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리의 노래 버티고 시리즈
댄 시먼스 지음, 김미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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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고르 이후 인도 최고의 시인으로 불리는 M.다스가 행방불명된 지 8년 만에 다시 나타났다.

시인이자 프리랜서 작가인 로버트 루잭은 다스에게서 신작 원고를 입수하기 위해

주변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위험천만한 캘커타로 향한다.

하지만 아내 암리타와 어린 딸 빅토리아까지 동반한 여행은 끔찍한 악몽으로 변하고 만다.

숨 막히는 더위와 몬순 폭풍, 악취가 진동하는 오물과 하수,

굶주림과 질병에 시달리는 사람들로 뒤섞인 아비규환의 도시.

루잭은 가족과 함께 캘커타를 벗어나려 하지만

받기로 한 원고는커녕 다스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다.

다스의 행방을 쫓을수록 서서히 엄습하는 공포는 루잭의 목을 조여 오는데..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여섯 개의 팔과 다리를 가진 파괴와 죽음의 여신 칼리,

그 여신의 이름에서 유래한 아비규환의 도시 캘커타와 그 여신을 떠받드는 잔혹한 폭력세력,

평생 평화를 노래했지만, 8년 만에 부활하며 그 여신의 악마성을 칭송하는 당대의 시인,

그리고 그 시인을 찾아 캘커타로의 위험한 여정을 택한 한 미국인 가족이 겪는 악몽의 시간..

 

칼리의 노래는 요약하자면 캘커타를 배경으로 한 호러물입니다.

현실과 비현실이 교차하고, 신의 광기와 인간의 공포가 극단까지 치닫는 작품입니다.

폭력은 엄연히 현실에서 벌어지고 피해자의 피와 살이 난무하지만,

폭력의 근원이 신의 분노인지 인간의 잔혹함인지,

심지어 실제로 폭력을 휘두르는 주체가 신인지 인간인지조차 모호합니다.

 

폭우와 오물과 악취로 뒤범벅인 캘커타의 지옥도 같은 풍경은

이런 근원 모를 공포와 난데없는 폭력의 강도를 훨씬 더 강렬하게 만듭니다.

마치 파괴와 죽음의 여신 칼리가 현실에 재림하여 여섯 개의 팔과 다리를 휘두르며

무자비한 향연을 벌이는 듯한 인상을 받게 되기도 합니다.

 

사실, 준비된 재료들만 놓고 보면 여전히 신비함이 남아있는 인도,

그것도 캘커타라는 곳을 무대로 완벽한 호러물이 기대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무척이나 혼란스럽게 읽힌 작품이었습니다.

파괴와 죽음의 여신 칼리가 이 작품에서 어떤 상징이었는지도 잘 모르겠고,

칼리를 섬기는 잔혹한 세력이 무자비한 폭력을 통해 추구하는 욕망도 잘 모르겠고,

죽은 줄 알았던 시인 M.다스가 칼리를 칭송하는 시를 지은 이유도 잘 모르겠고,

주인공 루잭에게서는 M.다스를 반드시 찾아내야 하는 절실함도 잘 안 보이고,

M.다스의 정보를 알려주겠다며 루잭에게 접근한 의문의 사내들의 목적도 잘 모르겠고,

궁극적으로는 칼리와 폭력세력과 의문의 사내들이

왜 루잭과 그의 가족을 공포에 사로잡히게 하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번역하신 김미정 님의 후기를 봐도 이해에 도움이 되진 않았고,

결국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 남은 것은 혼란스러운 상징들과 불편한 공포심뿐이었습니다.

