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의미한 살인
카린 지에벨 지음, 이승재 옮김 / 밝은세상 / 2018년 10월
평점 :
품절


국내에 7편의 작품이 출간된 작가지만 이제야 처음 만나게 된 카린 지에벨입니다.

유의미한 살인은 가장 최근 출간됐지만 실은 작가의 데뷔작입니다.

 

주인공 잔느는 마르세유 경찰서 지원실에 근무하는 28살 여성입니다.

그녀는 누구와도 섞이지 못한 채 스스로 강박적인 삶을 살아갑니다.

, 오랜 정신적 문제를 앓고 있으며, 자신이 설정한 루틴에서 한발짝도 벗어나지 못합니다.

당연히 친구도 없고 연인도 없으며, 누구도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여깁니다.

어느 날, 그런 그녀의 일상을 모조리 뒤엎을만한 큰 사건이 벌어집니다.

출퇴근 기차에서 늘 같은 자리에만 앉던 그녀는 좌석 틈에 꽂힌 한 통의 편지를 발견합니다.

편지를 보낸 자는 스스로를 엘리키우스(벼락을 내리는 신 주피터의 다른 이름)라 칭하며

잔느의 마음을 뒤흔드는 두 개의 고백을 털어놓습니다.

당신은 너무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어제 한 여자를 죽였습니다.”

 

잔느는 엘리키우스가 지금 현재 마르세유를 발칵 뒤집어놓은 연쇄살인범임을 눈치 챕니다.

하지만 잔느는 평생 들어보지 못한 엘리키우스의 따뜻한 위로와 흠모의 문장들 때문에,

, 그가 자신에게 살인을 고백한 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탓에

연쇄살인사건 담당인 (자신이 흠모하는) 에스포지토 반장에게 편지를 내보이지도 못합니다.

그러는 동안 희생자는 점점 늘어가고, 잔느는 죄책감과 황홀함 사이에서 길을 잃습니다.

 

330여 페이지 가운데 1/3쯤까지 제 마음 속의 별점은 무조건 5개였습니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여주인공, 그녀에게 흠모의 마음과 살인 사실을 고백한 미지의 살인범,

그리고 여주인공이 좋아하면서도 말 한마디 붙여볼 생각도 못하는 호감형 강력계 반장 등

주요인물 대부분 캐릭터도 매력적이었고 그들간의 관계 역시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 엘리키우스라는 자의 편지 속에 언급된 죽어 마땅한 희생자들의 정체는 무엇인지,

그는 왜 하필 잔느에게 위험천만한 살인 고백까지 하는 것인지 무척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런 기대감과 호기심들은 중반부를 넘어가면서 점차 사그라지기 시작했고

클라이맥스와 엔딩쯤엔 왜 초반에 잘 쌓은 심리스릴러의 토대를 이렇게 마무리했나?’라는,

다소 이해할 수 없는 실망감까지 느끼게 됐습니다.

우선, 주인공 잔느는 엘리키우스의 첫 편지를 받은 이후 더 이상 진화하지 않습니다.

엘리키우스의 편지 덕분에 그녀는 조금씩 당당함을 되찾기도 하고,

자신이 흠모하던 에스포지토 반장에게 마음을 열어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작 핵심인 사건에 관해 그녀는 수동적인 역할 외엔 아무 것도 하지 않습니다.

고민과 갈등은 시간이 지날수록 깊어지지만 다음 단계로 도약하지 않습니다.

 

그녀에게 의문의 편지를 보낸 엘리키우스나 그녀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에스포지토 반장 역시

초반에 보여준 신비감이나 매력남으로서의 캐릭터를 전혀 발전시키지 못합니다.

특히 에스포지토 반장은 수사과정에서는 무기력한 경찰 역할에 그치고 있고,

잔느에게 호감을 갖는 과정은 뚜렷한 계기도 없고 감정의 색깔 자체도 모호할 뿐입니다.

