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물이라 불린 남자 스토리콜렉터 58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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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직 미식축구 선수, 아내와 딸과 처남을 참혹한 범죄로 잃은 전직 경찰, 그리고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려 원하든 원치 않든 모든 것을 기억하게 된 남자. 데이비드 발다치가 창조한 특이한 히어로 에이머스 데커는 전작에서 자신의 가족들을 살해한 범인을 갖은 고난 끝에 밝혀냈고, 이번엔 FBI의 객원요원이 되어 20년 간 사형수로 갇혀있던 한 남자의 진실을 추적합니다.

 

미식축구선수였던 멜빈 마스는 20년 전 부모 살해범으로 체포됐습니다. 물증, 동기, 목격자가 워낙 확고해서 꼼짝없이 유죄를 선고받았고, 20년의 수형기간을 보낸 현재, 사형집행일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형수가 자신이 마스 사건의 진범이라고 주장하면서 사태는 급반전됩니다. 전작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에서 인연을 맺은 FBI 로스 보거트의 제안으로 미제 사건을 다루는 신설 특별수사팀에 참여한 데커는 마스 사건에 집착에 가까울 정도로 관심을 갖습니다. 자신의 가족들이 살해된 사건 때처럼 갑자기 누군가 자신이 진범이라며 나선 점, 마스와는 대학시절 미식축구선수로서 직접 경기장에서 만난 적이 있던 점, 그리고 무엇보다 마스가 사형수로 보낸 20년의 세월 뒤에 묻힌 비밀에 대한 의문 때문입니다.

 


전작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개인적으로 2016년 베스트 11으로 꼽았던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1년 만에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명탐정데커를 다시 만난 건데, 그는 더욱 매력적인 인물이 됐고, 사건은 더욱 복잡하고 강한 비극성을 지녔으며, 페이지는 훨씬 더 빨리 넘어가는, 그야말로 기대에 100% 부응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20년을 복역한 한 사형수의 억울한 사연은 단순히 진짜 범인은 누구?’를 넘어 한 가족의 비극과 미국 남부의 씻을 수 없는 역사적 상처로까지 확장되면서 서사의 무게를 꽤 묵직하게 만듭니다.

 

거의 원 맨 밴드에 가까웠던 전작에 비해 이번에 데커는 여러 조력자들과 함께 합니다. 보기 드물게 선한(?) FBI 요원 보거트와 얄밉고 집요한 저널리스트 알렉스 재미슨은 전작에 이어 이번에도 데커와 호흡을 맞추는데 케미는 좀 부족해도, 데커의 든든한 의지처 또는 지원사격조로 활약합니다. 그 외에 심리학자 대븐포트, 전형적인 FBI 요원 밀리건도 맛깔난 양념 캐릭터들입니다. 이들은 상부의 압력, 보이지 않는 적들의 기습과 살해 위협 속에서도 꿋꿋이 팀워크를 유지하며 20년 전의 진실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합니다.

 