오히려 이 작품 속에 문학과 예술과 가족과 삶의 의미가 녹아있다는 해설을 읽곤

꿈보다 해몽인가 싶을 정도로 억지스러운 해석의 느낌까지 받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일본의 대표적 호러작가인 미쓰다 신조의 작품을 무척이나 좋아하는 편이지만,

칼리의 노래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은 단지 문화적 차이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호러물에서 개연성논리적 연결성을 찾는다는 것 자체가 모순된 행동이겠지만,

주인공의 의지, 조연들의 정체와 목적, 폭력의 근원과 주체,

()과 시()가 상징하는 바 등 많은 것들이 납득 또는 추정할 수 있게 설명되지 않은 탓에

이런 모호한 서평을 남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만, 다른 분들의 서평을 보니 저만 이 작품을 잘못 읽었을지 모른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취향의 문제일 수도 있고, 오독의 결과일 수도 있으니

아직 이 작품을 읽지 않은 상태에서 제 서평만 보신 분이라면

인터넷 서점이나 블로그를 통해 다른 분들의 서평을 꼭 참고하시라고 권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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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크 사이드
앤서니 오닐 지음, 이지연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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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전설적인 프로그레시브 록 그룹 핑크 플로이드(Pink Floyd)의 명반 중

‘The Dark Side Of The Moon’이 있습니다.

1970년대 발매된 음반이지만 지금 들어도 혁명적이고 전위적이며

달의 뒷면에 숨은 서늘함과 기괴함이 느껴지는 명곡들이 수록돼있습니다.

 

앤서니 오닐의 다크 사이드에 펼쳐진 달의 뒷면은

핑크 플로이드가 음악으로 그린 그 서늘함과 기괴함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인 퍼거토리(purgatory, 연옥)

기이한 백만장자 플레처 브라스가 소유하고 있는 무법천지 도시로,

지구에서 흉악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나 어두운 과거가 있는 사람들이

쾌락을 좇아 죽음의 위협을 무릅쓰고 찾아가는 곳입니다.

살인과 폭력, 마약과 섹스 등 온갖 범죄가 난무하지만 경찰은 형식적으로만 존재할 뿐입니다.

 

이런 음험한 곳에 지구에서 추방당한 형사 유스터스가 부서장으로 부임합니다.

자신이 수사하던 범죄조직이 들이부은 산() 때문에 얼굴의 반은 녹아 내렸고,

모종의 음모에 의해 지구에서 추방당하기까지 했지만,

그는 어떤 권력의 압력에도 굴하지 않는 당당함과 청렴함을 가진 유능한 경찰입니다.

하지만 우연의 일치인지 그가 퍼거토리에 도착하자마자 기이한 연쇄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유스터스는 일련의 사건들이 퍼거토리의 최상위 권력을 놓고 벌어진 충돌의 결과임을 깨닫고

적극적으로 수사에 나서지만 서장을 포함한 나머지 경찰들은 그런 그를 비웃거나 방관할 뿐입니다.

 

한편 퍼거토리와 멀리 떨어진 또다른 달의 뒷면 어딘가에서도 참혹한 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새로 프로그래밍 된 안드로이드 한 대가 퍼거토리를 향해 폭주하며

자신의 앞길을 방해하거나 돕지 않는 사람들을 상대로 무차별 살인극을 벌이는 것입니다.

왕과 정복자가 되겠다며 퍼거토리를 향하는 안드로이드의 궁극적인 목적은 무엇일까?

그 미스터리는 퍼거토리 내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유스터스가 수사 중인) 연쇄살인사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유스터스와 안드로이드는 서로 한 챕터씩 번갈아가며

퍼거토리 안팎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참극들의 진실을 드러냅니다.

 

작가 스스로 ‘2001 스페이스 오딧세이‘L.A 컨피덴셜을 뒤섞었다고 말할 정도로

다크 사이드SF와 하드보일드 미스터리가 뒤섞인 독특한 형식미를 가진 작품입니다.

하지만 SF는 전혀 낯설지도, 먼 미래의 이야기 같지도 않은 현실감을 지니고 있고,

유스터스가 발산하는 냉정하고 올곧은 형사 캐릭터와 그가 대적하는 의 캐릭터들 역시

현실의 미스터리만큼 팽팽하고 리얼하게 그려져서

때때로 이곳이 달의 뒷면임을 잊게 만들곤 합니다.

