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이프 오어 데스 스토리콜렉터 50
마이클 로보텀 지음, 김지선 옮김 / 북로드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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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실 인간에게 한치 앞이라도 내다볼 줄 아는 능력이 있다면

세상은 지금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겠죠.

행복과 불행은 한치 앞을 못 보는 인간을 조롱하듯 어느 날 갑자기 들이닥치곤 합니다.

그리고 찰나 같은 한순간에 그 인간의 미래를 훅 바꿔놓습니다.

어처구니없거나 믿어지지 않는 방식으로 말이죠.

 

라이프 오어 데스의 주인공 오디 파머는 찰나 같은 순간에 들이닥친 행복과 불행덕분에

삶 자체가 누더기처럼 조각조각, 또는 롤러코스터처럼 업다운을 거듭해온 인물입니다.

하지만 그가 만끽할 수 있었던 행복은 너무 짧았고,

그가 감내해야 했던 불행은 너무도 크고, 깊고, 길었습니다.

만일 오디 파머에게 한치 앞을 내다보는 능력이 있었다면

어쩌면 그의 인생에서 불행이란 영원히 존재하지 않았을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너무도 안타깝고 애틋한 일입니다.

 

● ● ●

 

10년 전, 현금수송차 강도사건으로 700만 불이란 거액이 사라진 현장에서

오디 파머는 경찰의 총격에 머리를 다친 채 생포됐습니다.

공범들은 죽거나 도주했고, 700만 불은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모두가 700만 불의 행방을 궁금히 여겼고, 오디만이 답을 알고 있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수감 기간 내내 오디는 갖은 폭력과 협박에도 입을 열지 않습니다.

그러던 그가 만기 출소 하루를 앞두고 홀연히 교도소를 탈출합니다.

상원 의원과 유력인사 등 거물급들이 나서서 오디의 행방을 뒤쫓는가 하면,

연방수사국 요원은 물론 10년 전 사건 현장에 있던 보안관까지 추격전에 나섭니다.

목숨을 건 오디의 탈주극이 전개되는 동안

그를 영원히 묻어버리려는 자들과 그의 진실을 알아내려는 자들이 대충돌을 일으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10년 전 강도사건의 충격적인 실체가 서서히 드러납니다.

 

● ● ●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긴박하게 전개되는 오디의 탈주극이 하나이고,

유년기부터 현재까지 행복과 불행이 교차했던 오디의 삶에 대한 회고가 나머지 하나입니다.

두 이야기는 10년 전 오디를 파멸시켰던 강도 사건의 진실에서 교차합니다.

 

두 이야기는 전혀 다른 뉘앙스의 서사들입니다.

전자가 전형적인 스릴러를 표방하고 있다면,

후자는 평범하고 모범적인 한 청년이 어떻게 밑바닥으로 추락했는지,

그 밑바닥에서 만난 한 여인을 향해 얼마나 진실하고 깊은 사랑을 쏟아 부었는지,

그리고 그들의 사랑이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됐는지 등 묵직한 연대기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스릴러 대가들이 만들어낸 매력적인 서사의 공통점은

단지 사건에만 몰입하지 않고 삶의 무게와 희로애락을 잘 버무려냈다는 데 있습니다.

마이클 코넬리의 해리 보슈가 그렇고, 요 네스뵈의 해리 홀레가 그렇습니다.

그들에 비해 라이프 오어 데스의 오디 파머는 지극히 평범하기 그지없는 캐릭터지만

그의 삶의 궤적이 스릴러와 만나면서 일으킨 화학반응의 강도는 결코 그들에 못지않습니다.

그만큼 오디 파머의 희로애락이 리얼하고 치열하게 그려졌다는 뜻입니다.

