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종자 1 - 식죄 타카시로 시리즈
도바 순이치 지음, 한성례 옮김 / 태동출판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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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장에서 한참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도바 슌이치의 실종자 1’을 꺼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식죄(蝕罪, 죄로 인해 썩어 들어간 상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이라 그런지 부제로만 활용하고 본제목은 실종자 1’로 출간됐습니다.

 

45세의 경감 타카시로 켄고는 경찰청 실종자 수사과 3분실(分室) 형사입니다. 이름은 그럴 듯하지만 사실 실종자 수사과는 전시 행정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일 뿐입니다. 아무도 가기 원치 않는 이곳은 각 경찰서에서 소위 낙오자로 찍힌 자들로 구성돼있습니다. 미팅과 치장에만 정신 팔린 있는 집, 사건만 나면 떨기부터 하는 무능한 겁쟁이, 늘 몸이 먼저 반응하는 운동선수 출신 과격파, 지병 때문에 서류 작업만 가능한 말년 형사, 최고책임자지만 기회만 되면 실적을 올려 조직 내 주류로 올라설 궁리만 하는 실장이 그들입니다.

 

이곳에 좀 특이한 이력을 지닌 두 사람이 배속됩니다. 타카시로 켄고는 한때 경시청 수사1과 최고의 형사였지만, 7년 전 비극적인 사고를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이젠 경찰 내부에서도 골칫덩이가 된 자입니다. 술과 담배와 커피에 찌든 채 월급을 받기 위해 경찰로 살아간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에겐 야망도 승부욕도 사라진 상태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타카시로와는 성별도 나이도 성격도 다른 27세의 묘진 메구미입니다. 수사1과로의 승진을 코앞에 뒀던 열혈 여형사 메구미는 엉뚱하게도 남의 문제에 휘말려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해 실종자 수사과에 오게 됐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가도 부당하거나 불합리하다고 판단될 때는 대선배 타카시로마저 꼼짝 못하게 만드는 돌직구 캐릭터입니다.

 

서류작업이나 하면서 대충 출퇴근만 해도 되는 실종자 수사과에 발령받은 타카시로는 성실한 직장인이 결혼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증발한 특이한 실종사건 조사를 지시받습니다. 의욕 같은 건 진작 개나 줘버렸던 타카시로는 자신도 모르게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새카만 후배 메구미와 번번이 충돌하며 사라진 남자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조사를 할수록 남자의 과거에 의문점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고, 타카시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요할 정도로 수사에 임합니다.

 

타카시로 시리즈의 첫 편이라 그런지 캐릭터 소개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 작품입니다. 실종자 수사라는 본 스토리에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 자연스럽게 타카시로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고 있고, 앞으로 콤비로 활약할 것으로 보이는 메구미와의 관계 설정도 매력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년의 스타 형사였지만, 지금은 숙취와 두통을 달고 사는 무기력한 타카시로와 실종자 수사과에서 실적을 올려 수사1과로 승진하려는 야심찬 메구미의 조합은 지금껏 봐온 남녀형사 커플 중 단연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는 설정입니다.

 

사건 자체는 무척 심플합니다. 실종된 남자의 주변을 조사하고 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출판사 책 소개에도 있듯) 실종은 죽음보다 더 잔혹한 공중에 매달린 상태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큰 상처를 주는 사건입니다. 무기력하게 인생을 소모하던 타카시로가 처음 투입된 실종수사에서 마음을 고쳐먹고 전력을 다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건은 그저 단순한 실종이나 납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라진 남자의 과거를 캐면서 그가 실종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또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만, 어느 정도 예상된 흐름대로만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하고, ‘의 비중 역시 소소한데다 실종의 계기도 조금은 심플하게 처리돼서 팽팽한 긴장감이나 대단한 반전을 주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타카시로 시리즈의 첫 편이라는 점에서 보면 분명 매력적인 출발을 알린 작품입니다. 스토리만큼이나 기대되는 타카시로와 메구미 사이의 케미가 여중생 실종사건을 다룬 시리즈 2편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지는 것은 물론, 단역 또는 미약한 조연에 머물렀던 실종자 수사과의 다른 멤버들도 뭔가 제대로 된 밥값을 하지 않을까,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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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잉 라이트 형사 로건 맥레이 시리즈 2
스튜어트 맥브라이드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평점 :
절판


애버딘의 홍등가에서 매춘부 로지 윌리엄스가 구타를 당한 채 알몸으로 발견된다.

