는 기이한 의식,

그것의 힘을 빌려 친구의 복수에 성공하더라도

이후 그것이 낸 수수께끼를 맞히지 못하거나 누구에게라도 놀이에 대해 언급할 경우

얼굴과 영혼을 빼앗긴 채 흔적도 없이 이 세상에서 사라지게 된다는 끔찍한 벌칙,

그리고, 모든 걸 원점으로 돌리려면 그것을 불러낸 자가 희생해야만 한다는 비극적 설정 등

각종 호러물의 코드들이 뒤범벅된 작품인데,

거기에 실종사건을 수사하는 형사들이 개입한 미스터리 서사도 함께 전개돼서

마지막까지 긴장감과 흥미진진함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사실, 이야기는 방대하고 등장인물도 꽤 많은데다

자칫 잘못 언급하면 대형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서평을 쓰기가 참 난감한 작품인데,

간략하게 말하자면 전설의 고향도시괴담이 적절히 믹스된 호러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2017년에 읽은 전건우의 소용돌이가 자주 떠오르곤 했는데,

어린 시절 주인공과 친구들이 일으킨 특별했던 사건이 결국엔 큰 비극으로 이어졌고,

멈추지 않은 비극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 그들을 다시 고향에 모이게 만들었으며,

업보를 해결하기 위해 분투하지만 큰 상처를 감내해야만 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다소 아쉬운 점도 눈에 띄었는데,

무엇보다 놀이자체에 대한 설명이 때론 모호하고 때론 너무 복잡해서

중반부에 이르기까지 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작가의 의도라는 느낌도 들었지만 결과적으론 몰입도 저하라는 부작용이 더 커보였습니다.

후반부에 등장한 (‘놀이의 규칙과 비밀을 담은) 한 장의 그림은

꽤 중요한 단서이자 일종의 독자에게 내민 퀴즈같은 흥미로운 장치였지만

몇 번을 되읽어도 그 그림이 연상되지 않아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주인공 못잖게 중요한 역할을 맡은 형사 캐릭터도 다소 작위적으로 보여 아쉬웠는데,

하필 그의 주변에도 주인공 친구들처럼 의문의 실종을 당한 사람이 있었고,

그런 탓에 누가 봐도 말이 안 되는연쇄실종사건을 너무 진지하게 받아들인 것은 물론,

비현실적인 존재에 의한 범행이라는 가설까지 큰 갈등 없이 수용하고 있습니다.

 

스토리공모대전에서 수상한 걸 보면 영상화 가능성도 꽤 커 보이는데

개인적으로는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오히려 이해도 쉽고 몰입도도 높을 거란 생각입니다.

