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자살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3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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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 한다미의 가출로 인해 삶의 의욕이 사라진 길영인은 자살을 꿈꾸며 그 방법을 찾던 도중

'정신을 파괴해서 육체의 생을 치유한다'는 정신자살연구소를 알게 된다.

호기심과 절박함으로 연구소에 찾아간 그는 이탁오 박사의 언변에 설득되어

거액의 비용을 지불하고 정신자살을 시술받기로 결정한다.

그러나 시술 후에도 그의 불안은 그칠 줄 모르고, 급기야 아내의 행방을 추적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주변에서 끔찍한 살인사건이 연이어 벌어지기 시작한다.

 

4년 전, 이탁오 박사와 짧지만 강렬했던 악연을 맺은 고진은

우연히 말려든 살인사건에 이탁오 박사의 정신자살연구소가 연관돼있음을 확인하곤

서초경찰서 이유현 팀장은 물론 미모의 마담 류경아까지 끌어들여 적극적인 조사에 나선다.

손끝 하나 대지 않고 유희삼아인간의 정신을 실험했던 이탁오 박사라면

길영인 주위에서 벌어진 참극들을 얼마든지 설계하고도 남았을 거라 확신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들고, 고진의 모든 가설은 산산이 부서지고 만다.

(출판사의 소개글을 일부 인용, 편집했습니다)

 

● ● ●

 

(걸작선이나 단편선은 제외하고) 도진기 작가가 발표한 미스터리 작품이 모두 열 편인데,

그중 여덟 편을 읽었으니 어떻게 봐도 도진기 작가의 팬임에 분명한 1인입니다.

못 읽은 두 편은 고진 시리즈 중 정신자살’, 진구 시리즈 중 나를 아는 남자였는데,

최근 고진 시리즈의 개정판을 내고 있는 황금가지에서 정신자살을 보내준 덕분에

그동안 너무 궁금했던 변호사 고진과 악마적 인간 이탁오 박사의 대결을 읽을 수 있었습니다.

 

정신자살은 고진 시리즈 가운데 세 번째 작품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이 작품은 작가와 작품에 대한 세간의 평(본격 추리)이 무색할 정도로

파격적인 반전과 엔딩을 통해 거의 호러에 가까운 세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론, 올해(2017) 출간된 단편집인 악마의 증명을 먼저 읽은 덕분에

도진기 작가의 숨겨진 진짜 취향(?)을 안 연후에 정신자살을 읽은 셈이 됐지만,

그렇지 않은 독자들은 꽤나 놀라고 당혹스러워했을 것이 분명한 작품입니다.

도진기 작가는 악마의 증명후기에서 다음과 같이 진술합니다.

 

추리와 오컬트 혹은 호러가 결합된 작품에 늘 매료되곤 했다.”

내가 괴기 환상물을 쓰게 된 건 DNA 수준의 필연인지 모른다.”

 

도진기 작가의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이 진술이 더욱 놀랍게 들릴 것입니다.

고진 시리즈나 진구 시리즈를 막론하고 도진기 작가가 보여준 서사의 핵심은

인간의 탐욕이 빚은 명백히 현실적인 사건과 매력적인 본격 추리였기 때문입니다.

혹시 고진 시리즈에서 도진기 작가의 이런 의외의 취향이 또다시 발휘된다면

그건 분명 악마적 인간 이탁오 박사와의 재대결 또는 마지막 대결을 다룬 작품이 되겠지만,

개인적인 바람이라면, 그 전까진 고진 시리즈가 본격의 틀을 지켰으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정신자살은 그만큼 도진기 작가의 팬인 저에게조차 충격적이고 낯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자신이 세워놓고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던 마지막 가설을 통해 진범을 밝히기 전까지는

고진은 여느 시리즈에서와 마찬가지로 매력적인 어둠의 변호사역할을 선보입니다.

자신의 추리가 틀려도 슬퍼하긴커녕 오히려 시니컬한 웃음과 함께 새 출구를 찾아나섭니다.

가끔 지나친 비약도 등장하지만, 그의 선명하고 빈틈없는 추리는 매번 놀라움을 자아냅니다.

