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팩스 부인과 여덟 개의 여권 스토리콜렉터 55
도로시 길먼 지음, 송섬별 옮김 / 북로드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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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적한 뉴저지 주 뉴브런즈윅에 사는 지극히 평범한 60대 중반의 할머니가

멕시코와 터키에서의 임무를 환상적으로 마친 후 이제 위험천만한 불가리아로 세 번째 모험을 떠난다.

작고 오동통한 체구, 복슬복슬한 흰 머리, 엉뚱 발랄한 모습은 그대로지만

더 풍성해진 모험과 스릴 넘치는 이야기로 돌아왔다.

게다가 두근두근 썸 타는 이야기까지 양념처럼 곁들어 있다.”

 

출판사 책 소개글에 나온 깜찍한 할머니 스파이 에밀리 폴리팩스에 관한 설명입니다.

할머니 스파이라는 설정도 특이하지만, 활약하는 무대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외국이고,

맡은 미션 역시 정보 획득 정도가 아니라 거의 할리우드 액션물 수준입니다.

뭐랄까, 홍콩배우 성룡의 액션영화를 본 느낌이랄까요?

사건은 험악하고 악당도 무시무시한데 정작 주인공은 코믹하고 유쾌 발랄 캐릭터라

폭력이 난무하는 영상을 보면서도 내내 웃게 되는 그런 인상을 주는 작품입니다.

여덟 개의 여권1971년에 출간된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의 세 번째 작품인데,

앞선 1~2편을 못 읽어서 폴리팩스 부인이 어떻게 CIA의 스파이가 됐는지는 잘 모르지만,

마지막 장을 덮고 나니 이 할머니라면 충분히 가능했겠구나, 라는 생각이 저절로 들었습니다.

 

CIA 담당자의 묘사대로 딴 길로 잘 새고, 충동적으로 움직이고,

자신의 직관을 믿는폴리팩스 부인의 또 다른 캐릭터는 오지라퍼인데,

원래 불가리아 지하조직에 8개의 여권을 전달하기로 돼있던 그녀는

공항에서 우연히 마주친 청년들과의 만남에 공연히끼어든 덕분에

생각지도 못한 엄청난 미션을 스스로 만들어버리고 맙니다.

불가리아에 도착하자마자 습격을 받고, 이유도 모른 채 비밀경찰의 추격을 받더니

한밤중에 납치되어 살해될 위기에 이르기도 합니다.

그 모든 것이 본인의 오지랖에서 비롯된 일이라는 걸 한참 뒤에나 알게 된 폴리팩스 부인은

움츠려들기는커녕 오히려 씩씩하게 자기 앞에 툭 떨어진 미션을 처리하겠다고 나섭니다.

불가리아의 지하조직과 스파이들을 놀라게 할 정도로 말이죠.

 

부인은 정말 친절하고, 다정하고, 온화한 분처럼 보이는데, 좋은 분은 아닌 것 같네요.”

어머나, 이건 내가 프로 스파이에게 들은 말 중 제일 좋은 칭찬이네. 고맙구먼.”

아이고, 하느님 맙소사.”

 

프로들까지 깜짝 놀라게 만든 폴리팩스 부인의 활약은 기어이 교도소 습격에 이르게 되고,

할머니+여대생으로 이뤄진 아마추어와 30여년 전 독일군과 싸웠던 한물 간 늙은 전사들과

유일하게 현직인 프로 스파이가 뒤섞인 폴리팩스 외인구단 팀

위기일발의 상황을 뚫고 불가능해 보였던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해냅니다.

물론 이 상황을 뒤늦게 전해들은 CIA가 뒷목을 붙잡고 경악한 것은 말할 것도 없습니다.

폴리팩스 부인은 결과적으로 불가리아 정치권을 뒤흔든 엄청난 일을 저질렀기 때문입니다.

할 말을 잃은 CIA에게 폴리팩스 부인은 태연스레 경과보고를 하며 요구사항을 전달하는데,

이 대목은 정말 피식피식 웃음이 나올 정도로 통쾌하게 읽혔습니다.