도시 반대편에서는 밖에서 창문이 잠긴 채 불에 탄 여섯 구의 시체들이 발견된다.

연쇄살인의 냄새를 풍기는 사건에 긴장한 형사 로건 맥레이.

게다가 자신이 지휘한 작전의 실패로 총에 맞은 경관이 사망하면서 주위의 눈총에 시달리고

꼴통들만 모인 팀으로 보내지는 등 최악의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맥레이는 꼴통 팀을 벗어나기 위해 매춘부 살인사건은 물론 화재 사건까지 파헤치지만

용의자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곧이어 새로운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미궁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출판사 책 소개 수정 인용)

 

● ● ●

 

스코틀랜드의 화강암 도시 애버딘을 배경으로 한 로건 맥레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첫 작품인 콜드 그래닛이 대단히 만족스런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번째 작품까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근 1년 반 만에 다잉 라이트를 펼쳤습니다.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로건 맥레이의 캐릭터입니다.

형사로서 그의 재능은 사실 평범한 쪽에 더 가깝습니다.

번득이는 추리력이나 천재적인 발상 같은 건 아예 없습니다.

다잉 라이트에서는 거기에 더해 좀더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합니다.

, 인사위원회에서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때론 비굴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갈등 중인 두 상사의 틈바구니에 낀 채 아슬아슬 양다리를 걸치기도 하며,

심지어 화난 여자 친구를 달래기 위해 욕을 먹으면서도 정시 퇴근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썰렁하기도, 촌철살인 같기도 한 블랙유머를 입에 달고 삽니다.

 

하지만 그런 로건 맥레이 앞에 벌어지는 사건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입니다.

콜드 그래닛에서도 연쇄 소아성애 살인, 유아 납치, 무릎뼈가 사라진 변사체 등

연이어 벌어진 참혹한 사건들을 상대했던 로건 맥레이는

이번에도 매춘부 연쇄살인, 살인을 목적으로 한 연쇄방화, 동물 유기살해, 실종 등

애버딘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끔찍한 사건들과 직면합니다.

 

더구나 그는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무모한 작전 때문에 인사위원회에 회부됐고,

그 페널티로 소위 꼴통팀으로 불리는 스틸 경위의 팀으로 발령받은 상태입니다.

공적 쌓기에 혈안이 된 이기적 욕심쟁이 스틸 경위 아래에서

로건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혹사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여자친구인 왓슨 여경과도 트러블을 겪습니다.

 

이런 배경들 자체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연이어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은 궁금증과 긴장감을 제공하고 있고,

로건의 사적인 문제들도 흥미진진합니다.

하지만, ‘다잉 라이트는 전작 콜드 그래닛에서 느꼈던 아쉬운 점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고,

고백하자면, 그 때문에 몇 번이고 중도 포기를 할까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 많은 사건들이 등장하면서 속도감과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은 완만하고 띄엄띄엄 발생하고,

그것을 수사하는 과정 역시 느리고 산만하기만 합니다.

정치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판단 때문에 로건과 꼴통팀이 떠맡게 된 매춘부 살인사건,

꼴통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적을 세울 심산으로 참견하게 된 연쇄 방화살인사건,

그야말로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된 동물 유기살해와 실종사건 등

로건은 한 개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에 모두 관여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로건의 사적인 문제들까지 언급되면서

독자들은 어떤 사건, 어떤 인물에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할지 헷갈리게 됩니다.

