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의 흔들림 - 영혼을 담은 붓글씨로 마음을 전달하는 필경사
미우라 시온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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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즈키 지카라는 오랜 역사와 진심 어린 서비스로 사랑받는 미카즈키 호텔에 근무하는 호텔리어입니다. 단골 고객의 연회를 준비하던 쓰즈키는 초대장 봉투에 붓글씨로 주소를 적어주는 서예가 도다를 찾아갔다가 경박하고 괴짜 같은 그의 언행에 깜짝 놀랍니다. 서예가라기보다는 꽃미남 바람둥이 혹은 거리낌 없이 막말을 내뱉는 무례한 사람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우발적으로 맡게 된 편지 대필 작업 덕분에 조금씩 서로를 알아가기 시작합니다. 쓰즈키는 도다의 수려한 붓놀림과 생생한 감정이 느껴지는 글씨에 반하고, 도다는 모두에게 호감을 사는 쓰즈키의 타고난 공감력과 이해심을 인정합니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우정은 도다의 갑작스럽고도 일방적인 통보 때문에 파열될 위기에 처합니다.

 


먹의 흔들림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두 가지인데, 하나는 배를 엮다의 작가 미우라 시온의 작품이란 점, 또 하나는 소재가 고풍스럽고 예스러운 정서가 깃든 서예라는 점 때문입니다. ‘배를 엮다는 이제 더는 사람들이 잘 찾지 않는 사전을 제작하는 편집부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인상적인 작품인데, 연필과 볼펜조차 구시대의 유물처럼 여겨지는 요즘 서예 역시 사전과 마찬가지로 아날로그 향기가 진하게 풍기는 소재라서, 또 서예가이자 필경사(손글씨로 글을 적는 것을 직업으로 하는 사람)가 주인공으로 등장해서 남다른 기대감을 품었습니다.

 

간략하게 요약하면, 살아온 이력이나 직업, 성격, 타인과의 소통방식까지 정반대인 두 남자 쓰즈키와 도다가 서예를 통해 소중한 인연을 맺는 이야기입니다. 쓰즈키가 반듯한 모범생 같은 남자라면, 도다는 어딘가 삐딱한데다 서예가와는 거리가 먼 괴짜 같은 남자입니다. 당연히 첫 만남부터 충돌과 몰이해가 거듭되고 마치 만담 커플이 서로 딴 소리만 주고받는 듯한 웃지 못 할 장면들이 이어집니다. 그러던 두 사람은 우연히 맡게 된 편지 대필 때문에 뜻밖의 협력을 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자신과는 다른 상대방의 진면목을 발견합니다.

 

제가 알기로 필경사는 한국에선 거의 찾아보기 힘든 직업입니다. 연회 초대장의 주소를 붓글씨로 대필하는 일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더구나 (요즘도 서예학원이 존재하는지 잘 모르겠지만) 서예 자체가 무척 희귀하거나 사치스러운 취미로 여겨진 지 오래된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미우라 시온은 먹과 벼루가 발산하는 은은한 향기라든가 화선지 위를 힘차게 또는 부드럽게 오르내리는 붓의 움직임, 그리고 그 움직임이 자아낸 갖가지 형태의 글씨의 향연 등 서예의 고풍스러운 매력을 필경사 도다를 통해 생생하게 그려냄으로써 거의 문외한이나 다름없는 독자마저 그 아름다운 세계에 푹 빠지게 만듭니다.

