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계자들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역사를 뒤흔든 암살 사건 뒤에는 항상 설계자들이 있다.

설계자들은 권력의 배후에서 움직이는 고도의 지적 능력자들이다.

그들의 설계가 자객들에게 떨어지고, 자객들은 설계를 실행한다.

일제시대 이래, ‘개들의 도서관은 가장 강력한 암살 청부 집단이었다.

도서관에는 20만 권의 장서가 가득하지만,

아무도 책을 읽지 않고 죽음을 설계하는 장소라 하여 개들의 도서관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래생(來生)은 도서관장인 너구리 영감의 양자이자 최고의 암살자 중 한 명이다.

민주화와 함께, 도서관은 설계와 암살의 중심부에서 밀려난다.

대신 기업형의 보안 회사로 성공리에 탈바꿈한 한자의 회사가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다.

한자는 도서관 출신으로, 유학파 경영인이다.

한자의 회사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충돌하기 시작하고 걷잡을 수 없는 갈등이 빚어진다.

설계로 아버지를 잃은 여주인공 미토는

래생에게 설계의 세계를 전복할 계획을 세워 접근해오면서 엄청난 사건들이 꼬리를 잇는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2016년에 출간된 뜨거운 피에 매료되어 김언수의 전작 설계자들을 읽게 됐습니다.

2010년에 출간됐으니 뜨거운 피보다 6년 앞선 작품입니다.

설계자들을 먼저 읽었다면 뜨거운 피를 통해 김언수의 성장을 생생하게 느꼈겠지만,

거꾸로 읽다 보니 (문장은 역시 단단하고 매력적이었지만) 아무래도 치기라고 할까,

어느 정도는 감정적이고, 어느 정도는 순진한 김언수의 일면을 발견한 책읽기가 됐습니다.

 

사실 주인공인 래생(來生)은 설계와 암살의 프로세스 가운데

가장 하위에 자리 잡은 실무 자객입니다.

그런 면에서, 이 작품의 제목은 어쩌면 설계자들보다는 자객들이 어울릴지도 모릅니다.

실제 설계에 나서는 인물은 거의 등장하지 않고,

암살의 총책인 너구리 영감이나 한자, 그림자(정보통)인 정안,

그리고 래생처럼 실무를 맡은 이발사와 추, 털보 등이 주요인물로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어쨌든..

식민지시대와 군부독재시절부터 정치-기업-관료의 세계에서 일어난 수많은 의문의 죽음들은

대부분 설계자들에 의해 기획되고 자객들에 의해 자행된 완벽한 암살의 결과물입니다.

오랫동안 빈틈없는 일처리로 설계자들에게 신뢰받던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은

시대가 변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부터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합니다.

그 빈자리를 파고든 한자의 기업형 암살조직은 너구리 영감의 도서관과 전면전을 기획합니다.

그리고 그 전쟁터의 한복판으로 우리의 주인공 래생이 내던져집니다.

 

수녀원의 쓰레기통에서 발견된 뒤 너구리 영감의 양자로 입적되어 자객이 된 래생은

17살에 첫 암살을 실행했고, 그로부터 15년 동안 완벽한 자객으로 살아왔습니다.

그의 이름은 어차피 이번 생은 글렀으니, 다음 생에서나 잘해보라는 뜻을 갖고 있습니다.

물론 너구리 영감이 지어준 이름이지만, 그는 자신의 이름에 담긴 뜻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삶을 대하는 그의 태도는 무척이나 염세적입니다.

남을 죽이는 일에도, 자신의 삶을 꾸리는 일에도 냉정대신 무관심으로 일관합니다.

하지만 한자와의 전쟁이 본격화되고, 동료와 절친을 잃게 되면서 래생은 변합니다.

언제든 자신의 옆구리에 칼이 박혀도 전혀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하던 그였지만,

, 늙고 병들었거나, 실수를 했거나,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자객들이

과거 자신들을 고용했던 설계자들에 의해 냉정하게 제거된다는 사실도 잘 아는 그였지만,

그는 점점 감정적인 인간이 되고, 생각이 많은 자객으로 변해갑니다.

