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광
렌조 미키히코 지음, 양윤옥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신간의 홍수 속에 오랜만에 공백이 생겨 책장 속에 갇혀 있던 책들을 지켜보다가

매번 특별한 이유도 없이 뒤로 미뤄오던 렌조 미키히코의 백광을 집어 들었습니다.

처음 만나는 작가지만 이름도, 작품 제목도, 표지도 무척 온화해 보여서

부드러운 일상 미스터리가 아닐까, 예단했다가 정말 제대로 뒤통수를 맞고 말았습니다.

 

평범한 중산층 주택 마당에서 4살 소녀가 교살당한 후 매장된 사체로 발견됩니다.

유아살해라는 충격적인 소재이긴 하지만, 사건은 이게 전부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소녀가 살해될 당시 집에 머물거나 드나들었던 7명의 인물을 통해

소녀의 죽음 이면에 도사리고 있는 그들간의 균열, 갈등, 복수심, 집착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특히 이들은 가족이거나 그에 준하는 관계라서

누가 범인이어도 그 결과는 참담할 것이 분명하기에 초반부터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4살 난 조카딸 나오코를 돌봐주기로 여동생 유키코와 약속했던 사코토는

본의 아니게 치매에 걸린 시아버지와 나오코만 집에 남겨두고 외출하게 됐는데,

그 사이 나오코가 살해당했고, 조사 결과 꽤 많은 인물이 범인일 수 있는 상황이 벌어집니다.

치매 환자인 시아버지, 사건 발생 시각에 회사에 없던 남편, 나오코를 방치한 사코토 본인,

자유분방한 삶을 구가하던 나오코의 엄마 유키코와 그녀의 불륜남,

그런 아내 유키코를 지켜보며 괴로워했던 남편 다케히코 등이 그들인데

그들은 차례차례 심중에 감춰뒀던 자신만의 끔찍한 비밀들을 독백으로 털어놓거나

날선 대화를 통해 상대의 진실과 거짓을 캐는 모습을 반복하여 보여줍니다.

 

작가는 다양한 인물의 1인칭은 물론 객관적인 3인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시점을 활용하는데,

처음엔 그 이유도 잘 모르겠고 약간의 혼란도 느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다양한 시점 구성 자체가 작가의 고도의 전략이란 걸 깨닫게 됐습니다.

각 인물이 소녀살해와 관련된 은밀한 고백을 1인칭 화법으로 털어놓을 때마다

독자는 그럼 이 사람이 범인인가?’라는 확신에 가까운 짐작을 하게 되는데,

문제는 다음 챕터에 넘어가 또 다른 인물이 고백을 털어놓자마자

앞선 짐작이 온통 허사가 돼버리고 예상치 못한 반전과 마주하게 되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누구나 범인인 것 같지만, 또 동시에 누구도 범인이 아닌 것 같은,

, 누구나 살해동기를 가진 것 같지만, 동시에 그 반대인 것 같기도 한 아이러니가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쉴 새 없이 등장한다는 뜻입니다.

번갈아 등장하는 1인칭 시점을 따라가다 보면 모두가 소녀를 죽이고 싶었던 같기도 하고,

모두가 다른 사람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스스로 희생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그런 탓에 소설 속 인물들은 물론 독자마저 점점 패닉 상태에 빠져들기 시작하고

진실이란 게 과연 있기나 한 걸까, 라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됩니다.

오죽하면 메인 화자인 사토코가 오히려 이 노인네만 정상이고 미친 건 우리 쪽이다.”라며

자신들이 처한 미스터리한 상황을 자탄하기도 합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등장인물간의 관계나 갈등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았는데,

위에서 언급한 내용대로 이 작품은 사건 중심의 이야기라기보다는

각 인물의 고통스런 전사(前史), 비틀리고 일그러진 악연, 참아왔던 분노와 배신감의 폭발 등

심리적인 서사가 굉장히 강한 작품입니다.

그런 서사에 서술트릭의 일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다양한 시점 변화가 끼어든 덕분에

꽤 집중력 있는 책읽기가 필요하기도 합니다.

