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의 카르테 3 - 시간의 풍경 아르테 오리지널 8
나쓰카와 소스케 지음, 백지은 옮김 / arte(아르테)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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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가노 현의 소도시 마쓰모토에 위치한 혼조병원의 소화기 내과 5년차 의사 구리하라 이치토는 여러 가지 이유로 괴짜로 불립니다. 근대 소설가 나쓰메 소세키의 광팬으로서 그의 소설을 줄줄 외우고 다니는 것은 물론 말투까지 고풍스럽기 그지없습니다. 뛰어난 의술과 함께 오직 환자의 미소만 생각하는 선한 능력자이기도 하지만, 입이 험하고 차림새도 영 허술한데다 자신을 근면성실의 전형이라 자화자찬하는 등 어딘가 4차원 같은 인상이 짙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환자를 끌어들이는 구리하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외래든 응급실이든 그가 나타나는 곳엔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환자가 몰려들어서 동료의사와 간호사들로부터 장난기 섞인 조롱을 받기도 합니다. (‘신의 카르테 1,2’의 서평에 쓴 구리하라에 대한 소개글입니다.)

 

추측에 의한 어림짐작이지만 대체로 메디컬 드라마는 최소 기본 이상의 시청률을 올리곤 합니다. 생로병사를 다루는 긴박감 그 자체가 시청자의 눈길을 끌기 때문이겠지만, 의술이라는 인간의 영역과 생사를 관장하는 신의 영역이 공존하는 병원이라는 무대, 그리고 두 영역 사이를 오가며 혼신을 다 하는 의사라는 캐릭터가 때론 감동과 환희를, 때론 슬픔과 절망을 생생하게 전달하며 극적일 수밖에 없는 스토리를 자아내고 있기에 가능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런 점에서 소도시의 열악한 지역의료기관에서 오로지 환자만을 생각하며 전력을 다하는 구리하라 이치토는 영웅적이지도 않고 천재적인 의술을 지니지도 않았으며 심지어 멋있는 캐릭터도 아니지만 환자라면 누구나 자신의 몸을 맡기고 싶은 진짜배기 의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의 카르테 3’에서 서른이 된 구리하라는 의사 생활 6년차와 7년차를 맞이합니다. 전작에서 의대 동기이자 오랜 친구 신도 다쓰야와의 재회를 통해 의사로서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해 진심으로 고민하며 끝내 한 뼘 이상 성장했던 구리하라가 이번에는 12년차 베테랑 내과의사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좀더 깊은 성찰과 비약에 가까운 성장을 이뤄냅니다. 더불어 여러 환자들과의 만남과 이별이 담담하게 그려지면서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수시로 눈가를 뜨끈하게 만들곤 합니다.

 

친구 신도 다쓰야, 선배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구리하라가 겪는 성장통은 어쩌면 세상의 모든 의사라면 한번쯤 거칠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인지도 모릅니다. 의사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의사가 되고 싶은 건가? 훌륭한 의사란 뛰어난 의술을 지닌 자인가, 아니면 철학과 양심을 더 중시 여기는 자인가? 적어도 베테랑이라는 소리를 듣기 전까지 지식과 임상을 쌓아야만 하는 젊은 의사라면 이 모든 질문을 숱하게 자기 자신에게 던질 것이 분명합니다. 일본의 의대 졸업생이라면 누구나 당연히 선택하는 대학병원 대신 열악한 지역의료기관에서 혼신을 다하는 구리하라는 그 누구보다 자주 그리고 절실하게 이 질문들을 스스로에게 던집니다.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라도 마지막 순간까지 전력을 다하는 의사, “의사도 사람!”이라고 주장하며 연이은 밤샘과 과로를 거부하고 가족을 더 소중히 여기는 의사, 열정과 양심만 앞세울 뿐 나날이 발전하는 새로운 의학지식에는 무지한 의사들을 멸시하며 밤낮으로 스스로를 갈고 닦는 의사 등 구리하라 앞에는 어느 것이 정답이라고 할 수 없는 여러 롤 모델들이 제시됩니다. 친구 신도 다쓰야, 선배 오바타 나미와의 만남을 통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보며 진정한 의사의 길을 모색하던 구리하라는 뜻하지 않은 오진 사태로 인해 새로운 시작을 고민하기 시작합니다.

