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래곤플라이 데드맨 시리즈
가와이 간지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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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 강가 둔치에서 장기가 제거된 상태로 불에 탄 사체가 발견됩니다.

사건을 맡은 가부라기를 비롯한 4명의 형사는 미세한 단서를 추적한 끝에

이 사건이 잠자리의 낙원인 군마 현의 산골마을 히류무라에서 출발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년기를 함께 보낸 선천적 맹인 이즈미와

그녀와 각별한 관계였던 두 소년 유스케와 겐이 얽혀있음을 파악합니다.

더구나 20년 전, 이즈미의 부모가 살해당한 미제 사건이

분명 둔치에서 발견된 사체 사건과 연관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애틋했지만 동시에 참혹할 수밖에 없었던 세 남녀의 기구한 인연은

히류무라와 잠자리 낙원을 수장시킬 히류 댐 건설을 둘러싼 오랜 갈등과 뒤섞이면서

20년의 시차를 두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일으킨 근원이 되고 만 것입니다.

 

● ● ●

 

화제의 데뷔작 데드맨이후 3년 만에 국내에 소개된 가와이 간지의 신작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이라는 타이틀로 데뷔한 작가라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 국내 소개가 많이 늦어진 셈입니다.

 

크기가 좀 작긴 해도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입니다.

같은 크기였던 데드맨보다 200페이지 가까이 두터운 셈인데,

사실, 분량에 비해 사건의 규모는 좀 소소한 편입니다.

2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부부 살해 사건과 둔치 사체 사건은

이만한 분량의 미스터리가 다루기에는 왠지 사이즈가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자의 개성을 자랑하며 돌직구처럼 수사에 나서는 가부라기 4인방의 활약,

애증과 고통으로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세 남녀의 기구한 인연,

그리고 댐 건설과 잠자리 낙원의 몰락이라는 사회적 이슈까지 다루다 보니

이야기가 비교적 단선적이었던 데드맨에 비해 양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많은 분량을 느낄 새도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쾌속으로 달리게 되는데,

그건 분명 가와이 간지의 간결하면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대단한 필력 덕분일 것입니다.

 

가와이 간지는 이 작품을 통해 팩트 찾기자체보다

팩트를 대하는 각오 또는 태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뒤표지를 보면 이 세상에 진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작품 속 대부분의 캐릭터가 자의든 타의든 견지하고 있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실이면서 진실인 것이 있는가 하면, 거짓인데도 진실이라 강요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사실이나 거짓인데도 누구에게는 진실, 누구에게는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와이 간지는 이런 물음에 대해 적잖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래서 사건은 단순해 보여도, 작품의 볼륨감이나 깊이는 여느 작품 못지않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적정선보다 조금 넘쳐 보이던 작가의 과욕(?) 때문에

자칫하면 철학적인 말장난처럼 느낄 독자가 분명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합리적인 직관과 육감을 갖춘 가부라기와 다혈질의 폭주 캐릭터 마사키 등 두 중년 형사와

스마트한 영건 히메노와 차분한 프로파일러 사와다 등 두 젊은 형사의 조합은

뛰어난 원톱 주인공을 앞세운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탄탄한 팀워크를 자랑합니다.

슈퍼 히어로는 아니지만 그만큼 리얼한 형사 캐릭터라고 할까요?

 

다만, 소위 애브덕션이라 불리는 이들의 독특한 추론 방법은

때론 지나치게 직감적이거나 무리한 가정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어서

독자들 입장에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비약으로 느낄 여지가 많습니다.

특히 팀장격인 가부라기는 이런 추론 방법이 몸에 배어 있는 캐릭터인데,

달리 말하자면, 지나칠 정도로 앞서나간(또는 다소 황당한) 추리를 펼친 끝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엄청난 진실에 도달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다소 급진적이고 비약된 추리가 쏟아져 나오면서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유지돼야 할 긴장감이 현격하게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루 만에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페이지는 잘 넘어가는 작품이지만,

데드맨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사건보다 캐릭터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 그런지

가와이 간지의 후속작을 기다린 독자 입장에선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 가부라기 4인방의 활약은 데드맨때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늘어났지만,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사건의 재미나 긴장감이 떨어진 대목도 있었습니다.

데드맨의 경우 사건이 확실한 주연이고, 가부라기 4인방이 탄탄한 조연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의 느낌이 강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사건의 밀도나 크기를 좀더 키웠다면

훨씬 더 재미와 긴장감을 갖춘 미스터리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번역하신 권일영 님의 후기를 보니 다음 작품 단델라이언은 민들레가 소재로 등장하는군요.