 

사실, 개인적으로는 말랑말랑한 주인공이 등장하는 스파이물을 좋아하진 않아서

애거서 크리스티의 명품인 미스 마플 시리즈도 한 편도 안 봤지만,

(실제로 미스 마플이 말랑말랑한 캐릭터인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막상 폴리팩스 부인을 통해 특유의 유머와 깨알 같은 재미를 맛보고 나니

앞서 출간된 시리즈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발동하게 됐습니다.

 

피와 살이 튀고, 치열한 두뇌전이 벌어지는 블록버스터 스파이물이 당기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끔 특별한 간식처럼 폴리팩스 부인을 만나보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입니다.

혹시 저처럼 편견을 가졌던 독자라면 별 부담 없이 반나절이면 완독할 수 있는 작품이니

한번쯤은 폴리팩스 부인 시리즈를 읽어보실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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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 2017-06-16 12: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편 진짜 재밌습니다~ 꼭 보세요 ㅎㅎ

하나비 2017-06-16 14:53   좋아요 1 | URL
아, 그런가요? CIA에 어떻게 입문했는지 궁금했는데, 찾아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안개 속 소녀
도나토 카리시 지음, 이승재 옮김 / 검은숲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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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은 일반적인 스릴러 범주에 우겨넣기에는 그 색깔이 너무 독특합니다.

타인의 정신을 지배하는 괴물의 이야기를 다룬 속삭이는 자도 그랬고,

그 연장선상에 있는 후속작 이름 없는 자도 마찬가지였는데,

스탠드얼론이라 할 수 있는 안개 속 소녀는 비교적 대중적인 코드로 이뤄진 작품임에도

역시나 그만의 독특한 정신세계(?)가 진하게 투영된 탓에

일반적인 스릴러라 부르기 곤란한, 그래서 호불호가 뚜렷이 갈리기 쉬운 작품이 돼버렸습니다.

 

이야기 구조는 전작들에 비해 심플합니다.

산으로 둘러싸인 폐쇄적인 마을 아베쇼에서 10대 소녀 애나 루 실종사건이 벌어집니다.

언론을 자유자재로 활용할 줄 아는 스타 형사 포겔이 아베쇼에 도착하고,

그는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여 금세 유력한 용의자를 지목함으로써 전국을 들썩이게 만듭니다.

용의자로 지목된 로리스 마티니는 평범한 학교 교사였지만,

포겔의 집요한 공세와 언론의 마녀사냥 식 보도에 광분한 대중들에 의해

순식간에 잔혹한 괴물로 낙인찍히고 맙니다.

화려한 쇼를 통해 자신의 진가를 발휘한 포겔은 당당히 아베쇼를 떠나려 했지만,

그에게 날아든 한 통의 전화는 그가 공들여 완성했던 쇼를 산산이 부숴놓습니다.

 

전작들에 등장했던 캐릭터들과 달리 안개 속 소녀의 주요인물들은 비교적 단선적입니다.

언론을 통해 사건과 수사를 쇼로 만들곤 자신에게 쏟아지는 스포트라이트를 만끽하는 포겔,

포겔이 던져준 미끼를 이용하여 대중을 선동하고 돈을 버는 언론 매체들,

진실 따윈 관심도 없이 오로지 분위기에 휩쓸려 광분하는 마을사람들,

그리고, 평범한 교사에서 사악한 괴물로 전락하는 무고한 용의자 등

도나토 카리시가 창조한 캐릭터라고 보기엔 너무 대중적이고 쉬워 보이는 인물들입니다.

 

이야기 역시 복잡다단했던 전작들과 비교하면 거의 예상된 경로로만 흘러가서,

왠지 도나토 카리시의 작품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기도 합니다.

뭐랄까, 탐욕투성이 형사와 광기에 사로잡힌 미디어와 대중을 고발하는 돌직구 같은 고발극?

괴물잡기에만 몰두한 사법제도로 인해 철저히 망가진 소시민의 비극을 그린 사회물?

이런 느낌이 강하게 들 수밖에 없게 되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나토 카리시라면 분명 그 이면에 뭔가 감춰둔 것이 분명하기에,

기대와 의심(?) 속에 계속 페이지를 넘기게 됩니다.

