립맨 미스터리, 더 Mystery The 13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추지나 옮김 / 레드박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일명 립맨(RIP MAN)이라 불리는 아와노는 천재적인 어둠의 비즈니스 설계자.

그는 보이스피싱 영업소에서 만난 도모키, 다케하루 형제와 함께 새로운 범행을 모의한다.

그것은 일본에서 성공한 적 없는 이른바 유괴 사업’.

그들의 계략은 과자회사 미나토당의 사장을 납치하고 그의 어린 아들을 유괴한 다음,

사장만 풀어주면서 아들의 몸값으로 금괴를 요구하는 것.

이들에게 맞서 유괴 사건의 수사 지휘를 맡은 형사는

텔레비전 공개수사를 펼쳐서 연쇄 살인마 배드맨을 체포했던 마키시마 경시.

범인들은 끈질기게 포위망을 좁혀오는 경찰을 따돌리고 금괴를 손에 넣을 수 있을까?

유괴단과 경찰, 피해자 가족 간의 예측 불가능한 속고 속이기 작전이 펼쳐진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립맨의 원제는 犯人2-蜃氣樓’, 범인에게 고한다 2-어둠의 신기루입니다.

2004년 출간된 첫 편 이후 무려 11년 만에 나온 후속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원제를 그대로 썼다면 좋았을 거란 생각이지만,

주인공 마키시마 형사와 정면대결을 펼치는 천재적인 범죄설계자 아와노의 별명인 립맨 역시

번역 제목으로는 무척 매력적인 것 같습니다.

 

립맨이란 별명은 뛰어난 두뇌를 가진 범죄자 아와노의 기이한 행적에서 유래합니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비웃듯 완벽하게 범죄를 설계하고 실행에 옮기는 천재이며,

경찰의 움직임에 대해서도 거의 동물적인 감각을 발휘하는 인물입니다.

그래서 위기의 순간이 되면 “Rest In Peace.”는 메시지를 남기고 홀로 유유히 사라집니다.

편히 잠들라.”는 뜻의 R.I.P는 범죄라는 유희(?)의 종료를 알리는 일성이자

곧 체포될 동료들에 대한 마지막 인사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가 보이스피싱 사기단에서 만난 도모키 형제와 함께 유괴사업을 계획합니다.

립맨의 유괴사업은 경찰과 인질과 인질의 가족까지 교묘하게 속이는 것은 물론

그들의 미세한 심리변화와 행동까지 꿰뚫어보고 설계된 완벽한 프로젝트입니다.

실패까지 계산한 빈틈없는 계획과 (립맨의 예상대로) 우왕좌왕하는 경찰의 대응을 보고 있으면

독자는 어느 샌가 립맨의 사업이 성공하기를 바라게 되는, 이상한(?) 감정에 휩싸이게 됩니다.

 

한편, 전편에서 TV프로그램을 통한 공개수사로 희대의 연쇄살인마를 잡은 마키시마는

이번에도 역시 경찰 내부의 정치적 알력 속에서도 묵묵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합니다.

보이스피싱 수사 때부터 립맨의 존재를 희미하게나마 감지해온 마키시마는

일반적인 유괴범 수사와는 다른 경로로 미나토당 부자(父子) 유괴사건을 다룹니다.

그 과정에서 그를 못마땅히 여기는 경찰조직 내 권력들과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마키시마는 사건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수단을 가리지 않고, 수사에 지장을 끼친다면

상대가 직속상관이라도 치워버리는’(422p) 카리스마를 유감없이 발휘합니다.

 

전작인 범인에게 고한다가 죄책감과 트라우마에 갇힌 주인공, 경찰 내부의 추잡한 알력,

TV를 통한 범인과의 접촉 시도, 시청률 경쟁에 나선 방송사의 행태 등

다양한 설정과 서사를 통해 600여 페이지의 분량을 꽉꽉 채운 작품이라면,

립맨은 사건이나 주변 에피소드가 단순해서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아 보이는 작품입니다.

물론 초반에 립맨과 도모키 형제의 등장을 알리는 보이스피싱 사건의 전말도 흥미롭고,

엎치락뒤치락 서로를 속고 속이는 심리전을 펼치는 유괴 사건의 전개도 매력적이어서

페이지가 엄청난 속도로 넘어가는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단 한 건의 유괴사건을 다루다보니 중량감이 부족하다는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에 못잖게 아쉬웠던 점은 전작에서 저의 눈길을 사로잡았던 경찰 내부의 알력 스토리

립맨에서는 단역급 서사로 밀려났다는 점입니다.