 

하지만 역시 인간이 결코 볼 수 없는 달의 뒷면이 지닌 신비한 이미지와 함께

그곳에 세워진 음험하기 짝이 없는 무법천지의 1인 독재 왕국이 내뿜는 긴장감은

현실의 지구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와는 분명 다른 매력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달의 곳곳을 마치 직접 가본 것처럼 생생하게 그린 점이라든가,

지구와는 다른 중력 덕분에 전혀 색다른 모습의 추격전이 벌어지는 점,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뒤섞인 듯한 소돔을 닮은 퍼거토리의 풍경 등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탄 채 SF영화를 보는 듯한 아찔함을 선사합니다.

 

다만, 사건의 진상과 미스터리를 풀어가는 과정은 상대적으로 단순합니다.

복잡한 미로라고 할 수도 없고, 대단한 반전이 기다리는 것도 아닙니다.

유스터스의 매력은 추리보다는 대쪽 같은 경찰로서의 태도에 더 의지하고 있고,

미친 안드로이드의 엽기 행각 역시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결과로 판명납니다.

그래서,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으로 이 작품을 읽은 독자라면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짜릿한 블록버스터 한 편을 본 듯한 만족감은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비주얼과 캐릭터의 매력 때문에 진작에 영화 제작이 결정됐다고 들었는데,

과연 달의 뒷면이 어떻게 영상화될지, 누가 유스터스 역을 맡게 될지 벌써부터 기대됩니다.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연상시키는 OST까지 맛볼 수 있다면

그야말로 금상첨화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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뜨거운 피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16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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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리장 호텔 지배인이자 마흔 살의 중간 보스 희수는

대를 이어 구암 바닷가를 장악해온 손영감의 오른팔 같은 존재입니다.

1993년 봄, 그는 10년 간 보필해온 손영감을 버리고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똑똑한 건달로 적들에게도 인정받은 것은 물론 의리와 겸손이란 미덕까지 갖춘 그였지만,

손영감 휘하에서 보낸 10년이 남겨준 것은 엄청난 빚과 암울한 미래뿐이었습니다.

어차피 소모품처럼 이용되다가 버려질 운명임을 확신한 그는

자기만의 사업을 시작하고, 첫사랑이던 인숙과 결혼을 하면서 새로운 삶을 준비합니다.

하지만 살얼음 같은 평화를 유지하던 영도 조직이 구암 바다를 기웃거리기 시작하면서

겨우 싹이 트기 시작한 희수의 새 삶은 맥없이 무너지고 맙니다.

결국 희수는 가족과 사업과 생존을 위해 무자비한 전쟁터에 뛰어들기로 결심합니다.

 

● ● ●

 

2001년에 개봉했던 영화 친구를 기억하는 독자라면

뜨거운 피곳곳에서 기시감 또는 추억의 편린들을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오로지 눈앞의 욕망에만 충실한 피도 눈물도 없는 건달들,

앞에선 우리가 남이가?”하면서도 뒤로는 비밀과 거짓말과 배신이 난무하는 비정한 생태계,

그리고, 그 욕망과 생태계를 비밀스레 품고 있는 부산의 바다와 뒷골목 등...

 

영화 친구가 네 남자의 우정과 숙명에 초점이 맞춰진 작품이라면,

뜨거운 피1993년의 부산 구암 바닷가를 무대로

건달들의 일그러진 탐욕, 자비심 없는 전쟁, 끝없는 배신과 음모를 정면으로 그린

그야말로 용광로 같은 느와르입니다.

 

주인공 희수는 음험한 구암 바다에서 자타가 인정하는 소위 에이스 건달입니다.

그는 쉽게 흥분하지도, 가볍게 처신하지도 않습니다.

능구렁이 같은 손영감을 보필하며 구암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실질적인 지배자입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건달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실제 삶은 그저 팍팍하고 초라할 뿐입니다.

가족도, 집도 없이 호텔 달방에 기숙하면서 위스키와 항우울제를 끼고 삽니다.

손영감은 유일한 혈육이면서도 개차반 같은 종자인 조카의 양아치 행각엔 무관심한 채

온갖 위험천만한 일은 모두 희수에게 떠넘길 뿐입니다.