저는 출퇴근길에 띄엄띄엄 읽다 보니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사흘이나 걸렸고,

그래서인지 작품의 진짜배기 맛을 제대로 못 본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가능하면 한 번에 집중해서 완독할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대담한 설정과 서정성 넘치는 문체로 굵직한 문학상을 휩쓸었다는 출판사의 작가 소개글이

절대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이 작품을 통해 직접 확인한데다,

렌조 미키히코의 작품들이 비슷한 미덕과 장점을 지녔다는 번역가 양윤옥 님의 후기 덕분에

회귀천 정사등 그의 다른 작품들도 조만간 찾아 읽고 싶어졌습니다.

그야말로 먼지 쌓인 책장 속에서 보물을 찾아낸 기분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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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 비포
JP 덜레이니 지음, 이경아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8월
평점 :
절판


견고한 완벽주의와 자기애로 똘똘 뭉친 에드워드는 극단적인 미니멀리즘 건축가입니다.

에드워드가 지은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의 주택은 미니멀리즘의 극치를 보여주는 것은 물론

소위 사물인터넷의 집합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특별한 주택입니다.

이야기는 이 특별한 주택의 과거 세입자 에마와 현재 세입자 제인이 이끌어갑니다.

그녀들은 각각 큰 상처를 입고 안전한 주택을 찾던 중 원 폴게이트 스트리트에 머물게 되는데

기이하다 싶을 정도로 까다로운 세입자 규칙에 놀라면서도 점차 적응해가는 것은 물론

주택의 설계자이자 주인인 에드워드와 특별한 관계에 이르기도 합니다.

하지만 에마와 제인은 에드워드와 이 주택의 치명적인 비밀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나름대로의 조사를 진행하지만 그녀들 앞에는 예상치 못한 상황들이 닥쳐오기 시작합니다.

 

● ● ●

 

사고인지, 살인인지, 자살인지 불명확한 몇 건의 죽음이 등장하고

과거와 현재의 세입자인 에마와 제인이 그 진실을 찾아가는 것이 주된 스토리이긴 하지만,

사건 자체보다는 각 인물들의 불안정하고 강박적인 심리 묘사가 핵심인 작품입니다.

에마와 제인은 서로 만난 적도 없는 과거와 현재의 세입자지만 묘한 공통점을 갖고 있습니다.

자매로 보일 만큼 꼭 닮았고, 에드워드와 판박이 같은 사랑을 나누며,

이 기이한 주택에서 벌어진 기이한 죽음에 관해 관심을 갖고 조사에 나선다는 점입니다.

그녀들은 에드워드는 물론 그의 분신과도 같은 주택이 내뿜는 압도적 분위기에 굴복하면서도

에드워드와 주택의 비밀을 파헤치고 싶어 하기도 합니다.

 

일단 설정 자체는 무척 흥미롭습니다.

미니멀리즘과 빅브라더의 혼합물 같은 기이한 저택과 그곳에 자리 잡은 상처투성이 인물들,

그리고 그 안에서 벌어지는 팽팽한 심리전과 긴장감 넘치는 미스터리 등

흥미를 자극하는 다양한 요소들이 내재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이 작품에 별 세 개밖에 줄 수 없었던 것은

뒤로 갈수록 점점 이야기가 사실감과 방향성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는 자연스레 진화하는 것이 아니라 스토리를 위해 편의적으로 변질됩니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세입자 규칙에 동의해가면서 이상한 집에 살고 싶어 하는 이유도,

모든 걸 통제당하는 이상한 집의 시스템에 큰 거부감 없이 순응하는 이유도,

빛나는 외모와 카리스마를 지녔지만 누구 봐도 비정상인 집주인에게 반하는 이유도,

(아무리 심리적 서사가 강한 스릴러라 해도) 딱히 설득력 있는 설명이 없습니다.

깊은 상처를 지녔던 인물은 점차 거짓말쟁이로 포장되기 시작하더니 전혀 딴사람이 돼버렸고,

집주인에게 철저한 이던 인물은 나중에 알고 보니 실은 이었던 것으로 밝혀집니다.

순도 100%의 완벽주의자이자 통제권을 잃지 않던 인물은 막판에 갑자기 순정파로 변하고,

미스터리로 남아있던 여러 죽음의 진실은 엉뚱하고 개연성 없는 인물이 진범으로 지목된 탓에

아무리 봐도 반전을 위한 반전이상의 의미를 찾기 어려웠습니다.

심리스릴러임에도 독자의 눈길을 끌었던 사건들이 너무 어이없이 마감된 느낌이랄까요?

