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여자들
카린 슬로터 지음, 전행선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10월
평점 :
품절


24년 전, 큰딸 줄리아의 실종 이후 캐럴 집안은 산산조각 났다.

둘째 딸 리디아는 약물에 중독된 채 가족과 절연했고,

아버지 샘은 딸을 찾기 위해 미친 듯이 애쓰다가 결국 자살했다.

막내 클레어만이 폴과 결혼하여 백만장자의 트로피 아내로 정상적인 삶을 살아왔다.

어느 날, 길거리에서 폴이 살해당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벌어진다.

미망인 된 클레어는 폴의 컴퓨터를 정리하던 중 봐선 안 될 파일을 보게 된다.

클레어는 경찰에 신고하지만 무슨 이유에선지 경찰은 별일 아닌 듯 대할 뿐이고,

느닷없이 찾아온 FBI 요원은 클레어에게 폴에 관한 집요한 심문을 멈추지 않는다.

18년 간 사랑해온 남편 폴의 추악한 모습 때문에 패닉에 빠진 클레어는

컴퓨터 파일 뒤에 숨은 진실을 찾기 위해 오랫동안 절연했던 언니 리디아에게 연락한다.

그리고 그날 이후 클레어와 리디아는 끔찍한 참극에 휘말리게 된다.

 

● ● ●

 

백만장자에 사랑이 넘치던 남편이 실은 끔찍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클레어가

오랫동안 절연했던 언니 리디아와 함께 남편 폴의 추악한 비밀을 추적하는 이야기입니다.

설정 자체는 크게 새롭지 않지만, 비극적인 가족사가 사건과 한데 엮여 전개되면서

기존의 비슷한 설정의 작품들과 차별화되는 매력이 있는 작품입니다.

 

작가를 검색해보니 이 작품 이전에는 2004년 북스캔에서 출간된 의혹 1~2’이 전부더군요.

‘19딱지가 붙어있던데, ‘예쁜 여자들을 읽고 나면 충분히 납득될 만한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이 작품이 꽤 잔혹하고 불편한 장면들을 많이 담고 있다는 뜻입니다.

개인적으로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과 막심 샤탕의 악의 3부작을 좋아하는데,

두 시리즈 모두 잔혹함과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죠.

하지만 예쁜 여자들의 경우 두 가지 면 모두 약간의 아쉬움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우선, 납치-고문-살인으로 이어지는 잔혹함의 수준은 꽤 높은 편이지만

다분히 과장되거나 강요하는 분위기, 또는 보여주기 식설정이어서

독자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기만 할뿐 정작 필요한 긴장감을 주지 못했습니다.

뭐랄까, “누가 나보다 더 잔인하게 쓸 수 있겠어?”라는 느낌까지 받았다고 할까요?

 

스릴러로서의 매력 역시 하염없는 심리 묘사와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 때문에

작가의 명성에 비해서는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후반부에 실린 옮긴이의 말이나 인터넷 서점에 소개된 작가 인터뷰를 보면,

기존 작품들과 달리 오롯이 범죄 피해자와 그 주변 사람들에게만 초점을 맞춘 스릴러”,

범죄 이후 남겨진 사람들의 시선에서 사건을 이야기하는 기회가 되었다.”라고 돼있는데,

이 문구들처럼 내용의 상당 부분이 현재 시점의 화자인 클레어와 리디아의 심리상태,

또는 과거 큰딸 줄리아의 실종 이후 캐럴 일가가 겪은 패닉 상태에 할애된 탓에

비슷한 분량의 여느 스릴러에 비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도 느리고,

동어반복처럼 느껴지는 감정과잉의 문장들이 지루하게 읽힌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이 작품의 의도 자체가 범인이나 진실 찾기가 아니라

