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이 뜨는 숲
아오야마 미치코 지음, 승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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힐링 소설은 제 관심 장르가 아닙니다. 최애 작가의 작품이 아니라면 제목이나 표지에서 힐링 비슷한 분위기만 풍겨도 외면하곤 합니다. 하지만 이름조차 생소한 아오야마 미치코의 달이 뜨는 숲에 눈길이 간 첫 번째 이유는 ‘4년 연속 일본서점대상 수상 작가라는 소개글 때문입니다. 일본의 여러 문학상 가운데 가장 신뢰하는 게 일본서점대상인데, 순문학에서 장르물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품들이 라인업 돼있어서 매년 수상작이 발표될 때면 관심 있게 지켜보곤 합니다. 4년 연속 수상에도 불구하고 아오야마 미치코의 이름이 제게 각인되지 않은 건 아마도 난 힐링 소설이야!”라고 대놓고 선언하는 듯한 표지와 제목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달이 뜨는 숲은 소개글 몇 줄만으로도 제 관심을 이끌어냈고, 결과부터 말하면 흔한 힐링 소설들과는 약간은 결이 다른 매력을 품고 있어서 꽤 진하고 깊은 여운을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각 주인공들은 다른 수록작에도 의미 있는 조연으로 등장하곤 해서 이 작품의 메시지 중 하나인 모습이 보이지 않아도 사람과 사람은 틀림없이 이어져 있다를 여러 번 실감하게 만듭니다. 또한 모두들 다케토리 오키나라는 사람이 운영하는 팟캐스트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의 애청자이기도 한데, 주인공들은 매일 10분씩 달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그 팟캐스트를 통해 자신이 처한 여러 가지 고민과 문제들의 탈출구를 찾아내곤 합니다.

 

번 아웃과 자기혐오에 빠져 오랫동안 근무한 병원을 그만둔 간호사 레이카, 개그맨이 되고 싶었지만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자괴감에 빠져 사는 택배기사 시게타로, 딸의 갑작스런 임신과 결혼 때문에 착잡함을 털어내지 못하는 중년남자 다카바, 엄마에게서 독립하기 위해 몰래 배달 라이더로 일하는 여고생 나치, 그리고 취미로 시작한 액세서리 제작이 번창하면서 일과 가정 사이에서 고민하는 20대 여성 무쓰코 등 다섯 명의 주인공은 하나 같이 자기 자신 때문에, 혹은 애증을 품은 그 누군가 때문에 고민과 갈등에 빠져있습니다. 갈수록 깊어지는 자기혐오, 가까우면서도 멀게만 느껴지는 상대와의 거리감, 벗어나고 싶지만 동시에 곁에 있어주기를 바라는 이율배반 등 쉽사리 치유되기 힘든 문제들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지구 자전속도에 맞춰서 달은 조금씩 조금씩 멀어져 가고 있지요. 달과의 거리가 처음과 똑같았다면 지구는 지금쯤 어떤 별이 됐을까요? 달과 지구는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그때그때 가장 좋은 상태로 관계를 이어왔구나, 하는 생각을 저는 하곤 합니다.” (p24)

 

다섯 명의 주인공에게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제시하는 건 팟캐스트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입니다. 실제로 이런 팟캐스트가 있다면 애독하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달도 끝도 없는 이야기는 지금껏 몰랐던 달에 관한 특별한 이야기들을 들려주는데, 단순히 달에 대한 상식만이 아니라 희로애락을 겪는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달과 결부시켜 설명함으로써 큰 공감대를 얻어내는 것입니다.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달처럼 변할 수밖에 없다고, 지구와 달이 조금씩 멀어지면서도 좋은 상태를 유지하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의 거리가 반드시 가까워야 행복한 것은 아니라고, 또 음력 초하룻날이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달이 다음날이면 새로운 모습으로 밤하늘에 뜨듯이 사람들에게도 언제나 새로운 시작이 가능하다고 말해주는 다케토리 오키나의 다정다감한 목소리에 주인공들은 새삼 자신의 처지를 돌아보며 변화와 희망의 가능성을 떠올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점이 달이 뜨는 숲을 다른 힐링 소설들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이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론 아오야마 미치코가 팟캐스트 내용만 모아 한 편의 소설로 내줬으면 하는 바람도 갖게 됐습니다.)

