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레이크하트힐
토머스 H. 쿡 지음, 권경희 옮김 / 오퍼스프레스 / 2017년 3월
평점 :
품절


2013년 가을, ‘채텀 스쿨 어페어로 토머스 H. 쿡과 처음 만났고,

2015년 봄, ‘밤의 기억들로 재회한 이후 또다시 2년이 지나 그의 신작을 만났습니다.

그의 초기작 또는 대표작인 심문붉은 낙엽을 읽어야지, 몇 번씩 생각만 하다가

매번 다음에...’라며 기약 없이 뒤로 미루곤 했는데,

그 이유는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 찾아오는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 때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록 그의 초기 장편이지만) 신간 소식에 쿡의 이름이 보이자마자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리듯 덥석 손이 나가고 말았습니다.

 

● ● ●

 

1962년 여름, 미국 앨라배마 주 촉토 마을의 브레이크하트 힐 아래에서

16살의 아름다운 고등학생 켈리 트로이가 피투성이가 된 채로 발견된다.

평온함이 일상이던 마을은 충격과 공포에 휩싸인다.

사건 현장에서 마을의 건달인 라일이 목격되고 그는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된다.

순수하고 아름다운 소녀 켈리에게 재앙이 덮친 이후 30년이 지났지만

사건은 마을 사람들에게는 아직 진행형이다.

켈리의 친구였던 벤과 루크는 켈리의 비극 속에 진실이 감춰져 있음을 감지한다.

그리고 진실의 씨앗은 켈리의 첫사랑 속에 있었음이 서서히 드러난다.

(인터넷 서점의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채텀 스쿨 어페어의 경우

소도시와 고등학교를 배경으로 했다는 점에서 브레이크하트 힐과 공통점이 있지만,

전자의 주된 서사가 어른들의 치정과 파멸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브레이크하트 힐은 몸과 마음이 언제든지 폭발할 준비가 돼있던

1960년대의 10대들이 겪은, 보다 날것 같은 치정과 파멸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진실이 제대로 밝혀지지 않은 살인사건이 등장하고,

30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누가?’, ‘?’라는 의문이 불온하게 마을을 지배하고 있다는 점에서

분명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로 분류되는 작품이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뼈대가 16살 소년, 소녀 벤 웨이드와 켈리 트로이의 치명적인 첫사랑이기 때문에

왠지 장르물과는 어울리지 않는 하이틴 로맨스의 냄새가 강하게 풍기는 것도 사실입니다.

 

다만, 쿡이 그린 벤과 켈리의 로맨스는 포장10대의 치기 어리고 순수한 아름다움이지만,

그 안에 담긴 알맹이는 심연을 그린 듯한 잔혹심리극에 다름 아닙니다.

모든 것이 눈부시고 미래에 대한 흥분으로 가득해야 할 16살의 소년과 소녀는

쿡의 잔인하기 그지없는 문장들 속에서 계속 엇갈리면서 서로에게 상처를 입힙니다.

사랑은 아름다운 판타지가 아니라 왜곡된 감정으로 진화할 뿐입니다.

번역하신 권경희 님 표현대로 사랑은 어떻게 미움이 되고 증오가 되는가,

사랑이 얼마나 깨지기 쉬우며, 편견이 얼마나 무모하고, 증오가 얼마나 처참할 수 있는가,

토마스 H. 쿡이 이 작품에서 그린 10대 소년, 소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렇다고 쿡이 우울한 10대 로맨스 이야기에서 머문 것은 아닙니다.

30년 전에 벌어진 살인사건은 어딘가 불완전하게 마무리됐고,

희생된 켈리와 각별한 관계였던 벤과 루크는 여전히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

켈리를 사랑했던 벤, 그런 벤을 곁에서 지켜봤던 루크,

그리고 함께 10대를 보냈지만 이젠 중장년에 이른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브레이크하트 힐에서 벌어졌던 참사를 잊지 못하면서 여전히 진실을 궁금해합니다.