 

콜드 그래닛의 서평을 다시 찾아 읽어보니

이야기가 곁가지가 너무 많은 느낌을 받았다라든가,

굳이 600페이지라는 분량이 필요했을까?’라고 지적해놓았는데,

이 역시 다잉 라이트에서 똑같이(아니, 오히려 더 크게) 느낀 아쉬움이었습니다.

물론 사건들은 점차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거나 명쾌한 방식으로 해결되긴 하지만,

500페이지라는 분량조차 길게 느껴질 만큼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만연체의 느낌이었습니다.

 

20151월에 이 작품이 출간된 후 아직 후속작 소식은 들려오지 않지만,

로건 맥레이의 캐릭터만 믿고 후속작들을 계속 읽어야할지,

두 작품을 통해 느낀 취향의 문제를 절감하고 더 이상의 읽기를 포기해야 할지

아직은 어느 쪽으로도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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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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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세 가즈히사는 스스로를 색이 없는 공기 인간이라 여깁니다.

유년기부터 또래들의 무시와 냉대, 투명인간 취급에 익숙해진 나머지

성인이 된 지금도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은 물론 주인공으로 대접받는 일에 서툰 남자입니다.

다만, 누군가가 후카세도 같이 갈래?” “후카세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오기라도 하면

온몸이 경직되고 식은땀부터 흘릴 정도로 열등감과 자괴감에 사로잡히면서도

그렇게 말해준 누군가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잠시나마 투명인간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 사무기기 업체에서 일하는 그가 누리는 소소한 행복은

직접 내려 마시는 진한 향기의 커피와 3개월 된 사랑스런 여자 친구 미호코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어느 날 미호코가 갖고 온 편지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후카세는 몇 년 전, 대학 친구들과의 여행길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고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곤 자책감과 함께 의문의 편지의 발신자를 찾아 나섭니다.

 

● ● ●

 

리버스(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니 당연히)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제겐 색이 없는 공기 인간의 일그러진 삶을 그린 심리물에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출판사 책 소개대로 데뷔 이래 천착해온 테마인 복수와 속죄가 바탕에 깔려있고

한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우발적인 사고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가 메인으로 전개되지만

작가는 범인은 누구?’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후카세의 번민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선지 미나토 가나에의 여느 작품보다 중반에 이르기까지 속도가 잘 안 나는 작품입니다.

후카세가 공기 인간으로 살아온 여정을 확인해야 되고,

성인이 된 현재까지 그 강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을 재확인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는 물론 그 이후의 대처 과정에서도

전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후카세의 번민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반부, 그러니까 한 친구의 죽음과 나머지 네 친구의 사고 당시의 비밀이 드러나고

후카세가 스스로를 다그쳐 편지의 발신자를 찾겠다고 나선 이후부터 이야기는 속도를 내지만

후카세의 여정은 여전히 탐정이나 경찰의 조사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입니다.

, 그의 조사는 진상 찾기가 아니라 죽은 친구의 과거를 훑어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공기 인간이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후카세는 거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의 고향을 찾아가 부모와 동창들을 만나면서

후카세는 그 친구가 왜 사건 당시 아무도 나서지 않는 위험을 무릅썼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왜 공기 인간이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는지도 알게 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책과 회한에 잠겼던 후카세는 돌아오기 직전

자신을 포함, 여행에 동행했던 모든 이들에게

‘OOO는 살인자다.’라는 편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후카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진실입니다.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간 덕분에 미스터리보다는 심리물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은 셈인데

내용은 다르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단편집 왕복서간에 수록된 십 년 뒤의 졸업문집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는 느낌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학창시절을 배경으로 삼아서 그런 것인지,

친구들 사이에 존재했던 위험한 비밀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에도 세밀한 심리묘사와 반전 덕분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만끽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을 한 가지 꼽자면 왠지 쉽게 이입되지 않는 캐릭터의 문제입니다.