 

하지만, 눈썰미 빠른 독자라면 대략의 엔딩을 예상할 수 있고,

관심은 과연 작가가 어떤 방법으로 클라이맥스와 엔딩을 장식할 것인가?’에 몰리게 됩니다.

아마 이 지점에서 이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갈리게 될 것 같은데,

막판 반전을 매력적이라고 여긴 독자들은 역시 도나토 카리시!’라며 찬사를 보낼 것이고,

그 대목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억지라고 받아들인 독자들은 허탈감을 느낄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에 가까운 편이었는데,

그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반전 자체가 너무나 완벽하게 설계됐다는 느낌 때문입니다.

작가가 뿌려놓은 소소한 단서들이 일궈낸 제대로 된 반전은 독자의 감탄을 자아내지만,

안개 속 소녀의 반전은 반전 자체를 위한 끼워 맞추기 식 변명이란 생각이 듭니다.

도나토 카리시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마지막 4페이지를 통해 또 한 번의 반전을 제공하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마저도 사족 같은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엔딩과 반전에 집착한 나머지 앞서 전개된 이야기들마저 무너졌다고 할까요?

 

중앙에서 파견된 일개 형사에 불과하면서도 언론을 마음대로 주무르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수사를 이끄는 포겔의 캐릭터도 이해하기 힘든 대목이었습니다.

증거도, 단서도 없이 단지 정황만으로 마녀사냥 하듯 용의자를 특정하고 몰락시키는 장면은

오히려 그를 소시오패스처럼 보이게 만들었는데,

그것이 작가의 의도였다고는 해도 현실적으로 가능한 일인지 의문이 들 수밖에 없었습니다.

 

속삭이는 자이름 없는 자의 경우 쉽게 납득되지 않는 모호함이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100%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정신세계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 작품들이라

전부 이해하거나 공감하진 못해도 그 나름의 독특함과 매력을 지녔다고 평가했었는데,

안개 속 소녀는 잘 읽히는 맛깔난 문장 외에는

도나토 카리시만의 힘이 잘 느껴지지 않는 작품이었습니다.

매번 그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다음에 또 읽어야 하나?’를 고민하곤 했는데,

안개 속 소녀는 그 고민을 더욱 깊게 만들고 말았습니다.

물론, 그래도 나중에 신작이 나오면 결국엔 고민 끝에 또 읽게 될 것 같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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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장 행복한 탐정 시리즈 4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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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행복한 탐정이라 불리는 스기무라 사부로 시리즈의 네 번째 작품입니다.

세 번째 작품인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이후 거의 2년 만인데,

시리즈 1~2(‘누군가’, ‘이름 없는 독’)을 읽지 못한 상태에서 또다시 신작과 만나게 됐습니다.

 

대기업 이마다 콘체른 회장의 사위이자 사내 홍보지 편집자였던 스기무라는

(전작에서) 자신이 인질로 연루됐던 버스 납치사건과 아내의 불륜으로 인해

재벌가의 사위라는 타이틀을 상실하면서 직장과 가정을 한꺼번에 잃게 됩니다.

전작은 스기무라가 본가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하는 장면에서 마무리됐는데,

희망장은 그렇게 고향으로 돌아왔지만 결국 탐정의 길을 걷게 된 스기무라의 사연과 함께

그가 의뢰받은 몇몇 사건들의 해결과정과 그 이면에 숨은 이야기를 담은 작품입니다.

 

네 편의 수록작은 사실 행복한 탐정이라는 시리즈 타이틀과는 거리가 먼 내용들입니다.

(앞선 전작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역시 말할 것도 없었지요.)

스기무라가 탐문과 추리를 통해 빚어낸 성과 자체는 명쾌하고 시원하지만,

그는 행복하다기보다 소소한 탐정생활에 만족하는 소시민처럼 보일뿐이고,

진실을 드러낸 이야기는 해피엔딩보다는 씁쓸하고 착잡하게 마무리되곤 합니다.

추악한 범죄를 저지른 범인은 악당이라기에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이었고,

피해자와 가까웠던 사람들은 범인의 악의로 인해 평생 잊히지 않을 상처를 간직하게 됩니다.

지극히 평범한 사람도 믿을 수 없는 악의를 품을 수 있다!’는 편집 후기의 제목은

아마도 그런 맥락을 감안해서 지어진 것이라 생각됩니다.

