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의 감옥 모중석 스릴러 클럽 41
안드레아스 빙켈만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16년 11월
평점 :
절판


사라진 소녀들’, ‘지옥계곡에 이어 세 번째 만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작품입니다.

외국작가의 경우 보통 재미와 대중성순으로 국내에 소개되는 탓에

첫 작품에 열광했다가도 뒤로 갈수록 시들해지는 경우가 적잖은데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저 개인적으로는) 오히려 그 반대의 경우입니다.

서평 대신 짧은 메모만 해놓던 시절에 읽은 사라진 소녀들은 별 3.5개 정도였고,

지옥계곡역시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별 4개가 적절하다고 생각했지만,

물의 감옥은 전작들에서 느낀 아쉬움들이 많이 해소된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하지만 독일 출간은 물의 감옥지옥계곡보다 1년 먼저더군요)

 

희생자를 끌어안은 채 깊은 호수 속에서 춤을 추며익사에 이르게 하는 살인마 물의 정령’,

한때 명성을 날렸지만 이혼 이후 몰락의 길을 걸어온 마초 형사 에릭 슈티플러,

살인사건 수사팀에 갓 배치되어 슈티플러의 파트너가 된 새내기 여경 마누엘라,

동료가 살해된 뒤부터 누군가에게 쫓기는 듯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전직 콜걸 라비니아,

우연한 만남을 통해 알게 된 라비니아를 보호하기 위해 분투하는 택시기사 프랑크 등

모두 5명의 주요 인물들이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이야기를 이끌어나갑니다.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범인은 목표물과 인연이 있는 여자들을 익사시키면서 천천히 복수를 완성해갑니다.

목표물은 범인의 위협 앞에서 무기력할 뿐이며 심지어 자살을 꾀하기도 합니다.

신참 여경은 상관의 지시보다 자신의 정의감을 앞세워 사건을 해결합니다.

 

하지만 작가는 각각의 인물들에게 특별한 캐릭터와 전사(前史)를 부여함으로써

단순히 진범 찾기와 진실 파헤치기 이상의 묵직한 서사를 제공합니다.

연쇄살인범의 경우, 왜 스스로를 물의 정령이라 칭하는 것인지,

호수와 수영과 여동생을 사랑했던 그의 어린 시절과 가족들이 어떻게 잔혹하게 파괴됐는지,

그에게 물속에서 춤추며 살해하기란 어떤 의미인지를 긴장감 넘치게 묘사합니다.

마초 형사이자 성차별주의자인 슈티플러의 경우 묘한 이중적 캐릭터를 부여받았는데,

명백한 악인이면서도, 동시에 타의에 의해 인생이 망가진 운 나쁜 중년남이란 면모입니다.

악인이라 망가진 건지, 망가진 탓에 악인이 된 건지,

슈티플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독자에게 양가적 감정을 갖게 만드는 인물입니다.

신참 여경 마누엘라는 상대적으로 평범하고 익숙한 캐릭터인데,

어쨌든 그녀의 돌직구 같은 추진력과 예리한 추리력은

연쇄살인범과 부패한 경찰의 서사의 무게를 감당해낼 만큼 제법 무겁게 설정돼있습니다.

 

작지만 음험해 보이는 검은 물의 호수 고레크,

수시로 몰아치는 천둥과 번개와 강풍과 폭우,

핀란드 태생인 연쇄살인범의 물의 정령이라는 별명 등

물의 감옥은 여러 모로 북유럽 스릴러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입니다.

특히 바닥을 알 수 없는 검은 호수 물속에서 자행되는 연쇄살인은

지금껏 본 그 어떤 수법과도 비교할 수 없는 냉정+잔혹+쾌락의 느낌이 배어있는데,

왠지 독일보다는 스웨덴 등 차가운 북유럽과 어울린다는 느낌을 여러 번 받곤 했습니다.

북유럽 특유의 묘한 분위기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호감을 가질 만한 설정입니다.