실종 이후 슬픔과 상실감에 젖은 사람들이 처음에는 고통과 분노에 사로잡혔다가

점차 죄책감과 자기 파괴로 이어지고 결국 이를 극복해가는 과정을 보여준다.”에 있기 때문에

그런 미덕에 매력을 느낀 독자들은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겠지만,

어쨌든 호불호가 꽤 갈릴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작가의 이력을 보니 법의학자와 형사가 함께 사건을 수사하는 그랜트 카운티 시리즈’,

연방수사국 특별요원 윌 트렌트를 주인공으로 한 윌 트렌트 시리즈가 대표작이던데,

개인적으로는 출간 순서가 좀 어긋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이 시리즈들이 먼저 출간됐더라면 스릴러로서의 만족감은 물론

작가에 대한 호감도 높일 수 있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카린 슬로터의 작품들이 계속 출간될지 모르겠지만

그녀의 대표작 시리즈라면 한번쯤은 도전해보고 싶은 욕심은 분명 있습니다.

예쁜 여자들이 아쉬움을 남긴 작품임엔 틀림없지만

적어도 작가의 필력만큼은 힘과 매력이 모두 느껴질 정도로 강렬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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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살인사건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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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문 사립중학교 입시준비를 위한 호숫가 별장에서의 합숙수업에 네 가족이 참여합니다.

단순히 아이들 때문에 친해졌다고 보기엔 어딘가 불온해 보이는 네 쌍의 부부들,

공부에 치어 그 또래의 활력을 잃은 네 아이들과 그들을 가르치는 학원강사 등 모두 13명이

풍광 좋은 히메가미코 인근의 별장에 머무는 동안 예기치 않은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범인이 자백까지 하자 학부모 중 한 명인 나미키 순스케는 경찰에 신고할 것을 주장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하나같이 시신을 유기하고 사건을 은폐할 것을 주장합니다.

결국 모두가 공모한 결과 시신은 호숫가 깊은 곳에 버려지지만,

나미키 순스케는 이 합숙 자체는 물론 부부들의 수상한 행동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 ● ●

 

책장에 방치된 장식용책들을 어떻게든 조금씩 소화해야겠다는 생각에 목록을 작성하다가

아직 읽지 못한 히가시노 게이고의 초기작을 고르게 됐습니다.

2005년에 국내에 소개됐으니 벌써 10년도 훌쩍 넘은 작품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엔터테인먼트 미스터리 대가로서의 진면목이 잘 드러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영화로도 만들어졌다는데 다루고 있는 주제나 미스터리의 구도로 보면 당연한 일인 것 같습니다.

 

일본의 입시문제, 그로 인해 파생되는 가족의 균열, 살인사건 은폐를 둘러싼 미묘한 갈등 등

어쩌면 무척이나 상투적인 코드들로 이뤄진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조금의 위화감이나 작위성도 느껴지지 않고 술술 잘 읽힙니다.

그야말로 독자들이 어디에서 궁금증을 느끼고, 어디에서 카타르시스를 느낄지,

, 어디쯤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쳐야 효과적일지 정확하게 알고 설계된 작품 같았습니다.

 

굉장히 무거운 주제를 다룬 작품에서조차 쉬운 문장들과 간결한 묘사 때문에

깊이감이 부족해 보이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전형적인 특징은 이 작품에서도 여전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의 현실감과 인물들의 감정이 워낙 탄탄하고 생생하게 그려져서

근래 출간된 일부 억지스럽거나 난해한 작품들에 비해서는 매력적으로 읽혔습니다.

 

무대는 열린 밀실처럼 외부인이 간섭할 여지가 없는 호숫가 별장이고,

경찰이나 탐정 없이 주인공이 진실을 밝힌다는 점,

또 예리한 독자라면 쉽사리 엔딩을 예상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투적인 구조로 보이긴 하지만,

적절한 분량과 군더더기 없는 이야기 전개로 인해 그런 아쉬움은 모두 상쇄될 수 있습니다.

 

줄거리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을 안 했는데,

초반부터 워낙 결정적인 단서들이 많이 등장하는 작품이라

누가 죽었고, 누가 죽였는지조차 스포일러가 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출판사의 소개글이나 앞뒤 표지도 무시하고

바로 본편 읽기에 들어가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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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이킬 수 없는 약속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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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일하던 가게의 손님이던 오치아이의 제안으로 바(bar)의 공동경영자가 된 무카이.