호러물을 읽는 건 좋아해도 보는 건 그다지 내키지 않는 취향이지만

그래도 이 작품이 영화로 만들어진다면 관심을 갖고 지켜보고 싶은 게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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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수의 레퀴엠 미코시바 레이지 변호사 시리즈 3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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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작에서) ‘시체배달부라는 별명까지 얻게 만든 어린 시절의 살인 이력이 폭로된 미코시바는 든든한 돈줄이던 기존 고객들을 잃고 폭력조직의 고문 변호사를 하면서 사업을 연명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과거 의료소년원 시절 자신을 속죄의 길로 이끌었던 교관 이나미가 요양병원 보호사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접하곤 큰 충격을 받습니다. 미코시바는 이미 선임된 국선변호사까지 끌어내려가며 이나미의 변호를 맡지만 이나미는 미코시바에게도, 판사에게도 자신의 죄를 제대로 처벌해 달라고만 할 뿐입니다. 미코시바는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그 결과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살인사건 이면의 놀라운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입니다. 주인공 미코시바 레이지는 최강이자 동시에 최악의 변호사라 불리는 인물입니다. 어떤 중범죄를 저질렀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무죄 혹은 집행유예를 받아내는가 하면, 그만큼 힘 있고 부유한 의뢰인만 상대하며 돈을 밝힌다는 풍문을 몰고 다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에겐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살인자의 낙인이 찍혀 있기도 합니다. 소년 시절 저지른 살인사건으로 인해 시체배달부라는 별명을 얻곤 의료소년원에 수감됐고, 그곳에서 교관 이나미 다케오를 만나 속죄의 길을 걸은 끝에 변호사가 되긴 했지만, 전작인 추억의 야상곡에서 맡았던 사건으로 인해 그 과거가 온 천하에 폭로됐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미코시바가 평생의 은인이자 살인범으로 체포된 이나미의 변호를 맡게 된 건 그 자체가 아이러니한 것은 물론 무척이나 비극적인 일입니다. 더더욱 미코시바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계속 처벌을 요구하는 이나미의 태도입니다. 냉정하고 엄격했던 교관 시절의 이나미를 떠올리면 이해 못할 일도 아니지만, 조사를 시작한지 얼마 안 돼 무죄를 선고받을 만한 정황이라고 확신한 미코시바로서는 이나미가 왜 이렇게 처벌과 속죄에 집착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을 뿐입니다. 특히 이나미가 살해한 보호사가 과거 끔찍한 짓을 저지르고도 법망을 피해간 인물인 탓에 미코시바는 소년이라 제대로 벌 받지 않았던자신을 떠올리며 더 큰 혼란에 빠집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화두는 처벌속죄입니다. 법에 의해 심판받지 않은 죄인을 인간이 처벌하거나 심판할 수 있는 것인가? 법에 의해 심판받지 않은 죄인의 속죄란 과연 가능한 것인가? 혹시 가능하다면, 속죄란 어느 정도까지 실천해야 그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 것인가?

 

사실, 법이란 때론 처벌속죄에 관해 그릇된 판단을 내리곤 합니다. 알량한 법조문의 말장난이나 해석의 방법 때문에 살인범이 무죄를 선고받기도 하고, 반대로 정당한 방어나 의로운 행위가 살인 또는 상해로 규정되기도 합니다. 처벌도 피하고 속죄도 거부한 채 살아가다가 이나미에게 살해당한 요양보호사, 살인자였지만 소년이란 이유로 처벌을 피한 뒤 속죄를 거쳐 변호사가 된 미코시바, 미코시바를 속죄의 길로 이끌었지만 그 자신이 살인자가 된 이나미 등 이 작품 속 주요인물들은 처벌속죄라는 어렵고도 무거운 화두를 짊어진 인물들입니다. 그래서인지 마지막 장을 덮고 난 뒤에도 후련함 같은 건 전혀 느낄 수 없고, 오히려 가슴 속에 돌을 하나 얹어놓은 것 같은 무거운 여운만 남게 됩니다.

 

하지만, 이런 엄중한 화두와 여운에 비해 전체적인 설계는 다소 아쉬워 보입니다. 살해된 요양보호사의 과거, 이나미의 불행한 가족사, 살인을 초래한 우연과 운명 등은 분명 극적으로 읽히기도 했고 반전의 맛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동시에 너무 완벽하고 정교하게 짜인 나머지 작위적인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주제를 강조하려는 의도는 알겠지만 그를 위해 리얼리티가 희생된 느낌이랄까요?

 

, 전작에 비해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동요하는 미코시바의 모습도 위화감이 느껴졌고, 과하다 싶을 정도로 처벌을 요구하는 이나미의 태도도 현실감이 떨어져 보였습니다. 이 역시 주제를 위한 의도적 설정으로 보이는데, 오히려 부작용을 낳았다는 생각입니다. 이런저런 탓에 분명 롤러코스터를 타듯 흥분 가득한 책읽기를 경험하고도 다 읽은 뒤에는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무엇이었나?’라는 의문을 떨치지 못했습니다.

