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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작된 시간
사쿠 다쓰키 지음, 이수미 옮김 / 몽실북스 / 2017년 8월
평점 :
절판
2016년에 이어 올해도 일본 미스터리가 대체로 부진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그런지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이번에는’ 하며 안쓰러운(?) 기대감을 갖게 됩니다.
‘조작된 시간’의 원제는 ‘사망추정시각(死亡推定時刻)’인데,
번역제목과 원제에서 연상되는 대로 피살자의 사망추정시각이 논란의 중심에 있는 법조물로,
원죄(冤罪, 억울하게 뒤집어쓴 죄)의 문제, 각 사법주체들의 판이한 정의감 등
꽤 매력적인 코드들이 다양하게 버무려진 작품입니다.
그래서인지 다른 때보다 조금은 더 큰 기대감을 갖고 첫 페이지를 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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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지산 기슭 대저택의 주인 와타나베 쓰네조의 딸이 유괴되는 사건이 벌어진다.
유괴범은 몸값 1억 엔을 요구했지만, 끝내 딸은 시신이 되어 돌아온다.
와타나베는 유괴범 체포를 위해 몸값을 전달하지 말 것을 지시한 경찰 수뇌부에게 분노한다.
그는 특히 딸의 사망추정시각이 몸값 수수 실패 이전이었는지 이후였는지에 집착한다.
몸값 수수 실패로 딸이 죽었다면 경찰의 비리를 까발려서라도 복수하겠다는 심산인 것.
한편 용의자로 체포된 고바야시 쇼지는 범행을 부인하지만 가혹한 취조에 시달리게 된다.
자신들을 향한 와타나베의 분노에 겁을 먹은 경찰 수뇌부는
고바야시를 범인으로 몰아가는 것은 물론 사망추정시각까지 조작할 계획을 세운다.
무기력한 변호인 탓에 궁지에 몰린 고바야시 앞에
가난하지만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국선변호인 가와이가 나타나면서 사건은 새 국면을 맞는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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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정의를 다루는 이야기다보니 당연히 사법시스템 내의 선과 악이 대결구도를 형성합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것은 후반부의 주인공 격인 선한 변호사 가와이를 제외하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모든 경찰, 검찰, 변호인, 재판관, 검시관은
적극적이든 소극적이든 악인의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수뇌부의 지시에 따라 사망추정시각을 비롯한 중요한 정황들을 조작하거나,
근거 없는 자신감과 빗나간 신념을 앞세워 ‘전근대적인 범인 만들기’에 혈안이 되거나,
가난한 의뢰인에게 돈만 뜯어내곤 본연의 업무를 내팽개치거나,
한 사람의 생명이 달린 재판 과정에서 대놓고 귀차니즘을 발휘하기도 합니다.
때론 인물들의 캐릭터도, 그들의 행동도 지나치게 아날로그적이어서
이 작품이 2001년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 것이 맞나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비록 거친 수준이긴 해도 과학수사가 등장하는 상황이지만,
작품 속 사법시스템은 70~80년대를 연상시킬 정도로 구태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구태’ 때문에 독자들의 분노 게이지는 급상승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분명 어딘가에서 이 모든 악습들을 일망타진할 영웅이 나타날 거라 기대하게 됩니다.
그 기대는 일부는 충족되기도 하고, 일부는 실망감만 안겨주기도 하지만
어쨌든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해피엔딩으로만 이어지진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전개가 작가가 의도한 이 작품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이 작품은 소설 집필을 위해 ‘형사소송법’을 읽다가 법의 세계에 빠져든 끝에
결국 법조인이 된 현직 변호사가 쓴 정통 법조 미스터리입니다.
이런 독특한 이력 탓인지 모르겠지만, 소재나 이야기 구조 모두 돌직구 같은 스타일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소설이라기보다는 다큐멘터리나 리포트’에 가깝다고 할 정도인데,
어찌 보면 그 점이 미스터리 독자들에게는 가장 아쉽게 느껴지는 대목일 수도 있습니다.
특히 사법시스템의 디테일을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해설’하는 내용이라든가
대부분 읽지 않고 그냥 넘겼던 굵은 글씨로 표시된 각종 메모나 재판 관련 서류들,
또, 별 갈등 없이 자신의 역할에만 충실한 캐릭터들은 소설적 재미와 거리가 먼 설정들이라
그리 길지 않은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수시로 지루함을 느끼게 하는 원인입니다.
‘사망추정시각을 조작한다’는 설정 자체가 너무 매력적이라서
아마 전업소설가가 이 작품을 썼다면 이야기의 굴곡도 커지고, 픽션의 재미는 배가됐겠지만,
부당하게 작동하는 사법시스템의 민낯의 리얼리티는 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시나 재미를 기대했던 독자 입장에서는
작가의 ‘너무 정직한 태도’가 못내 아쉽게 느껴질 수밖에 없는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결론적으로 이번에도 일본 미스터리에 대한 안쓰러운 기대감은 충족되지 못했지만,
그래도 이 작가의 신작이 출간된다면 분명 귀가 솔깃해질 것 같긴 합니다.
다음엔 너무 돌직구만 던지지 말고, 변화구도 좀 섞인 이야기가 나오기를 기대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