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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주로
요코미조 세이시 지음, 정명원 옮김 / 시공사 / 2025년 6월
평점 :
*출판사에서 제공받은 도서입니다.
영문학 강사 시나 고스케는 동료 오쓰코쓰와 함께 신슈의 N호수에서 여름휴가를 보내기로 하고, 조카딸 유미와 단둘이 사는 전직 의사 우도의 저택에 방을 빌린다. 그런데 N호수로 향하는 버스에서 한 노파가 “그곳에 가면 피의 비가 내리고 N호수가 새빨갛게 물들 것”이라는 예언을 남긴 채 사라진다. 저택에 도착한 두 사람은 우도와 유미 외에 다른 이의 기척을 느끼고, 얼마 후 호숫가에서 신비로운 미소년을 발견한다. 한데 미소년 목격담을 들은 우도는 왠지 심하게 동요한다. 그리고 인근의 화산이 폭발한 날, 시나와 오쓰코쓰는 ‘신주로’라는 이름의 그 미소년이 우도의 목을 베는 광경을 목격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유리 린타로는 요코미조 세이시가 창조한 더벅머리 탐정 긴다이치 고스케보다 꼭 10년 앞선 1936년 ‘신주로’로 데뷔한 경시청 수사과장 출신의 명탐정입니다. “백발 머리를 보면 일흔 살 노인 같지만 건장한 몸이나 까무잡잡한 얼굴은 그가 아직 40대의 장정이란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라는 묘사대로 일단 외모부터 긴다이치 못잖게 독특한데, 애초 요코미조 세이시가 시리즈까지 염두에 두고 쓴 작품은 아닌 듯 ‘신주로’에서 유리 린타로의 활약은 분량이나 역할 면에서 조연 정도에 그칩니다. 또 소개글에 따르면 “신문기자 미쓰기 슌스케와 함께 사건을 해결해 ‘유리·미쓰기’ 시리즈로 불리기도” 한다는데, ‘신주로’에 미쓰기가 등장하지 않은 걸 보면 유리 린타로가 주인공으로서 본격적으로 활약하는 건 후속작부터가 아닐까, 추정됩니다.
유리 린타로가 중반부쯤 등장해서 미스터리 해결사를 맡긴 하지만, ‘신주로’의 메인 주인공은 화자이자 연쇄살인사건의 목격자인 시나 고스케입니다. 오쓰코쓰에게 이끌려 신슈의 N호수를 찾았다가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미소년 신주로의 연쇄살인을 목격한 시나는 경찰의 수사가 미궁에 빠진 가운데 도쿄로 돌아와서도 좀처럼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한동안 행방이 묘연하던 신주로가 도쿄에 출몰하여 또다시 살인을 저지르자 다음 희생자는 자신이 아닐까 공포에 사로잡힙니다.
‘팔묘촌’을 비롯하여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의 여러 작품을 떠올리게 만들기도 하지만, ‘신주로’는 좀더 고풍스러운 문체, 집요함마저 느껴지는 탐미적인 분위기, 그리고 그로테스크한 설정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아름답기 그지없지만 화산 분화와 함께 지옥으로 변한 N호수, 호숫가 풍경과 어울리지 않는 기괴한 저택, 괴팍한 백부와 함께 사는 아름다운 외모의 유미, 그리고 그 일대에 출몰하여 피해자의 목을 잘라 사라지는 미소년 살인귀 신주로 등 ‘긴다이치 코스케 시리즈’보다 좀더 날것 같은 분위기와 음울하면서도 관능적인 기운을 발산하는 인물들이 독자의 눈길을 사로잡습니다.
또한 진주라는 이름(真珠郎)에 걸맞게 비현실적인 외모를 지닌 신주로가 어떻게 살인귀가 된 건지, 살인의 동기와 목적은 무엇이며 왜 잘린 목을 들고 사라지는 건지, 목표물만 살해할 뿐 현장의 목격자들을 방치하거나 부상만 입히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 여러 가지 미스터리가 호기심과 궁금증을 자극합니다.

“본격 추리소설로의 노선 전환이 이루어지기 전 과도기적 작품이므로 트릭과 동기의 치밀성은 다소 부족한 것이 사실이다”라는 ‘작품해설’ 속 설명대로 마지막에 진실이 밝혀지는 대목에서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살짝 아쉬움을 느낀 독자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요코미조 세이시 특유의 거칠고 잔인하면서도 애잔함을 놓치지 않는 고전미를 한껏 만끽할 수 있었습니다. 트릭 역시 찬찬히 복기하다 보면 결코 부족하지도, 허술하지도 않다는 걸 실감할 수 있습니다. 또한 고색창연한 시대적 배경, 노골적이고 직설적인 아날로그풍의 감정들, 그리고 탐욕과 복수와 배신의 조합이 낳은 참혹한 연쇄살인은 시대물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제 취향에 너무나도 잘 맞아떨어지기도 했습니다.
하반기엔 ‘유리 린타로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자 또 하나의 명품인 ‘나비부인 살인사건’이 출간된다고 합니다. ‘신주로’에서는 딱 필요한 만큼의 활약만 펼치고 퇴장해서 무척 아쉬웠지만, 시리즈 마지막 작품에선 명탐정 유리 린타로의 매력을 제대로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신주로’와 함께 수록된 단편 ‘공작 병풍’(1940)은 유리 린타로가 등장하는 작품은 아니지만, 로맨스와 판타지와 미스터리가 절묘하게 결합된 단편이라 무척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