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설 공주 살인 사건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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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품 회사의 한 직원이 계곡에서 흉기에 수차례 찔리고 불에 태워진 채로 발견된다.

피해자가 눈에 띄는 미인이라는 점과 사건의 잔혹성 때문에

삽시간에 언론과 SNS를 통해 퍼져나가고, 피해자의 입사 동기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다.

평범하고 내성적인 그녀가 피해자와 비교당하면서 열등감에 시달리다 살인을 저질렀다는 것.

주간지 기자는 피해자의 회사 동료에게 들은 내용들을 실시간으로 중계하고,

용의자는 네티즌들에게 '신상 털기'를 당하며 사이버 상에서 유죄 선고를 받는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피해자와 직장동료인 연인으로부터 살인사건의 윤곽을 전해들은 한 주간지 기자가

유력한 용의자로 떠오른 시로노 미키의 지인들을 인터뷰한 내용들이 차례로 등장합니다.

그 내용들을 종합해보면,

시로노는 피살된 노리코와 절친했던 동료였지만

외모와 능력 등 여러 면에서 사사건건 비교를 당해 모욕감을 느꼈던 건 물론

심지어 남자친구까지 빼앗겼던 전력을 갖고 있습니다.

기자는 시로노의 중고교 친구들, 대학의 절친들, 고향의 가족들까지 샅샅이 만나는데

문제는 진술하는 사람에 따라 시로노가 전혀 다른 인물로 비친다는 점입니다.

 

누군가는 그녀를 저주의 힘을 가진 기괴한 소녀,

또는 피해자를 불태워 죽여도 전혀 이상하지 않을 잔혹한 심성을 가진 여자로,

, 누군가는 시로노는 따뜻하고 정감 넘치는 사랑스런 여자였고,

살해된 노리코야말로 겉과 속이 다른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여자였다고 진술합니다.

 

결국 주간지의 추측성 보도와 SNS의 광기 넘치는 관심 때문에

시로노는 조사받기도 전에 이미 여론재판을 거쳐 살인자로 낙인찍히게 됩니다.

더구나 사건 이후 종적을 감춰버린 탓에 스스로 자백한 거나 다름없는 상황이 연출됩니다.

그리고 막판에 이르러 그날 시로노와 노리코에게 벌어졌던 모든 진상이 반전처럼 드러납니다.

 

읽다 보면 아리요시 사와코의 악녀에 대하여가 저절로 떠오릅니다.

한 여자를 기억하는 27명의 지인들이 진술한 27가지의 각기 다른 내용을 담은 작품인데,

뒤로 갈수록 도대체 이 여자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한 사람에 대한 타인들의 기억이 얼마나 주관적이고 자기위주로 구성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 작품입니다.

 

백설공주 살인사건속 시로노는 지극히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타인들의 기억은 물론

선정성으로 먹고 사는 옐로우 페이퍼와 익명성의 광기가 넘쳐나는 SNS에 의해

지금껏 살아온 날들을 모조리 부정당하거나 왜곡당하는 인물입니다.

심지어 주간지와 SNS를 보니 내가 누군지 나도 모르겠다.”는 지경에 이르게 됩니다.

물론 독자들은 그런 시로노의 한탄을 전적으로 믿진 못합니다.

어쩌면 주간지와 SNS가 진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르기 때문이죠.

 

살인 미스터리, 실체 없는 타인들의 기억, 이기심 또는 욕망, 옐로우 페이퍼와 SNS

꽤 다양한 소재와 서사가 펼쳐진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재미와 긴장감을 갖고 단번에 달릴 수 있는 작품이긴 합니다.

, 영화로 제작되어 성공을 거뒀다는 걸 보면 분명 극성이 강한 건 맞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나토 가나에만의 기발한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기대한 독자에겐

제법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지극히 개인적인 평가지만,

읽을 때마다 편차를 크게 느꼈던 그녀의 작품들 중 딱 한 가운데쯤에 자리한 작품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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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스마트폰을 떨어뜨렸을 뿐인데
시가 아키라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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택시 안에 두고 내린 스마트폰이 모든 비극의 출발점이었다.

그것을 주운 남자는 스마트폰을 돌려주었지만, 폰 주인의 여자 친구를 마음에 품게 된다.

그녀의 신상정보를 모두 털어 그녀를 함정에 빠뜨리는 남자!

이제 스마트폰은 흉기나 다름없이 변해 간다.

한편 인근 야산에서는 신원을 알 수 없는 여성의 변사체가 잇따라 발견되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고백하자면, 제목 때문에 읽을 생각조차 안 하고 패스했던 작품이었습니다.