(까마득한 높이의 알프스 계곡에서의 추락사로 연쇄살인의 서곡을 연 지옥계곡역시

북유럽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작품이었습니다)

 

이 작품의 또다른 미덕 중 하나는 이분법적인 시선에서 을 그리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런 모호함은 독자에 따라 불편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부분이지만,

저로서는 악을 그저 악으로만그렸다면 이 작품의 매력은 반감됐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안드레아스 빙켈만은 적절한 수위를 유지하면서

동전의 양면처럼 선악을 공유한 인상 깊은 캐릭터들을 만들어냈고,

그 덕분에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도 여러 가지 회한과 여운을 느낄 수 있게 해줬습니다.

 

굳이 아쉬운 점을 꼽아보면,

연쇄살인범 물의 정령의 복수심의 원천, 즉 과거의 상처 묘사가 조금 약했다는 점과

살인 계획을 세우고 실행에 옮기는 그의 모습이 과도하게 판타지처럼 그려져

때론 정말 정령처럼 느껴진 나머지 현실감을 잃곤 한다는 점 정도입니다.

 

별로 매력 없는 형사와 범인’(사라진 소녀들), ‘뜬금없는 범인과 범행동기’(지옥계곡)

전작들에 대해 비우호적인 평을 했던 터라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캐릭터, 사건, 정서 등 여러 면에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진수를 맛본 작품이 돼준 물의 감옥이었습니다.

 

사족으로..

안드레아스 빙켈만의 홈페이지를 보니 아직 국내에 소개 안 된 작품들이 있더군요.

킬게임(Killgame)’, ‘데스북(Deathbook)’, ‘사육(Die Zucht)’ 등이 눈에 띄었는데,

안드레아스 빙켈만이 국내에서 조금만 더 분발(?)해준다면

미 출간작품 전부를 머지않아 만나볼 수 있지 않을까요? 기대해보겠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악당 밀리언셀러 클럽 147
야쿠마루 가쿠 지음, 박춘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천사의 나이프하드 럭에서도 그랬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이야기를 빙빙 돌리지 않고 민감한 사회적 문제,

특히 개인의 복수 또는 구조적으로 코너에 몰린 약자의 이야기를 정면으로 파고듭니다.

악당역시 가해자와 피해자, 복수와 증오, 화해와 용서 등을 다룬 작품입니다.

 

주인공 사에키 슈이치는 15살 생일날 참혹한 범죄로 인해 누나를 잃습니다.

누나의 죽음에 영향을 받은 그가 선택한 길은 경찰이었지만,

죄책감 없는 악당들을 향해 치솟는 분노를 자제하지 못해서 제복을 벗어야 했고,

지금은 조그만 탐정사무소에서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수록된 7편의 연작 단편은 그가 의뢰받은 건의 조사 과정을 다루고 있는데,

의뢰 자체가 과거 범죄를 저질렀던 자의 현재를 알고 싶다는 내용들이라

여전히 누나의 죽음에서 자유롭지 못한 사에키에게는 고통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의뢰인은 피해자, 유족, 변호사 등 다양하지만

그들이 알고 싶은, 또 고민하는 지점들은 거의 비슷합니다.

, 가해자는 진정으로 갱생했는가? 피해자나 유족에게 사죄하고 있는가?

설령 갱생하고 사죄한다 해도 피해자와 유족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상처를 잊을 수 있는가?

만일 그 자가 죄책감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안락과 행복을 누리고 있다면 어찌 해야 되는가?

 

피해자나 그 유족들이 멀쩡히 살아있는 가해자와 마주하는 일이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운지 그 자신이 범죄 피해자의 유족인 사에키는 누구보다 잘 압니다.

각기 다른 에피소드들 속에서 사에키는 자신이 해결한 일들 때문에

대부분의 의뢰인들이 오히려 더 큰 고통에 빠지는 모습들을 지켜보게 됩니다.

상처는 절대 치유되지 않고, 속죄란 허울 좋은 변명에 불과할 뿐입니다.