형사로서, 남자로서 특별한 캐릭터도 없던 그가

엔딩에서 뭔가 특별한 인물처럼 그려진 대목은 조금도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희생자들이 끔찍하게 살해된 연쇄살인사건이 메인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수사과정과 마무리는 심리스릴러답지 않게 너무 쉽고 안이하게 처리됐습니다.

에스포지토 반장과 마르세유 경찰서 강력계는 연쇄살인사건을 맡은 경찰답지 않게 무기력하고

말 그래도 의욕 없는 월급쟁이 공무원수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 ‘과연 엘리키우스는 누구일까?’, ‘그는 왜 참혹한 연쇄살인극을 펼쳤는가?’,

왜 그는 잔느에게 흠모와 살인이라는 모순된 고백을 했을까?’라는 의문에 대해

심리스릴러다운 특별한 해법을 제시하지 않을까, 나름 기대했지만, 결과는 실망스러웠습니다.

결국, 작품 내내 잔느의 심리적 불안정을 그렸음에도 정작 엔딩은 그와는 무관해보였습니다.

잔느가 평범한 인물이었다고 해도 아무 문제없었을 엔딩이란 뜻입니다.

 

초반의 긴장감을 잘 키웠다면, , 사건이 확산됨에 따라 인물들이 적절히 진화했더라면,

그래서 미처 예측하지 못한 심리스릴러다운 반전과 엔딩이 펼쳐졌다면

애초 마음 먹은대로 별 5개도 부족한 작품이 됐겠지만

그 모든 기대감들이 다소 허무하게 풀린 탓에 결국 별 1.5개를 빼게 됐습니다.

 

국내에 처음으로 소개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은 그녀의 5번째(6번째?) 작품인 그림자입니다.

앞선 작품들보다 먼저 국내에 소개된 걸 보면 대중성이나 완성도에서 뛰어나다는 반증일 텐데

그런 면에서, ‘유의미한 살인이 다소 아쉽긴 했어도 그림자는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대체로 출판사나 독자들의 서평들이 그 작품을 그녀의 대표작이라 칭한 걸 보면

이번에 느낀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시켜 주리라 기대해도 괜찮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원제는 ‘Terminus Elicius’입니다.

사전을 보니 Terminus로마신화에 나오는 경계를 다스리는 신’, 또는 종착역이란 뜻인데

이런 원제가 어떻게 유의미한 살인이란 번역제목이 된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혹시나 하고 찾아보니 국내에 출간된 카린 지에벨의 작품 가운데

그림자’(Juste une ombre) 외에는 모두 원제와 번역제목 사이의 거리가 멀어보였는데,

독자의 눈길을 끌기 위한 출판사 나름의 노력이라는 것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원제를 직역했어도 큰 무리가 없었을 거란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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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파더 1 브론크스 형사 시리즈
안데슈 루슬룬드.스테판 툰베리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8년 10월
평점 :
절판


완전무장한 강도단이 현금수송 차량을 털고 경비원을 무차별 폭행한 사건이 일어난다.

스톡홀름 시경의 브론스키 형사는 유례없는 잔인함에 경악하며 수사에 착수한다.

경찰을 비웃듯 강도단이 연이어 은행을 터는 동안 그저 제자리만 맴돌던 브론크스 형사는

군이 관리하던 무기고가 6개월 전 털렸다는 소식을 듣곤 강도단의 소행임을 직감한다.

CCTV 속 강도단의 행적을 면밀히 주시하던 브론크스는 자신의 경험을 떠올리며 추리한 끝에

강도단 멤버들이 어린 시절 학대당하며 자랐고, 친형제로 구성됐을 가능성에 주목한다.

