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한 이웃
이정명 지음 / 은행나무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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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고 보니 6월의 첫날입니다.

올해는 19876월 항쟁으로부터 꼭 30년이 흐른 해입니다.

독재자의 시대가 막을 내린 뒤에도 어둠과 불의로 가득 찼던 1980년대는

그해 6월을 기점으로 거대한 하나의 시퀀스를 마무리했습니다.

비록 그 결과는 미미했고, 대중은 그 미미한 결과에 만족하면서 더 이상의 싸움을 포기했지만

어쨌든 새로운 시대를 연 전기가 됐던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선한 이웃은 그해 6월을 전후로 한 1980년대의 비극을 다룬 작품입니다.

작가는 후기에서 이런 말을 합니다.

 

인간답지 못한 시대를 인간답게 살아간다는 것은 가능할까?

87년을 살아낸 사람들은 그것이 가능하다는 확신을 준다.

그해 여름 시민들은 최루탄에 얼룩진 광장에서 희망의 노래를 불렀고,

진압경찰에게 쫓기면서도 삶을 찬미했다.”

 

선한 이웃에는 그 시대를 상징하는 극적인 캐릭터들이 다수 등장합니다.

부도덕한 국가권력에 의해 프락치로 키워진 끝에 정보요원으로 살아야만 했던 남자,

운동권의 살아있는 전설로 회자되며 정보기관을 희롱하는 신출귀몰한 남자,

시저의 암살을 다룬 연극 공연 직후 정보기관의 먹잇감이 된 신인 연극연출가,

그리고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선과 악마저 자신이 설계한대로 움직이게 만드는 관리관 등...

 

그 가운데에는, 생존을 위해 악에 부역할 수밖에 없었던,

그래서 눈앞의 삶을 위해 자신의 운명을 팔아넘긴 죄”(267p)를 저지른 자도 있고,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가 진짜 정의인지 아니면 정교하게 설계된 인지도 구분 못하거나

지금 누리는 삶이 자신의 것인지 타인에 의해 조작된 것인지조차 모르는 사람도 있고,

심지어, 스스로 괴물이 됐다는 사실마저 눈치 채지 못한 채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들은 자기 일에 최선을 다하는 선한 이웃이지만 결국엔 세상을 지옥으로 만든 자들입니다.

 

작가의 말대로 인간답지 못한 시대였기에 존재할 수 있었던 사람들이지만,

어쩌면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시대사람은 여전히 같은 얼굴로 세상을 지옥으로 만들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작가의 말을 한번만 더 인용을 하겠습니다.

 

나는 80년대의 분위기를 지금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애썼다.

최종 수정을 막 끝낸 시점에 국정농단 사건이 터졌고 블랙리스트 사건이 뒤를 이었다.

마치 1987년에서 시간의 필름을 잘라 2017년에 이어붙인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이 이야기가 1987년이 아닌 지금, 2017년의 이야기로 느껴지기도 한다.”

 

소설은 여러 사람의 시점을 번갈아 앞세우며 전개됩니다.

인물들은 시대의 광풍에 휩쓸리며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살게 되고,

그 안에서 어떻게든 자신이 정의라고 믿는 가치를 위해 혹은 생존을 위해 분투합니다.

그들은 각자의 챕터를 통해 자신의 삶과 신념과 목표를 강변하면서도

동시에 그것들에 대해 회의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고 비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국 그들의 운명은 조금도 자신의 의지대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동시에 작가는 에우리피데스의 희곡을 기반으로 한 연극 엘렉트라의 변명

꽤 비중 있는 소재로 끌어들입니다.

한쪽에서 신출귀몰한 운동권의 전설을 체포하기 위한 집요한 첩보전이 벌어지는 동안

한쪽에선 치열한 연극 논쟁이 벌어집니다.

쫓는 정보원과 쫓기는 연극연출가, 그리고 그 사이에 낀 여배우라는 설정 때문에

연극 엘렉트라의 변명은 첩보전 못잖은 분량과 비중을 부여받았는데,

어떤 때는 첩보전이 연극처럼 보이고, 어떤 때는 연극이 첩보전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문제는, 이 부분에 대해서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는 점입니다.