결국 설계자들은 암살계의 구조조정과 조직 간의 전쟁을 이야기의 배경으로 삼았지만,

실제로는 래생이라는 말단 실무 자객의 굴곡으로 가득 찬 인생기이면서

어딘가 영화 박하사탕같은 향기를 느끼게 하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래생과 너구리 영감 외에도 설계-암살과 직간접적으로 연관된 다양한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피해자이자 설계자이자 자객인 여주인공 미토, 전설적인 칼잡이 이발사’,

암살대상을 살려준 탓에 자신이 설계의 대상이 된 추, 시체소각처리 담당 털보,

환상적인 정보통 정안, 래생의 라이벌이자 악역인 한자 등은

판타지 같은 암살 이야기 속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리얼한 캐릭터들을 지니고 있어서

읽는 내내 강렬한 흡인력과 궁금증을 자아내고 있습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김언수의 문장은 단단하고 묵직한 깊이를 유지합니다.

하지만, 래생이 감정적인 인간이 되고, 생각이 많은 자객으로 변신하면서

김언수의 문장 역시 조금은 덜 단단해지고, 깊이보다는 속도에 더 신경을 쓰기 시작합니다.

래생 못잖게 어딘가 조급해 하는 것 같고, 다분히 비극적인 영웅서사의 기운이 감지됩니다.

특히 후반부와 엔딩은 설계자들뜨거운 피의 밀도의 차이를 확연히 느끼게 합니다.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문장까지 긴장감을 놓을 수 없던 뜨거운 피와 달리

설계자들의 마지막은 김언수의 의지보다는 대중성에 부응한 느낌이 강합니다.

 

사실, ‘설계자들의 래생과 너구리 영감은 뜨거운 피의 희수와 손영감과 많이 닮았습니다.

그래서인지 두 작품 속 인물들을 비교하면서 읽는 색다른 재미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노회함이라든가 세상에 대처하는 자세에 있어서만큼은 희수와 손영감이 한 수 위지만,

어딘가 날것 같고 불온한 분위기에 관한 한 래생과 너구리 영감이 압도적입니다.

능구렁이 같은 노인과 염세적인 중년의 조합이 주는 색다른 매력이랄까요?

어쩌면 김언수의 다음 작품에서도 이들을 떠올리는 커플 주인공이 등장할지도 모를 일입니다.

 

다시 한 번 거슬러 올라가 김언수의 데뷔작(?)캐비닛을 읽는다면

어떤 느낌을 받게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치기일지, 신선함일지, 무모한 도전정신일지...

동시에, 다음 작품에서 김언수의 문장이 얼마나 더 단단해지고 묵직해질지,

, 얼마나 센 이야기를 들고 나올지도 마찬가지로 궁금해지고 기대가 되는 대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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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수첩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존 리버스 시리즈의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시리즈 첫 편인 매듭과 십자가이래 일부러 순서대로 읽어왔지만,

공교롭게도 바로 앞의 스트립 잭을 못 읽은 상태에서 검은 수첩을 먼저 만나게 됐습니다.

 

고백하자면, 시리즈 1~2편 이후 3편인 이빨 자국을 읽기까지 1년 반 정도 공백이 있었는데,

그것은 존 리버스를 계속 읽어야 하나?’라는 회의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빨 자국에서 이언 랜킨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는 어느 분의 서평 때문에

큰맘(?) 먹고 존 리버스와 재회하기로 결심했고, 그 덕분에 검은 수첩까지 만나게 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직 스트립 잭을 못 보긴 했지만),

검은 수첩은 제가 존 리버스 시리즈에게 기대했던 모든 것이 담겨 있는 종합선물세트입니다.

어딘가 뻣뻣하고 빈틈도 많은데다, 수사마저 외부의 제보에 주로 의존하던 존 리버스는

이제 치고 빠지기에도 능숙하고, 위아래 사람들을 다루는 솜씨도 일취월장한 것은 물론,

복잡다단한 사건 속에서 어디를 파고들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멋진 형사로 성장했습니다.

물론 여전히 일상의 삶(연애나 가족문제 등)에 관한 한 그는 서툴거나 실수투성이입니다.

