굽이치는 달
사쿠라기 시노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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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호텔 로열로 사쿠라기 시노를 처음 만난 이후

유리갈대’(2016), ‘빙평선’(2018) 2년마다 한 편씩 그녀의 작품을 읽어왔는데,

올해는 욕심을 좀 내서 빙평선에 이어 2015년에 출간된 굽이치는 달까지 읽게 됐습니다.

 

모두 6편의 단편이 연작 형태로 수록된 작품집인데,

언제나 그렇듯 이야기의 주 무대는 훗카이도 동부의 작은 항구도시 구시로입니다.

작가 본인이 나고 자란 곳이기도 한 구시로는 무척 특이한 분위기를 내뿜는 곳입니다.

넓은 습원(濕原)이 자리 잡은 탓에 신비함, 스산함, 애틋함이 녹아있는 것 같고

마치 안개 속의 풍경처럼 아스라한 느낌까지 주는 곳입니다.

바다에서 살아있는 생물처럼 다가오는 해무 때문에 도시 전체가 갯내에 휘감겨 있었다.”

빙평선의 수록작 중 한 편에서 언급된 구시로에 대한 압축적인 묘사인데,

이런 분위기는 사쿠라기 시노의 모든 작품에 전반적으로 녹아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다만, ‘굽이치는 달은 구시로의 독특한 분위기가 덜 배어있는 편인데,

그것은 이야기의 중심에 위치한 인물이 도쿄 변두리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를 이끄는 주인공들은 모두 구시로에 위치한 도립 습원고등학교 독서부 멤버들입니다.

이들이 20대 초반이었던 1984년부터 약 25년간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데,

각각의 인물은 단편 하나하나의 주인공을 맡아 자신만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동시에

1984년 스무살 연상의 유부남과 야반도주한 한 친구와의 인연을 담담히 그리고 있습니다.

 

스가 준코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삿포로에서 화과자집 종업원으로 일하던 중

사장이자 유부남인 교이치로와 불륜에 빠진 뒤 임신까지 한 상태에서 도쿄로 야반도주합니다.

1984년의 주인공 기요미는 준코가 야반도주 직전 마지막으로 연락한 친구였고,

1990년의 주인공 모모코는 과거의 준코처럼 유부남과 불륜에 빠진 상태에서

난 행복하게 잘 살고 있다는 준코의 편지를 받곤 그 행복을 확인하려고 도쿄로 찾아갑니다.

1993년의 주인공 야요이는 준코에게 남편을 빼앗긴 삿포로 화과자집 주인으로,

7년 만에 모든 것을 정리하기 위해 남편과 준코가 있는 도쿄로 향합니다.

2000년의 주인공 미나에는 학생 때부터 흠모했던 국어선생 다니카와와 결혼을 앞두고 있는데

그는 학창시절의 준코가 푹 빠져 있던 상대이기도 합니다.

2005년의 주인공 시즈에는 준코의 엄마로, 평생 여러 남자에게 전전하느라 준코를 방치했다가

60대가 돼서야 자신의 미래가 두려운 나머지 준코를 찾아가기로 결심합니다.

2009년의 주인공 나오코는 독서부 멤버 중 유일한 미혼으로,

부모의 죽음에 죄책감을 갖고 있던 중 준코를 통해 마음의 안식을 얻게 됩니다.

 

이렇듯 모든 이야기의 중심에 준코가 놓여있지만, 정작 준코가 화자인 작품은 없습니다.

말하자면, 모든 화자가 각자의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 하지만,

동시에 준코에 대해, 준코와의 인연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셈입니다.

무엇보다 25년이라는 시간적 배경은 이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과 인연이란 것이

얼마나 짙고, 깊고, 되돌리기 어렵고, 잊기 어려운 것인가를 설명하는 중요한 설정입니다.

그들 사이의 관계와 감정과 인연이란 단어 하나로 규정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숱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애()든 증()이든 한 방향으로만 치닫지도 않습니다.