 

다만 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는 쓰즈키와 도다가 소중한 인연을 맺어가는 스토리 자체가 너무 밋밋하고 감흥이 부족했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에게 접점을 만들어준 편지 대필은 다소 뜬금없는 설정 같았고, 그 대필 편지의 내용도 그다지 흥미롭지 않았습니다. 또한 쓰즈키가 괴짜에 가까운 필경사 도다의 페이스에 말려들며 호감을 갖게 되는 에피소드들 역시 자연스럽지 못했는데, 그러다 보니 쓰즈키의 말과 행동이 매번 ?”라는 의문을 자아내곤 했습니다. 다 읽고도 기승전결을 갖춘 이야기라기보다는 도다와의 만남을 기록한 쓰즈키의 일기장처럼 느껴진 건 이런 이유들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서예의 매력과 품격을 그린 장면들은 정말 아름답고 황홀했지만, 정작 두 주인공의 이야기는 그다지 눈길을 끌지도 못했고 음미할 만한 여운도 남기지 못했습니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는 사전을 제작하는 편집부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그린 배를 엮다처럼 먹의 흔들림에서도 등장인물들이 품는 뭉클함과 뿌듯함, 그리고 충만한 아날로그 감성을 만끽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던 터라 아쉬움이 더 크게 느껴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미우라 시온이 그린 서예를 통한 치유의 서사에 만족한 독자가 훨씬 더 많을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이 작품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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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우스메이드 2 - 하우스메이드의 비밀
프리다 맥파든 지음, 황성연 옮김 / 북플라자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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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살의 나이에 대학에 다니며 사회복지사가 될 계획을 갖고 있는 밀리 캘러웨이는 살인 전과 때문에 비공식적인 경로를 통한 하우스메이드 외에는 일자리를 찾기 힘든 형편입니다. 그러던 어느 날 IT 재벌인 더글러스 개릭의 연락을 받고 맨해튼 펜트하우스의 하우스메이드가 된 밀리는 자신의 천운에 감격하지만, 이내 평범하지 않은 개릭 부부의 상황을 감지하곤 불안감에 휩싸입니다. 손님방에서 나오지 않는 아내 웬디, 처음엔 친절했지만 밀리가 웬디에게 관심을 갖자 싸늘한 태도를 보이는 남편 더글러스, 살짝 열린 문틈으로 보인 웬디의 멍투성이 얼굴, 그리고 빨래와 세면대에서 발견되는 핏자국 등 밀리를 긴장하게 만드는 일이 연이어 벌어졌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얼마 안 가 밀리는 웬디가 처한 끔직한 상황을 직접 목격합니다.

 


서평에 앞서 편집에 관해 한마디 하겠습니다. 빠른 속도로 책을 읽는 편인데도 12개나 되는 오타를 발견했는데, 모든 독자가 다 그렇진 않겠지만 제 경우엔 책읽기를 방해하는 오타를 견디지 못합니다. 또 그런 상태로 책을 판매한 출판사의 태도도, 일반독자조차 쉽게 찾아내는 12개의 오타를 방치한 편집자와 번역가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하우스메이드 2’는 내용만으론 별 5개도 충분하지만, 편집에 관한 한 별 1개도 주고 싶지 않습니다.

 

과거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 친구를 구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르고 10년을 복역한 밀리는 출소 후 하우스메이드로 일하며 남편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자들을 여러 번 구해낸 적 있습니다. 때론 불법적이고 극단적인 방법을 통해 남자들을 응징한 적도 있습니다. 그런 상황을 보면 결코 외면하지 못하는 모태 오지라퍼이기 때문입니다. 그랬던 밀리가 사회복지사가 되기로 결심한 건 그것이 법을 어기지 않고도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을 도울 수 있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밀리는 맨해튼의 펜트하우스에서 또다시 가혹한 상황에 처합니다. 전형적인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웬디를 모르는 척할 수 없었던 밀리는 그녀를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씁니다.

 

밀리를 더욱 힘들게 하는 건 6개월 된 연인 브록의 존재입니다. 은수저 출신의 변호사인 그는 밀리를 진심으로 사랑하며 결혼까지 꿈꿉니다. 하지만 밀리는 자신의 살인 전과를 언제까지고 숨길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에 그와의 사랑이 고통스럽기만 합니다. 그런 와중에 펜트하우스의 일이 터지자 밀리는 자신에겐 사랑과 결혼이란 게 결코 손에 넣을 수 없는 허상임을 뼈저리게 깨닫습니다.