 

몇몇 대목에서 힐링 소설의 작위성과 한계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달이 뜨는 숲은 그동안 읽은 몇 안 되는 힐링 소설 중에서도 꽤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입니다. 무엇보다 그동안 무심히 바라보곤 했던 달을 앞으론 각별한 마음으로 지켜볼 수 있게 해준 점이 고마웠습니다.

역자 후기를 보니 아오야마 미치코의 작품 가운데 도서실에 있어요달이 뜨는 숲과 비슷한 정서를 품은 것으로 보이는데, 언젠가 장르물 편식이 참을 수 없이 지겨워지는 순간이 찾아오면 꼭 한 번 읽어보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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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산가옥의 유령 현대문학 핀 시리즈 장르 4
조예은 지음 / 현대문학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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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졸업 후 일본에서 지내던 현운주는 서른 살이 되어 외증조모 박준영이 유산으로 남긴 적산가옥 붉은담장집으로 돌아옵니다. 박준영이 유언장을 통해 서른 살이 된 해, 1년 동안 이 집에서 살아야 한다.”라는 조건을 걸고 자신에게 그 집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어린 시절 박준영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현운주는 붉은담장집의 기괴한 사연을 잘 알고 있었기에 썩 내키진 않았지만 1년 후 게스트하우스로 리모델링할 것을 계획하며 남편 우현민과 함께 붉은담장집에서의 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지만 첫날부터 현운주는 유령임에 분명한 소년을 발견하곤 기겁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현운주는 현실에서는 환시와 환청에 시달리기 시작하고, 꿈에선 외증조모 박준영의 시점으로 80년 전 붉은담장집에서 벌어진 참극을 직접 목도하게 됩니다.


 

집은 자신의 벽에 깃든 모든 역사를 기억한다. 안에 살던 사람은 죽어도 집은 남는다. 오히려 죽음으로써 그 집의 일부로 영원히 귀속된다.” (p10)

 

작품 속 현운주가 물려받은 붉은담장집의 모델인 군산시 신흥동 히로쓰 가옥을 방문했을 때 저도 모르게 호러의 무대로 딱 알맞은 공간이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습니다. 식민지 수탈의 상징이자 일본가옥 특유의 괴괴함을 발산하는 그곳에서 어쩌면 온갖 비극과 참극이 벌어졌을지도 모르며, 패망 후 일본인 집주인이 도망친 뒤엔 곳곳에 한이 서린 폐가가 되어 괴괴함의 농도가 한층 더 짙어졌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이 불쑥 솟아올랐기 때문입니다. 끔찍하면서도 애틋하기 짝이 없는 호러 스토리인 조예은의 적산가옥의 유령은 저의 그 상상이 완벽하게 구현된 이야기라 마지막 장까지 남다른 느낌으로 읽을 수 있었습니다.

 

2020년대 붉은담장집을 물려받은 현운주가 유령 소년을 목격하곤 공포에 사로잡혀 나날이 피폐해져가는 이야기와 1940년대 박준영이 붉은담장집에 입주간호사로 들어와 15살 소년 유타카의 치료를 맡으며 겪은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번갈아 전개됩니다.