 

신의 카르테 3’에서 성장통을 겪는 건 구리하라뿐만은 아닙니다. “안달하면 안 돼. 그저 소처럼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게 중요해.”라는 (구리하라가 존경하는) 대문호 나쓰메 소세키의 문장이 자주 인용되면서 주조연을 막론하고 모두들 묵묵하게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들이 그려집니다. 선배의사 오바타 나미와의 우여곡절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긴 하지만 그 외에도 독자를 울고 웃게 만드는 소소한 에피소드들을 통해 의사, 간호사, 환자, 가족 등 많은 인물들이 작지만 진정성 있는 성장을 이뤄낸다는 뜻입니다. 극적인 사건은 없지만 읽는 내내 마음의 동요가 그치지 않았던 건 바로 이런 매력적인 서사 덕분입니다.

 

신의 카르테 3’ 다음 작품은 구리하라의 프리퀄을 그린 신의 카르테 0’입니다. 의대 기숙사 시절, 구리하라가 신도 다쓰야, 스나야마 지로와 절친의 인연을 맺는 과정을 비롯하여 레지던트 시절의 고생담이 그려질 것으로 보이는데, 3편까지 읽고 보니 정말 구리하라의 의대생 시절이 궁금해지기 시작했습니다. 정식 의사가 되기 전의 구리하라가 어떤 성장을 겪었는지, 또 얼마나 웃음과 눈물을 번갈아 선사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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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비밀 케이스릴러
이종관 지음 / 고즈넉이엔티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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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경찰서 강력2팀 오대영은 자신이 쫓던 사기범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당신의 비밀이라는 사이트에 오대영의 아내 해인과 불륜 관계인 국회의원 보좌관 나태곤이 실종됐는데, 실종 직전 마지막으로 만난 게 해인이며, 그 근방에서 오대영의 차가 목격됐다.”라는 글과 함께 해인이 큰 캐리어를 끌고 어디론가 가는 사진이 올라왔다는 것입니다. 문제는 얼마 후 토막 난 나태곤의 몸통부위가 해인이 끌고 가던 것과 똑같은 캐리어에 담긴 채 발견됐다는 점. 대영은 경찰의 수사망이 곧 해인을 향할 것을 직감하곤 자신이 먼저 진범을 찾아내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해인은 불륜 사실을 눈치 챈 남편 대영이 나태곤을 죽인 게 아닐까 의심하며 대영을 피해 진실을 밝히고자 합니다.

 

2019년에 출간된 현장검증을 읽고 이종관을 관심 갖고 지켜볼 한국 장르물 작가중 한 명으로 꼽았음에도 불구하고, 직전 작품인 리볼브1~2권으로 나뉜데다 7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부담스러운 분량 때문에 결국 장바구니에 넣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2년 만의 신작인 당신의 비밀은 분량도 적절하고, 사건과 소재도 호기심을 자극해서 큰 기대감을 갖고 첫 페이지부터 찬찬히 읽기 시작했습니다.

 

큰 얼개만 보면, 남편은 불륜을 저지른 아내를 증오하면서도 그녀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홀로 수사를 벌이는 반면, 아내는 남편이 범인이라고 확신하곤 어떻게든 유죄를 입증하기 위해 분투한다는 기묘한 구도를 지닌 범죄 스릴러입니다.

이 구도를 더욱 흥미롭게 만드는 것은 다크웹처럼 은밀하고도 위험천만한 분위기를 풍기는 당신의 비밀이라는 사이트의 존재입니다. 누군가 타인의 비밀을 판매용으로 올리면 그 비밀을 필요로 하는 사람이 코인을 지불하고 구매하는 것입니다. 한번 판매된 비밀은 블라인드 처리되는 것은 물론 다시는 재게시가 불가능합니다.

대영은 누가, 왜 자신과 해인과 나태곤의 관계를 폭로한 것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지만, 나태곤의 토막시신이 발견되자마자 한 가지 확신을 품게 됩니다. 즉 그 글을 올린 자가 나태곤을 살해한 진범이며, 그 진범이 자신 혹은 해인을 살인범으로 몰아가려 한다는 점입니다. 더 큰 문제는 토막살인사건에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자들이 하나둘씩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는 점, 또 그 죽음들이 모두 당신의 비밀사이트와 연관 있다는 점입니다.

