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늑대의 피
유즈키 유코 지음, 이윤정 옮김 / 작가정신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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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 사사키 조의 명품들 이후 오랜만에 제대로 된 경찰소설을 읽은 느낌입니다.

사실, 엄밀히 말하면 경찰-야쿠자 소설이라고 불러야 할 작품인데,

성실한 경찰’, ‘야쿠자와 너무 친한 경찰’, 그리고 야쿠자가 작품의 세 축이기 때문입니다.

 

성실한 경찰히오카 슈이치는 히로시마 현 구레하라 동부서 폭력반에 배치된 신참입니다.

그는 배치와 동시에 야쿠자와 너무 친한 경찰오가미 쇼고의 파트너가 됩니다.

실적에 관한 한 군계일학이지만 그에 못잖게 징계도 수두룩하게 받아온 오가미 쇼고는

도무지 경찰인지 야쿠자인지 종잡을 수 없을 정도로 미스터리한 인물입니다.

야쿠자에게 정보와 뒷돈을 받는 것은 물론 경쟁 조직의 궤멸을 돕기까지 하는 오가미를 보며

신참경찰 히오카는 야쿠자보다 더 야쿠자 같은 그의 행태에 몇 번씩 분노에 휩싸이곤 합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히오카의 눈에 점차 오가미의 위악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폭력적이고 불법적인 수사를 자행하는 것이 분명한데,

그의 행동과 말 어딘가에서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은 위화감을 느끼게 된 것입니다.

견디다 못한 히오카가 야쿠자를 상대하는 형사에게 정의가 무엇이냐고 묻자

오가미는 예상도 못한 의미심장한 말을 건넵니다.

폭력단은 사라지지 않아. 우리의 임무는 야쿠자가 민간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감시하는 일이야. 나머지는 도를 넘는 녀석들을 없애기만 하면 돼.”

 

말하자면, 모든 야쿠자는 박멸해야 한다는 히오카의 정의가 실현 불가능한 망상이라면,

현실적인 수단과 방법을 통해 악의 부작용을 막는 것이 오가미의 정의인 것입니다.

실제로 오가미는 구레하라 시 전역에 야쿠자 간의 전쟁이 임박해오자

무조건적인 단속과 체포보다는 한쪽의 궤멸을 통해 전쟁을 막는 방법을 택합니다.

그리고 자신과 오랜 인연을 맺어온 나머지 한쪽의 승리를 위해 열심히 분투합니다.

이쯤 되면 히오카는 물론 독자마저도 오가미는 어떤 사람?”이란 혼란에 빠지게 됩니다.

응원해야 할 주인공인지, 야쿠자와 함께 박멸돼야 할 인지 경계가 애매해지는 것입니다.

 

그 혼란엔, 단골술집 마담 아키코가 들려준 오가미의 비극적인 과거사도 한몫 거드는데,

어쨌든 우여곡절 끝에 히오카는 어느 새 오가미의 정의에 감염된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리고 진심으로 그의 파트너가 되어 야쿠자의 전쟁을 막기로 결심합니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예상치 못한 전개와 반전이 일어납니다.

 

막판에 폭죽처럼 연이어 터지는 반전은 기시감이 드는 대목도 살짝 있긴 하지만

경찰-야쿠자 소설의 백미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긴장감과 속도감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고독한 늑대인 오가미의 정의가 구현되는 과정, 그의 피를 물려받는 히오카의 성장기,

그리고 팽팽한 긴장감 속에 벌어지는 야쿠자의 전쟁과 판세가 마무리되는 과정 등

다양한 서사들이 묵직한 여운과 함께 절묘하게 조합되며 클라이맥스를 장식합니다.

사실, 스포일러가 될 대목들이 많아서 이렇게 두루뭉술한 묘사밖에 할 수 없지만,

마지막 50여 페이지는 그야말로 폭주 그 자체라고 할 만큼 손에 땀을 쥐게 만듭니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애를 먹었던 건 소화불량에 걸릴 만큼 많은 등장인물입니다.