손영감이 애지중지 지켜온 만리장 호텔은 개차반 조카에게 돌아갈 것이 분명했고,

마흔이 돼도 팍팍함과 초라함이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자 손영감을 떠나기로 결심하지만,

무뇌아 같은 건달들의 이유 없는 폭력을 증오하고, 이권보다 가오를 중요히 여기며,

싸움 대신 합리적이고 상식적인 해결법을 추구하는 희수의 사고방식은

짐승의 생태계와 다름없는 구암의 바다와는 어울리기 힘든 이질적인 것이었기에,

그가 큰마음을 먹고 시작한 새로운 삶은 출발부터 위태로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후 그가 겪게 되는 참혹한 전쟁과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은 꽤나 거칠게 묘사됩니다.

누가 적인지 아군인지도 불분명한 채 건달들은 욕망에 의해 이합집산을 반복합니다.

어제까지 동료였던 자의 배에 회칼을 쑤셔 넣는가 하면,

죽일 듯 증오했던 자와 전략적 제휴를 감행하기도 합니다.

소소한 영역 다툼으로 보였던 싸움은 실은 거대 조직의 야비한 음모에 의한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말단들은 이유도 모른 채 죽어 나가고 보스들은 야합으로 사태를 마무리합니다.

 

600페이지 가까운 방대한 분량이지만 주말 하루면 순식간에 완독할 수 있는 작품입니다.

희수를 비롯한 여러 캐릭터의 생생함도 매력적이고,

음모와 배신, 전쟁과 야합을 통해 1993년 구암의 여름 바다를 피로 물들인 건달들의 대결은

너무나도 리얼한 나머지 손에 땀을 쥐게 만들며,

비틀기와 정공법이 절묘하게 뒤섞인 김언수의 문장들은 눈에 쏙쏙 들어올 정도로 맛있습니다.

 

알고 보면 멋진 건달이라는 명백히 비현실적인 희수의 캐릭터라든가,

그의 첫사랑이자 완월동의 유명한 창녀였던 인숙과의 가슴 먹먹한 멜로,

그리고 여러 곳에서 중첩되며 발산되는 아버지에 대한 애증이라는 신파 코드는

(대부분의 느와르가 그렇듯) ‘건달을 미화한 픽션이란 느낌을 주는 대목인 것이 사실이지만,

동시에, 살육이 난무하는 거칠고 날선 서사의 독기를 빼주는 드라마틱한 설정이기도 합니다.

사실 이런 설정들 없이 그저 건달들의 전쟁만 보고 싶어 하는 독자들은 없을 것입니다.

비록 희수의 이야기가 드라마 속 판타지 - ‘저런 건달이 어디 있어?’ - 로 읽힐 수도 있지만,

그 외의 인물들이나 스토리가 소름 돋을 정도의 리얼리티로 중무장한 덕분에,

개인적으로는 어느 한 쪽으로도 편향되지 않은 균형감을 잘 잡은 작품이란 생각입니다.

 

그동안 작가 김언수의 이름은 서점에서도, 인터넷에서도 많이 접했지만

작품으로 만난 것은 이번이 처음입니다.

인터넷 서점의 소개를 보면 뜨거운 피는 그의 전작들과 성격이 좀 다르다고 나와 있는데,

어쨌든 그동안 관심 목록에만 담겨 있던 캐비닛이나 설계자들을 읽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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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레타의 일기 밀리언셀러 클럽 146
척 드리스켈 지음, 이효경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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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이지 하트라인은 과거 미국 비밀 특수부대의 일급 요원이었으나

작전 수행 중 민간인 아이들을 사망케 한 후,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전역한다.

각국 정보부의 비폭력적인 청부만을 싼값에 의뢰받아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중,

유대인 학살의 희생자가 남긴 걸로 추측되는 일기장을 발견한다.

그 내용은 아돌프 히틀러와 연관된 충격적인 진실을 담고 있었다.

본래 주인의 후손을 찾아 일기장을 돌려주려던 게이지의 계획은,

그가 지닌 일기장의 엄청난 가치를 눈치 챈 프랑스 마피아와 정보부에 의해 방해받고,

결국엔 목숨까지 위협받는 지경에 이른다.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500페이지가 훌쩍 넘는 분량이지만 이야기 구조는 심플합니다.

