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망이 죽은 밤에
아마네 료 지음, 고은하 옮김 / 모로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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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살 소녀 도노 네가가 같은 반 소녀 노조미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됩니다. 네가는 범행 수법은 순순히 진술하지만 살해동기에 관해서는 함구합니다. 현경 수사1과 형사가 된 뒤 첫 사건을 맡은 마카베는 상사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신속한 수사를 추진하지만 동기를 안 밝히는 네가 때문에 초조해집니다. 더구나 배정받은 파트너가 생활안전과 소년계 여경인 나카타라는 점 때문에 짜증이 치밉니다. 소년범죄 담당자지만 살인사건을 여러 건 해결했다는 나카타는 특별한 상상력과 촉을 발휘하여 여러 번 마카베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가난한 네가가 부잣집 딸 노조미를 질투하여 살해한 것이라는 마카베의 추리와 달리 나카타는 침착하게 두 소녀 주위를 탐문하며 자신만의 상상에 빠지곤 합니다. 마카베의 초조함이 극에 달한 가운데 뜻밖의 목격자와 단서가 나타나면서 두 사람은 두 소녀 사이의 놀라운 비밀을 알게 됩니다.

 

희망이 죽은 밤에라는 제목에는 크게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살인사건의 가해자와 피해자인 두 주인공 도노 네가(ネガ)와 가스가이 노조미(のぞみ)의 이름이 희망을 뜻하는 한자어 와 연관 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날 밤, 어떻게든 살아내기 위해 가까스로 붙잡고 있던 희망이 죽어버렸다.”라는, 액면 그대로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 희망을 죽인 건 1차적으론 극도로 지독한 가난이었습니다. 거기에다 무책임한 어른들과 무관심한 사회가 가한 2차 가해는 가난의 강도와 고통을 견딜 수 없게끔 만들었습니다.

 

사회파 미스터리를 꽤 여러 편 읽었지만 극도의 가난이 소재인 작품은 거의 처음인 듯합니다. 특히 주인공이 14살의 중학교 2학년이란 점이 눈길을 끌었는데, 그래선지 철없고 무책임한 어른이 자초한 극도의 가난이 14살 소녀의 몸과 마음에 낸 상처가 너무나도 참혹하게 읽혔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가 곪고 썩어간 끝에 살인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까지 초래했다는 사실에 내내 무거운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 와중에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는 건 전형적인 살인사건 수사관 마카베와 특별한 상상력을 지닌 생활안전과 소년계 여경인 나카타의 대비되는 캐릭터입니다. 마카베가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밀어붙이기 식 수사를 강행하는 반면, 나카타는 네가와 노조미를 비롯하여 사건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해 이런저런 상상을 하며 실마리를 찾는 특이한 수사를 고집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두 사람의 장점이 시너지 효과를 내어 진상을 파악하긴 하지만, 무겁고 어두운 이야기 속에서 마카베와 나카타의 대립되는 캐릭터는 잠시나마 쉬어갈 틈을 주는 흥미로운 설정임에 틀림없습니다.

 

마카베와 나카타의 수사네가와 노조미의 과거가 한 챕터씩 번갈아 전개되는데, 이야기는 중반부쯤 큰 반전과 함께 급격하게 선회합니다. 그 반전을 공개할 수 없다 보니 뒷이야기에 대해 조금도 언급할 수 없긴 하지만, 이때부터 독자는 작가가 숨겨놓은 여러 개의 지뢰를 차례차례 밟게 됩니다. 또한 뒤통수를 때리는 크고 작은 반전이 마지막 장까지 연이어 터지면서 안 그래도 심란한 독자의 마음을 거듭 씁쓸하게 만들곤 합니다. 미스터리의 문외한이라도 중반쯤 사건의 진상을 추정할 수 있도록 작가는 대놓고 단서를 공개합니다. 실제로 그 예상대로 전개되긴 하지만, 작가는 난 이미 진상을 알고 있었어!”라고 자만에 빠진 독자의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치면서 뜻밖의 진상을 내놓습니다. “‘극도의 가난을 소재로 한 사회파 미스터리라면 대략 이렇게 흘러가지 않을까?”라는 어리숙한 예상과 짐작을 통렬히 비웃듯 희망이 죽은 밤에는 책장을 덮을 때까지 쉼 없이 독자를 들었다 놨다 하는 작품이란 뜻입니다.