 

비밀이 있는 사람에겐 꼬리가 있다. 그리고 언젠가 그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순간이 온다.”라는 첫 문장처럼 이 작품 전반을 관통하는 코드는 바로 비밀입니다. 말하자면 (출판사 소개들대로) “비밀을 손에 쥐고 타인의 삶을 흔들려는 자, 비밀을 덮으려고 자신의 삶을 거는 자 그리고 이 모든 비밀을 이용해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자가 서로 얽히는이야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각자 정반대의 이유로 진실 찾기에 나섰지만 대영과 해인은 한편으론 비밀을 밝히기 위해, 한편으론 비밀을 덮기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는 당신의 비밀뒤에 숨은 진범의 정체를 밝히기 위해 숱한 위기를 함께 헤쳐가야 하는 역설적인 처지에 놓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불륜이라는 덫 때문에 돌이킬 수 없는 관계가 된 두 사람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상대방이 공개하지 않은 비밀이 있다고 의심하며 위태로운 공조를 이어갑니다.

 

이종관의 전작인 현장검증의 서평에 작가의 설계도가 워낙 복잡한데다 반전 역시 여러 차례 거듭된다.”라고 쓴 적 있는데, ‘당신의 비밀은 그에 못잖게 인물도 많고 사건들도 얽히고설킨 데다 구도도 무척 복잡한 작품입니다. 또한 함께 진범을 찾아 나섰지만 서로에 대한 의심을 놓지 못하는 대영과 해인의 미묘한 심리전까지 가세하면서 독자는 범죄-서스펜스-심리 스릴러를 동시에 읽는 듯한 아찔함을 맛보게 됩니다.

하지만 복잡다단한 이야기를 다 읽은 뒤에 가장 먼저 느낀 건 어딘가 개운치 않다, 라는 점이었습니다. 진범의 정체도 매끄럽게 밝혀졌고, 뜻밖의 반전과 함께 이야기 자체도 잘 마무리되긴 했지만 실은 왜 진범은 이렇게 번거롭고 수고스러운 일을 벌인 걸까?”라는 의문이 머릿속에 계속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작가가 막판에 그 이유를 진범의 입을 통해 설명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깔끔한 답변이라고 여겨지진 않았습니다. 이야기의 완성도나 정교함에선 별 5개도 너끈한 작품이지만 이 개운치 않은 여운 때문에 별 1개를 빼야만 했습니다.

 

현장검증서평 때 복잡한 설계도에 비해 다소 모호하고 불친절한 설명이 잦다.”는 이유로 별 0.5개를 뺐고, 이번에는 이야기의 원점에 대한 의문 때문에 별 1개를 빼긴 했지만, ‘관심 갖고 지켜볼 한국 장르물 작가중 한 명인 이종관의 필력은 여전히 매력적이었고 다음 작품도 무척 기대가 되는 게 사실입니다. 다만, 주제 넘는 당부를 한 가지만 하자면 이야기의 큰 선 혹은 시작점이 좀더 선명하고 단순했으면 좋겠다는 점입니다. 빽빽하고 치밀하게 나무를 심느라 숲 전체의 모습이 모호해지는 건 너무나도 아쉬운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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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손
이시모치 아사미 지음, 주자덕 옮김 / 아프로스미디어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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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물학 조교인 히로코와 평범한 회사원 타쿠미는 각각 긴짱, 무짱이라는 파트너와 동거 중입니다. 하지만 긴짱과 무짱은 실은 인간의 생명 에너지를 먹고 사는 미지의 생명체입니다. 손을 맞대는 등의 단순한 스킨십을 통해 상대의 잉여 에너지를 섭취하는 것입니다. 또한 혼란에 빠진 정신 상태를 안정시키기도 하고, 상대방의 영혼이 맑은지 탁한지도 알아낼 수 있습니다. 육체적인 사랑이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두 커플은 애정 이상의 관계를 유지하며 언제 종료될지 알 수 없는 기묘한 동거를 이어갑니다. 그런데 두 커플 주위에서 크고 작은 사건들이 발생합니다. 살인이나 성추행 등 중범죄부터 소소한 트러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건들이 벌어지는데, 긴짱과 무짱은 특유의 추리력으로 사건의 진상을 파악해냅니다.

