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호새의 비밀 - 천재변리사의 죽음
이태훈 지음 / 몽실북스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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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밀함과 성실함으로 정평 난 천재 변리사 송호성이 인적 드문 골목에서 살해된 채 발견된다.

송호성과 죽마고우이자 라이벌 변리사인 강민호가 유력한 용의자로 몰리게 되고,

송호성이 직접 선발한 어딘가 비밀스러운 사연이 많아 보이는 수습 변리사 선우혜민 역시

강남경찰서의 수사선상에 오르게 된다.

숨진 송호성의 주머니에서 발견된 영수증 한 장.

그리고, 그 뒷면에 적힌 수수께끼 같은 메모, ‘AERUS-IL’에 숨겨진 의미는 과연 무엇일까?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익숙하지 않은 변리사라는 직업을 소재로 삼았고,

특허전쟁이라는 문제를 살인사건에 대입시킨 점에서 눈길을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 작가 본인이 오랫동안 특허 업계에 종사한 만큼

변리사나 특허라는 소재에 관해서만큼은 디테일이 잘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천재 변리사가 살해되고 그 죽마고우가 용의자로 꼽히는데다

베일에 싸인 듯한 수습 변리사 역시 용의선상에 오르면서 사건은 시작됩니다.

, 수사를 맡은 강남경찰서 내 형사들 간의 갈등과 공 다툼도 동시에 전개되는데,

1주일 뒤 국정원에게 수사권을 넘기기 전에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시간제한 설정까지 더해져

그들 간의 치열한 다툼은 수사 자체만큼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특허변리사가 연루된 사건이다 보니

당연히 특허분쟁을 둘러싼 갈등, 정치권과 기업이 개입된 이권 다툼이 예상됐는데,

거기에 주인공들의 과거사, 형사들의 공 다툼, 국정원 요원의 탐욕까지 끼어들면서

분량에 비해 이야기가 다소 복잡해지기도 했고 사족처럼 늘어난 대목도 많았습니다.

문제는 이렇게 동원된 다양한 리소스들이 제대로 배합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주요인물들의 유년기의 이야기나 강남경찰서 형사들의 공 다툼은 꼭 필요해 보이지 않았고,

천재 변리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특허분쟁은 너무 뻔한 공식대로 전개되는데다

현실감마저 부족해 보여서 긴장감을 갖고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인지 특허변리사라는 주요 소재가 딱히 인상적으로 느껴지지 않기도 했습니다.

, 탐욕스러운 정치인과 국정원 요원은 설정된 캐릭터에 비해 어설픈 언행만 거듭했고,

미스터리를 푸는 역할을 맡은 변리사나 형사는 주인공다운 포스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현실감 없는 설정들도 눈에 거슬렸는데,

그토록 천재 변리사라 불린 인물이 왜 그렇게 가난에 시달렸는지도 잘 모르겠고,

국정원은 당장 수사권을 회수할 상황에서 왜 1주일씩이나 경찰에게 시간을 줬는지 모르겠고,

USB, 영수증, 메모 등 주요단서들은 너무 쉽거나 안이하게 발견되고 있습니다.

 

요약하자면 미스터리로서의 치밀함도, ‘특허변리사라는 소재의 특별함도

제대로 독자에게 어필하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변을 보면 작가가 이 작품에 쏟은 애정이 고스란히 느껴지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미스터리 서사나 소재의 특별함 가운데 하나만 제대로 살았더라도

작가의 의욕이 어느 정도 독자에게 전달되지 않았을까, 라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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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C. J. 튜더 지음, 이은선 옮김 / 다산책방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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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로운 작은 마을 앤더베리에 사는 에디와 미키를 포함한 12살의 다섯 친구들은

어느 날 숲속에서 머리가 사라진 소녀의 토막시체를 발견한다.

이후 그들의 일상은 세차게 흔들고 다시 내려놓은 스노볼처럼 완전히 달라진다.

그리고 30년이 지난 현재, 숲속 사건을 책으로 내고 싶다는 미키의 방문에 당황한 에디는

그의 방문과 동시에 날아든 (숲속 사건을 암시하는) 익명의 편지에 더더욱 놀란다.

흐지부지 마무리됐던 경찰의 수사결과와 달리 별도의 진실이 있다고 믿게 된 에디는

결국 30년 동안 기억 속에 묻어뒀던 숲속 사건의 진실을 찾기로 결심한다.

