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 미 배드 미 미드나잇 스릴러
알리 랜드 지음, 공민희 옮김 / 나무의철학 / 2017년 7월
평점 :
절판


이 작품의 주인공 밀리(본명은 애니)는 만 16살 생일을 앞둔 소녀입니다.

부모의 사랑을 받으며 청춘의 온갖 에너지를 발산할 나이지만

밀리의 삶은 일반적인 소녀들의 그것과는 너무나도 다른 궤적을 그려왔습니다.

밀리는 아이 아홉 명을 차례로 학대하고 살해한 엄마를 경찰에 고발한 뒤

엄마의 재판이 끝날 때까지 심리학자 마이크의 집에 임시로 머무르게 됩니다.

 

이름을 바꾸고 신분을 감추긴 했지만 밀리의 삶은 살얼음 그 자체입니다.

마이크는 최면치료를 통해 더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밀리의 과거를 소환하려 하고,

동갑내기인 마이크의 딸 피비는 집과 학교에서 밀리를 극단적으로 괴롭힙니다.

무엇보다, 자신을 학대하고 괴롭혔던 엄마를 경찰에 신고하긴 했지만,

밀리는 그 누구보다 엄마와 자신이 닮았다는 사실 때문에 극도의 혼란을 겪게 됩니다.

부지불식간에 엄마처럼 말하고 행동하는 자신을 발견하곤 깜짝 놀라기도 하고,

때론 의식적으로 엄마의 교훈대로 타인들을 대하기도 합니다.

 

과연 밀리는 법정에서 엄마의 죄를 제대로 털어놓을 수 있을까요?

엄마의 재판이 어떻게 끝나든, 밀리는 그 이후 어떤 인격으로 성장할까요?

정말 밀리는 엄마의 사이코패스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게 될까요?

 

● ● ●

 

심리학자 마이크의 집에 임시 입양된 밀리는 이전과는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마이크는 일찌감치 집을 나간 아버지 대신 부성애가 무엇인지 알려주는 인물입니다.

그의 아내 사스키아는 밀리의 엄마와는 180도 다른 무기력한 인물입니다.

마이크의 딸 피비와 그 친구들에게 학교 안팎에서 끔찍한 괴롭힘을 당하지만,

이웃에 사는 불우한 소녀 모건을 통해 처음으로 우정이란 게 뭔지 경험하기도 합니다.

또 전학 간 학교의 미술선생 미스 켐프는 밀리로 하여금

우리가 엄마가 저런 엄마였다면..’이란 아쉬움과 회한을 갖게 만드는 따뜻한 인물입니다.

 

이런 낯선 환경과 인물들은 밀리에게 지금껏 겪어보지 못한 다양한 감정들을 느끼게 만듭니다.

하지만 이야기는 10대 소녀의 아름답고 긍정적인 성장기와는 전혀 반대로 전개됩니다.

현실에 적응하지 못한 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엄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기 위해 끊임없이 자신의 몸에 자해를 가하는,

그런 참혹한 삶을 견뎌야 하는 밀리의 몸과 마음의 민낯을 적나라하게 까발립니다.

물론 밀리는 아주 잠깐씩 이 아늑한 가족 속에 녹아들고 싶다는 욕망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자신을 위해 헌신하는 마이크나 자신에게 관심을 표시하는 미술선생을 볼 때마다

그들에게서 보호받고 싶다는 아주 당연하면서도 소소한 바람을 마음속에 키우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공존하기 힘든 양면성을 몸과 마음 안에 깊이 품고 있는 소녀가 바로 밀리입니다.

그래서인지, 가끔 밀리에게서 사이코패스의 전형이 발현되는 대목을 읽을 때면

진짜 사이코패스의 잔인한 범죄 장면을 읽을 때보다 더 섬뜩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이 아이는 타고난 사이코패스가 아닐까?

혹시 엄마보다 더 강력한 사이코패스는 아닐까?