 

무척 독특한 미스터리 작품입니다. 출판사 소개글대로 힐링과 로맨스 코드가 혼재된 것은 물론 주인공들의 캐릭터 때문에 판타지 미스터리로 분류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맛있고 맑은 에너지를 섭취하며 생명을 유지하는 긴짱과 무짱은 말하자면 피 대신 에너지를 갈구하는 평화주의 뱀파이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을 동거 파트너로 삼은 평범한 인간 히로코와 타쿠미가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았던 건 아니지만, 긴짱과 무짱은 호감으로 시작된 관계가 무르익을 무렵 자신들의 정체를 고백하곤 서로에게 윈윈이 되는(한쪽은 필요한 에너지를 섭취할 수 있고, 또 한쪽은 과잉 섭취한 에너지를 내줌으로써 건강을 유지하는) 기묘한 동거를 시작하게 된 것입니다. 다만 육체적인 사랑도, 미래에 대한 약속도 할 수 없다 보니 남녀로서의 애정이 생길 리 만무하고, 또 언제 이 기묘한 동거가 갑자기 막을 내릴지 알 수 없다는 불안감이 히로코와 다쿠미를 꾸준히 동요하게 만들어서 독자 입장에선 기적(진짜 연인으로 발전?)을 바라거나 안쓰러운 시선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들 주변에서 크고 작은 사건이 벌어지고, 긴짱과 무짱이 탐정 역할을, 히로코와 타쿠미가 조수 역할을 하며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것이 이야기의 중심축입니다. 모두 7편의 연작단편으로 구성돼있는데, 대부분 살인이나 성추행 등 강력사건을 다루고 있긴 하지만 주인공들의 캐릭터에 걸맞게 무겁고 심각한 분위기보다는 일상 미스터리에 가까운 서사로 포장돼있습니다. 긴짱과 무짱의 특별한 추리능력이 천재탐정의 그것과 비슷하게 발휘되는 경우도 있고, 그들만의 에너지 섭취력만으로 범인을 제압하는 기발한 에피소드도 포함돼있어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미스터리만큼 관심을 끄는 건 과연 이 커플들이 진짜 연인이 될 수 있겠는가, 라는 점인데, 실은 작가는 중간중간 그럴 가능성이 전혀 없음을 내비쳐서 독자의 궁금증을 더욱 증폭시킵니다. 육체적인 사랑도 불가능하고, 남녀로서의 애정도 생겨나지 않는 관계지만 독자는 왠지 이들에게 그 후로 오랫동안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는 엔딩이 주어지기를 바라게 되기 때문입니다. 이 궁금증은 결국 마지막 수록작에서 뜻밖의 반전과 함께 해소되는데, 뭉클함과 함께 애틋함까지 느끼게 만들어서 힐링+로맨스+판타지 미스터리에 잘 어울리는 결말이라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출간된 이시모치 아사미의 작품은 모두 열 편입니다. 그중 딱 절반을 읽었는데, 제가 준 평점은 다소 극과 극인 게 사실입니다. ‘따뜻한 손은 중간쯤이라고 할 수 있는 작품인데, 재미있게 읽긴 했지만 독한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제겐 조금은 심심하게 느껴졌고, 또한 제 취향과는 거리가 먼 판타지 요소가 깃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궁합이 잘 맞는 독자라면 재미 이상의 감동을 느낄 수도 있으니 다른 독자들의 서평을 참고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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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물
요네자와 호노부 지음, 김선영 옮김 / 리드비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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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연물은 군마 현경 수사1과 가쓰라 경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경찰 미스터리 단편집입니다. 꽤 많은 경찰 미스터리를 읽었지만 가연물처럼 기름기 하나 없이 담백하고 사족 하나 없이 매끈한 작품은 거의 처음인데, 가장 큰 이유는 주인공인 가쓰라 경부의 캐릭터 때문입니다.

 

불필요한 말은 하지 않는다. 상사로부터 외면당한다. (부하들로부터) 좋은 상사라고도 생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수사능력은 탁월하다. 오직 그에게만 보이는 세계가 있다.” (뒷표지 카피)

 

가쓰라는 천재적인 명탐정도 아니고, 특이하거나 괴팍한 캐릭터도 아니며, 자신만의 고뇌와 갈등에 휩싸인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도 않습니다. 수사방법 역시 지극히 교과서적이고 규범적입니다.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고, 필요하다면 직접 탐문에 나서기도 하며, 수집된 정보와 단서들을 꼼꼼하게 훑어보곤 그 안에서 진상을 찾아내는, 유능하긴 해도 아주 평범한 경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가쓰라가 자신만의 특별한 능력을 발휘하는 지점은 바로 마지막 한 단계의 비약이 필요한 수사 막바지입니다. 일부 천재적인 명탐정의 경우 독자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뜬금없는 추리를 앞세워 말도 안 되는 비약을 일삼곤 하지만, 가쓰라는 부하들과 독자들에게 공정하게 공개된 단서를 기반으로 마지막 한 걸음을 훌쩍 뛰어넘는 것입니다.