한편 가정폭력사건 이후 아내와 아들들에게 절연 당하다시피 고립된 채 홀로 살던 이반은

텔레비전 뉴스 속에 등장한 복면 강도단에게 미묘한 기시감을 느낀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안데슈 루슬룬드는 전작인 비스트’, ‘쓰리세컨즈에서 버리에 헬스트럼과 호흡을 맞췄다가

이번에는 시나리오 작가 스테판 툰베리와 함께 이 작품을 집필했습니다.

공동집필임에도 안데슈 루슬룬드가 모든 작품에서 메인 작가 역할을 맡은 걸로 보이는 이유는

세 작품 모두 비슷한 톤인 것은 물론 아쉬움과 미흡한 점까지 꼭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더 파더의 메인 코드는 가족의 폭력희대의 연쇄 은행강도사건입니다.

아버지로부터 잔혹한 폭력성을 물려받은 레오 형제들은 희대의 연쇄 은행강도단이 됩니다.

군대의 무기를 탈취하여 스웨덴 전역의 은행을 터는 것은 물론

그 과정에서 살인까지 이르진 않더라도 수많은 사람을 공포에 떨게 만듭니다.

, 아버지의 폭력으로 가족이 해체된 탓에 폭력을 지독히도 혐오하는 형사 브론크스는

상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폭력덩어리로 보이는 은행강도단 수사에 전력을 쏟습니다.

 

범인의 아버지와 형사의 아버지 모두 폭력의 화신이었고 결과적으로 가족을 붕괴시켰는데,

한쪽의 아들은 아버지로부터 유전된 폭력을 더 큰 폭력으로 진화시켰고,

다른 한쪽의 아들은 폭력에 대한 극도의 혐오감을 발판으로 폭력을 막는 형사가 된 셈입니다.

그런 면에서 더 파더는 가족폭력의 상반되는 양면성을 암시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축으로 전개됩니다.

어린 레오가 존경과 증오의 대상인 아버지로부터 폭력을 전수받는 과거 이야기와,

스톡홀름 경찰 브론크스가 레오 형제의 은행강도사건을 수사하는 현재 이야기입니다.

작가는 3형제 중 맏아들인 레오가 어떻게 아버지로부터 폭력성을 전수받았으며

어떻게 두 동생에게 카리스마를 발휘하여 연쇄강도단으로 진화하는지 설명합니다.

동시에, 폭력에 대한 본능적 혐오감이 자아낸 특별한 촉을 지닌 형사 브론크스가

어떤 방식으로 은행강도단의 정체와 그들간의 특별한 유대감을 밝히는가를 설명합니다.

 

안데슈 루슬룬드가 버리에 헬스트럼과 호흡을 맞췄던 쓰리세컨즈도 그랬지만,

더 파더역시 분권이 필요할 정도로 800페이지에 육박하는 두툼한 분량을 자랑합니다.

하지만 그만큼의 분량에 비해 주제, 서사, 캐릭터는 다소 허약한 편입니다.

우선 두 주인공(레오 VS 브론크스)의 기계적 설정은 그다지 감흥이 강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폭력이 낳은 상반된 캐릭터라는 점 자체는 인상적이지만,

너무 완벽할 정도로 대조된 점은 읽는 내내 위화감만 불러일으켰습니다.

100% 대척점에 선 인물들을 그리기 위해 마치 자로 재고 설계한 듯한 느낌이랄까요?

 

, 스릴러에서 가장 중요한 주인공의 동기와 목표가 부실하다는 것도 문제로 보이는데,

레오와 두 동생이 왜 하필 이 시점에 와서 연이어 은행을 털려는 건지,

그 많은 돈을 훔쳐서 무엇을 하려는 건지, 얼마만큼의 돈을 훔쳐야 범행을 그치려는 건지 등

레오의 범행 전반에 대한 설정이 다 읽은 뒤에도 잘 납득되지 않았습니다.

브론크스의 경우 사건을 수사하는 형사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만의 특별한 으로 범인들의 윤곽만 포착할 뿐 구체적인 수사 모습은 별로 없는데,

대신 그 자리엔 아버지의 폭력이 남긴 트라우마에 대한 한없는 고찰과 회한,

그리고 (등장이유를 전혀 알 수 없는) 연인과의 불화에 대한 자책만 가득합니다.