현운주의 이야기가 유령소년을 목격한 이후 겪게 된 환청과 환시와 악몽의 연속이라면, 박준영의 이야기는 80년 전 붉은담장집에서 벌어진 참극의 세세한 내용과 함께 후일 현운주 앞에 유령으로 나타나게 될 소년 유타카의 비극적인 일생을 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왜 대를 건너뛰어 증손녀 현운주에게 붉은담장집을 물려준 건지, 왜 굳이 서른 살이 됐을 때 1년 동안 이 집에 머물라는 유언장을 남긴 건지, 또 왜 유타카의 유령이 현운주 앞에 나타날 수밖에 없었는지를 담담하게 서술합니다.

 

200여 페이지에 불과한 분량이지만 마치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스티븐 킹의 호러물을 읽은 듯한 느낌입니다. 몇 안 되는 등장인물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호러 코드와 미스터리 서사가 빈틈없이 직조된 데다 독자의 예상을 뛰어넘는 반전이 잇따라 벌어지기 때문에 체감되는 이야기의 밀도와 농도가 그만큼 높고 진하다는 뜻입니다.

특히 스티븐 킹의 샤이닝에 등장하는 호텔 오버룩을 연상시키는 적산가옥 붉은담장집의 매력 역시 분량 대비 고밀도의 이유 중 하나인데, 박준영과 현운주가 80년의 시차를 두고 겪는 서로 다른 색깔의 공포도 흥미롭지만 호러의 원천이자 살아 숨 쉬는 괴물과도 같은 붉은담장집이 내뿜는 기괴함은 주인공들 못잖게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80년의 간극을 둔 괴담과 공포와 유령의 이야기는 막판에 이르러 현실의 사건과 접점을 갖게 됩니다. 환청과 환시와 악몽에 시달리던 현운주가 절체절명의 위기를 벗어나는 과정과 함께 여러 가지 미스터리도 밝혀집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호러 코드가 깔끔하게 현실적으로설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호러는 호러대로, 미스터리는 미스터리대로 나름의 여운을 남기면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색깔은 전혀 다르지만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와 비슷한 느낌이라고 할까요?

 

조예은은 이름은 많이 들어봤지만 직접 읽은 작품이라곤 앤솔로지 도시, 청년, 호러에 수록된 단편 보증금 돌려받기밖에 없었습니다. 제목에 이끌려 읽은 적산가옥의 유령덕분에 그녀의 진가를 만끽하게 됐는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낯익은 제목의 작품들만이라도 찾아 읽어보려고 합니다. “오직 호러만이 죽은 자가 죽은 입으로 자신의 소리를 낸다. (실체 없는 유령들은) 육체가 사라졌어도 집요하게 남아 말을 건다. 나는 그 지독함과 애달픔이 좋다.”라는 작가의 말이 마음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인터넷서점의 소개글을 보면 나름 이 작품의 스포일러라 할 만한 내용들이 꽤 많이 공개돼있습니다. 막판에 밝혀지는 결정적인 반전까지 담겨 있어서 이래도 되나?”싶은 생각이 들었는데,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독자라면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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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로장의 참극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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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가을, 명탐정 긴다이치 고스케가 후지산 인근 대저택 명랑장을 방문합니다. 지금은 신흥재벌 시노자키가 소유하고 있지만 명랑장은 과거 메이지유신으로 부와 권력을 거머쥐었던 후루다테 다넨도가 지은 별장으로 건물과 부지 곳곳에 비밀장치와 탈출구가 설치돼서 미로장이란 별칭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후루다테 가문은 패전 후 3대째인 다쓴도에 이르러 몰락하고 말았고 시노자키는 명랑장은 물론 다쓴도의 아내 시즈코까지 손아귀에 넣었습니다. 시노자키가 긴다이치 코스케를 초빙한 건 정체불명의 외팔이 남자가 저택 인근에 나타났다가 사라진 일 때문입니다. 20년 전 2대째 주인 가즌도가 일으킨 대참극 때 시즈마라는 남자가 한쪽 팔을 잘린 채 종적을 감춘 일이 있는데, 시노자키는 시즈마가 복수를 위해 20년 만에 저택에 나타났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진 것입니다.


