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빼미는 밤에만 사냥한다 미아&뭉크 시리즈
사무엘 비외르크 지음, 이은정 옮김 / 황소자리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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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빼미 깃털, 백합꽃, 오각형으로 배치된 양초 등

다분히 주술적인 분위기로 장식된 공터에서 17살 소녀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미아와 뭉크를 비롯한 수사팀은 소녀가 기거하던 보육원을 샅샅이 뒤지고 탐문하지만

어디에서도 단서는 나오지 않고 속절없이 시간만 흘러갈 뿐입니다.

그러던 중, 피살자가 감금된 상태에서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찍힌 동영상이 제보되고,

그것이 특별한 목적을 갖고 제작된 것이란 사실이 드러나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탑니다.

 

● ● ●

 

나는 혼자 여행 중입니다에 이은 미아&뭉크 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단서를 통해 사건의 이면을 꿰뚫어 보는 특별한 직관력의 소유자인 여형사 미아 크뤼거와

인심 좋은 옆집 아저씨 같은 베테랑 형사 홀거 뭉크 콤비가

6살 소녀들의 연쇄피살사건을 다뤘던 전작에 이어 다시 한 번 엽기적인 사건과 마주합니다.

 

전작도 그랬지만 이번 작품에서도 어딘가 으스스한 북유럽의 주술적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피살자들은 제의를 위한 희생물처럼 장식된 채 발견되고,

(나중에 밝혀지는) 범인의 의도는 상식과는 거리가 먼 판타지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분위기는 주인공인 여형사 미아 크뤼거의 두 가지 캐릭터, ,

쌍둥이의 죽음의 트라우마 때문에 약물에 중독된 채 자살을 꿈꾸는 불행한 여자이면서,

동시에, 직감과 예감에 의해 진실을 밝히는 뛰어난 형사라는 면모와 잘 맞아 떨어져서

독자로 하여금 살짝 몽환적인 분위기 속에서의 책읽기를 경험하게 만듭니다.

 

하지만, 작가의 그런 시도가 전작에서는 나름 설득력과 개연성을 얻는데 성공했지만,

올빼미는~’에서는 좀 지나치게 설정된 나머지 부작용이 더 커졌다는 생각입니다.

뭐랄까.. 마치 전작보다 센 설정이 필요했던 작가의 욕심이 좀 과해졌다고 할까요?

문제는 그 과욕 때문에 미스터리의 서사가 힘을 얻지 못했다는 생각입니다.

말하자면, 작가가 범인을 워낙 다른 차원의 세계에 사는 인물로 설정한 탓에

탐문과 추리 등 주인공의 순수한 노력만으로는 진실을 찾을 방법이 요원해진 것입니다.

, 우연 또는 갑작스런 깨달음 같은 변수 없이는 미스터리를 풀기가 힘들어진다는 뜻입니다.

 

직감과 예감을 통해 진실을 밝히는 미아의 능력은 이번 작품에선 거의 발휘되지 않습니다.

뭉크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 역시 계속 헛발질만 할 뿐 좀처럼 수사를 진전시키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잇단 외부의 도움이 그들 앞에 선물처럼 나타납니다.

살해되기 전 피살자가 고문당하는 모습이 담긴 동영상,

피살자와 똑같은 방식으로 처리된개와 고양이의 사진,

임종 직전 자신의 오랜 죄를 고백하는 의문의 노인 등

어느 하나라도 없었다면 사건을 미궁에 빠뜨릴 만한 중요한 제보와 인물들이 속속 등장합니다.

 

이 과정에서 미아와 뭉크는 너무 무력합니다.

미아는 여전히 트라우마에 갇힌 채 동어반복처럼 괴로움을 호소하면서

꽤 많은 장면에서 (좀 짜증이 날 정도로 자주) 술에 취한 모습을 보여줍니다.

뭉크는 이혼한 아내의 재혼 문제 때문에 얻은 두통에 시달리며 판단력이 흐려집니다.