풀기 힘든 수수께끼라는 꽃말을 가진 민들레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궁금해집니다.

매력적인 가부라기 4인방과 허를 찌르는 이야기의 힘의 균형이

다음 작품에서는 황금비율로 잘 안배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을 읽을 예정인 독자라면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법 중요한 정보 두어 가지가 통째로 노출돼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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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바이벌
스티븐 킹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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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작품을 많이 읽진 못했지만 읽을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던 것만은 사실입니다.

무엇보다, 판타지나 호러, 비현실의 세계를 소름 돋게 그리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진짜 현실감 있는캐릭터나 스토리로 포장해내는 그의 필력은

정말 타고난 이야기꾼이 아니면 갖추기 힘든 미덕이라는 생각입니다.

덕분에 장르도 잊은 채 그가 펼쳐놓은 사실적인 세계 속으로 푹 빠져들게 되고,

공포와 기괴함을 느끼는 체감의 강도는 그만큼 강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리바이벌은 두 개의 서사, 즉 주인공 제이미 모턴의 성장 소설이면서 동시에

전직 목사이자 전기(電氣)에 미친 남자 제이컵스의 괴담이 뒤섞인 작품입니다.

제이미의 성장기가 지독히 사실적인 20세기 후반의 미국 청년의 명암을 그리고 있다면,

제이컵스의 괴담은 전기(電氣)와 신()과 지옥을 그린 끔찍한 판타지에 다름 아닙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두 개의 서사는 전기의 힘을 매개로 연결되고,

무려 50여년의 시간적 무대를 통해 두 남자의 방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습니다.

 

● ● ●

 

평범한 소년에서 마약에 쩐 록 아티스트를 거쳐 레코딩 프로듀서로 성장하는 제이미는

인생의 고비마다 제이컵스와 마주치게 됩니다.

목사로 재직 중 아내와 아들을 잃고 제이미가 살던 마을을 떠난 제이컵스는

이후 박람회에서 번개 사진사가 되어 시골사람들을 현혹시키더니,

난데없이 성스러운 반지로 병든 자를 고쳐주는 열광적인 목사로 변신합니다.

그는 아무도 모르는 전기의 힘으로 병든 자를 구제하고 헌금을 끌어 모읍니다.

 

제이컵스가 자랑하는 전기의 힘은 치유 이상의 목적을 갖고 있는 것이 분명하기 때문에

제이미는 그를 끊임없이 의심하고 두려워하지만,

자신은 물론이고 그의 친형, 연인, 동료까지 전기의 힘의 수혜자가 된 덕분에

그와의 오랜 악연을 떨쳐내지 못합니다.

제이컵스를 조심하라는 현명한 조언을 몇 차례나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이미는 분노와 호기심이라는 함정에 빠진 채 자꾸만 제이컵스의 곁을 맴돌았고,

결국 그의 궁극의 치유 현장에서 평생 잊히지 않을 끔찍한 사건과 마주하게 됩니다.

 

● ● ●

 

지극히 현실적인 제이미지극히 비현실적인 제이컵스의 콤비 플레이도 그렇지만,

제이컵스의 괴담의 핵심인 전기와 신이 각각 과학과 종교를 대변한다는 점도 무척 아이러니한 일입니다.

인물도 소재도 서로 뒤섞기 힘든 정반대의 특질들을 갖고 있는 셈인데,

바로 이 지점에서 스티븐 킹의 마력 같은 힘이 드러납니다.

눈앞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명백히 비현실적인데 너무 현실적으로 다가오고,

그저 허구에 불과한 호러일 뿐인데 내 옆에서 벌어지는 일처럼 생생함이 발산됩니다.

오래 전에 본 키아누 리브스 주연의 영화 콘스탄틴에서 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는데,

이런 묘한 위화감이야말로 리바이벌이 가진 가장 큰 매력이자 힘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샤이닝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폭주하는 호러 서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적잖은 분량을 차지한 초반부의 제이미의 성장기가 낯설거나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첫사랑, 꿈과 좌절, 가족사 등을 맛볼 수 있는 특별한 재미도 있는데다,

후반부를 위한 큰 밑밥 역할을 하기 때문에 그 나름의 의미가 있는 전개라고 생각합니다.

전기의 힘을 설명한 부분에서는 난해함이 느껴지기도 하지만,

대략의 추정만으로도 뒤의 이야기를 이해하는데 큰 어려움이 없으니

너무 골치 아프게 여기지 않아도 될 것입니다.