하지만 어설픈 남자 존 리버스의 모습은 애든버러의 반골형사 존 리버스가 갖지 못한

인간적이고 따뜻한 매력을 발산하고 있어서 더욱 그를 응원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초기에 몸과 마음이 트라우마로 쩔어있던 존 리버스는 상상도 잘 안 되는군요.^^)

 

검은 수첩의 또 한 가지 재미는 마치 중간결산 스페셜처럼

앞선 시리즈에서 조연 또는 단역으로 등장했던 인물들을 다시 만나볼 수 있다는 점입니다.

이언 랜킨은 서문을 통해 그 이유를 노골적으로 밝히고 있는데,

경제적인 글쓰기를 위해 (중략) 머리를 싸매고 새 인물을 창조하는 것보다

그들을 다시 불러내 쓰는 편이 훨씬 낫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라고 밝히고 있습니다.

리버스와 호흡이 잘 맞는 동료이자 엄청난 헤비 스모커인 잭 모튼,

연쇄 소녀유괴살인 수사 당시 용의자로 몰렸던 소심한 악당 앤드류 맥페일,

그리고 최면술사이자 마약에 손을 댔다가 폐인이 된 채 돌아온 동생 마이클 등이 그들인데,

머리를 싸매고 창조한 새 인물보다 훨씬 더 적절히 활용된 것은 물론,

오랜만에 재회해서, 또는 이번에는 제대로 혼내줄 수 있겠다는(?) 생각에 반갑기만 했습니다.

 

타이틀인 검은 수첩은 리버스의 파트너인 브라이언 홈스의 수첩을 뜻합니다.

여친과 다툰 후 카페에 들렀던 홈스는 괴한으로부터 습격을 당해 의식불명 상태에 빠지는데,

리버스는 홈스가 지니고 있던 검은 수첩에서 암호가 섞인 두 개의 문장에 주목합니다.

그것은 5년 전에 벌어진 센트럴호텔 화재사건에 관한 내용으로,

화재의 원인, 당시 호텔에 있던 인물들, 불에 탄 채 발견된 신원불명의 시신 등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중요한 정보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리버스는 윗선의 방해와 만류에도 불구하고

홈스의 수첩에 있던 두 개의 문장을 발판으로 5년 전 사건의 진상파악에 나섭니다.

문제는, 리버스의 수사가 거듭될수록 여기저기서 예상 못한 사건들이 일어난다는 점입니다.

 

정리해놓고 보니 무척 간단한 내용이 돼버렸는데,

사실 검은 수첩은 인물도 많고, 사건도 많아서 꽤나 복잡하게 읽히는 작품입니다.

물론 이언 랜킨은 이야기가 차곡차곡 정리되도록 친절하게 설명하고 있지만,

언뜻 보면 서로 무관해 보이는 사건들이 동시다발적으로 터져서

도대체 리버스의 몸이 몇 개가 필요한가, 의구심이 드는 독자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 사건들이 결국 하나로 수렴될 것이란 점은 익히 예상 가능한 일이고,

이언 랜킨은 그 수렴을 전혀 억지스럽지 않게, 긴장감과 재미를 겸비하여 요리합니다.

 

5년 전 호텔 화재사건과 함께 병행되는 에피소드는

애든버러 최대의 악당 모리스 제럴드 캐퍼티, 일명 빅 제르 검거 작전입니다.

경찰과 공정거래원까지 합류한 이 작전에 대해 리버스는 무척이나 회의적입니다.

누구보다 빅 제르를 잡아넣고 싶은 리버스지만,

수십 번을 잡아넣어도 결국 그는 능구렁이처럼 법원을 빠져나올 것이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새 파트너 쇼반 클락을 투입해놓은 채 자신은 비공식 수사(호텔 사건)에만 매달리지만,

그 과정에서 빅 제르가 호텔 사건과도 연관이 있다는 것을 알아낸 리버스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빅 제르와 담판을 벌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형사 리버스와 악당 빅 제르가

(적절한 비교인지 모르겠지만) 때론 홈스와 뤼팽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점입니다.