스티븐 킹이 범죄소설들이 자꾸 잊어버리는 영혼을 가진 스릴러라고 호평한 것도

아마 이런 이유 때문이리라 생각됩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같은 이유 때문에 작가의 대표작인 조 올로클린 시리즈에 비해

페이지가 넘어가는 속도나 긴장감이 떨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스릴러 부분에서는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긴박한 이야기가 전개되지만,

오디의 삶을 회고하는 부분에서는 그가 겪은 모든 감각과 감정들을 디테일하게 그리기 위해

적잖은 분량의 문장들이 동원되기 때문입니다.

그가 바라보는(바라봤던) 풍경들, 그의 가슴을 스치는(스치고 갔던) 설렘과 고통들,

그리고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해 운명처럼 겪어야만 했던 행복과 불행들...

 

속도감 있는 스릴러를 기대했던 독자에겐 좀 지루하게 읽힐 수도 있는 대목들이지만

결말부에 가서 독자를 울컥하게 만들고 긴 여운을 드리우게 만드는 것은

결국 작가가 오디 파머라는 한 개인의 삶과 사랑에 대해 정성스레 쌓아온 서사의 힘입니다.

저 역시 좀처럼 잘 넘어가지 않는 페이지 때문에 예상보다 하루이틀 시간이 더 걸렸지만

마지막 장을 덮은 뒤에는 왜 그 많은 분량들이 필요했는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습니다.

 

오디 파머가 겪은 찰나의 순간에 들이닥친 불행은 그 누구라도 겪을 수 있는 일입니다.

실제로 수많은 사람들이 겪어왔고,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는 겪고 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이기 때문에 감내해야 하는 운명입니다.

어쩌면 이 서평을 채 마무리 짓기도 전에 제게 그 순간이 닥칠 수도 있는 일이겠죠.

읽는 내내 그런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질 않았고, 다 읽은 지금도 여전히 마찬가지입니다.

남의 이야기처럼만 읽힌 여느 스릴러보다 큰 공감을 느낄 수 있었던 것은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그런 점에서 라이프 오어 데스는 한순간에 종이 한 장 차이로도 갈릴 수 있는

한치 앞을 내다보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을 단적으로 잘 표현한 제목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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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체 읽는 남자
안토니오 가리도 지음, 송병선 옮김 / 레드스톤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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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역사소설가가 중국 송나라 때의 법의학자 송자를 주인공으로 쓴 역사소설입니다.

태생(?) 자체가 무척 특이한 작품입니다.

산업공학을 전공한 현직 공대 교수면서 역사소설가라는 작가의 이력은 더욱 이채롭습니다.

 

시체 읽는 남자는 제목 그대로 법의학을 다룬 작품입니다.

역사상 최초의 법의학서라 불리는 세원집록을 집필한 송자는

의술 자체가 천대받던 13세기 송나라에서 중국 최고의 명판관으로 이름을 날린 사람입니다.

(비록 대부분 픽션이긴 하지만) 작가는 고난으로 얼룩진 송자의 젊은 시절부터 시작하여

수없이 많은 죽음의 위기를 넘기면서 기어이 판관의 자리에 오르는 그의 성장-성공 스토리를

법의학 + 법정 미스터리라는 긴장감 넘치는 서사 속에 담아내고 있습니다.

 

송자가 겪는 젊은 날의 시련은 좀 지나칠 정도로 혹독합니다.

배신, 사기, 모함 등으로 인해 온 가족을 잃는가 하면,

고향을 떠나 도망자 신세가 된 뒤에는 추격자를 뿌리쳐야 하는 위기의 순간들을 넘깁니다.

한가닥 희망을 안고 도착한 도성에서는 예기치 못한 좌절을 겪으면서

공부에 대한 열망마저 접은 채 공동묘지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신세로 전락합니다.

이 과정에서 송자는 보통 사람 같으면 적어도 5~6번은 죽고도 남을 고비를 겪게 됩니다.

송자의 성공을 빛나게 하기 위한 작가의 기초공사였겠지만

어떤 때는 이렇게까지 주인공을 괴롭혀야 되나?’라는 의문이 들 정도로

작가는 송자를 절벽 끝까지 수도 없이 밀어붙입니다.