 

이런 관계와 감정과 인연을 지켜보는 일은 설령 소설이라 하더라도 만감을 교차하게 만드는데

정곡을 콕콕 찌르면서도 담백하고 알싸한 사쿠라기 시노의 문장으로 그것들을 읽다 보면

어느 새 독자 스스로 준코가 되거나 그 친구들, 엄마, 남편을 빼앗긴 여자가 되어

한없이 깊게 감정이입하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쿠라기 시노가 그려낸 구시로의 아련한 모습을 맛보지 못한 건 무척 아쉽지만,

6명의 화자와 1명의 중심인물이 이끌어가는 특별한 분위기의 굽이치는 달

개인적으론 호텔 로열다음으로 그녀의 베스트로 꼽고 싶은 작품입니다.

국내 출간된 작품 중 아무도 없는 밤에 피는순수의 영역만 못 읽었는데,

특히 (국내출간작 중) 유일한 장편인 순수의 영역이 무척 궁금하고 기대가 됩니다.

언제쯤 또 그녀의 신간이 나올지 모르는 상태에서 아껴 읽어야 할 형편인 건 분명한데,

마음 같아선 당장 두 작품 모두 장바구니에 넣고 싶은 심정이니, 참 난감할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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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메시스의 사자 와타세 경부 시리즈 2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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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타세 경부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의 제목이 테미스의 검이었으니 다분히 의도적인 작명으로 보이는데,

테미스가 법의 여신인 반면, 네메시스는 (흔히 알기로) 복수의 여신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카야마 시치리는 네메시스의 올바른 어원은 의분(義憤)’이라고 주장합니다.

, ‘나와 직접적인 이해관계는 없지만 도의에 어긋나고 불공정한 것을 보며 느끼는 분노인데

댓글이나 청원 등을 통해 의분을 드러내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지만

만약 살인이 의분의 창구로 이용된다면 그건 꽤 심각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번에 와타세 경부가 맞닥뜨린 사건의 진범은 살인현장에 네메시스라는 글자를 남겼습니다.

그 의미가 복수든 의분이든 결국엔 사적인 응징을 의미한다는 건데,

특히 피살자들이 과거 흉악범들의 가족이란 점 때문에 경찰과 검찰은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 흉악범들은 사형이 확실하다는 예상을 깨고 모두 무기 또는 장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비록 감금된 상태이긴 해도 분명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게 사실입니다.

와타세는 과거 피해자 유족들을 조사하지만 그들에겐 동기 외엔 혐의점을 찾기 어렵습니다.

그러자 누군지도 모를 제3자가 의분을 참지 못해 복수를 대행한다는 심증과 함께,

교도소 안의 흉악범 대신 그 가족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추리만 남게 됩니다.

이럴 경우 잠재 용의자는 무한대로 늘어나고 범인의 범행 역시 언제 그칠지 알 수 없게 돼서

와타세와 그의 파트너 고테가와가 속한 사이타마 현경은 물론

이 사건에 투입된 도쿄지검 차장검사 미사키 역시 난감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전작인 테미스의 검이 원죄(冤罪, 억울하게 덮어쓴 죄)의 문제를 정면으로 다뤘다면

네메시스의 사자는 사적 복수, 사형제도, 사법시스템, 가해자-피해자 가족의 비극 등

좀더 광범위하지만 좀더 현실적인 딜레마를 깊고 폭넓게 다루고 있습니다.

연이은 흉악범 가족 피살사건이 벌어지고 범인의 의도가 사적 복수라는 게 밝혀지자

잠시 충격을 받았던 일반시민들은 이내 국가를 원망하고 범인을 영웅 시 여기기 시작합니다.

시민들의 분노는 검찰, 사법부, 법무성을 가리지 않고 폭발합니다.

와타세와 미사키는 어쩌면 이런 분노야말로 범인의 진짜 목적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애초 흉악범에게 사형을 언도하고 집행했더라면 이 복수극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

흉악범이 사형을 면하면 피해자는 두 번 죽습니다.”