복잡하게 얽힌 여러 야쿠자 조직은 물론 경찰캐릭터도 상당히 많이 등장하는데,

다 읽고 보면 4~5명의 주요 인물들에게만 집중했어도 된다는 걸 알게 되지만,

읽는 동안에는 모든 인물을 유심히 봐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 시달릴 수밖에 없습니다.

 

마지막까지 의아했던 두 가지 의문은 모두 여성에 관한 것인데,

하나는 표지를 장식한 인물이 오가미도, 히오카도 아닌 정체불명의 젊은 여성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한없이 거칠고 폭력적인 세계를 다룬 이 작품의 작가가 여성이라는 점입니다.

앞의 의문은 도무지 풀 길이 없어 일찌감치 포기했지만,

뒤의 의문은 놀라움 그 자체라서 서평을 쓰고 있는 지금도 잘 믿기지 않는 것이 사실입니다.

여성작가가 야쿠자 소설을 쓰지 말란 법도 없거니와 띠지에 작가 사진이 실려 있고,

이름이 유코(裕子)’임을 알고 봤는데도 읽는 내내 여성작가라고 생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만큼 거칠고 폭력적이면서도 리얼한 경찰-야쿠자 소설이라는 의미입니다.

 

2016년 일본 추리작가 협회상을 비롯 다수의 수상과 노미네이트 경력을 보면

유즈키 유코가 보통 내공을 지닌 작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국내에는 2011년에 출간된 최후의 증인외에는 소개된 작품이 없어서 아쉽지만,

일본에서 이 작품의 후속작(‘불길한 개의 눈’)이 출간됐다는 정보는 무척 반가웠습니다.

고독한 늑대의 피가 호응을 얻어 유즈키 유코와 다시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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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미스의 검 와타세 경부 시리즈 1
나카야마 시치리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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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우가 내리는 밤, 부동산 업자 살해 사건이 발생한다.

용의자로 지목된 구스노키는 강압적인 수사로 인해 자백하고 사형판결을 받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교도소에서 자살하고 만다.

그러다 5년 후 와타세 경부는 강도 살인 사건을 수사하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그제야 밝혀지는 무리한 수사, 증거 날조, 원죄, 경찰과 사법의 어두운 그늘.

과연 구스노키는 무죄였을까? 그렇다면 진범은 누구인가?

와타세는 경찰의 조작으로 인한 원죄 사건에서 진실을 밝히기 위해 조직을 고발해야 했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나카야마 시치리의 작품들을 통해 와타세라는 이름에 익숙해진 독자에겐

무척이나 반갑고 남다른 의미가 있는 작품입니다.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에서는 신참 고테가와를 성장시키는 괴짜 반장으로,

미코시바 레이지 시리즈인 속죄의 소나타에서는 조연이지만 감초 같은 역할을 맡았던 그는

이번 작품을 통해 자신의 이름을 딴 새로운 시리즈의 주인공으로 등극합니다.

특히 와타세가 신참 시절이던 1984년부터 28년에 걸친 이야기가 전개돼서

그야말로 와타세의 프리퀄이라 할 만한 매력적인 서사를 맛볼 수 있습니다.

(‘작가형사 부스지마살인마 잭의 고백에 등장했던 이누카이는 물론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의 히어로인 고테가와도 잠깐이지만 얼굴을 비추기도 합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이 작품의 화두는 원죄(冤罪, 억울하게 덮어쓴 죄)’입니다.

다카노 가즈아키의 ‘13계단이나 오리하라 이치의 원죄자등 원죄를 다룬 걸작이 많아서

소재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신선한 이야기는 아닙니다.

더구나 절반쯤까지는 규모도 작고 특별한 설정도 눈에 보이지 않아서

그렇고 그런 원죄 이야기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입니다.

 

경찰은 강압적인 방법으로 자백을 얻어내고 증거를 날조했고,

검찰과 법원은 경찰의 조사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곤 용의자에게 사형을 선고합니다.