피해자와 유족은 평생을 악몽과 상실감 속에서 살아가야 하지만

가해자는 터무니없이 가벼운 형벌만 받곤 당당하게 일상으로 돌아오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사에키는 의뢰를 받을 때마다, 또 미션을 완수할 때마다 새로운 고통을 맛봅니다.

당연히 그 일로 밥벌이를 하는 자신을 혐오합니다.

 

하지만 그는 탐정으로 일하면서 틈나는 대로 누나를 능욕하고 살해한 범인들을 쫓습니다.

그 자신이 의뢰인이자 탐정이 되어 복수를 꿈꾸고 있는 것입니다.

설령 복수가 완성된다 해도 그것으로 모든 악몽이 지워지진 않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고는 살아갈 이유도, 힘도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딜레마에 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독자는 사에키의 딜레마 때문에 공분과 좌절을 함께 느끼게 되는데

이런 감정은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읽을 때마다 경험하게 되는 씁쓸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재미나 여운 모두 수록작마다 조금씩 편차는 있지만

가해자와 피해자, 그리고 제3자의 시선들을 다양한 각도에서 다루고 있어서

단순히 개인의 복수를 다룬 작품들과는 차별화된 매력을 지니고 있습니다.

또한 탐정 사에키뿐 아니라 피해자이자 추격자 사에키의 비극적인 이야기 역시

작가의 전작들에서 맛봤던 특유의 긴장감과 안타까움을 발산하고 있어

역시 야쿠마루 가쿠라는 호평이 저절로 나오게 만듭니다.

 

다만, 연작 형태이긴 해도 단편이다 보니 이야기의 규모나 깊이가 부족한 건 사실입니다.

야쿠마루 가쿠의 매력은 그가 다루는 소재 자체에도 있지만

후벼 판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깊게 파고드는 서사의 힘에 기인하기 때문에

아무래도 단편보다는 장편이 더 묵직하게 느껴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통쾌함이나 해피엔딩과는 거리가 먼 그의 작품들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더 그의 작품을 찾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짐승의 성 스토리콜렉터 51
혼다 테쓰야 지음, 김윤수 옮김 / 북로드 / 2016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도쿄 외곽의 한 맨션에서 발견된 잔혹한 살육의 현장.

그리고 그곳을 탈출한 10대 소녀와 그곳에서 체포된 중년의 여자.

두 여자의 증언을 통해 드러난 악마나 다름없는 조종자의 정체와

그의 조종에 의해 서로를 고문하고, 살해하고, 토막냈던 수많은 사람들의 비극.

증언은 엇갈리고 조종자의 행방은 오리무중.

조종자의 지시대로 참혹한 살육을 벌인 자들은 왜 무기력하게 그에게 굴복했던 것일까?

그들은 왜 도망치지도, 도움을 청하지도 않았던 것일까?

살아남은 두 여자의 눈에서 읽히는 조종자에 대한 존경과 욕정의 빛은 무엇을 뜻하는가?

과연 그 맨션 안에서 벌어진 참극의 진실은 무엇일까?

 

● ● ●

 

읽는 내내 이런저런 단어들이 머릿속에 떠올랐습니다.

살육에 이르는 병’, ‘외과의사’, ‘종의 기원’, ‘살인의 추억’, ‘추격자’...

 

, 이런저런 질문들이 떠오르기도 했습니다.

인간을 짐승으로 만드는 기질은 타고난 것일까, 습득된 것일까?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먹잇감으로 삼으려는 욕망은, 특수하다 해도, 결국 자연의 섭리일까?

그 욕망은 언젠가는 포만감과 함께 소멸되는 것인가?

아니면 영원히 허기진 상태로 남아 끝없이 새로운 먹잇감을 요구하는가?

혹시, 그 욕망은 강한 전염성을 지닌 것은 아닐까?