제 취향과는 거리가 좀 먼 코믹하고 가벼운 미스터리라고 여겼기 때문이죠.

그러다가 몇몇 분의 서평 초반부를 보면서

제 선입견과는 전혀 다른 작품이란 걸 알게 되곤 호기심에 찾아 읽게 됐습니다.

결과적으로는, 평범한 소재에서 출발했지만 개성 만점의 미스터리를 선보인 작품이었습니다.

 

세 명의 화자가 번갈아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택시에서 스마트폰을 주운 악의로 가득 찬 남자’,

남자의 표적이 된 긴 흑발의 미인 이나바 아사미,

그리고 적잖은 여성들이 매장된 채 발견된 사건을 수사하는 관할서 형사들이 그들입니다.

형사들의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답답한 느낌이 들긴 하지만,

포식자인 남자와 무력한 먹잇감 아사미의 챕터가 번갈아 등장할 때면

남자에 대한 분노와 아사미에 대한 안타까움이 저절로 들 정도로 작품에 빠져들게 됩니다.

 

택시에 두고 내린 스마트폰이 그야말로 인생을 괴멸시킬 정도의 재앙을 초래합니다.

물론 이 작품 속 남자처럼 폰을 주운 사람이 전부 악마적 인물은 아니겠지만,

거의 모든 개인정보가 저장된 스마트폰이 얼마든지 자신을 향한 흉기로 돌변할 수 있다는 걸

작가는 실제 벌어졌던 사건의 기록물처럼 생생하게 묘사합니다.

 

, 폰을 주운 남자의 악마적 행태만 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폰 때문에 인생이 파멸위기에 처한 여주인공의 개인적인 비밀과 반전을 그림으로써

작가는 막판 클라이맥스에 새로운 재미를 얹어놓습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는데,

그와 무관하게 재미있게 읽히는 것만은 분명한 작품입니다.

 

개인적으로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한 소통에 그다지 관심이 없는 터라

서평을 올리는 블로그와 트위터 외에는 어떤 종류의 SNS도 하지 않는 1인이지만,

주위에서 스마트폰을 통해 자신과 지인들의 모든 것을 세상에 내보이는 사람들을 보면

솔직히, 노출증 환자(?) 또는 스스로 먹잇감을 자처하는 바보처럼 느껴질 때가 있기도 합니다.

그런 와중에 이 작품을 읽고 보니 새삼 인터넷과 모바일과 SNS에 사로잡힌 사람들이

얼마나 위험한 일상을 살아가고 있는지 새삼 소름이 돋기도 했습니다.

 

15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수상작이라는 타이틀답게

이야기는 참신하고 재미있는데다 속도감까지 갖추고 있어서

한 번 잡으면 바로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재미와 오락성을 겸비한 미스터리를 찾는 독자에게 딱 맞는 작품일 것 같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반전을 위한 여주인공만의 스토리가 좀 뜬금없었던 점입니다.

작가로서는 남자의 악의적 범죄 외에 이야기 폭을 넓히고 싶었겠지만,

왠지 억지스러운 사족 같은 느낌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 사족이 없었어도 충분히 메인 서사만의 힘으로 엔딩을 그릴 수 있었을 텐데

아무리 봐도 작가의 과욕으로밖에 안 보였습니다.

더불어, 참 재미있게 읽었는데도 어딘가 가벼워 보인다는 인상인 남았다는 점입니다.

어쩌면 영미권 장르물과 대비되는 일본 미스터리의 특징이기도 한데,

아사미가 겪게 되는 사건의 잔혹성이나 사이코패스인 남자의 악의에 비해

서사의 무게감이 이야기 속에 제대로 실리지 못한 점은 무척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0.5개가 사라진 건 이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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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길
존 하트 지음, 권도희 옮김 / 구픽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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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력계 형사 엘리자베스는 괴한에 납치되어 지하실에 갇혀 있던 소녀를 구해 영웅이 된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총알 여러 발을 발사하며 범인들을 고문했다는 의혹이 대두되며

경찰 배지를 잃고 체포당할 위기에 처한다.

한편, 그녀가 신입 시절부터 따르고 존경하던 애드리안 형사는

엽기적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몰려 13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하고 영혼까지 사라져 버렸다.

그가 출소하자마자 과거와 똑같은 방식의 살인이 발생, 도시 전체가 충격에 빠진다.

엘리자베스는 정직 위기 속에서도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동분서주하지만,

도저히 믿기 힘든 거대한 진실이 그녀를 죄어 온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그동안 읽은 존 하트의 전작들(‘다운 리버’, ‘아이언 하우스’)

재미있는 책읽기와 고통스런 책읽기를 동시에 경험하게 했던 특별한 수작들이었습니다.