범인에게 고한다의 서평에서 고위 관료에서 말단에 이르기까지 다채롭게 포진한 경찰들은

경찰캐릭터 백과사전의 느낌이 들 정도로 깊이나 사실감에서 압도적이었다.”라고 썼는데,

그런 압도적 느낌을 립맨에서도 기대했던 탓에 아쉬움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몇 장면 없었지만, 마키시마의 영원한 숙적인 소네 본부장과의 짜릿한 대결은

그나마 저의 아쉬움을 달래준 대목이었습니다.

 

개인적인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립맨은 시즈쿠이 슈스케의 탄탄한 미스터리를 맛볼 수 있는 수작임에 분명합니다.

올해 읽은 불티를 비롯, ‘검찰 측 죄인이나 범인에게 고한다등 그의 작품들은

사건을 다루는 솜씨도 매력적이지만 인물들의 심리를 치밀하게 그리는 점이 압권입니다.

립맨역시 시즈쿠이 슈스케의 그런 미덕들이 잘 살아있어서

적잖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금세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독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립맨의 마지막 페이지를 보니 시즈쿠이 슈스케의 신간이 곧 나올 것으로 보이는데,

가나가와 현경의 명품 마키시마가 다음엔 어떤 활약을 펼칠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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액스 버티고 시리즈
도널드 웨스트레이크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6월
평점 :
절판


버크 데보레는 23년간 제지회사에서 일해온 평범한 중산층 남자다.

하지만 미국에 불어닥친 인원 감축의 바람을 피하지 못한 그는 하루아침에 정리해고 되고 만다.

재취업을 위해 원서를 내보지만 2년이 지나도록 그를 다시 받아주는 회사는 없다.

초조해진 그는 자신의 인생과 상처 입은 영혼을 복구하기 위해 기막힌 계획을 세운다.

그는 잡지에 제지회사의 가짜 구인 광고를 낸다.

사서함에는 경쟁자들의 이력서가 쌓이고, 그는 자신보다 더 능력 있어 보이는 6명을 추린다.

뛰어난 인사 담당자라면, 버크 데보레보다는 이들을 채용할 것이다.

버크 데보레에게 필요한 것은 이 유능한 경쟁자들이 사라지는 것이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설정이나 소재도 무척 흥미로운 작품이었지만 그보다 더 관심을 가졌던 이유는

박찬욱 감독이 이 작품을 영화로 만들고 싶은 원작소설로 꼽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딱 박찬욱 감독 스타일, 기발하고 파격적인 이야기입니다.

 

언뜻 제목만 보면 도끼(Ax) 연쇄살인마를 다룬 작품으로 오해하기 쉬운데,

실제 이 제목은 직장에서 해고된 걸 비유하는 영어 표현인 도끼질 당했다에서 유래합니다.

해고의 광풍이 낳은 끔직한 참극을 그렸다는 점에서 적절한 제목으로 보이지만,

마지막 장을 덮을 땐 도끼 연쇄살인마스토리를 읽은 듯한 느낌도 강하게 들어서 그런지

꽤나 이중적이고 상징적인 의미를 가진 제목으로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액스는 제목만큼이나 다양한 면모를 가진 작품입니다.

사회문제를 정면으로 다룬 고발극이면서, 연쇄살인을 다룬 스릴러이기도 하지만

일면, 진짜 지독한 블랙코미디의 인상도 갖고 있습니다.

 

작가는 수시로 정리해고의 비정함과 부당함, 시스템의 문제를 정면으로 언급하면서

동시에, 그 광풍에 치인 한 개인이 어떻게 철저하게 붕괴되는지 디테일하게 묘사합니다.

공장자동화가 몰고 온 육체노동자의 몰락에 이어

컴퓨터의 등장 이후 거리로 내몰린 버크 같은 중간관리자들의 비극을 읽다 보면

수많은 버크 데보레를 거리로 쏟아낼, 로봇이 장악할 머지않은 미래가 암울하게 느껴집니다.

 

이런 구조적 문제에 대한 고발이 지루하게 읽히지 않는 이유는

주인공 버크가 벌이는 기상천외한 프로젝트,

경쟁자 제거하기라는 다분히 엽기적이고 오락성이 강한 연쇄살인 스토리 때문입니다.