 

하지만 그 시련들은 송자에게 또다른 세상을 배울 수 있는 기회가 되기도 합니다.

특히 공동묘지에서 여러 종류의 시신들을 접하면서

송자는 책이나 학교에서는 배울 수 없는 생생한 경험을 하게 되고,

그를 통해 검시관으로서의 스펙을 차곡차곡 쌓아가게 됩니다.

좀 장황하게 묘사되긴 하지만 송자가 겪는 시련들은 그를 타고난 천재에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스스로를 단련시킨 노력형 천재로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돼줍니다.

 

CSI 등의 미드에 익숙해진 독자들에게는 송자가 선보이는 검시, 해부, 법의학적 판단이

그리 새롭거나 대단하게 보이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방대한 자료조사를 통해 설명하고 있는 13세기 송나라의 상황을 감안하면

당시 무모해 보이기까지 한 송자의 법의학에의 열의와 노력은 충분히 공감할 수 있습니다.

특히 우여곡절 끝에 궁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된 송자가

참혹한 시체들과 사건 현장에서 미세한 단서들을 찾아내며 타고난 재능을 발휘하는 대목은

CSI도 부럽지 않은 세밀함과 정교함을 자랑합니다.

 

작가는 송자를 시체를 통해 많은 정보를 알아내는 법의학자에 머물게 하지 않고

뛰어난 추리력을 지닌 현명한 판관의 캐릭터까지 발전시킵니다.

마지막 절정부에서 황제를 앞에 두고 적들과 벌이는 한판의 법정 대결은

현대 영미권의 뛰어난 법정물을 연상시킬 정도로 팽팽한 승부로 묘사됩니다.

송자는 자신이 찾아낸 단서들을 통해 상대의 모함을 하나하나 깨부수는가 하면,

아무도 예상 못한 범인의 정체를 밝힘으로써 황제를 비롯한 궁 전체를 발칵 뒤집어놓습니다.

 

물론 송자의 뛰어난 추리력에 대해서는 독자의 호불호가 갈릴 수 있습니다

시체 읽는 남자, 즉 검시관의 영역을 뛰어넘어 수사관 역할까지 해내는 송자가

이때만큼은 작위적이란 느낌이 들 정도로 너무 완벽한 스펙을 발산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야기가 워낙 스피디하게 전개되는데다 긴장감으로 꽉 차 있어서

그 정도의 위화감은 가볍게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라는 생각입니다.

 

13세기 동양의 법의학자라는 소재도 흥미로웠고,

오래 전 방영된 허준이라는 드라마를 연상시키는 극적인 서사도 매력적이었습니다.

젊은 날의 송자에게 주어진 시련이 좀 과한 느낌이 들었고,

구성 면에서도 많은 분량이 할애되어 초중반까지 약간의 지루함을 주는 아쉬움은 있었지만

그런 아쉬움은 중반부터 발휘되는 속도감과 긴장감,

그리고 마지막에 터지는 반전으로 충분히 상쇄될 수 있었습니다.

진실을 밝힘으로써 황제의 인정을 받은 송자가

본격적인 판관으로 역할하게 될 후속작을 기대하는 것은 비단 저만의 바람은 아닐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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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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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순서대로 읽기를 시작한 게 2014년인데,

이제 세 번째 작품을 읽었으니 꼭 1년에 한 편씩인 셈입니다.

사실 출간 순서대로 치면 저녁의 구애전에

장편 재와 빨강이 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두 번째 단편집인 사육장 쪽으로아오이 가든에 비해 순화(?)된 느낌을 줬다면,

저녁의 구애는 좀더 일상성이 강조된, 즉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캐릭터 면에 있어서는 사육장 쪽으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은 어딘가 마이너의 성향이 강하거나 또는 일부 문제적 인간들로 보이지만

실은 상실감과 익명성, 단절과 고립이 몸에 배어버린 대다수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어느 쪽이 됐든 그들은 그 뒤로도 여전히 불행할 것이 분명하다.”는 암울한 인상을 남깁니다.