그럼 이 이야기는 어떻게 끝맺음 할 것인가?

 

설정도 캐릭터도 무척 매력적인 작품이긴 한데

아쉬운 점이라면 초반의 힘이 끝까지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절반쯤까지는 한 줄 한 줄 긴장감이 팽팽하게 유지되면서

독자로 하여금 꽤나 깊은 몰입도를 요구하는 어지간히 숨 막히는 이야기가 전개됩니다.

하지만 그 뒤론 왠지 동어반복으로 보이는 엇비슷한 에피소드가 계속 이어졌고,

이 작품의 클라이맥스라고 할 수 있는 엄마의 재판 부분도 기대보다 파괴력이 약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엔딩의 반전은 왠지 사족 또는 덧댄 이야기처럼 공감하기 쉽지 않았습니다.

굉장히 복잡하고 묵직한 심리스릴러로 시작했지만,

반전 한 방으로 앞서 전개된 그 많은 이야기를 허망하게 만든 셈이랄까요?

 

밀리는 내내 굿 미 배드 미’, 좋은 나나쁜 나사이에서 지독한 혼란을 겪습니다.

제가 원했던 것은 그 지독한 혼란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것이었는데,

마지막 장을 덮고 생각해보니 저의 바람 중 딱 절반쯤만 이뤄진 것 같았습니다.

다른 독자들의 서평이 무척 궁금해지는 작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나이트 스쿨 잭 리처 컬렉션
리 차일드 지음, 정경호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10월
평점 :
절판


최근 들어 몇몇 웰 메이드 첩보물을 책으로 읽긴 했지만,

그 전까지는 첩보물은 영상이 제격이란 편견을 갖고 있어서

이야기든 캐릭터든 웬만큼 소문이 났어도 좀처럼 책으론 접할 마음이 별로 없었습니다.

22편까지 출간된 리 차일드의 잭 리처 시리즈도 그런 이유로 지금껏 외면했었는데

단지 잭 리처가 아직 30대이고 현역 헌병이었던 시절의 이야기라는 소개글 한 줄에 끌려

그의 초창기 모습이라면 한번쯤 도전해볼 만하겠다는 객기(?)를 부리게 됐습니다.

 

나이트 스쿨은 과거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21번째로 출간된 잭 리처 시리즈입니다.

잭 리처에게 주어진 미션은 중동테러조직에 넘어갈 1억 달러 상당의 정체불명의 상품

상품을 거래하려는 독일 함부르크에 거주하는 신원미상의 미국인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국가안보위원회의 두 거물과 FBI CIA에서 차출된 요원까지 가세한 가운데

리처는 자신의 최측근인 프랜시스 니글리 상사를 불러들여 최정예 팀을 꾸립니다.

그리고 외교 분쟁 우려 때문에 폭력 한 번 제대로 휘두르기 어려운 독일 함부르크에서

그야말로 모래사장에서 바늘 찾기 식으로 상품미국인을 찾기 시작합니다.

 

도대체 1억 달러를 지불할 만한 가치가 있는 상품은 무엇인가?

미국인은 왜 하필 독일을 근거지로 거래를 하려는 것일까?

특정 기간 동안 함부르크에 체류했던 미국인한 명을 찾는 것은 거의 무모한 일이지만

리처는 특유의 감각과 추론으로 서서히 범위를 좁혀가며 자신의 의견을 개진합니다.

모두들 고개를 설레설레 젓지만 리처는 매번 그가 올바른 선택을 했음을 입증합니다.

그 와중에 불의의 습격을 받기도 하고, 코앞에서 용의자를 놓치기도 하지만

리처는 희미하게 남은 단서들을 통해 자신에게 부여된 미션을 완벽하게 마무리 짓습니다.

, 아슬아슬한 긴장감 속에서도 매력적인 남자 주인공답게 에로틱한 연애를 만끽하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지략과 완력과 마초적 매력을 모두 갖춘 완벽한 캐릭터의 결정체입니다.