어딘가 주고받는 사이또는 앙숙이면서 감싸주는 사이의 느낌이랄까요?

번역하신 최필원 님의 후기에 따르면, 시리즈 20황야의 얌전한 개들에서는

은퇴한 리버스가 킬러의 표적이 된 빅 제르를 보호하는 내용이 나온다고 하니,

앞으로 둘 사이의 관계가 어떻게 엎치락뒤치락 할지 두고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시리즈 가운데 순서대로 읽어야 좋은 경우

대표작부터 읽은 뒤 처음으로 돌아가 순서대로 읽는 것이 좋은 경우가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존 리버스 시리즈는 후자에 속한다는 생각입니다.

그리고 처음 읽을 대표작을 추천하라면, 적어도 지금까지는, ‘검은 수첩을 꼽고 싶습니다.

그런 뒤에 조금은 어설프고 뻣뻣한 초창기 존 리버스를 읽는다면

여러 가지 아쉬움이 남더라도 다 이해하고 용서(?)할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제 다시 앞으로 돌아가 아직 못 읽은 스트립 잭을 읽을 계획입니다.

존 리버스 시리즈가 꽤 빠른 호흡으로 출간되고 있어서

어영부영 미루다가 또다시 신작에게 밀릴 지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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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손 놓지 마
미셸 뷔시 지음, 김도연 옮김 / 달콤한책 / 2016년 8월
평점 :
품절


미셸 뷔시와의 세 번째 만남입니다.

검은 수련도 좋았지만 그림자 소녀에서 그의 진가를 만끽한 바 있어,

이 작품 역시 묵직한 서사와 사건 이면의 깊은 울림을 기대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 ● ●

 

인도양의 매력적인 휴양지인 프랑스레위니옹 섬에서 가족 휴가를 보내던 마샬 벨리옹은

미모의 아내 리안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자 지역헌병대에 신고합니다.

지역헌병대장인 아자 푸르비는 목격자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수사한 끝에

신고자이자 남편인 마샬을 유력한 용의자로 특정하지만,

마샬은 무슨 까닭에선지 체포 직전 6살 된 딸 조세파와 함께 호텔에서 사라집니다.

순순히 수사에 응하던 마샬이 갑자기 도주하자 아자 푸르비는 의문에 휩싸이지만,

그의 도주 경로에서 연이어 시신이 발견되자 의문은 뒤로 미루고 체포에 주력하기로 합니다.

특수부대까지 동원된 추격전이 벌어지지만 섬 구석구석을 잘 알고 있는 마샬은

헌병대의 추격을 따돌리고 조세파와 함께 섬 반대편으로 가기 위해 전력을 다 합니다.

그리고 천신만고 끝에 도착한 섬 반대편에서 마샬은 참혹한 진실과 마주하게 됩니다.

 

● ● ●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셸 뷔시의 전작에서 느꼈던 매력들을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아쉬운 작품이었습니다.

외양 사건의 무대라든가 다양한 인종의 캐릭터 등 은 제법 화려하게 꾸며졌지만,

알맹이, 즉 스토리 자체에는 큰 영향을 미치지 못한 채 물과 기름처럼 따로 놀았고,

미스터리 자체도 구성, 개연성, 반전 모두 기대만큼 강렬하지 못했습니다.

마치 영화화를 염두에 두고 화려한 포장과 말초적인 사건만으로 조합된 작품이랄까요?

 

살인사건의 주 무대인 레위니옹 섬은 꽤나 독특한 정체성을 갖고 있습니다.

유럽-아프리카-아시아계가 뒤섞여있는 인종과 종교의 전시장,

2년마다 용암이 터져 나오는 위험한 화산섬이자 산호초로 둘러싸인 휘황찬란한 휴양지,

외지인들의 화려한 바캉스와 대비되는 원주민들의 가난과 폭력과 마약에 찌든 일상...

미셸 뷔시는 레위니옹 섬의 이런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해 적잖은 분량을 할애합니다.

당연히 독자로서는 리안의 실종사건과 연이은 살인사건이

이러한 레위니옹 섬의 묘한 분위기와 연관 있으리라 기대할 수밖에 없게 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이 점이 내 손 놓지마의 가장 아쉬운 대목이 됐습니다.

