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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닮은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9월
평점 :
국내 출간된 누쿠이 도쿠로의 12작품 중 이 작품까지 7편을 읽었으니
나름 팬이라고 자부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의 작품을 꽤 읽은 셈입니다.
물론 작품마다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리곤 했지만,
일단 신간 소식이 들리면 반드시 관심 목록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작가인 건 분명합니다.
그는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라는 낙인(?)이 확실히 찍힌 작가 중 한 사람인데,
‘나를 닮은 사람’은 그런 그의 정체성을 가장 돌직구처럼 드러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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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부터 불특정 대상을 목표로 한 작은 테러가 일본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범인들은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안면은커녕 접점이 전혀 없고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다.
자신들의 행동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없다.
다만 목숨을 던져 사회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자칭할 뿐이다.
사람들은 어느덧 그런 신종 테러를 ‘소규모 테러’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를 닮은 사람’은 소규모 테러와 직간접적으로 얽힌 열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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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규모 테러’는 이렇게 작동됩니다.
빈곤과 소외로 인해 사회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일본의 부당한 현실을 비난하고, 증오하고, 원망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 비난과 증오와 원망을 행동으로 옮길 것을 권유합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진 자들에게 그 ‘누군가’의 권유는
부당한 사회에 대한 유일하고 최종적인 복수를 약속하는 달콤한 계시로 들립니다.
그리고 그는 실천에 옮깁니다.
트럭을 몰고 인도로 돌진하거나, 시내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거나...
‘나를 닮은 사람’은 10명의 화자가 등장하는 10편의 연작집입니다.
각각 상이한 입장에서 테러와 연관된 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지만,
크게 보면 테러에 동조(지휘/행동)하는 자, 반대하는 자, 방관하는 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막판에 소규모 테러의 최초 기획자가 밝혀지긴 하지만,
누쿠이 도쿠로는 ‘누가 범인?’이란 미스터리 자체보다 독자로 하여금 10명의 이야기를 통해
동조-반대-방관이라는 상이한 경험을 겪어보게 하기 위해 이런 구성을 취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권유로 테러에 나선 자들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흙수저로 태어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자들,
거품경제의 후유증과 기업의 탐욕으로 인해 취업은커녕 연애나 결혼마저 뒷전으로 밀린 자들,
전업주부 아니면 윤락녀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는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 여자들...
이들은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소규모 테러를 저지른다.”,
또는 “우리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잘못됐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테러를 저지릅니다.
작은 규모지만 지속적인 희생자를 낸다면 언젠가는 사회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따뜻한 사회’, ‘누구나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는 사회’ 등
화자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현실의 불평등이나 부당함이 제거된 평등한 사회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비현실적이고 허황되고 이상적인 꿈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 안에서 사회적 부당함 때문에 빈곤층으로 전락한 인물 중에도
소규모 테러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든 일본이든 풍요와 빈곤, 금수저와 흙수저,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계층과 계급을 양극단으로 구분 짓는 사회적 장벽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라고 확신하고 분노하는 사람들 역시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누군가’의 권유를 기폭제로 삼아 분노를 폭발시키고자 하는 테러리스트는
그들의 이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맞닥뜨릴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평화와 안정과 신뢰와 행복이라는 설득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요?
그들에겐 비록 미미하더라도 단 한 번의 의미 있는 ‘테러’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까요?
추석 연휴를 전후로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우울한 소식이 더 많이 실렸습니다.
추석 보너스의 많고 적음, 쉴 수 있는 날의 많고 적음, 폭증하는 고독사 또는 자살,
연일 신기록을 세우는 해외여행자 수, 연휴지만 어디도 갈 곳 없는 빈곤층의 참담함 등
‘소규모 테러’를 위한 토대들이 견고하게 쌓여가는 뉴스들이 널려 있습니다.
‘나를 닮은 사람’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무렵, 새삼 이 뉴스들이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리고 당장 한국에서 ‘소규모 테러’가 벌어져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미스터리 자체로는 아쉬운 점들이 적지 않지만,
‘나를 닮은 사람’은 머지않은 미래에 벌어질 참극에 대한 조용한 경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좀더 강하게 어필하는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여느 작품보다 돌직구의 느낌이 강했던 건 바로 이 점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마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누쿠이 도쿠로지만,
‘나를 닮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평범한 소설이 아니라서
그 불편함의 무게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