사실, 이번 작품에서 데커의 과잉기억증후군은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가족을 그리워하거나 대학시절 경기장에서 맞닥뜨렸던 마스를 떠올리는 일을 위해 활용될 뿐 정작 수사 과정에서는 미미한 정도로만 언급되는데, 전작을 읽은 입장에선 오히려 더 편하고 자연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마 기억에 의존한 특별한 수사가 강조됐더라면 오히려 작위적으로 보였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다만, 데커를 이번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라면 주인공이 과잉기억증후군이라던데, 별 거 없네.”라고 느낄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만일 그렇다면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를 꼭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과잉기억증후군 대신 작가는 데커에게 냉정함과 가차 없는 판단력을 부여했는데, 거기까지는 충분히 매력적으로 보였지만, 거의 천재적인 명탐정처럼 활약하는 데커는 어딘가 낯설게만 느껴졌습니다. 컴퓨터 비밀번호를 쉽게 알아내고, 평범한 단어 하나에서 결정적 단서를 유추하고, 누구도 생각 못한 엄청난 상상력으로 사건의 골격을 파악합니다. 또 현장에서 단서를 찾아낸다기보다 두뇌활동에 의지하는 경우가 많아서 때론 안락탐정의 분위기까지 풍긴 점은 유감이었습니다. 거침없이 넘어가던 페이지가 2/3쯤 잠시 느슨해졌던 건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또 하나의 아쉬움은 번역 제목인데, 전작인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는 원제인 ‘Memory Man’의 적절한 의역으로 보인 반면, ‘괴물이라 불린 남자는 원제 ‘The Last Mile’과는 너무 동떨어져 보였기 때문입니다. ‘The Last Mile’사형집행장까지 죄수가 걷는 마지막 길을 뜻하는데다 멜빈 마스는 어느 모로 보나 괴물이라 불릴 만한 캐릭터가 아니었습니다. 전작과 운율을 맞추기 위한 의도로 보이는데, 오히려 내용이나 원제에 충실했다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소소한 아쉬움을 제외하곤 괴물이라 불린 남자는 올해 가장 인상적인 작품 중 하나입니다. 시리즈 첫 두 편이 모두 제 마음을 사로잡았으니 이제 데이비드 발다치를 관심목록 최상단에 올려놓아야 할 것 같습니다. 20여 년 동안 30편이 넘는 작품을 쓴 데이비드 발다치가 2016년에야 한국에서 관심을 받기 시작한 이유는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습니다. 신간이 아니라도 그의 과거 작품들이 한 편이라도 더 빨리 소개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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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랙 머니 밀리언셀러 클럽 148
로스 맥도날드 지음, 박미영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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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들이 즐겨 찾는 테니스 클럽을 방문한 사설탐정 루 아처는

자산가의 아들인 피터 제이미슨이란 청년에게서 의뢰를 받는다.

이웃집에 살며 어린 시절부터 알아 온 그의 약혼녀 버지니아가

돌연 인텔리풍의 프랑스인 프란시스 마텔에게 홀려 약혼을 파기한 것이다.

제이미슨은 마텔이 사기꾼이며 심지어 진짜 프랑스인조차 아니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아처는 마텔의 행적을 뒤쫓고, 교양 있는 프랑스인만이 대답할 수 있는 문답까지 준비하며

그의 정체를 파악해 보려 하지만 단서는 쉽사리 손에 들어오지 않는다.

더구나 수사를 진행할수록 테니스 클럽이 위치한 부유한 도시 몬테비스타의 사람들에게서

갖가지 미심쩍은 정황들을 확보한 아처는 수사의 끝이 결코 해피엔딩이 될 수 없음을 직감한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고백하자면, ‘3대 하드보일드 거장이라는 로스 맥도널드의 이름도,

또 그가 창조한 명탐정 캐릭터 루 아처도 제겐 거의 생소한 이름입니다.

물론 로스 맥도널드의 활약 시기가 20세기 중반이란 이유도 있지만,

대실 해밋, 레이먼드 챈들러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인물이란 걸 감안하면

생소함 자체가 꽤나 당혹스럽게 느껴졌습니다.

 

아무튼...

이야기의 출발점, 즉 아처가 피터라는 청년으로부터 받은 의뢰는 무척 심플합니다.

자신의 약혼녀를 빼앗은 마텔이라는 자칭 프랑스 출신 남자의 정체를 파악해달라는 것인데,

아처가 본격적으로 탐문을 시작하자마자 이야기의 볼륨감은 갑작스러울 정도로 확 커집니다.

 

마텔을 쫓는 또 다른 인물들이 나타나고, 마텔의 동행으로 보이는 수상한 커플이 등장합니다.

마텔을 기억하는 대학교수들은 그를 뛰어난 수재라고 칭송하는가 하면,

어떤 이는 그가 프랑스 인이 아니라 중남미 또는 스페인 계 밀입국자라고 진술합니다.

아처 입장에서 마텔은 그야말로 캐면 캘수록 새로운 면모가 드러나는 양파 같은 존재입니다.