, 레위니옹 섬은 단순한 배경 이상의 역할을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물론 휴양지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은 그 자체만으로 긴장감이 배가되는 효과가 있고,

도주길에 오른 마샬 앞에 펼쳐진 화산섬의 험한 지형은 읽기만 해도 위험하기 그지없습니다.

하지만 화려한 이미지 외에 이 섬이 반드시 사건의 주 무대여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습니다.

 

, 꽤 상세하게 묘사된 등장인물들의 인종적 특징이나 종교적 차이 역시

사건 자체와는 무관하게 단지 캐릭터 설명용으로만 활용되고 있습니다.

주요 인물들을 굳이 백인-흑인-혼혈-원주민으로 구분한 이유도 잘 모르겠고,

그들 간의 인종적-종교적 갈등이 살인사건에서 특별한 동기나 배경으로 작동하지도 않습니다.

그저 휴양지 손님들은 백인이고, 종업원들은 원주민이나 혼혈인 것이 전부입니다.

 

미스터리로서의 매력도 많이 부족했는데,

우선, 용의자로 낙인찍힌 채 딸과 함께 도주길에 오른 마샬이 책의 1/3지점까지

장황하고 난해한 행동과 모호한 독백만 거듭하고 있어서 독자 입장에서 무척 난감했습니다.

내가 지금 어떤 미스터리를 읽고 있는 거지? 누명을 쓴 도망자? 잔혹한 소시오패스?”

적절한 정보와 떡밥이 제때 노출돼야 독자들을 미스터리의 흐름에 끌어들일 수 있는 법인데,

마치 모든 걸 감춰놓고 작가 혼자서만 앞으로 달려가고 있는 느낌이랄까요?

 

마샬과 대척점에 서있는 지역헌병대, 즉 수사를 맡은 인물들의 역할 배분도 아쉬웠습니다.

분명 혼혈 여성대장 아자 푸르비가 주인공인데, 정작 그녀의 역할은 눈에 띄지도 않았고,

얼마 안 되는 비중마저 부하인 크리스토와 나눠 가진 탓에 매력을 느끼기 어려웠습니다.

여성+혼혈+수사책임자로 설정됐지만 그 설정은 이야기 어디에서도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데,

그런 와중에 3~4대에 걸친 그녀의 가계도가 왜 장황하게 설명됐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아자 푸르비를 비롯한 지역헌병대는 그저 쫓는 것 외엔 별로 한 일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우연히 범인의 행적을 발견한 것 외엔 딱히 수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마지막에 드러난 레위니옹 섬의 비극의 진실과 반전은

그나마 앞서 쌓아온 서사들을 무력하게 만들 정도로 단조롭고 억지스러웠습니다.

동기는 둘째 치고라도, 범인이 왜 이렇게까지 힘들고 수고스러운 범행계획을 세운 것인지,

, 마샬은 왜 딸을 위험에 빠뜨리면서까지 경찰의 추적을 자초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말하자면, 사건 자체가 작위적으로 꾸며졌다는 느낌만 남았다는 뜻입니다.

 

앞선 두 작품을 재미있게 읽은 탓에

미셸 뷔시의 신작에 대해 이렇게 혹평을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만큼 기대가 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검은 수련의 묵직한 서사와 그림자 소녀의 사건 이면의 깊은 울림을 만나진 못했지만,

다음 작품에서는 미셸 뷔시가 자신의 주 무기를 잘 살려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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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더스 키퍼스 - 찾은 자가 갖는다 빌 호지스 3부작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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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메르세데스에 이은 빌 호지스 시리즈두 번째 작품입니다.

파인더스 키퍼스는 전작인 미스터 메르세데스와 접점이 굉장히 많은 작품입니다.

등장인물뿐 아니라 다루고 있는 사건 등 많은 면에서 그런 편인데,

그 덕분에 미스터 메르세데스를 읽은 독자에겐

본 내용 외에도 소소한 재미를 느낄 여지가 많은 작품입니다.