사형 하나 못 하는 게 무슨 법치국가냐! 다음 법무대신은 네메시스!”

 

나카야마 시치리는 사적 복수사형제도의 문제라는 묵직한 두 개의 소재를

하나의 큰 사건 속에 잘 녹여냈습니다.

, ‘네메시스의 사자로 불린 범인 한 사람의 스토리를 넘어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치유될 수 없는 피해자 유족의 깊은 상처,

단지 가해자의 가족이란 이유만으로 사회적으로 매장당하고 따돌림 받아야 하는 억울한 상황,

그리고 온정주의적인 판결을 반복했던 한 판사의 고뇌 등 다양한 주제를 다각도로 그립니다.

더불어,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미스터리의 꽃인 막판 반전에도 공을 들인 모습입니다.

 

다만, 이야기의 상당부분이 사형제도나 사적 복수에 대한 원론적 설명에 할애된 점이라든가,

주인공 와타세가 이 두 문제에 대해 모호하고 중립적인 태도를 보인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여러 등장인물을 통해 일본의 사법체계에 대해 설명한 점 자체는 나쁘지 않았지만,

비슷한 내용들이 중언부언 동어반복된 점은 종종 지루함을 느끼게 만들었고,

논란의 주제에 대해 이쪽도 저쪽도 아닌 원론적이고 중립적인 태도만 보이는 와타세의 경우

주인공이라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다소 몰입감을 떨어뜨리는 캐릭터 설정이란 생각입니다.

 

큰 그림 차원에서도 전작들에 비해 다소 아쉬움이 느껴졌는데,

범인의 행적 범행동기, 범행준비과정, 그의 진짜 목적 등 대부분이

결과적으로 보면 너무 평범하거나, 너무 완벽하거나, 너무 쉬워 보였다는 점입니다.

한마디로 정리하면 결론을 위해 작위적으로 설계된 느낌이랄까요?

물론 작가는 그 작위성을 극복하기 위해 이런저런 장치들을 부연설명하고 있지만,

전작들과는 달리 그 설명이 변명처럼 읽히기도 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이 작품에서 스토리나 주제 못잖게 흥미로운 점은

소위 나카야마 월드에 속한 인물들이 카메오나 주요 조연으로 교차 등장하는 대목입니다.

형사 와타세와 검사 미사키는 10년 만에 조우했다지만 간접적으로는 무척 밀접한 관계입니다.

와타세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첫 편인 속죄의 소나타에서

변호사 미코시바를 도와 사건 해결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인물입니다.

차장검사 미사키는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 두 번째 작품인 추억의 야상곡에서

숙적 변호사 미코시바에게 연이어 완패한 안 좋은 기억을 갖고 있습니다.

묘한 인연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을 각각 다른 시리즈에서 만나게 되니 무척 흥미롭더군요.

 

, 와타세의 파트너이자 까마득한 후배 고테가와는

나카야마 시치리의 또 다른 작품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히어로지만,

이 작품에선 아직 풋내를 풍기는 초짜 형사로 등장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특종이라면 무슨 짓이든 서슴지 않는 기자, 와타세의 단골 부검의 등

크고 작은 조연들이 시리즈와 스탠드얼론을 막론하고 교차출연하고 있는데,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에 익숙한 독자라면 남다른 별미를 맛볼 수 있는 대목입니다.

 

엄청난 다작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는(?) 나름의 퀄리티를 유지하고 있는데,

부디 나카야마 시치리가 양을 위해 질을 포기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물론 빠른 시간 안에 새로운 작품을 만나보고 싶은 역설적인 바람도 갖고 있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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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추락한 이유
데니스 루헤인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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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 ‘켄지&제나로 시리즈’, ‘커글린 가문 3부작등에 이어

데니스 루헤인과 만나는 10번째 작품입니다.

전부는 아니지만, 나름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라 자부할 만한 이력인 셈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추락한 이유는 작가 이름을 가려놓고 읽었다면

결단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 아니라고 판정했을 것 같습니다.