한편 위기에 처한 여자들을 구할 때마다 자신과 함께 행동했던 전 연인의 존재가 늘 밀리의 마음 한 편에 남아있습니다. 그가 곁에 있다면 웬디를 구해내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거란 생각에 2년 전 일방적으로 소식을 끊고 이별을 초래한 그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이 연인의 이름이나 캐릭터를 밝히지 않은 건 전작인 하우스메이드에 대한 대형 스포일러이기 때문입니다. 아마 많은 서평에서 이 연인의 이름을 공개할 텐데, ‘하우스메이드를 읽지 않은 채 그 서평들을 접한 독자라면 아쉽지만 그 스포일러를 감수해야 할 것 같습니다)

 

1개를 뺄 정도로 아쉬웠던 건 서론이 너무나도 길고 장황했던 점입니다. 본격적인 사건은 중반부쯤에 터지는데, 그 전까지는 전작과 거의 비슷한 흐름으로 전개되는데다 유사한 상황들이 반복될 뿐이고, 현재 연인인 브록과의 갈등 역시 밀리를 민폐캐릭터로 보이게 할 정도로 지루하게 되풀이됩니다.

물론 본격적인 사건이 터진 뒤부터 마지막 장까지는 프리다 맥파든 특유의 몰아치는 반전과 짜릿한 스릴러 서사의 쾌감이 연이어 폭죽처럼 터집니다. 펜트하우스에서 벌어진 폭력과 학대의 진상이 드러나는가 하면, 빠져나오기 힘든 함정 속에서 허우적대던 밀리는 천운 같은 반전 덕분에 큰 위기에서 벗어납니다. 그리고 모태 오지라퍼 하우스메이드로서의 타고난 능력을 다시 한 번 발휘하는 데 성공합니다.

 

하우스메이드 시리즈는 모두 세 편이 출간됐습니다. ‘The Housemaid's Wedding’이라는 단편이 있긴 하지만, 장편으론 2024년에 출간된 ‘The Housemaid Is Watching’이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치명적인 하우스메이드 밀리 캘러웨이의 세 번째 활약도 조만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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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로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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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영문학 강사 시나 고스케는 동료 오쓰코쓰와 함께 신슈의 N호수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조카딸 유미와 단둘이 사는 전직 의사 우도의 저택에 방을 빌린다. 그런데 N호수로 향하는 버스에서 한 노파가 그곳에 가면 피의 비가 내리고 N호수가 새빨갛게 물들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채 사라진다. 저택에 도착한 두 사람은 우도와 유미 외에 다른 이의 기척을 느끼고, 얼마 후 호숫가에서 신비로운 미소년을 발견한다. 한데 미소년 목격담을 들은 우도는 왠지 심하게 동요한다. 그리고 인근의 화산이 폭발한 날, 시나와 오쓰코쓰는 신주로라는 이름의 그 미소년이 우도의 목을 베는 광경을 목격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유리 린타로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한 더벅머리 탐정 긴다이치 고스케보다 꼭 10년 앞선 1936신주로로 데뷔한 경시청 수사과장 출신의 명탐정입니다. “백발 머리를 보면 일흔 살 노인 같지만 건장한 몸이나 까무잡잡한 얼굴은 그가 아직 40대의 장정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라는 묘사대로 일단 외모부터 긴다이치 못잖게 독특한데, 애초 요코미조 세이시가 시리즈까지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은 아닌 듯 신주로에서 유리 린타로의 활약은 분량이나 역할 면에서 조연 정도에 그칩니다. 또 소개글에 따르면 신문기자 미쓰기 슌스케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 유리·미쓰기시리즈로 불리기도한다는데, ‘신주로에 미쓰기가 등장하지 않은 걸 보면 유리 린타로가 주인공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건 후속작부터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유리 린타로가 중반부쯤 등장해서 미스터리 해결사를 맡긴 하지만, ‘신주로의 메인 주인공은 화자이자 연쇄살인사건의 목격자인 시나 고스케입니다. 오쓰코쓰에게 이끌려 신슈의 N호수를 찾았다가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미소년 신주로의 연쇄살인을 목격한 시나는 경찰의 수사가 미궁에 빠진 가운데 도쿄로 돌아와서도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던 신주로가 도쿄에 출몰하여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자 다음 희생자는 자신이 아닐까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팔묘촌을 비롯하여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여러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신주로는 좀더 고풍스러운 문체, 집요함마저 느껴지는 탐미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화산 분화와 함께 지옥으로 변한 N호수, 호숫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저택, 괴팍한 백부와 함께 사는 아름다운 외모의 유미, 그리고 그 일대에 출몰하여 피해자의 목을 잘라 사라지는 미소년 살인귀 신주로 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보다 좀더 날것 같은 분위기와 음울하면서도 관능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인물들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또한 진주라는 이름(真珠郎)에 걸맞게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신주로가 어떻게 살인귀가 된 건지, 살인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며 왜 잘린 목을 들고 사라지는 건지, 목표물만 살해할 뿐 현장의 목격자들을 방치하거나 부상만 입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여러 가지 미스터리가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합니다.