 

미야베 미유키는 범인이 누구냐?’ 또는 사회가 이런 비극을 낳았다라는 서사 대신

소시민에 가까운 사립탐정의 눈에 비친 개인의 비극과 상처 자체에 초점을 맞춥니다.

잔인한 소시오패스나 연쇄살인범 이야기는 재미있게는 읽혀도 딴 세상 일일 뿐이지만,

평범한 개인이 저지른 끔직한 사건의 뒷이야기는 내 주변의 일처럼 여겨지기 마련이고,

그런 점에서 희망장에 수록된 네 작품은 뒤끝이 꽤 길게 남는 편에 속합니다.

 

특히 스기무라의 탐정으로서의 활약 자체보다

의뢰인을 포함하여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의 비하인드 스토리에 적잖은 무게를 실은 탓에

자꾸만 소설이 끝난 뒤에도 그들은 오랫동안 고통스러울 것.”이란 인상을 받게 되는데,

미야베 미유키 소설에 익숙한 저로서도 이런 인상은 그리 편하게만 다가오진 않습니다.

(물론, 아이러니하게도 그 인상 때문에 그녀의 작품을 계속 찾아 읽긴 하지만 말입니다.)

사건은 작지만 고뇌는 깊다.”는 출판사의 책 소개글은

제가 받은 인상을 한 줄 카피로 함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스기무라의 낡은 탐정사무소가 위치한 도쿄의 오가미 초 풍경이라든가

집 주인을 비롯한 이웃들의 캐릭터만 놓고 보면 포근한 일상미스터리가 먼저 떠오릅니다.

실제로 그런 느낌의 수록작도 있지만

어쨌든 희망장은 그 어느 사회파 미스터리보다 더 묵직하고 은근한 방식으로

인간의 욕망에 대해, 또 범죄가 남기는 지워지지 않는 상처에 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런 목적의식 때문인지 간혹 미스터리로서의 허술함이 눈에 띄는 대목도 있고,

단서나 증언이나 목격담 등에서 다분히 작위적인 설정이 등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아쉬움은 십자가와 반지의 초상에서도 느꼈던 점인데,

시리즈의 숙명인지 작가의 의도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후속작에서는 이런 아쉬움들이 조금은 덜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개인적으로는 3.11 동일본 대지진이 언급된 도플갱어가 제일 기억에 남았는데,

아무래도 다른 수록작에 비해 미스터리 서사가 촘촘하게 설정됐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한 남자의 30년이 넘는 자책감과 그의 주변에서 반복되는 비극을 다룬 희망장도 좋았고,

스기무라가 탐정사무소를 열게 되기까지의 과정을 프리퀄로 그린 모래 남자도 괜찮았습니다.

독자에 따라 인상 깊은 수록작이 다 다르겠지만,

평범해서 오히려 보기 드문 사립탐정 스기무라 사부로의 활약은 매 작품마다 매력적입니다.

소위 초대박 작품은 아니지만,

스기무라 사부로의 캐릭터만으로도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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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 누아르 1 : 3월의 제비꽃 (북스피어X) 개봉열독 X시리즈
필립 커 지음, 박진세 옮김 / 북스피어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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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원제인 ‘March Violets’, ‘3월의 제비꽃1933년 히틀러가 독재자의 자리에 오르자

앞 다투어 나치당에 입당했던 기회주의자를 뜻하는 단어입니다.

하지만 이들 기회주의자들이 작품의 주요 캐릭터나 소재는 아닙니다.

작가 필립 커는 전쟁준비에 광분한 당시 독일의 폭압적 분위기와

맹목적이든 공포에 기인한 것이든 오직 복종만이 생존을 보장했던,

언뜻 보면 코미디 같은 독재의 참상을 은유하기 위해 이 제목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작가 스스로도 말했듯 이 작품의 주인공 베른하르트 귄터는

레이먼드 챈들러가 창조한 하드보일드 캐릭터의 대명사 필립 말로를 떠올리게 합니다.

히틀러의 독재도, 공산주의의 망령도 마음에 들지 않았던 그는

경찰(크리포)을 그만두고 사립탐정으로 생계를 이어가는 38살의 남자입니다.