또 스릴러로서의 매력과 문학작품으로서의 품격을 모두 갖춘 작품들이기도 했습니다.

두툼한 분량 안에서 그가 창조한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어둡고 비극적인 과거를 부여받았고,

그 과거가 잔인한 방식으로 현재의 삶을 뒤흔드는 바람에 더욱 큰 고난과 마주쳐야 했습니다.

구원의 길역시 그의 전작들과 일맥상통하는 서사를 다루고 있는데,

아무래도 제목(원제 Redemption Road) 때문에 좀더 심난한 이야기를 읽게 될 듯한

불안한(?) 예감을 갖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야기를 끌고 가는 네 명의 인물들은 평범한 삶을 살기엔 너무 큰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강력계 형사 엘리자베스는 10대 때 겪은 악몽 같은 사건은 물론,

경찰이 된 이후에도 몸과 마음에 크고 작은 상처를 입은 고난의 캐릭터이며,

현재는 납치범 두 명에게 18발의 총을 발사한 혐의로 정직 상태에 놓여있습니다.

엘리자베스의 우상이자 완벽한 매력을 지닌 경찰이었던 애드리안 월은

13년 전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범인으로 체포된 뒤

지옥 같은 교도소에서 생사의 경계를 수도 없이 넘나들었고,

모범수로 조기 석방됐지만 하필 그 시점에 과거와 똑같은 수법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출소와 동시에 용의자로 쫓기는 신세가 됩니다.

이제 14살과 18살인 기드온과 채닝 역시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상처를 지니고 있습니다.

13년 전 어머니가 참혹하게 살해당한 뒤 오직 복수의 날만 기다려온 기드온,

납치된 뒤 40시간 동안 두 남자에게 끔찍한 만행을 당한 끝에 엘리자베스에게 구출된 채닝...

 

이들은 잠시도 쉬지 않고 자신들의 삶을 박살내려 다가오는 불행과 맞서 싸웁니다.

때론 서로 적이 되기도 하고, 때론 서로에게 큰 힘이 돼주기도 하지만,

정작 그들이 대적해야 할 불행은 너무 크고 버거워서 매번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지곤 합니다.

자신에게 닥친 위기에도 불구하고 애드리안의 무죄를 확신하며 그를 보호하려는 엘리자베스와

13년의 교도소 생활로 몸과 마음과 정신이 모조리 산산조각 난데다

죄책감과 복수심, 살의와 도피라는 욕망이 뒤엉킨 탓에 모든 것이 혼란일 뿐인 애드리안은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여러 감정을 쥐어짜는 캐릭터들입니다.

 

첫 페이지를 펼치기도 전부터 스스로 예방주사(?)를 충분히 놓았다고 생각했지만,

상처투성이 인물들의 내밀한 심리를 지독하리만치 섬세하게 그려낸 존 하트의 문장들은

그따위 예방주사라는 게 아무 효과가 없는 무용지물임을 금세 입증해줍니다.

덕분에 역시 이번에도 내내 독하고 쓰린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재미와 고통이 제멋대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는 이상하고 흥분된 책읽기를 겪게 됐습니다.

 

다만, 엽기적인 살인사건의 진범의 정체와 그의 범행동기만큼은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습니다.

(0.5개가 빠진 유일한 이유가 이것입니다.)

뭐랄까... ‘반전을 위한 반전또는 엽기를 위한 엽기처럼 느껴졌다고 할까요?

물론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이번만큼은 존 하트가 무리수를 뒀다는 인상을 받은 건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 같습니다.

 

출판사에 따르면 존 하트의 새 작품 ‘The Hush’가 올해 출간될 예정입니다.

과작 작가라 할 수 있는 존 하트의 이른 신작 소식이 반가울 따름입니다.

신간에 대한 과욕과 대책 없는 게으름 탓에 아직 그의 대표작 라스트 차일드를 못 읽었는데

‘The Hush’가 나오기 전에 반드시 라스트 차일드위에 쌓인 먼지들을 털어내줘야 하겠습니다.

(전에도 이와 똑같은 공수표를 날린 바 있는데, 이번에는 꼭 지키도록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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짐승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3
신원섭 지음 / 황금가지 / 2018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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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미스러운 일로 경찰 옷을 벗은 뒤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이진수,

엄청난 부를 향유하고 있지만 인간의 탐욕이란 끝이 없음을 온몸으로 입증하는 도미애,

스스로 삶을 망쳐놓고도 그 모든 것을 언니 탓으로 돌리며 증오심을 키우는 도미옥,

타고난 게으름과 사회부적응으로 히키코모리나 다름없는 황폐한 삶을 사는 장근덕,

줏대도 의지도 없는데다 스스로를 무시당해도 싼 나약한 인간이라 여기는 오동구,

오동구보다 나은 것 하나 없으면서도 늘 그를 하찮게 내려 보며 만족감을 느꼈던 최준.