이후 5년 뒤에야 사건의 진실을 알게 된 와타세는 조직의 갖은 압박에도 불구하고

평소 존경하는 검사를 통해 원죄의 전모를 폭로하기에 이릅니다.

5년 전 사건에 관여했던 경찰, 검찰, 법원 등은 그야말로 숙청의 피바다를 이뤘지만

정작 폭로자인 와타세만은 그 숙청에서 비껴난 채 경찰로서의 삶을 이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속죄하며 23년을 보낸 어느 날, 이젠 현경 수사1과 반장이 된 와타세 앞에

과거 원죄 사건이 아직 제대로 끝나지 않았음을 알리는 충격적인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바로 이 대목이 중반부를 살짝 넘은 지점인데,

나카야마 시치리의 진짜 매력은 여기서부터 폭주하기 시작합니다.

밋밋한 원죄 이야기처럼 보이던 서사는 돌직구 같은 전개와 반전으로 무장한 채 달려갑니다.

조직을 팔아넘겼다는 낙인이 찍힌 채 진실을 향해 달려가는 와타세의 마음은 한없이 무겁지만

오히려 그것은 와타세를 분투하게 만드는 동력이 되기도 합니다.

작은 단서, 스쳐 지났던 목격자 등을 다시 되짚어가던 와타세는

막판에 이르러 생각지도 못한 인물, 예상치 못한 진실과 마주하며 충격에 빠집니다.

 

다소 억지스러울 정도로 시의적절한 단서와 증언이 와타세에게 제공되기도 하고

미스터리의 종결점 역시 와타세만이 알아낼 수 있는 특별한 반전이 아니라서 아쉬웠지만

20년도 훌쩍 넘은 과거의 진실을 파헤치는 와타세의 진정어린 노력은

독자의 눈길을 한시도 다른 곳에 팔 여지를 주지 않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아무래도 원죄라는, 한없이 무겁고 고통스러운 소재를 다룬 작품이라

괴짜 반장으로 등장했던 연쇄살인마 개구리 남자속죄의 소나타때의 와타세와는

분명 어딘가 이질감이 느껴진 것도 사실이지만,

나카야마 시치리가 창조한 캐릭터 가운데 꽤 매력적이라 여겼던 와타세의 프리퀄은

기대 이상의 재미와 여운을 남겨줬습니다.

더불어, 경찰, 검찰, 법원, 언론, 유족 등 원죄 관련자들의 태도나 입장도 묵직하게 그려졌고,

단 한 건의 원죄가 얼마나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지,

또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절대 벗어버릴 수 없는 형벌이란 점도 충분히 어필하고 있습니다.

 

늦은 나이에 데뷔했음에도 엄청난 작품을 쏟아낸 나카야마 시치리가

테미스의 검을 통해 와타세를 주인공으로 한 새 시리즈를 선보였는데,

번역하신 이연승 님에 따르면 후속작 제목이 네메시스의 사자라고 합니다.

이 작품 역시 꽤나 묵직한 주제를 다룬다고 하니 기대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묵묵히 자신만의 정의를 구현해온 와타세의 새로운 활약이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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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2호에서는 303호 여자가 보인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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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턴의 부촌에 위치한 ㄷ자 모양의 이탈리아 스타일 아파트를 무대로

관음증, 공황발작, 데이트폭력, 사체를 훼손하는 소시오패스 등

꽤 폭력적이면서도 다양한 심리스릴러 코드들이 난무하는 작품입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 ‘아낌없이 뺏는 사랑등 사건 중심의 서사였던 이전 작품들과 달리

피터 스완슨은 이번에는 심리적 요소를 전면에 내세우고 있는데,

등장인물 모두 어딘가 한군데쯤 심각하게 비틀린 듯한 내적 상태를 지니고 있는데다,

그 비틀림이 외부로 발산되는 형태가 살인, 폭력, 관음, 공황장애 등

반사회적이거나 개인적으로도 무척 불행한 양상을 띠기 때문입니다.