히틀러의 치명적인 진실이 담긴 일기장을 둘러싼 전형적인 첩보-액션 스릴러인데,

큰 얼개만 보면 본 아이덴티티와 비슷하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폭력과 절연한 채 소소한 청부업자로 살아가던 전직 특수요원 게이지 하트라인은

일기장을 빼앗기 위해 물불 안 가리고 덤비는 프랑스 정보부 요원과 마피아를 상대합니다.

그 과정에 게이지의 연인, 휴가 중인 미국 육군 수사대원 등이 말려들게 되고,

게이지는 수차례 치명적인 위기를 넘긴 끝에 결국 억눌렀던 폭력의 본능을 부활시킵니다.

 

영화로 만들기에 딱 알맞은 소재와 인물 설정 덕분에

읽는 내내 저절로 그림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작품입니다.

인물들의 배치나 사건 전개는 할리우드 액션물의 문법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대략 예상되는 방식과 타이밍에 위기가 찾아오고,

게이지는 주인공다운 포스를 발휘하며 그 위기를 벗어나고, 통쾌한 복수를 감행합니다.

상투적이긴 하지만 눈을 뗄 수 없게 만드는 탄탄한 서사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하지만 그레타의 일기’(원제 The Diaries)라는 제목이 알려주듯

이 작품을 다른 할리우드 액션물과 차별화시키는 가장 큰 특징은 바로 문제의 일기장입니다.

 

그레타가 쓴 일기에는 히틀러의 치명적인 진실이 고스란히 담겨있는데,

게이지는 어떻게든 이 일기를 그레타의 후손에게 전해주겠다고 마음먹습니다.

하지만 악당들에게 그레타의 일기는 전혀 다른 차원의 물건일 뿐입니다.

, 향후 수십 년간 무한한 부()를 축적시켜줄 황금알을 낳는 거위인 것입니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약발이 떨어진 히틀러와 2차 대전과 홀로코스트라는 소재를 대체할,

모든 영화사와 출판사가 탐낼 만한 엄청난 원작으로서의 가치를 지녔기 때문입니다.

결국 우연과 운명이 교차하면서 온갖 악당과 조연들이 일기장 주위로 몰려들게 되고,

피비린내 나는 살육전이 벌어지기 시작합니다.

 

이야기는 첩보와 액션의 매력을 구사하며 물 흐르듯 흘러가지만,

히틀러나 홀로코스트에 대해 조금은 구경꾼 같은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는 한국의 독자에겐

그레타가 남긴 일기의 엄청난 충격100% 이입되지 않은 탓에

일기장 주변으로 몰려든 인물들의 욕망이나 감정들이 조금은 낯설게 보이기도 했습니다.

히틀러라면 (일기에 적힌) 그런 짓을 하고도 남을 위인 아닌가?’,

또는 과연 그 일기가 그만한 가치가 있는 건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 것이 사실입니다.

역사관과 가치관의 차이에서 오는 당연한 의문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이 낯선 느낌만 극복한다면 한 편의 잘 만들어진 첩보-액션물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작품을 시작으로 모두 4편의 게이지 하트라인 시리즈가 나왔다고 하는데,

봉인됐던 폭력의 본능을 되찾은 전직 특수요원 게이지 하트라인이

그레타의 일기이후 또 어떤 사건에 말려들었을지 무척 궁금해집니다.

트라우마에 사로잡힌 전직 특수요원의 인생역경은 아무리 반복돼도 흥미로운 소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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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상가족놀이 스토리콜렉터 6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선영 옮김 / 북로드 / 2017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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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코로다 료스케라는 이름의 한 남자가 공사 현장에서 잔인한 변사체로 발견된다.

경찰은 수사 끝에 평범한 직장인이자 가장인 것처럼 보였던 도코로다 료스케가

인터넷상에서 '아버지'라는 닉네임으로 '가상가족놀이'를 했다는 사실을 밝혀낸다.

서로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이 마치 가족처럼 아버지, 어머니, , 아들로 연극을 해왔던 것.

진짜 가족을 내팽개친 채 인터넷상의 가상가족에게만 몰두한 피해자.

경찰은 사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해 전대미문의 계획을 세운다.