 

사실, 잔혹하고 엽기적인 묘사에 대해서는 워낙 사전정보를 많이 접한 탓에

그다지 충격적으로 읽히진 않았습니다. 예상보다는 훨씬 약했다고 할까요?

꽤나 충격적이고 심각하게 비위를 건드리는 장면들임에도 불구하고

의식적으로 어떤 을 넘지 않고 필요한 팩트만 묘사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만일 작가가 작심했다면 아마 한 사람의 해체를 위해 한 챕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최대한 간결하고 담담한 투로 그려진 고문-살인-해체-처리과정은,

어쩌면 잔혹함에 가려 주제가 희석될 수도 있다는 작가의 우려(?)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혼다 테쓰야가 실화를 바탕으로 굳이 이런 끔찍한 서사를 기획한 것 자체가

주제를 강조하려는 분명한 목적을 지닌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그 주제란 앞서 언급한 질문들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악의 기원과 정체, 전염성과 생명력에 대한 근원적 고민이 그것입니다.

혼다 테쓰야는 탐문과 취조를 맡은 경찰들을 통해 이런 주제를 거침없이 드러냅니다.

때론 그 수위가 너무 노골적이어서 작위적으로 읽힐 때도 있습니다.

결국 짐승의 성은 미스터리, 트릭, 반전보다 악에 대한 보고서의 기운이 강한 작품입니다.

 

문제는, 캐릭터나 스토리마저 주제에 맞춰 전개된다는 의심(?)이 들게 만든 점입니다.

먹잇감을 좌지우지하는 조종자의 전능함은 어떻게 가능했던 것인가?

먹잇감들은 왜 도망치지도, 저항하지도 않은 채 조종자의 뜻대로 참극을 연출했는가?”

물론 지속적인 악의 폭력은 먹잇감을 길들이거나 자포자기하게 만들거나 전염시킨 끝에

결국 자기방어에 대한 의지마저 잃어버리게 만들 수 있겠지만,

위의 의문은 작품을 읽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런 의문 자체가 이 작품의 모티브라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 혼다 테쓰야가 기타큐슈에서 벌어진 실제 사건을 조사하면서 똑같은 의문을 가졌고,

그 의문이 이 작품의 출발점이 됐을지도 모른다는 뜻입니다.

혼다 테쓰야는 그와 그녀와 그들이 폭력에 굴복하고 전염된 끝에

스스로 악으로 진화한 실제 사건을 보곤 의문을 가진 끝에 이 작품을 기획한 것이 아닐까요?

그렇다면 그와 그녀와 그들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조종하여 짐승의 성에 가둔 악의 전능함도 제대로 보이기 시작합니다.

비록 추정이지만, 그러지 않곤 이 작품의 모든 것을 순순히 납득하기가 어렵다는 생각입니다.

 

혼다 테쓰야가 강조한 내용 중 하나가 짐승은 내 주위 어디에도 존재 가능하다입니다.

말하자면 나의 옆집이나 앞뒷집이 짐승의 성일 수도 있다는 얘기죠.

재미있게 읽긴 했어도 몸과 마음 어딘가에 끈적끈적함과 불편함도 함께 남는 작품입니다.

시간이 흘러 언젠가는 그것들이 저절로 사라지거나 잊히길 바라지만,

그렇게 호락호락 기억에서 물러나주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은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무코다 이발소
오쿠다 히데오 지음, 김난주 옮김 / 북로드 / 2017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우울할 땐 오쿠다 히데오를 읽어라!”

공중그네남쪽으로 튀어!’ 같은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모두 동의할 만한 문장입니다.

사실 왁자지껄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유쾌한 에피소드라는 출판사 책 소개를 접하곤

시골 판 공중그네훗카이도 판 남쪽으로 튀어!’를 기대했는데,

의외로 무코다 이발소의 정서는 제법 차분하고 정적입니다.

그것은 이야기의 주 무대인 훗카이도의 작은 마을 도마자와의 분위기와도 흡사합니다.