 

보는 시각에 따라 엘렉트라의 변명은 괴물과 악, 정의와 저항을 상징한다고 볼 수도 있지만,

반대로 작가의 지적 허세상징의 과잉이 낳은 무리수로 읽힐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굳이 그렇게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감정이입을 요구해가면서까지,

그리스-로마의 연극과 셰익스피어에 무지하거나 낯선 독자들에게 혼란을 줬어야 할까요?

엘렉트라와 클리타임네스트라의 갈등과 파국의 어느 지점을

선한 이웃의 주제의식과 연결시켜야 할지 혼란스러웠던 것은 저만의 경험일까요?

개인적인 의견을 솔직히 털어놓자면,

일체의 비유 없이 돌직구처럼 80년의 광주를 그린 한강의 소년이 온다를 떠올려 보면,

꽤 많은 상징과 은유를 동원하여 광주 이후의 80년대를 그린 선한 이웃

어쩌면 연극 엘렉트라의 변명때문에 주제 자체가 흔들렸을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이정명의 전작을 읽었던 독자로서 솔직히 고백하자면,

80년대라는 인간답지 못한 시대를 그린 작품이었기에

통속적이라도 좋으니 가슴을 뜨겁게 만드는 극적인 이야기를 기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물론 “80년대의 분위기를 지금 독자들에게 전달하려 애썼다.”는 작의는 전달됐겠지만,

예상보다 훨씬 큰 비중으로 그려진 연극 관련 내용 탓에

왠지 빠른 돌직구를 기다리고 있다가 어이없는 느린 변화구에 헛방망이질을 한 타자처럼

조금은 당혹스러웠던 것도 사실입니다.

 

그 시대의 이야기는 어떻게 그려도, 어떻게 풀어도 여전히 아프게 읽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달라진 것 없어 보이는 오늘날,

그 시대를 통찰하는 작가들이 있어서 고맙고 반갑게 느껴집니다.

예상치 못한 막판 반전은 1987년과 2017년이 그리 다르지 않음을 통렬히 보여줬고,

그 시간동안 늙고 변질돼버린 주요 인물들의 현재의 모습은

때론 공감을, 때론 탄식을 불러일으키는 대목입니다.

아쉬운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대를 오늘의 독자에게 전하려 했던 시도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박수를 보내고 싶은 선한 이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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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재나 마르틴 베크 시리즈 1
마이 셰발.페르 발뢰 지음, 김명남 옮김 / 엘릭시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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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보렌스홀트 갑문 수로에서 성폭행과 교살의 흔적이 남은 여성의 시신이 발견됩니다. 지역경찰과 함께 수사에 나선 국가범죄수사국 형사 마르틴 베크는 우여곡절 끝에 사건 발생 3개월 만에 시신의 신원을 알아내는데 성공하지만 수사는 더 이상 진전되지 못하고 교착 상태에 빠집니다. 중간에 승선한 갑판 승객까지 포함하여 100명이 넘는 다국적 승객과 선원들을 조사하는 것은 그야말로 모래밭에서 바늘 찾기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마르틴 베크는 미량의 단서조차 포기하지 않은 끝에 결국 용의자를 특정합니다. 다만, 범죄사실 입증을 위해 위험하지만 유일한 작전을 펼쳐야 하는 처지에 놓입니다.

 

북유럽 미스터리의 원점’, ‘경찰소설의 모범이라 불리는 마르틴 베크 시리즈는 스웨덴 작가 마이 셰발과 페르 발뢰가 1965년부터 10년에 걸쳐 공동집필한 작품으로, ‘로재나는 그 시리즈의 포문을 연 첫 작품입니다. 이전에 한국에 유일하게 소개된 작품은 시리즈 대표작인 웃는 경관’(동서문화, 2003)인데, 늘 읽어봐야지 하다가도 오역과 오타에 관한 평이 많아서 계속 미뤄두곤 했습니다. 그러다가 시리즈 1~2편인 로재나연기처럼 사라진 남자가 새로 출간됐다는 소식을 듣곤 드디어 스웨덴 국가범죄수사국 형사 마르틴 베크와 첫 만남을 갖게 됐습니다.