그런 마텔이 7년 전 버지니아의 아버지의 자살 사건은 물론 거대한 도박판의 불법자금,

즉 블랙머니와도 연관돼있다고 확신한 아처는 이제 단순히 마텔의 정체 밝히기를 넘어

부유한 도시 몬테비스타에서 벌어졌던 미심쩍은 사건들에까지 관심을 확장시킵니다.

 

불과 350여 페이지에 불과한 작품이지만

등장하는 인물이나 사건만 놓고 보면 거의 600페이지 급 서사에 맞먹는 작품입니다.

수상한 프랑스 청년의 정체 밝히기에서 시작된 이야기는

아처의 광폭 탐문이 진행되면서 따라가기 어려울 정도로 급격하게 볼륨을 키웁니다.

그는 몬테비스타 곳곳은 물론 L.A, 라스베거스까지 빛의 속도로 오가며 수사를 펼칩니다.

당연히 그만큼 많은 인물들을 만날 수밖에 없고,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정보 역시 방대하면서도 어느 하나 허투루 다룰 것이 없습니다.

아처는 그 모든 정보와 인간관계들을 면밀하게 조사하고 추리합니다.

쉬어가는 코너가 거의 없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그는 오로지 만 열심히 합니다.

너무 빡빡하고 건조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말이죠.

그야말로 피도 눈물도 없는 냉정한 명탐정이자 지독한 워커홀릭이라고 할까요?

 

이런 식의 이야기 구성과 주인공 캐릭터 설정은

속도감과 긴장감을 고조시키고 독자들의 몰입도를 높이는 장점이 있는 반면,

동시에 독자의 이해력을 떨어뜨리고 피로도를 높이는 부작용을 낳을 수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과밀한 인구밀도의 문제를 지적하고 싶은데,

너무 많은 인물들이 등장하는데다 이야기는 과속으로 달리는 바람에

미처 그들의 과거와 현재, 애정과 증오 등을 제대로 파악하기가 어려웠습니다.

600페이지가 필요한 인물들에게 350페이지밖에 주어지지 않았으니

캐릭터, 감정, 관계 등 디테일한 부분이 설명될 여지가 별로 없었다는 생각입니다.

 

루 아처는 1949년에 출간된 움직이는 표적을 통해 탄생했다는데,

블랙머니1965년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루 아처 시리즈는 모두 18편이라고 하네요)

아무래도 하드보일드 캐릭터를 제대로 맛보려면 그의 첫 데뷔를 읽는 일이 필수인데,

최소한 시리즈의 중반쯤 되는 작품을 통해 처음 만나다 보니

루 아처의 진짜 매력을 맛봤다고는 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부유층들만의 테니스 클럽이 자리 잡은 부촌 몬테비스타에 대한 냉소적인 시선,

일말의 동정심도 없어 보이는 송곳 같은 탐문과 핵심만 짚어내는 간결한 말투,

이성과 논리로 중무장한 듯한 금욕적인 태도 등

레이먼드 챈들러의 명품 캐릭터 필립 말로를 연상시키는 대목들이 간간이 목격되긴 하지만

루 아처만의 특별함까지 찾아내지 못한 점은 무척 아쉬웠습니다.

 

황금가지에서 루 아처 시리즈를 계속 출간할지는 알 수 없지만,

혹 출간된다면 사건 자체보다 루 아처의 매력을 맛볼 수 있는 작품을 내줬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초기의 루 아처를 통해 그의 매력을 알게 된 뒤 블랙머니를 다시 읽는다면

그땐 지금과는 전혀 다른 느낌의 책읽기가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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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체온증 에를렌뒤르 형사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 지음, 김이선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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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의 별장에서 마리아라는 여성이 자살한 채 발견된다.

부검의는 자살로 판정하고 조서도 그렇게 적힌다. 사건 파일은 신속하게 정리된다.

경찰로서 할 일은 다 끝난 것처럼 보이는 이 지점에서 에를렌뒤르 형사는 수사를 시작한다.

자살로 죽은 여자는 사후 세계를 믿었다고 했다.