, 사건의 무대 자체가 부촌에 위치한 폐쇄적인 고급 아파트이면서도

건너편 방을 들여다 볼 수 있거나 지하실을 통해 은밀한 접근이 가능한 구조,

, 언제든지 위험한 상황이 벌어져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이중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입니다.

 

런던에 사는 케이트 프리디는 어느 날 보스턴에 사는 면식도 없는 친척 코빈 델로부터

6개월 간 집을 바꿔 살아보면 어떻겠냐는 제안을 받습니다.

데이트폭력으로 공황장애 후유증을 앓던 케이트는 나름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수락하지만

보스턴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옆집 여자가 살해당했다는 소식을 듣곤 깜짝 놀랍니다.

망상과 불안장애까지 갖고 있던 케이트는 자기도 모르게 집주인인 코빈을 의심하게 되고,

직접 집안 곳곳을 뒤진 끝에 합리적 의심을 할 만한 단서들을 얻습니다.

한편, 런던에 머물던 코빈은 옆집 여자의 살해 소식을 듣곤 큰 충격에 빠집니다.

그리고, 15년 전 런던의 한 공동묘지에서 벌어졌던 끔찍한 일을 회상합니다.

어쩌면 옆집 여자의 죽음은 그때부터 이미 결정된 일일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실, ‘누가 범인이냐?’에 대한 궁금증은 그다지 크지 않습니다.

작가는 여러 명의 화자를 동원해서 ‘303호 사건에 대한 각자의 생각을 가감없이 공개합니다.

그 과정에서 범인의 윤곽이 꽤 빨리 드러나기도 하고,

심지어 과거 회상 장면을 통해 이 사건의 구도 전체를 쉽게 짐작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5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을 긴장감을 유지한 채 읽게 만드는 힘은

아무래도 각 인물들의 위태로운 심리상태에 대한 극적인 묘사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보스턴에 와서도 여전히 공황장애에 시달리는 것은 물론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고 갔던 전 남자친구의 악몽과 환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케이트는

스스로 진실을 밝혀야만 된다는 강박과 망상 때문에 사건에 깊숙이 개입하게 됩니다.

살해된 303호 여자와 각별한인연을 맺었던 남자는 죄책감과 불안감에 시달리고,

303호 여자의 대학시절 연인이라 주장하는 남자는 사건 후 아파트를 배회하며 우울해합니다.

, 보스턴 경찰의 용의선상에 오른 코빈은 런던에 머문 채 303호 여자가 살해된 것이

마치 자신의 책임인 양 괴로워하며 깊은 회상에 빠집니다.

결국, 케이트를 비롯 주요 인물들 모두 결코 해피엔딩을 맞이하기 어려울 것 같다는 예감에

독자는 마지막까지 불안감을 끌어안은 채 책장을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독자에 따라 다소 장황해 보이는 심리묘사 때문에 느슨함과 지루함을 느낄 수도 있겠지만,

실은 그 대목들 하나하나가 나름 정교한 트릭이자 덫임을 후반부에 깨닫게 됩니다.

물론 피터 스완슨의 두 번째 작품이자 국내 데뷔작인 죽여 마땅한 사람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얼개 자체가 단순해 보이고, 호흡도 느리고, 반전의 힘도 약한 것이 사실입니다.

범인의 정체는 일찌감치 공개되는데다 동기 역시 살짝 억지스러운 면도 있고,

사건의 무대인 아파트는 (제목이 암시하는) 관음증 유발 외에는 큰 역할을 하지 못합니다.

그래서인지 기대만큼의 만족감을 느끼지 못하는 독자도 꽤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저 역시 재미있게 읽었지만 너무 기대가 컸던 것이 별 1개를 뺀 결정적 이유가 됐습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원제는 번역제목과는 거리가 좀 멀어 보이는 ‘Her Every Fear’입니다.

아무래도 관음증에 포커스를 맞춰 번역제목을 지은 것 같은데,

스토리를 제대로 담아내기만 한다면 어떤 의역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되지만,

이번에는 (개인적으로는) 왠지 속은 것 같다는 씁쓸함이 더 많이 남는 제목이었습니다.

