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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평점 :
사업실패로 빚더미에 오른 채 고시원을 전전하던 최대국은 어느 날 한 남자의 방문을 받는다.
남자는 최대국의 아버지인 최희도가 총에 맞아 중태라는 소식과 함께,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한다.
아버지와 의절한 상태였지만 보상금에 욕심이 났던 최대국은 덜컥 제의를 수락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은 아들 최대국의 시점과 젊은 시절의 아버지 최희도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아들과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과거사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한편,
이를 통해 간첩, 안기부, 요정정치, 납북사건 등
6~70년대 한국 사회의 굵직한 사건을 절묘하게 작품에 녹여낸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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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이름의 작가라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니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주로 부모와 자식. 그리고 가족이란 관계가
서로에게 구원인가, 원죄인가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담아내려 노력해 왔다.”
그래서 현대를 배경으로 아들 최대국의 시점에서 전개된 첫 챕터와
6~70년대를 무대로 아버지 최희도의 시점에서 전개된 두 번째 챕터를 읽고는
오랜 세월에 걸친 부자간의 갈등을 미스터리 기법으로 푼 작품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초반부, 정확히는 46페이지에서 ‘남조선’이라는 단어를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두 개의 모순되는 느낌이 확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2017년에 간첩 이야기라니, 하는 당혹감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특별한 이유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대로 이 작품은 고정간첩, 중앙정보부, 요정정치, 납북사건 등
‘옛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극’에 어울리는 올드한 소재들로 구성돼있습니다.
캐릭터나 이야기 자체도 그런 올드함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작품입니다.
그런데도, 첫 페이지를 펼친 뒤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해버렸는데,
그것은 올드하지만 탄탄한 서사, 앞뒤가 빈틈없이 맞아 들어가는 정교한 구성,
그리고 상투적이라 해도 역시 재미있게 읽히는 스파이물의 미덕들 덕분입니다.
또한 가족의 문제에 천착해왔다는 작가의 ‘전공’이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어서
이야기의 묵직함을 더한 것도 재미의 한 요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다 드러낼 수 없는 진실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음지와 이면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 외연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반항합니다.
그런 점에서만 보면 흙수저로 태어나 비참한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아들 최대국이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물려준 것이 없는 냉전시대의 산물인 아버지 최희도와 겪는 갈등은
여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자주 봐왔던 익숙한 부자의 갈등일 뿐이지만,
‘제3의 남자’는 거기에 덧붙여 아버지의 비밀을 탐색해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장착함으로써
가족의 문제와 시대의 문제와 미스터리를 정교하게 맞붙인 작품입니다.
아버지의 과거는 벗기면 벗길수록 더 복잡한 미로를 보여줄 뿐이었고,
아버지의 비밀창고 속에 소장됐던 물건들은 아버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의 LP판, 오래 전 판매됐던 담배 은하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젊은 여인의 사진 등...
수첩의 행방은 묘연했고, 탐색의 단서는 너무나도 모호했지만,
최대국은 오직 의문의 사내가 제시한 거액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수첩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위기가 연이어 그에게 닥칩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 이렇게 위험한 것인지 최대국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대국은 문득 아버지가 새겨놓은 한마디를 기억해냅니다.
“모르는 사람이 너를 찾아와 내 이름을 대면, 그대로 도망가라.”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긴 후에야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의 진실을 알아냅니다.
소설 속 아버지 최희도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은 허구이지만 허구처럼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 무렵 대한민국 어딘가에는 실제 최희도 같은 인물이 여럿 존재했을 것만 같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 김해경, 그의 절친 김환, 그의 멘토 강춘식, 그의 숙적 서중태 등도
시한폭탄 같던 그 시대 어딘가에 분명 실존했을 것만 같은 인물들입니다.
물론, 6~70년대는 너무나 먼 시대이고, ‘간첩’이란 단어 자체가 발산하는 긴장감이나 위기감은
아무리 미사일 문제로 시끌시끌한 2017년의 대한민국이라 하더라도 생경하게 다가옵니다.
적어도 19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독자라면 모를까,
그 아래의 세대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나름의 친절한 방식으로 그 시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쓴 것은 물론,
혹시 그 시대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비극적인 가족사와 팽팽한 스파이물의 미덕을 잘 섞어놓았습니다.
46페이지에서 본 ‘남조선’이라는 단어가 준 당혹감과 호기심이라는 모순된 감정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됐고,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특별한 이유’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첨단 스파이물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날로그 수준의 ‘스파이놀이’가 아쉽겠지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제3의 남자’는 꽤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