 

무엇보다 막판에 드러난 사건의 진상은 너무나도 안타깝고 참혹해서 지독한 가난과 무책임한 어른들과 무관심한 사회가 14살 소녀에게 가한 무형의 폭력에 대해 분노하게 만듭니다. 이름에 희망을 의미하는 가 들어간 소녀가 세상을 살아갈 모든 희망을 잃은 그 밤에 느꼈을 까마득한 절망에 안타까움을 느끼면서도 독자는 연민 이상의 그 무엇도 할 수 없는 무력감에 빠지기도 합니다. 부디 이런 참극이 현실에서 벌어지지 않기를 기도하는 것 외에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마네 료는 희망이 죽은 밤에를 통해 처음 한국에 소개된 작가입니다. 일본의 한 평론가는 재미있는 작가가 굉장한 작가가 되는 순간이 있다. 이 책으로 인해 아마네 료는 대단한 작가가 되었다.”라고 극찬을 했는데, 검색해보니 일본에서 출간된 작품이 엄청나게 많은데다, 이 작품이 나카타 시리즈의 첫 작품이라고 해서 깜짝 놀랐습니다. 생활안전과 소년계 여경답게 나카타 시리즈모두 소년범죄를 다루고 있는 것 같은데, ‘희망이 죽은 밤에가 좋은 성과를 거둬 남은 작품들도 꼭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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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답하는 너의 수수께끼 - 아케가미 린네는 틀리지 않아
가미시로 교스케 지음, 이연승 옮김 / 블루홀식스(블루홀6)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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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노벨 스타일의 본격 미스터리에 추리를 추리하는 미스터리라 정말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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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최고은 옮김 / 북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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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화 별장지의 바베큐 파티가 끝난 직후 끔찍한 연쇄살인 사건이 일어난다. 인근 호텔에서 최고급 만찬을 즐긴 뒤 자수한 범인은 사형을 당하고 싶어서, 또 가족에게 복수하고 싶어서 무차별 살상을 저질렀다는 불가해한 동기를 밝힌다. 하지만 범행 과정에 대한 진술은 일절 거부한다. 유족들은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자 검증회를 열고, 그 자리에 경시청 수사1과 가가 교이치로 형사가 참석한다. 유족들의 기억을 통해 재구성되는 비극 속에서 가가 형사는 사람들이 저마다 감추고 있던 비밀을 파헤치기 시작하고, 결국 예상 밖의 진실이 그 정체를 드러낸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는 열 번째 작품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일본 2013, 한국 2019년 출간)로 공식 종료됐습니다. 워낙 좋아하는 시리즈라 언젠가 다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왔는데, 가가 형사가 조연으로 등장한 희망의 끈’(일본 2019, 한국 2022)이 출간되면서 어쩌면 그 바람이 이뤄질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하게 됐습니다. 그리고 기도의 막이 내릴 때이후 꼭 10년 만에 가가 형사 시리즈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를 통해 부활했습니다.

희망의 끈을 시리즈에 포함시키느냐 여부에 따라 이 작품을 시리즈 11편 혹은 12편으로 부를 수 있는데, 개인적으론 11편으로 보는 것이 맞다는 생각입니다.(‘희망의 끈은 스핀오프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 부분은 향후 가가 형사 시리즈가 계속 이어질지 지켜봐야 확실해질 것 같습니다.

 

호화 별장지에서 하룻밤 사이에 여섯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엽기적인 사건이 벌어집니다. 즉시 범인이 자수했지만 유족들은 범인이 누구인지보다는 피해자들이 왜,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알 수 없어 분노 이상의 답답함에 치를 떱니다. 만일 범인이 끝까지 범행 과정에 대한 진술을 거부한 채 사형을 당한다면 가족의 죽음은 영원히 미스터리로 남게 되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날의 상황을 재구성하기 위해 검증회라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고, 유족 중 한 사람인 와시오 하루나는 선배 간호사 가나모리 도키코의 소개로 가가 형사를 만나 검증회에 참석해줄 것을 요청합니다. 장기 휴가 중이던 가가는 말하자면 옵서버(observer) 자격으로 검증회에 참석하여 유족들의 진술을 통해 그날의 진상을 파악해야 하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어차피 이런 생물이다. 겉으로 하는 행동과 속으로 생각하는 건 전혀 다르다. 겉과 속이 다른 게 보통이다.” (p39)

 