 

다 읽은 후에 서문과 후기, 출판사 소개글 등을 읽다 보니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에드 맥베인의 영향을 받았다는 언급이 있습니다. 작가 본인들의 고백인지 평론가들의 추정인지는 모르겠지만, 듣고 보니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1950년대 중반에 시작됐으니 10년 정도면 북유럽에도 그 여파가 미칠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 대한 한 줄 평을 해본다면 아마 차갑고 우울한 ‘87분서 시리즈’” 정도가 될 것 같습니다.

 

사건은 여름에 벌어지지만 마르틴 베크의 수사는 주로 으슬으슬한 가을과 겨울에 이뤄집니다. 그래서인지 비와 눈이 내리는 스웨덴 곳곳의 이른 아침과 밤풍경이 자주 묘사되는데, 그런 분위기를 더욱 차갑고 우울하게 만드는 것은 마르틴 베크의 캐릭터입니다. 딱히 열정적이라 할 수는 없어도 경찰로서의 사명감만큼은 확실한 인물이지만, 해체 직전의 가족, 몸에 밴 듯한 우울함, 툭하면 거북해지는 속, 그리고 일 외에는 특별히 관심 갖는 것이 없어 보이는 건조함 등 때문에 어지간한 하드보일드 캐릭터보다 더 딱딱하고 무채색 같은 인물로 보였습니다. ‘87분서 시리즈의 스티브 카렐라와는 무척 대조되는 캐릭터인 셈입니다. 물론 그의 주변에는 유능하고 유쾌한 동료들이 포진돼있습니다. ‘87분서 시리즈의 마이어를 닮은 콜베리와 뛰어난 기억력의 소유자 멜란데르가 그들인데, 그들 덕분에 한없이 가라앉을 수 있는 이야기의 톤이 어느 정도 생기를 갖게 됩니다.

 

마르틴 베크의 캐릭터는 후속 작품을 통해 좀더 지켜봐야 그 매력을 제대로 알 수 있겠지만, 어쨌든 처음 만난 마르틴 베크 시리즈에게 좋은 점수를 주지 못한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경찰소설의 핵심인 사건과 수사부분에서 느낀 아쉬움 때문입니다. 헨닝 망켈의 서문과 평론가의 해설, 또 출판사의 소개글 가운데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 ‘로재나는 경찰의 근본적인 덕목, 즉 참을성에 관해 이야기하는 책이다.

- 느리고 짜증스러운 현실 수사에서 유발되는 긴장감을 사용해 철저한 사실주의를 구현했다.

 

이 두 문장은 분명 로재나의 미덕을 주장하고 있지만, 정작 제겐 로재나가 안고 있는 아쉬움을 그대로 드러낸 문장으로 읽혔습니다. ‘참을성철저한 사실주의를 위해 전개는 한없이 느려졌고 디테일은 과도하게 묘사됐는데, 그 때문인지 마치 6개월에 걸친 수사일지를 통째로 읽는 느낌을 받기도 했습니다. ‘참을성은 덕목이 아니라 무기력으로 읽혔고, ‘철저한 사실주의는 전혀 긴장감을 유발하지 못했습니다. 여기에 무겁고 우울한 주인공의 캐릭터마저 더해지다 보니 얼마 안 되는 분량임에도 불구하고 굉장히 길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셜록 홈스 식 수수께끼 풀이가 만연하던 1960년대 스웨덴에서 최초로 현실적인 경찰수사를 다룬 마르틴 베크 시리즈가 신선한 충격을 준 건 사실이겠지만, 2017년의 독자들에게 어필하기에는 쉽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87분서 시리즈역시 비슷한 아쉬운 점들을 갖곤 있지만 그래도 긴장감과 속도감, 다양한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탄력 있게 만들어주고 있기에 호평 속에 여러 권의 시리즈가 연이어 출간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시리즈가 기여한 바를 기리기 위해 스웨덴 범죄소설작가 아카데미에서 마르틴 베크 상을 제정하여 매년 훌륭한 범죄소설에 시상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분명 북유럽 미스터리의 한 획을 그은 시리즈임은 분명한 사실일 것입니다. ‘로재나를 읽고 나니 (오역과 오타가 있더라도) 시리즈 대표작으로 꼽히는 웃는 경관을 먼저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작품을 통해 두 커플작가의 필력과 주인공 마르틴 베크의 매력을 재발견한다면 다시 돌아와 시리즈 2편인 연기처럼 사라진 남자를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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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티
시즈쿠이 슈스케 지음, 김미림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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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증 부족과 강압수사를 이유로 일가족 살해용의자 다케우치에게 무죄를 선고한 이사오는