그 이유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밝히지 않겠지만,

빗나가도 너무 많이 빗나간, 다분히 상업적인 번역제목이란 느낌을 지우기 힘들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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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선택한 남자 스토리콜렉터 66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이한이 옮김 / 북로드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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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남자 에이머스 데커의 활약을 그린 세 번째 작품입니다. 전도유망한 미식축구선수였지만 경기 중 과격한 충돌 이후 모든 걸 기억하는 능력을 얻었고, 운동을 접고 형사가 된 후에는 그 능력 덕분에 최고의 검거율을 자랑하게 됐지만, 참혹하게 가족이 살해당한 뒤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기억 능력을 발휘하여 가족 살해범을 체포한 것을 계기로 FBI와 인연을 맺은 데커는 미제사건 전담반에 소속되어 전작인 괴물이라 불린 남자에서 맹활약을 했고, 이번 작품에서는 워싱턴으로 무대를 옮겨 현재 진행 중인 사건까지 맡게 됩니다.

 

이번에 데커가 맡은 사건은 도무지 이해하기 어려운 저격 사건입니다. FBI 빌딩 앞에서 한 남자가 한 여자를 저격하곤 자살한 사건인데, 둘 사이엔 아무리 봐도 접점이 전혀 없고 살인 동기 역시 유추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중 DIA(국방정보국) 소속 하퍼 브라운이 수사에 개입하면서 데커 팀은 두 남녀가 국가기밀 유출과 연관됐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주목합니다.

알아내면 알아낼수록 오히려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정체불명의 가해자와 피해자, 단순살인사건에서 국가 간 스파이 대결로 확장되는 서사, 정보기관 간의 미묘한 힘 대결, 거기에 덧붙여 비극적인 가족사와 아슬아슬한 멜로 등 특별한 능력자 데커를 중심으로 600페이지에 걸쳐 다채로운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데이비드 발다치의 필력과 에이머스 데커의 캐릭터는 역시나 매력적입니다. 데커와 묘한 케미를 발휘하는 전직 기자 출신의 동료 알렉스 재미슨도 돋보였고, 카메오 이상의 비중과 분량을 차지한 전작의 주인공 멜빈 마스의 활약도 눈에 띄었습니다. 무엇보다 데커 팀을 괴롭히는 것 같기도, 도와주는 것 같기도 한 DIA 요원 하퍼 브라운은 이후 시리즈에서도 모습을 보일 것 같아 나름 기대감을 주는 인물입니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자면, 두 편의 전작에 비해 여러 가지로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우선, 스파이 또는 국가기밀 유출이라는 소재 자체가 주는 위화감입니다. 민간인이지만 특별한 능력 덕분에 FBI 특수팀 요원인 된 데커가 국가안보에 관한 사건을 맡는 것은 충분히 개연성 있는 설정이긴 하지만 (가족을 살해한 범인을 체포하고, 억울한 누명을 쓴 자의 진실을 밝혔던 전작들과 비교하면) 아무리 봐도 왠지 데커와 어울리지 않는 사건처럼 보였고, 뒤로 갈수록 데커를 미국식 슈퍼히어로로 만들기 위해 사건의 몸집을 억지로 부풀린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 좀처럼 수사가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제자리에서 맴돌다 보니 중반쯤부터는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전작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곤 했습니다. 396페이지에 와서도 아직 조금도 성과가 없었다.”라는 묘사가 등장할 정도로 데커 팀은 사건의 핵심에 조금도 다가가지 못한 채 주변부만 맴돌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어딘가 2% 부족해 보이는 번역의 문제입니다. 이유는 잘 모르겠지만, 그동안 세 편의 데커 시리즈는 매번 번역자가 바뀌었는데, 이번 작품의 경우 전작들에 비해 되읽게 만드는 대목들이 꽤 잦아서 아쉬움이 배가됐던 것 같습니다.