 

출판사의 홍보카피만 보면 금세 그 이유를 알 수 있는데,

이 작품은 범죄 소설이다. 하지만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이 작품의 핵심이다.’,

데니스 루헤인이 여성 시점으로 집필한 첫 로맨틱 스릴러.’ 등이 그것입니다.

언뜻 수긍하기 힘든 조합인데, 결과적으로 홍보카피가 과장 또는 오류는 아니었고,

실제로 이 작품의 핵심서사는 사랑이 맞습니다.

 

주인공 레이철은 성격파탄에 가까운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습니다.

생부가 누군지 절대 알려주지 않던 어머니가 사망한 후

그녀는 백방으로 생부를 찾아 나섰지만 결과는 꽤 비극적이었습니다.

덕분에 그녀가 얻은 것은 불쑥불쑥 폭발하는 공황발작뿐이었습니다.

이후 기자로서 성공가도를 달리던 레이철은 불의의 사고로 낙마하게 되고

결국 공황발작과 대인공포증은 나날이 심각한 수준으로 치닫고 맙니다.

하지만 그때 레이철 앞에 나타난 브라이언은 그녀의 모든 공포를 잠식시켜 줍니다.

자신의 모든 것을 이해해주는 브라이언 덕분에 점차 세상과 마주할 준비를 하던 레이철은

어느 날, 브라이언이 자신이 알던 사람이 아니란 것을 깨닫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로 인해 레이철은 살인, 사기, 복수, 탐욕이 뒤섞인 사건에 휘말리고 맙니다.

 

사실, 초반에는 무척 당혹스러웠습니다.

첫 장면이 남편을 쏴 죽이는 레이철로 시작하는데 그 뒤는 좀 생소한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성격파탄 어머니와의 갈등 및 출생의 비밀을 알아내기 위한 생부 찾기 이야기,

반골기질과 소신과 재능을 겸비한 기자로서의 성공 이야기,

공황발작과 대인공포증에 걸린 여자의 사랑 이야기 등등...

그 어느 것도 데니스 루헤인다운 스릴러와 거리가 먼 서사인데,

이 서사들이 전체 분량의 절반을 차지하며 초반 내내 약간은 지루하게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다가 레이철이 브라이언의 실체를 알게 되는 대목부터 본격적인 스릴러가 시작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앞서 어머니, 생부, 기자 이야기가 왜 필요했던 걸까?’라는 의문이 들었고,

이 의문은 마지막 페이지에 도달한 뒤에도 사그라지지 않았습니다.

제가 아는 데니스 루헤인이라면 초반부터 스릴러 서사를 돌직구처럼 날렸을 텐데

주인공의 가족사와 성장기를 위해 왜 절반에 가까운 분량을 할애한 걸까 궁금했습니다.

물론 앞서 말한대로 이 작품의 핵심서사가 사랑이고, 장르가 로맨틱스릴러라는 걸 감안하면,

, 진실이나 범인 찾기보다는 레이철의 성장과 사랑에 방점이 찍힌 작품이란 걸 감안하면,

그녀에 대한 초반의 장황한 설명이 충분히 납득될 수도 있겠지만,

역시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이기에 저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의문으로 남고 말았습니다.

 

아무튼...

가족이 남긴 상처와 거기에서 파생된 트라우마로 인해 세상과 단절될 뻔했던 레이철이

점차 자신감을 얻고, 사랑을 얻고, 삶의 원동력을 얻게 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더욱 큰 추락과 비극을 맛보게 된다는 게 이야기의 핵심입니다.

레이철은 몇 번의 위기를 겪으면서 자신의 추락을 막아내는 것은 물론

스스로 사건의 종지부를 찍는 역할까지 담당하는 여전사(?)로 진화하기도 합니다.

중반부터 시작된 본격적인 스릴러는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답게 빠르고 촘촘하게 전개되는데,

초반에 다소 지루함을 느꼈던 독자라도 단숨에 몰입감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흥미롭습니다.