그녀에게는 영매에 대한 믿음, 의사인 남편, 그리고 막대한 유산이 있었다.

눈곱만큼도 타살의 흔적이 없지만, 그녀는 정말 자살한 것일까?

그녀는 왜 그토록 사후 세계에 집착했으며, 그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과거의 상처는 무엇일까?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과는 첫 만남이지만 인터넷 서점을 검색해보니

저체온증전에 이미 세 편의 작품이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습니다.

2006무덤의 침묵’, 2007저주받은 피’, 2009목소리등인데,

낯익은 제목이 있어 찾아보니 그 중 한 편이 먼지를 뒤집어쓴 채 제 책장 속에 갇혀있더군요.

 

저체온증은 극심한 냉기 속에 모든 신진대사가 둔화되고 혼수상태에 빠지는 상태.’입니다.

얼음대륙 아이슬란드의 싸한 이미지냉기로 인한 혼수상태를 이르는 저체온증의 조합은

첫 페이지를 읽기도 전에 어딘가 암울하고 불온한 분위기를 내뿜습니다.

실제로, 저체온증은 이 작품에서 전개되는 세 개의 비극을 상징하는 직간접적 코드입니다.

 

주인공인 레이캬비크 경찰 범죄수사과의 베테랑 형사 에를렌뒤르는

어릴 적 일명 화이트아웃이라 불리는 눈보라 속에서 동생을 잃은 뒤

홀로 살아남은 죄책감 때문에 평생을 심리적 저체온증 상태로 살아온 인물입니다.

그의 현재 삶 역시 고단하긴 마찬가지인데,

악의만 남긴 채 갈라선 아내, 술과 약물에 절어있는 자식들은 그에겐 진행형의 고통입니다.

 

호숫가 별장에서 목을 매 자살한 상태로 발견된 마리아는

유년기에 아버지의 죽음을 목격한 뒤부터 죽음과 사후 세계에 집착하며 살아왔고,

이후 거의 강박적으로 집착하던 어머니마저 암으로 사망한 뒤엔

삶 자체가 저체온증 혹은 혼수상태에 빠져있던 여자입니다.

 

또한, 30년이 지났지만 에를렌뒤르가 여전히 외면하지 못하는 몇몇 실종사건의 유족들은

그 긴 저체온증의 시간을 흘려보낸 뒤 이제 삶을 마감하기 일보직전에 있지만,

생사조차 확인하지 못한 실종된 자식들 때문에 죽음을 앞두고도 냉기에 휩싸여 있습니다.

 

작품 내내 차디찬 얼음물 속에 갇힌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어서인지

사실 저체온증은 마음 편히 읽을 수 있는 스릴러가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스릴러라기보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의 비극에 더 가깝다는 생각입니다.

동생을 잃은 에를렌뒤르, 부모를 잃은 마리아, 자식을 잃은 실종 유가족들의 이야기는

어디 한군데 밝은 곳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싸늘한 냉기만 내뿜고 있고,

그 냉기 속에는 오랜 시간 동안 봉인돼있던 추악한 비밀들이 은밀히 자리 잡고 있습니다.

 

명백한 자살로 판명된 마리아의 죽음을 비공식적으로 수사하기로 한 에를렌뒤르의 집념은

사실 진범 찾기보다 저체온증에 걸린 사람들을 위로하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어 보입니다.

물론 그는 사소한 단서에서 극적인 추리를 끌어내기도 하고,

탐문에서 얻어낸 진술 한마디를 바탕으로 추악한 비밀의 실체를 깨닫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이 분명 뛰어난 경찰소설인 건 맞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장르물 이상의 가슴 먹먹함이 밀려 들어와서

에를렌뒤르라는 인물이 평생을 겪어 온 저체온증에 전염된 듯한 느낌을 받게 됩니다.

 

분명 매력적인 작가의 매력적인 작품인 건 맞는데,

솔직히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다시 읽게 될지는 장담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읽는 내내 주먹을 꽉 쥐어야 하고 미간을 찡그려야 하는 책읽기 때문이랄까요?