 

우선,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 최악의 소시오패스 브래디 하츠필드를 상대했던 빌 호지스는

당시 인연을 맺은 홀리 기브니와 함께 파인더스 키퍼스라는 탐정사무소를 차린 상태입니다.

, 이 작품의 실질적 주인공인 피트 소버스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사건으로 인해

가족이 통째로 붕괴될 뻔한 위기를 겪은 소년입니다.

그리고, 빌 호지스와 소년 피트 소버스를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하는 제롬과 바브라 남매는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마지막 장면에서 폭사의 위기를 넘긴 인물들입니다.

 

이런 식으로 전작의 유산을 적잖이 물려받은 파인더스 키퍼스지만

정작 시리즈 타이틀 롤인 빌 호지스는 등장인물표 상으로 세 번째 정도의 비중,

, 두 명의 진짜주인공을 보필하는 소박한 역할에 머물고 있습니다.

그중 한 명은 35년 전, 자신이 숭배하던 작가를 살해한 뒤 미발표 원고를 훔쳤던 모리스이고,

또 한 명은 모리스가 감춰놓았던 미발표 원고를 손에 넣게 된 피트 소버스입니다.

운명 같은 사건들이 얽히고설키면서 두 사람은 미발표 원고를 놓고 사투를 벌이게 됩니다.

그리고 두 사람의 쫓고 쫓기는 추격전 사이에 빌 호지스가 끼어들게 됩니다.

 

● ● ●

 

(약간 상세한 줄거리가 포함돼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명작 미저리의 여주인공 애니를 연상시키는 캐릭터인 모리스 벨라미는

미국 문학의 대표작 러너시리즈와 그 작가인 로스스타인에게 탐닉한 청년입니다.

하지만 러너시리즈가 거듭될수록 자신이 숭배하던 소설 속 주인공 지미 골드가

돈에 눈이 멀고 현실과 타협하면서 애초의 카리스마를 잃고 속절없이 타락하자

그를 탄생시킨 작가 로스스타인을 증오하게 됩니다.

 

결국 절필한 채 18년 동안 은둔생활을 하던 로스스타인을 찾아간 모리스는

설전 끝에 그를 살해한 뒤 미발표 상태인 러너시리즈의 후속편 원고를 훔칩니다.

하지만 그 원고를 읽어보지도 못한 상태에서 그는 성폭행 혐의로 종신형을 언도받습니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소년 피트 소버스는 그야말로 운명 같은 우연으로 인해

모리스가 구속 전에 감춰놓았던 로스스타인의 원고와 막대한 돈뭉치를 발견하게 됩니다.

문제는, 피트 소버스 역시 로스스타인의 러너시리즈에 빠져들었다는 점,

그리고, 35년을 복역하고 가석방된 모리스가 여전히 그 원고에 집착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 ● ●

 

미스터 메르세데스의 악당 브래디가 무차별로 인명을 살상하는 전형적인 소시오패스라면,

파인더스 키퍼스의 모리스는 자신이 숭배하는 소설 속 주인공 때문에 살인마저 서슴지 않는

무척 독특하고 감성적인(?) 소시오패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감정 이입을 넘어 동일시의 대상으로까지 여겼던 주인공의 타락을 지켜보면서

모리스는 말할 수 없는 분노에 빠지게 되고, 그 모든 증오심을 작가에게 쏟아 붓습니다.

그것이 마치 주인공을 올바른 길로 복귀시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 자신의 분노를 정당하게 발휘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 것처럼 여기면서 말이죠.

 

현실과 소설을 구분하지 못하고, 작가와 작품을 구분하지 못하는 모리스의 캐릭터는

스티븐 킹의 팬에게는 브래디보다 훨씬 더 매력적인 악당으로 보입니다.

앞서 언급한대로 미저리의 애니가 환생한 느낌이랄까요?

그래서인지, 스티븐 킹의 외도라 할 수 있는 탐정 시리즈 작품임에도 불구하고,

스티븐 킹 고유의 향기가 많이 느껴지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빌 호지스가 피트와 모리스에게 주인공 자리를 양보하게 된 이유도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희대의 미발표 원고를 둘러싼 피트와 모리스의 추격전은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연상시킬 만큼 극적이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특히, 만 하루 동안 숨 돌릴 틈도 없이 급박하게 전개되는 마지막 클라이맥스 장면은

어떻게 페이지가 넘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독자의 눈을 사로잡습니다.