 

어느 분의 서평에서 액션이 너무 적은 것이 안타깝다는 문구를 봤는데,

잭 리처를 책으로 처음 만난 저로서도 액션에 능한 주인공이라기보다는

직관과 논리적 추론에 모두 능한 명탐정에 가까운 그의 캐릭터는 약간은 의외였습니다.

물론 독일에서 비밀리에 벌이는 미국 국가안보위원회의 작전이니 만큼

비밀 유지가 되지 않으면 크나큰 외교 분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전제 때문인 건 알겠지만

소소한 액션 장면 몇 개 외엔 리처의 파괴력을 맛볼 수 없는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몇몇 장면에서 대단한 흥분을 느낀 걸 보면

액션으로 도배된 작품에서라면 엄청난 폭발력을 만끽할 수 있겠다는 확신이 들기도 했습니다.

 

책으로 읽는 첩보물의 매력은 여전히 의구심(?)을 갖게 만드는 게 사실인데,

나이트 스쿨덕분에 잭 리처 시리즈는 아무래도 출간 순서대로 찾아 읽게 될 것 같습니다.

어딘가 배배 꼬인 듯한 리 차일드의 촌철살인의 문장들도 마음에 들었고,

무엇보다 폭주하는 잭 리처의 통쾌한 액션을 맛보고 싶은 욕심 때문입니다.

서평을 마치는 대로 당장 국내 출간 순서부터 확인해봐야겠습니다.

 

사족으로..

채널 돌리는 중에 잠깐밖에 못 봤지만 영화에서 톰 크루즈가 잭 리처 역할을 맡았기 때문인지

읽는 내내 ‘195cm의 키에 110kg의 거구라는 표현이 도무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는데,

모르긴 해도 이건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아마 작가인 리 차일드 역시 자신이 만든 잭 리처와 톰 크루즈가 연기하는 잭 리처 사이에서

꽤나 혼란을 느낄지도 모를 일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갱년기 소녀
마리 유키코 지음, 김은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1970년대를 풍미했던 전설의 순정만화 푸른 눈동자의 잔.

갑작스러운 연재 중단 후 작가가 은퇴를 선언하면서 미완결로 남아버렸지만,

어린 시절 가슴 두근거리며 읽던 이 만화를 아직 기억하고 사랑하는 이들이 있다.

주로 40~50대의 중년 여성들로 구성된 푸른 6인회

팬클럽 안에서도 열렬한 팬심을 자랑하며 시간과 애정을 아낌없이 투자하는 간부들의 모임.

프렌치레스토랑에서 정기 모임을 열고 홈페이지를 운영하고 회지를 발행하며

추억의 만화 속 세계에서 소문과 망상을 공유하던 이들 사이에,

한 멤버의 실종과 함께 불길한 파문이 일기 시작한다.

복잡한 현실문제에서 도피해 막연히 주인공이 되기를 꿈꾸는 이들의 엇나간 열정과 집착은

끝내 유혈사태까지 불러오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2015년 이맘때쯤, 마리 유키코의 여자 친구골든 애플을 연이어 읽었는데,

그때 쓴 서평을 찾아보니 이 작가의 작품은 절대 연이어 읽으면 안 되겠다.”는 다짐과 함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답답함이 부담스러웠고, 한 번으론 납득할 수 없는 이야기 구조 탓에

두 번 읽지 않곤 못 배기게 하는 난감함도 부담스럽다.”라는 애증(?) 섞인 멘트가 눈에 띕니다.

서점에서 제목과 표지가 눈에 띄어 집어든 뒤 작가 이름을 보곤 잠시나마 주저했던 것도,

, 집에 모셔놓고도 애써 다음에라며 게으름을 부린 것도 그런 트라우마 때문이었습니다.

 

하지만 갱년기 소녀는 앞서 읽은 두 작품과는 사뭇 다른 느낌을 전해줬는데,

무엇보다 무난하고 쉬운 책읽기가 가능했다는 점입니다.