켄지&제나로 시리즈처럼 거칠고 폭력적이면서도 블랙유머가 깃든 스릴러라든가

여타 작품들처럼 묵직하고 장대한 서사를 기대했던 탓에 다소 아쉬움이 남긴 했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난 데니스 루헤인의 신작은 반갑고 또 반가웠습니다.

다음엔 데니스 루헤인의 전공이 제대로 폭발한 작품과 꼭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사족으로...

지금까지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 번도 번역의 문제를 느낀 적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같은 문장을 몇 번씩 되읽어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습니다.

오타는 아니지만 조사가 생략돼서 비문처럼 읽히는 경우도 있었고,

한 문장 안에 주어가 두 번씩 들어가거나, 한 번에 이해 안 되는 문장도 있었습니다.

그간 데니스 루헤인의 작품을 전담하다시피 작업하셨던 분들의 번역에 익숙해진 탓도 있지만

이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 중 번역이 차지한 부분이 상당했던 것 역시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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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나방
장용민 지음 / 엘릭시르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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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을 무대로 미래를 기억하는 신비한 능력자 이야기를 다룬 궁극의 아이나 진시황의 불로초를 소재로 한중일 3국의 쫓고 쫓기는 스릴러를 그린 불로의 인형처럼 작가는 이번에도 글로벌한 무대 위에 복잡하게 얽힌 추적자 이야기를 내놓았습니다. 두 전작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귀신나방은 역사적 배경이 중요한 설정인데, 소설 속 현재는 1969년이고, 이야기의 연원은 2차 대전 즈음으로 잡혀있습니다. 무엇보다 한국-한국인과는 전혀 무관한 이야기라서 그야말로 세계적인 마케팅을 염두에 둔 듯한 느낌까지 받게 됩니다.

 

서평을 쓰기 전에 혹시나 해서 출판사의 소개글을 살펴보니 역시나 이 작품의 주인공이 평생에 걸쳐 추적하는 악당에 대한 자세한 언급이 없었습니다. 악당의 정체는 작품 초반부에 등장하기 때문에 사실 스포일러라고 할 수도 없고, 또 그 정체를 언급하지 않곤 줄거리든 서평이든 제대로 쓰기가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어쨌든 출판사가 노출하지 않은 정보를 제멋대로 언급할 수는 없는 일이라 아주 두루뭉술한 서평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유명한 여성 컬럼니스트가 사형을 코앞에 둔 사형수의 초대로 인터뷰에 나섭니다. 사형수는 뮤지컬 극장에서 16살 소년에게 다섯 발의 총을 난사한 뒤 체포됐는데 스스로 함구한 탓에 동기도, 피해자와의 관계도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사형을 언도받았습니다. 그런 그가 사형을 앞두고 초대한 컬럼니스트에게 충격적인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2차 대전 종전 즈음부터 현재까지 그는 20여년에 걸쳐 추적극을 벌여왔는데, 그 대상은 불사신처럼 오랫동안 죽음을 초월하여 생존해 온 것은 물론 자본과 정치의 힘으로 전 세계를 지배하려는 야망을 가진 자라는 것입니다. 처음엔 헛소리로 들렸지만 사형수의 진술이 소름 끼칠 정도로 팩트에 가깝다는 걸 깨닫자 컬럼니스트는 전대미문의 특종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야기는 주인공이 지난 20여 년간 집요하게 악당을 추적한 과정을 그립니다. 물론 그 혼자만이 추적극을 벌인 것은 아닙니다. 함께 했던 동료들이 있었지만 결국엔 오롯이 그만의 미션으로 남게 됐고, 몇 번쯤은 결정적 기회를 잡아 악당을 제거할 수도 있었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는 현직 경찰임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악당에 대해 털어놓지 못합니다. 아무도 믿어줄 리 없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고독한 추적극을 감당해야 했고, 마침내 자신의 미션을 달성해냅니다.

