엘리펀트 헤드
시라이 도모유키 지음, 구수영 옮김 / 내친구의서재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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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과 의사 기사야마 세이타의 삶은 평범하지만 행복합니다. 매력적인 아내 기키, 아이돌로 활약 중인 큰딸 마후유, 게임 마니아인 둘째딸 아야카 등 가족들 역시 유쾌한 일상을 공유하며 살아가는 중입니다. 하지만 과거의 트라우마 때문에 기사야마는 이 소중한 가족이 언제든 작은 균열 하나로 박살날 수 있다는 두려움을 품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불안은 어느 날 갑자기 찾아든 사소한 사건 하나 때문에 현실이 돼버립니다. 가족이 해체된 뒤 절망에 사로잡힌 그의 선택은 마약 딜러에게서 산 위험천만한 약물 시스마. 마지막으로 엄청난 쾌락을 맛본 뒤 삶을 마감하려 했지만, 약물에서 깨어난 기사야마는 믿을 수 없는 충격적인 상황을 목도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소중한 가족들이 끔찍한 형태로 살해당하는 악몽을 겪게 됩니다.

 

그리고 아무도 죽지 않았다를 시작으로 인간의 얼굴은 먹기 힘들다’, ‘명탐정의 창자등 지금까지 읽은 시라이 도모유키의 작품들은 이른바 특수설정 미스터리라는 장르에 걸맞게 상상을 초월하는 설정과 기괴한 전개, 그리고 충격적인 엔딩을 선사해왔습니다. 취향의 차이 때문에 읽은 작품들 모두 별 4개만 주고 말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작 소식이 들릴 때마다 참을 수 없는 궁금증 때문에 기어이 장바구니에 담곤 했습니다. (유일하게 못 읽은 명탐정의 제물역시 언젠가는 꼭 읽어볼 생각입니다)

 

엘리펀트 헤드는 시라이 도모유키의 상상력엔 끝이 없다는 점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작품으로, 정신과 의사 기사야마가 위험천만한 약물 시스마를 투약한 뒤 겪게 되는 가공할 상황과 함께 19금 판정을 받아도 이상하지 않을 잔인하고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을 다룹니다. 특히 시라이 도모유키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이 가공할 상황때문에 충격, 혼란, 당혹감, 불쾌감을 동시에 느낄 수도 있습니다. 다만, 상상력의 끝판왕이라 부를 만한 이 놀라운 설정에 거부감을 느낀 독자라도 얼마 지나지 않아 모든 걸 망각한 채 미스터리 자체에 빠져들게 될 텐데, 그 이유는 (전작들을 능가하는) 특수설정과 본격 미스터리 서사가 너무나도 자연스럽고 매끄럽게 결합되기 때문입니다.

 

범인의 정체를 밝히고 범행동기와 방법을 추리하는 본격 미스터리이긴 하지만 탐정도, 범인도 기상천외한 캐릭터로 설정돼있고(초반부터 탐정 역할과 범인 후보군이 곧바로 공개됩니다), 사건들 역시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잔혹하고 기괴한 형태로 벌어져서 초반부터 내가 제대로 읽은 게 맞나?”라는 위화감과 의문에 휩싸인 채 앞 페이지를 몇 번이고 다시 읽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또한 진범을 추적하는 과정은 집중력이 필요할 정도로 꽤 복잡하게 설정돼있는데, 거기에다 크고 작은 반전들까지 끼어드는 바람에 1/3쯤 되는 지점부터는 기억할 필요가 있는 대목들을 카메라로 찍어가며 읽어야만 했습니다. 덧붙이자면, 하찮아 보이는 작은 단서, 단역 수준의 인물, 별 의미 없는 풍경이나 공간 묘사조차 나중에 각별한 의미를 갖게 되므로 반전의 쾌감을 제대로 맛보려면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넘겨서는 안 됩니다.

