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터의 요리사들
후카미도리 노와키 지음, 권영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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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터의 요리사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독특함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일본의 젊은 여성 작가가 일본인은 단 한 명도 안 나오는 전쟁 소설을 썼다는 점,

심지어 그 전쟁이 70여 년 전에 벌어진 2차 세계대전이란 점,

그리고 주인공들은 용맹한 전투병도, 카리스마 넘치는 장교도 아닌 홀대 받는 조리병인데다

장르는 전쟁터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사건의 진실을 찾는 일상 미스터리라는 점 등

어느 하나 일반적인 상식과는 거리가 먼 특징들을 지니고 있습니다.

 

프롤로그와 에필로그를 제외하고 모두 5개의 챕터로 이뤄져있는데,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된 프랑스를 비롯, 네덜란드와 독일 등

여러 곳의 전선을 이동하는 중에 벌어진 5개의 사건을 다루고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공수부대의 낙하산을 은밀히 모으는 병사의 비밀,

보급 창고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무려 600상자 분량의 분말 달걀의 행방,

네덜란드 민가에서 벌어진 장년 부부와 정체불명의 민간인의 괴이한 죽음,

한밤중의 설원을 떠도는 유령 병사의 정체,

그리고 반역죄의 위험을 무릅쓰고 벌이는 기가 막힌 탈주극 등이 그것입니다.

 

사실, ‘가혹한 전장에서 사랑스러운 조리병들이 선사하는 일상 미스터리라는,

이 작품을 함축한 한 줄 카피를 본 순간 제일 먼저 든 느낌은 이질감이었습니다.

마치 궁합이 안 맞는 음식을 한꺼번에 입에 넣은 듯한 식감이랄까요?

피비린내 넘치는 전쟁터와는 한참 거리가 멀어 보이는 후방의 조리병들이

희극에 가까운 미스터리 쇼를 벌이는 게 아닐까, 하는 막연한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잘 만들어졌거나 여운이 남는 일상 미스터리라면 꽤 좋아하는 독자 가운데 하나지만,

전쟁 + 조리병 + 일상 미스터리 = 비현실적인 희극으로밖에 여겨지지 않았습니다.

 

실제로 첫 챕터를 보곤 저의 예상이 크게 빗나가지 않았구나, 라고 생각을 했는데,

그것이 지나치게 성급한 예단이었음을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게 되면서

이 작품이 일본에서 꽤 화제가 됐던 것이 괜한 허세는 아니었음도 흔쾌히 인정하게 됩니다.

작가는 풋내 나는 신병 팀 콜이 전쟁터에서 희로애락을 겪으며 성장하는 과정에 맞춰

그가 맞닥뜨리는 사건도 점차 묵직하고 큰 규모로 키워간 것입니다.

 

조리병이지만 유사시엔 낙하산으로 적진에 투입되어 전투에 참가해야 하는 공수부대원 콜은

덩치만 큰 어린애라고 키드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지만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면서 어쩔 수 없이 전쟁의 광기에 조금씩 전염됩니다.

타고난 선함과 후천적으로 습득한 광기 사이에서 콜은 갈등하고, 괴로워하면서 성장합니다.

다행히도 콜 곁에는 에드라는 소중한 멘토가 존재했고,

콜은 에드와 함께 전방 혹은 후방에서 벌어진 미스터리한 사건을 함께 해결하면서

인간적으로 성장하는 것은 물론 광기에 함몰되는 비극도 면하게 됩니다.

 

소소한 웃음을 자아내는 초반의 미스터리와 달리

뒤로 갈수록 사건은 일상 미스터리의 범주를 벗어나 명백한 전쟁 미스터리로 진화합니다.

거기엔, 살아서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절실한 욕망이 깔려있기도 하고,

전쟁의 양상에 따라 이웃에서 원수로 탈바꿈하는 민간인들의 비극이 개입되기도 하고,

적 아니면 아군이라는 흑백논리만 존재하는 전쟁터의 아이러니가 빚어낸 참극도 끼어듭니다.

그래서인지 중반 이후의 콜은 조리병이라기보다 미군 공수부대원의 느낌이 더 강해지는데,

이는 가혹한 전장에서 사랑스러운 조리병들이 선사하는 일상 미스터리를 기대한 독자에겐

다소 아쉬움을 느끼게 만들 수도 있는 대목입니다.