 


본격 추리소설로의 노선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 과도기적 작품이므로 트릭과 동기의 치밀성은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라는 작품해설속 설명대로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는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살짝 아쉬움을 느낀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거칠고 잔인하면서도 애잔함을 놓치지 않는 고전미를 한껏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트릭 역시 찬찬히 복기하다 보면 결코 부족하지도, 허술하지도 않다는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색창연한 시대적 배경,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아날로그풍의 감정들, 그리고 탐욕과 복수와 배신의 조합이 낳은 참혹한 연쇄살인은 시대물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반기엔 유리 린타로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자 또 하나의 명품인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출간된다고 합니다. ‘신주로에서는 딱 필요한 만큼의 활약만 펼치고 퇴장해서 무척 아쉬웠지만, 시리즈 마지막 작품에선 명탐정 유리 린타로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신주로와 함께 수록된 단편 공작 병풍’(1940)은 유리 린타로가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로맨스와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단편이라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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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되살리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120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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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주 연방법원 판사 줄리아 커먼스와 그녀의 경호원 앨런 드레이먼트가 판사의 자택에서 살해된 채 발견됩니다. 새 파트너 프레더리카 화이트와 함께 플로리다로 날아간 에이머스 데커는 사건 현장을 보자마자 위화감에 사로잡힙니다. 현지 요원은 판사의 판결에 불만을 품은 자의 보복살인으로 추정했지만, 한 사람은 총으로 깔끔하게, 한 사람은 칼로 무참하게 살해된 현장을 본 데커는 별개의 살인사건일 가능성을 떠올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경찰 시절 첫 파트너였던 메리의 자살, 데커의 뇌에 이상 변화가 감지됐다는 연구소의 통보문, 느닷없이 배정된 새 파트너, 그리고 최근 들어 자꾸 떠오르는 죽은 아내와 딸의 추억 등 데커는 극도로 불안하고 심란한 상태에서 좀처럼 사건의 실마리를 찾아내지 못해 곤경에 빠집니다.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이머스 데커의 일곱 번째 이야기인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여느 전작들보다 이 시리즈의 팬들에게 호기심과 기대감, 안타까움과 연민을 동시에 선사합니다. 오랜 파트너 알렉스 재미슨이 뉴욕으로 떠난 뒤 데커에게 반강제로 배정된 새 파트너 화이트는 첫 등장부터 강렬한 인상을 풍기는 것은 물론 데커와 비슷한 가슴 아픈 상처를 지닌데다 수차례 충돌과 화해를 거듭하며 데커의 진지한 파트너로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줘서 단숨에 시리즈 팬들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한편 매 작품마다 아내 캐시와 딸 몰리에 대한 그리움을 드러냈던 데커가 메리의 자살로 인해 더더욱 깊은 심연으로 빠져들며 우울증 이상의 위태로운 모습을 보이는 장면이라든가 뇌에 이상 변화가 감지됐다는 통보 때문에 미래에 대한 두려움에 휩싸이는 장면은 그에게 주어진 잔혹한 운명을 다시 한 번 절절히 느끼게 만들어서 독자의 마음을 안타깝고 스산하게 만듭니다.