 

처음엔 읽는 내내 이런 미친...”이라는 혼잣말을 되뇌었다.”는 편집자의 고백이 과장이 아닐까 의심했지만, 실제로 저 역시 읽는 동안 여러 차례 똑같은 마음의 소리를 내지르곤 했습니다. 그리고 시라이 도모유키의 뇌 구조가 진심으로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상상력도 상상력이지만, 조금만 삐끗해도 와르르 무너질 수밖에 없는 복잡한 설계를 정교하고 완벽하게 마무리한 점에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앞서 읽은 작품들과 마찬가지로 (순전히 개인적인 취향 때문에) 만점을 주진 못했지만, 특수설정 미스터리에 조금이라도 궁금증과 호기심을 가진 독자에겐 무조건 추천하고 싶은 작품이기도 합니다.

 

미스터리도, 트릭도, 전개도 모두 스포일러 금지!”라는 띠지의 카피 때문에 인물이나 내용에 대해 거의 언급하진 못했지만, ‘엘리펀트 헤드는 출판사의 소개글 외에는 아무런 정보도 없이 읽어야 제 맛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또한 모든 예측은 무의미합니다. 함부로 상상하지 말 것.”이라는 홍보카피처럼 뇌와 이성을 무방비 상태로 열어놓은 채 읽어야 작가의 의도를 제대로, 온전히, 완벽하게 음미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독자에 따라 불편함과 불쾌감을 느낄 대목들이 자주 등장하긴 하지만 그 부분만 극복한다면 시라이 도모유키의 초강력 특수설정 미스터리의 진면목과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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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충증
마리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박하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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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에 다니는 남편, 사립중학교 입시를 앞둔 딸과 함께 고급 맨션에 사는 마미는 겉으로는 평범한 주부 같지만 실은 동생 나미에게 빌린 아파트에서 여러 남자와 난잡한 성관계를 갖곤 하는 성욕 이상자입니다. 어느 날, 관계를 갖던 남자 중 하나가 온몸에 작은 혹이 난 채 기이한 형태로 사망하면서 마미의 삶은 대혼란에 빠집니다. 더구나 참을 수 없이 성기가 가렵고, 복통과 함께 기생충이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가 하면 끊임없이 들려오는 벌레 소리 때문에 노이로제에 걸리고 맙니다. 그러던 중 가족에게 뜻밖의 사고가 벌어지면서 마미의 정신은 완전히 붕괴됩니다. 마미가 쪽지 하나만 남겨놓고 사라진 가운데 남편 다카오와 동생 나미는 마미가 투고했던 소설을 통해 그녀의 난잡했던 사생활을 알게 된 뒤 큰 충격에 빠집니다.

 

한국에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은 모두 일곱 편입니다.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 수에 비하면 극히 일부만 한국 독자에게 소개된 셈인데, 2016년에 번역-출간된 고충증은 그녀의 데뷔작(2005)임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유일하게 읽지 않고 책장에 방치해온 작품입니다. 읽기 싫어서도, 게으름을 부려서도 아니고, 오히려 아껴 읽고 싶은 마음에 내내 미뤄온 것입니다. 마리 유키코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작가 중 한 명인데, 그동안 읽은 작품 대부분에 별 4개만 줬음에도 불구하고 모조리 찾아 읽은 건 궁금증과 호기심을 자아내는 그녀만의 이야미스(イヤミス, 불쾌함을 남기는 미스터리) 서사 때문입니다. 인물과 사건 모두 음습하고 기분 나쁘고 악취로 진동하지만 오히려 그래서 눈길이 자꾸만 끌렸다고 할까요? 표지와 제목 모두 독특하면서도 기괴함을 풍기는 고충증마리 유키코 식 이야미스의 정점처럼 느껴져서 아끼고 또 아껴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입니다.