 

폭력 자체에 관한 설정도 모호한 편인데,

레오 일당은 극단적인 폭력성을 보이긴 해도 가능하면 사람을 다치지 않게 하려고 애씁니다.

배려가 뭘 뜻하는지, 보통의 폭력성과 무슨 차이가 있는 건지 전혀 설명하지 않습니다.

더 문제는 독자 입장에선 꽤나 인간적으로 보이는 레오의 이 배려 깊은 폭력

유독 형사 브론크스에게만은 용서할 수 없는 지독한 폭력으로 보였다는 점입니다.

말하자면, 레오의 배려 깊은 폭력, 브론크스의 뜬금없는 폭주수사도 이해불가입니다.

결국, 범인도 형사도 ?’라는 질문에 대해 제대로 대답하지 못한 채,

오로지 작가에 의해 부여받은 경로를 따라 그저 직진만 할 뿐입니다.

 

그 외에도,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조연들(주로 여자 캐릭터),

묵인하고 넘어가기엔 꽤 자주 눈에 띄는 오타들, 불필요해 보이는 사족 같은 분량 등

장점이나 미덕보다는 아쉬움이 훨씬 더 많이 눈에 띄는 작품이었습니다.

특히 전작들과 비슷한 부분에서 비슷한 종류의 아쉬움을 느꼈기에 실망감이 더 컸습니다.

2013년에 쓴 비스트서평에 안데슈 루슬룬드의 후속작 한 편쯤은 더 보고 싶다.”고 했는데

이후에도 그가 참여한 작품을 계속 찾아 읽게 될지는 자신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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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가능성은 이미 떠올렸다
이노우에 마기 지음, 이연승 옮김 / 스핑크스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특이한 제목과 표지만큼이나 기발한 발상과 독특한 이야기를 지닌 작품입니다.

기적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트릭이 성립하지 않음을 입증하려는 탐정우에오로 조는

수수께끼를 푸는 것이 당연한 보통의 탐정 주인공과는 전혀 반대의 길을 걷는 인물입니다.

말하자면, 누구도 쉽게 풀지 못할 것 같은 수수께끼 같은 사건이 벌어졌는데

주인공은 그것이 현실적 트릭에 의한 범행이 아니라 기적에 의한 결과라고 주장하는 반면,

오히려 적대세력들이 기적이란 없으며 100% 트릭에 의한 범행임을 입증하려 분투(?)합니다.

 

앞뒤가 뒤바뀐 듯한 주인공과 적대세력의 설정도 흥미롭지만

다양한 장르적 특징을 지닌 점도 눈여겨 볼 대목입니다.

이 작품의 장르를 굳이 한마디로 규정하자면 논리 미스터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트릭에 의한 실제 사건임을 주장하는 적대세력과 기적에 의한 결과를 주장하는 우에오로는

처음부터 끝까지 말 그대로 논리와 추론의 성찬 또는 전쟁을 벌이는데,

간혹 이 논리 싸움이 너무 복잡해진 나머지 독자를 혼란스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 외에 이 작품은 판타지, 무협, 휴먼드라마로서의 미덕도 함께 지니고 있는데,

일단, 주인공 우에오로 조는 기적을 주장하는 세계관 외에도

파란 머리, (두 눈동자의 색이 다른) 오드 아이, 늘 걸치고 다니는 붉은 외투 등

현실적 인물이라기보다 판타지나 애니메이션 속 캐릭터처럼 느껴집니다.

, 차례차례 등장하여 우에오로 조와 트릭 대결을 펼치는 기적론자들은

등장하는 모양새나 내뿜는 포스 모두 무림의 고수를 연상시키는 인물들입니다.