이윽고 진짜 가족이 매직미러 너머로 취조실을 지켜보는 가운데,

피해자와 함께 인터넷상에서 가족놀이를 했던 사람들이 차례로 불려오는데.

(인터넷 서점의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예전에 ‘R.P.G’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던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입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에 읽은 탓에 짤막한 줄거리만 메모로 남긴 적이 있는데,

오랜만에 다시 읽었는데도 (부실한 기억력 때문인지^^) 여전히 새롭고 재미있게 읽혔습니다.

 

인터넷이 확산되면서 사회적 문제가 본격적으로 제기됐던 2000년대 초반이 배경이라

스마트폰이 대세인 요즘의 시각으로 보면 채팅이나 게시판에서의 가상가족놀이는

조금은 올드하게 보일 수도 있는 소재입니다.

하지만 많은 작품을 통해 사회적 이슈를 미스터리 속에 정교하게 녹여냈던 미미 여사는

현실 속 가족가상현실 속의 가짜 가족이라는 극단적인 대비를 동원하여

그 올드함을 무색하게 하는 보편적인 서사를 구축하고 있습니다.

 

익명성에 의지하여 가상의 세계에 잠복한 채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욕망들을 추구하고 만족과 구원을 느낀다는 것은

인터넷의 맹아기나 지금이나 크게 다를 바가 없습니다.

가상가족놀이에 참여한 네 명의 인물은 (조금씩 성격은 다르지만)

현실의 가족들에게 만족하지 못하거나 상처받거나 분노해온 이력을 갖고 있습니다.

그저 채팅과 메일이 전부이고 딱 한 번 오프라인에서 만난 적 밖에 없지만,

그들은 아무런 보상도, 의무도 강요하지 않는 가상현실 속의 가족들에게서 위로받으며

현실의 가족을 내팽개친 채 그들만의 놀이를 즐겨왔습니다.

하지만 그들만의 놀이는 어느 시점인가부터 가상현실을 벗어나기 시작했고,

비뚤어진 욕망, 시기, 질투라는 현실적인 관계를 맺기 시작하면서 비극을 초래하게 됩니다.

 

이야기의 주 무대는 취조실입니다.

살해당한 가장도코로다 료스케를 제외한 세 명의 가짜 가족들이 차례로 불려오고,

매직미러 너머에서는 도코로다의 딸 가즈미가 진범을 확인하기 위해 자리잡고 있습니다.

밀폐된 취조실에서 그들은 더 이상 서로를 친밀한 가족으로 대하지 않습니다.

제 멋대로인 놈, 늘 여리고 착한 척만 아는 철부지, 욕망에 눈 먼 아줌마 등

서로를 날선 말들로 비난하며 자신들이 꾸며온 친밀한 가족을 붕괴시킵니다.

애초 가상현실에서 구원받고 싶어 했던 서로의 처지까지 들먹이면서 말이죠.

매직미러 너머의 가즈미는 자신이 증오했던 아버지가 자신과 어머니를 버려둔 채

저런 사람들과 친밀한 가족을 이뤘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습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범인의 정체를 쉽게 알아챌 수도 있습니다.

이 작품은 누가 범인일까?’라는 미스터리보다

허위와 기만으로 꾸며진 가상의 가족의 양면성에 좀더 방점이 찍혀있기 때문에

미미 여사의 강력한 미스터리 서사를 기대한 분들에게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붕괴된 가족, 소외된 개인, 인터넷 속 익명성의 유혹, 가상현실에서의 대리만족 등

한데 엮기 쉽지 않은 사회적 이슈를 적절한 규모의 미스터리와 잘 배합한 미미 여사의 필력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이것저것 생각할 여지와 여운을 깊게 남겨놓습니다.

 

식탁에 마주앉아서도 대화 한마디 없이 각자의 스마트폰만 쳐다보며

진짜 가족을 외면한 채 가상현실에 몰두하는 요즘의 세태를 보면

미미 여사가 창조한 가상가족놀이는 어쩌면 더욱 잔혹하고 비극적인 모습으로

2017년의 현실에 불쑥 나타날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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