 

이런 일관성 없는 전개 덕분에 마지막 챕터를 읽을 쯤엔 좀 허무한 느낌이 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모든 인물들이 중후반부터 실은 이런 사람이었다는 식으로 캐릭터가 변한 점은

앞서 꽤 거창하고 장황했던 내용들이 굳이 필요했나, 싶은 회의까지 들게 만들었습니다.

엔딩 지점의 주요 인물들은 초반부의 모습과는 너무나도 달라 보였기 때문입니다.

 

작가의 이름이 낯설어서 찾아보니 과거 베스트셀러를 썼던 작가의 새 필명이라고 돼있는데,

첫 페이지를 읽기 전만 해도 작가의 본명이 무척 궁금했지만,

다 읽고 난 뒤에는 다른 이유에서 작가의 본명을 알고 싶어졌습니다.

시작과 끝이 전혀 다른 이야기로 보이는 이 작품이

아무래도 과거 베스트셀러를 썼던 작가의 작품으로 보이지는 않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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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귀 후지코의 충동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3년 6월
평점 :
품절


이 소설에는 어렸을 때 가족을 잃고 결코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다짐하면서도 결국 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진창 속으로 빠져 들어가는 한 여자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받은 왕따와 학대, 가정폭력은 결국 그녀를 살인의 길로 이끌고 만다.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라고 자신을 정당화하며 살인을 반복해 살인귀가 되어가는, 한때 장밋빛 인생을 꿈꿨던 11세 소녀. 무엇이 그 소녀를 전설의 살인귀로 만들었는가?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이야미쓰(イヤミス)’는 불쾌한 기분이 남는 미스터리를 가리키는 일본식 조어입니다. ‘싫다는 뜻의 이야(いや)’와 미스터리의 미스를 결합한 단어인데, 마리 유키코는 이 분야에 있어 (개인적인 경험에 의한 판단이지만) 단연 톱클래스입니다. 지금까지 여자 친구’, ‘골든 애플’, ‘갱년기 소녀등 세 작품을 읽었는데, 말 그대로 어딘가 찜찜하고, 불편하고, 불쾌한 여운이 더 강했던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매번 더는 마리 유키코 작품을 읽지 않을 테야!”하면서도 알 수 없는 중독증 때문에 자꾸만 손이 가는 묘한 경험을 하고 있습니다.

 

제목이나 표지가 워낙 남의 시선을 끄는 작품이라 연휴를 맞아 방에 틀어박혀 읽었는데, 역시나 여러 번 속이 뒤집히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은 살인귀라는 제목에서 연상되는 공포나 잔혹함은 별로 보이지 않습니다. 너무도 디테일하게 시체 훼손 과정을 묘사한 한두 군데를 제외하곤 대체로 아주 쿨하고 간결한 방식으로 살인을 그리고 있습니다. 오히려 핵심은 살인귀가 된 후지코라는 여자의 파란만장한 연대기입니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가족과 학교에서 심각한 왕따와 폭력을 당하던 후지코는 일가족이 살해된 와중에 홀로 살아남아 이모의 손에 크게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남되, 절대 엄마처럼은 살지 않겠다.’는 일념만 남은 후지코는 자신의 생존과 화려한 삶에 대한 동경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을 철저히 파괴합니다. 중학생 시절 부잣집 아들인 대학생과 몸을 섞으며 신분상승을 기도하는가 하면, 돈만 모으면 성형외과로 달려가 자신의 얼굴을 모조리 뜯어 고치기도 합니다. 끔찍한 가난과 추한 외모만 극복한다면 절대 엄마처럼 살지 않을 거라 확신했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과정에서 또래집단의 아웃사이더로 밀려나지 않기 위해 속임수를 부리기도 하고, 자신의 약점을 알아낸 사람을 서슴없이 제거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후지코의 삶은 점점 엄마의 그것과 닮은꼴로 진화하기 시작합니다. 그것을 깨달은 후지코는 더더욱 포악해지고 동시에 희생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갑니다.