, 투덜대면서도 늘 고진과 파트너처럼 움직이는 서초경찰서 이유현 팀장도 귀엽고(?),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에서 연을 맺은 미모의 마담 류경아는

특유의 매력과 언변을 무기 삼아 고진이 설계한 실제 수사에 투입되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역시 정신자살에서 고진에 맞먹는 비중과 분량, 재미를 선보이는 것은

인간의 정신을 좌지우지하는 비상한 능력을 가진 악마적 인간 이탁오 박사입니다.

길영인 사건을 통해 오랜만에 재회한 두 사람이 벌이는 팽팽한 대결도 재미있지만,

4년 전, 고진과 이탁오 박사를 운명적으로 조우시켰던 미스터리한 살인사건 스토리나

그 영향으로 고진이 판사직을 버리고 어둠의 변호사를 택하는 과정도 흥미롭게 그려집니다.

특히 고진이 아이러니하게도 자신과 이탁오 박사가 닮은꼴 인간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지점은

고개가 저절로 끄덕여질 정도로 수긍이 가는 대목입니다.

 

꽤 많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인물들의 관계도 복잡한데다 예상치 못한 엔딩의 충격 때문에

스토리보다는 장르적 특징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한 서평이 돼버렸는데,

아무래도 그 이상 내용을 소개하는 것은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다른 작품도 마찬가지긴 하지만,

정신자살은 직접 읽지 않곤 누군가에게 설명하기가 참 어려운 작품입니다.

 

사족으로 한마디만 덧붙이자면,

혹시 정신자살로 도진기 작가와 처음 만난 독자라면,

이 작품으로 고진 시리즈나 진구 시리즈를 예단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앞서 구구절절 설명하긴 했지만, 도진기 작가의 성향은 (적어도 메이저는) 본격 추리입니다.

그 스스로 호러+오컬트+괴기 환상물의 취향을 갖고 있다고 고백했고

언젠가는 그에 걸맞는 주인공을 내세운 새 시리즈가 나올지도 모를 일이지만,

지금 그의 주력상품(?)은 고진과 진구인 만큼 꼭 다른 작품들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정신자살에서 그다지 호감을 갖지 못한 독자가 도진기 작가의 진면목이 담긴 작품들을

통째로 외면하는 일이 있을까봐 괜한 오지랖까지 덧붙인 사족을 달아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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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 트라비아타의 초상 - 개정판 변호사 고진 시리즈 2
도진기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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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9월 들녘에서 출간된 초판을 읽고 썼던 서평을 다시 업로드한 것입니다.)

 

어둠의 변호사 고진시리즈 두 번째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붉은 집 살인사건이나 유다의 별에 비해 비교적 소소한 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독특한 구성과 연이은 반전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 경위를 듣는 것만으로 사건의 윤곽을 파악하는 안락의자 탐정 고진

사소한 단서만으로 수사의 맥을 짚는 명탐정 고진의 매력을 동시에 맛볼 수 있기도 합니다.

 

● ● ●

 

서초경찰서 이유현 팀장은 독신자 아파트에서 벌어진 남녀피살사건을 수사하며

조금은 무리한 방법으로 용의자를 특정하여 기소한 끝에 결국 쓴맛을 보게 됩니다.

사건에 끼어든 고진은 이유현 팀장으로부터 사건 개요를 듣는가 하면,

사건 현장을 찾아가 이런저런 단서를 확보한 끝에 나름 용의자를 특정합니다.

이유현 팀장은 고진의 충고대로 수사를 진행하지만 결과는 엉뚱하게만 나올 뿐입니다.

완벽한 알리바이, 가늠할 수 없는 범행수법, 모호할 뿐인 범행동기 등

수사를 할수록 진실은 더 멀어지고, 이유현 팀장은 조언해준 고진에게 오히려 화가 납니다.

결국 안락의자를 벗어나 현장을 탐문하고 관련자들을 만나본 고진은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충격적인 진실을 이유현 팀장 앞에 내놓습니다.