사육장 쪽으로의 인물들은 닭장이나 사육장처럼 도망칠 수 없는 갇힌 환경에 처한 채

출구 없는 먹먹한 삶을 살다가 잠시 희망에 들떠 모종의 일을 벌이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망가지거나 진창을 헤매며 끝없는 늪으로 사라져버립니다.

그에 비해 저녁의 구애의 인물들은 오전과 다를 게 없는 오후,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내일 등

다람쥐 쳇바퀴 같은 동일성의 지옥에 빠진 채 무의미한 현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 동일한 점심

이런 주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텍스트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하 복사실을 운영하는 는 매일 정오 구내식당에서 늘 비슷한 메뉴로 점심을 해결합니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의 전철을 타고, 새로울 것 없는 복사로 하루를 보냅니다.

누구도 에게 복사에 관한 주문 외엔 말을 건네지 않으며,

역시 누구에게도 2m 이내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의 복사된 일상을 깨뜨리는 사건이 벌어진 날, 그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외에도 매일 무의미한 서식만 작성하는 남자 (토끼의 묘),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남자 (정글짐),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계적으로 통조림을 밀봉하는 사람들 (통조림 공장)

소통과 관계가 단절된 채 동일하게 반복되는 복사된 삶에 매몰된 인물들의 비극은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는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는 내겐 미래가 있고, 지금의 삶 역시 변화무쌍하며 의미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특별한 소수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저녁의 구애아오이 가든에 비해 한층 순화된 듯 보이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동일하게 복사되는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삶저녁의 구애의 대표 정서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의반, 타의반으로 찾아온 불행을 다룬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반복적이고 무의미하지만 나름 무탈하게 유지돼온 일상들은

입과 귀로 파고드는 하루살이 떼, 내 곁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자살이나 실종이나 교통사고,

낯선 이국땅에서 길을 잃은 당혹감, 사소한 자동차의 고장 등에 의해 순식간에 파열됩니다.

상사의 지시에 따라 정체불명의 자루를 운반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세든 집의 덩치 큰 개, 불온한 숲의 멧돼지의 울음, 만삭의 아내에게 둘러싸인 남자 (산책),

본사 발령을 받고 서울로 오는 길에 폭우와 폭력에 노출된 남자 (크림색 소파의 방)

전작인 사육장 쪽으로의 수록작들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그것입니다.

 

말미에 수록된 평 가운데 저녁의 구애의 두 가지 미덕을 한마디로 잘 정리한 대목이 있는데,

편리하고 안온한 일상이 소름 끼치는 불안과 암흑,

그리고 끝 모를 공포로 탈바꿈해가는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라는 부분입니다.

편혜영의 작품들이 서사의 힘과 현실감을 동시에 획득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 평이 아닐까요?

 

다만, 몇몇 작품에서는 이런 주제의식을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장치들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보다는 작위적인 느낌, 즉 멋을 부린 듯한 개운치 않은 느낌도 받게 됩니다.

또 누군가의 분석이나 설명 없이는 작가의 의도를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전작에서도 이런 느낌은 분명 있었지만,

저녁의 구애의 경우 전작보다 현실감이 강한 수록작들이 많아서 그런지

역설적으로 위화감 역시 강하게 느껴진 탓일 수도 있습니다.

 

1년에 한 편 꼴로 읽고 있는 상황에서 편혜영의 다음 작품을 언제쯤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색깔을 바꿔 가며 독자를 당혹시키는 그녀의 글이

다음 작품에선 어떤 모양새로 제 앞에 나타날지 궁금해집니다.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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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트랙 발란데르 시리즈
헨닝 망켈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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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뛰어난 스펙이나 추리력보다는 성실함과 진정성이 돋보이는 평범한 수사반장발란데르는

스웨덴 남부 말뫼에서 위스타드에 걸쳐 벌어지는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됩니다.