 

한때 탄광산업으로 번창했지만 이젠 인구절벽에 가로막힌 조그만 시골 마을 도마자와.

음식점마저 주 3일만 영업할 뿐이고, 차도에서 차 소리를 듣기란 무척이나 드문 곳이며,

젊은이들은 인근 대도시 삿포로나 멀리 도쿄로 빠져나가고,

변화 없는 삶에 익숙해진 중장년들만이 겨우겨우 가업을 유지하며 살아가는 곳입니다.

 

젊은 시절, 도시 직장생활에 실패하고 귀향하여 가업인 이발소를 이어받은 무코다 야스히코는

또래의 친구 세가와, 다니구치 등과 함께 하루하루가 엇비슷한 날들을 보내는 중년입니다.

하루에 1~2명에 불과한 손님을 위해 야스히코는 아침부터 이발소 문을 열고 기다립니다.

고색창연한 삼색등이 걸린 그의 이발소는 도마자와의 사랑방이기도 해서,

친구들은 물론 면사무소 직원이나 동네 노인들까지 수시로 드나들며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와 마을사람들에 대한 소식을 나누곤 합니다.

 

설 명절과 여름 축제를 제외하면 1년 내내 아무 일도 없을 것 같은 도마자와에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벌어지고 외지의 사람들이 드나듭니다.

무코다 이발소에 실린 6편의 단편은 그 사건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멀쩡히 다니던 대도시의 직장을 때려치우고 갑자기 가업을 잇겠다는 아들 가즈마사 때문에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걱정이 겹치는 야스히코의 고민 (무코다 이발소),

병든 노인과 가족이 감당해야 하는 우울한 현실과 유쾌한 반전 (축제가 끝난 후),

중년의 노총각들의 고민과 프라이버시 없는 시골 공동체의 아이러니 (중국에서 온 신부),

귀향한 40대 여자가 차린 새 술집 때문에 벌어지는 도마자와 남자들의 해프닝 (조그만 술집),

유명 여배우 주연의 영화촬영 때문에 잠시 열광의 도가니에 빠진 도마자와 사람들 (붉은 눈),

도쿄에서 성공한 모범 청년이 사기극의 주범으로 밝혀지며 벌어지는 마을의 혼란 (도망자)

모두 6편의 작품이 수록돼있습니다.

 

인구절벽, 고령화, 세대 간의 갈등, 허울뿐인 행정, 관광객 유치를 위한 무리한 투자 등

도마자와가 겪고 있는 문제는 한국에서도 낯설지 않은 전형적인 지방 소도시들의 문제입니다.

도마자와는 왁자지껄하지도 않고, 유쾌한 에피소드가 난무하는 곳도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에 사건이 없을 리도 없습니다.

다만 그 사건이란 대도시의 그것과는 양상 자체가 판이하게 다릅니다.

 

옆집 숟가락 개수와 앞집 장남의 시험성적까지 다 알고 있는 도마자와에서는

기쁨과 슬픔과 분노는 엄청난 속도로 전염됩니다.

도시로 나가 성공한 자식의 이야기는 동네방네 퍼뜨려야 할 자랑거리지만,

마흔이 되도록 결혼 못한 남자나, 범죄자가 된 아들을 둔 부모는

도마자와를 떠나지도 못한 채 이웃들의 가혹한 시선을 견뎌내야 하는 운명에 처합니다.

새로 연 술집의 예쁜 마담은 온 동네 남자들을 들뜨게 한 끝에 주먹다짐까지 벌이게 만들고,

중국에서 돈 주고 데려온신부는 과도한 호기심과 빗나간 애정을 불러일으킵니다.

가족 같은 이웃이라는 선의가 때론 가족 같아서 괴로운 이웃으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오쿠다 히데오는 미래도 없고, 변화도 없는 도마자와를 배경으로

그래도 이웃은 고마운 존재이고, 마을은 우리의 삶의 터전이란 따뜻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에 있는 무코다 야스히코는

언뜻 보면 누구보다 도마자와의 미래를 체념한 비관론자처럼 행세하지만

실은 도마자와의 모든 일에 애정과 관심을 갖고 중재자 역할을 하는 인물입니다.