그리고, 막판에 드러나는 사건의 진실과 우에오로 조가 기적에 연연해온 이유는

미스터리를 넘어 휴먼드라마의 향기를 풍기기도 합니다.

 

우에오로 조가 기적을 입증하려는 사건은 10여 년 전 벌어진 신흥종교집단의 자살사건입니다.

당시 유일한 생존자였던 소녀가 뒤늦게 사건의 진실을 알고 싶다며 우에오로를 찾아와선

누구도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이야기를 털어놓습니다.

한 소년이 집단자살의 현장에서 자신을 구해낸 뒤 안전한 장소로 옮겨줬는데,

한참 후 깨어나서 살펴보니 그 소년은 머리가 잘린 채 죽어 있었다.

신흥종교집단의 거주지는 외부와 차단된 곳이었고 나머지 사람들은 이미 죽은 상태였다.

그럼 내가 그 소년을 죽인 것일까? 아니면 누군가 그 소년을 죽인 뒤 내 곁에 둔 것일까?

확실하진 않지만 그 소년이 자신을 옮길 당시 이미 머리가 잘린 상태였던 것 같기도 하다.”

 

우에오로 조는 여러 날의 조사 끝에 기적임을 선언합니다.

, 소녀는 범인이 아니며, 소년은 머리가 잘린 채 기적을 통해 소녀를 구했다는 얘깁니다.

우에오로 조는 달리 그 소년의 죽음을 설명할만한 트릭이 없기 때문이라는 설명과 함께

추정 가능한 모든 트릭과 그것이 실현 불가능함을 설명한 수백 장의 보고서를 내놓습니다.

하지만 그때부터 우에오로 조의 논리를 반박하는 기적론자들이 하나씩 등장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추리한 트릭으로 소년의 죽음을 입증하곤 우에오로의 기적론을 반박합니다.

문제는 그들이 추리한 트릭이 개연성이 없거나 터무니없더라도

우에오로는 명확한 근거를 갖고 그 트릭이 불가능함을 입증해야 한다는 점입니다.

 

독특하긴 해도 사건, 캐릭터, 기적에 관한 논쟁 등 다소 생경한 코드들이 버무려진 탓에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무엇보다 가능성 있는 모든 트릭을 부정함으로써 기적을 입증한다는 설정이 논란거리인데,

실제로 적대세력 중 한 명은 우에오로의 기적 입증법을 간결하게 부정해버립니다.

모든 가능성이란 다시 말해 무한을 뜻하지. 영겁의 시간이 주어져도 다 열거할 수 없다.

즉 이 탐정의 기적을 증명하는 방법론 자체가 탁상공론, 그림의 떡인 거다.”

비록 우에오로가 수백 장에 달하는 보고서를 통해 가능한 모든 트릭을 부정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가능한 모든 트릭의 전부라고 할 수는 없다는 뜻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가능한 모든 트릭을 전부 열거할 수는 없겠지만요.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은 물론 후속작도 꽤 호평을 받은 것 같습니다.

번역하신 이연승 님 역시 이 작품의 새로운 시도와 신선한 서사를 극찬하셨는데,

개인적으로는 호불호의 딱 중간지점쯤 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기적을 입증하려는 주인공자체가 설득력이 좀 약했던 것 같고,

우에오로를 꺾으려는 적대세력의 비현실성도 한몫 거들었다는 생각입니다.

후속작인 성녀의 독배‘2017년 본격 미스터리 베스트10’ 1위에 올랐다는데

이연승 님에 따르면 첫 편의 아쉬움이 어느 정도 해소됐다고 하니

살짝 기대와 관심을 가져도 괜찮을 것 같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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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들의 저택
오리하라 이치 지음, 김성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7월
평점 :
절판


후지산 기슭 숲속에서 백골 시체가 발견된다.

경찰은 반년 전 실종된 고마쓰바라 준으로 추정하지만,

준의 어머니 다에코는 아들이 죽었을 리 없다고 믿으며 아들의 일생을 책으로 엮으려 한다.