재판관을 그만두고 대학 강단에서 평안한 날들을 보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그의 옆집에 다케우치가 이사를 오면서 불길한 그림자가 드리우기 시작합니다.

대부분의 가족들이 친절하고 다정다감한 다케우치에게 호감을 표하지만

이사오의 며느리 유키미만이 그의 과도한 친절과 기이한 행동을 의심합니다.

과거 일가족 살해사건의 유족이 유키미에게 접근하여 다케우치의 위험을 경고하자,

유키미는 다케우치와의 정면대결을 통해 그의 수상한 행적을 따져 묻지만,

다케우치는 명쾌한 언변을 앞세워 오히려 오히려 유키미를 곤란에 빠뜨립니다.

애써 다케우치를 외면하던 이사오는 유키미로부터 최근 벌어진 기이한 일에 대해 들은데다

의문의 침입자에게 아내가 폭행당하는 사건까지 발생하자

어쩌면 자신이 내린 무죄선고가 틀렸을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집니다.

 

● ● ●

 

검찰 측 죄인범인에게 고한다에 이어 세 번째 만난 시즈쿠이 슈스케의 작품입니다.

앞선 작품들이 검사와 형사 주인공을 앞세워 정의와 진실에 대해 다룬 정통 미스터리라면,

불티는 한 소시오패스에 의해 서서히 붕괴되어 가는 전직 재판관의 가족의 비극을 다룬

소름끼치는 스릴러에 가까운 작품입니다.

물론 시즈쿠이 슈스케답게 전직 재판관 캐릭터를 앞세워

사형제도라든가 피고의 일생을 재단해야 하는 재판관의 고뇌를 다루기도 하지만

그 부분은 어느 정도는 양념 수준에서만 다뤄지고 있습니다.

예전에 검찰 측 죄인을 읽고 썼던 서평을 찾아보니 이런 대목이 있습니다.

 

작가는 굳이 반전의 길을 택하지 않습니다.

돌직구처럼 처음부터 독자에게 모든 패를 내보인 채 앞만 보고 달려갑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야기는 엄청난 에너지와 가속의 힘을 지닙니다.

 

불티역시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시작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지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소소한 반전이나 의외의 정보들이 등장하긴 하지만,

그건 독자를 위한 작가의 최소한의 배려(?)일 뿐 이야기의 대세에 변화를 주진 못합니다.

오히려 작가는 기분 나쁠 정도로 천천히 그리고 끈적끈적한 묘사를 통해

한 가족에게 닥칠 끝 모를 재앙을 오직 한 방향으로 그려나갑니다.

 

사실, 초반부는 드라마 연속극처럼 문제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에 집중합니다.

집안일이라면 아내에게 모든 걸 떠맡기고 남 일처럼 방관하는 전직 재판관,

치매에 걸려 간병을 받으면서도 고마운 줄 몰라하는 독살스런 노모,

간병과 가정 일에 시달린 끝에 과호흡증까지 겪는 아내,

서른이 넘었지만 여전히 자기 앞가림도 못하다가 뒤늦게 공부에 뛰어든 아들,

그나마 현명하고 이성적이지만 육아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며느리 등

이사오의 집안은 겉으론 평화로워 보이지만 실은 이런저런 풍파를 겪고 있기도 합니다.

 

좀 과하다 싶을 정도로 가족 캐릭터와 집안 분위기가 묘사되던 끝에

일가족 살해용의자였지만 이사오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다케우치가

바로 옆집으로 이사를 오면서 독자들은 바짝 긴장하게 됩니다.

왜 하필 이사오의 옆집으로 이사를 온 것일까? 이사오에게 무슨 해코지라도 하려는 것인가?