 

● ● ●

 

숲에서 발견된 10대 소녀의 토막시체, 순수와 악마성을 겸비한 12살 소년소녀들의 혼돈,

사랑과 평화를 표방하면서도 정작 안으로는 균열 투성이인 가족들,

축제, 폭력, 낙태, 교회, 권위 등으로 뒤범벅된 소도시 주민들 간의 노골적인 갈등,

그리고 30년이 지난 후에 당시 사건 관련자들이 벌이는 느닷없는 진실 공방 등

초크맨은 꽤나 다양한 서사를 한데 버무린 작품입니다.

심지어 읽는 동안 곳곳에서 스티븐 킹의 호러 판타지의 느낌을 종종 받곤 했는데,

책을 다 읽고 서평을 쓰기 전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스티븐 킹 본인이

내 스타일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작품도 좋아할 것이다.”라는 코멘트를 했다고 해서

제가 잘못 읽은 건 아니구나, 라며 안심(?)하기도 했습니다.

 

사실, ‘초크맨은 정통 미스터리나 스릴러로 보기는 어려운 작품입니다.

오히려, 끔찍한 유년기와 청소년기를 보낸 12살 소년소녀의 성장소설의 면모가 더 강합니다.

동시에 30년이 지나서도 12살 무렵의 악몽에 여전히 발목이 잡혀있는,

어쩌면 평생 그 짐을 짊어져야 하는 운명에 빠진 엉망진창 중년들의 회상기이기도 합니다.

 

물론 주인공 에디가 30년 전 숲속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는 것이 주된 서사이고,

관련자 하나하나를 만날 때마다 그날의 진실이 양파껍질처럼 거듭 새롭게 밝혀지며,

결국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과정을 거쳐 진범이 드러나는 미스터리 구조임엔 분명합니다.

하지만 우연과 우연이 겹친 끝에 만들어진 운명 같은 필연이 연이어 등장하고,

현실과 비현실을 오가는 몽환적인 설정이 꽤 비중 있게 다뤄지는데다,

메인 사건과 연관 있긴 해도 별개처럼 보이는 소소한 해프닝들이 적잖이 전개돼서

간결하고 명확한 한 줄 스토리 정리가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재미있게 읽었음에도 별 1개를 뺀 가장 큰 이유이기도 합니다.)

 

워낙 크고 작은 사건들이 많이 등장하고 인물관계도 복잡해서

그 내용들을 설명하는 것 자체가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두루뭉술한 서평이 되고 말았지만

어쨌든, 캐릭터들은 생생하고 다양한 크기의 반전들도 끊임없이 등장하며,

호러와 미스터리가 겹겹이 쌓인 덕분에 페이지는 무척 잘 넘어갑니다.

, 흐트러진 단서들이 하나둘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과정 역시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선명한 스토리라인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약간은 질척이는 전개가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단순한 진범 찾기 이상의 복잡한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꽤 좋은 성적을 낸 초크맨을 흥미롭게 읽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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널 지켜보고 있어 스토리콜렉터 65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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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임상심리학자 조 올로클린 시리즈(한국 출간 기준) 네 번째 작품입니다. 파킨슨병을 앓고 있지만 뛰어난 직관과 추리력으로 사건의 진실을 파헤쳐온 그가 이번에는 곤란한 상황에 빠진 자신의 환자를 돕다가 의문의 살인사건에 개입하게 됩니다.

거액의 빚만 남기고 종적을 감춘 남편 때문에 매춘까지 하게 된 마니는 주변 인물들이 연이어 살해당하자 용의선상에 오릅니다. 정황 외엔 물증도 단서도 없어서 체포는 면하지만 마니는 눈앞에 닥친 현실 때문에 남편을 찾는 일이 시급해졌고 담당의사인 조에게 도움을 청합니다. 조는 마니의 사연을 심상치 않게 여기곤 퇴직 경찰인 루이츠와 함께 조사에 나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마니가 감췄던 비극적인 과거사는 물론 사건의 진상을 목도하게 됩니다.

 

전작인 미안하다고 말해가 심리학자보다는 명탐정으로서의 조 올로클린을 그렸다면 이번 작품은 두 캐릭터가 잘 버무려진 조를 그리고 있습니다. 살인사건에 말려든 자신의 환자이자 두 아이의 어머니인 마니를 도우면서 심리학자로서의 통찰력은 물론 명탐정으로서의 추리력까지 발휘하기 때문입니다.