출판사 소개글 중에 요리사 버전의 밴드 오브 브라더스란 문구가 있는데,

어쩌면 이 문구가 이 작품을 좀더 적확하게 함축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복잡하거나 대단한 반전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전쟁터라는 공간이 주는 긴장감이 미스터리의 아쉬운 부분을 충분히 채워주고 있어서

꽤 빠른 속도로 페이지를 넘길 수 있는 작품입니다.

전쟁 이야기를 좋아하면서 색다른 미스터리도 함께 맛보고 싶은 독자라면

주말 한나절쯤 투자해서 팀 콜과 그의 동료들이 벌이는 독특한 이야기를 만끽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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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나이트 다이버
덴도 아라타 지음, 송태욱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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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대지진 당시 부모와 형을 잃은 세나 슈사쿠는 한 달에 한 번 꼴로 금지된 다이빙을 합니다.

그는 보름달이 뜬 밤, 방사능 오염 우려 때문에 출입이 금지된 바다에 몰래 들어가

대지진 당시 휩쓸려간 소소한 유품들을 건져 올립니다.

마을이 통째로 사라지고 소중한 가족을 잃은 유족들의 비밀스런 부탁을 받은 슈사쿠는

어두운 밤바다로 들어갈 때마다 복잡한 심경에 휩싸이곤 합니다.

돈을 받고 하는 일이지만, 그에게 있어 다이빙은 또 다른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 또는 슬픔을 씻어내는 슈사쿠만의 엄중한 의식인 것입니다.

그런 그에게 남편의 유품을 찾지 말아달라는 여인이 나타납니다.

슈사쿠는 그녀로 인해 욕망, 갈등, 회한 등 크나큰 심경의 변화를 겪게 됩니다.

 

● ● ●

 

동일본 대지진이 일어난 지 벌써 6년 반이 넘게 지났습니다.

그동안 몇몇 일본 소설 속에 그날의 참사의 여파가 조심스럽고 짤막하게 등장하곤 했지만,

문나이트 다이버, 여전히 조심스럽고 신중하긴 하지만,

2011311일의 비극, 그리고 그날 이후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그린 작품입니다.

 

성격은 달라도, 세월호 참사를 겪은 한국 독자 입장에서 이 작품을 읽는 일은

여러 가지로 힘들기도 하고, 과도하게 감정이 이입될 수밖에 없습니다.

특히 참사의 흔적들로 가득한 밤의 바다 속을 유영하는 슈사쿠의 모습은

목숨을 걸고 진도 앞바다를 드나들었던 잠수사들을 떠올리게 합니다.

 

문나이트 다이버는 살아남은 자의 슬픔과 죄책감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슈사쿠는 허리 통증 때문에 대지진 당일 바닷가에 나가지 않아 살아남았지만,

하필 그때 고향에 내려왔던 형이 그를 대신해 쓰나미에 휩쓸리고 말았습니다.

부모와 형의 사체를 직접 확인한 이후 슈사쿠의 삶은 온통 회색으로 물들었습니다.

삶 자체가 망가지진 않았지만, 더는 웃을 수 없는, 웃어선 안 되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반면, 슈사쿠의 아내는 그가 살아 있어줘서 고맙다고 말합니다.

신 따위는 없다는 슈사쿠에게 그녀는 신이 있기에 당신이 살아있는 것이라고 항변합니다.

슈사쿠는 다이빙이 거듭될수록 점점 더 삶과 욕망에 집착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아내의 항변에 담긴 이율배반적인 감정이 때론 이해되기도, 때론 원망스럽기도 합니다.

 

슈사쿠에게 유품 회수를 의뢰한 유족들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그들은 왜 자신이 아니라 가족과 지인들이 죽었는지, 이렇게 살아남은 것 자체가 죄는 아닌지

적잖은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혼란 속에 갇혀 살아가고 있습니다.

슈사쿠에게 남편의 유품을 찾지 말아달라는 이상한 부탁을 한 여인은

남편의 친구로부터 프로포즈를 받은 일 때문에 마음을 다잡지 못하고 방황합니다.

한편으론,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남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자신의 미련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제대로 정의내리지 못합니다.