전작들의 경우 저절로 미간이 찌푸려지고,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간 상태에서 책장을 넘겼는데,

갱년기 소녀는 문장이나 이야기 구조 모두 굉장히 친절하고 심플한 작품이었습니다.

물론 마리 유키코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인 여자들 사이의 미묘한 심리전은 여전했지만,

이번에는 뭐랄까, 조금은 단선적인 돌직구 스타일의 심리전이란 인상이 강했습니다.

 

몸이 갱년기에 이른 현재까지도 10대 시절 열광했던 만화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채

팬클럽을 관리하고 간사 역할을 자처하며 현실과 몽상의 경계조차 망각한 5명의 여자들은

중년이기에, 여자이기에, 약자이기에 겪어야만 하는 자신들의 지긋지긋한 현실을

푸른 6인회라는 간사 모임을 통해 잠시나마 망각하려고 분투합니다.

없는 살림에 빚까지 내가며 화려한 옷차림을 준비하고,

턱없이 비싼 식사와 후식을 만끽하며 그 덕분에 얻게 되는 거만함을 뽐내지만,

그건 찰나에 가까운 신기루일 뿐입니다.

거짓으로 꾸몄던 부와 명예와 우아함은 순식간에 사라지고

빈곤, 폭력, 황폐화된 가족이란 비참한 현실이 즉각 그녀들을 옥죄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위안을 받고자 참여했던 푸른 6인회에서 그녀들은 새로운 감정을 맛보게 되는데,

그것은 멤버들에 대한 시기, 질투, 증오, 열등감, 살의 등입니다.

결국 그녀들은 누군가를 속이거나 소외시키거나 비난함으로써 가해자가 됩니다.

그리고 가해자로서 승기를 확인한 순간 그녀들은 쾌감 이상의 감정을 느끼게 됩니다.

 

여자 친구골든 애플이 꽤 복잡한 구조 속에 그보다 더 복잡한 심리전을 그렸다면,

갱년기 소녀는 마리 유키코답지 않게 5명의 여자들의 현실을 민낯 그대로 그립니다.

문제는, 아이러니하게도 갱년기 소녀에 대한 아쉬움이

그런 무난함, 친절함, 심플함에서 비롯됐다는 점입니다.

중반까지만 해도 예전 같지 않은 편한 책읽기가 마음에 쏙 들었는데,

뒤로 갈수록 등장인물들의 상투적인 설정과 거기에서 비롯될 수밖에 없는 상투적인 스토리,

그리고 그다지 긴장감을 자아내지 못한 채 동어반복을 거듭하는 사건들 때문에

지금 내가 무슨 이야기를 읽고 있는 거지?’라는 의문이 계속 맴돌았습니다.

 

5명의 여자들은 이름과 환경만 조금씩 다를 뿐 거의 하나의 캐릭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남편에게 학대당하거나, 부모와 갈등을 빚거나, 유산문제로 형제와 다툽니다.

다들 가족에게서 도망치고 싶거나 자신만의 도피처를 마련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물론 빈부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결국 그녀들의 문제의 대부분은 가정에서 출발합니다.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이 한 챕터씩 맡은 구성에도 불구하고

각 챕터 별로 확실한 개성을 느낄 수 없을 정도로 대동소이한 느낌만 받게 됩니다.

 

멤버들이 하나씩 의문의 사체로 발견되는 미스터리 역시 딱히 궁금증을 자아내지 못하는데,

애초 이 작품의 의도가 범인 찾기 미스터리와는 거리가 멀어 보여서 그런지

그 부분이 크게 불만스럽게 느껴지진 않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들의 미묘한 심리전과 함께 작품의 한 축을 담당했어야 할

미스터리의 긴장감이 훅 떨어지다 보니 아쉬움이 배가된 것이 사실입니다.

 

마리 유키코는 꽤 중독성이 강한 작가입니다.