도마자와에서 무슨 일이 터질 때마다 사람들은 야스히코를 찾아옵니다.

해법을 내놓으라고 닦달하기도 하고, 사건을 일으킨 사람을 만나보라고 등을 떠밀곤 합니다.

내키지 않지만 결국 중재와 화해와 해법을 내놓는 것은 사람 좋은 이발사 야스히코입니다.

공중그네의 이라부가 유쾌한 해결사라면,

무코다 이발소의 야스히코는 현명한 중재자라고 할까요?

어딘가 비밀스러운 도쿄 파견관료 사사키가 이라부처럼 맹활약하지 않을까 기대했지만,

외지인이 도마자와의 문제를 해결한다는 것은 애초 이 이야기의 주제와 어울리지 않는데다

결국 희망고문이나 비현실적인 해피엔딩이 나올 수밖에 없다는 걸 뒤늦게 깨닫기도 했습니다.

 

지극히 현실적인 소재와 사회적 이슈를 다루고 있지만

무코다 이발소는 지나치게 진지하거나, 지나치게 희화화된 태도 대신

오쿠다 히데오 특유의 문장과 캐릭터를 통해 도마자와 사람들에게 애정과 격려를 보냅니다.

언제까지나 무코다 이발소, 세가와 주유소, 다니구치 전기공업사가 존재하기를 기원하고,

옆집 할아버지가 아프거나, 이웃의 아들이 결혼을 못하거나, 심지어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결국엔 도마자와의 모든 사람들이 그들을 돕고, 이해하고, 받아들일 것이라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웃음이 나기도 하고, 가슴이 훈훈해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 도시인의 근거 없는 시골 예찬이라 비난하는 독자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만한 눈높이의 시선이라면 충분히 공감과 응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는 생각입니다.

공중그네처럼 유쾌하거나 소동이 난무하지도 않고,

남쪽으로 튀어!’처럼 유머와 풍자가 가득하지도 않지만,

무코다 이발소는 따뜻하면서도 안타까움이 배어있는 도마자와의 정서와 함께

현실 직시라는 주제 역시 충실히 구현한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기울어진 세상
톰 프랭클린.베스 앤 퍼넬리 지음, 한정아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2월
평점 :
절판


1927년 봄, 역대 최악의 폭우로 범람 위기에 직면한 미시시피 강 인근의 작은 도시 하브나브.

이곳에 밀주단속원 햄과 잉거솔이 밀주 제조업자를 찾아내기 위해 찾아옵니다.

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길거리에서 우연히 아기를 떠맡게 된 잉거솔은

하브나브에서 입양가정을 찾던 중 딕시 클레이라는 여인과 만나게 됩니다.

문제는 그녀와 그녀의 남편 제시가 이 지역 최고의 밀주 제조업자이자 공급책이란 점입니다.

한편으론 밀주제조업자를 찾아내야 하고,

한편으론 정부 보상을 노리고 제방을 폭파하려는 자들을 저지해야 하는 심각한 상황 속에서

잉거솔은 본연의 임무 대신 딕시 클레이와 아기에게 온 신경을 쏟습니다.

덕분에, 밀주를 앞세워 소도시를 장악한 딕시의 남편 제시의 치명적인 음모도,

제방을 폭파시켜 이익을 보려는 자들의 끔찍한 계획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위기에 빠지게 됩니다.

 

● ● ●

 

톰 프랭클린의 미시시피 미시시피를 인상 깊게 읽은 덕분에

1927년 수몰 위기에 빠진 미시시피 강 인근의 소도시를 무대로 한 이 작품에 단번에 관심이 꽂혔습니다.