매번 예상을 뛰어넘는 방식으로 살인극이 벌어지고,

완전범죄라고 안심할 무렵 뜻하지 않은 단서를 잡은 경찰이 등장하는가 하면,

해고의 후유증 때문에 엉망진창이 된 버크 가족들의 문제까지 뒤엉키면서

이야기는 숨 돌릴 틈 없이 급박하게 전개됩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눈앞에서 끔찍한 살인극이 묘사되고 있는데도

독자가 긴장감을 갖기는커녕 피식피식 웃음을 짓게 된다는 점입니다.

상황이 웃겨서가 아니라, 블랙코미디 같은 쓴웃음이라고 할까요?

평범한 중산층 남자가 예상치 못한 상황을 맞이하면서 킬러로 진화하는 과정을 보고 있으면

쓴웃음과 동정심, 심지어 부디 잡히지 말고 미션을 완수하기를 바라는마음까지 생깁니다.

특히 버크가 자신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갖다 붙이는 이런저런 명분들이

억지라기보다 오히려 공감이 가는 내용들이라 더욱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드는지도 모릅니다.

 

이 작품이 출간된 게 1997년이니 20년의 시간이 흐른 셈입니다.

그 사이 세상은 더욱 험악해졌고, 이제 일자리는 생존의 가장 큰 화두가 됐습니다.

그래서인지 일자리를 위해 킬러가 된 버크는 소설 속 픽션이 아니라

현실 여기저기에서 목격할 수 있는 실존 인물처럼 소름 돋게 뇌리에 각인됩니다.

한 개의 일자리, 열 명의 지원자가 제 앞에 닥친 현실이라면

저 역시 버크 같은 상상력을 발휘하지 말란 법이 없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살면서 버크와 맞닥뜨릴 일이 없기를 바랄 뿐이다.”라는 번역가 최필원 님의 말씀은

그래서 더욱 섬뜩하고 리얼하게 느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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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2016년에 이어 올해도 일본 미스터리가 대체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그런지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이번에는하며 안쓰러운(?)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조작된 시간의 원제는 사망추정시각(死亡推定時刻)’인데,

번역제목과 원제에서 연상되는 대로 피살자의 사망추정시각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법조물로,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의 문제, 각 사법주체들의 판이한 정의감 등

꽤 매력적인 코드들이 다양하게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때보다 조금은 더 큰 기대감을 갖고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 ● ●

 

후지산 기슭 대저택의 주인 와타나베 쓰네조의 딸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유괴범은 몸값 1억 엔을 요구했지만, 끝내 딸은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와타나베는 유괴범 체포를 위해 몸값을 전달하지 말 것을 지시한 경찰 수뇌부에게 분노한다.

그는 특히 딸의 사망추정시각이 몸값 수수 실패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에 집착한다.

몸값 수수 실패로 딸이 죽었다면 경찰의 비리를 까발려서라도 복수하겠다는 심산인 것.

한편 용의자로 체포된 고바야시 쇼지는 범행을 부인하지만 가혹한 취조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들을 향한 와타나베의 분노에 겁을 먹은 경찰 수뇌부는

고바야시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물론 사망추정시각까지 조작할 계획을 세운다.

무기력한 변호인 탓에 궁지에 몰린 고바야시 앞에

가난하지만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국선변호인 가와이가 나타나면서 사건은 새 국면을 맞는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법과 정의를 다루는 이야기다보니 당연히 사법시스템 내의 선과 악이 대결구도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후반부의 주인공 격인 선한 변호사 가와이를 제외하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경찰, 검찰, 변호인, 재판관, 검시관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악인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사망추정시각을 비롯한 중요한 정황들을 조작하거나,

근거 없는 자신감과 빗나간 신념을 앞세워 전근대적인 범인 만들기에 혈안이 되거나,

가난한 의뢰인에게 돈만 뜯어내곤 본연의 업무를 내팽개치거나,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재판 과정에서 대놓고 귀차니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때론 인물들의 캐릭터도, 그들의 행동도 지나치게 아날로그적이어서

이 작품이 2001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맞나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비록 거친 수준이긴 해도 과학수사가 등장하는 상황이지만,

작품 속 사법시스템은 70~80년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구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구태때문에 독자들의 분노 게이지는 급상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어딘가에서 이 모든 악습들을 일망타진할 영웅이 나타날 거라 기대하게 됩니다.