 

미로장의 참극은 좀 복잡한 탄생 이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1956미로장의 괴인이란 제목의 단편으로 출간됐다가 이후 중편으로 확장됐고, 이후 1975년에 이르러 장편소설로 완성됐습니다. ‘긴다이치 고스케 시리즈의 후기작임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의 배경이 1950년인 건 이런 사연 때문입니다. 장편 출간일자를 기준으로 하면 가면무도회’(1974년 출간)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1975~1977년 연재) 사이에 나온 셈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핵심 코드는 패전 이후의 사회적 혼돈, 몰락한 화족(華族)의 비극, 붕괴를 겪는 지방의 봉건문화, 그 와중에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라고 할 수 있는데, ‘미로장의 참극은 붕괴 중인 봉건문화를 제외한 모든 코드들이 잘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각종 비밀장치와 탈출구로 중무장한 기묘한 대저택, 대를 이을수록 심해진 후루다테 가문의 탐욕과 부패와 엽색의 기질, 그리고 20년 전의 대참극 이후 몰락의 길을 걸은 끝에 연쇄살인사건에 휘말리고 만 참혹한 운명 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팬이라면 누구라도 흠뻑 빠져들 만한 매력적인 서사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신흥재벌 시노자키에 의해 곧 호텔로 변신할 예정인 명랑장에 그야말로 악연이라 할 수 있는 인물들이 모여듭니다. 시노자키는 후루다테 가문 사람들을 불러 모아 저택의 과거를 함께 반추하는 것은 물론 20년 전 대참극 때 살해된 자들의 기일 제사를 올리려 한 것인데, 공교롭게도 바로 그 타이밍에 정체불명의 외팔이 남자가 출몰한 탓에 긴다이치 코스케를 초빙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긴다이치 코스케가 저택에 도착한 날부터 연이어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지고, 적잖은 인물들이 기괴하거나 참혹한 방식으로 목숨을 잃고 맙니다.

 