타고난 반골기질, 짜릿짜릿한 냉소와 비아냥, 집요하고 지칠 줄 모르는 탐문,

그리고 마초 기질과 훈남을 뒤섞은 듯한 언행은 베른하르트 귄터를 대표하는 캐릭터들입니다.

 

평범한 세상이었다면 그는 꽤 짭짤한 수입을 올리는 유능한 탐정으로 살아갔겠지만,

불평 한마디만으로도 인생이 끝장날 수 있었던 1930년대의 독일에서는

탐정 업무 자체보다 사방에 깔린 경찰이나 정보기관과의 충돌을 더 염려해야만 했고,

특히 권력자와 부자가 연루된 사건이라면 목숨을 걸 정도로 위협을 감내해야 했으며,

실제로 이 작품에서 귄터는 히틀러의 하수인들과 부딪히며 결정적인 위기를 겪곤 합니다.

그리고, 그 대목이야말로 이 작품을 평범한 탐정 이야기와 차별시키는 최고의 미덕입니다.

 

이미 사살되거나 강제수용소로 보내진 것이 분명한 유대인 실종자 수색을 주로 다루던 귄터는

어느 날 독일의 유력 철강 재벌에게 은밀한 의뢰를 받습니다.

그의 딸과 사위가 총에 맞은 뒤 불에 탄 채 발견된 사건이 벌어졌는데,

그들 부부의 금고에서 사라진 엄청난 보석들을 찾아달라는 것이 주된 의뢰 내용입니다.

경찰에게도 보석의 존재를 알리지 않았던 철강 재벌은 귄터에게 엄청난 사례를 약속합니다.

하지만 수사를 진행할수록 귄터는 보석보다 더 중요한 뭔가가 사건의 이면에 있으며,

뭔가의 주변에 독일 권력의 상층부가 깊이 관련돼있음을 알아내게 됩니다.

당연히 그의 수사는 권력기관의 레이더에 걸려들게 되고,

게슈타포는 물론이고 폭력집단과 암살자까지 끌어들이는 결과를 낳습니다.

 

‘3월의 제비꽃의 매력은 크게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앞서 충분히 언급했던) 주인공 베른하르트 귄터의 캐릭터이고,

또 하나는 불온하고 공포로 가득 찬 당시 독일의 분위기에 대한 리얼한 묘사입니다.

특히 생소하면서도 두려움마저 자아내는 1930년대 독일에 대한 묘사는 압권입니다.

약간의 화장만 해도 무조건 창녀로 취급되는 세상,

누군가 위대한 독일을 찬양하는 노래를 선창하면 당연히 따라 불러야 하는 세상,

가족사진 대신 ‘2+1 기획상품으로 판매된 독재자의 사진을 거실에 걸어놓아야 하는 세상 등

찰리 채플린의 영화에나 어울릴 것 같은 코미디 같은 설정들이 수시로 묘사되지만,

그것은 엄연히 히틀러와 나치가 지배하고 있던 1930년대 독일의 현실이었습니다.

얼마 전에 읽은 로랑 비네의 ‘HHhH’(황금가지)가 나치 권력층 내부를 상세히 묘사했다면,

‘3월의 제비꽃은 평범한 사람들과 그들이 사는 거리의 숨 막히는 일상에 주력함으로써

장르물 이상의 역사소설로서의 미덕도 함께 갖춘 작품입니다.

번역하신 박진세 님께서 독일 내 좌파 지식인이라고 할 수 있는 귄터의 시각을 통해

당시 독일 시민이 느꼈을 공포와 타성과 무지에서 기인한 나치에의 묵종을

체감할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라고 평한 것도 이런 맥락일 것입니다.

 

두 가지 매력을 이야기했으니 이젠 두 가지 아쉬운 점을 이야기해보겠습니다.

우선, 선명하게 정리되지 않는 미스터리 구도입니다.

귄터의 탐문은 그 방법이나 순서 모두 너무 정직할 정도로 일직선입니다.