그 기대는 일부는 충족되기도 하고, 일부는 실망감만 안겨주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해피엔딩으로만 이어지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개가 작가가 의도한 이 작품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소설 집필을 위해 형사소송법을 읽다가 법의 세계에 빠져든 끝에

결국 법조인이 된 현직 변호사가 쓴 정통 법조 미스터리입니다.

이런 독특한 이력 탓인지 모르겠지만, 소재나 이야기 구조 모두 돌직구 같은 스타일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나 리포트에 가깝다고 할 정도인데,

어찌 보면 그 점이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사법시스템의 디테일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해설하는 내용이라든가

대부분 읽지 않고 그냥 넘겼던 굵은 글씨로 표시된 각종 메모나 재판 관련 서류들,

, 별 갈등 없이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한 캐릭터들은 소설적 재미와 거리가 먼 설정들이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원인입니다.

 

사망추정시각을 조작한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아마 전업소설가가 이 작품을 썼다면 이야기의 굴곡도 커지고, 픽션의 재미는 배가됐겠지만,

부당하게 작동하는 사법시스템의 민낯의 리얼리티는 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재미를 기대했던 독자 입장에서는

작가의 너무 정직한 태도가 못내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에도 일본 미스터리에 대한 안쓰러운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작가의 신작이 출간된다면 분명 귀가 솔깃해질 것 같긴 합니다.

다음엔 너무 돌직구만 던지지 말고, 변화구도 좀 섞인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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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증명
도진기 지음 / 비채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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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직 판사에서 변호사로 변신한 도진기 작가의 단편집입니다.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포함, 모두 8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각 작품마다 작가의 매력이 잘 배어있어서 마음에 들기도 했지만,

지금껏 보지 못했던 도진기 작가의 숨은 관심을 엿볼 수 있어서 더욱 좋았던 작품집입니다.

 

후반에 실린 작품별 후기에서 도진기 작가는

추리와 오컬트 혹은 호러가 결합된 작품에 늘 매료되곤 한다.”라고 고백했는데,

실제로 정글의 꿈’, ‘외딴 집에서’, ‘시간의 뫼비우스’, ‘죽음이 갈라놓을 때

적잖은 수록작들이 오컬트, 호러,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어서 무척 놀랐습니다.

 

특히 마지막 수록작인 죽음이 갈라놓을 때에 대해 도진기 작가는

내가 괴기 환상물을 쓰게 된 건 DNA 수준의 필연인지 모른다.”라고 설명했는데,

이 작품은 블라인드 테스트를 하면 누구도 도진기 작가의 작품이라고 맞출 수 없을 정도로

호러와 오컬트에 충실한 이야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물론 표제작 악마의 증명을 비롯 본격 추리물들도 다수 있지만,

그 작품들 역시 추리물다운 선명하고 깔끔한 엔딩 대신

어딘가 감성적이고 비논리적인 뉘앙스를 풍기며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 증거와 단서에 의한 합리적이고 명료한 결론이 아니라,

추정컨대, 진실은 이런 모습 아니었을까?”라는 식의 희망사항을 담은 엔딩의 느낌이 강합니다.

이런 류의 엔딩이 도진기 작가의 작품에서 처음 경험한 느낌은 아니지만,

호러, 오컬트, 판타지 단편들과 번갈아, 연이어 읽다 보니 또다른 맛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요즘 들어 단편 읽기가 좀 부담스러워지곤 했는데,

악마의 증명여름용 장르물로 적극 추천할 수 있을 만큼 알찬 단편집이었습니다.

어디 서늘한 책 하나 없을까, 하시는 분들은 꼭 찾아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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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사람을 죽여라
페데리코 아사트 지음, 한정아 옮김 / 비채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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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주인공 테드가 자살을 시도하는 장면으로 시작된다.

가족들을 여행 보내고 관자놀이에 총을 발사하려는 찰나, 초인종이 울린다.

자신의 이름을 린치라고 밝힌 방문자는 테드에게 달콤한 제안을 건넨다.

법망을 교묘히 피해간 인간쓰레기를 한 명씩 죽여주면 조직에서 테드를 죽여주겠다고.

가족이 받을 충격을 생각해서든 이 사회를 위해서든 그 방법이 훨씬 정의롭지 않으냐고.

자살은 중단되었고, 테드는 새로운 행동에 나선다. 바로 살인이다.

