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평점 :
만리장 호텔 지배인이자 마흔 살의 중간 보스 희수는
대를 이어 구암 바닷가를 장악해온 손영감의 오른팔 같은 존재입니다.
1993년 봄, 그는 10년 간 보필해온 손영감을 버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똑똑한 건달’로 적들에게도 인정받은 것은 물론 의리와 겸손이란 미덕까지 갖춘 그였지만,
손영감 휘하에서 보낸 10년이 남겨준 것은 엄청난 빚과 암울한 미래뿐이었습니다.
어차피 소모품처럼 이용되다가 버려질 운명임을 확신한 그는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하고, 첫사랑이던 인숙과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살얼음 같은 평화를 유지하던 영도 조직이 구암 바다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면서
겨우 싹이 트기 시작한 희수의 새 삶은 맥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 희수는 가족과 사업과 생존을 위해 무자비한 전쟁터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 ● ●
2001년에 개봉했던 영화 ‘친구’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뜨거운 피’ 곳곳에서 기시감 또는 추억의 편린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눈앞의 욕망에만 충실한 피도 눈물도 없는 건달들,
앞에선 “우리가 남이가?”하면서도 뒤로는 비밀과 거짓말과 배신이 난무하는 비정한 생태계,
그리고, 그 욕망과 생태계를 비밀스레 품고 있는 부산의 바다와 뒷골목 등...
영화 ‘친구’가 네 남자의 우정과 숙명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라면,
‘뜨거운 피’는 1993년의 부산 구암 바닷가를 무대로
건달들의 일그러진 탐욕, 자비심 없는 전쟁, 끝없는 배신과 음모를 정면으로 그린
그야말로 용광로 같은 느와르입니다.
주인공 희수는 음험한 구암 바다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소위 ‘에이스 건달’입니다.
그는 쉽게 흥분하지도, 가볍게 처신하지도 않습니다.
능구렁이 같은 손영감을 보필하며 구암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실질적인 지배자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건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삶은 그저 팍팍하고 초라할 뿐입니다.
가족도, 집도 없이 호텔 ‘달방’에 기숙하면서 위스키와 항우울제를 끼고 삽니다.
손영감은 유일한 혈육이면서도 개차반 같은 종자인 조카의 양아치 행각엔 무관심한 채
온갖 위험천만한 일은 모두 희수에게 떠넘길 뿐입니다.
손영감이 애지중지 지켜온 만리장 호텔은 개차반 조카에게 돌아갈 것이 분명했고,
마흔이 돼도 팍팍함과 초라함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손영감을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무뇌아 같은 건달들의 이유 없는 폭력을 증오하고, 이권보다 ‘가오’를 중요히 여기며,
싸움 대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해결법을 추구하는 희수의 사고방식은
짐승의 생태계와 다름없는 구암의 바다와는 어울리기 힘든 이질적인 것이었기에,
그가 큰마음을 먹고 시작한 새로운 삶은 출발부터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그가 겪게 되는 참혹한 전쟁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은 꽤나 거칠게 묘사됩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불분명한 채 건달들은 욕망에 의해 이합집산을 반복합니다.
어제까지 동료였던 자의 배에 회칼을 쑤셔 넣는가 하면,
죽일 듯 증오했던 자와 전략적 제휴를 감행하기도 합니다.
소소한 영역 다툼으로 보였던 싸움은 실은 거대 조직의 야비한 음모에 의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말단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 나가고 보스들은 야합으로 사태를 마무리합니다.
600페이지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지만 주말 하루면 순식간에 완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희수를 비롯한 여러 캐릭터의 생생함도 매력적이고,
음모와 배신, 전쟁과 야합을 통해 1993년 구암의 여름 바다를 피로 물들인 건달들의 대결은
너무나도 리얼한 나머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들며,
비틀기와 정공법이 절묘하게 뒤섞인 김언수의 문장들은 눈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맛있습니다.
‘알고 보면 멋진 건달’이라는 명백히 비현실적인 희수의 캐릭터라든가,
그의 첫사랑이자 완월동의 유명한 창녀였던 인숙과의 가슴 먹먹한 멜로,
그리고 여러 곳에서 중첩되며 발산되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라는 신파 코드는
(대부분의 느와르가 그렇듯) ‘건달을 미화한 픽션’이란 느낌을 주는 대목인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살육이 난무하는 거칠고 날선 서사의 독기를 빼주는 드라마틱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설정들 없이 그저 ‘건달들의 전쟁’만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희수의 이야기가 드라마 속 판타지 - ‘저런 건달이 어디 있어?’ - 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 외의 인물들이나 스토리가 소름 돋을 정도의 리얼리티로 중무장한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어느 한 쪽으로도 편향되지 않은 균형감을 잘 잡은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그동안 작가 김언수의 이름은 서점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많이 접했지만
작품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를 보면 ‘뜨거운 피’는 그의 전작들과 성격이 좀 다르다고 나와 있는데,
어쨌든 그동안 관심 목록에만 담겨 있던 ‘캐비닛’이나 ‘설계자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