 

결론적으로 재미와 아쉬움이 딱 반반씩 느껴진 작품이었는데, 주제에 대한 강박만 없었더라면, 또 인물들이 조금만 더 현실감을 지녔더라면 오히려 작가의 의도가 훨씬 더 강렬하게 독자에게 전달됐을 거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미코시바 레이지의 캐릭터와 나카야마 시치리의 미스터리 서사는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당연히 앞으로 이어질 작품에 대한 기대감도 예전과 달라지진 않았지만, 주제 때문에 너무 많은 걸 희생시킨 일부 사회파 미스터리를 생각해 보면 이 시리즈의 앞으로의 행보가 살짝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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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백한 말
최민호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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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출판사의 소개글은 크든 작든 과장이 들어가기 마련인데

창백한 말의 경우 그런 과장이 전혀 느껴지지 않은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이런저런 수식어가 들어가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고,

결과적으로 다 읽은 뒤의 만족도가 그만큼 높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ZA(Zombie Apocalypse) 문학공모전에서 6회 만에 장편으로서는 처음 당선작에 오른..”

좀비라는 소재와 사회적 메시지를 스릴러 전개 속에 잘 담아낸...”

때로는 사회파 소설을, 때로는 첩보 스릴러를 연상하게 하는 빠르고 강렬한 전개

 

여느 좀비물과 달리 창백한 말의 공간적 배경은 무척 독특합니다.

좀비 바이러스는 이미 26년 전에 출몰했지만 한국에는 여전히 사람들과 시체들이 공존합니다.

사람들은 면역자보유자로 구분되는데,

면역자가 건강한 신체와 사회적 권력을 향유한 채 (서울) 북쪽의 안전지대에서 살아간다면,

보유자는 시체가 되지 않기 위해 매일 바이러스 억제제를 먹어야만 하는 것은 물론

사회적으로도 하층에 위치한 약자들이며 대부분 남쪽과 지방에 살고 있습니다.

남쪽과 북쪽을 가로지른 엄청난 장벽은 1차적으로는 시체들의 공격을 막는 기능을 하지만

실제로는 면역자와 보유자를 갈라놓는 사회적 장벽이기도 합니다.

 

이런 배경 하에 몇몇 인물들이 극적인 사건에 휘말리게 됩니다.

바이러스 억제제를 생산하는 구인제약 하청공장에서 해고된 뒤

생활고로 인해 억제제를 구하지 못한 나머지 딸의 죽음을 지켜봐야만 했던 보유자 김수진,

윗사람의 눈에 들어야만 얻을 수 있는 (시체들의 위협에서 100% 안전한) ‘거주권을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구인제약 하청공장의 사장이자 면역자 진석호,

그리고 구인제약의 비리를 캐던 동생이 불법 시체게임장에서 살해되자

그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백방으로 애를 쓰는 전직 군인 박세영이 그들입니다.

 

딱히 좀비물을 좋아하는 취향은 아니지만 책이든 영화든 좀비를 다룬 작품 가운데

창백한 말만큼 현실감 있게 다가온 작품은 드물었습니다.

좀비가 등장하기만 하면 도시든 국가든 절멸의 운명에 처하는 것으로 그려지곤 했는데

이 작품 속 한국은 나름 시체와 공존하며 균형감(?)있는 체제유지에 성공한 상태입니다.

26년에 걸쳐 다져진 체제는 면역자와 보유자라는 새로운 계급을 탄생시켰고,

장벽 너머에서 시체들에게 무참히 물어뜯긴 보유자들이 새로운 시체로 전락하는 사이

장벽 반대편에서는 천하태평인 면역자들이 문명의 이기를 누리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훌륭한 유전자 덕분에 억제제 없이도 건강한 삶을 보장받은 면역자와

비싼 억제제 없이는 언제라도 바이러스에게 먹힐 수 있는 비참한 신세의 보유자의 격차는

빈부, 의료, 복지, 인권 등 모든 면에서 까마득할 정도로 벌어져있으며,

그 격차는 결국 삶과 죽음을 갈라놓는 단순하고도 명쾌한 기준이 돼버렸습니다.

 

이런 설정은 좀비의 공격 앞에 만인은 평등하다는 공식을 넘어선 특별한 힘을 발산했고,

인물들이 겪는 위기와 고민, 갈등과 협력, 삶과 죽음을

먼 나라 이야기가 아닌 피부에 와 닿는 현실감 충만한 이야기로 만들어줍니다.

얼마 전 본 영화 월드 워 Z’에도 이런 비슷한 상황이 살짝 전개되긴 하지만,

창백한 말의 압도적인 리얼리티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다는 생각입니다.