이야기는 진실을 알고 있는 유일한 인물인 벤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되고,

현재와 과거의 사건들을 오가며 켈리의 비극의 진실을 아주 느린 속도로 풀어놓습니다.

안 그래도 어둡고 습하고 탁하기 이를 데 없는 쿡의 문장들이 슬로비디오처럼 늘어진 덕분에

읽는 내내 마음에 돌덩이 하나가 들어앉은 듯한 기분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쿡의 작품답군, 이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론 아쉬움이 많이 남기도 했는데,

무엇보다, 끝까지 진짜 모습 인격도, 감정도 을 알 수 없었던 켈리의 캐릭터가 모호했고,

마지막에 드러난 30년 전 사건의 진실이 예상보다 덜 충격적이었으며,

특히 반전이 (설명 부족인지 제 이해력 부족인지 모르겠지만) 납득되지 않는 점 때문입니다.

비슷한 시기에 집필된 채텀 스쿨 어페어를 읽은 후에도

사건의 실체가 강하거나 충격적이지 않을뿐더러, 개운치 못한 느낌이란 서평을 남겼는데,

브레이크하트 힐의 모호함과 개운치 못함은 아마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쿡 특유의 감당하기 힘든 후유증은 제법 만끽할 수 있었지만,

채텀 스쿨 어페어와 마찬가지로 브레이크하트 힐역시 초기 장편이란 점에서

아직 그의 미덕이 만개하지는 못했다는 느낌이었고,

아무래도 그의 진짜 후유증과 진면목을 맛보기 위해서는

쿡의 팬들이 열광하는 붉은 낙엽심문을 찾아 읽어야 할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빨 자국 버티고 시리즈
이언 랜킨 지음, 최필원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8월
평점 :
절판


매듭과 십자가’, ‘숨바꼭질이후 거의 1년 반 만에 읽은 존 리버스 3편입니다.

존 리버스의 과거사와 캐릭터 설명에 치중하느라 밋밋한 스릴러로 읽혔던 매듭과 십자가,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려다가 정작 중심 서사가 흔들렸던 숨바꼭질이 준 실망감 때문에

이후로는 한동안 존 리버스 시리즈를 외면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다가 얼마 전, 인터넷 서점을 검색하던 중 문득,

이빨 자국에서 이언 랜킨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는 어느 분의 서평이 생각나면서,

, 이번 한 편만 더라는 막연한 기대감으로 다시 존 리버스와 만나게 됐습니다.

 

뼛속까지 스코틀랜드 인이며, 자신의 근거지인 에든버러를 사랑하는 존 리버스가

이번에는 런던을 무대로 끔찍한 연쇄살인사건 수사에 나섭니다.

에든버러의 연쇄 소녀살인사건을 해결한(‘매듭과 십자가’) 점을 높이 평가한 런던 경찰이

소위 울프맨이라 명명된 런던의 연쇄살인범 체포를 위해 존 리버스를 초대한 것입니다.

대부분의 런던 경찰은 스코틀랜드 출신의 존 리버스를 외국인취급하며 무시합니다.

전문가로 초빙된 그를 노골적으로 비아냥대는가 하면, 수시로 돌아가라는 압력을 가합니다.

그와 파트너가 된 조지 플라이트 경위만이 존 리버스를 공정한 태도로 대해주는데,

두 사람은 수사기법도, 성격도 전혀 다르지만 좌충우돌을 겪으면서도 협력을 이어갑니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언 랜킨은 잠시 런던에 머물던 시절 꽤나 스트레스를 받았었고,

무슨 심보인지 자신의 주인공 존 리버스에게도 그 스트레스를 겪게 해주고 싶었다고 합니다.

그래서인지, 런던의 모든 것 사람, 교통, 날씨, 건축물 등 을 못 마땅히 여기는

존 리버스의 짜증과 한탄을 작품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언 랜킨은 숨바꼭질에서도 런던과 런던 사람들에 대한 불만을 노골적으로 표현했는데

이빨 자국에 숨어있는 그의 직선적인 스코틀랜드 기질을 엿보는 것도 특별한 재미였습니다.