 

사실, 후지코가 바란 것은 행복입니다. 다만, 후지코에게 있어 행복은 어떻게 해도 채워지지 않는 무한대의 탐욕 그 자체였습니다. 후지코는 늘 자신에게 들키지만 않으면 그만이야.’라는 주문을 걸면서 자신의 탐욕을 합리화하고 절대 도달할 수 없는 행복을 위해 살인귀를 자처했습니다. 돈을 위해, 사랑을 위해, 행복을 위해 죄의식 없는 맹목적 살인을 불사한 후지코. 그런 살인귀의 일생을 지켜보는 일은 응원할 수도, 저주할 수도 없는 일이라 독자로서는 이야미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대며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소 작위적인 사족처럼 느껴지긴 했지만 많은 독자들이 이 작품의 백미라 지칭하는 대목은 서문후기입니다. 이 작품이 반전을 내포한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것도 바로 서문후기때문인데 단순한 연대기처럼 읽혔던 앞선 내용들을 모두 뒤집어엎는 듯한 마지막 한 줄은 (저처럼 사족으로 여긴 독자 외에는) 꽤나 충격적으로 읽힐 것으로 보입니다.

 

아무리 CCTVDNA검사가 도입되기 전인 시대를 배경으로 삼았다 해도 후지코가 어떻게 경찰의 수사를 피해 수많은 살인극을 저질렀나, 라는 의문도 제기되지만 사실 그 부분은 이 작품에서는 굳이 리얼리티를 따질 필요는 없다는 생각입니다. 그보다는, 불행한 유년기로 인해 행복에 대한 갈증이 극에 달했던 한 소녀가 어떻게 서서히 살인귀로 진화했으며, 그 갈증의 끝이 어떤 파국을 맞이하게 되는가, 라는 꽤나 암울하고 불편한 서사 자체에 몰입해서 읽어야 할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국내 출간된 마리 유키코의 작품 중 유일하게 안 읽은 작품이 고충증인데, 한동안은 읽지 말아야지, 하면서도 역시나 호기심이 생기는 것을 보면 마리 유키코의 이야미스의 늪은 무시무시한 흡인력을 갖고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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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쳐다보지 마 스토리콜렉터 67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9월
평점 :
절판


모녀가 살해당했다. 어머니는 난도질당했고, 딸은 침대에 고이 누워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별거 이후 6년 만에 가족들과 여름을 보내게 된 임상심리학자 조 올로클린은 경찰의 수사협조 요청을 거부하지만 수상쩍은 심리학자가 자신의 이름을 팔아 수사에 혼선을 가하자 어쩔 수 없이 가담하게 된다. 광기와 연민이 공존하는 두 살인은 큰 온도 차를 보였고, 조는 살인자에게 딸과 어머니가 표상하는 바가 분명 달랐다는 것을 단번에 간파해낸다. 모녀의 주변 인물들을 살피기 시작하면서 깊숙이 감춰져 있던 비밀들도 서서히 드러나고, 수사선상에 오른 용의자 모두가 의심스러운 상황에 놓이게 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널 지켜보고 있어에 이어 올해에만 두 편의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출간된 건 마이클 로보텀의 팬들에겐 무척이나 반가운 소식이었습니다. 그 전작인 미안하다고 말해에서 조는 심리학자보다는 탐정에 가까워 보였고, ‘널 지켜보고 있어에선 자신의 환자를 도우면서 심리학자의 카리스마를 회복했다면, 이번 작품에서 조는 두 가지 캐릭터를 모두 발산하고 있습니다.

피해자들이 끔찍하게 살해당하긴 했어도 사건 자체는 소소해 보입니다. 연쇄살인마의 행각으로 보이지도 않고, 면식범일 가능성이 무척 높아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조는 여러 면에서 당혹스런 처지에 놓입니다. 주변 인물들을 꼼꼼히 탐문해도 단서는 도무지 나타나지 않고, 악질적인 사이비 심리학자까지 나서서 무능한 경찰을 공격하자 수사는 방향을 잃은 채 이리저리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사실, 이번 작품은 전작들에 비해 페이지를 넘기는 속도가 무척 느린 편이었습니다. 사건 못잖게 비중을 차지한 조의 가족 이야기가 무겁고 처연한 톤을 지녔기 때문입니다. 아내 줄리안의 건강에 이상이 생긴데다, 딸 찰리가 범죄심리를 전공하겠다고 선언하자 조는 크게 놀랍니다. 거기다가 가족의 문제가 사건과 연결되기 시작하면서 조는 산산이 부서진 남자에서 겪었던 끔찍한 가족해체의 비극이 재생될까 전전긍긍합니다. 이런 서사가 작품 전반을 지배하다 보니 스릴감 넘치는 책읽기보다는 돌덩이를 가슴에 얹어놓은 듯한 묵지근한 책읽기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 때문인지, 수시로 튀어나와 웃음을 자아냈던 조 특유의 블랙유머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개성 강한 단골 조연들의 매력 역시 이 무거운 분위기에 압도되고 말았습니다.