 

이렇듯 덴도 아라타는 살아남은 여러 인물들을 통해 추억, 미련, 이별, 정리, 새 출발 등

삶과 죽음을 대하는 다양한 태도와 감정들을 담담하게 묘사합니다.

그들 하나하나의 죄책감과 슬픔을 깊고 묵직하게 짚어가면서도

덴도 아라타는 그 감정들의 원천은 죽은 자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 때문이라고,

그러니 힘들어도 조금씩 지금의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슈사쿠를 통해 이야기합니다.

 

태양이 하늘 높이 떠있을 때 잠수하고 싶습니다.

전에는 두려운 마음이 있었지만 지금이라면 제대로 지켜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여기서는 아마 사람이 웃고 있었을 것이다, 서로 사랑했을 것이다,

행복한 시간을 보냈을 것이다, 라고 생각하며 잠수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단 하나, 영원히 자신의 추억이 되는 것을 가져오고 싶습니다.”

 

동일본 대지진은 작가라면 누구나 도전하고 싶은 소재지만,

동시에, 누구도 쉽게 쓸 수 없는 소재이기도 합니다.

그런 면에서, 동일본 대지진을 다룬 이야기를

다른 작가가 아닌 덴도 아라타의 문장으로 만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불과 두세 작품밖에 읽어보지 못했지만

내면 깊은 곳을 진정성 있게 그려내는 글 솜씨에 충분히 반했던 바 있고,

문나이트 다이버는 그런 그의 솜씨가 유감없이 발휘된 매력적인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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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실살인게임 2.0 밀실살인게임 2
우타노 쇼고 지음, 김은모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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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시리즈의 1편인 밀실살인게임 : 왕수비차잡기의 엔딩은

한참 재미있는 드라마가 다음 이 시간에라는 자막과 함께 끝날 때처럼

독자들의 분노(?)를 사기에 딱 좋은 엔딩이었습니다.

오로지 트릭 게임을 위해 태연히 살인을 저지르는 5명의 살인마들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까?’에 잔뜩 촉각이 곤두서있는데,

허망하게 ‘To be continued’라며 이야기가 끝나버리기 때문입니다.

그 무렵엔 꽤나 뒷이야기가 궁금해서 얼른 후속편을 읽으려 했지만,

버전 2.0으로 업그레이드 된 밀실살인게임과 재회하는데 꽤 오랜 시간이 걸리고 말았습니다.

 

교수라는 표면적 직업과 어수룩한 태도로 늘 공격만 받는 반도젠,

가장 예리한 캐릭터로 보이지만 늘 허방만 짚는 aXe,

다혈질에 험악한 말투로 우격다짐 식 추리만 거듭하는 잔갸,

차분하고 이성적이지만 늘 마지막 결정타 한 방을 놓치고 마는 주인공 격인 두광인,

그리고, 말없이 남들의 추리를 듣다가 항상 마지막 정답을 내놓는 천재 044APD

다섯 명의 게이머들은 1편과 마찬가지로 각자 고난이도의 문제를 준비합니다.

문제는 머릿속에서 자아낸 문제가 아니라, 현실에서 자신이 직접 저지른 살인입니다.

, 평소 자신이 연구하고 설계해온 트릭을 이용하여 실제로 살인을 저지른 뒤

그것을 다른 멤버들이 풀도록 하는 것이 이 모임의 실체인 것입니다.

 

세상에 없을 살인마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한 그들을 보니 반갑기도(?) 했습니다.

그들 사이엔 예전과 다름없이 노골적인 적대감과 경쟁심이 만연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들은 과거의 이야기, 1편의 엔딩에 관해서는 전혀 입에 담지 않습니다.

파국을 목전에 뒀던 그 긴박한 순간에 관해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고

태연히 새 게임에만 몰두하며 예의 비난과 욕설, 냉소와 무시만 주고받을 뿐입니다.

그리고 ? 이거 확실히 이상한데?’라는 의문이 구체화될 때쯤

우타노 쇼고는 아주 조금씩, 그다운 서술과 구성을 통해 정보를 흘려주면서

살인마들의 과거 이야기와 현재의 위화감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시켜줍니다.