 

써놓고 보니 부족한 점, 아쉬운 점만 잔뜩 늘어놓은 서평이 됐는데, 어쩌면 저와는 달리 데커의 외연이 국가안보 문제를 다루는 데까지 확장된 상황을 반기고 열광하는 독자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혹시 이 작품으로 처음 데커를 만난 독자라면 반드시 전작들을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남자 에이커스 데커의 진짜 매력을 100% 맛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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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선인간
찬호께이 지음, 강초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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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3.67’, ‘망내인’, ‘기억나지 않음, 형사등 그동안 읽은 작품 목록만 놓고 보면

찬호께이는 사회파 미스터리 또는 무거운 주제를 좋아하나 보다, 라고 여길 수밖에 없었는데,

덕분에, ‘초능력 청부살인업자를 다룬 오락성 짙은 단편집 출간 소식에 살짝 놀랐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분량을 자랑하던 전작들에 비해 터무니없이(?) 얇은 분량에 또 한 번 놀랐고,

코믹한 분위기까지 발산하는 청부살인업자 주인공의 유쾌한 행각에 마지막까지 놀랐습니다.

 

모두 네 편의 단편이 수록돼있는데, 작품마다 개성도 무척 강합니다.

초능력을 얻게 된 사연과 함께 소소한 일상미스터리를 다룬 이런 귀찮은 일’,

스케일도 제법 크고 여러 목숨을 아무렇지도 않게 빼앗으며 위기를 맞기도 하는 십면매복’,

청부살인업자라면 한번쯤 겪을 법한 딜레마와 아이러니를 다룬 사랑에 목숨을 걸다’,

그리고 유쾌한 트릭과 함께 독자의 뒤통수를 적절히 때려주는 마지막 파티

짧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갖가지 요소들을 잘 버무려 놓았습니다.

 

사실, 주인공의 초능력은 판타지 그 자체입니다.

이벤트 회사의 말단직이던 주인공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지닌 초능력을 깨닫습니다.

누군가와 접촉한 상태에서 주문을 외우면 상대가 그 주문대로 죽게 되는데,

죽는 시간대를 정할 수 있는 것은 물론 죽음의 형태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습니다.

특히 심장과 혈관에 공기를 넣어 마치 풍선처럼 부푼 채 사망하게 만드는 게 주된 전략인데

그래서인지 언젠가부터 경찰들 사이에서 풍선인간이라는 별명을 얻게 됩니다.

 

서문에서 순수하게 오락을 목적으로 하는 이야기를 더 좋아합니다.”라고 밝힌 찬호께이는

길티 플레저(Guilty Pleasure), 즉 잘못된 일인 줄 알면서도 즐거움을 느끼는 방식으로

이 작품을 읽어줄 것을 독자들에게 부탁하고 있습니다.

주인공이 청부살인업자라면 대체로 목표물은 악역으로 설정되는 것이 일반적인데,

수록작들 속의 목표물은 어찌 보면 악역이기도, 어찌 보면 불행한 희생자로 보이기도 해서

마냥 주인공의 살인에 동조하거나 공감하면서 따라가기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내내 블랙유머를 접하듯 피식피식 웃음이 나오는 걸 보면

아무래도 찬호께이가 바란 길티 플레저가 제대로 작동한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주인공 캐릭터가 너무 매력적이라 후속작이 나오면 어떨까 생각하기도 했는데,

번역하신 강초아 님 후기를 보니 풍선인간의 다음 이야기가 조만간 출간될 것으로 보입니다.

‘13.67’의 서사적 무게감, ‘망내인의 엄청난 분량으로만 기억됐던 찬호께이가

마치 분신술을 부린 것 마냥 예상치 못한 장르와 즐거움을 전해준 것 자체로도 유쾌했는데

그 후속작까지 나온다고 하니 이제 그를 바라보는 시선 자체를 교정할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다만, 여전히 그의 압도적인 서사와 분량이 그리운 것 역시 숨길 수 없는 욕심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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