더구나, 조연들이 겪는 다사다난한 갈등들이 적잖은 분량으로 묘사되는데,

문제는 그 갈등들이 전부 메인 사건과 이런저런 식으로 연결된다는 점입니다.

물론 작가는 나름의 방식으로 필연성을 설명하고 있지만,

하필 사건을 맡은 형사들의 딸이나 약혼녀가 사건에 연루된다는 것은 좀 심한 억지입니다.

 

정리하자면, 주인공들은 트라우마와 두통 때문에 고생하는 모습이 더 많이 보이고,

범인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혼자 놀고있으며,

진실 찾기는 생각지 못한 우연과 선물처럼 날아든 제보에 의해서 전개되고 있습니다.

 

작가는 마지막 페이지에서 또다시 미아의 쌍둥이 트라우마에 관한 떡밥을 흘립니다.

다음 편의 주된 이야기가 아무래도 또 그쪽으로 전개될 것 같은데,

그렇다면 전 미아&뭉크 시리즈는 이 작품에서 굿바이를 해야 될 것 같습니다.

약과 술에 취해 자살만 꿈꾸는 주인공을 더는 바라보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인공의 트라우마가 작품의 서사와 잘 녹아든다면 그것 자체로 매력적인 설정이지만,

미아의 트라우마는 왠지 설정을 위한 설정처럼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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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의 마녀 엘릭시르 미스터리 책장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박춘상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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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에게 한 실업가가 찾아온다.

그는 자신이 곧 살해당할 것 같다며, 자신이 죽은 후의 처리를 햐쿠타니에게 의뢰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는 실제로 살해당하고, 범인으로 세 번째 부인인 아야코가 지목된다.

햐쿠타니 센이치로는 그를 독살했다고 자백한 아야코의 변호를 위해 법정에 선다.

승산이 전혀 없어 보이는 이 사건의 행방은?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약간 상세한 내용이 포함돼있습니다. 아직 안 읽으신 분은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파계재판’, ‘문신살인사건’, ‘대낮의 사각에 이은 다카기 아키미쓰와의 네 번째 만남입니다.

패전 후부터 1960년대 사이에 전성기를 구가했던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읽은 작품마다 묘한 매력들이 있어서 신간이 나오면 어김없이 찾아 읽게 되는 작가입니다.

특히 이 작품은 파계재판에 이은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라서 더욱 관심이 갔는데,

넉넉한 중편 정도의 분량이라, 장편을 기대했던 저로서는 좀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이야기의 큰 얼개는 파계재판과 유사합니다.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를 소재로 한 점,

법정에 선 피고인의 누명을 벗겨주는 히어로 변호사 스토리라는 점,

그리고, 변호에 그치지 않고 진범을 공개 지목하여 법정 안을 충격에 빠뜨린다는 점입니다.

 

이런 구조의 이야기에서 필수적인 전제 조건은 유력한 범인으로 추정되는 피고인입니다.

단서가 됐든 정황이 됐든 목격담이 됐든 그 피고인은 명백한 진범으로 여겨져야 하고,

그 추정이 단단할수록 원죄를 벗기려는 주인공 변호사의 이야기가 쫀쫀해지기 때문입니다.

법정의 마녀의 피고인 아야코는 그런 면에서 꽤나 단단한 추정 속에 갇힌 인물입니다.

피살자와 함께 있는 현장에서 발견됐고, 독살의 증거인 청산가리가 그녀 방에서 발견됐으며,

피살자의 가족들이 하나같이 그녀를 동기가 분명한 범인으로 지목한 것은 물론

본인 스스로 경찰에서 범행을 자백했기 때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애초 생전의 피살자로부터 사후 처리 의뢰를 받은 주인공 햐쿠타니가

유력한 범인으로 지목된 피고인을 변호한다는 점입니다.