 

1편에 이어 이번에도 눈의 밀실, 이중밀실, 알리바이 트릭 등이 등장하는데,

현실에서는 좀처럼 실용성(?)이 없어 보이는 번거롭고 복잡한 설정들이지만,

소설 속에서 그려지는 완벽해 보이는 밀실트릭은

미스터리 독자들에겐 매력적으로 읽힐 수밖에 없는 묘한 중독성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우타노 쇼고에게 두 번째 본격미스터리 대상을 안겨줬지만

개인적으로는 1편인 왕수비차잡기가 좀더 매력적이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물론 좀 이야기가 거칠기도 하고, 트릭의 수준도 돌직구 스타일이긴 했지만,

재미나 긴장감, 캐릭터 간의 케미 등 여러 면에서 좀더 쫀쫀함이 강했기 때문입니다.

2편에서 다뤄진 사건과 트릭들은 상대적으로 사이즈도 커지고 잔혹함도 배가됐지만

그만큼 빈틈도 많아 보이고, 어딘가 작위적인 느낌도 커진 게 사실입니다.

 

충격적이긴 해도 2편의 엔딩은 1편에 비해 후속작에 대한 호기심을 이끌어내진 못했습니다.

그래도 우타노 쇼고가 시리즈 3편인 밀실살인게임 마니악스에서

이 희대의 살인마들을 어떻게 그려낼지, 어떤 밀실트릭을 들고 나올지,

또 그들에게 어떤 엔딩을 부여할지 사뭇 궁금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잠시 잊고 있다가 맛깔난 간식이 생각나면 다시 한 번 이들의 살인게임을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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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닮은 사람
누쿠이 도쿠로 지음, 김은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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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출간된 누쿠이 도쿠로의 12작품 중 이 작품까지 7편을 읽었으니

나름 팬이라고 자부해도 이상하지 않을 만큼 그의 작품을 꽤 읽은 셈입니다.

물론 작품마다 어느 정도 호불호가 갈리곤 했지만,

일단 신간 소식이 들리면 반드시 관심 목록에 올려야 직성이 풀리는 작가인 건 분명합니다.

그는 사회파 미스터리 작가라는 낙인(?)이 확실히 찍힌 작가 중 한 사람인데,

나를 닮은 사람은 그런 그의 정체성을 가장 돌직구처럼 드러내고 있는 작품입니다.

 

● ● ●

 

언젠가부터 불특정 대상을 목표로 한 작은 테러가 일본 각지에서 일어나기 시작한다.

범인들은 빈곤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안면은커녕 접점이 전혀 없고 조직화되어 있지도 않다.

자신들의 행동이 사회를 바꿀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없다.

다만 목숨을 던져 사회에 저항하는 레지스탕스를 자칭할 뿐이다.

사람들은 어느덧 그런 신종 테러를 소규모 테러라고 부르게 되었다.

나를 닮은 사람은 소규모 테러와 직간접적으로 얽힌 열 사람의 이야기를 다룬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소규모 테러는 이렇게 작동됩니다.

빈곤과 소외로 인해 사회의 밑바닥까지 추락한 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일본의 부당한 현실을 비난하고, 증오하고, 원망합니다.

그때 누군가가 그 비난과 증오와 원망을 행동으로 옮길 것을 권유합니다.

더 이상 잃을 게 없어진 자들에게 그 누군가의 권유는

부당한 사회에 대한 유일하고 최종적인 복수를 약속하는 달콤한 계시로 들립니다.

그리고 그는 실천에 옮깁니다.

트럭을 몰고 인도로 돌진하거나, 시내 한복판에서 칼을 휘두르거나...

 

나를 닮은 사람10명의 화자가 등장하는 10편의 연작집입니다.

각각 상이한 입장에서 테러와 연관된 자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고 있지만,

크게 보면 테러에 동조(지휘/행동)하는 자, 반대하는 자, 방관하는 자로 나눌 수 있습니다.

막판에 소규모 테러의 최초 기획자가 밝혀지긴 하지만,

누쿠이 도쿠로는 누가 범인?’이란 미스터리 자체보다 독자로 하여금 10명의 이야기를 통해

동조-반대-방관이라는 상이한 경험을 겪어보게 하기 위해 이런 구성을 취한 것 같습니다.