그는 과거의 삶을 버리고, 믿을 수 있는 파트너와 자신의 성()을 새롭게 구축하였다.

사랑하는 가족과 함께 소박하지만 평온한 삶을 누리고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버려버린 과거에서 도착한 한 통의 편지가 예전에 봉인한 기억을 되살린다.

그들은 지금 교도소에서 나왔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줄거리나 인물들을 좀더 상세하게 소개하고 싶었지만,

출판사의 절제된소개글을 보니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렇듯 어중간한 인용에 그쳤습니다.

다만, 궁금증 유발 차원에서 한두 줄만 더 한다면,

살인을 약속한 대가로 어두운 과거와 단절하고 새 삶을 얻었던 주인공이

15년이 지난 지금, 그 약속의 실행을 요구받으면서 벌어지는 미스터리입니다.

 

최근 읽은 야쿠마루 가쿠의 두 작품(‘기다렸던 복수의 밤’, ‘악당’) 모두

짧게는 10여 년, 길게는 30년 전의 과거사를 이야기의 출발점으로 삼았는데,

이런 설정은 주인공의 고뇌, 갈등, 상처를 그 기간만큼 깊고 절실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어서

사회적 문제나 개인의 복수를 주로 다루는 야쿠마루 가쿠의 서사와 잘 매치되는 것 같습니다.

 

주인공 무카이 사토시는 인생에서 결정적인 두 번의 딜레마와 마주칩니다.

목숨을 구하기 위해 먼 미래에 누군가를 죽이겠다는 약속을 해야 하는 상황이 하나이고,

15년 간 봉인했던, 결코 현실이 될 거라 여겨본 적 없는 그 약속의 이행을 요구받게 됨으로써

지금껏 일궈온 소소한 행복과 단란한 가족을 모조리 깨부숴야 하는 상황이 또 하나입니다.

과거, 나름의 절박한 사정으로 영혼을 팔아 위기를 넘겼지만,

결국 그 거래가 혹독한 부메랑으로 돌아와 더 큰 대가를 치르게 된 경우라고 할까요?

 

무카이는 과연 약속을 지키기 위해 살인을 저지를까?

그가 살인을 저지르지 않고 약속한 자의 마음을 달랠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혹시, 살인을 포기한다면 그는 어떤 참혹한 대가를 치르게 될까?

무카이에게 약속된 살인의 이행을 요구하는 자는 과연 정당하다고 볼 수 있는가?

이런저런 의문과 궁금증과 긴장감이 팽팽하게 펼쳐진 상황에서

무카이는 그에게 주어진 얼마 안 되는 시간 안에 미션을 마무리하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지금까지 읽었던 야쿠마루 가쿠의 주인공들 대부분이 무카이와 같은 사면초가의 신세였는데,

그들과 마찬가지로 무카이는 행복하다고도, 불행하다고도 할 수 없는 결말을 맞이합니다.

그것은 이 비극의 출발점이 결국은 무카이 자신이 저질렀던 젊은 날의 죄에 있기 때문입니다.

한 번 죄를 저지른 사람은 새 삶을 꿈꿀 수 없는 것일까?’라는 홍보 문구는

아마도 무카이의 이런 상황을 적절하게 짚어낸 한 줄 카피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딱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마지막에 드러난 한 조각의 진실이 조금은 작위적으로 구성됐다는 점입니다.

뭐랄까, 무카이를 조금이나마 구원하기 위해 작가가 이런저런 변명을 하는 느낌이랄까요?

스포일러가 될 수 있어 자세한 언급은 할 수 없지만,

이 작품을 다 읽은 독자라면 어느 정도 수긍할 수 있는 유일한 옥의 티인 건 분명합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들은 사이즈나 구성 면에서 상대적으로 왜소해 보이긴 하지만

주인공들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심리적 딜레마에 관한 한

여느 대작보다 탁월하다는 느낌을 받곤 합니다.