작품 중후반에나 설명되는 중요한 설정이라 자세히는 소개 못하지만 마니의 심리적 문제가 이번 사건의 핵심 단서로 등장하면서 조의 전공인 임상심리학이 모처럼 그 진가를 드러냅니다. , 연쇄살인사건의 용의자로 마니를 점찍은 경찰과 달리 조는 마니의 남편이 사라지기 직전에 연락했던 사람들을 하나하나 만나면서 마니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애쓰기도 합니다.

 

독자의 긴장감을 배가시키는 또 다른 중요한 설정은 작품 제목대로 끊임없이 마니를 지켜보고 있는 그 누군가입니다. 마니의 수호천사처럼 보이기도 하고, 거꾸로 위협적인 인물처럼 보이기도 하는 그 누군가때문에 이야기가 본격적으로 속도감과 긴장감을 얻게 되는데, 아쉬운 점이라면 이 대목이 꽤 늦게 등장한다는 점입니다. 밑바닥을 전전하는 마니의 궁핍한 현실을 설명하기 위해 꽤 많은 분량이 초반에 할애되는데, 그런 탓에 마이클 로보텀 작품답지 않게 초반 100페이지가 넘도록 느슨함과 지루함이 느껴졌습니다. 물론 막판에 밝혀진 마니의 비밀의 폭발력을 위해 꼭 필요한 토대인 건 맞지만 동어반복처럼 읽힌 게 사실입니다.

 

중후반부터 스릴러의 미덕이 발휘되면서 재미를 배가시켰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남아있어서 역시 마이클 로보텀!”이란 찬사가 저절로 나오기도 했지만, 가장 아쉬운 점 하나만 꼽으라면 다소 작위적으로 느껴진 범인의 실체입니다. 동기도 방법도 목표도 비현실적인 면이 과하다고 할까요? 물론 그동안 조가 맞닥뜨린 범인들 모두 비정상적으로 뒤틀린 심리적 문제를 갖고 있었지만 그들은 나름 소시오패스로서 현실감 있는 캐릭터를 지니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의 범인은 인공미가 강하게 느껴진 게 사실입니다.

 

별거 상태에 있는 조의 가족들을 비롯 여경감 베로니카, 심리학자 빅토리아 나파르스텍 등 전작에 등장했던 매력적인 조연들이 안 보인 건 아쉬웠지만, 거의 투톱 주인공처럼 활약한 퇴직 경찰 빈센트 루이츠는 여전히 압권의 캐릭터였습니다. , 딱히 조를 괴롭히는 악역이 눈에 띄지 않아서 긴장감이 좀 떨어지긴 했지만, 그 공백을 메울 만한 크고 작은 조연들이 충분히 자기 역할들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저런 아쉬움 때문에 별 0.5개를 빼긴 했어도 흡입력 강한 마이클 로보텀의 글빨과 연민과 응원을 자아내는 조 올로클린의 매력 덕분에 이번에도 기대한 만큼의 만족스러운 책읽기가 됐습니다. 들은 풍문에 따르면 조만간 후속작인 나를 쳐다보지 마’(Close Your Eyes)가 출간될 것 같은데, 한 해에 두 편이나 조 올로클린의 이야기를 만나는 건 정말 특별한 행운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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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담을 파는 가게 - 아시베 다쿠 연작소설
아시베 다쿠 지음, 김은모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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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하루가 멀다 하고 헌책방을 드나들며 고서를 수집하는

마법에 이끌리듯 들어서선 아무도 찾지 않을 것 같은 낡고 허접한 책자를 집어 든다.

오래전 문을 닫은 정신병원의 입원 안내서, 무명작가가 직접 쓰고 제본한 삼류 탐정소설,

결말을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소년 만화, 매혹적인 여인의 사진이 실린 영화 서류철 등...

수수께끼 같은 헌책을 입수한 후 나타나는 섬뜩한 징조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계속 빠져들고

급기야 자신의 행동이 초래할 결과를 알지 못한 채,

작가를 찾아 나서거나 내용의 진위를 파헤치거나 미완성 부분을 직접 메우기도 한다.

그러는 사이 어느덧 책장 안쪽의 세계가 서서히 현실을 침범해온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지금은 인터넷으로도 중고서적을 쉽게 검색하고 구입할 수 있지만

여전히 헌책방에 대한 아날로그적 느낌은 아련하고 애틋한 것이 사실입니다.