 

각 인물들이 지닌 리얼리티도 굉장히 생생했는데,

각각 딸과 동생을 잃은 채 구인제약이라는 괴물에 맞서는 김수진이나 박세영도,

자신과 가족들의 안전을 위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진석호도,

또 바이러스가 지배한 세상에서 제정신을 잃고 폭주하는 크고 작은 조연들도

각자 자신만의 정의와 생존을 위해 나름 제대로 분투하고 있어서

단순한 선악 이분법으로만 나눠서 평가할 수 없는 인물들입니다.

물론 대부분의 인물이 평범한 일반인이 아니라 나름 특별한 이력과 과거를 지닌 탓에

다소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긴 하지만 스토리의 힘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중반부에 약간 늘어지는 대목이 있었는데,

더 이상 새로울 게 없는 좀비물의 상투성을 완전히 피하지 못한 탓으로 보입니다.

(1개가 빠진 건 좀비물에 대한 개인적인 취향과 이 대목의 느슨함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클라이맥스를 지나면서 상투성은 사라지고 예상외의 전개가 이뤄지는데

특히 마지막 50페이지는 분노, 동정, 안쓰러움 등 여러 감정을 뒤섞이게 만들면서

영화 월드 워 Z’의 허망하고 억지스런 해피엔딩과는 급이 다른 현실감을 느끼게 만듭니다.

 

적잖은 제작비가 들겠지만 창백한 말이 영상으로 만들어진다면

부산행못잖은 매력을 발휘할 것 같다는 기대를 하게 됩니다.

(전부는 아니라도) 공포 자체에 방점이 찍힌 부산행의 시체들과 달리

창백한 말의 시체들은 묵직한 사회적 메시지까지 함께 던져주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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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드맨 모중석 스릴러 클럽 45
로버트 포비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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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초강력 허리케인 딜런이 다가오는 롱아일랜드의 몬탁.

30여 년간 외면하고 살아온 아버지의 끔찍한 사고 소식을 들은 FBI 특별수사관 제이크 콜은

불편한 마음으로 고향집을 찾았다가 지역보안관으로부터 급한 연락을 받는다.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살해당한 두 구의 시신이 발견됐다는 것.

현장을 찾은 제이크는 오랫동안 잊고 있던 분노를 느낀다.

모든 정황이 어머니가 끔찍하게 살해당한 삼십여 년 전과 너무도 비슷하기 때문.

제이크는 그놈에 대해 살의에 가까운 복수심을 느끼지만,

시간이 갈수록 그놈은 제이크를 놀리듯 주변 사람들을 계속 산 채로 살가죽을 벗겨 죽인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끔찍함 자체를 보여주려는 게 아니다. 독자에게 최대한 강한 충격을 선사하려는 것이다.”

작가인 로버트 포비가 이 작품에 관해 코멘트한 내용입니다.

실제로 이 작품을 읽다 보면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함 때문에 꽤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불과 2~3일 만에 수많은 희생자들이 산 채로 살가죽이 벗겨져 살해당하는데,

역대급 허리케인의 습격이 예고된 소규모 지역에서 연이어 참혹한 사건이 벌어지고

벗겨진 살가죽은 물론 단서라곤 단 하나도 발견되지 않자 지역사회가 패닉에 빠진 것입니다.

 

일단 끔찍함과 충격을 예고한 작가의 의도는 성공한 것으로 보입니다.

전례 없는 엽기적인 살인수법, 도시 기반 자체를 붕괴시킬 것 같은 엄청난 허리케인,

시시각각 주인공인 제이크 콜을 향해 조여드는 듯한 범인의 광폭 행보 등을 통해

작가는 500페이지 가까운 분량 내내 독자를 마음대로 뒤흔들어놓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 희생자가 등장하면서부터 제이크 본인은 물론 독자들도

범인의 최종 목표 또는 타격 대상이 제이크임을 쉽게 감지할 수 있습니다.