 

아무튼...

존 리버스 시리즈가 3편인 이빨 자국에 와서 한단계 업그레이드 된 것은 분명합니다.

번역하신 최필원 님도 후기를 통해 “‘매듭과 십자가숨바꼭질이 풋풋했다면,

이빨 자국에서는 전에 없던 무게감과 원숙미가 뚜렷이 느껴진다.”라고 언급하셨는데,

일단, 특수부대 생활이 남긴 엄청난 트라우마, 어린 시절부터 각인된 불행한 가족의 기억,

주변 동료들과 쉽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 이혼이 가져다 준 엉망진창의 생활 등

심신 모두가 삐딱하던 존 리버스가 이젠 제법 성숙한 경찰이 됐다는 점이 가장 눈에 띕니다.

, 전작들에서 순간적인 깨달음과 결정적 제보에만 의존했던 존 리버스가

느리지만 꼼꼼한 자신만의 추리를 통해 사건을 해결하는 점도 개선점(?) 중 하나입니다.

 

다만, “‘이빨 자국에서 이언 랜킨의 재능이 폭발하기 시작한다.”는 어느 분의 서평은

한편으로 수긍이 갔지만, 한편으론 아직 폭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예상 밖의 범인은 충격이나 반전보다는 독자의 예상을 따돌리려는 억지처럼 보였고,

리버스의 수사와 탐문은 왠지 슬로비디오를 보는 것처럼 한없이 느린 만연체였습니다.

깨달음과 제보대신 그가 구사한 무기는 범인 약 올리기인데,

그것 외에는 리버스가 멀고 먼 런던까지 와서 보인 활약이 크게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전처와 딸이 등장한 대목은 이혼남 경찰이면 당연히 등장하는 상투적 에피소드였고,

리버스에게 조언과 애정을 함께 쏟은 심리학자 리사는 어정쩡한 모습만 보이다 말았습니다.

 

결론적으로, 1~2편 이후 존 리버스를 포기하지 않았던 건 괜찮은 선택이었지만,

여전히 그의 폭발적 매력을 느끼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원석 같은 상태에서 점차 보석으로 진화하는 모습을 보인 점은 다행스럽게 여겨지지만,

에든버러로 복귀한 존 리버스가 시리즈 네 번째 작품인 스트립 잭을 통해

제대로 된 폭발을 만끽하게 해줄지 기대 반, 우려 반인 것도 사실입니다.

부디 스트립 잭에서 이언 랜킨의 대폭발을 볼 수 있게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리턴
이가라시 다카히사 지음, 이선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7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그러진 자기애와 순수한 악의,

인간의 심연 속에만 존재할 것 같은 악의 정령,

스티븐 킹의 미저리의 간호사 애니와 미쓰다 신조의 작품 속 초현실적 악령의 조합...

 

전편인 리카의 서평에서 리카의 캐릭터를 제 나름대로 지칭했던 표현들입니다.

그녀는 사랑에 관한 한 독점과 소유밖에 모르는 광기에 사로잡힌 스토커이며,

자신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방해하는 자들을 눈 하나 깜짝 않고 토막 내는 연쇄살인마입니다.

두드러지는 큰 키에 뼈만 남은 듯한 흙색 피부, 온몸에서 풍기는 썩은 냄새 등

어디에서도 눈에 띌 수밖에 없는 특징을 가졌지만,

10년 전, 사랑하던 남자의 토막난(그러나 여전히 살아있던) 몸통을 들고 사라졌던 그녀는

경찰력이 총동원된 수사에도 불구하고 완벽하게 자신의 존재를 감춰왔습니다.

 

● ● ●

 

그랬던 그녀가 다시 돌아옵니다.

리카는 10년간 애지중지 사랑했던, 하지만 이젠 죽어버려 쓸모가 없어진

한 남자의 토막난 몸통을 야산에 내다버림으로써 자신의 복귀를 알립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두 명의 경시청 여형사 나오미와 다카코가 리카의 뒤를 쫓습니다.