 

현장에서 발견되지 않은 흉기의 행방(‘낭떠러지 밑’), 너무나도 정확히 일치해서 오히려 수상쩍어 보이는 복수의 목격진술들(‘졸음’), 굳이 눈에 띄는 장소에 토막 시신을 유기한 범인의 의도(‘목숨 빚’), 소규모 연쇄방화범의 가늠할 수 없는 동기와 목적(‘가연물’), 그리고 절체절명의 인질극 와중에 느껴지는 지독한 위화감(‘진짜인가’) 등 가쓰라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거나 주목하더라도 그 이상 나아가지 못하는 지점에서 마지막 고민에 돌입합니다. 이미 지겹게 봐온 자료와 사진들을 펼쳐놓고, 또는 관련자들의 진술을 하나씩 되짚거나 형사들의 보고 하나하나를 떠올리며 자신에게 위화감을 품게 만든 그 무엇을 찾아내기 위해 골몰합니다. 그리곤 예의 마지막 한 걸음을 거쳐 진상에 도달하는 것입니다. 그 마지막 한 걸음을 확인한 독자는 대부분 나도 눈치 챌 수 있었는데!”라는 아쉬움과 함께 가쓰라에게만 보이는 세계에 감탄할 수밖에 없습니다.

 

가쓰라의 이런 행보가 상관과 부하들에게 좋게 보일 리는 만무합니다. 유력한 용의자가 포착됐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위화감이 해소될 때까지 수사를 강행하는 가쓰라는, 검거율은 높지만 부하들과의 협업보다는 원맨팀이라는 비난을 위아래로부터 살 수밖에 없습니다. 부하들이 거북해 하는 걸 알면서도 탐문과 심문에 끼어드는가 하면, 굳이 맡을 사건이 아닌데도 원칙을 내세우며 모두를 피곤하게 만들곤 합니다. 다만, 가쓰라를 좋은 부하나 좋은 상사라고 여기지 않는 그들도 그의 수사 능력만큼은 결코 의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역시 군마 현경에서 외딴섬처럼 원맨쇼를 벌이는 가쓰라를 지켜보는 게 그리 마음 편한 일은 아니었습니다.

 

요네자와 호노부의 작품을 많이 읽은 건 아니지만, 가쓰라처럼 건조하고 사족 없는 주인공은 거의 기억에 없습니다. 오히려 이런저런 인간미가 넘쳐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는데, 그래선지 가쓰라에게 연민이나 정이 잘 가지 않는 것도 사실이긴 합니다. 다만 깔끔하고 공정한 미스터리를 읽고 싶을 때나 괜히 화려하고 별난 설정으로 변죽만 울리다가 용두사미가 되는 미스터리에 지칠 때엔 불쑥 가쓰라의 마지막 한 걸음이 생각날 것 같습니다. 출판사 소개글에 따르면 후속작 출간이 예정돼있는 것 같은데, 한 가지 바람이 있다면 그래도 가쓰라의 인간적인 면모를 살짝이라도 맛보고 싶다는 점입니다. 개인적인 고민이든, 가족의 문제든, 그를 못 마땅히 여기는 상관이나 부하들과 충돌하는 모습이든 뭐라도 좋으니 그저 수사 기계가 아닌 인간 가쓰라와 만나보고 싶다는 뜻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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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리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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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19의 기세가 최고조에 이른 2021년 여름. 파인더스 키퍼스 탐정사무소의 홀리 기브니는 실종된 딸 보니를 찾아달라는 한 어머니의 의뢰를 받습니다. 파트너인 피트 헌틀리는 코로나로 입원중이고, 비공식 조수로 도움을 주던 제롬과 바버라 남매는 작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바쁜 중이라 오롯이 홀리 홀로 수사에 나서게 됩니다. 보니의 실종은 당초 가출 혹은 평범한 사건처럼 보였지만, 홀리는 단서를 모으면서 연쇄 납치사건의 기미를 느꼈고 집요한 탐문과 조사 끝에 희미한 실마리를 찾아냅니다. 하지만 9년에 걸쳐 벌어진 여러 건의 납치가 은퇴한 유명 노교수 부부의 소행으로 추정되자 홀리는 혼란에 빠집니다. 동기와 목적이 무엇인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상태에서 홀리는 노교수 부부 배후에 진짜 범인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홀리라는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 이 작품은 홀리의, 홀리에 의한, 홀리를 위한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는 원래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 특이한 단역에 그칠 예정이었다. 그런데 내 심장을 훔쳐버렸다고 술회할 정도로 홀리 기브니라는 캐릭터에게 깊은 애정을 가진 스티븐 킹이 그녀의 모든 것을 그린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엽기적이고 끔찍한 연쇄 납치사건의 진상을 밝혀내는 집념 덩어리 탐정으로서, 또 어머니의 통제와 속박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삶을 추구해온 한 여성으로서 홀리의 과거와 현재를 심도 깊게 그린 이 작품에 홀리라는 제목이 붙은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여느 명탐정이나 그렇듯이) 홀리 기브니의 이력은 그야말로 숱한 고비와 사선을 넘어온 산전수전 그 자체입니다. ‘빌 호지스 3부작에서 조연으로 등장한 홀리는 상상을 초월하는 괴물들과 사투를 벌이며 존재감을 드러냈습니다. 이후 스승이자 동업자인 빌 호지스가 암으로 사망한 뒤 아웃사이더 1~2’에서 세컨드 주인공으로 처음 독립했고, ‘피가 흐르는 곳에’(동명의 중단편집 표제작)서는 처음으로 단독 주인공에 올랐습니다. 그리고 홀리는 오롯이 그녀에게만 스포트라이트를 맞춘 첫 장편소설입니다. 미스터리 주인공으로서의 미덕이나 매력이라곤 조금도 찾아보기 힘들었던 중년 아줌마홀리가 스티븐 킹의 전폭적인 애정을 받게 된 과정이 궁금하다면 전작들을 미리 읽어볼 것을 추천합니다. 작품 수가 많아 모두 읽기 힘들다면 데뷔작인 미스터 메르세데스와 중단편집 피가 흐르는 곳에정도만 읽어도 충분합니다.