갱년기 소녀전에 불과 두 작품, 그것도 꽤 불편한 책읽기의 기억만 남았는데도

그녀의 신간이라면 일단 끌리지 않을 수 없다는 게 참 신기한 일입니다.

그 불편함 속에 든 중독성 강한 매력은 무엇일까요?

갱년기 소녀는 어쩌면 그 불편함이 제대로 느껴지지 않아서 실망한 셈이 됐는데,

스스로도 납득하기 어려운 모순된 결론이지만 그래도 그게 사실인 걸 어찌하겠습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연
에스더 헤르호프 지음, 유혜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난산 끝에 첫 아이를 낳은 디디는 산후도우미의 도움을 받으며 침대에 꼼짝없이 매여 있다.

아기는 사랑스럽고 건강하지만 디디의 회복은 더디기만 하다.

한편, 로테르담 경찰서에서 일하는 미리암은 친오빠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한 채

올케였던 미망인 헤네퀸을 의심하고 그녀의 뒤를 밟는다.

이때 헤네퀸이 서로간의 믿음이 취약한 신혼부부의 가정 속으로 파고드는데...

(출판사의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이제 갓 엄마가 됐지만 그로 인해 몸과 마음이 망가진 디디,

디디를 케어하기 위해 산후도우미로 들어온 수상한 여자 헤네퀸,

그리고 헤네퀸의 비밀을 밝히기 위해 개인적인 수사를 하는 로테르담 형사과장 미리암 등

번갈아 화자를 맡는 세 명의 여자는 제목대로 악연으로 얽힌 사이입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되는데,

하나는 디디의 가족을 망쳐놓기 위한 헤네퀸의 현재의 소시오패스적 행각이고,

또 하나는 미리암의 수사 과정에서 밝혀지는 헤네퀸의 사악하고 비극적인 과거사들입니다.

헤네퀸은 산후도우미로서 디디와 오스카 부부 집에 발을 들이는 순간부터

가장 잔혹한 방법으로 그들을 응징할 의지를 드러내는데,

그녀와 그들 부부 사이의 과거의 악연은 미리암의 수사를 통해 한꺼풀씩 밝혀집니다.

오빠의 의문의 죽음에 올케 헤네퀸이 어떤 식으로든 영향을 미쳤다고 확신하는 미리암은

헤네퀸의 수상쩍은 세 번의 결혼 이력은 물론 유년시절까지 집요하게 조사합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헤네퀸이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 왜 산후도우미로 위장하여 디디와 오스카 부부에게 접근했는지 깨닫게 됩니다.

 

시작과 동시에 범인을 공개한 뒤 ?’라는 질문, 즉 범인의 동기에 초점을 맞춘 작품인데,

이런 류의 서사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충분히 어필할 수 있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사악한 목적을 갖고 가족 안으로 파고든 외부인은 그 존재만으로도 긴장감을 고조시키는데,

특히 그 대상이 갓난아기가 있는 가족이라면 독자가 느끼는 위기감은 더 말할 것도 없겠죠.

그리고 한쪽에서 그 외부인의 정체를 밝히는 주인공의 수사가 병행되면서

이 가족이 맞닥뜨리게 될 위기가 어디까지 확장될지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분량도 서사에 맞게 적절하고, 페이지도 금세 넘어갈 만큼 속도감을 자랑하지만,

단선적인 이야기의 뼈대와 예측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전개는 무척 아쉬웠습니다.

헤네퀸의 과거는 그다지 충격적이거나 새롭지 않았고,

디디 부부나 미리암과의 악연도 작가의 거듭된 강조에도 불구하고 인상 깊게 읽히지 않았습니다.

고개가 끄덕여지고 페이지는 계속 넘어가는데 뭔가 양념이 덜 들어간 듯한 느낌이랄까요?