또는 돌덩이를 얹은 것처럼 묵직하거나 얼음장 위에 누운 듯 초조해져야 하기 때문이랄까요?

그런 예감에 화답(?)하듯 해설에 실린 작가 인터뷰를 보면 내가 가장 관심 있는 인물은

상실을 맞닥뜨린 사람들, 시간 속에 얼어붙어버린 사람들.”이란 대목이 있습니다.

이 인터뷰를 보고 나니 더더욱 아르드날뒤르 인드리다손의 작품을 읽기가 주저됩니다.

 

물론 그리 멀지 않은 시간 안에 그의 작품이 문득 생각날 것은 분명한 일입니다.

이상하게도 이런 정서들은 묘한 중독성을 갖고 있어서

갑자기 마음 한 구석에서 툭 튀어나오곤 하기 때문입니다.

읽으면서 힘들고 불편하고, 읽고 나면 마음이 무거워지는 서사 속에

뭔가 진짜배기 같은 감정이 들어있기 때문일까요?

마음을 가볍게 하기 위해서라도 다음 책읽기는 지극히 속된 이야기를 고르고 싶은데,

어쩐지 그런 이야기를 읽을수록 에를렌뒤르가 생각날 것 같은 건 왜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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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묻어버린 것들
앨런 에스킨스 지음, 강동혁 옮김 / 들녘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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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탤버트는 알코올중독에 조울증 환자인 어머니와 자폐증이 있는 동생으로부터 탈출해

대학으로 도망쳤다는 죄책감을 안고 사는 대학생이다.

한 인물을 인터뷰해 전기문을 쓰는 과제를 위해 요양원을 찾아간 조는 마치 운명에 이끌리듯

30년 전 이웃집 소녀를 살해하고 시신을 불태운 잔인한 살인마, 칼 아이버슨을 만난다.

그는 암 말기로, 세 달 정도 남았을 임종을 앞두고 조에게 마지막 증언을 하고 싶다고 한다.

조는 칼이 털어놓는 과거의 이야기를 듣고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고,

이웃집의 매력적인 여대생 라일라와 함께 칼이 묻어두고 살았던 것들을 파헤치러 나선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베테랑 형사사건 변호사의 작가 데뷔작이자 각종 시상식을 휩쓴 독특한 이력의 작품입니다.

이야기 구조는 아주 심플합니다.

수업 과제 때문에 우연히 희대의 살인마를 인터뷰하게 된 대학생이

30년 전 사건의 진상을 밝혀내고 그의 원죄(冤罪)를 구명하는 이야기입니다.

신선하진 않아도 할리우드에서 아주 좋아할 법한 매력적인 플롯이죠.

 

조 탤버트는 소시민적 영웅이 되기 위한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습니다.

알코올중독에 걸린 어머니와 그녀 곁에서 기생하는 야비하고 폭력적인 애인,

그리고 자폐를 앓고 있는 사랑하는 동생 제러미 등 불행한 가족 관계가 그를 잠식합니다.

술집 기도로 등록금과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빠듯한 경제적 문제도 한몫 거듭니다.

작은 셋방에서 고된 삶을 영위하는 가난한 대학생 조의 유일한 무기라면

기도 생활로 단련된 격투(?) 능력과 타고난 착한 심성 정도랄까요?

다행이라면, 까칠한 연인이자 유능한 파트너인 매력녀 라일라가 조의 곁에 있다는 점입니다.

하지만 소시민적 영웅은 이 세 가지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랑받을 수 있는 게 사실입니다.

실제로 조는 뛰어난 추리능력이 아니라 착한 심성과 소소한 폭력으로 진실을 찾아갑니다.

터무니없는 정의감이 아니라 작은 단서 하나하나를 성실히 조사하는 과정을 통해

스스로 확신을 얻고 행동에 옮기면서 위험한 상황조차 마다하지 않습니다.

 

주인공을 비롯한 주요 인물들의 캐릭터도, 사건 자체도 모범적인 스릴러의 형태지만,

이 작품의 진짜 매력은 제목이 가리키듯 그들이 묻어버린 그 무엇에 있습니다.