 

끝없이 솟아오르는 성욕에 이끌린 지독하고 난잡한 성교, 온몸에 블루베리 같은 혹이 난 채 끔찍한 모습으로 죽어가는 사람들, 참을 수 없는 복통을 일으키다가 항문으로 빠져나오는 징그러운 기생충 등 고충증은 상상만 해도 불결함과 혐오감을 자극하는 소재들이 난무하는 야만적인 소설’(일본 평론가 도요자키 유미)입니다. 또한 끈끈한 욕정과 추한 악의가 소용돌이치는 고급 맨션의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홍보 카피대로 인간의 어둡고 일그러진 내면을 집요하게 포착해내는 마리 유키코 특유의 글맛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는 서스펜스 심리물이기도 합니다. 동시에 마지막 반전을 통해 앞서 읽은 이야기들이 완전히 전복되는, 그래서 기생충과 난교와 의문의 죽음과 살인사건이 어떻게 얽히고설킨 것인지를 소름 돋도록 목도하게 만드는 잘 짜인 미스터리이기도 합니다.

 

마리 유키코는 현대의학에서도 그 정체를 확실히 알아내지 못한 고충(孤虫)이라는 기생충에 대해 알게 된 뒤 오랜 시간의 자료조사를 거쳐 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합니다. 명백히 추상적인 개념인 인간의 악의와 욕망을 기생충이라는 구체적이고도 혐오스러운 존재와 결부시킴으로써 누구도 상상해내지 못할 독특한 미스터리를 완성한 셈인데,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읽은 마리 유키코의 그 어느 작품보다도 강렬한 인상과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론 막판에 미스터리가 해소되는 과정이 지나치게 단조롭고 설명적이라 아쉽기도 했지만, 읽는 내내 말할 수 없는 불쾌감 속에서도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듯한 긴장감과 몽롱함을 만끽한 것은 특별한 경험이 돼줬습니다.

 

첫 챕터가 극단적인 불쾌감을 선사하는 마미의 고백이라면, 두 번째 챕터는 시작부터 뜻밖의 반전을 선보이며 앞서 전개된 마미의 고백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합니다. 이어 사라진 마미를 찾는 남편 다카오와 동생 나미의 행적이 미묘한 기류와 함께 전개되고, 잇따라 기이한 형태로 사망하는 인물들이 속출하면서 긴장감은 더욱 고조됩니다. 또한 고급 맨션에 거주하는 주부들의 수상쩍은 행태 역시 눈길을 끄는 대목입니다. 이 모든 요소들 때문에 독자는 수시로 위화감을 느끼는 것과 함께 이야기가 어디로 튈지 좀처럼 가늠하지 못하게 됩니다. 때론 괴담처럼, 때론 심리 스릴러처럼 읽히는 혼란스러운 이야기는 예상 밖의 결말을 맞이하게 됩니다.

 

19금 판정을 받아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수위가 높은 작품이라 내용에 몰입하기도 전에 거부감을 느끼는 독자가 적지 않을 거란 생각입니다. 마리 유키코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도 비슷한 경험을 겪을 수 있는데, 그 고비만 넘긴다면 마리 유키코의 진정한 이야미스의 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스터리가 풀리는 과정이 무척 아쉽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이야미스를 충분히 즐겼으니 나름 눈감아 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궁금증과 호기심이 이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한 뒤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에 도전해보시기 바랍니다.

 

(사족으로... 2016년에 출간된 책의 오타에 대해 언급하는 게 너무 늦은 뒷북이긴 하지만, 초반에는 잘 보이지 않던 오타가 후반으로 갈수록 눈이 찌푸려질 정도로 많아진 건 무척 유감이었습니다. 인물 이름은 물론 소제목까지 잘못 표기된 건 상식 밖의 일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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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는 망자, ‘괴민연’에서의 기록과 추리
미쓰다 신조 지음, 김은모 옮김 / 리드비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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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무척 좋아하는 작품 중 하나가 미쓰다 신조의 도조 겐야 시리즈입니다. 패전 직후 혼란에 빠진 근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민속학과 호러와 본격 미스터리가 혼재된 독특한 장르를 맛볼 수 있는 시리즈인데, 일본에서는 2021년까지 모두 11편의 작품이 출간됐지만, 아쉽게도 한국에선 2013년에 출간된 미즈치처럼 가라앉는 것을 끝으로(모두 4편 출간) 신간 소식이 끊겼습니다.