검사라면 모를까, 자신에게 무죄를 선고한 재판관의 옆집으로 이사 온 저의는 무엇인가?

혹시... 그는 유죄였던 것인가?

 

전작들에 비하면 불티는 만연체의 느낌이 강한 작품입니다.

무엇이 정의인가를 놓고 선후배 검사 간의 정면충돌을 그린 검찰 측 죄인이나

다양한 경찰캐릭터와 함께 공개수사의 긴장감이 느껴졌던 범인에게 고한다에 비하면

불티는 빠른 전개를 좋아하는 독자에겐 좀 답답하게 읽힐 수도 있는 작품입니다.

그런 탓에, 이 작품에 붙은 철야책이라는 별명에 동의하지 못할 독자도 있겠지만,

실제로 첫 페이지를 열게 되면 웬만해선 중간에 접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그만큼 작가의 필력이 탄탄하고, 이야기 역시 느리긴 해도 정교하고 밀도가 높아서

이 다음 페이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질지 궁금해 하지 않을 수가 없고,

그래서 여기까지만 읽고 내일 읽어야지라는 생각을 좀처럼 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전작들처럼 검사나 형사가 등장하는 정통 미스터리를 기대한 탓에

초반부의 문제 있는 가족들의 이야기에서 살짝 멈칫하긴 했지만,

탄력이 붙으면서 스릴러의 맛이 제대로 나기 시작한 지점부터는

전작들 못잖은 재미와 긴장감을 맛보면서 마지막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유일하게 못 읽은 시즈쿠이 슈스케의 국내 출간 작품은

그가 최초로 쓴 연애소설 클로즈드 노트인데, 솔직히 거기까지 읽을 자신은 없고,

그저 그의 정통 미스터리가 빠른 시간 안에 새로 출간되기를 기대할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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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를 놓아줄게 미드나잇 스릴러
클레어 맥킨토시 지음, 서정아 옮김 / 나무의철학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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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소개하기가 참 어려운 작품입니다.

무엇을 언급해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는 스포일러가 될 내용들이기 때문입니다.

간단하게 줄이면, 5살 소년 제이콥의 뺑소니 사망사고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인데,

브리스톨 경찰청 범죄수사과 레이 스티븐스 경위와 케이트 형사의 집요한 수사가 한 축이고,

뺑소니 사고와 관련된 여성조각가 제나 그레이가 외진 해변마을로 몸을 숨긴 뒤

자신의 과거를 지우고 새로운 삶을 살기 위해 분투하는 이야기가 한 축입니다.

그리고, 1년 넘게 공들여온 레이와 케이트의 수사가 성과를 올린 이후의 이야기와

제나 그레이가 지우려 했던 과거사 및 뺑소니 사고의 진실 이야기가 중반 이후를 장식합니다.

 

500페이지의 적잖은 분량이지만 사건과 진실의 규모는 스릴러 치곤 소소한 편입니다.

충격적인 사건은 때로 단숨에 일어나지만, 그에 따르는 파멸은 느리고 착실하게,

게다가 예기치 못했던 형태로 인생을 죄어오는 것이다.”라는

알라딘 소설 MD 최원호님의 서평대로, 이야기는 느리고 착실하게전개됩니다.

특히 서론에 해당하는 1부는 무기력한 경찰의 수사와 제나 그레이의 끝없는 절망에 대해

너무나도 느리고 착실하게진행된 탓에 꽤나 지루하게 읽힙니다.

작가가 각 인물의 디테일에 힘을 줘도 너무 준다는 느낌을 받을 정도인데,

가령, 경찰 주인공인 레이 경위의 불행한 가족사 같은 에피소드는

본 이야기와 잘 섞이지 못하는데 왜 굳이 집어넣었을까, 라는 의문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부 마지막 페이지에서 독자의 뒤통수를 가볍게한 방 때려준 작가는

2부에서부터 제법 속도를 내기 시작하고, 후반부로 갈수록 미친 듯이(?) 가속을 붙입니다.