가족의 문제가 얽힌 탓에 경찰 조직 모르게 단독 수사를 벌여야 하는 미리암의 행보도

누구라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단순 탐문 이상의 재미는 느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심심함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는지 모르겠지만,

막판의 무리한 반전은 오히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독자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도 모르게 So What?이란 반문이 저절로 튀어나올 정도였으니까요.

 

네덜란드 최고의 범죄소설에 수여하는 '헤반 크라임존상'을 수상한 작품이라지만,

외양에 비해서는 아쉬움이 더 크게 남은 작품이었습니다.

다만, 캐릭터를 그리는 힘이나 단순하긴 해도 매끄러운 필력은 인상적이어서

혹시 에스더 헤르호프의 신작이 나온다면 한번쯤은 꼭 다시 찾아보게 될 것 같습니다.

2006년에 데뷔해서 네덜란드 인기작가의 반열에 올랐다는 소개글을 보면

그녀의 진짜배기 작품을 기대하는 것도 무모한 일은 아닐 것 같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붉은 기억
다카하시 가쓰히코 지음, 오근형 옮김 / 네오픽션 / 2011년 10월
평점 :
절판


기억을 소재로 한 소름 돋는 7편의 괴담이 실린 작품집입니다.

중년의 주인공들이 오랫동안 봉인해온 어린 시절의 기억들과 마주하는 이야기가 대부분인데,

그 기억들은 하나같이 기이하거나 미스터리한 죽음과 연관돼있습니다.

또 그 죽음은 유령, 불륜, 근친상간, 식인(食人), 욕정 등

금기시 여겨지는 원시적 사연들이 내포된 것들이라서 더더욱 으슬으슬한 느낌을 전합니다.

 

누군가는 어릴 적 자신이 살던 마을의 세세한 지도를 우연히 본 것 때문에,

누군가는 박물관 직원이 갖고 온 낡고 오래된 온천여관의 사진 한 장 때문에,

또 누군가는 어릴 적 친구들과 즐거웠던 한때를 회상하며 나눈 이야기 한 토막 때문에

스스로 꼭꼭 억눌러놓았던 참혹한 기억들과 마주하게 됩니다.

그들이 자신의 기억을 봉인한 대부분의 이유는 죄책감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죽였거나, 누군가의 죽음을 방조했거나, 누군가의 죽음에 영향을 미친 죄책감입니다.

어린 나이의 자아들은 그 공포를 견뎌내지 못했고,

결국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그 시간과 공포와 기억을 모조리 봉인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본의 아니게 봉인이 해제된 기억과 마주한 주인공들은 엄청난 패닉에 빠집니다.

 

사실, ‘봉인된 기억이란 것은 직접 겪어보지 않은 사람에겐 비현실적으로 느껴지기 마련이고,

그래서 강고하게 봉인됐던 기억들이 무려 30여 년이 지난 시점에 이르러서야

(어떤 계기로든) 해제된다는 설정은 독자에 따라 지나친 허구로 읽힐 수도 있습니다.

저 역시 간간이 위화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아주 매력적인 기억에 관한 괴담 판타지라는 생각입니다.

내용도 내용이지만 나오키 상 수상작인 이 작품집이

국내에서 크게 입소문이 나지 않은 것은 예상외의 일이었습니다.

(물론 저만 몰랐을 수도 있겠지만요.^^;)

 

아직 읽지 못한 샤라쿠 살인사건때문에 작가의 이름은 낯익었지만,

검색을 해보니 국내에 이 작품 외에 전생의 기억도 출간돼있었습니다.

일본에서 모두 세 권의 기억 연작 소설집을 출간한 걸 보면

어디서도 맛본 적 없는 이 작품집의 독특함이 우연한 산물은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습니다.

2011년 이후 더는 다카하시 가쓰히코의 신작이 출간되지 않은 점이 아쉬운데,

그나마 네이버 카페 일미즐의 일반독자님 추천 덕분에

이 작품을 만나게 된 걸 다행으로 여겨야 될 것 같습니다.

기억 또는 괴담을 좋아하는 독자에겐 저 역시 강추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