 

데커는 화이트의 반론에도 불구하고 다른 범인에 의해 벌어진 별개의 살인사건으로 여기고 수사를 진행합니다. 탐문을 거듭할수록 판사와 경호원의 숨겨진 사연들이 밝혀지고 두 사람의 살해 동기가 전혀 다르다는 점이 드러나면서 데커의 추론은 힘을 얻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초능력에 가까운 데커의 과잉기억증후군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점. 불안하고 심란한 상태에서 좀처럼 수사에 집중하지 못하기 때문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새 파트너 화이트가 큰 힘을 발휘합니다. 자신을 믿지 못하는 듯한 데커에게 정면으로 대들기도 하고, 언성을 높여가며 의견을 개진하기도 하던 화이트지만 그의 과거 속 비극과 현재의 고통을 알게 된 뒤로는 자신의 가족사와 속내까지 터놓으며 치유와 위로의 역할을 마다하지 않습니다.

 

미스터리의 구도만 보면 592페이지라는 분량은 다소 과해 보이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데커의 무간지옥 같은 고뇌, 화이트의 현실적인 고민, 그리고 두 사람 사이의 롤러코스터 같은 교감이 미스터리 못잖게 중요한 서사라서 그 부분에 꽤 많은 페이지가 할애된 작품입니다. 다른 작품 같으면 과도한 분량에 다소 불만을 품었겠지만,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는 사건보다 두 사람의 개인사가 더 강렬한 인상을 풍겨서 조금도 길거나 지루하게 느껴지지 않았습니다.

 

사실 데커와 화이트의 수사는 판사와 경호원 주변 인물들을 거듭 탐문하는 게 전부입니다. 물론 탐문 중에 얻어낸 정보를 통해 새 인물들이 조사 대상으로 떠오르기도 하고, 오랜 과거 속 사건과 인물까지 소환되면서 사건의 외연은 초반보다 엄청나게 확장됩니다. 막판까지 반전이 거듭되는 가운데 화이트의 도움으로 초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게 된 데커는 판사와 경호원의 죽음의 진상을 극적으로 밝히는 데 성공합니다. 그리고 독자의 궁금증을 자극했던 몇 가지 의문 - 왜 데커에게 새 파트너가 갑자기 배정됐나? 왜 플로리다에서 벌어진 사건에서 현지 요원들이 아닌 데커와 화이트가 수사의 주체가 됐나? - 이 마지막 장에서 풀리면서 짜릿한 쾌감과 함께 앞으로 이어질 후속작에서의 두 사람의 활약에 큰 기대감을 갖게 만듭니다.

 

검색해보니 기억을 되살리는 남자’(2022) 이후 에이머스 데커의 여덟 번째 이야기는 출간되지 않았습니다. 그 사이 ‘620분의 남자 시리즈3편까지 나왔던데, 데이비드 발다치가 언제쯤 데커-화이트 콤비의 두 번째 이야기를 선사할지 그저 궁금하고 기다려질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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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틀 아일랜드
아키요시 리카코 지음, 임희선 옮김 / 하빌리스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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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집 아일랜드에서 무인도에 딱 세 가지만 가져갈 수 있다면?”이란 주제로 흥미로운 대화를 나누던 단골손님 여덟 명이 실제로 무인도 여행을 떠나게 됩니다. 낚싯대, 에어매트리스, 공기총, 술 등 제각각 세 가지 물건만 지닌 채 무인도에 도착한 일행은 낭만적인 첫날을 보내지만, 다음날 아침 그들 앞엔 지옥도가 펼쳐집니다. 타고 온 배가 사라진 가운데 단 한 명만이 섬을 빠져나갈 수 있으며 유일한 생존자는 10억엔의 상금을 받게 된다는 충격적인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다 함께 섬을 빠져나가기 위해 역할을 분담하며 협력하지만 얼마 안 가 첫 희생자가 나타나자 상황은 급변합니다.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게 된 공포와 두려움 속에 섬은 이내 피비린내로 뒤덮이기 시작합니다.

