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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숭이들
에쿠니 가오리 지음, 신유희 옮김 / (주)태일소담출판사 / 2017년 2월
평점 :
오랜만에 에쿠니 가오리의 ‘전공’을 읽었습니다.
2년 전, 마지막으로 읽은 그녀의 작품이 10대 소녀들의 성장통을 다룬 ‘수박향기’였는데,
그녀의 전공인 ‘금지된 사랑과 어긋난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읽은 것은
7~8년 전쯤의 ‘장미 비파 레몬’이 마지막 기억인 것 같습니다.
‘웨하스 의자’, ‘울 준비는 되어 있다’, ‘낙하하는 저녁’, ‘반짝반짝 빛나는’ 등
한때 그녀에게 심취하여 밑줄까지 그으며 읽었던 작품들을 떠올려보면
그 무렵이 에쿠니 가오리의 전성기가 아니었나,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벌거숭이들’은 “여전히 에쿠니 가오리, 그녀 맞네.”라는 생각이 절로 들게 할 만큼
차분하고 담담한 문장들 속에 실은 꽤나 격한 감정들을 잘 담아낸 수작이라,
아직도 그녀의 전성기가 현재진행형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벌거숭이들’에는 꽤 많은 인물이 등장합니다.
크게 보면 30대의 모모와 히비키 두 여자를 중심으로 그 가족 또는 지인들이 등장하는데,
에쿠니 가오리는 그들을 통해 인물 수만큼이나 다양한 애증의 감정들을 풀어놓습니다.
당연히 결혼할 것으로 여겨지던 6년 사귄 남자와 헤어진 뒤 9년 연하남을 택한 36살의 모모,
그런 모모를 만나면서 동시에 모모의 절친인 유부녀 히비키를 마음에 품는 27살의 사바사키,
절친의 남자란 걸 알면서도 그의 접근에 낯선 설렘을 느끼는 네 아이의 엄마 히비키 등
세 명의 중심인물은 남녀의 관계, 즉 연애와 결혼 또는 구속과 자유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또, 엄마와 ‘연애’를 경멸하며 프리라이터로서 독립적인 삶을 사는 모모의 언니 요우,
그런 딸 요우를 이해 못하며, 여자의 삶의 가치를 ‘안락한 결혼’에서 찾는 모모의 엄마 유키,
딸과 아내의 갈등을 알면서도 현명한(?) 중립적 태도로 가족을 지키는 모모의 아빠 에이스케,
황혼에 이르러 가정을 버린 채 진짜 인연 – 히비키의 엄마 카즈에 – 을 만난 야마구치,
그런 ‘새 장인’ 야마구치를 증오하면서도 정작 아내 히비키를 건성으로 대하는 하야토 등은
가족이기에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하는 갖가지 희로애락을 이야기합니다.
‘벌거숭이들’ 속의 인물들은 대부분 ‘관계’ 때문에 고민하고, 위로받고, 상처받습니다.
특히 주인공인 모모는 연애문제에서도 가족문제에서도 ‘관계’ 때문에 혼란을 겪습니다.
6년을 만난 이시와와 채 헤어지지도 않은 상태에서 연하남 사바사키를 만났던 모모는
자신과 만나는 와중에 절친인 히비키에게 (심지어 숨기지도 않고) 들이대는 사바사키를 보며
그와 자신의 관계 – 남편감? 애인? 친구? 섹스 파트너? – 에 대해 고민합니다.
그를 구속해야 하는 것인지, 자신이 그의 구속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고,
히비키를 원망하고 질투해야 하는 것인지, 그냥 모르는 척 지켜봐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콩 샐러드를 뒤적이며 모모는 이시와를 생각했다.
오늘 저녁에 만날 사바사키도.
언제까지일까.
그리고 생각한다. 언제까지 이런 짓을 해야 하는 걸까.
그렇다기보다,
어째서 인간은 꼭 누군가를 선택해야만 하는 걸까.
가족 문제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연애를 거부하고 엄마를 증오하며 가족과 등 돌린 채 히피 같은 삶을 사는 언니 요우와 달리
모모는 진작부터 어정쩡한 태도를 보이며 가족의 일원으로 남기를 선택했습니다.
그녀 역시 엄마의 집착에 반항하지만, 언니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원하진 않았기 때문입니다.
더구나 아버지의 뒤를 이어 치과의사가 되어 병원을 물려받는 ‘효녀’ 노릇도 그녀의 몫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그녀는 ‘성실한 남자와의 결혼’에 안착하기를 바라는 엄마가 불편하고,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 화해와 용서와 이해와 포용의 의무가 부과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그녀에게 ‘관계’란 삶을 윤택하게 하는 자양분이 아니라 구속을 위한 명분인지도 모릅니다.
모모 외에 다른 모든 인물들도 이와 비슷한 종류의 ‘관계에 대한 고민’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그리고 에쿠니 가오리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야기들을 통해,
또 격하지도 무겁지도 않은 간결하고 순한 문장들을 통해
그들이 ‘관계’ 때문에 겪는 감정적 혼란들을 내밀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부드럽게 읽히지만 행간은 온통 치열하고 뜨거운 불덩이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거야말로 에쿠니 가오리의 진짜 매력이란 생각입니다.
다만, 모모와 히비키는 물론 등장인물 모두 작품의 주제를 위해 기능적으로 역할 한다는 점,
즉, 지나칠 정도로 ‘적절한 문제’를 안고 있고, 지나칠 정도로 ‘적절한 관계’로 설정된 점은
(소설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읽는 내내 작위적인 느낌을 갖게 만들었습니다.
전작들과는 달리 왠지 에쿠니 가오리가 정교한 설계도를 미리 그려 놓은 뒤
그에 맞춰 캐릭터와 사건들을 배치한 느낌이랄까요?
그런데...
또, 막상 생각해보니...
제 주위에 ‘무난하고 평화롭기만 한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은 전혀 떠오르지가 않는군요.
역시 누구나 다 소설에 어울릴 법한 그런 문제와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것일까요?
번역하신 신유희 님의 후기 중 일부를 인용하며 두서없는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할 수 있는 것은 ‘부분’일 뿐이며
그래서 편리하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 것이 인간관계이지 싶다.
연애도 결혼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 ‘부분’이 전부인 양 기대어 사랑하다가도
어느 순간 또 다른 ‘부분’에 절망하여 등을 돌리기도 하는 것을 보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