호화 별장지라는 설정에 걸맞게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호사스러운 생활을 즐길 만큼 넉넉한 부와 지위를 축적했고 그에 어울리는 점잖고 교양 있는 교류를 나눠왔지만, 실은 그들 사이의 관계는 이기심과 허영과 위선으로 이뤄진 것뿐입니다. 그 때문에 범행과정을 밝히기 위한 검증회는 시간이 갈수록 별장지 사람들의 추악한 관계를 폭로하는 자리로 변질되는데, 거기에 기름을 부은 건 누군가가 유족들 모두에게 보낸 의문의 한 줄 편지 -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 - 입니다. 이 편지로 인해 유족들은 자신들 가운데 누군가가 범인과 공모했다는 의심을 품게 되고, 결국 자신과 오래전부터 악연을 이어온 누군가를 범인으로 몰아세우는 이전투구가 벌어집니다. 누구나 겉과 속이 다른 일면을 갖고 있긴 하지만, 더 많은 부와 더 높은 지위를 갈망하는 호화 별장지 사람들의 허영과 위선은 살의 이상의 위험한 욕망으로 들끓고 있던 것입니다. 가가는 이들의 추악한 관계에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동시에 사소한 단서와 진술을 통해 그날 밤 벌어진 참극의 진상을 조금씩 파헤쳐나갑니다.

 

범행 과정을 밝히는 본격 미스터리의 매력도 눈길을 끌지만, 그동안 가가 형사 시리즈가 추구했던 휴먼 미스터리의 미덕도 잘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일그러진 가족 관계, 만족을 모르는 탐욕, 위선으로 가득 찬 거짓 선의, 말초적인 욕망에의 탐닉 등 어차피 겉과 속이 다른 생물인 인간들의 추악함을 고발하며 그를 통해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구도가 안정적이고 탄탄하게 그려졌다는 뜻입니다.

검증회라는 설정 때문에 가가의 행동반경이 한정돼있으며, 실제 수사보다는 토론과 추측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긴 했지만(0.5개를 뺀 유일한 이유입니다), 마지막까지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놀라운 진상을 드러내는 가가의 매력은 그동안 시리즈의 부활을 고대했던 제겐 충분히 만족스럽게 읽혔습니다.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가 팬 서비스 차원에서 나온 1회성 작품인지, 시리즈의 부활을 알리는, 말하자면 가가 형사 시즌 2’의 첫 작품인지는 아직 알 수 없지만, 그저 바람이라면 다만 몇 편이라도 가가 형사의 활약을 더 지켜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만일 후속작이 출간된다면 내년쯤이 아닐까 싶은데, 희소식이 들려오기를 간절히 기다려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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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의 끈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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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대의 카페 여주인 하나즈카 야요이가 피살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면식범의 소행으로 보고 탐문수사에 들어가지만,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야요이가 원한을 살 사람이 아니라고 증언한다. 그런 가운데 전 남편 와타누키와 카페 단골손님인 시오미가 용의선상에 떠오른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알리바이가 확실한 데다 뚜렷한 살해 동기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경시청 수사1과 형사 마쓰미야는 두 사람 다 야요이와 관련해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수사가 교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마쓰미야는 곤혹스러워 하지만 그가 소속된 팀의 리더인 가가 교이치로는 마쓰미야의 을 믿으라며 격려해준다. 그러던 중 뜻밖의 인물이 자수하면서 경찰은 사건을 종결지으려 하지만, 마쓰미야는 범인이 뭔가 숨기고 있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한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10편이자 마지막 편인 기도의 막이 내릴 때가 출간된 건 2013(일본 출간)입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난 2019년에 가가 형사가 등장하는 희망의 끈이 출간됐는데, 이 작품의 주인공은 가가 형사가 아니라 그의 사촌동생이자 경시청 수사1과 형사인 마쓰미야 슈헤이입니다. 그래선지 이 작품을 가가 형사 시리즈11번째 작품으로 볼 것인지 스핀오프로 볼 것인지, 아니면 마쓰미야 슈헤이 시리즈의 첫 편으로 볼 것인지 의견이 분분했다고 합니다. 최근 한국에 출간된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일본 출간 2023)의 출판사 소개글에는 “‘가가 형사 시리즈12번째 작품이라는 카피가 들어있는데, 그건 희망의 끈11번째 작품으로 봤다는 뜻입니다. 독자마다 느낌이 다르긴 하겠지만 개인적으론 가가 형사 시리즈의 스핀오프로 보는 게 타당하다는 생각입니다.