 

경시청 콜드케이스 수사반, 즉 미제사건 수사반에 근무하며 리카의 흔적을 조사해온 나오미는

10년 전 리카를 추격하다가 그녀의 참혹한 범죄에 충격을 받고 쓰러진 뒤로

지금까지 의식을 잃은 채 병상에 누워있는 노형사 스가와라의 애제자이기도 합니다.

나오미와 다카코는 상부의 지시와 무관하게 그녀들만의 수사를 전개시키고,

끝내 리카의 눈길을 끄는 데 성공합니다.

하지만, 새로운 사랑의 대상을 찾기 위해 10년 만에 돌아온 리카는 예전보다 더 난폭해졌고,

그녀의 일그러진 자기애와 순수한 악의는 더욱 날카롭게 벼려졌습니다.

나오미와 다카코의 집념과 의지 같은 건 리카에겐 하찮고 손쉬운 먹잇감에 불과합니다.

 

● ● ●

 

사실 리카의 복귀는 무척이나 기대됐던 이야기입니다.

단순한 소시오패스를 넘어 그야말로 악의 순수한 응집체 같던 리카가

10년 만에 세상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을 때 과연 무슨 참극이 벌어질까 궁금했기 때문입니다.

일단 출발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야산에서 발견된 몸통이 10년 전 리카의 마지막 범행대상이었던 남자라는 점,

그 남자가 몸통만 남은 채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살아있었다는 점,

그리고 리카가 새로운 사랑을 찾기 위해 또다시 만남사이트를 전전한다는 점 등

그녀의 복귀는 예상을 뛰어넘는 파격으로 시작됩니다.

 

, 리카로 인해 자책과 자괴에 빠진 끝에 식물인간처럼 망가진 스가와라 형사의 애제자이며

미제사건 수사팀에서 10년 간 리카를 추적해온 나오미의 캐릭터는 매력적입니다.

나오미와 다카코가 조직의 방침을 무시하고 따로 리카에게 접근하겠다는 발상이라든가,

그를 위해 기발한 유인책을 쓰는 대목은 긴장감을 극적으로 유발하는 설정들입니다.

리카는 여전히 잔혹한 방법으로 희생자를 해체하고,

눈에 띄는 외모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의 눈은 물론 촘촘한 CCTV도 무력하게 만듭니다.

수사 도중 위기에 처한 나오미의 모습은 읽기 불편할 정도로 참혹합니다.

리카의 복귀에서 기대됐던 덕목들이 곳곳에서 풍성하게 발견된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제가 내린 한 줄 평은 너무 허술하고 안이했던 후속편입니다.

300페이지를 갓 넘길 정도의 짧은 분량임에도

작가는 다카코의 연애 등 엉뚱한 묘사에 적잖은 분량을 할애한 반면,

정작 리카에 관해서는 인색할 정도로 분량을 아꼈습니다.

모처럼 세상 밖으로 나왔는데 나쁜 짓(예상보다) 별로 안 하고,

복귀한 이유나 목적도 제3자의 추측으로만 설명될 뿐이라 존재감이 미미할 수밖에 없습니다.

(전편에서도 의문이었지만) 특히 투명인간처럼 모든 감시망을 빠져나가는 그녀의 신통력은

이번 작품에서는 과하다 싶을 정도로 반복적으로 묘사되어 현실감을 떨어뜨렸습니다.

나오미와 다카코의 수사는 복잡하지도 않고 별 난관도 없이 순조롭게 전개될 뿐만 아니라

10년 차 미제사건 수사팀이라는 이력이 무색할 정도로 단순-초보에 가깝습니다.

그런 그녀들의 수사조차 못 따라가는 경시청 수사1과는 한심해 보일 정도입니다.

 

리얼 호러물과 판타지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며 극도의 공포심을 발휘했던 전편에 비해

리턴11년 만에 쓰인 후속편으로서는 여러 면에서 자격 미달이라는 생각입니다.