긴다이치 코스케를 가장 곤혹스럽게 만든 것은 미로장이란 별칭을 갖게 만든 저택 곳곳의 비밀장치와 지하로 연결되는 탈출구입니다. 저택이 처음 지어질 당시부터 지금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는 80대 노파 외에는 그 누구도 비밀장치와 탈출구에 대해 완벽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러다 보니 경찰과 긴다이치 코스케는 범인이 저택에 머물고 있는 자들 중 하나라고 확신하면서도 동시에 20년 전 한쪽 팔을 잘린 채 종적을 감췄던 시즈마라는 남자에 대한 의심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어쩌면 그가 비밀장치와 지하 탈출구를 이용하여 과거의 복수를 실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팔묘촌에서 맛봤던 지하 동굴 미스터리를 연상시키는 이 특별한 공간이야말로 미로장의 참극의 가장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팬이라면 가면무도회이후 무려 10년 만에 한국에 출간된 미로장의 참극을 무조건 두 손 들어 환영하겠지만, 이 작품으로 처음 시리즈를 접한 독자라면 살짝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초기작인 옥문도’, ‘팔묘촌’, ‘이누가미 일족등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특유의 핵심 코드들과 함께 트릭 미스터리의 진수를 선보였다면 미로장의 참극은 미스터리 자체로는 다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의 추리는 비약과 정체를 반복하는 탓에 독자가 따라가기 쉽지 않았고, 저택에 머무는 자들은 용의자이자 예비희생자들인데도 서로 갈등하거나 충돌하는 일이 거의 없어서 긴장감을 유발하기는커녕 마네킹 조연처럼 보일 만큼 존재감이 희미합니다. 첫 살인사건 이후 이들에 대한 심문에 상당한 분량이 할애되는데 정작 이들 사이에 눈길을 끌만한 관계가 없다 보니 지루하게 읽힐 수밖에 없었습니다. 또한 비밀장치와 지하 탈출구가 미스터리의 흥미를 돋우긴 하지만 독자를 교묘하게 속이기 위한 트릭이라기보다는 저택의 비극성을 강조하기 위한 배경으로 활용된 점도 무척 아쉬웠습니다. 무엇보다 범행동기가 애매모호하게 혹은 기대 이하로 설정돼서 연쇄살인의 비극성을 제대로 느낄 수 없었던 점은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두고두고 찜찜함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총평하자면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특유의 핵심 코드들은 여느 작품 못잖게 매력적이었지만, 미스터리는 초기작들의 맛에 비해 무척 싱거웠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쉬움들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가면무도회병원 고개의 목매달아 죽은 이의 집등 후기작들의 공통점이기도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엔 긴다이치 코스케가 활약한 작품이 모두 77편이라고 하지만 이중 장편(또는 단편으로 출간됐다가 장편으로 확장된 경우)만 골라내면 대략 27편 정도 됩니다. 한국엔 두 편의 중단편집 외에 11편만 소개됐는데, 한 가지 바람이라면 미로장의 참극출간을 계기로 시리즈 초기작들이 좀더 많이 한국에 소개됐으면 하는 점입니다. 장편이라면 더할 나위 없고, 중단편집도 괜찮으니 또 다시 10년을 기다리는 일만은 없기를 기대해봅니다.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출간 순서는 https://blog.naver.com/memories226/222215959134 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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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쿠치바 전설
사쿠라바 가즈키 지음, 박수지 옮김 / 노블마인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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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내 남자’, ‘토막 난 시체의 밤’, ‘소녀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직업등 읽은 작품 모두 독특한 느낌과 여운을 남겨줬던 사쿠라바 카즈키의 2006년 출간작입니다. 이 작품은 2007‘60회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을 수상했지만 추미스 독자들이 기대하는 일반적인 추리소설은 아니라서 사전 정보 없이 읽을 경우 살짝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면 아카쿠치바 전설은 패전 직후부터 2000년대 초반에 이르는 60여년에 걸쳐 돗토리 현 베니미도리 촌에서 제철업의 흥망성쇠를 겪은 아카쿠치바 가문의 여성 3대의 연대기입니다. 패전 무렵 태어나 업둥이로 자랐으며 환시(幻視)와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지녔던 만요, 거품경제의 극치를 달리던 80년대에 전국적으로 악명을 떨치던 폭주족이었다가 소녀만화가로 변신하여 불꽃같은 삶을 살았던 게마리, 그리고 할머니와 어머니와는 달리 무기력하게 젊음을 소진하며 현대를 살아가고 있는 도코 등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세 명의 여성이 자신이 살던 시대의 변화상과 아카쿠치바 가문에서 벌어진 갖가지 사건들을 담담하게 들려줍니다.


 

아카쿠치바(赤朽葉, 붉은 고엽)라는 가문 이름답게 건물과 정원 모두 짙은 붉은색으로 뒤덮인 대저택을 무대로 한 여성 3대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굴곡진 삶뿐 아니라 패전-고도성장-거품경제에 이르는 일본의 현대사까지 담아내고 있어서 말 그대로 대하드라마와 같은 무게감과 깊이를 갖고 있습니다.

 