 

누군가의 권유로 테러에 나선 자들은 한국 독자들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흙수저로 태어나 아무리 발버둥 쳐도 미래를 꿈꿀 수 없는 자들,

거품경제의 후유증과 기업의 탐욕으로 인해 취업은커녕 연애나 결혼마저 뒷전으로 밀린 자들,

전업주부 아니면 윤락녀만이 생존을 보장할 수 있다는 비참한 현실에 직면한 여자들...

 

이들은 누구도 행복해질 수 없는 사회에 저항하기 위해 소규모 테러를 저지른다.”,

또는 우리 잘못이 아니라 사회가 잘못됐다.”는 슬로건을 내걸고 테러를 저지릅니다.

작은 규모지만 지속적인 희생자를 낸다면 언젠가는 사회가 관심을 가질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따뜻한 사회’, ‘누구나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는 사회

화자마다 조금씩 다르긴 해도 현실의 불평등이나 부당함이 제거된 평등한 사회입니다.

 

사실, 이쯤 되면 비현실적이고 허황되고 이상적인 꿈으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작품 안에서 사회적 부당함 때문에 빈곤층으로 전락한 인물 중에도

소규모 테러의 실현 불가능한 이상을 지적하고 비판하는 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한국이든 일본이든 풍요와 빈곤, 금수저와 흙수저, 정규직과 비정규직 등

계층과 계급을 양극단으로 구분 짓는 사회적 장벽은 갈수록 높아지고 있고,

그 과정에서 우리 잘못이 아니라 사회의 잘못이라고 확신하고 분노하는 사람들 역시

과거에 비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누군가의 권유를 기폭제로 삼아 분노를 폭발시키고자 하는 테러리스트는

그들의 이상이 얼마나 비현실적이고 허황된 것인지와는 상관없이,

언제 어디서든, 누구라도 맞닥뜨릴 수 있는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일지도 모릅니다.

그런 그들에게, 평화와 안정과 신뢰와 행복이라는 설득이 과연 설득력이 있을까요?

그들에겐 비록 미미하더라도 단 한 번의 의미 있는 테러가 더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을까요?

 

추석 연휴를 전후로 신문이든 인터넷이든 우울한 소식이 더 많이 실렸습니다.

추석 보너스의 많고 적음, 쉴 수 있는 날의 많고 적음, 폭증하는 고독사 또는 자살,

연일 신기록을 세우는 해외여행자 수, 연휴지만 어디도 갈 곳 없는 빈곤층의 참담함 등

소규모 테러를 위한 토대들이 견고하게 쌓여가는 뉴스들이 널려 있습니다.

나를 닮은 사람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무렵, 새삼 이 뉴스들이 더욱 도드라져 보입니다.

그리고 당장 한국에서 소규모 테러가 벌어져도 전혀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도 함께 듭니다.

 

미스터리 자체로는 아쉬운 점들이 적지 않지만,

나를 닮은 사람은 머지않은 미래에 벌어질 참극에 대한 조용한 경고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독자들에게 좀더 강하게 어필하는 매력을 지닌 작품입니다.

누쿠이 도쿠로의 여느 작품보다 돌직구의 느낌이 강했던 건 바로 이 점 때문이었습니다.

언제나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때마다 마음을 불편하게 만드는 누쿠이 도쿠로지만,

나를 닮은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잊히는 평범한 소설이 아니라서

그 불편함의 무게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만 같은 느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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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용돌이
전건우 지음 / 엘릭시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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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건우는 한국 추리스릴러 단편선 5’(황금가지)의 수록작 해무를 통해 만난 적이 있습니다.

공교롭게도 소용돌이해무모두 25년 전에 벌어진 사건을 소재로 하고 있으며,

그 시절 특별했던 연인 혹은 친구의 부고를 들은 주인공이

불편한 심정으로 장례식에 참석했다가 큰 위기를 겪는 이야기라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해무가 제목 그대로 바다가 뿜어낸 안개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았다면,

소용돌이는 저수지, 태풍, 익사 등 물의 공포를 배경으로 삼고 있습니다.

인간으로서 어찌해볼 수 없는 자연의 힘 또는 초자연적인 존재가

극단적인 공포와 죽음을 야기한다는 점에서도 두 작품은 닮은꼴로 읽히는 작품들입니다.