 

스티븐 킹이 처음 도전했다는 탐정 추리소설 미스터 메르세데스도 재미있었지만

역시 그의 진짜 매력은 현실 저 너머의 세상과 공포를 그린 작품에서 발휘되는 것 같습니다.

체질적으로 안 맞는 분은 어쩔 수 없지만 그의 전작들을 재미있게 읽은 독자라면

리바이벌역시 한 번에 완주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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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네 클라이네 나흐트무지크
이사카 고타로 지음, 최고은 옮김 / 현대문학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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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가 쓴 연애소설이란 카피를 본 그의 팬이라면

누구나 설마’ ‘진짜?’ 하는 반응을 보였을 것입니다.

저 역시 이사카 고타로의 작품을 많이 읽어본 편은 아니지만

어쨌든 그가 평범한 연애소설을 쓴 것은 아닐 거란 기대감으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6편의 단편은 연작처럼 서로 사건이나 인물이 얽혀있고,

무려 19년을 왕복하며 만남과 사랑과 이별과 회한에 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펼쳐놓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룬 이야기들이 주류를 이루지만

그 외에 부모와 자식, 교사와 학생, 친구나 낯선 이와의 인연도 간간이 등장합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 작품은 연애소설이라기 보다는

돌아보면 전부 기적처럼 이뤄진 것이 분명한, 어떤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이야기들입니다.

인연이든 악연이든 사람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막장 드라마에 버금가는 우연과 우연이 연이어 겹쳐야 가능한 일입니다.

그때 거기에 당신이 있었기 때문에두 남녀는 연인 또는 부부가 될 수 있는 것이고,

하필 같은 학교, 같은 반이 됐기 때문에왕따의 가해자와 피해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군가를 만나는 순간 불꽃이 튈 수도 있지만, 암운이 드리울 수도 있습니다.

누군가와의 만남을 회피한 일을 두고 후회할 수도 있고, 잘 했다고 자찬할 수도 있습니다.

또 누군가와의 만남은 희망이 되고 열정으로 가득 찬 채 오랜 시간을 지탱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시간이 지날수록 절망이 되고 상처로만 남을 수도 있습니다.

 

만남은 그 순간에 평가하고 단언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숙성되든 변질되든 그 순간의 의미는 변화하기 마련이며, 유효기간 역시 제각각입니다.

이사카 고타로가 만남에 관한 이야기를 하기 위해

19년이라는 긴 시간을 무대로 삼은 것은 그런 이유 때문일 것입니다.

그래서인지 300페이지를 갓 넘긴 짧은 분량이지만

등장인물들의 다양한 감정들이 여느 장편 못잖게 진지하고 진솔하게 다가왔던 것 같습니다.

 

어쩌면 이사카 고타로는 세상의 모든 만남은 운명이란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릅니다.

새삼 제가 살면서 가졌던 여러 만남들을 돌이켜보니

(좋아했든 싫어했든) 그 누구도 운명이 아닌 채 만났던 사람은 없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래서일까요? 제가 겪은 특별한 만남을 단편으로 끄적거려본다면

이 연작 속 어딘가에 한 자리를 차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들었습니다.

 

이사카 고타로의 뒤통수치는 연애소설은 아니었지만,

중간중간 코끝을 시큰하게 만드는 에피소드도 있고,

괜히 빙그레 웃음 짓게 만드는 따뜻한 에피소드도 있어서

제목처럼 작은 밤의 음악과 함께 읽는다면 잘 어울리는 작품이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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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세상에서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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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날’, ‘리브 바이 나이트(밤에 살다)’에 이은 커글린 가문 3부작의 마지막 편입니다.

운명의 날1919년 보스턴의 경찰 파업을 다룬 역사소설이었다면,

리브 바이 나이트는 금주법 시대를 무대로 한 폭력과 생존과 사랑의 이야기였습니다.

 

운명의 날에서 어린 소년으로 아버지와 형들의 몰락을 지켜봤던 조 커글린은

금주법 시대를 다룬 리브 바이 나이트에서 플로리다 템파를 거머쥔 갱의 보스로 성장합니다.

무자비한 폭력의 향연 속에 수많은 죽음의 위기를 이겨냈고, 불같은 사랑에 빠지기도 했지만,

리브 바이 나이트에서의 조 커글린의 결말은 불행 그 자체였습니다.

그래서 3부작의 마지막인 이 작품에서 조 커글린의 어떤 모습이 그려질지 무척 궁금했습니다.

 

● ● ●

 

무너진 세상에서의 핵심 줄거리는 조 커글린에 대한 암살 위협입니다.