그런 주인공이 사회적 문제나 개인의 복수라는 주제 속에 던져지면서

이야기는 힘과 긴장감과 호기심을 함께 얻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소위 문학적 멋내기는 찾아볼 수 없는 쉽고 평이한 문장들이지만

오히려 더 깊고 오래가는 여운을 남기는 것 역시 야쿠마루 가쿠만의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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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미줄에 걸린 소녀 밀레니엄 (문학동네) 4
다비드 라게르크란츠 지음, 임호경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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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는 개인적으로 베스트 목록 상단에 올릴 만큼

재미와 인상과 무게감이 남달랐던 작품들입니다.

어쩌면 작가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더는 후속편을 만날 수 없게 된 탓도 있겠지만,

뭐랄까, 일종의 전설 같은 느낌까지 주는 대작이라고 할까요?

 

그런 밀레니엄 시리즈의 후속편이 국내에 6년 만에 소개됐습니다.

다비드 라게르크란츠라는 낯선 작가에 의해서 말이죠.

사실, 지난 9월에 출간 소식을 들었지만 읽고 싶다는 생각은 별로 들지 않았습니다.

카리스마 넘치는 탐사전문기자 미카엘 블롬크비스트와

천재 해커이자 증오+폭력+연민으로 똘똘 뭉친 인간 흉기 리스베트 살란데르는 여전하겠지만

스티그 라르손이 아닌 다른 작가에 의해 그려진 두 사람을 지켜보는 일은

아무래도 불편하거나 아쉬움만 남을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거미줄에 걸린 소녀이후 다비드 라게르크란츠의 이름으로

밀레니엄 시리즈가 계속 이어졌다는 소식(후속작은 자기 그림자를 찾는 남자’)을 듣곤

결과야 어찌 되든 미카엘과 리스베트를 한 번은 만나봐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습니다.

 

● ● ●

 

판매부수의 추락, 특종의 부재 등으로 위기에 빠진 밀레니엄과 미카엘은

새로운 모기업의 상업적 정책 때문에 존재감 자체가 사라질 처지에 놓입니다.

그 무렵, 미국에서 돌아온 천재 과학자 프란스 발데르 사건이 터지면서

미카엘은 몇 년 만에 리스베트와 온라인으로나마 재회하게 됩니다.

당초 사건성 자체가 부족해 보이던 천재 과학자 사건은

시간이 지날수록 미카엘에게 엄청난 특종의 가능성을 보이기 시작합니다.

특히, 미국, 러시아, 스웨덴의 정보기관, 대기업, 해커그룹이 연루됐다는 사실에 더해,

리스베트가 꽤 오래 전부터 이 사건에 깊숙이 개입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카엘은

극히 위험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는 프로젝트라고 판단하고 본격적인 취재에 나섭니다.

무엇보다 이 사건 어딘가에, 오래 전 자취를 감췄던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이자

포악한 아버지의 유전자를 물려받은 카밀라가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미카엘은

리스베트가 그 어느 때보다 피하기 힘든 위험한 상황에 놓였음을 깨닫습니다.

 

● ● ●

 

일단, 왜 다비드 라게르크란츠가 밀레니엄 시리즈의 계승자로 지목받을 수 있었는지

스티그 라르손의 독자 입장에서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작품인 건 분명합니다.

미카엘이나 리스베트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어디에서도 이질감을 느끼기 힘들었고,

이야기를 끌고 가는 힘 역시 전작들에 버금가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스티그 라르손의 전작들과의 비교를 떠나,

작품 자체에 대해서만 말하자면 여러 가지 면에서 아쉬움이 더 많이 남은 게 사실입니다.