 

● ● ●

 

초반에 소개된 사건의 규모나 서론만 놓고 보면

혹시 이 작품이 단편집 또는 중편집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그리 두꺼운 분량은 아니지만, 설마 이 사건만으로 장편을 끌고 간다고?”

 

사건은 단순하고, 관련자들도 한정되어 있지만

의외로 해결의 실마리는 드러나지 않고, 용의자들의 알리바이는 완벽합니다.

분명 단서가 될 만한 정황들이 여기저기 널려 있지만,

도무지 그 의미를 알기가 어려워진 탓에 수사는 계속 제자리를 맴돌 뿐이고,

안락의자 탐정 고진의 추리마저 번번이 벽에 막히면서 이야기는 밀도를 높여갑니다.

 

사실 고진이 이유현 팀장에게 조언을 해줄 때마다

독자는 이번에는...”하면서 사건이 해결되는 게 아닐까, 기대하게 됩니다.

그만큼 추리도 완벽하고, 범행동기도 그럴듯하게 설명되기 때문인데,

남은 분량을 보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 것 같고,

결국 예상대로 용의자는 고진과 이유현 팀장을 보기 좋게 넉다운 시킵니다.

이런 구성 덕분에 독자는 마치 고진 또는 용의자와 두뇌싸움을 벌이는 듯한

색다른 긴장감과 재미를 만끽하게 됩니다.

 

치열한 논리의 싸움, 알리바이 깨기, 사소한 단서들 속에 꼭꼭 숨은 진실 찾기 등

라 트라비아타의 초상은 작은 사건 속에서 미스터리의 미덕을 실컷 맛보여주는 작품입니다.

거만해 보이기도, 얄미울 정도로 똑똑해 보이기도 한 고진의 캐릭터도 맛깔나고,

욱하는 성질과 돌직구 같은 추진력을 보여준 이유현 팀장의 캐릭터도 재미있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어디까지 추악해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의 진상은 충격적이고,

거의 완벽하게 준비된 범행수법과 곳곳에 매복된 사소한 단서들은

도진기 작가가 얼마나 꼼꼼하게 설계도를 준비했는지를 알 수 있는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부분이 너무 많아 좀 애매한 서평이 됐지만,

부담 없는 분량에 알찬 미스터리를 맛보려는 독자들에겐 더없이 추천하고 싶은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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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던 복수의 밤
야쿠마루 가쿠 지음, 김성미 옮김 / 북플라자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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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선 잘 안 쓰는 단어지만 시대극이나 사극을 보면

기구한 인생이란 말을 심심찮게 들을 수 있습니다.

비록 허구의 드라마라 하더라도 그런 인생을 부여받은 등장인물들은

그야말로 누구도 겪고 싶지 않은 참혹한 우여곡절들을 겪기 마련이고,

혹시 드라마의 마지막 순간에 모든 문제가 해결돼서 해피엔딩을 맞이하더라도

상처뿐인 자신의 과거를 돌이켜보는 것 자체를 끔찍하게 여길 것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기구한 인생이란 언제든, 어느 곳에서든, 누구에게라도

날벼락처럼 떨어질 수 있는 피할 수 없는 숙명일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의 주인공 가타기리 타츠오에게 그 숙명이 찾아든 것은 30여년 전의 일입니다.

사랑하는 아내, 예쁜 딸과 함께 가난하지만 건강한 미래를 꿈꾸던 가타기리의 인생은

단골 이자카야에서 횡포를 부리던 야쿠자를 저지하려던 사소한 행동 하나 때문에

순식간에 만신창이가 되고 맙니다.

상해죄로 전과자가 되면서 직장에서 쫓겨난 것은 물론 가족마저 붕괴됩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가타기리는 얼굴에 추악한 문신을 새긴 뒤 연이어 범죄를 저질러왔고,

30여년의 시간을 전국의 교도소를 전전하는 지경에 이르게 됐습니다.

그러던 그가 강도사건으로 5년을 복역한 뒤 출소하여 단골 이자카야를 찾아옵니다.

그리고, 태연스레 또 다른 범행을 저지를 것을 예고합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Last Night’인데, 개인적으로는 번역 제목 자체가 좀 과했다는 생각입니다.