그의 첫 살인은 생각보다 수월했지만, 테드는 모든 것이 조금씩 뒤틀린 듯한 느낌을 받는다.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위의 줄거리는 이 작품의 첫 챕터인 Part 1의 내용을 요약한 것입니다.

모두 네 개의 챕터와 에필로그로 구성돼있는데,

스토리도, 구성도 워낙 파격적인 작품이라 나머지 챕터를 소개하기가 불가능한 작품입니다.

다만, 출판사가 공개한 정보를 인용하면, “1부의 일부 내용이 2부에서 변형, 반복되었다가

3부에서 완전히 부정되고 4부에 이르러 진실을 드러내는 식이다.”인데,

Part 1~2가 주인공 테드의 종잡을 수 없는 살인행적을 다루고 있다면,

Part 3은 과거와 현재, 현실과 환상, 분노와 광기에 짓눌린 테드의 실체를 보여주고 있으며,

Part 4는 테드가 겪은 모든 혼돈의 원인이 됐던 과거의 참혹한 기억들을 소환함으로써

어디로 튈지 예측 불가능하고 제멋대로(?)였던 길고 긴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있습니다.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이야기 구조도 그렇지만

혼돈 그 자체인 주인공 테드의 삶 역시 미로처럼 설정해놓았습니다.

출구를 찾으려 할수록 점점 더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는 느낌이랄까요?

작가의 의도를 대변한 듯한 작품 속 한 인물의 말은 그런 느낌을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저는 항상 미로를 매혹적이라고 생각했어요.

우리가 생각하는 방식 자체가 미로와 관련되어 있는 것 같아요.

테드는 자기 마음이 만들어낸 미로에 갇힌 것과도 같았어요.”

 

유년 시절부터 테드는 출구 없는 미로 같은 삶을 살아왔고,

자살을 꿈꾸기 시작한 무렵부터는 스스로 만들어낸 미로 속에서 지독한 혼란과 마주합니다.

자신이 보고 만지고 느낀 것들조차 믿을 수 없고, 자신이 누구인지조차 확신하지 못합니다.

그런 상태에서 누군가를 죽였지만, 실제 자신이 죽인 것인지,

죽인 상대가 애초 자신이 노렸던 사람인지, 상대가 정말 죽긴 죽은 것인지조차 헷갈립니다.

이러니 이야기는 미로이면서 동시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처럼 제멋대로 비틀립니다.

 

작가 스스로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고 했지만,

사실, ‘다음 사람을 죽여라는 작품 전체가 반전으로 꽉 찼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주인공 테드는 물론 등장인물 누구 하나 믿을 사람이 없고,

작가가 뿌린 크고 작은 단서들 역시 페이지나 챕터가 넘어갈 때마다 독자를 배신합니다.

말 그대로 도대체 어쩌려고 이렇게 끝없이 비틀고, 뒤집는 거야?”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로

이야기는 하염없이 미궁 속으로 빠져듭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은 책갈피를 끼워놓고 짬날 때마다 찔끔찔끔 읽어선 제 맛을 느낄 수 없고,

넉넉한 시간 여유를 갖고 한 번에 완독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

 

이야기의 핵심을 소개하려면 Part 3의 내용을 언급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이 작품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인 Part 1~2의 김을 확 빼놓는 일이라

이렇게 어중간한 서평 밖에 올리지 못하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는 Part 1~2까지 읽었을 때만 해도 올해 최고의 스릴러라고 확신했지만,

그 뒤로 전개가 늘어지면서 이런저런 군더더기가 붙는 바람에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더불어,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도 명료하게 설명되지 않은 부분들이 꽤 있어서

고심 끝에(?) 별 반 개를 덜어내기로 했습니다.

 

어떤 분의 서평을 보니 누구든 저랑 이야기 좀 나눠보잔 말입니다.’라는 문구가 있었는데,

아마 이 작품을 읽은 대부분의 독자가 비슷한 심정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아무래도 복잡다단한 심리 스릴러라서 모든 게 선명할 순 없겠지만,

그래도 나름 중요하게 설정된 요소들(가령, 주머니쥐의 의미)에 대해서만큼은

좀더 설득력 있는 설명이 있었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처음 만난 작가지만 이렇게 독자를 쥐고 흔들만한 필력이라면

후속작에 대한 기대를 안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다음에는 어떤 반전이 있는 이야기를 들고 독자를 찾아올지 벌써부터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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