 

시작과 함께 범인의 정체와 범행방법 및 목적이 모두 공개됩니다. 생물학과 영문학을 전공하고 지금은 현역에서 은퇴한 유명 노교수 부부 에밀리와 로드니 해리스가 그들입니다. 그들은 9년 전부터 휠체어가 실린 밴을 이용하여 사전에 점찍어둔 인물들을 납치한 뒤 방음시설과 온갖 도구들을 갖춘 지하실에 감금합니다.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하자면 해리스 부부는 자신들의 신체 수명을 늘리기 위해 젊은이들을 납치해 살해하는 살인마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더 자세한 설명은 할 수 없지만, 소개글만 봐도 어떤 종류의 엽기적인 범행이 벌어지는지 대략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스티븐 킹이 그려낸 80대 부부 살인마의 소행은 그 어떤 짐작도 무색하게 만들 게 확실하며, 독자에 따라 지독한 거부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점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이지만, 사건과 미스터리의 사이즈는 평범합니다. 한 젊은 여성의 실종사건을 조사하던 홀리가 오래 전부터 비슷한 정황에서 실종된 사람들이 있음을 파악한 뒤 지독하고 집요한 탐문을 벌이기 시작하고, 우연과 행운이 전해준 정보들까지 조합하여 유력한 용의자를 특정하는 것이 큰 얼개입니다. 하지만 스티븐 킹 특유의 구수하면서도 냉소적이고 흥겨우면서도 정곡을 찌르는 문장들 덕분에 이 심플한 얼개는 풍성한 볼륨감을 얻게 됩니다. 거기에다 홀리의 안쓰럽고 처연한 개인사(주로 어머니와 관련된)가 병행되어 이전부터 홀리의 산전수전을 읽어온 독자들에겐 미스터리와는 별개의 애틋한 감흥을 선사합니다. 더불어 그동안 홀리와 함께 괴물들과 맞서 싸워온 제롬-바버라 남매가 자신들의 꿈을 이루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도 부록처럼 전개돼서 엽기적인 미스터리의 중화제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홀리 기브니의 이야기 가운데 아웃사이더만 유일하게 못 읽었는데, 1~2권 합쳐 800페이지에 이르는 막대한 분량이 가장 큰 이유였습니다. ‘홀리를 읽고 나니 왠지 아웃사이더를 읽어야만 된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게 됐는데, 언젠가 기회가 되면 홀리 기브니가 맞닥뜨린 또 다른 엄청난 괴물 이야기(한 사람이 동시에 각기 다른 장소에 존재하는 이야기)를 꼭 읽어보려고 합니다. 물론 괴물 자체보다 홀리 기브니가 어떤 시련을 통해 얼마만큼 성장했는지가 더 궁금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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