희생자 대부분은 ‘30여 년 만에 고향에 온 FBI 특별수사관 제이크 콜의 지인 또는

물심양면으로 그를 도운 자들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 즉 범인의 동기인데 이 부분이 작품 속 가장 큰 미스터리입니다.

 

작가는 그 미스터리의 핵심에 제이크의 아버지 제이콥이 있는 것처럼 묘사합니다.

유명 화가였지만 지금은 치매에 걸린 제이콥은 아들 제이크와 오랜 기간 절연한 상태였는데

최근 끔찍한 사고를 겪은 탓에 결과적으로 제이크를 고향으로 불러들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 일련의 연쇄살인에 대해 뭔가 아는 듯한 태도를 취하지만,

치매 상태인 그의 언행을 무조건 믿을 수는 없어 제이크와 독자 모두 혼란을 겪게 됩니다.

, 독자를 조마조마하게 만드는 설정 중 하나는 뉴욕에서 온 제이크의 아내와 아들입니다.

제이크는 지금 현재 오랫동안 등 돌렸던 고향이자 끔직한 사건 현장에 있는 셈인데,

그런 곳에 가족이 나타났다는 건 곧 그들에게도 위기가 닥칠 거란 전조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끔찍함과 충격으로 포장된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무척 좋아하긴 하지만

끔찍함과 충격이 제대로 작동하려면 그 외의 서사들이 탄탄해야만 한다는 생각입니다.

, ‘누가, 어떻게, ?’라는 대목이 설득력도 있고 개연성도 있어야 하고,

그래야만 다 읽은 뒤에 공포든 여운이든 그 작품만의 미덕을 느낄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블러드맨의 경우 작가가 의도한 끔찍함과 충격은 성공했을지 모르지만,

그 외의 부분들은 다소 허무하게 느껴지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무엇보다 범인의 정체가 드러나는 반전이 그다지 놀랍지 않았고,

어떻게?’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통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충분한 설명 없이 마냥 끔직함과 공포에 대한 서술만 거듭하다가 막을 내린 듯 했고,

특히 엔딩은 정해진 분량이라도 있었던 듯 급하고 두루뭉술하게 마무리된 느낌이었는데,

그러다 보니 여운이고 뭐고 맛볼 틈도 없이 책을 덮어야만 했습니다.

 

, 가장 중요한 설정 중 하나인 제이크의 과거에 대한 설명은 반칙에 가까웠다는 생각인데,

당연히 초반부터 공개됐어야 할 중요한 정보를 중반이 넘어서야 반전처럼 내보인 대목에서는

놀라움보다는 어이없음이 더 강하게 느껴졌습니다.

문제는 이 대목에서 이미 이야기의 엔딩이 희미하게나마 예측된다는 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왜 이런 구성을 했을까?’라는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사소한 부분이긴 하지만, 지나치게 많은 각주역시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었습니다.

심도 있는 비유나 은유를 위해 여러 지식과 정보를 활용하는 것 자체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개인적으로는 작가의 지적 허영심이 과도하게 발휘된 것으로만 보였을 뿐

수시로 책읽기의 템포와 긴장감을 무너뜨린 부작용만 일으켰다는 생각입니다.

 

끔찍함과 충격 면에서만 보면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역시 블러드맨에 못잖은데,

제가 의사 3부작을 좋아하는 이유는 끔찍함과 충격을 뒷받침한 튼튼한 서사 때문입니다.

범인의 정체, 의도, 수법은 물론 범인을 쫓는 주인공의 심리에 이르기까지

독자가 충분히 긴장감을 갖고 몰입할 수 있게끔 설득력과 개연성을 갖췄다는 뜻입니다.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나중에 이 작품을 떠올리면 산 채로 벗겨진 살가죽허리케인외엔

인상적으로 기억할 만한 뭔가가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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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 킬러 시리즈
이사카 고타로 지음, 김해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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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 고백하자면 악스는 중도 포기한 작품입니다.

원래 중도 포기한 작품은 서평 자체를 쓰지 않는데,

왠지 악스는 이것저것 좀 할 말이 생각나서 짧게나마 기록을 남기고 싶어졌습니다.