환시(幻視)와 미래시(未來視)의 능력을 지닌 만요는 패전 직후부터 1975년까지의 이른바 최후의 신화시대의 표상입니다. 지금은 존재 여부조차 확실치 않은 산속의 은거자들의 후손으로 피부색이며 머리칼이며 보통 일본인과는 사뭇 달랐던 만요는 업둥이로 자라다가 기구한 인연으로 인해 아카쿠치바 가문의 며느리가 됩니다. 그녀가 지닌 신비한 능력과 최전성기를 구가하던 아카쿠치바 가문의 범상치 않은 분위기 덕분에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선 최후의 신화시대라는 부제에 걸맞게 매력적인 판타지 서사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만요의 딸 게마리는 1979년부터 1998, 그러니까 고도성장과 거품경제의 붕괴라는 롤러코스터 같았던 시대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명문가의 차녀였지만 게마리는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폭주족 리더이자 쇠파이프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 으로 세상에 그 이름을 알립니다. 오늘이 행복하다면 내일 죽어도 좋다는 청춘예찬론을 펼치며 거침없이 살아가던 그녀는 뜻밖의 비극을 겪은 뒤 갑자기 소녀만화가로 변신하고 그야말로 짧지만 굵게 불꽃처럼 살아갑니다. 자신이 살던 격동의 시대와 꼭 닮았던 게마리의 삶은 만요의 판타지 서사와는 정반대로 지독한 사실주의에 입각하여 그려집니다.

 

게마리의 딸 도코는 변화무쌍한 시대에 태어나 극적인 삶을 살았던 할머니 만요나 어머니 게마리와는 너무나도 다른 인물입니다. 2000년대 초반 일본 청춘들의 모습을 대변하는 도코에게선 그저 무기력함밖엔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 도코에게 주어진 미션은 할머니 만요가 죽기 전에 남긴 마지막 한마디 - “내가 옛날에 사람을 한 명, 죽였어.” - 의 진실을 밝히는 일입니다. 60여년에 걸쳐 아카쿠치바 가문에선 여러 사람이 다양한 형태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하지만 도코가 알기로는 그 가운데 살인의 가능성이 있는 죽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요의 고백에 담긴 진실을 알아내기 위해 도코는 과거의 죽음들을 모조리 소환합니다. 그리고 결국 만요가 오랜 시간 홀로 감내했던 비극의 실체와 마주하게 됩니다. 이 작품의 미스터리 서사는 만요에 의해 시작되고 도코에 의해 완성되는 것입니다.

 

‘200760회 일본추리작가 협회상수상 이력만 믿고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다소 배신감(?)이 들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런 오해 덕분에 아카쿠치바 전설을 읽게 돼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입니다. 물론 수상 이력이 아니더라도 표지와 제목이 호러의 분위기를 내뿜는데다 사쿠라바 카즈키의 작품이란 이유만으로 어떻게든 읽었을 작품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각각 신화의 시대, 풍요와 붕괴의 시대, 무기력의 시대를 살았던 아카쿠치바 여성 3대를 그린 아카쿠치바 전설은 한두 줄로 그 매력을 요약하기가 어려운 작품이며, 특히 굴곡진 개인의 삶과 격변기를 통과하는 시대상을 한꺼번에 맛보고 싶은 독자에겐 적극적으로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사쿠라바 카즈키에게 한번쯤 매료된 적 있는 독자라면 이 묵직하고도 기이한 이야기에 도전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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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스트 플라이트
줄리 클라크 지음, 김지선 옮김 / 밝은세상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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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가 출신 예비정치인의 아내로 모두의 부러움을 샀지만 실은 지독한 가스라이팅과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클레어 쿡은 오랜 준비 끝에 신분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대학에서 퇴교당한 뒤 12년 넘게 마약 조직에 얽혀있던 이바 제임스는 마약단속국의 미행과 조직의 의심 속에 위기를 느끼곤 고향으로 도망치기로 결심합니다. 일면식도 없던 클레어와 이바는 우연히 공항에서 마주쳤고, 피치 못할 이유 때문에 서로의 항공권은 물론 옷과 휴대폰과 신분증 등 지니고 있던 모든 것을 바꿔치기합니다. 그리고 각자가 간절히 원했던 자유로운 삶을 향해 비행기에 오릅니다. 하지만 운명은 결코 두 사람의 뜻대로 흘러가주지 않습니다.