너무 직설적이고 올드한 냄새도 문제지만, ‘셀프 스포일러란 점이 아쉽기 때문입니다.

사실, 조금만 읽으면 주인공 가타기리가 그저 평범한흉악범이 아니란 건 금방 알게 되지만

그래도 복수라는 코드는 어느 정도 감춰져 있다가 등장하기 때문에

굳이 번역 제목을 통해 미리 독자에게 알릴 필요가 있었는지는 다 읽은 지금도 의문입니다.

 

아무튼...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은 대체로 사회파 미스터리로 분류되지만

매번 읽을 때마다 사회파이상의 인간 냄새가 물씬 풍기는 여운을 느끼곤 했습니다.

천사의 나이프’, ‘하드 럭’, ‘악당이 모두 그랬는데,

세 작품의 주인공 모두 기구한 인생을 부여받은 안쓰러운 캐릭터들이긴 하지만,

그들에 비하면 가타기리는 백만 배쯤은 더 기구한 인생을 산 셈이라,

마지막 장을 덮을 때의 여운 역시 그만큼 진하고 오래 갈 것 같다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심지어 이야기가 클라이맥스로 치닫는 순간에는 작품 속으로 들어가

가타기리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깊게 이입하기도 했습니다.)

 

한 개인의 비극을 디테일하게 그린 휴먼드라마와 빈틈없이 정교하게 설계된 미스터리가

적절한 비율로 잘 배합된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들은 매번 만족스런 책읽기가 되곤 했는데,

기다렸던 복수의 밤천사의 나이프만큼이나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작품입니다.

픽션이긴 해도 가타기리의 참혹한 비극을 재미있다라고 소개하는 게 어색하긴 하지만,

탄탄한 미스터리와 묵직한 여운을 찾는 독자에겐 자신 있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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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들의 섬 밀리언셀러 클럽 3
데니스 루헤인 지음, 김승욱 옮김 / 황금가지 / 200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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켄지&제나로 시리즈’, ‘커글린 3부작’, ‘더 드롭을 통해 데니스 루헤인의 팬이 됐지만

그의 대표작인 살인자들의 섬은 아껴 읽는다는 핑계로 계속 뒤로 미뤄놓곤 했습니다.

고백하자면, 디카프리오 주연의 영화로도 만들어졌고 해서

당연히 켄지#제나로 시리즈처럼 꽤나 오락적 요소가 강한 액션 스릴러라고 단정했는데,

(영화로만 본) ‘미스틱 리버만큼이나 어둡고 무겁고 충격적인 반전으로 꽉찬 작품이었습니다.

 

● ● ●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정신이상자들이 수용된 셔터 아일랜드(이 작품의 원제이기도 합니다)

연방보안관 테디와 처크가 찾아옵니다.

탈출한 여성 수용자 레이첼을 찾기 위해 파견된 그들은

전혀 협조적이지 않은 병원과 교도소 관계자들의 태도에 의문을 갖게 됩니다.

특히 개인적인 복수라는 별도의 목적을 갖고 이 미션을 자청했던 테디는

자신이 찾는 자에 대해 모르쇠로 일관하는 관계자들이 의심스러워집니다.

 

참혹했던 전쟁과 화재로 사망한 아내 때문에 큰 트라우마를 지니고 있는 테디는

섬에 들어온 이후 더욱 심해진 편두통과 악몽 때문에 거의 패닉상태에 빠지고 맙니다.

때맞춰 30년 만에 찾아온 엄청난 폭풍 때문에 시설은 아수라장이 되는데,

그 과정에서 테디는 섬에서 자행되는 심각한 문제들을 인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껏 알고 있던 것과 180도 다른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습니다.

 

● ● ●

 

사실, 워낙 방대한 서사가 담긴 작품이라 줄거리 요약이 참 난감합니다.

테디의 비극적인 가족사, 섬에서 벌어지는 은밀하고 불법적인 치료 프로세스,

폭력적인데다 정신이상증세를 겪고 있는 시한폭탄 같은 수용자들,

그리고 탈출한 여성 수용자가 남긴 의문의 암호와 그것이 가리키는 섬의 치명적 비밀 등

작품의 분량만큼이나 두텁고 복잡다단한 설정들로 가득 찬 작품입니다.