누군가 도끼로 희생자들의 머리를 쪼갠 뒤 머리가죽을 벗겨가는데

희생자들 대부분은 부패하고 부정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고령의 인물들이지만

딱히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 발란데르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그 와중에 전혀 다른 성격의 희생자가 등장하면서 수사는 미궁에 빠집니다.

연쇄살인사건들이 일어나기 직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유채밭 소녀 분신자살은

발란데르의 머릿속 한구석에 불편하게 남아 수사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사건만으로도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발란데르에게는

재혼을 꿈꾸는 상대 바이바, 예민한 시기의 딸 린다,

치매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고령의 아버지 등 개인적인 문제까지 산적해있습니다.

또한 중년의 우울함과 경찰로서의 피폐한 삶에 회의까지 몰려와

발란데르는 짓눌린 듯한 압박감 속에서 사건수사에 임하게 됩니다.

무수한 탐문과 과학수사, 프로파일링까지 동원한 발란데르의 집념 덕분에 사건은 해결되지만

사건의 이면에는 발란데르를 또다른 절망에 빠뜨리는 비참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 ●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의 10편의 발란데르 시리즈가운데 5번째 작품입니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보니 과거에 여러 출판사에서 6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지금은 대부분 절판 상태이고 웅진에서 새롭게 시리즈 출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만난 작품이 시리즈 5번째 작품이다 보니

주인공인 발란데르의 과거사라든가 캐릭터에 한껏 몰입하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적잖은 분량에 할애된 그의 개인사덕분에

발란데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습니다.

특히 혹독한 형사로서의 삶을 살아온 45세의 중년남자가

아버지, , 이혼한 아내, 새로 만난 연인 등 가까운 인물들과 유지하고 있는 불안정한 관계,

또 자신을 신뢰하는 동료, 선후배들과 나누는 업무적인 관계 등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처음 만난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친숙함과 안쓰러움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심플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파괴한 부당한 권력과 폭력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그 복수심이 자아낸 다분히 사이코패스적인 연쇄살인이 주축인데,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의 정체와 동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자연히 이야기는 반전보다는 심층묘사, 결과보다는 과정, 외양보다는 심리에 방점이 찍히는데

이런 심플한 구조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작가는 곳곳에서 복지국가 스웨덴의 참담한 민낯이라든가, 까마득히 벌어진 빈부 격차,

지독한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빚어낸 일그러진 폭력의 실상 등을 묘사하는데

사건 자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작품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작위적 설정처럼 느껴집니다.

부당하게 권력과 부를 손에 넣은 자들이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살해되고,

등장인물 대부분이 외롭게 혼자 살거나 복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런 설정을 연쇄살인사건의 사회적 배경이라고 칭하기엔 곤란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매력은 사건과 수사보다는 발란데르의 캐릭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닳고 닳은 중년의 형사 발란데르는

이전에 접한 몇몇 같은 연배의 주인공들과 겹치는 상투적인 면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사실적인, 즉 실제 존재할 것 같은 매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일과 가족과 사랑에 치여 우울한 중년의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알코올중독자도, 비관주의자도, 무기력증에 빠진 환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 앞에 닥친 문제들을 진지하게 대합니다.

열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의 성실함과 진정성은 작품 내내 돋보입니다.