그런 점에서 걷는 망자는 저와 같은 도조 겐야 팬에게는 무척 반가운 작품인데, ‘도조 겐야 시리즈의 스핀 오프라 할 수 있는 연작단편집이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은 도조 겐야의 조수인 젊은 남녀지만, 전국을 떠돌며 괴담을 수집하는 도조 겐야의 행적이 간간이 그려지고 있어서 아쉬운 대로 도조 겐야 시리즈의 정취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도쇼 아이는 어릴 적 고향 인근에서 벌어진 사건 때문에 도조 겐야와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은 바 있고, 그 덕분에 대학생이 된 현재 학교 도서관 지하에 자리 한 괴이 민속학 연구실’, 통칭 괴민연으로 불리는 도조 겐야의 연구실 겸 장서 보관실에 드나들게 됩니다. 홀로 괴민연을 지키고 있던 건 도조 겐야의 조수이자 대학원생인 덴큐 마히토입니다. 두 사람은 도조 겐야가 수집해서 보내온 괴담의 진상을 토론하고 미스터리를 추리하여 합리적인 결론을 도출하곤 합니다. 재미있는 건 격세유전을 통해 외할머니의 영매 재능을 물려받은 도쇼 아이가 괴이 현상을 실재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반면, 덴큐 마히토는 소심할 정도로 괴담 공포증을 가진 인물로, 괴이란 모두 망상이며 합리적인 추리가 가능하다고 믿는다는 점입니다.

 

도조 겐야가 30대 초반으로 나오는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1950년대 중반입니다. 외지고 작은 마을이라면 여전히 근대적 풍습과 전설이 잔존해있던 시절로, 도조 겐야가 수집한 괴담들은 하나 같이 현지인들에게는 생생한 공포이자 무시할 수 없는 금기를 담고 있습니다. 물에 빠져 죽은 자의 망령이 돌아다니는 바닷가(‘걷는 망자’), 400여 년 전부터 내려오는 머리 없는 여자의 저주(‘다가오는 머리 없는 여자’), 완벽한 밀실인 곰덫 안에서 내장이 파헤쳐진 채 발견되는 어린이의 시신과 시간이 갈수록 작아지는 깊은 산속 서양식 저택의 비밀(‘배를 가르는 호귀와 작아지는 두꺼비집’), 요괴를 체험하기 위해 스스로를 밀실에 가둔 요괴연구회 멤버가 겪은 의문의 사건(‘봉인지가 붙여진 방의 자시키 할멈’), 그리고 풍토병이 불러온 끔찍한 앙화와 참극(‘서 있는 쿠치바온나’) 등 모두 다섯 편이 실려 있습니다.

 

도조 겐야가 수집한 괴담의 내용이 먼저 소개되고, 괴민연 책상에 마주앉은 도쇼 아이와 덴큐 마히토가 괴담 속 미스터리를 추리하는 형식으로 이뤄져있습니다. 말하자면 추리 과정 자체는 안락탐정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앞부분의 괴담이 미쓰다 신조 특유의 민속학과 호러가 접목된 으슬으슬한 내용을 담고 있다면, 이어지는 두 안락탐정의 추리는 로맨틱 코미디 기운이 깃든 코지 미스터리에 가까워서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깁니다. 남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줄 아는 영매의 재능을 가진 도쇼 아이와 괴이 현상 자체를 부정하며 어떻게든 합리적인 추리를 도출해내려는 덴큐 마히토가 괴담의 실체에 다가가는 과정에서 벌이는 투닥거림은 로코 주인공들이 사랑에 빠지기 직전 벌이는 유쾌한 소동극에 가깝기 때문입니다. 이 두 사람이 어떤 미래를 맞이하게 되는지가 마지막 페이지에서 공개되는데, 미쓰다 신조의 다른 작품과 세계관이 연결돼있어서 무척 흥미롭게 읽혔습니다.