모두에게 이익을 제공해왔고, 모든 인종들에게 지지를 받아온 조 커글린으로서는

자신을 향한 암살 또는 배신의 음모가 믿을 수 없을 만큼 큰 충격으로 다가옵니다.

자신의 목숨 뿐 아니라 이제 9살이 된 아들 토머스에 대한 애착으로 인해

조 커글린은 그답지 않게 공포와 혼란에 빠집니다.

금발의 꼬마 유령을 목격하는가 하면, 암살자를 찾기 위해 무리한 행보에 나서기도 합니다.

그 무렵, 템파를 중심으로 한 갱 조직은 분열과 갈등으로 치닫게 되고

거리 곳곳에서 응징과 보복이 난무하기에 이릅니다.

조 커글린의 발밑 세상은 뿌리부터 흔들리기 시작하고, 언제라도 무너질 듯 위태로워 보입니다.

 

● ● ●

 

리브 바이 나이트이후 8.

조 커글린이 세운 왕국은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만 같아 보였습니다.

패밀리는 공고했고, 분업은 효율적이었으며, ()는 화수분처럼 메마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간의 끝없는 탐욕은 안정된 왕국에서도 왕성하게 번식했고,

그것은 사방에서 작은 균열을 일으키기 시작했습니다.

암살 정보를 들은 조 커글린이 새삼 주위를 돌아보자

아무도 그럴 사람이 없다던 확신은 누구나 그럴 수 있다는 공포로 급변합니다.

자신이 직접 죽이거나 살해를 지시했던 많은 갱들과 보스들이 그랬듯,

자신에게도 어이없는 죽음이 순식간에 다가올 수 있다고 믿게 된 것입니다.

 

갱에게 있어 인생의 정점이란 너무나 짧고, 종말은 예고 없이 다가옵니다.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아는 조 커글린이지만

정작 자신에게 닥친 죽음의 공포를 대하는 태도는 평범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도망쳐야 되나, 몸을 숨겨야 되나, 맞서 싸워야 되나...

적은 내부에 있는 것인가, 외부에 있는 것인가...

9살 된 아들 토머스에 대한 걱정, 언젠가부터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한 의문의 유령,

아내를 잃은 뒤 7년 만에 찾아온, 그러나 위험천만한 금지된 사랑의 댓가,

탐욕과 증오가 촉발시킨 거리의 살육과 패밀리 간의 갈등 등

조 커글린을 둘러싼 세상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앞선 두 작품이 사건 중심의 이야기였다면

무너진 세상에서는 작품 전반에 걸쳐 조 커글린의 복잡다단한 심리묘사가 주를 이룹니다.

물론 부와 권력의 재편을 코앞에 둔 거대한 전쟁이 긴장감을 조성하긴 하지만,

암살에 대한 공포, 토머스에 대한 걱정, ‘금지된 사랑에의 집착,

그리고 누구를 믿어야할지 확신할 수 없는 혼란 등

이리저리 흔들리는 조 커글린의 심리가 주된 이야기다 보니

독자 입장에서 재미만 따지고 보면 앞선 작품들에 비해 떨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히 앞선 작품들을 읽지 않아 그의 전사(前史)를 잘 모르는 독자 입장에선

그의 심리나 감정이 잘 읽히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조 커글린이 세운 왕국이 서서히 무너지는 비극을 지켜보는 일이나

태연한 얼굴로 배신과 음모를 꾸미는 패밀리의 비정한 단면을 엿보는 일,

또 거듭된 반전 속에서 배신자의 정체를 추리하는 일은 여전히 매력적입니다.

적절한 시점마다 터지는 무자비한 살육전은 영화를 보듯 생생하고 참혹하며,

날선 대화와 냉정한 처단으로 무장한 패밀리 간의 피도 눈물도 없는 비즈니스는

마치 그 현장에 있는 듯 소름을 돋게 만듭니다.

 

읽는 내내 독자를 애태우는 것은 과연 조는 살아남을 것인가?’의 문제입니다.

무너진 세상에서라는 제목이 풍기는 선명한 비극의 냄새 때문에

이 궁금증은 마지막 장에 이르기까지 독자를 끊임없이 괴롭힙니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토머스와 함께 쿠바에서 여생을 보내기를 바라기도 하고,

전설적인 보스답게 비장한 최후를 맞이하기를 기대하기도 합니다.

어느 쪽이 됐든 역시 조 커글린답다라는 엔딩이 기다리고 있으니

직접 눈으로 확인하시기 바랍니다.