물론 수사 시작 단계에서 그가 손에 쥔 정보가 너무 빈약했고,

그 때문에 기초적인 탐문이 불가피했다는 점은 이해되지만,

그 과정이 ‘A를 만나 B얘기를 듣고, B를 만나 C의 정보를 얻고, C를 만나...’ 등으로 전개되다 보니

어느 순간에 이르면 정말 중요한 인물은 언제 나오나?”라는 불만이 터질 수밖에 없습니다.

동시에, 습득한 정보와 추리의 결과를 독자에게 알리는 과정 역시 그다지 친절하지 않아서

독자에 따라 메모하며 읽기가 필요하다고 느끼는 경우가 적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렇듯 선명하지 않거나 불친절한 미스터리 구도는 엔딩까지 영향을 미치는데,

자세한 이야기는 못하지만, 조금 찜찜한 기분으로 마지막 장을 덮었다는 정도만 언급하겠습니다.

 

또 한 가지는 - 많은 이견이 있을 수 있지만 과도한 직유와 은유가 섞인 문장들입니다.

초중반까지만 해도 작가의 비유는 위트도 느껴지고, 촌철살인의 매력으로 읽히곤 했지만,

거의 모든 사물과 풍경과 인물을 지칠 줄 모르는 직유와 은유로 수식한 문장들은

후반부로 갈수록 피로감만 전해줄 뿐, 굳이 그 의미를 되새기고 싶지 않게 됐습니다.

이 과도한 비유를 ‘3월의 제비꽃의 최고 미덕으로 꼽는 독자도 있을 수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반쯤만 줄였다면 좀더 편한 책읽기가 됐을 거란 생각입니다.

 

번역하신 박진세 님의 후기를 보니 베른하르트 귄터 시리즈는 모두 11편이 나왔다고 합니다.

3부까지 베를린 누아르라는 이름으로 출간됐고, 이어 8편이 더 나왔는데,

7부까지는 나치 치하를 배경으로, 8부부터는 냉전시대가 배경이라고 합니다.

베른하르트 귄터의 캐릭터만 보면 그만한 시리즈가 나올 정도로 매력적이란 게 이해되지만,

미스터리로서의 미덕이라든가 복잡하게 꼬인 문장들을 떠올려보면

후속작들을 계속 읽어야 될지 고민되는 게 사실입니다.

과거의 경험(?)으로 비춰보아 분명 두 번째 베를린 누아르까지는 읽을 가능성이 높긴 한데,

첫 작품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조금만 줄어든다면

아마 11부까지의 완간을 응원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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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을 나는 말 엔시 씨와 나 시리즈 1
기타무라 가오루 지음, 정경진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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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일상 미스터리를 특별히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나름 재미나 감동 또는 운치 있는 작품이라고 입소문이 돌면

신인이든 기성이든 가리지 않고 일부러라도 찾아 읽곤 합니다.

그런 점에서 “1989년 출간 이래 일본에서 일상 미스터리의 고전이라 불린다.”

기타무라 가오루의 하늘을 나는 말은 꽤나 호기심을 끄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남녀 주인공의 캐릭터입니다.

화자이자 실질적인 주인공인 19살의 나이가 무색하게 고풍스런 여대생입니다.

벤츠 타고 드라이브나 할까?”라는 프로포즈는 거들떠보지도 않으면서

괜찮은 고서점이 있는데..”라는 말엔 귀가 종긋합니다.

적은 용돈을 쪼개서라도 오페라나 가부키 등 유명한 공연은 놓치지 않고,

지하철에서 읽는 책은 죄다 동서양의 고전이며,

심지어 여행 갈 때 지니고 가는 책도 헤이안 시대의 속요집입니다.

 

해박한 고문학 지식 덕분에 는 라쿠고가(落語家)로 유명한 엔시 씨와 만나게 됩니다.

(라쿠고(落語)는 좀 생경한 일본 예능인데, 본문 시작 전의 일러두기를 보면,

근세기에 생겨나 현재까지 계승되고 있는 일본 특유의 이야기 예술.

부채나 수건 같은 소도구와 함께 목소리, 추임새, 몸짓만으로

해학과 풍자가 섞인 이야기를 익살스럽게 연기한다.‘라고 돼있습니다.)

엔시 씨는 특정 유파의 5대 째 라쿠고가로, 어린 딸이 있는 마흔 즈음의 남자입니다.