이 작품의 주요 무대인 헌책방은 흔히 떠올릴 수 있는 소설 중심의 헌책방이 아니라

병원 안내 서적이나 영화제작 관련 서류철 등 그야말로 종이로 된 모든 것이 보관된,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자면 오래된 종이들의 보관소같은 느낌입니다.

 

헌책방을 찾는 를 그린 다섯 편과 헌책방을 운영하는 를 그린 한 편까지

모두 여섯 편의 단편이 수록된 작품집입니다.

다섯 편의 는 그다지 잘 나가지 못하는 작가지만 헌책방에서 구한 귀한 자료들을 통해

작품의 영감을 얻거나 그 자료들 속에 숨어있는 진실 찾기에 나서곤 합니다.

는 늘 헌책방에서 구한 자료들을 볼 때마다 기시감 또는 묘한 운명 같은 걸 느끼는데

실제로 그 자료들을 추적하다 보면 어떤 식으로든 인연이 닿아있음을 감지하게 됩니다.

문제는 그 추적의 끝이 대체로 파국에 이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 파국은 마지막 수록작이자 표제작인 기담을 파는 가게에서 절정에 이릅니다.

 

미쓰다 신조 류의 기담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이 작품에 수록된 기담들 자체는 공포심이나 여운에 있어 그리 파괴력이 크진 않습니다.

여름에 어울리는 소름 돋는 기담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소소한 해프닝의 기록이라고 할까요?

물론 마지막 수록작에서 밝혀지는 기담을 파는 가게의 진실은 꽤나 놀라움을 전합니다.

그리고 작가가 독자들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도 마지막 수록작에서 모두 밝혀집니다.

 

무서운 기담을 바랐던 독자에게는 좀 실망감이 느껴질 수도 있지만,

미쓰다 신조와는 좀 다른 톤의, 그것도 헌책방에 관한 소소한 기담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한나절이면 완독할 수 있는 이 작품에서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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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섬광 - 김은주 미스터리 소설
김은주 지음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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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 미스터리를 꽤 좋아하는 편인데다

(거의 처음 읽는 것 같은) 한국작가의 메디컬 미스터리라 무척 기대가 됐던 작품입니다.

 

일단 오프닝은 흥미롭습니다.

15살 소녀 수인이 5년 만에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날, 동갑내기 소년 고윤이 투신자살합니다.

고윤은 수인과 거의 동시에 코마상태에 빠졌다가 1년 만에 깨어났고,

그 뒤로 아직 코마상태인 수인을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독백처럼 들려주던 소년입니다.

수인은 코마상태에서도 고윤의 이야기를 모두 들을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고윤의 죽음이 병원이나 경찰의 결론처럼 일반적인 자살이 아님을 확신합니다.

수인과 고윤의 담당간호사였던 희정 역시 고윤이 절망감에 자살한 것이 아니며,

그에 관한 결정적인 단서도 손에 넣지만 쉽사리 행동에 옮기지 못합니다.

다른 경찰들과 달리 고윤의 죽음에 의문을 품은 형사 무원은 이리저리 조사를 진행하지만

어디에서도 자신의 의문을 해결해줄 단서를 찾아내지 못해 답답할 따름입니다.

 

같은 목표를 이루기 위해 어두운 터널을 함께 달린 형사, 간호사, 소녀.”라는 본문 속 표현처럼

이 작품은 무원, 희정, 수인이 고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입니다.

그 과정에서 부도덕한 행위를 일삼았던 대형병원의 추악한 이면,

모두의 무관심 속에 무기력하게 절망해야 했던 의료사고 희생자 유족들의 슬픔,

그리고, 진실을 알면서도 오락가락하는 사건 관련자들의 불안감 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됩니다.

 

사실, 이야기는 무척 단선적입니다.

코마상태에서 깨어난 소녀라는 특별한 설정 외에는

신약 개발, 대형병원의 횡포, 인명조차 도구로 여기는 탐욕, 무기력하게 이용당한 희생자 등

전형적인 메디컬 미스터리의 요소들이 공식처럼 배치돼있습니다.

이야기의 흐름 역시 큰 무리 없이 무난하게 흘러갑니다.

분량도 300여 페이지에 불과해서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는데,

문제는, 다 읽고 나면 어딘가 허전하기도 하고,

특히 긴장감 같은 건 거의 느끼지 못한 듯한 아쉬움이 남는다는 점입니다.