 

이 여섯 명의 인물들이 짐승이라는 교집합 안에 들어있는 단 하나의 이유는 탐욕입니다.

그 탐욕이 갈구하는 바는 인물에 따라 순정이나 사랑이기도 하고 돈이나 복수이기도 합니다.

탐욕의 농도도 제각각이어서 색을 칠해놓으면 마치 프리즘을 투과한 빛처럼 보일 듯 합니다.

하지만 갈구하는 바나 탐욕의 농도는 서로 달라도

그들의 선택과 행동은 하나같이 짐승의 그것과 닮아있습니다.

 

사랑하는 여자가 살인을 저지르자 그 시체를 감춰주기 위해 밤길을 달려가는 사람이 있고,

자신의 집에서 의문의 사체가 발견되자 앞뒤 생각도 없이 무작정 토막부터 내는 사람이 있고,

나의 불행은 남의 탓이고, 남의 행복은 내가 짓밟힌 덕분이라는 근거 없는 증오심에 출발하여

끝내 상대의 모든 것을 빼앗고 말겠다는 일념에 사로잡힌 사람이 있습니다.

, 우연찮게 말려든 사건 속에서 자신의 잇속을 위해 비열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이 있고,

자신이 짜놓은 촘촘한 그물에 걸린 비루한 인간들을 보며 악마의 미소를 짓는 사람도 있습니다.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진실을 찾는 인물이 등장하니 당연히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짐승은 불행한 과거, 비루한 현실, 막장 같은 미래에 사로잡힌 인간들이

게으름, 나약함, 탐욕, 오만, 증오, 시기라는 일그러진 인격까지 겸비(?)했을 때

어떤 파멸적인 결과를 맞이하게 되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비극에 더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문득 소네 케이스케의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이 생각났는데,

이야기나 캐릭터는 전혀 다르지만 어쨌든 비슷한 여운을 느낀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짐승이 끝까지 혀를 차게 만들었다면, ‘지푸라기~’는 안쓰러움을 남겼다고 할까요?

짐승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꼭 한 번 읽어볼 것을 추천하고 싶습니다.

 

신원섭은 한국 추리스릴러 단편선 5’에 수록된 라면 먹고 갈래요?’로 처음 만났는데,

고백하자면 그 단편이 그리 인상이 깊진 못했던 탓에 큰 기대를 안 했던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짐승은 정교한 이야기 구조와 탄탄한 캐릭터 설계 덕분에

한 번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릴 수 있게 하는 페이지터너의 힘을 지닌 작품이었습니다.

문장 역시 쉽고 간결하면서도 메모해놓고 싶을 정도로 인상적인 부분들이 꽤 많았는데,

그래서인지 왜 진작 장편을 쓰지 않았을까, 의문이 저절로 들기도 했습니다.

또 한 명의 좋은 한국 작가를 발견했다는 반가움과 함께

머지않아 신원섭의 후속작을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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팬텀 형사 해리 홀레 시리즈 9
요 네스뵈 지음, 문희경 옮김 / 비채 / 2017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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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노우맨에서 손가락을 잃고, ‘레오파드에서 얼굴 절반이 찢어진 해리.

그러는 동안 아버지는 세상을 떠났고 운명의 연인 라켈 역시 도망치듯 그와 헤어졌다.

팬텀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홍콩으로 떠난 해리가 돌아오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이번에 그를 오슬로로 이끈 것은 라켈의 아들 올레그였다.

그에게만 속마음을 털어놓던, 아들보다 더 가깝던 소년이 다른 소년을 죽인 혐의로 체포된 것.

그러나 해리는 이제 경찰이 아니다. 더군다나 올레그의 아버지도 아니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경찰이자 아버지의 입장에 선 해리.

진정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 해리는 가장 가혹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팬텀포함) 국내 출간된 해리 홀레 시리즈 8권 중 바퀴벌레를 제외하고 모두 읽은 셈인데

팬텀은 사건의 외연만으로 비교하면 소박한 작품에 속하지만,

사건의 질이나 해리에게 가해진 정신적, 육체적 충격 면에서는 단연 압도적인 작품입니다.

겉으로만 보면 마약중독자인 10대 소년이 살해당한 사건에 불과하지만,

문제는 그 용의자가 해리의 운명의 연인인 라켈의 아들 올레그이기 때문입니다.