피트와 모리스가 맞대결을 펼치는 엔딩은 어느 정도 예상됐던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샤이닝의 엔딩을 연상시킬 정도로 강렬하고 충격적입니다.

미스터 메르세데스에서 간이 덜 된 듯한 싱거움을 맛본 독자라도

스티븐 킹의 개성 넘친 호러와 대중성이 잘 배합된 파인더스 키퍼스라면

충분히 만족감을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빌 호지스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올 여름 출간된다고 하는데,

파인더스 키퍼스를 본 독자라면 그 기대감이 훨씬 더 배가될 것입니다.

스티븐 킹이 아예 대놓고 브래디 하츠필드의 부활을 예고했기 때문인데,

과연 시리즈 마지막 작품에서 빌 호지스와 브래디가 어떤 식으로 정면 대결을 펼칠지,

미스터 메르세데스파인더스 키퍼스의 트라우마를 지닌 호지스의 주변 인물들이

어떤 식으로 브래디의 끔찍한 부활에 말려들지 벌써부터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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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선택 87분서 시리즈
에드 맥베인 지음, 박진세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7년 4월
평점 :
절판


에드 맥베인의 ‘87분서 시리즈1956~2005년에 걸쳐 57편이 출간된 경찰소설로,

그야말로 반세기에 걸친 엄청난 시리즈입니다.

살인자의 선택은 그 가운데 5번째 작품으로, 1957년에 출간된 작품입니다.

(오래 전 출간됐다가 절판된 작품을 제외하고, 현재 한국에는 모두 9편이 출간된 상태인데,

피니스아프리카에에서 7, 검은숲과 황금가지에서 각각 1편이 나왔습니다.)

출간시기만 봐도 요즘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와 달리

아날로그적인 수사 기법과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작품임을 쉽게 예상할 수 있습니다.

마치 21세기 ‘CSI 시리즈20세기 수사반장을 비교한 느낌이랄까요?

 

한국에 출간된 9편 가운데 이 작품까지 겨우 4편 밖에 읽지 못한 상태라

시리즈 전체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평하기는 어렵지만,

경찰소설에 관한 한 명불허전의 고전이란 사실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엽기에 가까운 참혹한 사건도, 과학수사를 동원한 최첨단 수사도 없지만

‘87분서 시리즈는 스티브 카렐라를 비롯한 다양한 경찰 캐릭터들을 집단주인공으로 내세워

발로 뛰고, 머리로 고민하는 진짜 경찰의 모습을 보여주는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살인자의 선택에 등장하는 두 건의 살인사건과 그 해결 과정은

요즘의 미스터리나 스릴러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무척 심심하고 평이하게 보일 것입니다.

특별한 반전도 없고, 과학수사의 개가도 없고, 영웅적인 원톱 주인공도 없고,

오로지 미련하게 탐문과 단서에 집착하는 클래식한 경찰들의 활약만 그려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한번 읽기 시작하면 단숨에 마지막 페이지까지 달리게 만드는 묘한 매력이 있습니다.

아마도 다양하고 생생한 경찰 캐릭터리얼리티의 힘’,

그리고 에드 맥베인 특유의 톡 쏘는 블랙유머를 그 이유로 꼽을 수 있는데,

살인자의 선택은 이 세 가지 매력이 잘 배어있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누가 봐도 시리즈를 이끄는 것은 따뜻한 품성과 예리한 추리력을 겸비한 스티브 카렐라지만,

에드 맥베인은 영웅적인 원톱 주인공 대신 87분서의 여러 경찰들을 적절하게 중용합니다.

직전 작품인 사기꾼에서 스티브 카렐라와 그의 아내 테디가 종횡무진 활약한데 비해,

살인자의 선택에서는 신참 형사인 버트 클링과 새로 전근 온 코튼 호스가

스티브 카렐라보다 훨씬 더 큰 비중을 맡아 이야기를 이끌고 있습니다.