캐릭터는 여전하더라도 매력을 찾아보기 힘든 두 주인공,

200페이지에 이르는 첫 챕터의 지루함과 명료하지 못한 사건 개요,

딱히 왜 등장했는지 알 수 없는 일부 조연들의 모호한 존재감,

(특히 서번트 증후군을 앓는 천재 과학자의 아들과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 카밀라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우연성과 작위성이 과도한 인물들인데,

문제는 이들이 미카엘 못잖은 비중과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다 읽고도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선과 악의 대결 구도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대작 스릴러로서 갖춰야 할 미덕이 많이 부족해 보이기 때문입니다.

 

가장 아쉬운 점은 아무래도 두 주인공에 관한 점인데,

미카엘은 위험한 진실을 좇는 탐사전문기자로서의 매력을 좀처럼 발휘하지 못합니다.

그다지 능동적이지도 않고, 큰 위기에 빠지는 경우도 별로 없습니다.

스릴러 주인공이라기보다 거의 관찰자 수준에서 이야기를 끌어갈 뿐입니다.

리스베트는 몇몇 해킹과 구출 작전 장면에서 그녀다운 모습을 보여준 것 외에는

독자 입장에선 안 읽고 넘어가도 아무 지장 없는 수학과 과학 설명에 더 바쁩니다.

다 읽고 보면 그녀의 가장 큰 미션은 해킹한 파일의 암호 깨기였던 것으로 보이는데,

정작 그 과정에서 리스베트가 한 일은 (의외의 도움을 받은 것 외엔) 별로 없습니다.

 

주인공들이 그다지 주인공답지 않은 면모만 보여주는데 반해,

사건의 외양은 인공지능의 미래, 각국 정보기관의 비리, 악질적인 국제 해커그룹의 준동 등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능가하는 규모로 마냥 확장됩니다.

솔직히 이만한 사이즈와 능력을 갖춘 악당들이 번번이 미션에 실패하는 것도 이상하고,

미카엘 한 명만 잡아서 족치면(?) 금세 해결될 고민을 질질 끄는 것도 이해할 수 없습니다.

꽤 비중 있게 그려진 천재과학자 아들의 서번트 증후군이나

중후반부에 갑자기 등장한 리스베트의 쌍둥이 자매 카밀라에 대한 장광설은

엔딩을 허무하게 만들거나 이야기 방향을 엉뚱한 쪽으로 틀게 만들어서

굳이 왜 설정했는지 그 이유도 잘 알 수 없었습니다.

 

쓰다 보니 정말 혹평이 돼버렸는데,

객관적인 평을 하고 싶었지만 역시 스티그 라르손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물론 지금 와서 다시 스티그 라르손의 밀레니엄 시리즈를 읽어보면

예전처럼 열광하지 않을 수도, 이에 못잖은 혹평을 쓸 수도 있겠지만,

그때 남은 여운과 새 시리즈에 기대치가 너무 컸던 탓인지

자꾸 마음에 안 드는 부분만 눈에 들어온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카엘과 리스베트만 생각하면 곧 출간될 자기 그림자를 찾는 남자가 너무 궁금하지만,

아마 그보다는 스티그 라르손의 유작들을 다시 읽을 가능성이 더 높을 것 같습니다.

그때의 미카엘과 리스베트는 모든 감정을 이입하게 만든 매력덩어리 캐릭터였고,

사건과 조연들 역시 주인공과 한데 섞여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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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번째 인격
기시 유스케 지음, 김미영 옮김 / 창해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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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집’, ‘악의 교전’, ‘말벌에 이어 네 번째로 만난 기시 유스케입니다.

사실, 오래 전에 강렬한 느낌을 줬던 검은 집이후 그의 팬이 됐지만,

아까운(?) 마음에 아껴 읽다 보니 이제 겨우 네 번째 작품을 읽게 됐습니다.

국내에 12편이나 출간됐고, 소장한 작품도 7~8편인데 너무 인색했던 셈입니다.

 

‘13번째 인격은 기시 유스케의 데뷔작입니다.

제목대로 13개의 인격을 지닌 다중인격 여고생 치히로가 등장하고,

다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읽을 줄 아는 특별한 능력자 유카리가

치히로의 인격을 통합하고 치유하기 위해 분투하는 여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두 사람은 1995년 발생한 고베대지진을 통해 만납니다.

