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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트랙 ㅣ 발란데르 시리즈
헨닝 망켈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뛰어난 스펙이나 추리력보다는 성실함과 진정성이 돋보이는 ‘평범한 수사반장’ 발란데르는
스웨덴 남부 말뫼에서 위스타드에 걸쳐 벌어지는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됩니다.
누군가 도끼로 희생자들의 머리를 쪼갠 뒤 머리가죽을 벗겨가는데
희생자들 대부분은 부패하고 부정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고령의 인물들이지만
딱히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 발란데르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그 와중에 전혀 다른 성격의 희생자가 등장하면서 수사는 미궁에 빠집니다.
연쇄살인사건들이 일어나기 직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유채밭 소녀 분신자살은
발란데르의 머릿속 한구석에 불편하게 남아 수사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사건만으로도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발란데르에게는
재혼을 꿈꾸는 상대 바이바, 예민한 시기의 딸 린다,
치매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고령의 아버지 등 개인적인 문제까지 산적해있습니다.
또한 중년의 우울함과 경찰로서의 피폐한 삶에 회의까지 몰려와
발란데르는 짓눌린 듯한 압박감 속에서 사건수사에 임하게 됩니다.
무수한 탐문과 과학수사, 프로파일링까지 동원한 발란데르의 집념 덕분에 사건은 해결되지만
사건의 이면에는 발란데르를 또다른 절망에 빠뜨리는 비참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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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의 10편의 ‘발란데르 시리즈’ 가운데 5번째 작품입니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보니 과거에 여러 출판사에서 6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지금은 대부분 절판 상태이고 웅진에서 새롭게 시리즈 출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만난 작품이 시리즈 5번째 작품이다 보니
주인공인 발란데르의 과거사라든가 캐릭터에 한껏 몰입하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적잖은 분량에 할애된 그의 ‘개인사’ 덕분에
발란데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습니다.
특히 혹독한 형사로서의 삶을 살아온 45세의 중년남자가
아버지, 딸, 이혼한 아내, 새로 만난 연인 등 가까운 인물들과 유지하고 있는 불안정한 관계,
또 자신을 신뢰하는 동료, 선후배들과 나누는 업무적인 관계 등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처음 만난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친숙함과 안쓰러움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심플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파괴한 부당한 권력과 폭력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그 복수심이 자아낸 다분히 사이코패스적인 연쇄살인이 주축인데,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의 정체와 동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자연히 이야기는 반전보다는 심층묘사, 결과보다는 과정, 외양보다는 심리에 방점이 찍히는데
이런 심플한 구조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작가는 곳곳에서 복지국가 스웨덴의 참담한 민낯이라든가, 까마득히 벌어진 빈부 격차,
지독한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빚어낸 일그러진 폭력의 실상 등을 묘사하는데
사건 자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작품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작위적 설정처럼 느껴집니다.
부당하게 권력과 부를 손에 넣은 자들이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살해되고,
등장인물 대부분이 외롭게 혼자 살거나 복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런 설정을 연쇄살인사건의 사회적 배경이라고 칭하기엔 곤란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매력은 ‘사건과 수사’보다는 발란데르의 캐릭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닳고 닳은 중년의 형사 발란데르는
이전에 접한 몇몇 같은 연배의 주인공들과 겹치는 상투적인 면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사실적인, 즉 실제 존재할 것 같은 매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일과 가족과 사랑에 치여 우울한 중년의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알코올중독자도, 비관주의자도, 무기력증에 빠진 ‘환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 앞에 닥친 문제들을 진지하게 대합니다.
열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의 성실함과 진정성은 작품 내내 돋보입니다.
그래선지 번역가 김현우 님 역시 ‘미련한 남자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단 옮긴이의 말을 통해
대부분 발란데르의 캐릭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발란데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100% 공감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자신감 없고, 정답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계속 옆으로 새면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던지고 있다는 것.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그래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손을 놓아버린다면 자신이 지키고 싶은 어떤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기에 차마 놓아버리지 못하는 마음.“
사실 스릴러에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사건의 재미를 능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발란데르는 유독 그런 면에서 압도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설령 스릴러로서의 미덕이 조금 아쉽게 느껴질지라도
‘사이드 트랙’ 앞의 4개의 작품은 물론 이후의 5작품이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둡고 무거운 주인공 캐릭터를 500페이지 넘게 감내하며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설프게 잔혹함과 폭력만을 내세우며 허술한 캐릭터 플레이를 하는 작품들보다는
(씁쓸하든 촉촉하든 기운을 북돋든) 이런저런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발란데르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