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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트기 힘든 긴 밤 ㅣ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11월
평점 :
공공장소에 시체를 유기하려던 용의자가 수백 명의 목격자 앞에서 체포되었다.
증인과 증거, 진술을 확보한 검찰이 용의자를 정식 기소하지만,
그는 재판정에서 갑자기 진술을 번복하며 사건을 새로운 국면으로 이끈다.
재수사 과정에서 피해자인 전직 검찰관이
십여 년 전의 살인사건의 진실을 끈질기게 조사해 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는데...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젊음, 일, 명예, 미래, 가정뿐만 아니라
자신의 생명까지 바친 한 남자의 삶이 조금씩 베일을 벗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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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대륙의 힘’이 느껴지는 중국 미스터리를 만났습니다.
‘옮긴이의 말’에 따르면 ‘사악한 최면술사’의 주하오후이, ‘심리죄’의 레이미와 함께
중국 추리소설계 3대 인기작가로 손꼽힌다고 하는데
다분히 개인적인 견해지만 쯔진천은 그들과는 체급 자체가 달라 보입니다.
물론 이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워낙 묵직하고 견고해서 그런 느낌이 들었을 수도 있지만,
캐릭터를 묘사하는 힘이나 사건을 풀어가는 방식 모두 대작의 분위기를 내뿜는 작품입니다.
굳이 소감을 비교하자면 찬호께이의 ‘13.67’의 압도감과 비슷하다고 할까요?
제목이 좀 독특한데, 실은 원제인 장야난명(長夜難明)을 그대로 풀어쓴 번역제목입니다.
말하자면, 지난한 어둠의 시간을 지나 어렵사리 만난 밝음이란 뜻인데,
(중국에서는 정치적 암흑기를 비유한 말이라고도 합니다.)
이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인 전직 검찰관 장양은
신참 시절에 휘말린 한 살인사건의 진실을 캐고 거대권력이 짓밟은 피해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끝이 없어 보이는 어둠 같은 10년의 세월을 자신의 모든 것을 내팽개치며 질주한 인물입니다.
시작은 무척 미미했습니다.
무난한 승진가도를 앞두고 골치 아픈 사건을 떠맡기 싫었던 장양은
자의반 타의반으로 미성년자 성폭행 의혹을 제기했던 한 남자의 죽음에 관여하게 되는데,
수사를 진행할수록 서서히 드러나는 추악한 이면으로 인해
자신의 미래를 붕괴시킬지도 모르는 더럽고 깊은 늪에 발을 담그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결정적 증인은 실종되거나 살해되고, 중요한 증거와 단서 역시 훼손되거나 사라지면서
장양의 수사는 10년 동안 한시도 평탄한 길을 걷지 못합니다.
그의 곁에는 돌직구 경찰 주웨이, 재테크에도 능한 타고난 법의관 천밍장이 있었지만,
경찰과 검찰의 비호를 받는 재벌, 폭력조직, 권력자의 카르텔을 깨기엔 역부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10년이 지난 어느 날, 이들은 희대의 ‘살인극’을 기획합니다.
그것만이 10년 전의 진실을 밝힐 수 있는 유일한 해법이라 여겼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특별수사팀장 자오톄민과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수학과 교수 옌량이
자백을 번복한 살인범 장차오를 취조하며 파묻힌 진실을 캐는 현재 시점의 이야기이고,
또 하나는 장차오에게 살해된 장양이 추악한 권력자들과 싸워온 지난 10년의 기록들입니다.
민간인임에도 수사팀에 합류한 옌량은 살인범 장차오에게 숨은 의도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곤
수사팀장인 자오톄민에게 피살된 장양에 관해 조사할 것을 권합니다.
그리고 장양의 과거를 알면 알수록 장차오의 범행이 결코 평범한 살인이 아님을 깨닫습니다.
현재 시점의 자오톄민과 옌량의 조사에 발맞춰 장양의 과거사가 한 챕터씩 전개되는데,
그 내용은 앞서 언급했듯 ‘장야난명’이라 할 수 있는 장양의 투쟁 기록이기도 합니다.
사실, 힘없고 외롭지만 정의감 하나로 똘똘 뭉친 주인공이
거대한 부정부패 세력과 싸우는 이야기의 전형적 요소가 빼곡하게 들어찬 작품이긴 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만의 미덕이라면 10년 동안 내내 패배의 쓴맛만 들이켰던 장양 일행이
더는 밀릴 수 없는 막판에 이르러 도박처럼 내던진 마지막 카드의 의외성과 비장미입니다.
독자는 중반부쯤에 이르러 살인범 장차오의 진의를 얼핏 깨달을 수는 있지만,
장양 일행의 ‘마지막 카드’가 10년 전의 진실을 끌어올리는 과정을 그린 클라이맥스는
제법 가슴을 먹먹하게 만드는 극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다만, 장양의 과거사가 상투적이긴 해도 묵직한 서사의 힘을 지닌 반면,
자오톄민과 옌량의 현재 시점의 수사는 다소 수동적이거나 모호한 부분이 많고,
장양의 과거사 챕터와 유기적으로 맞닿지 못했다는 느낌이 든 것도 사실입니다.
현재 시점의 주인공들이 자신들만의 힘으로 과거의 진실을 찾아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지금은 ‘진술 듣고 추리하기’ 이상의 특별한 매력을 찾아보기 힘들기 때문입니다.
다 읽고도 “자오톄민과 옌량이 뭘 했지?”라는 의문이 든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이었고,
별 0.5개가 빠진 것도 바로 같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옌량이 주인공을 맡은 ‘추리의 왕’ 시리즈의 마지막 편이라고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쯔진천의 작품 중 한국에 처음 소개된 걸 보면
아마 대중성이나 작품성 면에서 가장 뛰어난 작품으로 보이는데
그렇다 하더라도 쯔진천의 다른 작품들에도 관심이 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중화권 미스터리를 꽤 읽었지만 나름 작품마다 편차가 좀 있다고 느꼈고,
찬호께이 외에는 후속작을 기대하는 작가가 딱히 없었는데,
이제 그 목록에 쯔진천을 올려놓아도 될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