 

도조 겐야 시리즈가 괴이 현상 속에 교묘하게 감춰진 범죄를 밝혀내는 본격 미스터리라면, ‘걷는 망자는 진실이야 어떻든 상관없이 괴담 자체를 텍스트 삼아 실제로 벌어졌을 법한 상황을 추리하는, 말하자면 이런 일이 벌어진 게 아닐까?”라는 수준의 추측성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덴큐 마히토가 이런저런 추리를 마구 던지고 도쇼 아이가 깔끔한 논리로 반박하는 가운데 점차 진실이라 여겨지는 지점에 도달하는 과정이 반복됩니다. 이런 설정도 나름 재미있고 흥미롭긴 하지만, 아무래도 딱 떨어지는 결론이 아니다 보니 독자에 따라 다소 찜찜함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현장과 동떨어진 안락탐정 미스터리의 한계겠지만, 가령 이들이 내린 결론 가운데 한두 개쯤 도조 겐야의 반박을 통해 뒤집어지는 경우가 있었다면 조금은 더 매력적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도쇼 아이와 덴큐 마히토가 이끄는 괴민연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지 모르겠지만, 한번쯤이라도 도조 겐야가 특별출연을 해준다면, 아니 도조 겐야까지 포함한 3총사가 활약하는 이야기가 그려진다면 정말 흥미진진한 시리즈가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아울러 이 작품을 계기로 11년 가까이 한국 출간이 중단된 도조 겐야 시리즈가 부활할 수 있다면 더 바랄 나위가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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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재능
피터 스완슨 지음, 신솔잎 옮김 / 푸른숲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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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대 후반인 마사는 남편 앨런 때문에 말 못할 두려움에 휩싸입니다. 셔츠에서 의문의 핏자국을 발견한 뒤 뉴스를 검색해보니, 앨런이 출장을 다녀온 곳마다 여성을 상대로 한 끔찍한 살인사건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런 경우가 무려 다섯 번이 넘었지만, 아무 증거도 없이 오직 심증만으로 남편을 고발할 수도 없는 상황. 결국 마사는 대학원 시절, 자신을 한 남자에게서 구해줬던 릴리 킨트너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마사의 의심에 공감한 릴리는 직접 앨런을 미행하며 그의 행동을 관찰하기로 합니다. 하지만 릴리는 앨런을 미행하는 게 자신만이 아니란 걸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살인 재능아홉 명의 목숨등 피터 스완슨의 작품 두 편이 비슷한 시기에 출간돼서 잠시 고민하다가 원조격인 푸른숲에서 출간한 살인 재능을 먼저 읽기로 했습니다. 사실 아무 정보도 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초반 설정 소개가 끝날 무렵 갑자기 릴리 킨트너라는 이름이 등장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릴리는 한국 독자에게 피터 스완슨의 이름을 강렬하게 각인시킨 죽여 마땅한 사람들의 주인공이며, 2023년에 출간된 살려 마땅한 사람들로 오랜만에 다시 만났던 매력적인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론 살인 재능릴리 킨트너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이라고 부르고 싶은데, 푸른숲에서 이 점을 좀더 홍보했더라면 더 큰 관심을 끌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요약한 줄거리대로 이야기는 마사가 남편 앨런이 연쇄살인마가 아닐까 의심하며 두려움에 휩싸이는 장면들로 시작됩니다. 5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분량이지만 초반 장면들은 지금껏 읽은 피터 스완슨의 작품과는 결이 많이 다른 전형적인 심리 스릴러 서사에, 건조하기 짝이 없는 문체라서 다소 낯설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릴리의 등장과 함께 피터 스완슨 특유의 속도감 넘치는 서스펜스 스릴러로 탈바꿈합니다.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에게 최대한 스포일러 없이 릴리를 소개하자면 이 세상에 존재해선 안 될 것들을 가차 없이 죽이는 똑똑하고 정의로운 연쇄살인마입니다. 13살에 첫 살인을 시작한 릴리는 전작들에서 유감없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며 독자에게 짜릿한 쾌감을 선사해왔는데, 그래선지 릴리가 등장하는 순간 그 쾌감을 다시 맛볼 수 있다는 기대감이 급상승했습니다.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이 작품엔 살인에 관한 한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인물이 등장합니다. 릴리와 비슷한 시기인 11살에 첫 살인을 시작한 그는 지금까지 모두 26명의 목숨을 빼앗는 동안 단 한 번도 경찰의 수사망에 걸려든 적이 없습니다. 같은 방법을 두 번 이상 쓰지 않고 전혀 다른 사건처럼 보이게 조작함으로써 30년 가까이 완전범죄를 저질러 온 것입니다. 그의 유일한 고민은 너무 쉽고 지루한 살인 대신 좀더 짜릿한, 그러니까 아슬아슬한 스릴감 혹은 쾌감과 우월감을 만끽할 수 있는 특별한 살인을 갈망하지만 좀처럼 그런 기회가 찾아오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그런 그가 모처럼 만족감을 느끼며 연쇄살인을 자행하고 있던 중 뜻밖의 인물과 마주칩니다. 바로 15년 전, 첫눈에 자신과 같은 과인 괴물임을 알아봤던, 그리고 유일하게 자신을 겁먹게 만들었던 릴리입니다. 말하자면 살인 재능에 관한 한 천재적이라 할 수 있는 두 사람이 누군가 하나가 죽지 않으면 끝나지 않을 무자비한 게임을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지만 가장 아쉬운 건 막 재미있어지려 하는 지점에서 갑자기 이야기가 엔딩으로 치닫는 점입니다. 마치 기승전결 구도에서 이 빠진 채 막바로 에서 로 달려간 느낌이랄까요? ‘릴리 킨트너 시리즈전작 두 편이 450~480페이지였던 반면 살인 재능344페이지에 불과한데, 그래선지 딱 100페이지 정도가 더 길었다면, 그래서 그 자리에 에 해당하는 숨 가쁜 액션 스릴러의 묘미가 채워졌더라면 좋았을 거란 아쉬움이 진하게 남았습니다.