, 햐쿠타니는 피살자와 함께 있던 피고인을 제일 먼저 목격한데다

그녀가 사인을 병사로 은폐하려 한 것까지 지켜본 탓에

누구보다 피고인이 범인이라는 심증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하지만 햐쿠타니는 어딘가 기분 나쁜 분위기를 발산하는 피살자 가족들의 태도가 수상했고,

무엇보다, 피고인에 대한 탐문을 통해 원죄의 가능성을 확인하곤 승산 없는 변호를 결심합니다.

 

1963년의 작품이라 그런지 파계재판’(1961)과 마찬가지로

단선적이고 심플하고, 정직한 돌직구 같은 법정 미스터리 구성을 갖고 있습니다.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기 위한 햐쿠타니의 노력은 집요하고 끈질긴 탐문이 거의 전부이고,

그 과정에서 얻은 예기치 못한 수확덕분에 피고인의 누명을 벗기는 것은 물론

진범의 정체와 살해 동기까지 폭로할 수 있게 됩니다.

 

그 때문에 법정 장면과 탐문 장면이 대부분인 이야기는 단조롭게 보일 수밖에 없는데,

대신 작가는 피살자와 피고인, 그리고 그들의 수상한 가족들 쪽에 진한 양념을 뿌려둡니다.

, 두 명의 전처와 그 소생들, 죽은 형의 딸, 예비사위로 점찍은 부하직원 등

적대적 감정들로 얽히고설킨 복잡한 가계도를 설정함으로써 법정물의 단조로움을 극복합니다.

악의에 찬 면면들을 보면 누구라도 범인이 될 만한 동기를 갖고 있는 것 같고,

독살이란 방법 때문에 누구도 완벽한 알리바이를 주장할 수 없는 상황입니다.

결국 물적 단서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정서적 단서가 더 중요해진 탓에

햐쿠타니의 조사는 좀처럼 쉽게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인공 햐쿠타니 만큼 눈길을 끄는 두 명의 캐릭터가 있는데,

한 명은 특유의 을 발휘하여 햐쿠타니의 수사에 큰 도움을 주는 그의 아내 아키코이고,

또 한 명은, ‘파계재판에 이어 햐쿠타니와 재대결하게 된 맹렬 검사 아마노입니다.

햐쿠타니가 미처 상상하지 못한 대목에서 비범한 직감을 발휘하는 아키코는

매력적인 연상녀에 신비함까지 풍기는 캐릭터라 무척 기대가 됐고,

아마노 검사는 파계재판에서 햐쿠타니에게 워낙 큰 역전패(?)를 당했던 전력이 있어서

이번에는 어떤 승부를 펼칠지 역시 큰 기대를 했습니다.

하지만, 작품 자체가 짧아서 그랬겠지만, 두 사람 모두 소소한 역할에 그칠 수밖에 없었고,

특히 아마노 검사는 단순 조연 정도로만 그려져서 아쉬움이 컸습니다.

 

후반에 실린 상세한 작가 소개를 보니 다카기 아키미쓰의 왕성한 이력이 한 눈에 들어옵니다.

변호사 햐쿠타니 센이치로 시리즈만 해도 7작품이나 되고,

가장 매력적인 작품인 문신살인사건이 속한 가미즈 교스케시리즈도 18작품이나 됩니다.

다음에 어떤 작품이 국내에 소개될지 모르겠지만,

단순한 미스터리 구조와 올드한 캐릭터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의 느낌이 좋아서 그런지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들이 꾸준히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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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꽃 엔시 씨와 나 시리즈 3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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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말’, ‘밤의 매미에 이은 엔시 씨와 나 시리즈세 번째 작품입니다.

일상 미스터리의 고전이라 불렸다는 이 시리즈에는 엔시 씨라는

좀 특별한 캐릭터를 지닌 두 명의 주인공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는 스무살 문학부 여대생입니다.

책을 좋아하고, 고문학과 전통예능에 조예가 깊은 그녀가 특별히 좋아하는 장르 가운데

라쿠고(落語)라는 일본 특유의 이야기 예술이 있습니다.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부채나 수건 같은 소도구와 함께 목소리, 추임새, 몸짓만으로

해학과 풍자가 섞인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연기하는 예술입니다.