그리하여 그녀에게 고용되어 준의 전기를 쓰게 된 유령작가(고스트라이터) 시마자키는

날마다 고마쓰바라 저택을 방문하여 준에 대한 자료를 조사한다.

준이 자기와 같은 작가지망생이었다는 점에 매력을 느낀 시마자키는

준의 지인들을 샅샅이 찾아다니며 인터뷰를 한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의 주변을 맴도는 수상한 인물이 있음을 알아채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오리하라 이치의 작품은 읽을 때마다 색깔과 톤이 너무 다양해서

서술트릭의 1인자라는 타이틀이 오히려 그에 대한 선입견을 갖게 만들었다는 생각입니다.

서술트릭의 진수인 도착 시리즈와 다양한 서술트릭의 만찬장인 단편집 그랜드맨션

그가 지닌 타이틀의 본색을 유감없이 보여주는 작품들이지만,

그 외에도 유쾌 발랄 미스터리 단편집 일곱 개의 관이라든가

기괴한 호러 분위기를 가미한 학교 폭력과 복수에 관한 장편 침묵의 교실’,

원죄(冤罪)에 관한 돌직구 같은 미스터리 원죄자등을 보면

그의 스펙트럼이 얼마나 넓고 다양한지 알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인들의 저택1993년 일본에서 출간됐고, 국내에는 2011년에야 소개된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요즘 작품들에 비하면 다소 올드한 감이 없지 않아 있긴 하지만,

오리하라 이치의 모든 무기(?)가 총출동한 듯한 느낌을 주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작가 스스로 원죄자와 함께 자신의 최고의 작품이라 칭한 것도,

또 평단으로부터 오리하라 미스터리의 총결산이란 극찬을 받은 것도 그 때문일 것입니다.

 

본문 외에 인터뷰, 소설 속 소설, 연표,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모놀로그 등

다양한 형식들이 한꺼번에 녹아있어 독특한 구성을 지닌 것은 물론

서사 역시 미스터리와 호러를 넘나들고 있어서 어떤 때는 몽환적인 느낌을 주기도 합니다.

특히 주요 무대이자 판타지 같은 느낌까지 주는 후지산 기슭의 깊은 숲속은

한번 발을 들이면 절대 살아 돌아올 수 없는 음험한 분위기까지 발산하고 있고,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도 호러물에 더 어울리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의 집착 아래 성장하며 작가로서 천재성을 발휘했지만

그만큼의 광기까지 얻은 끝에 괴로워하다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버린 아들,

사라진 아들의 죽음을 믿지 않으며 전기를 써달라고 부탁하는, 어딘가 기이한 면모의 어머니,

그 부탁을 받고 아들의 지인들을 탐문하면서 불길한 기운과 호기심을 갖게 되는 유령작가,

그 유령작가에게 노골적인 욕망을 들이대는 실종된 남자의 의붓여동생,

그 유령작가의 뒤를 밟는 듯한 미지의 키 큰 남자중년의 여자’,

그리고 전기가 완성될 무렵 유령작가에게 일어나는 의문의 폭력과 위협 등

다양하고 독특한 캐릭터가 이끄는 요약 불가 스토리500여 페이지에 걸쳐 전개됩니다.

 

다만, 이 작품의 가장 큰 약점이자 아쉬움은 어중간한 행동 동기와 미스터리 해법입니다.

실종된 아들, 아들의 전기를 의뢰한 어머니, 전기를 집필하는 유령작가 등 주요인물은 물론

아들의 의붓여동생, 아들의 의붓아버지, 유령작가의 부모 등 조연들에 이르기까지

대다수 인물들의 행동 동기는 어딘가 아귀가 맞지 않는 결과론적인 느낌을 줍니다.