비교하자면, ‘CSI 시리즈에서 반장 혼자 모든 걸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구성원들이 돌아가며 사건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과 비슷한 느낌입니다.

그 덕분에 모든 캐릭터에게 따뜻한 애정을 갖게 되고,

누가 사건 해결의 주도권을 갖더라도 응원하는 마음이 생기게 되는 것입니다.

 

87분서 경찰들의 아날로그적인 수사는 CSI의 과학수사보다 더 리얼하게 다가옵니다.

실험실에서 화학약품을 뒤섞고, CCTV를 판독하고, 데이터베이스를 검색하는 CSI보다

용의자나 관련자를 반복해서 탐문하고, 산더미처럼 쌓인 서류들을 검토하는 87분서 형사들이

훨씬 더 진짜 경찰처럼 보이는 것은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캐릭터와 리얼리티의 힘을 뒷받침하는 것은 에드 맥베인의 촌철살인 같은 블랙유머입니다.

때론 능청스러운 아재 개그로, 때론 라임(Rhyme)처럼 반복되는 리드미컬한 유머로,

때론 상대방의 말문을 막히게 하는 정신없는 속사포 유머로 이야기를 끌어가는데,

가끔은 책을 읽다가 혼자서 빵 터지게 만드는 대목들도 등장하곤 합니다.

진지와 유머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드는 그의 필력에 페이지는 쉴 새 없이 넘어갑니다.

 

서평을 쓰다 보니 정작 살인자의 선택에 대해서는 별로 언급을 못했네요.

붉은 머리 여인이 네 발의 총을 맞고 사망한 주류매장 살인사건이 메인 사건이고,

87분서의 악역 경찰 로저 하빌랜드 피살사건이 서브 사건으로 전개됩니다.

메인 사건은 신참인 버트 클링이, 서브 사건은 새로 전근 온 코튼 호스가 담당하는데,

분량 면에서는 당연히 메인 사건이 압도적이지만,

더욱 호기심을 끄는 것은 향후 주인공 스티브 카렐라의 입지를 위협할(?) 것으로 보이는

87분서의 뉴 페이스코튼 호스의 첫 등장 부분입니다.

(이렇게 된 사연은 에드 맥베인의 분노에 찬 작가 후기(?)’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부유하고 안락한 관할지역만 맡던 범생이+도시 깍쟁이캐릭터 코튼 호스가

하루도 조용할 날 없는 87분서에 부임하여 스티브 카렐라와 한 팀이 된 뒤

어처구니없는 사고를 치고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 고군분투 하는 내용을 다루고 있는데,

진짜 경찰이 되기 위해 성장통을 겪는 신입의 스토리처럼 읽혀서 무척 흥미롭습니다.

 

그에 비해 버트 클링이 맡은 메인 사건은 아날로그 경찰수사의 깨알 같은 재미를 주지만,

규모도 소소하고, 해법이나 결말 모두 심플하게 설정돼서 임팩트 자체가 좀 약한 편입니다.

그런 점 때문에 살인자의 선택을 통해 ‘87분서 시리즈를 처음 접한 독자라면

중간부터 보기 시작한 탓에 이야기의 흐름도 잘 모르겠고, 인물들의 성격이나

아날로그 수사의 재미도 느낄 수 없는 연속극의 한 회처럼 읽힐 수도 있습니다.

혹시 ‘87분서 시리즈를 시작하는 독자라면 앞서 출간된 1~4편인

경찰혐오자’, ‘노상강도’, ‘마약밀매인’, ‘사기꾼(또는 이 가운데 한 권 정도라도)

먼저 읽은 후에 이 작품을 읽으시기를 추천하고 싶습니다.

그래야 살인자의 선택의 참맛을 만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저 역시 초기작 가운데 못 읽은 작품들이 꽤 있는데,

시리즈 6~7편인 Killer's Payoff(1958)Lady Killer(1958)가 출간되기 전에

(출판사의 행보로 보아 이제부터는 순서대로 출간할 것 같아서 이렇게 추정해봅니다^^)

더는 미루지 말고 빨리 마스터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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