 

물론 마이클 로보텀만의 스릴러로서의 미덕은 견고하게 유지되고 있는데, 명탐정이자 뛰어난 임상심리학자인 조 올로클린이 진실을 향해 분투하는 과정이라든가 하나같이 수상한 피해자 주변 인물들을 경찰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매서운 탐문은 언제나 그랬듯 독자의 마음을 제대로 휘어잡고 있습니다. , 끔찍한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아버지의 뒤를 이어 범죄심리학을 공부하려는 찰리는 자신만의 확고한 주장을 통해 아버지 조의 반대와 우려를 불식시키는 것은 물론 오리무중에 빠진 수사에 큰 도움을 주기도 해서 색다른 기대감을 주기도 했습니다.

 

다만, 다소 아쉬운 대목들도 있었는데 가장 눈에 띈 점은 조가 사건에 말려들게 된 계기와 조의 단독수사처럼 느껴진 전반적인 수사 과정입니다. 간곡하게 조를 수사에 초빙한 베로니카 총경은 그 뒤론 조의 후방지원에 무관심한 것은 물론 심지어 귀찮아하기도 합니다. , 피해자 주변을 이 잡듯 탐문하고 다니는 조에 비해 런던의 그 어느 경찰도 수사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건 납득하기 힘든 대목이었습니다. 조 혼자 모든 관련 인물들을 다 만나고, 사건 현장을 반복해서 조사합니다. 조의 수사방식 역시 용의선상에 오른 자들의 심리상태를 날카롭게 분석하는 것 외엔 딱히 특별하다고 할 것이 없어서 재미를 반감시켰습니다. 그래서인지 막판에 드러난 범인의 정체나 범행 동기는 이야기 전체에 녹아들지 못한 채 약간은 뜬금없는 반전의 느낌마저 주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무겁고 묵직한 서사가 깃든 작품이지만 재미라든가 개연성 면에서는 다소 아쉬움이 많이 묻어났습니다. 물론 여전히 마이클 로보텀의 문장은 한눈 팔 틈을 주지 않을 정도로 매력적이고, 사건은 끔찍한 외형과 함께 내밀한 심리서사를 겸비하고 있어서 매번 독특하고 특별한 사건 설정을 자랑하는 시리즈의 힘을 놓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런 매력과 힘 때문에 마지막 장을 덮자마자 다음 이야기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올해 또다시 조 올로클린 시리즈가 출간될 것 같진 않지만, 인생 최대의 위기에 봉착한 조가 이후 어떤 사건과 맞닥뜨릴지 벌써부터 궁금해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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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울 속 외딴 성
츠지무라 미즈키 지음, 서혜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평점 :
품절


등교 거부 후 방 안에 틀어박혀 지내던 중학교 1학년 여학생 안자이 고코로는

갑자기 환한 빛을 내뿜는 방안의 거울에 무심코 손을 댄 순간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가고 만다.

거울 속 세상은 서양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웅장한 고성이었고,

늑대가면을 쓴 어린 소녀와 고코로 또래의 6명의 남녀학생들이 고코로를 기다리고 있었다.

앞으로 1년 남짓 그곳을 드나들 수 있으며 비밀열쇠를 찾으면 소원을 빌 수 있다는 늑대소녀.

오랫동안 부모 외에 대화를 나눠본 적이 없는 고코로는

어딘가 삐딱하고 상처를 지닌 듯한 나머지 6명에게서 알 수 없는 동질감을 느낀다.

, 비밀열쇠를 찾아 소원을 빌면 자신의 고통과 상처가 치유될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 ● ●

 

‘10’, ‘교육’, ‘판타지’, ‘미스터리등 츠지무라 미즈키의 전공들이 총출동한 작품입니다.

등교거부 중인 소녀가 거울 속으로 들어가 다른 세상과 만나고

처음 만난 또래들과 갈등/화해하며 시간제한이 설정된 미션을 해결한다는 스토리는

언뜻 보면 해피엔딩이 보장된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냄새가 감지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그림 형제나 안데르센의 예쁜 동화처럼 포장된 듯한 이 작품의 핵심 서사는

갈등을 이겨내고 힘을 합쳐 비밀열쇠를 찾아 아름다운 해피엔딩을 맞이하는 것이 아니라

외딴 성에 오게 된 10대들의 비극적인 상처와 스스로 그것을 극복해가는 성장기입니다.