 

희망의 끈가가 형사 시리즈에서 자주 다뤘던 비극적인 가족사를 소재로 삼은 휴먼 미스터리입니다. 카페 여주인이 살해당한 사건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두 가족 간에 얽히고설킨 불행한 과거사, 상상을 초월하는 악연, 돌이킬 수 없는 복잡한 운명이 드러나는 구조입니다. 거기에다 수사를 담당한 마쓰미야 본인의 기가 막힌 가족사와 비밀 이야기까지 병행되면서 단순히 범인 찾기미스터리 이상의 묵직한 감동과 연민을 자아내는 작품입니다.

 

기도의 막이 내릴 때마지막 장면에서 가가는 경시청 수사1과로 복귀했습니다. ‘희망의 끈은 그 이후 3년이 지난 시점이 배경인데, 가가는 주임이란 직책의 관리자가 됐지만 여전히 마쓰미야와 함께 현장을 누비기도 합니다. 또한 이제는 형사로서 제법 관록이 붙은 마쓰미야에게 여전히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충고를 해주는 멘토로서의 역할도 성실히 수행합니다. 마쓰미야는 그런 충고에 툴툴거리면서도 이따금 자신의 성장을 확인할 때마다 가가에게 고마움을 느끼곤 합니다. 또한 결정적인 순간마다 수사에 큰 변곡점을 이끌어내는 가가를 보면서 자신의 부족한 부분을 절감하기도 합니다.

무엇보다 흥미로운 건 마쓰미야가 비극적인 가족사를 수사하는 입장이자 동시에 뒤늦게 자신의 가족사의 비밀을 알게 되는 당사자라는 점입니다. ‘가가 형사 시리즈의 팬이라면 가가 역시 비슷한 경험을 겪었다는 걸 알고 있을 텐데, 그래선지 마치 기시감 같은 것마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이유들 때문에 이 작품을 마쓰미야 슈헤이 시리즈의 첫 편으로 여기는 독자도 꽤 많을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등장인물도 꽤 많고 사소한 설명만으로도 스포일러가 될 여지가 많은 작품이라 내용에 대해선 별로 언급하지 못했는데, 그만큼 허투루 읽어 넘길 페이지가 없을 정도로 재미있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설정만 보면 막장 가족극으로 폄하하는 독자도 있을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히가시노 게이고 특유의 정교한 미스터리가 탄탄하게 뒷받침하고 있어서 별 거부감 없이 읽어나갈 수 있는 작품입니다.

 

원래 이렇게 급하게 읽을 생각이 없었는데, 가가 형사가 주인공을 맡은 당신이 누군가를 죽였다가 출간되는 바람에, 그 직전 작품인 희망의 끈을 부랴부랴 읽게 됐습니다. 가가 형사와 다시 만난 것도 반가웠고, 마쓰미야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도 흐뭇했습니다. 물론 수시로 눈가를 뜨끈하게 만드는 히가시노 게이고의 휴먼 미스터리는 정말 매력적이었습니다.