우연한 기회에 자신이 좋아하는 라쿠고의 대가 슌오테 엔시 씨를 알게 된

이후 일상에서 기이하거나 미스터리한 일을 겪을 때마다 그를 찾아 상담을 하곤 합니다.

 

앞선 두 편의 작품이 모두 단편집인데 반해 가을꽃은 이 시리즈의 첫 장편입니다.

장르 자체가 일상 미스터리라 어쩌면 단편이 더 어울리는 시리즈일 수도 있지만

아무래도 미스터리를 다루다 보니 단편에서는 분량이나 깊이 면에서 아쉬운 점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기대했던 장편이 출간돼서 무척 반가웠습니다.

 

가을꽃은 이 시리즈에서는 처음으로 죽음이 등장합니다.

주인공 의 후배인 여고생 쓰다가 학교 옥상에서 의문의 추락사를 당하고,

그로 인해 초등학교 시절부터 쓰다의 절친이던 이즈미가 패닉상태에 빠집니다.

옥상은 밀실이나 다름없는 상태라 범인을 특정하기 곤란한 상황이고,

패닉상태에 빠진 이즈미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삶의 끈을 놓아버린 사람처럼 지냅니다.

그러던 어느 날 에게 의문의 편지들이 날아듭니다.

그 중 하나는 쓰다 마리코는 살해당했다.”라는 끔찍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는 사건 당일 쓰다를 목격했던 선생님과 학생들을 만나 진실을 알아내려 하지만

수집된 단서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자살인지, 타살인지조차 파악할 수 없습니다.

때마침 엔시 씨가 라쿠고 공연 때문에 연락을 해오자 는 그의 도움을 얻기로 합니다.

 

가을꽃은 장편이지만 287페이지의 짧은 분량입니다.

여고생 쓰다의 죽음의 미스터리가 메인 스토리이긴 하지만,

역시 그에 맞먹는 비중으로 주인공 의 성장 스토리가 전개됩니다.

작가는 다양한 매개체를 통해 미스터리와 성장 스토리를 이런저런 방식으로 연결시킵니다.

동화에서 고전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독서, 또래 친구들과의 수다 또는 상담,

태풍과 함께 등퇴장하는 여름과 가을의 분위기, 계절의 변화에 맞춰 피고 지는 꽃 등

주인공 의 삶과 일상을 지배하는 다양한 매개체들이 성장의 밑거름으로 묘사됩니다.

그리고 그 매개체들은 어떤 식으로든 로 하여금 쓰다의 죽음을 연상하도록 만듭니다.

그것은 때론 책임감의 형태로, 때론 진실 찾기라는 순수한 욕망의 형태로 발현됩니다.

 

와 엔시 씨가 찾아낸 진실 속에는

죄 없이 살아온 평범한 사람에게도 부조리한 사건은 일어날 수 있다.

그런 것까지도 우리의 일상.” (옮긴이의 말 )이라는,

무겁고 비극적이지만, 실은 너무 당연해서 오히려 당혹스러운 주제가 진하게 녹아있습니다.

그 누구도 자신의 평범한 삶 속에 부조리한 사건이 벌어지지 않기를 바라지만,

인터넷 사회 뉴스만 검색해도 그런 일들이 얼마나 흔하게 벌어지고 있는지,

, 그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일상이 어떻게 붕괴되는지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쓰다와 이즈미가 마주한 부조리한 사건은 화가 날 정도로 안쓰럽기 그지없습니다.

아무리 그런 것까지 모두 우리의 일상이라 하더라도 말이죠.

 

전작들을 읽지 않은 독자들은 의 방대한 독서량에 놀랄 것이고,

연이어 인용되는 다양한 동화, 고전, 소설에 당황할 수도 있습니다.