 

알라딘에서 이사카 고타로를 검색하면 처음에 68편의 리스트가 뜨지만,

만화, 편집본, 개정판 등을 제외하고 나면 30편의 작품이 국내에 출간됐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만히 세어보니 이 작품까지 겨우 6편밖에 읽지 않았더군요.

그나마 대표작 중 한 편인 골든 슬럼버는 읽지도 못했구요.

그런데, 왜 늘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이라면 호감 또는 호기심을 가져왔을까, 따져보니

결정적인 한 작품, 사신 치바가 제게 너무 강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란 걸 알게 됐습니다.

 

사신 치바전에 읽은 작품이 그래스호퍼였으니 연이어 두 작품에서 호감을 느낀 셈이고,

그 결과 이사카 고타로에게 각별한 관심을 가진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 뒤로 만난 사신의 7부터 가장 최근에 읽은 화이트 래빗에 이르기까지

매번 왜 내가 이사카 고타로를 좋아하는 거지?”라는 의문을 갖곤 했는데,

이번 작품 악스역시 비슷한 경험을 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골든 슬럼버를 비롯, 읽지 않은 그의 대표작들이 워낙 많은 상태에서

함부로 그런 의문을 가져선 안 되겠지만 악스는 제법 기대했던 작품이라 실망감이 더 컸고

그런 탓에 그의 작품을 중도 포기한 것은 물론 이런 서평까지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악스는 겉으론 평범한 영업사원이자 세 식구의 가장이지만

실은 업계에서 뛰어난 능력으로 유명한 20여년 경력의 살인청부업자 미야케가 주인공입니다.

당연히 그래스호퍼가 떠올랐고, 최근 재미있게 읽은 청부살인 작품들이 생각났는데,

제가 책장을 접은 2/3쯤까지는 청부살인 이야기는 잠깐씩 스쳐 지나듯 등장하기만 했고,

대부분은 아내에게 구박 받고 쩔쩔 매는 공처가 미야케이야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그는 의뢰를 처리하고 늦게 돌아온 밤이면 아내를 깨울까봐 소리 나지 않게 야식을 먹고,

아내의 심기를 조금이라도 건드릴만한 이야기는 아예 하지도 않을뿐더러,

아내의 발소리만 들으면 위가 오그라드는, 좀 과도한 공처가 캐릭터입니다.

물론 그는 가정의 평화를 기원하고, 그를 위해 업계에서 은퇴하기를 바라며,

혹시라도 자신 때문에 가족이 다칠까봐 걱정하는 충실한 인물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청부살인을 소재로 한 미스터리로 분류된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고독하고 평범한 샐러리맨의 친구 만들기, 마당에 자리 잡은 말벌 집 없애는 이야기,

아내가 각인시킨 트라우마 때문에 전전긍긍하는 공처가 이야기가 (거의) 전부라는 점입니다.

다음 챕터엔 뭔가 나오겠지, 기대하다가도 계속 이런 식의 이야기가 전개되자

(가족을 지키기 위한 킬러의 분투를 다뤘을 것으로 보이는) 마지막 챕터를 남겨둔 지점에서

더는 버틸 힘이 없어 중도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이사카 고타로 특유의 톡 쏘는 유머와 한껏 비튼 은유는 언제 봐도 매력적입니다.

악스에서도 이런 그의 매력은 여전했지만

읽는 내내 인물, 사건, 감정 가운데 몰입해야 할 것을 전혀 찾지 못했기에

어떤 때는 그 매력적인 유머와 은유가 무슨 소용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인터넷 서점의 서평 별점을 찾아보니 대부분 호평 일색이더군요.

그의 매력적인 유머와 은유 때문일 수도 있고, ‘악스자체의 완성도 때문일 수도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쫓아가야 할 알맹이가 뭔지 도저히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마음에도 없는 호평을 하긴 어려웠습니다.

 

앞으로도 이사카 고타로를 포기하진 않겠지만

아무래도 예전처럼 근거 없는 호감에 휘둘리진 않을 것 같습니다.

신작보다는 그의 대표작으로 분류되는 작품들부터 마음을 비우고 도전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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