3편인 후속작 리버스가 리카의 비기닝 또는 프리퀄 스토리라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봤는데,

부디 리턴의 아쉬움을 털어낼 수 있는 작품이기를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프 보이스 - 법정의 수화 통역사
마루야마 마사키 지음, 최은지 옮김 / 황금가지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경찰 사무직을 그만두고 수화 통역사가 된 아라이 나오토는

자신이 근무하던 경찰서 관할지역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소식에 크게 놀랍니다.

살해된 자는 농인(聾人) 재활시설의 대표로,

17년 전, 같은 시설의 대표로 있던 자신의 아버지와 같은 방법으로 살해됐기 때문입니다.

당시 체포된 범인은 농인이었고, 말단 경찰 아라이는 그의 수화 통역을 맡은 바 있습니다.

통역 도중 사건 수사에 뭔가 오류가 있음을 감지했지만

강압적인 상부의 지시 때문에 이의 제기 한 번 못했던 아라이는

17년이 지나 똑같은 방법으로 그 아들이 살해된 사건을 접하곤 충격에 빠집니다.

경찰은 17년 전 사건의 범인인 몬나 데쓰로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쫓지만,

아라이는 농인이 연루된 두 사건의 이면에 전혀 다른 비밀과 진실이 숨어있다고 확신합니다.

 

● ● ●

 

데프 보이스속 인물들은 세 개의 캐릭터 – ①농인(聾人, 들리지 않는 사람),

청인(聽人, 들리는 사람), 그리고 농인과 청인의 경계에 있는 사람으로 분류됩니다.

세 번째 캐릭터의 대표적 사례는 농인 부모에게서 태어난 청인인데

이들을 가리켜 코다(CODA, Children of Deaf Adults)라고 부르며,

주인공 아라이 나오토가 바로 이 경우에 속하는 인물입니다.

 

부모와 형이 모두 농인이지만 본인만 청인이었던 어린 시절의 아라이에게

들린다는 것은 축복이 아니라 트라우마였습니다.

그는 세상과 가족을 연결하는 통역사였지만 정작 가족 안에서는 늘 외톨이였습니다.

농인인 부모와 형은 아라이는 끼어들기 힘든 자신들만의 유대로 뭉쳐있었기 때문입니다.

성장하면서 가족과 멀어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농인의 세계와도 연을 끊으려 했지만,

경찰 사무원이 된 뒤에도, 또 경찰을 그만둔 뒤에도

들리지 않는 사람과의 인연은 좀처럼 그를 놓아주지 않습니다.

 

데프 보이스는 농인과 청인의 경계에 선 아라이 나오토의 트라우마와

17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동일한 수법의 살인사건을 엮은 미스터리입니다.

더불어, 농인에 대한 사회적 편견은 물론 농인들 간의 갈등과 딜레마까지 다룸으로써

300여 페이지의 분량 안에 다양한 서사를 선보입니다.

 

사실, 미스터리 자체만 놓고 보면 그리 크지도, 복잡하지도 않은 설정이지만,

작가는 아라이를 통해 농인 대 농인의 갈등, 농인 대 청인의 갈등을 정교하게 그려냄으로써,

또 가족-이웃-사회가 어떻게 그 갈등을 촉발시키고, 부추기고, 억누르는지를 보여줌으로써

미스터리 이상의 여운과 감동을 전해줍니다.

 

아저씨는 우리 편? 아니면 적?”이라는 카피는

17년 전 아라이가 통역을 맡았던 농인 용의자의 막내딸이 던진 수화 질문입니다.

아라이는 당혹스러운 표정만 보여줬을 뿐 소녀에게 분명한 대답을 하지 못합니다.

그 순간만이 아니라 아라이는 그때까지 평생 그 질문에 대한 답을 회피해왔기 때문입니다.

그날 이후로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들리는 사람인가, ‘들리지 않는 사람인가?

나는 누구의 편이며, 누구의 적인가?