무엇보다 호러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다소 억지스런 행동들을 계속 벌이는데,

다 읽고 보면 그들이 왜 그런 행동이나 말을 한 건지 잘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미스터리 해법 역시 앞서 다양한 구성과 캐릭터를 통해 쌓아온 서사에 비하면

너무 싱겁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허망하게 마무리됩니다.

심지어 아직 이야기가 다 안 끝났는데도 급하게 막을 내린 듯한 인상도 받았는데,

그러다 보니 이 작품의 주인공이 누구였나, 이 작품의 핵심 미스터리는 무엇이었나, 라는

아주 근본적인 의문까지 품게 됐습니다.

독특한 작품임에도 틀림없고, 오리하라 이치의 무기가 총출동한 작품인 것도 맞지만,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듯한 엔딩 때문에 (심하게 말하면) 용두사미가 된 느낌을 받았고,

결론적으로는 너무 많은 걸 담으려다가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결과물이 나왔다는 생각입니다.

그래도 오리하라 이치의 색다른 맛을 보고 싶은 독자라면 한번쯤 권할 만한 작품이긴 합니다.

그를 트릭의 대가로만 알고 있는 독자에겐 정말 별미처럼 읽힐 수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인터넷 서점을 보니 오리하라 이치의 최근 국내 출간작이 2015년의 일곱 개의 관입니다.

일본에서도 활동이 뜸한 건지 국내 출간이 미뤄지고 있는 건지 잘 모르겠지만,

작품마다 강한 개성과 특별한 매력을 발휘하는 그의 신작은 언제든 환영하고 싶습니다.

아직 못 읽은 도착 시리즈일부와 () 시리즈일부부터 소화하면서

오리하라 이치의 반가운 신작 소식을 기다려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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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온 레인 데이브 로비쇼 시리즈
제임스 리 버크, 박진세 옮김 / 네버모어 / 2018년 11월
평점 :
절판


무죄를 주장하는 사형수를 찾아간 뉴올리언스 경찰서의 데이브 로비쇼 경위는

그에게서 라틴계 조직이 자신을 노린다는 이야기를 듣는다.

자신과 라틴계 조직과의 접점을 찾던 데이브 로비쇼는

몇 주 전, 늪에서 낚시를 하다 우연히 흑인 여성의 시체를 발견한 사실을 떠올린다.

관할 지역의 보안관이 시체 부검을 하지 않은 채 단순 익사로 처리했지만

그 사건을 쉽게 넘기고 싶지 않았던 데이브 로비쇼는 독자적인 수사에 착수한다.

하지만 얼마 안 돼 일개 형사로서는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에 발을 담갔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미시시피 미시시피’, ‘기울어진 세상’, ‘액스맨의 재즈

미국 남부를 무대로 한 장르물들은 항상 제 시선을 끌곤 했습니다.

미국이지만 미국 같지 않은 곳, 프랑스의 유산이 화석처럼 남은 곳, 그리고 재즈의 고향 등

다양한 지리적, 역사적 관심거리가 많은 곳인데다 항상 불온한 기운까지 느껴지는 곳이라서

그곳을 무대로 한 미스터리나 스릴러는 뭔가 특별한 게 있을 거란 기대를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다 읽은 뒤의 만족도는 조금씩 다르긴 했어도

여전히 미국 남부라는 무대는 제겐 호기심을 자극하는 배경임에 틀림없습니다.

 

네온 레인은 루이지애나 주와 뉴올리온스라는 도시의 색채가 무척 진한 작품입니다.

작가는 그곳의 풍경과 사람들이 지닌 남부 특유의 이미지 설명에 꽤 많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겉으론 화려하지만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거리와 건물과 식물들,

직업과 인종을 불문하고 언제 폭발해도 이상하지 않을 긴장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사람들,

그리고 달콤한 재즈가 흐르는 가운데 살인과 폭력과 마약이 난무하는 정글 같은 분위기 등

작품 전반에 걸쳐 불온한 미국 남부가 상세히 묘사되고 있습니다.