후카세처럼 공기 인간으로 살아본 적도 없고,

후카세의 친구처럼 누군가를 따뜻하게 배려하며 살아본 적도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에 맞춰 캐릭터가 과대포장 또는 작위적으로 설정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맞게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됐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해부하는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는 미나토 가나에에 대한 찬사는

(100%는 아니더라도) 거의 매 작품에서 어느 정도는 공감해왔지만,

리버스만큼은 해부와 관찰 대신 의도적 설정이 더 강했던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그녀의 작품 중에 이제 딱 절반(6)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명성에 비하면 의외로 적게 읽은 편인데

아마도 두 번째로 읽은 야행관람차의 충격(?)이 컸던 탓으로 여겨집니다.

제게 리버스고백꽃사슬에 이어 왕복서간과 함께 공동 3위 정도랄까요?

고백을 뛰어넘는 작품을 기대하다가 만족보다는 실망을 느낀 일이 많으면서도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아직도 설레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기에 비해 출간편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내년에도 한편쯤은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을 꼭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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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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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연금술사’,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은 뒤로

파울로 코엘료는 저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스파이가 마타 하리의 이야기, 그것도 그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다뤘다는 카피를 보곤

오랜만에 큰맘(?) 먹고 파울로 코엘료를 다시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 즉 마타 하리가 처형되기 직전에 변호사에게 쓴 장문의 편지와

그 변호사가 마타 하리에게 쓴 중편 정도의 편지로 구성돼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편지 형식을 통해 마타 하리의 출생과 성장, 결혼과 독립,

무희로서의 파격적인 삶, 독립적이며 자유를 갈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삶 등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 ● ●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던 유럽은 전운이 감도는 위험한 기운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산업과 과학의 힘이 공존하는 시대였지만,

동시에 여성에게는 전근대적인 억압과 차별이 여전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가부장적인 남편, 희생만을 강요하는 가족제도, 도구화된 여성성에 억눌려 살던 마타 하리는

꿈에 그리던 파리에 정착하면서 이국적인 외모와 관능적인 춤을 앞세워

당시 유럽의 내로라하는 무대에서 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은 부유층과 고위 관료들을 사로잡았으며

널리 알려진 대로 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화려한 삶을 구가했습니다.

 

사교계를 장악하고 남성들을 희롱하며 자신만의 이상을 실현했던 마타 하리의 삶은

1차 대전의 발발을 전후하여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마타 하리를 추앙했던 파리는 어느 새 그녀의 춤을 지겨워하기 시작했고,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이루려던 그녀의 꿈은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무산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무렵, 그녀와 프랑스 고위 관료들과의 내밀한 관계를 주시하던 독일이

마타 하리를 다른 용도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사후 100년이 다 된 지금까지 그녀를 스파이로 기억하게 만든 단초가 됐습니다.

 

● ● ●

 

스파이는 마타 하리를 앞세운 정통 스파이물도, 스릴러도 아닙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다양한 사실 자료와 적절한 분량의 상상력을 통해

한때 유럽을 사로잡고 가부장적인 남성들을 굴복시켰던 파격적인 여성성과 함께

이중스파이로 낙인찍힌 채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버림받은 그녀의 삶을 담담히 변호합니다.

특히 파울로 코엘료는 그녀가 참혹하게 처형당한 이유를 스파이라는 죄목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남성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지배적 가치관과 도덕관념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이고,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나는 희생자가 아니라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치러야 할 대가를 당당히 치른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29페이지, 마타하리의 편지 )

 

마타 하리는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로 남성들의 요구에 저항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택했다.” (작가 인터뷰)

 

말하자면 출판사 책 소개대로

마타 하리는 여자라는 죄로, 대중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죄로,

평판을 유지해야 하는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죄로 부당하게 처형되었다.

그녀는 도덕적 관습에 겁 없이 저항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이

마타 하리에 대한 파울로 코엘료의 변론의 핵심인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껏 알던 마타 하리에 대한 통념을 뒤집게 만든 흥미로운 책읽기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파울로 코엘료가 쓴 마타 하리에 대한 이야기에 이끌려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정말 파울로 코엘료의 광팬이 아니라면) 어딘가 허전함을 느낀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

마타 하리의 참모습을 지칭하는 수식어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지만

정작 이야기 속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채 부와 명예를 좇은 여자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이미지가 더 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사실 자료에 근거한 탓이겠지만,

평범한 다큐처럼 나열식으로 전개된 이야기 속에서 극성(劇性)을 발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녀를 스쳐간 여러 남자가 등장하지만, 그들의 개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녀 앞에 툭 나타났다가, 휙 사라져버릴 뿐입니다.