지진의 트라우마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원봉사를 온 유카리는

모든 봉사자들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감당하기 어려운 여고생 치히로를 맡게 됩니다.

그리고 그녀의 사고와 감정을 읽는 과정에서 그녀에게 여러 인격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문제는 대지진 와중에 자리 잡은 것으로 보이는 무척 이질적인 13번째 인격입니다.

유카리는 그 인격에게 이소라라는 특이한 이름이 붙은 점도,

, 그 이름이 일본 괴담 속에 등장하는 끔찍한 원령의 이름이란 점도 석연치 않습니다.

자원봉사기간이 끝나고 몇 달이 지난 뒤 다시 치히로를 찾아온 유카리는

그 사이 치히로 주변에서 의문의 죽음이 잇달았다는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죽음의 배후에 13번째 인격인 이소라가 연루됐음을 깨닫습니다.

유카리는 이소라를 제거하지 않는 한 끔찍한 비극이 멈추지 않을 것을 예감합니다.

 

아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특별한 능력자 유카리가 사악한 13번째 인격 이소라와 대결하는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임사체험, 유체이탈, 인격 간의 헤게모니 대결 등 강렬한 판타지 요소와 함께

치히로 주위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의문의 죽음이라는 현실적 공포가 가미되면서

굉장히 복잡한 서사가 400여 페이지에 걸쳐 전개됩니다.

 

현실과 거리가 먼 판타지라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독자는 어느 순간부터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망각한 채

유카리가 끌고 가는 이야기 속으로 속절없이 빠져들게 됩니다.

그리고 의문의 13번째 인격 이소라의 정체에 대해 호기심과 공포심을 함께 느끼게 되는데

유카리의 탐문과 추리로 이소라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에는

머리칼이 쭈뼛거릴 정도의 당혹감을 경험할 수밖에 없게 됩니다.

마지막 장을 덮을 때쯤엔,

도시전설, 원령 괴담, 잔혹 호러, 살인 미스터리를 한꺼번에 읽은 듯한 묵직한 두통은 물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이소라의 저주와 공포까지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비현실적 공포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현실감 있게 읽히는 건

100% 유카리의 매력적인 캐릭터 덕분입니다.

다른 사람의 사고와 감정을 읽는다는 건 얼핏 특혜처럼 보이지만,

실은 원하지 않는 엄청난 소음과 환각에 시달리게 되는 저주와도 같은 능력입니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 가출을 한 유카리는 먹고 살기 위해 천박한 직업을 택하지만

그곳에서 의외로 자신의 능력이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다는 것을 깨닫곤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기 시작합니다.

그런 특별한 능력과 선량한 마음씨의 조합이 치히로에게 관심을 갖게 만들었고,

결국엔 치명적인 위험을 무릅써가면서 이소라와의 대결에 헌신하게 만든 것입니다.

이런 매력적인 캐릭터 탓인지, 왜 기시 유스케가 유카리 시리즈를 이어가지 않았는지

의문스럽기도 하고, 아쉬운 마음이 들기도 했습니다.

 

심리학이나 약리학에 대한 엄청난 자료조사의 흔적이 작품 곳곳에 배어있는데,

간혹 너무 지나친 나머지 부담스럽게 읽히는 경우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흔적들 덕분에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가 슬그머니 희미해지면서

독자에게 좀더 리얼한 공포심을 전달하게 된다는 점에서

작가의 노력에 박수를 보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애초 괴담이니 원령이니 하는 컨셉에 우호적이지 않은 독자라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공포물에 관심 있는 독자라면

출간된 지 20년도 넘은(일본 출간 1996) 이 작품을 2017년에 읽는다고 해도

꽤 높은 만족감을 얻을 수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데뷔작부터 엄청났던 기시 유스케의 내공에 새삼 놀라고 또 놀란 즐거운 책읽기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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