 

정체불명의 늑대소녀는 거울을 통해 성에 오갈 수 있는 건 9시부터 17시라고 알려줍니다.

고코로는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다른 10대들 모두 등교거부 중이란 걸 알게 됩니다.

하지만 그들은 꽤 많은 시간이 지나기 전까지 그 사실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피합니다.

각자 누구에게도 털어놓고 싶지 않은 고통스런 사연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친해진 뒤에도 좀처럼 속내를 털어놓지 않던 그들은

아키라는 소녀가 교복을 입은 채 외딴 성으로 들어온 사건 때문에 일대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등교거부 중인 10가 주인공이라면 결국엔 학교로 돌아간다는 엔딩이 나오기 마련인데

이 작품 역시 비슷하긴 해도 그 과정은 여타 작품들과는 많이 다릅니다.

보통은 학교와 가정은 반드시 돌아가야 할 곳이란 전제 하에 이야기가 전개되는데,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는 싫으면 돌아가지 않아도 된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런 생각을 통해 자신이 싫어하는 대상과 인물에 대해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고

결국엔 돌아가서 얼마든지 싸우겠다는 자기 의지를 키울 수 있다는 뜻입니다.

 

어쨌든...

7명의 10대는 1년 남짓한 시간 동안 거울 속 외딴 성과 현실세계를 오가며

자신이 처한 상황들과 고통스런 싸움을 계속 이어갑니다.

그러면서, 현실보다 외딴 성에서의 시간을 더 행복하게 여기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누구와도 쉽게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던 자신들이

외딴 성에서 만난 또래들에게 친구이자 보호자 같은 안온함을 느끼게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해진 시간대 외에는 절대 성에 남을 수 없었고,

늑대소녀가 정한 날짜가 지나면 이 성에서의 기억이 모두 휘발된다는 사실 때문에

성 안의 10대들은 영원히 이들과 성 안에 남고 싶다는 것이 불가능한 소망임을 깨닫습니다.

결국 이 간절하고도 실현 불가능한 욕망으로 인해 성 안에 큰 파장이 일어나게 되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선 비밀열쇠만이 해법임을 깨달으면서 이야기는 절정으로 치닫습니다.

 

사실, 츠지무라 미즈키의 작품세계에 낯선 독자라면 꽤 당혹스러울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고백하자면, 그녀의 작품을 5~6편 읽은 저로서도 그 당혹감은 거의 마찬가지였습니다.)

동화에 가까울 정도로 비현실적인 설정 속에 10대들의 등교거부라는 문제를 다루다 보니

독자로서 어떤 마음가짐을 갖고 페이지를 넘겨야할지 무척 모호해지기 때문입니다.

동화 같은 판타지로 여기고 읽자니 작품 자체를 너무 가볍게 대하는 것 같고,

‘10대와 학교의 문제를 다룬 미스터리라 하기엔 비현실적인 판타지 서사가 신경 쓰이고,

무엇보다 고코로의 상처라든가 막판의 반전과 여운이 분량만큼의 임팩트를 갖추지 못한 탓에

왠지 어중간한 상태에서 마지막 장을 덮게 된 느낌을 감출 수 없었습니다.

 

츠지무라 미즈키만의 특별한 코드들이 전부 버무려진 맛난 비빔밥 같으면서도

뭔지 몰라도 양념이나 재료 하나가 덜 들어간 듯한 허전함이 남은 작품이었지만,

거꾸로 말하자면 보기 드문 별미였던 것도 사실입니다.

비현실적인 시공간에 초대받은 등교거부 중학생들이라는 특별하고도 인상적인 설정은

츠지무라 미즈키가 꾸준히 추구해온 10대와 학교와 교육의 문제를 다루기에

더없이 매력적이고 풍부한 상상력의 산물로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다소 뻔해 보일 수 있는 이야기를 설정의 힘만으로도 신선하게 만든 필력이랄까요?

새삼 아직 못 읽은 츠지무라 미즈키의 차가운 학교의 시간은 멈춘다

어떤 캐릭터와 설정과 스토리를 담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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