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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평점 :
사실 ‘연금술사’,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은 뒤로
파울로 코엘료는 저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스파이’가 마타 하리의 이야기, 그것도 그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다뤘다는 카피를 보곤
오랜만에 큰맘(?) 먹고 파울로 코엘료를 다시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 즉 마타 하리가 처형되기 직전에 변호사에게 쓴 장문의 편지와
그 변호사가 마타 하리에게 쓴 중편 정도의 편지로 구성돼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편지 형식을 통해 마타 하리의 출생과 성장, 결혼과 독립,
무희로서의 파격적인 삶, 독립적이며 자유를 갈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삶 등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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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던 유럽은 전운이 감도는 위험한 기운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산업과 과학의 힘이 공존하는 시대였지만,
동시에 여성에게는 전근대적인 억압과 차별이 여전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가부장적인 남편, 희생만을 강요하는 가족제도, 도구화된 여성성에 억눌려 살던 마타 하리는
꿈에 그리던 파리에 정착하면서 이국적인 외모와 관능적인 춤을 앞세워
당시 유럽의 내로라하는 무대에서 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은 부유층과 고위 관료들을 사로잡았으며
널리 알려진 대로 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화려한 삶을 구가했습니다.
사교계를 장악하고 남성들을 희롱하며 자신만의 이상을 실현했던 마타 하리의 삶은
1차 대전의 발발을 전후하여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마타 하리를 추앙했던 파리는 어느 새 그녀의 춤을 지겨워하기 시작했고,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이루려던 그녀의 꿈은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무산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무렵, 그녀와 프랑스 고위 관료들과의 내밀한 관계를 주시하던 독일이
마타 하리를 다른 ‘용도’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사후 100년이 다 된 지금까지 그녀를 스파이로 기억하게 만든 단초가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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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는 마타 하리를 앞세운 정통 스파이물도, 스릴러도 아닙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다양한 사실 자료와 적절한 분량의 상상력을 통해
한때 유럽을 사로잡고 가부장적인 남성들을 굴복시켰던 파격적인 여성성과 함께
이중스파이로 낙인찍힌 채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버림받은 그녀의 삶을 담담히 변호합니다.
특히 파울로 코엘료는 그녀가 참혹하게 처형당한 이유를 ‘스파이라는 죄목’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남성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지배적 가치관과 도덕관념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이고,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나는 희생자가 아니라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치러야 할 대가를 당당히 치른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29페이지, 마타하리의 편지 中)
“마타 하리는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로 남성들의 요구에 저항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택했다.” (작가 인터뷰)
말하자면 출판사 책 소개대로
“마타 하리는 여자라는 죄로, 대중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죄로,
평판을 유지해야 하는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죄로 부당하게 처형되었다.
그녀는 도덕적 관습에 겁 없이 저항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이
마타 하리에 대한 파울로 코엘료의 변론의 핵심인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껏 알던 마타 하리에 대한 통념을 뒤집게 만든 흥미로운 책읽기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파울로 코엘료가 쓴 마타 하리에 대한 이야기’에 이끌려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정말 파울로 코엘료의 광팬이 아니라면) 어딘가 허전함을 느낀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 등
마타 하리의 ‘참모습’을 지칭하는 수식어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지만
정작 이야기 속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채 부와 명예를 좇은 여자’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이미지가 더 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또,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사실 자료에 근거한 탓이겠지만,
평범한 다큐처럼 나열식으로 전개된 이야기 속에서 극성(劇性)을 발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녀를 스쳐간 여러 남자가 등장하지만, 그들의 개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녀 앞에 툭 나타났다가, 휙 사라져버릴 뿐입니다.
그녀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걷게 된 스파이의 길 역시 전혀 흥미롭지 않습니다.
신문기사 같은 팩트만 나열될 뿐, 작가의 상상력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자극적인 흥미에 꽂혀 이 작품을 선택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은데 대한 불만이 이런 혹평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물 평전’과 ‘소설’의 경계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애매한 정체성은
아무리 제가 파울로 코엘료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시켜놓고 생각해봐도
이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