안 그래도 라쿠고를 사랑하고 엔시 씨의 공연을 즐겨 찾던 로서는

우연히 찾아온 그와의 만남 덕분에 19살의 여름부터 겨울을 뜻깊게 보내게 됩니다.

 

엔시 씨는 라쿠고에 능한 예능인일뿐 아니라, 굳이 비유하자면 끝내주는 일상 탐정입니다.

궁금한 일이 생기면 견딜 수 없어 하는 는 엔시 씨의 특별한 능력을 알게 된 뒤로

주변에서 소소한 사건 또는 의문들이 벌어질 때마나 그에게 묻는 버릇이 생겼고

엔시 씨는 빠르든 늦든 어김없이 사건과 의문을 풀어내서 를 놀라게 하곤 합니다.

 

작가의 의도적 설정이겠지만 엔시 씨를 사심(?)없는 중년 유부남으로 설정함으로써

와 엔시 씨 사이에 남녀의 케미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때로는 스승 같고, 때로는 아버지 같고, 때로는 친구나 연인 같은 두 사람은

오히려 남녀의 케미가 없기에 더 담백하고 따뜻하게 읽히는 캐릭터입니다.

물론 엔시 씨와 나시리즈가 6편이 나왔다고 하니

그동안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는 아직은 모를 일입니다만..^^

 

하늘을 나는 말에는 모두 다섯 편의 단편이 실려 있습니다.

일상 미스터리인 만큼 살인 같은 무겁고 잔인한 사건은 전혀 없고,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경범죄 수준의 사건 또는 일상적인 의문들이 등장합니다.

어린 시절 숙부집에만 가면 악몽을 꾸곤 했던 노교수의 오랜 궁금증을 풀어준다든가,

카페 구석에 몰려 앉아 홍차에 무려 7~8스푼의 설탕을 넣는 여성의 비밀을 캔다든가,

유치원 앞에 놓여있던 장난감 목마가 하룻밤 사이에만 실종됐던 이유를 추론한다든가

그야말로 순도 100%의 일상 미스터리가 전개됩니다.

 

솔직하게 평하자면,

와 엔시 씨의 캐릭터에 매혹된 독자라도

5편에 담긴 일상 미스터리는 조금은 만족도가 떨어질 여지가 많습니다.

이 작품이 1989년에 출간됐고, 그 영향으로 많은 일상 미스터리가 출간됐다고 하지만,

요즘 들어 꽤 수준 높은 일상 미스터리(물론 진정한 의미의 일상이라기보다는

조금은 사건의 수위도 세고, 미스터리의 성격이 강한 내용들입니다만) 작품이 많아서 그런지,

고전 또는 정통 일상에 가까운 하늘을 나는 말의 다섯 수록작들은

상대적으로 밋밋하고 심심하게 읽힙니다.

간혹 비약이 심한 엔시 씨의 추리도 눈에 거슬릴 때가 있지만,

기본적으론 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그래서 엔시 씨에게 의뢰하게 되는 사건 자체가

장르물과는 거리가 먼, 오히려 의 성장소설에 어울리는 수준과 규모에 머물고 있어서

이 작품을 미스터리로 접근한 독자들에겐 아쉬움이 클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엔시 씨와 나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인 밤의 매미

1991년 제44회 일본추리작가협회상을 받았고, 곧 국내에도 출간될 예정이지만,

아직까지는 계속 이어서 읽을 것인지 마음을 결정하지 못했습니다.

워낙 독한 쪽의 취향을 가진 제가 또다시 착한 이야기를 택할지 말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뭐랄까, 사건 같은 사건도 있으면 좋겠고, 너무 신비한 엔시 씨도 좀 현실적이면 좋겠고,

반전이든 감동이든 나름의 비장의 무기도 있으면 좋겠다는 게 제 욕심입니다.

물론 추리작가협회상을 받은 걸 보면 첫 작품에 비해 미스터리가 강조된 것 같기도 하고,

, 두 사람의 케미라든가 20살이 된 의 성장도 무척 궁금해서 이래저래 고민 중입니다.

일단 제가 좋아하는 독하고 센 이야기를 1~2권 정도 읽은 뒤에 다시 생각해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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