 

(줄거리 요약 가운데 일행이 섬에 들어가게 된 경위와 생존경쟁에 내몰리게 된 과정을 생략했는데, 나름 이 작품의 첫 반전이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소개글과 뒤표지 카피에는 그 경위과정이 모두 공개되어 있는데, 가급적이면 아무 정보 없이 본편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한국에 소개된 아키요시 리카코의 작품을 모두 읽었는데, 한 번도 이런 장르를 다룬 적이 없는 작가라 반가움에 앞서 뜻밖이란 생각이 먼저 들었습니다. 5개를 준 성모암흑소녀처럼 서스펜스와 미스터리가 결합된 서사가 그녀의 전공이라고 단정해왔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 기타노 타케시가 주연을 맡은 영화 배틀 로얄’(2002)을 너무 좋아해서 아키요시 리카코가 그린 서바이벌 스릴러가 어떤 이야기를 품고 있을지 무척 궁금해졌습니다.

 

전체적인 구조는 영화 배틀 로얄이나 수잔 콜린스의 헝거 게임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심하는 가운데 필요에 따라 이합집산이 이뤄지고 험난한 지형의 무인도를 배경으로 피비린내 나는 살육극이 연이어 벌어집니다. 같은 술집의 단골들로 늘 웃음과 농담을 주고받던 인물들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타인들의 진면목에 놀라기도 하고, 스스로도 서바이벌 스릴러의 인물답게 극적인 변화를 겪습니다. 인상 좋은 아저씨 같던 인물은 실은 칼로 사람을 베는 손맛을 갈망하던 사이코패스였고, 유튜버로 성공하기를 꿈꾸는 청년은 살인이 난무하는 가운데에도 카메라를 놓지 않으며 오히려 위기를 기회로 삼습니다. 모두에게 민폐 캐릭터로 낙인찍힌 인물과 모두에게 호감과 안도감을 주던 인물 등 갖가지 군상들이 살아남기 위해 변신하는 모습도 흥미롭습니다.

 

매 챕터마다 화자가 바뀌는 가운데 희생자가 발생하는데, 작가는 매번 독자의 예상을 뒤집어가며 전략적 이합집산을 꾸미고 다음 희생자를 선정하곤 합니다. 마지막 생존자는 그리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지만 클라이맥스와 엔딩에 이르는 과정에 연이어 반전이 벌어지곤 해서 끝까지 긴장감을 만끽할 수 있습니다.

 

서바이벌 스릴러라는 장르의 특성상 속도감도 무척 빠르고 등장인물이 느끼는 공포와 두려움도 고스란히 독자에게 전달됩니다. 다만 사건 위주로 급하게 전개되다 보니 전체적으로 가볍다는 인상을 피할 수 없었던 점(특히 생존을 건 마지막 대결은 현실감이 떨어질 정도로 너무 가볍고 만화스러웠습니다), 다소 피상적으로만 그려진 등장인물들의 심리묘사가 좀더 깊고 디테일했더라면 좋았을 거란 점이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300페이지가 살짝 넘는 짧은 분량인데 제가 아쉽게 느낀 부분들을 꾹꾹 눌러 담아 한 100페이지 정도 늘렸더라면 훨씬 더 인상적인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해봅니다.

 

이 작품으로 아키요시 리카코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살짝 고개를 갸웃할지도 모르는데, ‘성모암흑동화는 그녀의 진가를 제대로 맛볼 수 있는 작품이니 꼭 읽어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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