 

그래선지 번역가 김현우 님 역시 미련한 남자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단 옮긴이의 말을 통해

대부분 발란데르의 캐릭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발란데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100% 공감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자신감 없고, 정답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계속 옆으로 새면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던지고 있다는 것.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그래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손을 놓아버린다면 자신이 지키고 싶은 어떤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기에 차마 놓아버리지 못하는 마음.“

 

사실 스릴러에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사건의 재미를 능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발란데르는 유독 그런 면에서 압도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설령 스릴러로서의 미덕이 조금 아쉽게 느껴질지라도

사이드 트랙앞의 4개의 작품은 물론 이후의 5작품이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둡고 무거운 주인공 캐릭터를 500페이지 넘게 감내하며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설프게 잔혹함과 폭력만을 내세우며 허술한 캐릭터 플레이를 하는 작품들보다는

(씁쓸하든 촉촉하든 기운을 북돋든) 이런저런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발란데르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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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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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메인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독일 나치 친위대 정보기관의 책임자이자 유태인 말살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총독으로 군림하며 프라하의 도살자라 불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삶과

그를 제거하기 위한 체코슬로바키아 두 공수부대원의 영웅적인 암살 시도를 그린 작품입니다.

 

일단이란 단서로 줄거리를 요약한 이유는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단순한 픽션 또는 역사소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가 스스로 인프라 소설이라고 지칭하기도 한 이 작품은 말하자면

실화가상의 내러티브의 조합에 작가의 생각이 가미된 소설입니다.

비유하자면, 한 편의 영화 속에 메이킹 필름이 중간중간 삽입된 상태라고 할까요?

3인칭 시점으로 2차 대전 당시의 상황이 전개되다가

느닷없이 작가의 1인칭 시점으로 돌아와 집필 과정이나 자료조사 상황이 묘사됩니다.

 

작가는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픽션을 배제하려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는 물론 대화 한마디조차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하려고 애씁니다.

부득이 상상력에 의존해야 할 경우 반드시 (자신이 화자가 되는) 다음 챕터에서

이것은 상상에 의한 것이다.’라고 반드시 짚고 넘어갑니다.

, 집필 도중 발견한 자료나 단서가 있으면

마치 일기장에 쓰듯 전에 쓴 것은 오류다.’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메인 줄거리와 무관한 내용이더라도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과감하게 한 챕터를 할애하여 정보 설명을 늘어놓는가 하면,

심지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등장시킨 영화나 소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허구적으로 조작된역사적 사실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기도 합니다.

 

처음엔 이런 식의 서사가 너무 낯설어서 뭐지?’하며 의아한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암살 스토리만큼 메이킹 필름의 재미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합쳐놓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덕분에 드라마의 리얼리티가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의 독일의 상황과 히틀러 후계자들의 치열한 권력투쟁,

나치에게 유린당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과 유태인 말살 계획의 입안과정 등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새롭게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아무래도 엔딩만큼은 작가도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희대의 도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대한 암살 시도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 목숨을 건 암살에 나선 체코슬로바키아의 두 영웅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등

가장 극적인 부분에서는 작가 역시 상상력만으로 집필된 짧은 소설적 구성을 택합니다.

앞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리얼리티의 힘 때문인지

마지막 엔딩은 독자를 한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묵직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겪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엔딩입니다.

 

줄거리를 상세하게 정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주로 형식에 대해 많이 언급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도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의 정세라든가

히틀러와 나치 수괴들을 다룬 그 어떤 역사서나 픽션보다

긴장감과 재미, 리얼리티와 서사의 힘을 겸비한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으로 프랑스 대선 과정을 그린 소설이 있다는데

비밀과 거짓말, 거래와 타협, 우아함과 추악함이 공존하는 대선이라는 과정이

어떤 식으로 그려졌을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제목인 ‘HHhH’“Himmlers Hirn heißt Heydrich.”의 약자입니다.

직역하면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고 불린다.”인데,

히믈러는 당시 나치 친위대의 수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괴링, 보르만, 괴벨스 등과 함께 히틀러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인물입니다.

하이드리히는 히믈러의 오른팔이자 나치 친위대의 2인자로서

폴란드 침공, 학살 전문부대 창설, 유태인 학살 등을 자행한 실질적인 설계자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독일에서는 히믈러의 두뇌가 하이드리히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던 것입니다.

그의 별명 중 하나가 독일 3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였던 것을 보면

‘HHhH’라는 약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지녔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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