그 아쉬움을 일일이 다 언급하면 서평이 지나치게 길어질 것 같아서,

읽는 동안 메모했던 단문들을 나열하는 것으로 대신하겠습니다.

 

- 단서들이 다 노출됐는데 정작 주인공들은 아무 행동도 안 한다. 고민만 하고 있다.

  각자 갖고 있는 단서나 의구심을 상대에게 보여주기만 해도 모든 게 해결될 텐데...

- 주인공 형사의 가족사나 트라우마가 이 작품에 꼭 필요한 설정이었나?

  정작 형사는 진실을 밝히는 과정에서 별 역할을 한 게 없다.

- 사건과는 무관하게 자기 연민에만 빠진 조연들. 왜 등장한 걸까?

  그들의 어두운 개인사를 일일이 다 언급할 필요가 있었을까?

- 악당은 자신의 행위를 은폐하기 위한 노력을 거의 하지 않는다.

  그러다가 무기력하게 주인공에게 당하고 만다. 허술하기 짝이 없는 악당.

- 제목을 너무 추상적으로 지었다. 그 의미를 잘 모르겠다.

 

메디컬 미스터리라고 해도 인물들이 적극적으로 행동해야 되고 긴장감이 팽배해야 하지만,

이 작품의 전반적인 기조는 조용함그 자체입니다.

수인은 고윤의 죽음의 진실을 밝힐 결정적 증거가 존재한다는 걸 알면서도

적극적으로 그것을 손에 넣기 위해 애쓰지 않습니다.

희정 역시 결정적 증거의 존재를 알면서도 그저 고민만 할뿐 아무 행동을 하지 않습니다.

무원은 형사로서 이리저리 뛰어다니고 탐문만 할뿐 정작 실속은 별로 없습니다.

세 인물이 한 번만 진지한 대화를 하고 적극적으로 자신의 패를 드러내기만 했어도

수사는 급물살을 탈 수 있었고 이야기는 좀더 확장성을 지닐 수 있었을 텐데,

작가는 엉뚱하게 주인공과 조연들의 개인사나 심리상태 묘사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했습니다.

그러니 긴장감 없는 책읽기과 다 읽은 뒤의 허전함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소재 자체나 필력만 보면 콘텐츠진흥원 지원사업 선정작으로 뽑히기에 충분한 퀄리티지만

이 작품을 원작으로 2차 콘텐츠가 제작되려면 훨씬 더 역동적인 서사가 가미돼야 할 것입니다.

조용함자체가 미덕인 메디컬 미스터리도 있겠지만,

적어도 이 작품 속 인물이나 사건은 애초 조용함과는 거리가 멀게 설정됐기 때문입니다.

문장이나 필력만 보면 후속작을 충분히 기대할만한 작가라는 생각입니다.

후속작도 장르물이라면 좀더 역동적인 서사를 고민하기를 바라고 싶습니다.

 

 

사족으로...

번역물의 오타도 마찬가지지만 한국작가의 작품에서 오타가 발견되면 참 난감합니다.

작가의 오타인지, 편집자의 실수인지 모르겠지만 씁쓸함이 훨씬 더 강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죠.

처음엔 그럴 수도 있겠거니 하다가, 너무 많다 싶어서 따로 정리해봤습니다.

물론 전부는 아니고 제 눈에 띈 것만 정리한 것입니다.

 

p31, 6. 희정의 성식의 말이 무슨 뜻인지 알고 있다.” (희정은)

p34, 4. “수인을 손을 뻗어...” (수인은)

p47, 7. “형사라면 누구나 불량식품으로 시민의 건강을 보호해야..” (불량식품으로부터)

p70, 10. “레지던트들이 자신의 말을 경철하고 있다는..” (경청하고)

p84, 1. “자신과 같이 처지에 있던 친구의...” (같은)

p114, 8. “아이들 이야기를 드리려면 5년 전 일부터 말씀을 드려야...” (들려드리려면)

p116, 1. “무원의 말이 희정은 누가 가방 속으로 손이라도 불쑥 넣은 양 당황...” (말에)

p144, 6. “매일 작은 책상 앉아서 일하고 있는 그녀가...” (책상에)

p151, 1. “무원의 희정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형사의 입장에서 이해했다.” (무원은)

p153, 9. “1인실은 그런 것들은 아주 천천히 처음부터 끝까지 뜯어보기에...” (것들을)

p184, 8. “친구가 털어놓은 비밀은 들은 것은 물론...” (비밀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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