 

한국에 처음 소개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이 너무 재미있었던 탓에 그 후로 나온 작품들이 독자의 눈높이에 부응하지 못했던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피터 스완슨은 늘 신작을 기다리게 만드는 작가 중 한 명입니다. 아무 정보 없이 읽다가 뜻밖에 릴리 킨트너를 다시 만나서 반가웠고, 어쩌면 머잖아 그녀의 네 번째 이야기가 나올지도 모른다는 기대감을 품게 됐습니다. 다만 다음 작품은 좀더 두툼한 분량에 풍성하고 볼륨감 넘치는 이야기가 실리기를 바라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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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과 부동명왕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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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도 간다 미시마초에 있는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는 흑백의 방이라는 객실에 손님을 초대하여 조금 특이한 괴담 자리를 마련해 왔다. 한 번에 부르는 이야기꾼은 한 명뿐. 이를 마주하여 듣는 이도 한 명이고 이야기도 하나. (중략) 이야기꾼은 이야기하여 추억의 짐을 내려놓고, 듣는 이는 받아 든 짐을 흑백의 방에만 넣어 두고 두 번 다시 입에 담지 않는다.” (p 9)

 

에도시대의 괴담을 다루는 미야베 월드 2에는 여러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미야베 미유키 스스로 필생의 사업이라 부를 만큼 애정과 노력을 다 하는 건 바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입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그 아홉 번째 작품으로, 모두 네 편의 다채로운 괴담이 실려 있습니다.

17살 소녀 오치카가 시리즈 5편인 금빛 눈의 고양이까지 흑백의 방의 청자(聽者)를 맡았고, 오치카가 결혼한 뒤인 6눈물점부터는 그녀의 사촌이자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의 차남인 도미지로가 그 역할을 이어받았습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첫 주인공인 오치카의 지난한 출산 및 두 번째 주인공인 도미지로의 지독한 성장통을 함께 그리고 있어서 수록된 괴담들의 비극성과 감동이 몇 배는 더 진하게 느껴지는 작품입니다.

