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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코다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울할 땐 오쿠다 히데오를 읽어라!”
‘공중그네’나 ‘남쪽으로 튀어!’ 같은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모두 동의할 만한 문장입니다.
사실 ‘왁자지껄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에피소드’라는 출판사 책 소개를 접하곤
‘시골 판 공중그네’나 ‘훗카이도 판 남쪽으로 튀어!’를 기대했는데,
의외로 ‘무코다 이발소’의 정서는 제법 차분하고 정적입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주 무대인 훗카이도의 작은 마을 도마자와의 분위기와도 흡사합니다.
한때 탄광산업으로 번창했지만 이젠 인구절벽에 가로막힌 조그만 시골 마을 도마자와.
음식점마저 주 3일만 영업할 뿐이고, 차도에서 차 소리를 듣기란 무척이나 드문 곳이며,
젊은이들은 인근 대도시 삿포로나 멀리 도쿄로 빠져나가고,
변화 없는 삶에 익숙해진 중장년들만이 겨우겨우 가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젊은 시절, 도시 직장생활에 실패하고 귀향하여 가업인 이발소를 이어받은 무코다 야스히코는
또래의 친구 세가와, 다니구치 등과 함께 하루하루가 엇비슷한 날들을 보내는 중년입니다.
하루에 1~2명에 불과한 손님을 위해 야스히코는 아침부터 이발소 문을 열고 기다립니다.
고색창연한 삼색등이 걸린 그의 이발소는 도마자와의 사랑방이기도 해서,
친구들은 물론 면사무소 직원이나 동네 노인들까지 수시로 드나들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마을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나누곤 합니다.
설 명절과 여름 축제를 제외하면 1년 내내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도마자와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외지의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무코다 이발소’에 실린 6편의 단편은 그 사건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멀쩡히 다니던 대도시의 직장을 때려치우고 갑자기 가업을 잇겠다는 아들 가즈마사 때문에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겹치는 야스히코의 고민 (무코다 이발소),
병든 노인과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우울한 현실과 유쾌한 반전 (축제가 끝난 후),
중년의 노총각들의 고민과 프라이버시 없는 시골 공동체의 아이러니 (중국에서 온 신부),
귀향한 40대 여자가 차린 새 술집 때문에 벌어지는 도마자와 남자들의 해프닝 (조그만 술집),
유명 여배우 주연의 영화촬영 때문에 잠시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도마자와 사람들 (붉은 눈),
도쿄에서 성공한 모범 청년이 사기극의 주범으로 밝혀지며 벌어지는 마을의 혼란 (도망자) 등
모두 6편의 작품이 수록돼있습니다.
인구절벽, 고령화, 세대 간의 갈등, 허울뿐인 행정, 관광객 유치를 위한 무리한 투자 등
도마자와가 겪고 있는 문제는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전형적인 지방 소도시들의 문제입니다.
도마자와는 왁자지껄하지도 않고, 유쾌한 에피소드가 난무하는 곳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사건’이 없을 리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사건이란 대도시의 그것과는 양상 자체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옆집 숟가락 개수와 앞집 장남의 시험성적까지 다 알고 있는 도마자와에서는
기쁨과 슬픔과 분노는 엄청난 속도로 전염됩니다.
도시로 나가 성공한 자식의 이야기는 동네방네 퍼뜨려야 할 자랑거리지만,
마흔이 되도록 결혼 못한 남자나, 범죄자가 된 아들을 둔 부모는
도마자와를 떠나지도 못한 채 이웃들의 가혹한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새로 연 술집의 예쁜 마담은 온 동네 남자들을 들뜨게 한 끝에 주먹다짐까지 벌이게 만들고,
중국에서 ‘돈 주고 데려온’ 신부는 과도한 호기심과 빗나간 애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족 같은 이웃’이라는 선의가 때론 ‘가족 같아서 괴로운 이웃’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미래도 없고, 변화도 없는 도마자와를 배경으로
‘그래도 이웃은 고마운 존재이고, 마을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란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무코다 야스히코는
언뜻 보면 누구보다 도마자와의 미래를 체념한 비관론자처럼 행세하지만
실은 도마자와의 모든 일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중재자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도마자와에서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야스히코를 찾아옵니다.
해법을 내놓으라고 닦달하기도 하고,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만나보라고 등을 떠밀곤 합니다.
내키지 않지만 결국 중재와 화해와 해법을 내놓는 것은 사람 좋은 이발사 야스히코입니다.
‘공중그네’의 이라부가 유쾌한 해결사라면,
‘무코다 이발소’의 야스히코는 현명한 중재자라고 할까요?
어딘가 비밀스러운 도쿄 파견관료 사사키가 이라부처럼 맹활약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외지인이 도마자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애초 이 이야기의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데다
결국 희망고문이나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와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무코다 이발소’는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희화화된 태도 대신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문장과 캐릭터를 통해 도마자와 사람들에게 애정과 격려를 보냅니다.
언제까지나 무코다 이발소, 세가와 주유소, 다니구치 전기공업사가 존재하기를 기원하고,
옆집 할아버지가 아프거나, 이웃의 아들이 결혼을 못하거나, 심지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결국엔 도마자와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돕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훈훈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혹, 도시인의 근거 없는 시골 예찬이라 비난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만한 눈높이의 시선이라면 충분히 공감과 응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공중그네’처럼 유쾌하거나 소동이 난무하지도 않고,
‘남쪽으로 튀어!’처럼 유머와 풍자가 가득하지도 않지만,
‘무코다 이발소’는 따뜻하면서도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도마자와의 정서와 함께
현실 직시라는 주제 역시 충실히 구현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