그녀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걷게 된 스파이의 길 역시 전혀 흥미롭지 않습니다.

신문기사 같은 팩트만 나열될 뿐, 작가의 상상력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자극적인 흥미에 꽂혀 이 작품을 선택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은데 대한 불만이 이런 혹평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물 평전소설의 경계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애매한 정체성은

아무리 제가 파울로 코엘료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시켜놓고 생각해봐도

이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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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나나카와 카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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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의 사망이나 이혼, 학대 등 가정의 품속에서 살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두 살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아이들이 생활하는 아동양호시설 나나미(七海)학원.

그곳에서는 '일곱 바다'라는 한자 이름에 어울리게 일곱 가지 괴담이 전해 내려온다.

여러 소녀와 얽힌 그 괴담들은 지금도 학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사건에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다.

보육사 키타자와 하루나는 아동복지사 카이오와 함께 여러 수수께끼를 풀면서

아이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려 노력한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크고 작은 곶 덕분에 마치 일곱 개의 바다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한 풍광을 자아내는

나나미 해변 언덕의 아동양호시설을 배경으로

성장 스토리와 소프트한 미스터리가 전개되는 나나카와 카난의 단편집입니다.

소프트라는 표현을 썼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들이 맞닥뜨린 미스터리는

어쩌면 일반적인아이들과는 달리 시설에서 유년기~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하는

그들만의 깊은 상처만큼이나 단단하고 두려운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그 미스터리는 나나미 학원에 전해 내려오는 7개의 오랜 괴담과 연결돼있어

이제 2년차 보육사로서 아이들의 고민과 상처를 돌봐야할 24살 하루나에게도

적잖은 무게의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딱히 감동적인 결말을 끌어내려 애쓰지 않은 작가의 담담한 문장도 좋았고,

비록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아이들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보육사 하루나와 아동상담사 카이오의 캐릭터도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7개의 단편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방어하고 키워가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지혜를 발휘하여 나나미 학원에서 일어난 미스터리를 극복해 나갑니다.

 

미스터리의 해결은 대부분 보육사 하루나와 아동상담사 카이오의 몫이지만

그 과정에서 소년, 소녀들은 과거의 상처 덕분에 얻게 된 조숙함과 어른스러움을 통해

미스터리의 진실과 결과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해냅니다.

물론 소설이니까 가능한작위적인 해피엔딩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작가는 가능한 한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경계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사실 아동양호시설에 수용된 아이들의 사연이라고 하면

사토 세이난의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에 등장하는

지독하게 학대받은 소녀 아키가 생각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상처란 아무리 뛰어난 보육사나 상담사가 노력한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영원히 뿌리내릴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는 나나미 학원 자체를 현실감 없는 판타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나미 학원의 아이들처럼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짜낸 긍정의 힘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듬으며 성장하는 아이들도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입니다.

번역하신 박춘상 님께서 이 작품을 희망 미스터리라 지칭한 것도 그런 면 때문일 것입니다.

 

수록작 별로 (감동 또는 미스터리라는 면에서) 약간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의지로 세상과 적극적으로 맞서려는 주인공이 등장한

지금은 사라져버린 별빛도절대 반지가 가장 매력적으로 읽혔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을 전해준 마지막 수록작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도 괜찮았구요.

 

잔혹하고 리얼하고 독한 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에겐 말랑말랑한 동화처럼 읽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1년에 한두 편쯤 이런 해독제같은 작품도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설령 판타지라 하더라도 험하고 모난 세상 어딘가에

아주 작지만 따뜻함이나 희망이란 게 아직 남아있다고 위안 받는다면

그 역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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