 

초반만 해도 테디와 저크 두 콤비가 비밀과 비리로 가득 찬 악당들을 제압하고,

그와 동시에 테디가 멋지게 개인적인 목표를 완수하는 액션 스릴러겠거니, 안심하고 있다가,

테디의 트라우마가 보통 스릴러의 주인공에 부여되는 관행적인 수준보다

좀 과하게 묘사되는 지점부터 슬슬 의심(?)이 가기 시작했습니다.

테디가 진짜 이 섬에 온 목적은 무엇일까?

그의 트라우마와 셔터 아일랜드의 비밀 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그의 악몽 속에 등장하는 기이한 현상들은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하는가?

 

뒷북 같은 소리이긴 하지만,

아마 영화로 이 작품을 먼저 봤다면 소설은 읽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미스틱 리버가 그런 경우였는데, 영화로만 봐도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만드는 그 서사를

소설로 읽으면 너무 힘들 것 같기 때문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살인자들의 섬역시 마지막 장을 덮을 무렵엔

가슴에 얹어놓았던 무거운 돌 하나를 겨우 내려놓은 듯한 해방감과 함께

테디에 대한 안쓰러움과 그의 고통에 대한 공감각이 여전히 무겁게 남아있었습니다.

 

이 작품이 국내에 출간된 2004년만 해도 엔딩이 꽤나 충격적인 반전으로 읽혔겠지만,

(정확히 기억은 안 나도) 비슷한 스타일의 반전을 본 적이 있어서,

, 테디가 겪는 심리적 고통과 악몽의 내용 속에 작가가 이런저런 단서를 남겨놓은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엔딩이 그리 세게 느껴지진 않았습니다.

하지만, 테디가 짊어진 시대적(전쟁), 개인적(가족사) 고통들이

셔터 아일랜드와 운명적으로 결부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대목은

반전의 충격과는 무관하게 마치 심연을 들여다보는 듯한,

그래서 책장을 넘기기가 주저될 만큼 강도 높은 고문으로 느껴졌습니다.

실은, ‘미스틱 리버를 소설로 읽기를 미룬 것도 바로 이런 고문을 피하고 싶어서였습니다.

 

독자의 사고와 감정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데니스 루헤인의 필력이야 이미 충분히 경험했지만

살인자들의 섬은 그동안 읽은 모든 작품들보다 훨씬 힘들고 불편하고 여운을 심하게 남기는,

그리고 역설적이지만 그런 이유 때문에 오래 기억에 남을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고민되는 건, 다가올 길고 긴 추석 연휴 때 영화 셔터 아일랜드를 볼 것인가, 여부입니다.

한편으론, 영화로는 어떻게 만들어졌을지 궁금해지기도 했지만,

동시에 영화의 엔딩 역시 소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힘든 여운을 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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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강
핑루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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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웬만한 미스터리 서사에는 제법 익숙한 편이라고 여겨왔지만,

검은 강은 그런 저에게도 꽤나 낯설고 독특한 작품이었습니다.

처음부터 범인과 피살자를 모두 공개한 점이라든가

사건 전후 그들의 심리를 디테일하게 그린 점은 크게 색다른 방식은 아니지만,

사건을 바라보는 작가의 냉정한 시선, 그 시선을 담아내는 담담하면서도 심연 같은 문장들,

누구를 비난하고 누구를 동정해야 할지 점점 모호해지는 캐릭터들,

반전도 충격도 없지만 왠지 읽을수록 서서히 진흙 속으로 끌려들어가는 듯한,

또는, 악취를 풍기며 느리게 흘러가는 검은 강을 눈앞에서 바라보는 듯한 불쾌함 등

작품 내내 제목에 걸맞는 이상한느낌을 피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건은 심플합니다.

커피점에서 일하는 젊은 여자(자전)가 단골이던 중년 부부(훙보, 훙타이)를 살해합니다.

작가는 누가?’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으로 이야기를 구성합니다.