 

줄거리를 정리하기 전에 혹시나 하고 출판사의 소개글을 보니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연쇄살인범(?)의 정체에 대해 전혀 언급을 하고 있지 않아서

서평을 쓰는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곤란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언급하자니 스포일러 같고, 안 하자니 두루뭉술한 이야기 외엔 할 말이 없기 때문입니다.

결과적으론 스포일러가 될지도 모르겠지만 최대한 에둘러 요약하자면,

이 작품은 스티븐 킹의 샤이닝과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를 연상시키는 호러물입니다.

초자연적인 존재가 25년의 간격을 두고 현실로 소환되는가 하면,

어떤 과학적 논리로도 설명할 수 없는 기이한 방법으로 연쇄살인을 일으킵니다.

 

초등학교 6학년 무렵, 광기에 휩싸인 연쇄살인을 초래했던 광선리의 다섯 소년소녀는

25년이 지나 불혹을 눈앞에 둔 시점에 또다시 비현실적인 연쇄살인사건과 마주합니다.

일명 독수리 오형제라 자칭하던 그들 가운데 한 명의 부고로 인해 광선리에 모인 나머지 넷은

마을 노인들마저 접근하기를 꺼려하는 귀기 어린 산속 저수지 솥뚜껑에서 시작됐던 악몽이

25년 만에 또다시 부활했음을 깨닫습니다.

모두가 헛소리라 치부하는 초자연적인 현상을 설명할 길 없기 때문에,

, 애초 이 참극을 초래한 것이 치기어린 13살 시절의 자신들이란 죄책감 때문에

그들은 무력감만 남은 상태에서도 오로지 자신들의 힘만으로 사건을 해결하려 합니다.

줄기차게 쏟아지는 장맛비 속에 희생자는 쉴 새 없이 발견되고,

역대급 태풍 예보 속에 인력으론 어쩔 수 없는 대규모 참극이 광선리를 무너뜨리고 맙니다.

 

5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이지만 크게 보면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위기에 빠진 친구를 구하겠다는 다섯 소년소녀의 순수한 염원이 야기한 통제불능의 참극,

봉인됐던 참극의 25년만의 부활과 그것을 재봉인하려는 네 명의 중년남녀의 목숨을 건 도전,

그리고 막판에 밝혀지는 참극의 정체와 연쇄살인의 진실이 그것입니다.

하지만 호러와 미스터리, 성장 스토리, 도로건설을 둘러싼 마을의 분란 등이 믹스된 서사는

심플한 구조를 무색하게 할 만큼 복잡하고 다양한 이야기를 독자에게 들려줍니다.

 

이런 작품일수록 비현실과 현실, 즉 호러와 미스터리의 결합이 얼마나 매끄럽냐가 핵심인데,

그 점에 관해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나뉠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호러를 현실적으로 설명하고 해결하려 한 작가의 의도 때문에

오히려 막판 몰입을 방해받았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스티븐 킹의 샤이닝이나 미쓰다 신조의 노조키메는 두 장르가 잘 결합된 작품이면서도

아무리 논리적인 결론이 도출되더라도 결국 호러는 호러라는 점을 견지한데 반해,

소용돌이는 약간은 무리한 방식으로 현실적인 미스터리 해법을 제시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이야기의 시작은 영문을 알 수 없는 호러인데,

엔딩은 영문을 알 수 없던 것을 논리적으로 설명한 미스터리라고 할까요?

 

클라이맥스에서 엔딩에 이르는 대목은 독자에 따라 평이 극단적일 수 있겠지만,

한 눈에 선명하게 들어오는 캐릭터의 매력이라든가 속도와 강약이 매끄럽게 조절된 문장들은

대부분의 독자에게 호평을 받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적잖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군더더기는 거의 보이지 않았고,

공포와 참혹함 사이로 군데군데 쉬어갈 수 있는 대목도 적절히 배치돼있어서

이쪽 장르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라도 불편하지 않은 책읽기를 경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단편과 장편에 걸쳐 그만의 매력을 확인한데다,

앞으로도 계속 어두운 이야기에 매진하겠다.”는 자신감 넘치는 후기까지 보고나니

전건우의 후속작에 대한 기대감이 벌써부터 꿈틀거리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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