 

커글린 가문 3부작은 어느 편이 됐든 영화적 매력을 갖춘 뛰어난 작품들이지만,

그중 가장 대중적인 서사를 자랑하는 리브 바이 나이트가 우선 제작됐습니다.

감독 겸 주인공인 벤 애플랙이 어떤 마법을 부렸을지도 궁금하지만,

부디 영화가 성공해서 무너진 세상에서도 속편으로 제작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원작만 아니라면 조 커글린을 주인공으로 두세 편의 영화도 충분히 만들어질 텐데

리브 바이 나이트가 초대박이 난다면 헛된 바람으로 그치지 않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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암살자닷컴
소네 케이스케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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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호러에 가까운 단편집 ’, 재치있는 트릭과 우울한 미래 이야기를 담은 단편집 열대야’,

오쿠다 히데오의 최악을 연상시켰던 장편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

그리고 첩보물을 표방한 침저어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의 작품들을 접하면서

믿고 볼 수 있는 작가중 한 명으로 소네 케이스케를 꼽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암살자 닷컴역시 저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은,

소네 케이스케의 이야기꾼으로서의 매력이 유감없이 발휘된 연작단편집입니다.

 

경찰로도, 가장으로도 모두 실패한 삶을 살면서 부업 삼아 암살자가 된 형사,

노인 도우미였다가 우연히 습득한 휴대폰 덕분에 생계를 위해 암살자가 된 중년의 주부,

전설의 암살범이었지만 시대가 변하면서 그 위상도 예전 같지 않은 장년의 전문 킬러 등

어딘가 암살자와는 거리가 좀 먼 인물들이 각 에피소드의 주인공으로 등장합니다.

 

조직은 인터넷 사이트 고로시야닷컴(.com)을 통해 의뢰를 공지하는데,

조직과 계약한 암살자들은 조건이나 암살 대상을 보고 각자 입찰에 응해야 합니다.

가장 낮은 금액을 써낸 암살자가 낙찰 받게 되고,

미션이 마무리되면 우편으로 현금을 받게 되는 구조입니다.

암살자가 늘어나면서 경쟁은 치열해지고, 낙찰가는 점점 하향 추세입니다.

취미형 암살자나 생계형 암살자는 물론

달리 할 줄 아는 일이 없어서 계속 암살자로 활동하는 인물도 있습니다.

문제는 낙찰 받은 의뢰를 처리하지 못했거나 조직의 정보를 누설할 경우

참혹한 응징을 피할 수 없다는 점입니다.

조직내에는 실패자나 배신자만 전문 처리하는 암살자도 있는데,

이들에겐 사체 훼손이라는 특별한 미션이 주어지기도 합니다.

 

아무튼...

수록된 네 개의 에피소드는 연작단편집답게 따로 또 같이전개됩니다.

인물들과 사건들이 서로 정교하게 얽혀있어서, 그 접점을 찾아 읽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앞선 에피소드에서 무심코 언급됐던 사건이 뒤의 에피소드의 중심 스토리가 되기도 하고,

6년이란 시간차를 두고 인물들이 성장하거나 변화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도 있습니다.

 

암살자닷컴이라는, 어딘가 희극적인 냄새를 풍기는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이 작품은 무겁고 어두운 암살자들의 세계와 잔혹한 사건을 그린 내용은 아닙니다.

오히려 웃음과 긴장과 공포가 한데 섞인 독특한 블랙유머의 분위기를 풍기는데,

이는 소네 케이스케가 전작들에서부터 과시해온 그만의 특별한 매력입니다.

첩보물을 표방한 침저어를 제외하곤, 대부분 어딘가 나사가 하나 풀렸거나,

삶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등 지극히 현실적인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그들 앞에 주어진 상황과 미션은 정말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이상한 일들 뿐입니다.

우여곡절과 반전 끝에 인물들은 행복해지기도 하고, 나락에 빠지기도 하고,

또는 행복한 건지 아닌지 구분할 수 없는 기묘한 엔딩을 맞이하기도 합니다.

암살자닷컴역시 그런 인물과 상황과 미션으로 채워진 작품입니다.

 

교훈이나 감동이나 여운과는 좀 거리가 멀지만,

짧은 시간 안에 재미와 긴장을 함께 맛보기엔 더없이 좋은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언젠가 소네 케이스케가 정색을 하고 묵직한 서사를 내놓을지도 모르겠지만,

(적어도 그 비슷한 맛을 보려면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짐승들을 강추합니다)

아직까지 제게 소네 케이스케는 스트레스 종결자 또는 재능 만점의 엔터테이너이기 때문에,

다음 작품에서도 그만의 그런 특별한 매력을 발휘해주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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