 

하지만... ‘악당이 도대체 어떤 존재이기에 사형수는 20여 년간 집착의 끈을 놓지 못한 걸까요? 20여 년에 걸친 추적 끝에 살해한 대상이 왜 16살 소년일까요? 16살 소년은 정말 사형수가 노렸던 악당이 맞을까요? 과연 20여 년의 추적을 마친 사형수의 이야기는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될까요?

 

사실, ‘귀신나방은 판타지라 하기엔 과학과 의학의 성과가 바탕에 깔려있고, 픽션이라 하기엔 꽤 많은 실존인물이 등장하기 때문에 장르 자체가 모호한 작품입니다. 방대한 인물이 등장하고, 복잡다단한 설계도 위에 무척 많은 역사적 사건들이 배치돼있어서 사이즈 면에서 보면 거의 대하드라마 급이라 불러도 손색없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상상력의 산물이라 할 수 있는데, 문제는 전작들의 경우 그 상상력이 판타지임에도 불구하고 리얼하게 읽힌 반면, 이번 작품은 상상력이 너무 멀리 간 나머지 다소 황당하게 읽혔다는 점입니다. 특히 악당이 미국의 자본과 정치를 장악하는 과정은 아무리 픽션이라 해도 이게 말이 돼?” 또는 이렇게 쉬워?”라는 의아함을 자아내곤 했는데, 워낙 전개가 빠르고 긴장감이 넘쳐서 페이지는 휙휙 넘어갔지만 어딘가 찜찜한 위화감과 의아함을 떨쳐내기는 쉽지 않았습니다.

 

장용민의 거대한 스케일과 엄청난 상상력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오랜만의 반가운 신작이겠지만 이 작품으로 장용민을 처음 접한 독자라면 다소 당황스러울 수도 있습니다. 4년 만에 나온 신작인데다, 내용 상 꽤 많은 자료조사와 공부가 필요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작품 곳곳에서 그 고된 과정의 흔적을 발견할 수는 있었지만 약간은 과할 정도로 뻗어나간 서사가 오히려 아쉬움으로 남았던 작품입니다.

 

악당에 대한 언급 없이 서평을 쓰긴 썼는데, 제가 봐도 참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어쩌면 출판사 입장에서도 악당을 이용한 홍보가 괜찮은 마케팅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굳이 감춘 이유를 잘 모르겠고 덕분에 서평 쓰는 독자 입장만 곤혹스러워졌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악당의 정체에 대해 별 생각 없이 언급하는 서평들도 있겠지만, 이렇듯 작품 자체에 대해 할 말이 없어지는 경우도 참 드물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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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잇 블리드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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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구 주민들의 민원 상담을 하던 톰 길레스피 의원 앞에

얼마 전 출소한 매커널리가 나타나 총으로 자신의 머리를 날려버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의원을 일부러 찾아와 보란 듯이 방아쇠를 당긴 것.

뭔가 감추는 듯한 의원의 태도에 리버스는 불시에 그의 집을 방문하고,

급하게 문서들을 파쇄 중이던 의원의 얼굴에 드리운 두려움을 발견한다.

전과자의 우발적 자살로 사건을 종결지으려는 상부에 반발해 독자적인 수사를 하던 리버스는

경찰 수뇌부는 물론 감찰부서와 정치권의 압력까지 받던 끝에 강제로 휴직당하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유능하고 괴팍하면서도 반골 기질로 가득한 존 리버스 형사 시리즈의 일곱 번째 작품입니다.

네 번째 작품인 스트립 잭을 제외하곤 그의 시리즈를 모두 읽었는데,

영미권 또는 북유럽권 작품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가 느껴졌던 건

아마도 스코틀랜드 에든버러라는 좀 특별한 무대 탓이었던 것 같습니다.

정치적으로나 역사적으로나 어딘가 불안정하고 뾰족뾰족 모난 느낌이 드는 분위기는

실제로 그곳에 가보지 않은 건 물론 딱히 해박한 지식 없이도

다른 책이나 영화를 통해 간접적으로 습득할 수 있었는데,

그런 상황에서 접한 존 리버스 시리즈는 확실히 색다른 분위기의 스릴러로 읽혔습니다.

