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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래곤플라이 ㅣ 데드맨 시리즈
가와이 간지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16년 12월
평점 :
도쿄 강가 둔치에서 장기가 제거된 상태로 불에 탄 사체가 발견됩니다.
사건을 맡은 가부라기를 비롯한 4명의 형사는 미세한 단서를 추적한 끝에
이 사건이 잠자리의 낙원인 군마 현의 산골마을 히류무라에서 출발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유년기를 함께 보낸 선천적 맹인 이즈미와
그녀와 각별한 관계였던 두 소년 유스케와 겐이 얽혀있음을 파악합니다.
더구나 20년 전, 이즈미의 부모가 살해당한 미제 사건이
분명 둔치에서 발견된 사체 사건과 연관 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애틋했지만 동시에 참혹할 수밖에 없었던 세 남녀의 기구한 인연은
히류무라와 잠자리 낙원을 수장시킬 히류 댐 건설을 둘러싼 오랜 갈등과 뒤섞이면서
20년의 시차를 두고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을 일으킨 근원이 되고 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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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제의 데뷔작 ‘데드맨’ 이후 3년 만에 국내에 소개된 가와이 간지의 신작입니다.
‘요코미조 세이시 미스터리 대상’이라는 타이틀로 데뷔한 작가라
후속작에 대한 기대가 컸는데 생각보다 국내 소개가 많이 늦어진 셈입니다.
크기가 좀 작긴 해도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입니다.
같은 크기였던 ‘데드맨’보다 200페이지 가까이 두터운 셈인데,
사실, 분량에 비해 사건의 규모는 좀 소소한 편입니다.
20년의 간격을 두고 벌어진 부부 살해 사건과 둔치 사체 사건은
이만한 분량의 미스터리가 다루기에는 왠지 사이즈가 작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각자의 개성을 자랑하며 돌직구처럼 수사에 나서는 가부라기 4인방의 활약,
애증과 고통으로 20년의 세월을 보내야 했던 세 남녀의 기구한 인연,
그리고 ‘댐 건설과 잠자리 낙원의 몰락’이라는 사회적 이슈까지 다루다 보니
이야기가 비교적 단선적이었던 ‘데드맨’에 비해 양적으로 늘어날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독자는 그 많은 분량을 느낄 새도 없이 마지막 페이지까지 쾌속으로 달리게 되는데,
그건 분명 가와이 간지의 간결하면서도 긴장감을 놓치지 않는 대단한 필력 덕분일 것입니다.
가와이 간지는 이 작품을 통해 ‘팩트 찾기’ 자체보다
‘팩트를 대하는 각오 또는 태도’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뒤표지를 보면 “이 세상에 진실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가 납득할 수 있는 사실만이 존재할 뿐”이라는 문구가 있는데,
이는 작품 속 대부분의 캐릭터가 자의든 타의든 견지하고 있는 자세이기도 합니다.
사실이면서 진실인 것이 있는가 하면, 거짓인데도 진실이라 강요되는 것이 있습니다.
같은 사실이나 거짓인데도 누구에게는 진실, 누구에게는 아닌 것이 될 수도 있습니다.
가와이 간지는 이런 물음에 대해 적잖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는데,
그래서 사건은 단순해 보여도, 작품의 볼륨감이나 깊이는 여느 작품 못지않습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적정선보다 조금 넘쳐 보이던 작가의 과욕(?) 때문에
자칫하면 ‘철학적인 말장난’처럼 느낄 독자가 분명 있으리라는 점입니다.
합리적인 직관과 육감을 갖춘 가부라기와 다혈질의 폭주 캐릭터 마사키 등 두 중년 형사와
스마트한 영건 히메노와 차분한 프로파일러 사와다 등 두 젊은 형사의 조합은
뛰어난 원톱 주인공을 앞세운 작품들과는 전혀 다른 매력을 보여줍니다.
이들은 물과 기름처럼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탄탄한 팀워크를 자랑합니다.
슈퍼 히어로는 아니지만 그만큼 리얼한 형사 캐릭터라고 할까요?
다만, 소위 ‘애브덕션’이라 불리는 이들의 독특한 추론 방법은
때론 지나치게 직감적이거나 무리한 가정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어서
독자들 입장에선 논리적이라기보다는 비약으로 느낄 여지가 많습니다.
특히 팀장격인 가부라기는 이런 추론 방법이 몸에 배어 있는 캐릭터인데,
달리 말하자면, 지나칠 정도로 앞서나간(또는 다소 황당한) 추리를 펼친 끝에
아무도 예측하지 못한 ‘엄청난 진실’에 도달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인지 후반부 클라이맥스에서 다소 급진적이고 비약된 추리가 쏟아져 나오면서
가장 중요한 대목에서 유지돼야 할 긴장감이 현격하게 떨어진 것이 사실입니다.
하루 만에 완독할 수 있을 정도로 페이지는 잘 넘어가는 작품이지만,
‘데드맨’과 비교해볼 때, 상대적으로 사건보다 캐릭터에 중점을 둔 작품이라 그런지
가와이 간지의 후속작을 기다린 독자 입장에선 아쉬움이 남았던 것 같습니다.
또, 가부라기 4인방의 활약은 ‘데드맨’ 때보다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늘어났지만,
오히려 그 부분 때문에 사건의 재미나 긴장감이 떨어진 대목도 있었습니다.
‘데드맨’의 경우 사건이 ‘확실한 주연’이고, 가부라기 4인방이 ‘탄탄한 조연’이었다면,
이번에는 그 반대의 느낌이 강했는데, 개인적으로는 사건의 밀도나 크기를 좀더 키웠다면
훨씬 더 재미와 긴장감을 갖춘 미스터리가 됐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번역하신 권일영 님의 후기를 보니 다음 작품 ‘단델라이언’은 민들레가 소재로 등장하는군요.
‘풀기 힘든 수수께끼’라는 꽃말을 가진 민들레가 어떤 이야기를 만들어낼지 궁금해집니다.
매력적인 가부라기 4인방과 허를 찌르는 이야기의 힘의 균형이
다음 작품에서는 황금비율로 잘 안배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을 읽을 예정인 독자라면 인터넷 서점의 소개글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제법 중요한 정보 두어 가지가 통째로 노출돼있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