 

가족의 정체가 드러날까 두려워 경찰직 중에도 일부러 사무직을 택했고,

농인 자녀를 낳을지도 모른다는 공포감에 결혼마저 파탄에 이르게 방치한 것을 보면

아라이의 무의식은 ’, 그러니까 들리는 사람의 자리에 안주하고 싶어 한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운명은 그의 삶을 계속 뒤흔들었고,

결국 경찰 퇴직 후 수화 통역사가 되어 또다시 농인들에게 돌아오게 만듭니다.

그렇다면 그는 이제 온전히 우리 편이 될 수 있을까요?

작가는 마지막까지 이 곤란한 딜레마를 아라이에게 끊임없이 던집니다.

 

일본 내 농인 사회의 갈등과 딜레마를 강조하기 위해

조금은 과도한 분량을 할애하여 전문 정보와 주제의식을 설명한 점이 부담스럽긴 했지만,

동시에, 흥미로운 미스터리 속에 농인의 문제를 현실감 있게 풀어낸 작가의 필력 덕분에

제대로 알지 못했던 농인들의 고민과 실상을 생생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중간에 사건의 진상을 알아낼 수도 있지만,

데프 보이스는 누가 범인이고, 무엇이 진실인지보다

작품의 밑바닥을 흐르는 좀더 큰 서사와 등장인물들의 감정을 따라가는 작품이라

미스터리가 좀 쉬워 보이더라도 마지막 장까지 천천히 음미하시기를 바랍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미안하다고 말해 스토리콜렉터 52
마이클 로보텀 지음, 최필원 옮김 / 북로드 / 2017년 3월
평점 :
절판


산산이 부서진 남자내 것이었던 소녀에 이어 한국에 소개된 조 올로클린 시리즈 세 번째 작품입니다. 마이클 로보텀의 홈페이지를 보면 산산이 부서진 남자앞에 ‘The Suspect’(한국 출간 2005, ‘용의자’), ‘The Drowning Man’이 있으니, 전체로 보면 다섯 번째 작품입니다.

 

이야기는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하나는 3년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두 소녀 태쉬와 파이퍼 사건이고, 또 하나는 세미나 때문에 옥스퍼드에 들른 조가 본의 아니게 휘말린 부부살해사건이 또 하나입니다. 사라진 소녀 파이퍼가 쓴 일기장 같은 기록엔 외모도, 집안도, 성향도 전혀 다른 두 소녀가 가족, 학교, 이웃들로부터 받은 상처와 그들에게 되갚아줬던 복수가 담겨있습니다. 하지만 그녀들은 톡톡히 대가를 치러야 했고, 그에 대한 반발로 옥스퍼드를 떠날 결심을 합니다. 그러나 런던에서의 그림 같은 삶을 꿈꾸던 그녀들은 어느 날 갑자기 세상과 단절됩니다. 한편, 조는 부부살해사건 때문에 옥스퍼드 경찰에 협조하기 시작한지 얼마 안 돼 소녀실종사건과의 접점 - 피살된 부부의 농장 인근의 얼어붙은 호수 밑에서 발견된 소녀의 시체 - 을 찾아냅니다. 그리고 이내 수사팀의 중심이 되어 두 사건을 동시에 조사합니다.

 

이번에 조가 맡은 사건은 (여전히 잔혹하긴 하지만) 규모나 복잡성 면에서 단순한 편입니다. 사건에 개입하는 과정 역시 본인 또는 가족이 고통스럽게 연루되는 방식이 아니라 출장지에서 우연히 협조요청을 받는 식으로 한 발 떨어진 상태에서 출발합니다.