 

주인공인 데이브 로비쇼는 베트남 참전 이력이 있는 거친 뉴올리온스 경찰입니다.

케이준(주로 루이지애나주에 거주하는 강제 이주당한 프랑스계 캐나다인)인 그는

무척 거칠고 다혈질이지만 동시에 누구보다 원칙과 법을 믿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그는 우연히 발견한 흑인 여자의 시신 때문에 스스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에 휘말립니다.

라틴계 폭력배와 이탈리아 마피아는 물론 CIA, 재무부 수사관과도 충돌하는 사태에 이르지만

그는 그만의 방식으로 흑인 여자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그의 목표는 영웅이 되는 것이 아니라 진실과 정의뿐입니다.

하지만 그 목표를 위해 지나치게 돌직구처럼 좌충우돌한 나머지

징계를 받거나 유치장에 갇히거나 동료들로부터 왕따를 당하기도 합니다.

 

재미있게 읽은 건 맞지만 나름 아쉬운 점도 꽤 많은 작품입니다.

우선 거칠지만 시적 은유로 가득한 걸작 누아르라는 홍보카피처럼 은유적 표현이 꽤 많은데,

때론 그 은유가 너무 지나쳐 좀처럼 페이지를 넘기지 못하게 만드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각주도 꽤 많은 편인데, 그중에는 은유를 설명하기 위한 각주가 적잖은 편이라

스토리에 몰입하는 것을 방해한다는 느낌을 자주 받기도 했습니다.

 

가장 아쉬운 부분은 사건 자체가 명확하지 않고, 누가 적인지 모호하다는 점입니다.

발단은 흑인 여자의 죽음인데 뒤로 갈수록 이런저런 거물들이 계속 개입하면서

주인공 데이브 로비쇼가 추적하는 최종목표가 누군지 점차 애매해지기 시작합니다.

다 읽고도 결국 누가 응징된 것인지, 어떤 정의가 구현된 것인지 정확히 파악하기 어려웠고,

꽤 많은 죽음이 등장하지만 그 죽음들이 어떤 의미를 지닌 것인지 불투명해 보였습니다.

대신 그 자리는 데이브 로비쇼의 베트남 참전 트라우마가 차지하고 있습니다.

물론 시리즈 첫 편이라 그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려는 의도라는 건 충분히 알겠지만,

때론 주객이 전도된 듯 보일 정도로 베트남 트라우마가 장황하게 설명된 게 사실입니다.

 

데이브 로비쇼는 여러 면에서 마이클 코넬리가 창조한 해리 보슈를 떠올리게 합니다.

해체된 가족, 돌직구 같은 정의감, 베트남 참전이 남긴 트라우마 등이 둘의 공통점인데

그래서인지 읽는 동안 종종 해리 보슈의 향기가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확실한 차이라면 데이브 로비쇼의 지독한 알코올중독증과 거침없는 폭력적 성향이랄까요?

 

작가의 이력을 보니 지금까지 이 이름을 몰랐다는 게 의아할 정도입니다.

2018년 현재까지 38권의 작품을 발표한 것은 물론

범죄소설 작가들 중 전설로 불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작가라는 찬사까지 받았으니

꽤 많은 스릴러를 읽었거나 읽진 않았어도 이런저런 소문을 섭렵했다고 자부하는 제 입장에선

내가 왜 이 작가의 이름조차 들어보지 못한 거지?’라는 의문이 드는 게 당연한 일입니다.

물론 그래서 데이브 로비쇼 시리즈가 더 궁금해진 것도 사실이지만요.

이후 작품도 네버모어에서 계속 출간된다고 하니

뉴올리언스 경찰 데이브 로비쇼가 어떤 사건을 맡고 어떻게 성장할지 지켜보려고 합니다.

물론, 앞서 언급한 아쉬움들이 어느 정도는 해소되기를 바라면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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