 

렛 잇 블리드에서 존 리버스가 마주한 사건은

스코틀랜드의 정치적-경제적 문제와 깊은 연관을 지니고 있습니다.

지방의회, 경제 관련 정부부처, 재벌, 경찰조직 등이 총출동한 가운데

살인, 자살, 납치 등 다양한 미스터리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전개됩니다.

전작인 치명적 이유에서 세대를 이은 정치적-종교적 갈등과 파벌주의를 다룬데 이어

또 다시 사회적 이슈를 소재로 삼은 셈인데,

특히 이번에는 존 리버스로 하여금 꽤나 심각한 딜레마까지 겪게 만들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정의와 도덕, 그리고 보편적 공익에 관한 딜레마인데,

본문에 이를 압축적으로 묘사한 악당의 변명이 등장합니다.

 

한 아이가 사과를 좀 훔쳤습니다. 그리고 나중에 커서 많은 생명을 구하는 의사가 됐어요.

굳이 그를 법정에 세워 어릴 적에 벌인 절도에 대한 책임을 물어야 합니까?”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더 자세한 언급은 곤란하지만,

어쨌든 존은 진실에 다가갈수록 악당의 변명이 건넨 딜레마 때문에 고민에 빠집니다.

이는 범죄 관련자 대부분이 고위직이라 폭로될 경우 에든버러에 치명타라는 딜레마를 다룬

시리즈 두 번째 작품 숨바꼭질과도 궤를 같이 하는 대목이기도 합니다.

초반부터 전방위적인 수사 중단 압박이 가해지고 끝내 강제휴직까지 당했던 시점에는

순수한 분노와 올곧은 정의감으로 중무장한 채 반골의 끝판왕처럼 수사에 매진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존은 자신의 도덕률과 보편적 공익 사이에서 고민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 읽고 보면 미스터리 자체는 그다지 복잡하지 않습니다.

자살, 살인, 납치 등 대부분의 사건이 단선적인 맥락에서 발생했고,

결정적 단서는 약간의 행운과 함께 존의 손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하지만 전작인 치명적 이유가 스코틀랜드의 역사적, 종교적 갈등에 대한

상세하고 장황한 묘사 때문에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됐다면,

렛 잇 블리드는 스코틀랜드의 정치권과 관료 시스템에 대한 복잡한 설명이

비슷한 성격의 장애물 역할을 하고 있어서 역시 쉽지 않은 책읽기가 되고 말았습니다.

, 복잡하지 않은 이야기임에도 큰 그림이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는데,

그래서인지 막판에야 설명된 그 큰 그림은 어딘가 결과론적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부자연스럽게 억지로 맞춰진 퍼즐 같다고 할까요?

 

이 작품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대목은 그동안 꾸준히 등장했던 조연들의 캐릭터입니다.

어느 새 직장인이 된 딸 새미(사만다)는 아버지 존과 직업적 문제로 갈등하게 되고,

시리즈 첫 편인 매듭과 십자가에서 연인이 됐다가 금세 헤어진 질 템플러는

존의 임시 상관으로 부임한 뒤 존을 끝없이 압박하는 나쁜 간부로 등장합니다.

역시 전 연인인 페이션스나 얄미운 경찰 동료 플라워는 계속 존과 악연을 이어갑니다.

물론 늘 존의 아군이던 브라이언 홈스와 쇼반 클락은

위험을 무릅쓰고 존의 불법적인(?) 암행수사를 돕는 매력적인 활약을 보여줍니다.

 

다소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긴 했지만 존 리버스 시리즈를 쭉 읽어온 독자 입장에선

그래도 그의 독설과 지독한 반골 기질을 다시 읽을 수 있어서 반가운 일이었습니다.

이 작품으로 존 리버스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느낌표보다는 의문부호가 더 떠오를 것 같은데

시리즈 첫 편부터 순서대로 읽다보면 이 시리즈만의 묘한 중독성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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