 

첫 주인공인 오치카의 무사 출산을 기원하기 위해 청과(靑瓜,울외)를 닮은 부동명왕 상을 안고 찾아온 한 중년여인이 들려주는 기구한 여성들의 연대(‘청과 부동명왕’), 탐관오리의 압제와 수탈로 파괴된 한 마을의 비극과 그로 인해 맺어진 기이한 인연(‘단단 인형’), 소유한 자에게 특별한 재능을 부여하지만 실은 앙화를 불러들이는 마물에 가까운 붓에 관한 이야기(‘자재의 붓’), 그리고 세상과 단절된 외딴 산기슭에서 특별한 산물을 채취하며 평화롭게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들이닥친 참극(‘바늘비가 내리는 마을’)이 수록돼있습니다.

 

일본의, 그것도 에도 시대의 괴담은 처음 접하는 한국 독자에게는 다소 낯설고 불편할 수도 있습니다. 일본 특유의 괴담도 괴담이지만, 무수한 종류의 신과 제례, 낯선 인명과 지명, 복잡한 복식과 음식 이름 등 일본어 고유명사가 워낙 많이 등장해서 눈과 머리를 어질어질하게 만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허들만 극복한다면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는 물론 미야베 월드 2의 진수를 만끽할 수 있습니다. 미야베 미유키가 다루는 괴담은 시대와 문화는 달라도 누구나 공감하고 이입할 수 있는 보편적인 희비극이기 때문입니다. ‘흑백의 방에 찾아와 자신이 알고 있는, 또는 자신을 옭아매고 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양하고, 그들이 풀어놓는 이야기 역시 유쾌한 추억부터 말할 수 없이 참담한 악몽에 이르기까지 다채롭습니다. 때론 화자(話者) 스스로도 눈치 채지 못했던 과거의 진상을 이야기를 나누는 중에 깨닫는 경우도 있어서 괴담 미스터리의 풍미를 맛볼 수도 있습니다.

 

청과 부동명왕은 이제 여자이자 어머니로서 살아가게 될 오치카의 출산 및 화공(畫工)으로 살고 싶다는 이상과 상인으로 살아가야 할 현실 사이에서 방황하는 도미지로의 고민이 각 괴담 속에 녹아있어서, 그동안 이 두 사람을 지켜봐온 독자에겐 더욱 더 각별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또한 수록된 괴담들 역시 전작들 못잖게 비극성의 깊이와 농도가 대단해서 오랜 여운을 남겨놓습니다.

 

매 작품마다 앞머리에 실은 ()’를 통해 흑백의 방이 운영되어온 과정을 설명하고 있어서 앞선 작품들을 읽지 않은 독자라도 대략의 분위기를 파악할 수는 있지만, 아무래도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의 참맛을 맛보려면 17살 오치카가 처음으로 흑백의 방에서 괴담을 듣기 시작한 시리즈 첫 편 흑백부터 순서대로 읽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괴담 자체야 극히 일부 작품을 제외하곤 연결성이 없으니 읽는 순서에 구애받을 필요가 없지만, 오치카와 도미지로를 포함한 주머니 가게 미시마야 사람들의 성장과 변화도 흥미로운 대목이기 때문입니다.

 

편집자 후기에 따르면 일본에서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 10편의 연재가 거의 끝나간다고 합니다. 아마 내년(2025) 여름쯤엔 한국 독자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 고양이의 참배라는 제목의 신작이 어떤 희비극을 담고 있을지 벌써부터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미시마야 변조 괴담 시리즈순서 (출간연도는 한국 기준)

1. 흑백 (2012)

2. 안주 (2012)

3. 피리술사 (2014)

4. 삼귀 (2018)

5. 금빛 눈의 고양이 (2019)

6. 눈물점 (2020)

7. 영혼 통행증 (2021)

8. 삼가 이와 같이 아뢰옵니다 (2023)

9. 청과 부동명왕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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