미스터리와는 무관해 보이는 꽤 많은 분량의 문장들을 보면서

이 작품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도 있습니다.

출연 분량이 얼마 안 되는 엔시 씨에 대해서도 무척 궁금히 여길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이 의문과 놀람들은 전작을 읽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을 문제들입니다.

만일 가을꽃이 매력적으로 읽혔다면, 또는 와 엔시 씨의 전사(前史)가 궁금하다면

앞선 두 편의 단편을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개인적으로 시리즈의 첫 장편을 읽게 된 것은 무척 반가운 일이었지만,

미스터리에 좀더 방점이 찍히지 않은 것은 역시 아쉬운 대목이었습니다.

작가가 의 이야기를 좀더 사랑했기 때문일까요?^^

하지만 세 편의 시리즈를 모두 읽고 보니 이것이 이 작품의 진짜 미덕이고

작가 기타무라 가오루의 스타일이라는 생각이 확실해졌습니다.

그에 대한 호불호는 물론 독자들의 몫이지만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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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년생 김지영 오늘의 젊은 작가 13
조남주 지음 / 민음사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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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82년생일까?’, ‘왜 주인공 이름이 저토록 특색 없을까?’ 궁금했습니다.

하지만 채 1/3도 읽기 전에, 작가가 하고 싶은 이야기에 관한 한 이보다 더 적절한 제목,

이보다 더 적절한 주인공의 캐릭터는 없다는 걸 깨닫게 됐습니다.

 

김지영은 1982년에 태어나 2015년 현재 우리 나이로 34살인 한 아이의 엄마입니다.

어느 날부터 갑자기 그녀의 입에서 다른 사람의 말이 튀어나오기 시작합니다.

그녀는 친정엄마가 됐다가, 친했던 대학선배가 되기도 합니다.

남편은 그녀에게 정신과 진료를 받게 했고,

그때부터 이야기는 김지영이 진술한 자신의 일생에 관한 짧은 리포트로 이어집니다.

그녀가 태어나기 전, 그녀의 어머니가 겪은, 지금은 상상하기도 힘든 고난의 시간들,

그녀가 국민학교에 입학한 뒤 학창시절을 거치는 동안 겪은 크고 작은 불합리한 일들,

그리고 직장에 들어간 뒤, 결혼한 뒤, 아이를 낳은 뒤 겪은 온갖 부조리한 일들이 나열됩니다.

그 모든 것들은 그녀의 주민등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됐다면

아마 대부분 겪지 않았을 지도 모를, 아니 절대 겪지 않았을 일들이었습니다.

 

김지영이 겪은 고난과 불합리와 부조리는 사실 폭력과 동의어입니다.

가해자는 가족, 친구, 선생, 직장동료, 낯선 타인 등 그녀가 만난 거의 모든 사람들입니다.

모든 남자가 가해자였던 것도 아니고, 모든 여자가 동지들이었던 것도 아닙니다.

문제는 그들 가운데 명백한 적대감을 갖고 폭력을 휘둘렀던 건 극히 일부라는 점입니다.

대다수는 그게 당연한 거니까’, 또는 상식이니까라는 이유로 김지영을 아프게 했습니다.

 

여자애들이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학교 망신이다, 망신.”

여자 직업으로 선생님만 한 게 있는 줄 알아?”

, 됐어. 씹다 버린 껌을 누가 씹냐?”

원래 첫 손님으로 여자 안 태우는데, 딱 보니까 면접 가는 것 같아서 태워준 거야.”

넌 그냥 얌전히 있다 시집이나 가.”

배불러까지 지하철 타고 돈 벌러 다니는 사람이 애는 어쩌자고 낳아?”

예전에는 방망이 두드려서 빨고, 불 때서 삶고.. 요즘 여자들은 뭐가 힘들다는 건지.”

나도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커피나 마시면서 돌아다니고 싶다. 맘충 팔자가 상팔자야.”