또한, 먼저 출간된 두 작품에 비해 미안하다고 말해의 조는 비교적 안정적인 컨디션입니다. 파킨슨병은 그의 애정행각(?)에 전혀 영향을 못 미칠 정도로 미미한 증상만 보입니다. 별거 중인 아내 줄리안이나 딸 찰리와도 큰 트러블 없이 오로지 사건에만 매진합니다. 앞선 두 작품에서는 가족들이 사건에 워낙 깊이 말려든 바람에 긴장감은 높아졌지만, 심연 같은 상심에 빠진 조를 지켜보는 일이 꽤나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이번 작품에서 조의 가족들은 안전지대(?)에 머물며 독자들이 조의 활약에만 매진하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미안하다고 말해는 전작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지닌 작품입니다. 전작의 범인들은 조 못잖은 심리전문가들로 피해자를 마음껏 좌지우지했고, 그런 만큼 조의 수사는 임상심리학자로서의 특별한 능력에 기반을 두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미안하다고 말해의 조는 심리학자라기보다는 명탐정에 가까운 캐릭터입니다. 물론 여전히 용의자들의 심리를 날카롭게 분석하고, 자신의 경험과 직관을 통해 경찰의 1차원적인 수사의 허점을 밝혀내고 있지만, 이미 여러 건의 위험천만한 사건을 겪으면서 탐정의 기질까지 익힌 덕분인지 찰떡궁합의 파트너인 전직 경찰 빈센트 루이츠보다도 훨씬 더 예리한 추리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이런 조의 새로운 면모는 한편으론 반가우면서도 한편으론 아쉽게 읽히는 대목입니다. 다른 스릴러 주인공들과 차별화됐던 심리학자의 미덕이 무뎌진 느낌 때문일까요? 그래서인지 용의자들에 대한 그의 심리학적 진단들이 대부분 그냥 볼 땐 몰랐지만, 용의선상에 올려놓고 생각하고 보니 그는 이런이런 이상심리를 가진 게 분명합니다.”라는 식의 결과론처럼 읽히곤 했는데, 조 올로클린과 마이클 로보텀의 팬이라면 누구나 느꼈을 아쉬움일 것입니다.

하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마이클 로보텀의 글빨은 이런저런 아쉬움을 충분히 상쇄시켜줍니다. ‘산산이 부서진 남자가 소름 돋도록 서늘한 런던의 빗방울 같은 문장들이었다면, ‘내 것이었던 소녀는 살인극 속에 깃든 냉소적인 블랙유머가 빛났고, ‘미안하다고 말해는 짧고 간결한 문장 속에 정통 스릴러의 맛이 묻어난 작품입니다. 괜히 현란하고 난해한 문장들로 독자의 눈을 어지럽히지도 않고, 과도한 감정 묘사나 불필요한 선정적 묘사로 분량을 잡아먹지도 않습니다. 방대한 분량을 놓고 이 작품을 번역한 최필원 님께서 흉기라는 비유를 쓰기도 했지만, 개인적으론 마이클 로보텀의 문장이 갖는 매력 덕분에 금세 마지막 장에 이를 수 있었습니다.

 

심리학자 조대신 명탐정 조를 만난 것이 아쉽다고 평하긴 했지만, 그만큼 마이클 로보텀의 정통 스릴러의 묘미를 맛봤던 것은 나름 색다른 재미였습니다. 현재의 사건을 통해 과거의 미제 사건을 해결한다는 구성도 매력적이었고, 파이퍼의 기록에서 드러난 10대의 폭주, 문제적 가족, 소도시 마초들의 집단적 폭력성도 읽는 내내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오랜 파트너이자 천재적인 기억력을 가진 빈센트 루이츠는 언제나처럼 반가웠고, 전작에서 악연으로 만났지만 이번 작품에서 조와 미묘한 관계로 발전한 미모의 심리학자 빅토리아 나파르스텍의 향후 행보도 관심을 끌었습니다.

 

다음에 읽을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이 어떤 작품이 될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시리즈 첫 작품인 ‘The Suspect’일지, 최신작인 ‘Close Your Eyes’일지, 아니면 또 다른 스탠드얼론일지 모르겠지만, 어떤 작품이 됐든 마이클 로보텀의 작품이라면 이젠 확실히 must-read 목록의 최상단에 자리 잡은 것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