헤어진 후에도 여전히 해리의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던 라켈,

또 자신을 아버지처럼 따랐지만 이젠 마약중독자에 살인용의자까지 된 올레그와 재회한 해리는

수사를 시작하기도 전부터 이미 정신적으로 무자비하게 난타당한 상태에 이르게 됩니다.

 

요 네스뵈의 말대로 이 작품의 또 다른 주인공은 마약의 천국 오슬로입니다.

역대급 신종 마약 바이올린이 등장하면서 오슬로의 마약 지형은 요동을 치게 되고,

그 와중에 잉태된 정치권과 경찰의 야합은 오슬로 곳곳에서 비열하게 작동되면서

사방팔방에 약에 찌든 환자들을 쏟아내기에 이릅니다.

중독자들은 바이올린을 구하기 위해 구걸을 하거나, 돈을 훔치거나 사람을 죽이기도 합니다.

피살된 소년 구스토와 살인용의자 올레그 역시 그런 자들 가운데 하나였고,

결국 그들 사이에 벌어진 비극은 오슬로라는 마약계의 빅 브라더에 의해 파생된 셈입니다.

 

진범 찾기가 목적이 아니라 올레그의 무죄만을 위해 전력을 다 하던 해리는

어느 순간 자신을 방해하거나 노리는 자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그가 수사하는 살인사건 뒤에 미처 예상치 못했던 거대한 배후가 있음을 유추하게 됩니다.

그 배후의 주인공들이 권력자, 경찰, 마약생산자들이란 사실은

그리 오래지 않아 해리의 추리 속에서 밝혀지게 되는데,

문제는 해리는 이미 경찰도, 그에 준하는 어떤 사법권도 갖지 않은 민간인이라는 점입니다.

결국 해리의 수사는 차포를 다 떼인 상태에서 최고수와 맞부딪힌 형국에 이르고,

얼마 안 되는 해리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도움을 통해 아주 느리게 진행됩니다.

 

더욱이 해리를 심난하게 만드는 것은 운명의 연인 라켈과의 관계입니다.

올레그의 무죄만 밝히면 마음 편하게 오슬로를 떠나 홍콩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과연 자신과 라켈은 예전의 소소한 행복을 다시금 공유할 수 없는 걸까?

애초 나는 왜 오슬로로 돌아온 것일까?

이런 정답 없는 질문들이 수사에 전념해야 하는 해리를 수시로 갈등하게 만듭니다.

 

사실, 올레그의 살인사건의 배경은 전형적인 틀대로 구성돼있습니다.

러시아 출신이지만 두바이라 불리는 정체불명의 마약업자,

권력과 부를 위해 살인을 포함한 모든 불법을 자행하는 탐욕스러운 경찰,

오슬로의 마약을 자신의 신분상승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부패한 정치인 등이 엮여있고,

배신자와 밀고자와 라이벌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적잖은 사람들이 죽어나갑니다.

물론 막판 반전을 통해 이 상투적인 구도 안에 뭔가 신선한단서가 숨어있음이 드러나지만

이전에 읽었던 해리 홀레 시리즈에 비하면 분량 대비 만족감은 상대적으로 부족해 보입니다.

 

그럼에도, 손에 묵직하게 잡히는 방대한 분량이 페이지터너의 위용을 잃지 않은 이유는

거의 전적으로 해리 홀레라는 캐릭터 덕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원래 출간순서와는 무관하게 뒤죽박죽 (국내 출간순서대로) 읽어왔지만

매번 해리 자신은 물론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다치고 상처받고 사라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당사자인 해리의 뇌 속에 차곡차곡 쌓인 트라우마와 악몽들이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염됐었고,

그런 덕분에 라켈과 올레그가 연루된 이 사건을 대하는 해리의 정신적 부담과 고통에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이 몰입할 수 있었다는 뜻입니다.

팬텀으로 해리를 처음 만난 독자라면 공감하기 쉽지 않은 대목일 텐데,

아마 스노우맨만 먼저 읽었어도 팬텀속 해리의 감정을 이해하기가 쉬울 거란 생각입니다.

 

다음에 이어질 해리 홀레 시리즈스노우맨직전의 ‘The Redeeemer’일지,

아니면 팬텀이후인 ‘Police’ 또는 ‘The Thirst’일지 모르겠지만,

부디 다음 편에는 좀 덜 아픈 해리와 마주하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애초 바랄 수 있는 기대는 아니겠지만,

그냥 멋진 히어로 해리도 한 번쯤은 만나보고 싶다는 욕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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