 

고백하자면, 이제 나이가 먹어 이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말들이

얼마나 폭력적이고, 일방적이고, 맥락 없는 것들이란 걸 깨닫게 됐지만,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보면 저 역시 숱한 ‘82년생 김지영들에게

부당한 폭력을 휘둘렀고 깊은 상처를 줬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폭력이 상식이고, 자연스러운 거고, 그러니 당연히 그래도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이

그저 부끄럽고 창피해질 따름입니다.

 

김지영은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작품 속에서 큰 목소리를 몇 번 내지 못합니다.

자신을 씹다 버린 껌으로, 재수 없는 첫 손님으로, 대책 없는 임산부로 여기는 가해자들에게

큰 목소리로 화내려다 말고, 따지려다 참고, 저항하려다 미루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34살이 된 그녀가 다른 사람의 말을 하게 된 어처구니없는 상황은

독자로 하여금 깊고, 두껍고, 끝없는 분노를 느끼게 만듭니다.

무엇보다 대부분의 ‘82년생 김지영들이 지금도, 또 앞으로도

그런 삶을 강요받고, 강요받을 거란 사실에 지독한 씁쓸함까지 맛보게 됩니다.

 

아마도 가해자들은 이 소설을 지긋지긋한 페미니즘이라고 편리하게 부정할지도 모릅니다.

그들은 스스로가 가해자인지도 모를뿐더러,

좀 심하게 말하면, 김지영의 상처에 대해 조금도 공감 못하는 사이코패스인지도 모릅니다.

의 여자들에게 제멋대로 불쾌하기 짝이 없는 성희롱을 자행하곤

밤늦게 귀가하는 딸을 에스코트하러 간다며 술자리를 뜨는 작품 속 대기업 부장처럼 말이죠.

 

이 작품을 세상의 모든 딸들에게 읽어보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무작정 싸우라는 게 아니라, 스스로 선택하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그 어떤 선택에서도 를 포기하는 것만큼은 하지 말라고 말해주고 싶습니다.

누구도 대신 살아주지 않는, 누구보다 소중한 자신의 삶이기 때문입니다.

, ‘82년생 김지영은 소설이 아니라 현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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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이 - 죽음을 질투한 사람들
제인 하퍼 지음, 남명성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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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폐쇄적+배타적 소도시라는 무대는 그 자체만으로도 서사를 묵직하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호불호를 거침없이 드러내고, 언제나 날이 서있는 듯한 그곳 사람들의 언행은

외부인이라면 불편하다 못해 웬만해선 견뎌내기 힘든 엄청난 압력입니다.

초라한 번화가 외엔 대부분이 광활한 농장인 그런 소도시에 2년째 가뭄이 지속된다면,

그래서 산불경고 지수는 극히 위험을 가리키고, 기르던 가축은 살처분을 해야 하고,

끝내 생존의 문제마저 위태로워지는 상황이 도래한다면,

사람들은, 날카롭다 못해 사소한 시비만으로도 피를 보는 일을 어렵지 않게 생각할 것입니다.

 

호주 멜버른에서 5시간 거리의 소도시 키와라가 지금 그런 지경에 처해있습니다.

그리고 이곳에서 루크라는 사내가 아내와 아들을 살해한 뒤 자살한 끔찍한 사건이 터집니다.

최악의 가뭄 때문에 궁지에 몰렸던 루크의 극단적 선택을 동정하는 사람도 있지만,

가족들까지 참혹하게 살해한 그의 마지막 결정을 극렬히 비난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루크와 그 가족의 비극적인 죽음 자체보다

장례식을 위해 키와라를 찾은 루크의 친구이자 돌아온 탕아에게 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에런 포크는 키와라에서 나고 자랐지만, 20년 전 도망치듯 마을을 떠났던 남자입니다.

그 무렵 16살 동갑내기 소녀 엘리의 의문사에 관해 경찰의 의심을 받았던 에런은

20년이 지난 지금도 키와라에서는 살인자로 낙인찍힌 상태입니다.