요즘 들어 히가시노 게이고의 작품을 여러 편 읽게 됐는데, 새삼 그의 천재적인 이야기꾼 재능에 매번 탄복하곤 했습니다. 아직 못 읽은 그의 작품들이 수두룩하지만 그래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그마저도 다 읽고 나면 오래 전에 읽은 명품들을 다시 한 번 찾아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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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몰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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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인 각본가 가이 치히로는 유명세를 타고 있는 영화감독 하세베 가오리에게서 신작 각본에 대해 의논하고 싶다는 메일을 받고 깜짝 놀랍니다. 더구나 그 소재가 15년 전 고향 사사즈카초에서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이란 사실에 궁금증이 더해졌지만, 실은 가오리 역시 그곳에서 3년 정도 살았으며, 그래서 그 사건을 영화로 조명하고 싶다는 설명을 듣곤 그녀의 신작에 전력을 다하기로 합니다. 그런데 자료조사를 하면 할수록 치히로는 혼란에 빠집니다. 새롭게 밝혀낼 진상이 없는 그 사건에 가오리가 집착하는 이유도, 영화로 만들려는 이유도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가오리는 그저 알고 싶어서.”라는 모호한 말만 할뿐입니다. 한편 치히로는 일가족 살해사건과 비슷한 시기에 사고로 죽은 언니 치호를 떠올리며 착잡한 심경에 빠집니다.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에 별 3.5개라는, 보기 드문 야박한 평점을 주긴 했지만, 그건 일몰이 함량이 부족한 작품이라거나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서사나 스토리가 제 취향과 거리가 멀어 보였기 때문입니다. 인터넷서점에서 일본소설로만 분류돼서 미스터리 작품이 아니란 건 알고 있었지만 일본의 어느 한적한 시골 마을을 강타한 전대미문의 살인 사건. 15년 전에 일어난 그 사건을 좇는 두 여성이 맞닥뜨린 진실은?”이라는 소개글 때문에 미나토 가나에 특유의 미스터리 서사를 조금은 맛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고 읽은 건데, 분명 살인사건의 진실을 찾아가는 이야기는 맞지만, ‘일몰은 두 여성 가오리와 치히로가 유년시절과 청소년시절에 겪은 깊은 상처와 정면으로 마주하는 이야기를 그린 정통소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계 유수 영화제에서 수상하며 일약 유명세를 타게 됐지만 하세베 가오리는 대중성 높은 상업영화와는 거리가 먼 감독입니다. 오히려 논픽션에 가까운 무거운 주제 - ‘자살한 자들의 마지막 한 시간’ - 를 그려내서 화제가 됐는데, 그녀는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함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가 알고 싶어서영화를 만들었다는, 다소 선문답 같은 대답을 내놓은 바 있습니다. 그리고 어릴 적 잠시 살았던 사사즈카초에서 15년 전 벌어진 일가족 살해사건을 영화로 만들려고 하는 지금도 역시 같은 목적을 견지하고 있습니다.

반면 업계에 발을 들인 지 10년이 됐는데도 대작가의 조수 역할에 머물고 있는 신인 각본가 가이 치히로는 가오리와의 작업을 통해 제대로 된 각본가로 성공하겠다는 열망에 사로잡히지만, 시간이 갈수록 가오리의 목적을 이해하지 못해 당황합니다. 범인이 뒤바뀔 일도, 이미 알려진 것 외에 새롭게 드러날 일가족의 사연도 없는데 굳이 그 사건을 영화로 만드는 이유를 알 수 없기 때문입니다. 과연 가오리는 이 영화를 통해 무엇을 보여주고 싶은 건지, “알고 싶어서.”라는 가오리의 말 속엔 무슨 함의가 숨어있는 건지 치히로는 내내 답답할 뿐입니다.

 

감독님은 그렇게까지 해서 뭘 알고 싶은데요? 그리고 알면, 그 다음에 뭐가 있는데요?”

잘은 모르지만, 알지 않고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까요.” (p325)

 

인구 15천 명 안팎의 작은 소도시 사사즈카초를 무대로 하고 있지만 일몰에는 가오리와 치히로를 둘러싼 여러 건의 죽음이 등장합니다. 가족, 친구, 좋아하는 사람을 비극적으로 떠나보냈던 가오리와 치히로는 보통사람들은 상상하기 어려운 큰 상처와 트라우마를 지닌 채 성장했고, 그것들은 지금도 현재진행형입니다. 그리고 두 사람이 영화 자료조사 차 여러 사람을 만나며 접하게 되는 정보들은 뜻밖의 진실을 알게 해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상처와 트라우마를 더 고통스럽게 헤집기도 합니다. 그 지난한 과정들이 자신들을 따뜻한 구원으로 이어줄지, 더 가혹한 지옥에 밀어 넣을지 알 수 없는 상태에서 가오리와 치히로는 15년 전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하기로 결심하는 것입니다.

 

야박한 평점을 준 이유가 서사나 스토리가 제 취향과 거리가 꽤 멀어 보였기 때문이라고 앞서 밝혔는데, 저와는 반대로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 없이 절망의 밑바닥을 경험한 사람들의 구원과 재생에 관한 이야기라는 홍보 카피에 눈길이 끌리는 독자라면 별 5개도 모자랄 만큼 푹 빠져서 읽을 수 있는 매력적인 작품이기도 합니다. 만일 똑같은 이야기를 정통 미스터리 서사로 풀었다면 재미있게 읽긴 했겠지만 일몰특유의 묵직하고 깊은 여운을 만끽하기 어려웠을 거란 점은 저 역시 인정하기 때문입니다. 제 서평 때문에 조금이라도 선입관을 갖게 된 독자라면 다른 분들의 서평도 꼭 참고할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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