, 라일라, 칼은 누구에게도 쉽사리 털어놓을 수 없는 그 무엇

오랫동안 각자의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 살아왔습니다.

형태도 다르고, 상처도 제각각이지만 그들이 묻어둔 것들은

하나같이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참혹한 기억들입니다.

사랑하던 할아버지와의 마지막 낚시에 관한 조의 기억,

한때 철없이 망나니처럼 지내던 시절의 라일라가 겪은 끔찍한 사건,

그리고 베트남 참전 당시 칼의 인생을 망가뜨렸던 한 소녀의 죽음 등이 그것입니다.

 

언뜻 보면 이들의 기억과 사건들은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와는 무관해 보일 수도 있지만,

한 걸음만 더 들어가서 생각해보면 바로 그 기억과 사건들이 오늘의 그들을 만든 것은 물론,

마치 나비효과처럼 그들을 한 자리에 모이게 만든 건지도 모른다는 추측에 도달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독자로 하여금 은연중에 각 인물의 무의식을 공유하게 만들었다고 할까요?

독자에 따라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왜 이런 제목을 붙였을까?”라고 반문하는 분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진범 찾기보다 그들이 묻어버린 그 무엇이 훨씬 더 매력적으로 읽힌 탓에

제목 자체에 100%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미덕을 정리하자면,

재미를 위해 선택한 독자도, 뭔가 있어 보이는 제목에 끌려 선택한 독자도 모두 만족할 만한

매력적인 서사와 캐릭터를 겸비한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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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담 - 서늘한 기척
고이케 마리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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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은 괴담이고, 부제는 서늘한 기척인데다

수록작 모두 분명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사람들이 등장하는 기이한 이야기들인데,

이상하게도 그들이 풍기는 분위기나 남겨 놓은 자취들은 대부분 온기가 도는 것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책을 읽는 내내 서늘함과 따뜻함을 함께 느낀 작품집입니다.

마치 머리 위에 아이스 팩을 얹은 채 뜨끈한 온천에 들어앉은 느낌이랄까요?

 

7편의 수록작에는 소년, 젊은 여자, 남동생, 아내, 남편, 친구 등

다양하고 애잔한 사연을 가진 이승 밖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그들 가운데 대부분은 딱히 어떤 목적이 있어서 현실의 누군가를 찾아온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일상에서 오래된 친구나 연인과 우연히 재회하듯 그렇게 무심히 나타납니다.

그들과 만나는 이승의 사람들 역시 동요나 공포가 아니라 담담한 태도로 그들을 맞이합니다.

그래도 그들의 만남에는 각기 특별한 사연들이 있기 마련이고,

작가는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 위에서 그 특별한 사연들을 감칠맛나게 하나씩 풀어갑니다.

그런 탓에, 좀 이상한 조어지만, 개인적으로는 따뜻한 호러라고 명명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물론, 진짜 괴담 같은, 그러니까 소름을 돋게 만드는 딴 세상 사람들도 등장하긴 합니다.

자신의 사랑을 받아주지 않고 죽어버린 여자의 새끼손가락을 갖고 있는 자도 있고,

자신이 죽은 뒤 친동생과 결혼한 아내 앞에 질투와 억울함이 담긴 눈빛으로 나타난 자도 있습니다.

작가가 작심하고 진짜 괴담을 쓴다면 정말 무서운 이야기가 나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일부 수록작들에서는 진정한 호러의 냄새가 물씬 풍기기도 합니다.

 

고이케 마리코는 다수의 문학상을 수상한 관록 있는 작가지만 작품으로는 처음 만났습니다.

미스터리뿐 아니라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집필했고 국내에도 여러 편이 소개된 작가인데,

작가의 이름은 낯익지만 이상하게도 낯익은 작품 제목이 거의 없습니다.

괴담 : 서늘한 기척의 묘한 매력 덕분에

기회가 된다면 한번쯤은 고이케 마리코에 대해 찬찬히 알아보고 싶어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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