여러 가지 서사와 소재가 믹스된 매력적인 스릴러입니다. 가스라이팅, 가정폭력, 마약, 불행한 가족사가 남긴 상처, 신분 바꾸고 종적 감추기, 여성들의 연대와 저항 등 쉽게 섞이기 어렵지만 제대로만 섞인다면 시너지 효과가 대단할 수밖에 없는 재료들이 한 바구니에 담겨있기 때문입니다.

클레어와 이바가 공항에서 항공권을 바꿔치기 한 직후 이야기는 두 갈래로 갈라집니다. 무사히 이바의 집에 몸을 숨기긴 했지만 끊임없이 찾아오는 위기 때문에 줄타기를 하듯 아슬아슬한 시간을 보내는 클레어의 이야기가 하나이고, 또 하나는 이바의 과거사로, 수녀원에 버려진 유년기부터 퇴교 직후 마약조직에 얽혔던 12년 전을 거쳐 공항에서 클레어를 만나기 직전까지의 기구하다고 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입니다.

 

클레어의 이야기가 언제 남편에게 발각될지 모른다는 공포와 한치 앞도 안 보이는 미래에 대한 막막함을 통해 독자의 긴장감을 고조시킨다면, 이바의 과거사는 한 사람의 인생이 얼마나 쉽고 어이없게 궤도를 이탈해 막장에 처박힐 수 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줘서 안쓰러움과 애틋함을 자아냅니다. 또한 장밋빛 미래를 꿈꾸던 젊은 날의 두 사람이 불과 30대에 이르러 자유로운 삶을 찾아 신분을 바꾸고 종적을 감추기로 결심하는 데 이르는 과정은 독자의 공분을 사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입니다.

 

클레어의 현재와 이바의 과거가 교차되면서 점차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지점에서 독자는 궁금증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두 사람의 계획은 성공할까? 자신들의 삶을 엿 먹인 자들에게 통쾌한 복수를 가할 수 있을까? 두 사람은 극적으로, 그것도 웃는 얼굴로 다시 한 번 만날 수 있을까? 작가는 여기저기 크고 작은 지뢰밭을 만들어놓고 궁금증에 사로잡힌 독자를 희롱합니다. 일부 궁금증은 클라이맥스 즈음에 풀리지만, 결정적인 궁금증은 마지막 에필로그에 이르러서야 해소됩니다. 제 경우 에필로그를 읽곤 이해가 잘 안돼서 잠시 멍~했던 게 사실인데, 5분쯤 지난 후 다시 한 번 에필로그를 읽은 뒤에야 제대로 된 의미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아주 특별한 감정에 푹 빠졌습니다. 압권 혹은 반전까지는 아니어도 이 작품을 오랫동안 기억하게 만들, 그런 멋지고도 애틋한 에필로그였기 때문입니다.

 

매력적인 소재와 서사들이 잘 섞인 데다 긴장감과 속도감도 적절해서 마지막 페이지까지 금세 달릴 수 있었지만, 중반 이후 살짝 늘어지는 대목들 때문에 별 0.5개를 뺐습니다. 다만 이 대목들 대부분은 클레어와 이바에게 있어 무척 중요한 과거사, 즉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어서 대충 읽어 넘길 수는 없었습니다. 분량이 좀 많아 보였고 비슷한 내용이 반복된 점이 아쉽긴 했지만 말입니다.

아울러 클레어와 이바에게 수호천사처럼 등장한 뜻밖의 조력자들의 존재도 조금은 작위적으로 보였습니다. 그들 중 누구 하나라도 없었다면 두 사람의 운명은 전혀 달라졌을 텐데 그만한 존재감치곤 너무나도 우연히, 너무나도 적절한 타이밍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등장한 방식이 썩 내키지 않았다고 할까요?

 

몇 가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재미와 의미와 여운을 함께 맛볼 수 있는 작품이라 주위에도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줄리 클라크의 다른 작품들도 해외에서 좋은 평을 들었던데, ‘라스트 플라이트가 한국에서 선전을 거둔다면 머잖아 그 작품들도 읽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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