특히 능력 있는 베테랑 밀주단속원, 위스키를 앞세워 소도시를 장악한 밀주제조업자,

제방 폭파를 둘러싸고 갈라선 주민 등 등장인물들 역시 흥미롭게 설정된 것 같아서

미시시피 미시시피이상의 스릴러로서의 매력을 기대한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엄밀히 말하면 이 작품은 역사물이면서 미스터리와 스릴러를 차용하긴 했지만

본류는 작품 속 여주인공 딕시 클레이의 독백대로 가족과 사랑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는 살인과 밀주 제조, 모래포대 쌓기와 파괴 공작원,

다이너마이트와 폭우에 관한 이야기이다.

(중략) 어울리지 않는 남편과 결혼해서 날마다 조금씩 죽어갔던 여자의 이야기이기도 하고,

자신이 투명인간 같다고 생각했던 남자의 이야기이기도 해.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는 사랑 이야기다.

우리가 어떻게 가족이 되었나를 말해주는 이야기이지.”

 

말하자면 자연의 힘과 인간의 탐욕이 동시에 빚어낸 최악의 참사를 겪어낸 뒤

몸과 마음은 비록 만신창이가 됐지만 결국 사랑의 힘으로 가족을 이뤄낸 이야기라고 할까요?

거기에 절묘하게 미스터리와 스릴러의 서사를 끼워 넣음으로써

작가는 영미권 특유의 가족애를 강조한 스릴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다만, ‘미시시피 미시시피의 매력을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심심하게 읽힐 수도 있습니다.

다 읽은 후에 출판사 소개글을 보니 남자 주인공 잉거솔의 챕터는 톰 프랭클린이,

여주인공 딕시 클레이의 챕터는 그의 아내 베스 앤 퍼넬리가 집필했다고 합니다.

읽다 보면 곳곳에서 문장의 색깔이나 페이지 넘어가는 속도가 차이나는 것을 느끼게 되는데,

나중에야 그 이유를 알게 된 셈입니다.

아무래도 잉거솔의 챕터가 사건 중심으로 전개되고,

딕시 클레이의 챕터가 심리 중심으로 집필된 탓에 그렇게 읽힐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 현재의 이야기만큼이나 두 사람의 과거사가 비중 있게 그려지고 있는데,

그로 인해 초반부가 느린 템포를 지니게 된 것은 아쉬운 부분이었습니다.

 

아무튼...

밀주와 흑백 갈등과 전근대성이 어지럽게 뒤얽혀있던 1927년을 배경으로

두 부부 작가는 상상을 초월한 폭우와 홍수, 금주법이 몰고 온 빛과 그림자,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사상 최악의 참사, 그리고 그 안에서 우연과 운명 속에 피어난 사랑을

때론 스릴러처럼, 때론 대하소설처럼, 때론 멜로나 가족소설처럼 다양한 형태로 그려냈습니다.

 

주류 서사 외에도 당시의 풍경이나 풍습에 대한 꼼꼼한 묘사가 눈길을 끌었는데,

건축, 패션, 음악, 교통 등 마치 눈앞에 펼쳐져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그려진

1927년 미국 남부 소도시의 민낯은 때론 이야기 자체보다도 매력적으로 읽히는 부분이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톰 프랭클린 식의 빠르고 묵직한 서사를 좋아하는 편이라

베스 앤 퍼넬리의 시적인 언어로 집필된 부분들이 약간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밀주와 폭우와 살인이 뒤엉킨 기울어진 세상을 헤쳐 나온 잉거솔과 딕시의 이야기는

언제 읽어도 흥미로운 20세기 초반의 미시시피의 묘한 분위기와 잘 어우러져 있어서

혹 스릴러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독자라도 충분히 빠져들 만한 힘과 매력을 지녔다는 생각입니다.

 

(마지막 장을 다 읽고 다시 표지를 살펴보니

거대한 물결 속에 처연히 노를 젓는 한 사람의 모습이 새삼 더 애틋하게 보였습니다.

이야기를 잘 함축한, 최근 들어 손에 꼽을 만한 표지라는 생각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