, ‘자전은 왜 훙타이 부부를 살해했을까? 부부는 왜 자전에게 살해당했을까?’가 중심입니다.

 

작가는 두 명의 화자 범인인 젊은 여자 자전과 살해된 중년 여자 훙타이 를 앞세우는 한편,

두 사람의 여러 시제 현재, 과거, 대과거 등 를 동원하여 이야기를 풀어갑니다.

자전의 경우, 트라우마와 상실감만 남긴 과거 유년기, 훙 부부와 묘한 악연으로 엮인 현재,

그리고, 기대보다는 두려움이 앞서는 남자친구 셴밍과의 불확실한 미래가 엇갈려 묘사됩니다.

훙타이 부부의 경우, 처음부터 어긋난 결혼생활, 각자 다른 궤도를 달리던 치명적인 욕망들,

그 결과 임계점까지 다다른 서로를 향한 증오심과 함께 자전에 대한 애증이 그려집니다.

 

이런 서사와 구성은 필연적으로 범인과 피해자 모두에게 단선적인 캐릭터 이상의 면모,

, 그들은 절대 악도 아니고 절대 선도 아니라는 식의,

도덕적으로 무척 모호해질 수 있지만, 그래서 더 현실감 있는 면모를 부여하기 마련입니다.

작가는 자전을 사이코패스동정 받아 마땅한 가해자의 경계에 세워놓고,

훙 부부를 불쌍한 피해자자업자득이라 비난 받을 만한 피해자의 경계에 세워놓습니다.

그런 후 그들이 살인과 피살에 이르기까지의 물리적, 심리적 과정을 집요하게 묘사합니다.

살인이든 피살이든 응축된 에너지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뚝딱 벌어질 수도 있는 일이지만,

이 작품 속의 자전과 훙 부부는 꽤 오랫동안 각자의 불행한 에너지를 쌓아왔고,

작가는 그 지점에 방점을 찍은 것입니다.

 

재미있는 것은, (아무 정보 없이 책을 읽어서 다 읽은 뒤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이 작품이 실제 사건을 모티브로 했다는 점입니다.

실제 사건이 벌어졌을 때 대만에서는 범인인 젊은 여자에 대한 엄청난 비난이 일었다고 합니다.

언론과 여론은 물론, 공정해야 할 재판장에서까지 무죄추정원칙 따윈 무시됐으며,

그런 분위기 속에서 범인에게는 사갈녀(蛇蠍女, 뱀과 전갈처럼 남에게 해를 가하는 여자)라는

듣기만 해도 등골이 싸해지는 별명이 붙었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작가가 굳이 현실의 사갈녀를 옹호하는 듯한 픽션을 자아낸 이유는 무엇일까요?

현실의 피살된 부부에게 어딘가 일그러진 캐릭터를 부여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솔직히 이 부분은 다 읽고도 쉽게 납득하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100% 픽션이었다면 작가의 독특한 정신세계에 위화감 없이 반했을 것 같은데,

막상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했다는 점을 알게 된 순간

작품 내용과는 별개의 편치 못한 감정이 일어난 것이 사실입니다.

어쩌면 이마저도 작가의 의도일지도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작품 뒤에 실린 정보를 보니 대만에서는 꽤 유명한 작가인 것 같은데,

핑루의 여러 전작들이 이런 식으로 실제 사건에 기반을 둔 작품들이라고 합니다.)

 

이런저런 불편한 감정들에도 불구하고 검은 강은 꽤 오랜 여운을 남기는 작품입니다.

비록 그 여운이란 게 애틋하거나 아련한 것과는 정반대인 음습한 것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담담한 문장들 속에 잔뜩 웅크린 듯 숨어있던 지독한 악의들,

자신들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를 훑어가는 자전과 훙타이의 처연하지만 소름 돋는 고백들,

그리고 쓰레기로 가득 찬 검은 강물과 그 기슭을 장악한 끈적끈적한 진흙 등

작품 내내 오감을 자극하던 온갖 것들이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여전히 제 주변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느낌이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핑루의 신작이 나온다면

이런 불편한 여운을 한번쯤은 더 겪어보고 싶은 것도 사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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