 

지루한 1부를 넘기기만 하면 마지막 페이지까지는 단숨에 달려갈 수 있지만,

너를 놓아줄게의 아쉬운 점은 초반의 지루함이 아니라

납득하기 어려운 반전과 이해할 수 없는 몇몇 인물들의 행태에 있습니다.

경찰은 당연히 조사했어야 할 내용을 조사하지 않아서 스스로 사건을 위험하게 만들었고,

주요인물인 그()는 얼마든지 자신이 빠진 늪에서 쉽게 빠져나올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구에게도 도움과 조언을 청하지 않은 채 무기력하고 파멸적인 삶을 자청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런 설정들이 개연성만 갖췄다면 서사를 떠받치는 든든한 출발점 또는 변곡점이 됐겠지만,

결과적으로는 ?”라는 반문만 자아내는 억지스러운 설정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특히 마지막에 드러나는 진실, , 많은 이들이 엮인 불행한 과거사에 대한 장황한 묘사는

왠지 불가피하고 운명적이란 느낌보다는 작가의 변명이나 핑계처럼 읽힙니다.

 

알라딘 서평 가운데 어느 분께서 속 터지고 이해 안 되는 점이라며

이 작품의 문제점에 대해 조목조목 지적한 글이 있는데,

꽤 센 스포일러라 이 작품을 안 읽은 독자라면 절대 미리 읽어선 안 되는 내용이지만,

다 읽은 제 입장에서는 100%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이었습니다.

분명 디테일에 능하고, 독자를 휘어잡는 필력은 대단한 작가지만,

정작 가장 중요한 이야기의 토대와 캐릭터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아쉬움을 남기고 말았습니다.

비유하자면, 맨 아래 벽돌 하나만 빼면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 이야기랄까요?

 

혹평에 가까운 서평을 썼지만, 그렇다고 다시 안 볼 작가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맨 아래 벽돌의 오류만 제외하면 탄탄한 필력이 엿보이는 매력 있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올해 출간된 작가의 두 번째 작품 나는 너를 본다에서는

이런저런 아쉬움들 대신 작가의 진짜 필력을 맛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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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남자
박성신 지음 / 황금가지 / 201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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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실패로 빚더미에 오른 채 고시원을 전전하던 최대국은 어느 날 한 남자의 방문을 받는다.

남자는 최대국의 아버지인 최희도가 총에 맞아 중태라는 소식과 함께,

아버지의 수첩을 찾아주는 조건으로 거액의 보상금을 제시한다.

아버지와 의절한 상태였지만 보상금에 욕심이 났던 최대국은 덜컥 제의를 수락하면서,

거부할 수 없는 아버지의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소설은 아들 최대국의 시점과 젊은 시절의 아버지 최희도 시점을 번갈아 보여주며,

아들과 어긋날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비밀스러운 과거사를 한발 한발 따라가는 한편,

이를 통해 간첩, 안기부, 요정정치, 납북사건 등

6~70년대 한국 사회의 굵직한 사건을 절묘하게 작품에 녹여낸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낯선 이름의 작가라 책날개의 작가 소개를 보니 이런 문구가 있습니다.

주로 부모와 자식. 그리고 가족이란 관계가

서로에게 구원인가, 원죄인가에 대한 고민을 작품에 담아내려 노력해 왔다.”

그래서 현대를 배경으로 아들 최대국의 시점에서 전개된 첫 챕터와

6~70년대를 무대로 아버지 최희도의 시점에서 전개된 두 번째 챕터를 읽고는

오랜 세월에 걸친 부자간의 갈등을 미스터리 기법으로 푼 작품이라고 지레 짐작을 했습니다.

 

하지만, 초반부, 정확히는 46페이지에서 남조선이라는 단어를 발견하는 순간,

갑자기 두 개의 모순되는 느낌이 확 다가왔습니다.

하나는, 2017년에 간첩 이야기라니, 하는 당혹감과

또 하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특별한 이유에 대한 호기심이었습니다.

출판사의 책 소개대로 이 작품은 고정간첩, 중앙정보부, 요정정치, 납북사건 등

옛 향수를 자극하는 시대극에 어울리는 올드한 소재들로 구성돼있습니다.

캐릭터나 이야기 자체도 그런 올드함에서 크게 벗어나진 못한 작품입니다.

