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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 번째 증인 ㅣ 변호사 미키 할러 시리즈 Mickey Haller series
마이클 코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6월
평점 :
이전까지 미키 할러 시리즈는 두 편밖에(그것도 한 편은 영화로, 한 편은 책으로) 못 봤지만,
예전 존 그리샴의 작품들이 그랬듯 법정물과 스릴러의 미덕이 잘 배합된 느낌들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죄질에 관계없이 자신의 이익과 돈을 위해 의뢰인을 변호하지만
윤리적 딜레마 사이에서 갈등하는 미워할 수 없는 속물 캐릭터’는
미키 할러를 여느 변호사와도 차별화시켜주는 가장 매력적인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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먹고 사는 문제 때문에 담보대출과 주택압류 사건까지 영업장을 넓혔던 미키 할러는
의뢰인이던 리사 트래멀이 은행 부행장 살인범으로 체포되자 본연의 형사변호사로 돌아옵니다.
자신과 꼭 닮은, 유능하지만 공정하지 않은 검사 안드레아 프리먼과 맞붙게 된 미키는
확고한 증거 – 혈흔과 흉기 – 라는 치명적인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리사가 범인일 수 없다는 점, 진범이 따로 있다는 점을 밝히기 위해 전력을 다합니다.
승패를 주고받으며 검사와 엎치락뒤치락 공방을 벌이던 미키는
회심의 다섯 번째 증인을 통해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고 확신했지만
전혀 예상치 못한 반전이 벌어지면서 큰 충격을 받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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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량에 비해 줄거리가 무척 간단하게 정리됐는데,
그 이유는 ‘다섯 번째 증인’이 미스터리나 스릴러로서의 재미보다는
사건과 의뢰인을 대하는 변호인의 태도와 철학에 더 방점이 찍힌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법정에서 벌어지는 검사와의 공방이 대부분의 분량을 차지하고 있는데,
물론 법정 밖에서의 미키의 활약과 다양한 에피소드들도 등장하긴 하지만,
어쨌든 마이클 코넬리의 작품 치곤 서사가 꽤 단순한 편에 속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작품 속에서 미키 못잖은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인물은 검사 안드레아 프리먼입니다.
인종적으로도 성적으로도 소수자에 속하는 그녀는 미키가 한 번도 이겨보지 못한 강적입니다.
미키가 오직 무죄입증을 위해 양심이고 나발이고 가리지 않고 싸우는 전사라면,
안드레아는 유력한 단서 하나만 있다면 피고를 묵사발 내는 것이 정의라고 여기는 냉혈한입니다.
둘의 싸움은 그야말로 누구 하나가 죽어야 끝나는 제로섬 게임처럼 막장을 향해 달려가지만
일진일퇴를 거듭할 뿐, 어느 누구도 일방적인 리드를 가져가지 못합니다.
미키와 안드레아의 법정 공방이 이 작품의 핵심이고 재미있게 읽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좀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과도한 분량이었다는 생각입니다.
비록 살인사건을 다루고 있지만 읽는 내내 ‘다섯 번째 증인’의 미덕은
‘리사는 정말 무죄인가? 그럼, 진범은 누구?’를 밝히는 것이 아닌 것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마이클 코넬리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앞서 언급한대로 ‘사건과 의뢰인을 대하는 변호인의 태도와 철학’인 것 같았는데,
그런 면에서, 전문 평론가도 아닌 일개 독자(?)로서 툭 터놓고 털어놓자면,
법정 공방 중 100페이지 정도의 분량은 없었어도 됐을 거라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오히려 (20페이지도 채 안 되는) 소송 종료 후를 다룬 마지막 챕터에 그 분량을 투입했어야,
그래서 돈과 명예냐, 양심과 정의냐를 놓고 치열하게 갈등하는 대목을 부각시킴으로써
‘주제’를 제대로 다뤘어야 되는 게 아닐까, 라는 게 제 생각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보면, 작은 조연 정도로 등장한 신참 변호사 제니퍼 애런슨이
이 작품의 주요 인물이 됐다면 주제도 잘 살고, 미키의 내적 갈등도 잘 살았을 것 같습니다.
‘불락스’라는 별명을 가진 제니퍼 애런슨은 법대를 졸업한지 얼마 안 된 풋내기 변호사입니다.
그녀는 ‘양심 따윈 개나 줘버린’ 미키의 형사변호를 지켜보며 당혹스러움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는 일에 양심적으로 임하면서 변호에도 최선을 다하면 되잖아요.”
“양심을 키우지 마. 나도 다 해봤어. 양심은 자넬 어떤 좋은 곳으로도 이끌어주지 않아.
의뢰인이 유죄인지 무죄인지는 중요하지 않거든. 받는 돈도 똑같고.”
두 사람의 이 대화야말로 전 마이클 코넬리가 이 작품에서 하려던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검사 안드레아와의 지루한 법정 공방과 피고인 리사의 유무죄 여부보다는
‘속물적인 노련한 변호사’ 대 ‘아직 때 묻지 않은, 양심을 믿는 신참’의 대결이 더 기대됐고,
마지막 챕터에서 이 갈등이 디테일하게 묘사되기를 바랐던 것입니다.
하지만 너무 급하게 후루룩 마무리된 엔딩 덕분에 마지막 장을 덮은 후의 느낌은
‘주제 따로, 스토리 따로’였던 것이 사실입니다.
두 사람의 마지막 대화는 이런 아쉬움을 더욱 강하게 만들어줬습니다.
“형사소송 변호가 제 적성에 잘 안 맞는 것 같아요.”
“어떤 기분인지 알 것 같아. 하지만 그런 느낌은 금방 사라져. 내 말 믿어. 진짜 금방 사라져.”
마이클 코넬리의 필력은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게 하는 매력이 여전했고,
600페이지에 육박하는 분량에도 불구하고 금세 완독하게 하는 힘이 있지만,
속물 변호사 미키 할러가 언젠가 한번은 겪어야 했을 이 재미있고 심오한 주제가
제대로 다뤄지지 않은 채 마무리 된 점은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미키 할러의 대변신을 예고한 엔딩은 다음 작품을 기대하게 만드는 최대의 떡밥입니다.
만일 미키의 꿈이 이뤄진다면 다음 작품은 그야말로 파격적인 스토리가 전개될 것 같은데,
‘다섯 번째 증인’에서 후루룩 지나갔던 미키의 내적 갈등이
다음 작품에서 약간이라도 보충 설명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더불어 신참 변호사 제니퍼 애런슨의 성장기도 함께 그려지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