더구나 경찰이란 신분 때문에 루크의 부모로부터 사건진상을 밝혀달라는 부탁을 받은 에런이

1주일의 휴가를 이용하여 비공식 수사에 나서면서 키와라의 분위기는 극도로 험악해집니다.

 

500페이지가 채 안 되는 딱 알맞은 분량의 스릴러지만

폐쇄적이고 배타적인 소도시를 배경으로 한 무겁고 습한 정서의 작품들이 그렇듯

마지막 페이지를 덮을 무렵엔 거의 7~800페이지를 읽은 듯한 천근만근의 느낌이 듭니다.

특히 20년 전 엘리의 의문사와 현재 벌어진 루크 가족의 참혹한 사건이 나란히 전개되면서

가뭄에 찌든 소도시 키와라를 배경으로 한 스토리는 한없이 독자의 마음을 무겁게 만듭니다.

 

하지만 작가는 그 무거움을 기꺼이 감당하게 할 만큼 매력적인 스릴러를 전개시킵니다.

루크는 과연 가족을 살해하고 자살할 만큼 궁지에 몰렸던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일하게 살아남은 아기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루크의 사건은 20년 전 엘리의 죽음과 어떻게 연결돼있는가?

에런은 엘리의 죽음에 진짜 책임이 있는 건가, 없는 건가?

루크의 이웃이자 죽은 엘리의 아버지인 음험하기 짝이 없는 맬 디컨은 무엇을 숨기고 있는가?

 

독자는 자살이냐 타살이냐, 타살이라면 소도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등을 관찰하며

에런의 비공식 수사를 초조하게, 하지만 기대와 궁금함을 갖고 지켜보게 됩니다.

, 16살이던 20년 전, 키와라를 헤집고 다녔던 에런과 루크와 엘리의 회상을 지켜보며

그 무렵 그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으로 지켜보게 됩니다.

아마, 미국의 작은 마을에서 위태로운 10대 시절을 보낸 한 소녀의 비극적 성장기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여름을 삼킨 소녀를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호주의 소도시 키와라에서 20년의 간극을 두고 벌어진 두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는

드라이에서도 비슷하거나 그 이상의 쾌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평점 별을 4.5개에 그치게 만든 아쉬운 점이 두 가지 있었는데,

우선, 이야기가 동어반복되거나 느슨해지고 지루해지는 지점이 간혹 목격된다는 점입니다.

폭발 직전의 키와라의 분위기에 대해 반복적으로 부연설명하고 있는 부분들,

혹은 에런과 루크와 엘리의 10대 시절을 강조하는 부분들에서 그런 느낌을 받았는데,

이런 느낌은 어쩌면 드라이같은 구조를 가진 작품들의 태생적인 한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무대와 캐릭터에 대해 확실히 독자의 뇌리에 각인시켜야 한다는 작가의 부담감이랄까요?

물론, 작품의 큰 미덕을 훼손할 정도는 절대 아니며,

독자에 따라 그런 지점을 재미있게 읽는 분이 더 많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또 한 가지는, 사실 굉장히 주관적일 수 있는 부분인데,

가끔씩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들거나 잘 이해가 안 되는 문장들이 보인다는 점입니다.

이게 원작의 문제인지, 번역의 문제인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개인적으로는 옥의 티처럼 보여서 많이 아쉬웠습니다.

 

제인 하퍼는 이 작품으로 데뷔하면서 많은 매체로부터 찬사를 받았습니다.

당연히 후속작에 대해 기대하지 않을 수 없는 작가입니다.

번역하신 남명성 님에 의하면, 에런 포크를 주인공으로 한 다음 작품이 예정돼있다는데,

실은 금융범죄 전문수사관인 에런 포크가 다음 작품에서는 어떤 사건을 맡게 될지,

(추정컨대) 애증의 고향인 키와라 대신 대도시 멜버른에서는 어떤 캐릭터를 발휘할지

벌써부터 기대와 궁금증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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