그런데도, 첫 페이지를 펼친 뒤로 한 번도 쉬지 않고 마지막 페이지까지 완주해버렸는데,

그것은 올드하지만 탄탄한 서사, 앞뒤가 빈틈없이 맞아 들어가는 정교한 구성,

그리고 상투적이라 해도 역시 재미있게 읽히는 스파이물의 미덕들 덕분입니다.

 

또한 가족의 문제에 천착해왔다는 작가의 전공이 작품 곳곳에 진하게 배어있어서

이야기의 묵직함을 더한 것도 재미의 한 요인입니다.

부모는 자식에게 다 드러낼 수 없는 진실과 상처가 있기 마련이고,

자식은 그런 부모의 음지와 이면을 눈치 채지 못한 채

겉으로 드러난 외연만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비난하고 반항합니다.

그런 점에서만 보면 흙수저로 태어나 비참한 밑바닥 삶을 살고 있는 아들 최대국이

자신에게 아무 것도 물려준 것이 없는 냉전시대의 산물인 아버지 최희도와 겪는 갈등은

여타 드라마나 소설 속에서 자주 봐왔던 익숙한 부자의 갈등일 뿐이지만,

3의 남자는 거기에 덧붙여 아버지의 비밀을 탐색해가는 아들의 이야기를 장착함으로써

가족의 문제와 시대의 문제와 미스터리를 정교하게 맞붙인 작품입니다.

 

아버지의 과거는 벗기면 벗길수록 더 복잡한 미로를 보여줄 뿐이었고,

아버지의 비밀창고 속에 소장됐던 물건들은 아버지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한때 절정의 인기를 누렸던 여가수의 LP, 오래 전 판매됐던 담배 은하수,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한 젊은 여인의 사진 등...

수첩의 행방은 묘연했고, 탐색의 단서는 너무나도 모호했지만,

최대국은 오직 의문의 사내가 제시한 거액을 위해 온 힘을 다해 수첩 찾기에 나섭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위기가 연이어 그에게 닥칩니다.

도대체 아버지가 어떤 사람이었기에,

그의 흔적을 찾는 여정이 이렇게 위험한 것인지 최대국은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그 과정에서 최대국은 문득 아버지가 새겨놓은 한마디를 기억해냅니다.

모르는 사람이 너를 찾아와 내 이름을 대면, 그대로 도망가라.”

그리고 죽음의 위기를 몇 차례 넘긴 후에야 아버지가 남긴 한마디의 진실을 알아냅니다.

 

소설 속 아버지 최희도가 겪은 파란만장한 삶은 허구이지만 허구처럼만 보이지 않습니다.

그 무렵 대한민국 어딘가에는 실제 최희도 같은 인물이 여럿 존재했을 것만 같고,

그가 사랑했던 여인 김해경, 그의 절친 김환, 그의 멘토 강춘식, 그의 숙적 서중태 등도

시한폭탄 같던 그 시대 어딘가에 분명 실존했을 것만 같은 인물들입니다.

물론, 6~70년대는 너무나 먼 시대이고, ‘간첩이란 단어 자체가 발산하는 긴장감이나 위기감은

아무리 미사일 문제로 시끌시끌한 2017년의 대한민국이라 하더라도 생경하게 다가옵니다.

적어도 1987년의 KAL기 폭파사건을 조금이라도 기억하는 독자라면 모를까,

그 아래의 세대에게는 딴 나라 이야기처럼 읽힐 수도 있겠지만,

작가는 나름의 친절한 방식으로 그 시대를 이해시키기 위해 애쓴 것은 물론,

혹시 그 시대를 모르더라도 충분히 공감할 수 있는,

비극적인 가족사와 팽팽한 스파이물의 미덕을 잘 섞어놓았습니다.

 

46페이지에서 본 남조선이라는 단어가 준 당혹감과 호기심이라는 모순된 감정은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해소됐고,

결과적으로 이 작품이 세상에 나온 특별한 이유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외국의 첨단 스파이물에 익숙한 독자라면 아날로그 수준의 스파이놀이가 아쉽겠지만,

그 점만 제외한다면 3의 남자는 꽤 묵직한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돼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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