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피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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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쿠라는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마흔여섯 살의 교수로 아내와 둘이 한적한 주택가에 산다.

어느 날,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경시청 형사 노가미가

8년 전에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에 대해 자문을 구한 후로

다카쿠라의 주변에서 이상한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다.

형사 노가미의 실종, 스토킹을 당하는 제자, 앞집에서 일어난 화재와 의문의 사체,

그리고 옆집 소녀가 내뱉은 기이한 한마디 등...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공포의 서막에 불과했다.

(책 뒷면에 소개된 줄거리를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나름의 줄거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책 뒷면의 소개글을 수정, 인용한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깔끔하게 줄거리를 정리하기 어려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오싹한, 섬뜩할 정도로 기이한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만큼이나

이 작품은 스토리보다는 분위기에 의해 독자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 수를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희생자를 낸 악인이 등장하고,

일찌감치 그의 정체가 독자에게 공개되지만

실상 그의 동기나 범행 자체는 작품 안에서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타고난 사이코패스의 성정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성욕 때문인지 모호할 뿐입니다.

오히려 작가는 범인의 존재와 그가 저지른 범행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포심을 느끼고 벌벌 떨게 되는지,

또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상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탐정 역을 맡은 범죄심리학 교수 다카쿠라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역할과 함께

그 자신과 가족이 범인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화자인 다카쿠라의 행동이나 심리를 지켜보면서

말할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을 공유하게 됩니다.

동시에 모든 범죄가 나란히 선 옆집의 낯선 이웃의해 벌어진다는 설정은

옆집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작품 속 다카쿠라는 물론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더욱 섬뜩한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누군가 내 옆집에 침입하여 그 집의 가장을 살해하곤

나머지 가족을 장악한 채 뻔뻔히 가장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면,

그런데, 정작 옆집에 사는 나는 그 자가 진짜 가장이라고 무심결에 넘기고 살아간다면,

그리고 그 자가 수도 없이 그런 짓을 이곳저곳에서 반복한다면...

언뜻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라 느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내 앞집 또는 옆집 가족의 얼굴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독자가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면, 그리 무리한 설정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마지막 장을 덮고도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은 것인가?’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폭주하는 사이코패스의 살인과 범인을 쫓는 탐정 이야기는 물론,

낯선 이웃에 대한 두려움, 비극적인 가족사, 남녀 간의 치명적인 애증 등

쉽사리 엮이기 어려운 다양한 코드들이 범벅이 돼있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덕분에 줄거리는 머릿속에서 뒤엉키고, 남은 것은 크리피한분위기뿐이었습니다.

 

마에카와 유타카는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으로 먼저 만났는데

그 작품 역시 뭔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사건과 인물들로 꽉 차있습니다.

다만 시체가~’가 비교적 명료한 줄거리를 지녔고,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는 설정이었다면

크리피는 사건과 인물 대신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명하고 깔끔한 줄거리와 엔딩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꽤나 당혹스러운 작품들이지만,

빈틈없는 논리 속에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믹스한 독특한 작품들이라

의외로 마니아층을 확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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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1-24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로 인상깊게 봤어요 . 제대로 짚어내는 말들이라 반박불가~! ㅎㅎㅎ잘 읽고 갑니다!
 
모든 죽은 것 찰리 파커 시리즈 (오픈하우스) 1
존 코널리 지음, 강수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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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쯤, ‘무언의 속삭임이라는 작품으로 존 코널리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라크전쟁에서 돌아온 퇴역 군인들의 연이은 자살 사건이 벌어지고,

그 안에 전쟁 중 이라크 박물관에서 약탈된 신비한 궤(?)의 이야기가 뒤섞인 작품입니다.

주인공 찰리 파커는 아내와 딸을 잃은 트라우마로 만신창이가 돼있어서 너무나 안쓰러웠고,

퇴역 군인들의 자살 사건은 어딘가 비현실적인 영매의 영역처럼 다뤄지면서

무척이나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던 끝에 결국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개운치 않은 첫 만남 덕분에 그 이후로 존 코널리의 작품은 제 관심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전에 알라딘에서 중고서적을 한꺼번에 주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도 모르게 집어 들었던 것이 찰리 파커 시리즈의 첫 편인 모든 죽은 것입니다.

무언의 속삭임의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첫 편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책장에서 꺼내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역시 존 코널리는 내 취향은 아니군.’이었습니다.

 

공포의 극한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라.”는 띠지의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잔혹함과 공포감은 역대 최강급입니다.

떠돌이라 지칭된 연쇄살인범은 출판사 홍보글대로 - 인간의 몸을 캔버스 삼아

붓 대신 메스를 휘두르며 잔혹하게 살해한 뒤 희생자들의 얼굴을 전리품으로 챙깁니다.

그는 약품으로 희생자를 취하게 한 뒤 산 채로 몸과 장기를 분리하는 것은 물론

그 모습을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희생자로 하여금 직접 지켜보게 만듭니다.

수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등장하고, 그 묘사는 아무리 반복해 읽어도 소름이 돋습니다.

심지어 희생자들 가운데에는 주인공 찰리 파커의 아내와 딸도 포함돼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이라면 극한으로 치닫는 잔혹함과 공포가 전부입니다.

 

뜬금없는 사건과 인물들이 별다른 개연성도 없이 메인 스토리 속으로 스리슬쩍 끼어드는 점,

주인공이 우연히 접하거나 얻은 정보를 연쇄살인범과 (과할 정도로) 밀접히 관련시키는 점,

드러난 연쇄살인범의 실체가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 가운데, 최소한 100페이지 정도는 딴 소리를 하고 있다는 점,

출판사가 홍보한 심오한 문학성은 오히려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하기만 한다는 점 등

이런저런 아쉬운 점들로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요 네스뵈, 테스 게리첸, 마이클 코넬리, 제프리 디버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방대한 페이지를 자랑하는 일군의 작가들의 매력은

그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와 인물들의 행태가 한 방향으로 수렴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지하게 하고 을 잃지 않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도 애써 메모나 기억에 의존할 필요 없게끔 캐릭터를 잘 살려놓고,

분위기 설명을 위한 주변 풍광의 묘사 역시 적절한 선에서 그칠 줄 압니다.

벌어지는 사건들은, 때론 무관해 보이면서도, 분명 하나의 궤도 안에서 벌어지고 있고,

반전은, 그것이 진범의 정체든 사건 뒤에 감춰진 진실이든,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모든 죽은 것은 아내와 딸을 잃고 한때 알코올에 중독됐던 찰리 파커의 정신처럼

계속 갈지자걸음을 걷거나 엉뚱한 설명을 하고 있거나 무리한 설정에 함몰돼있습니다.

 

스토리도, 서사도, 캐릭터도 필요 없고 오직 잔혹함만 즐기고 싶은 독자에게는

모든 죽은 것은 상상 이상의 재미를 선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재미를 위해 인내해야 할 페이지가 너무 많습니다.

만일 이 작품이 (개연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사건에만 충실했더라면,

즉 불필요한 인물을 배제하고 현란한 수사(修辭)를 어떻게든 조금만 자제했더라면

그나마 잔혹함에 관한 한 최고라는 영예를 얻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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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1-24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런 식의 소설이 너무 많아요 . 그게 마치 카메라 위크가 불안정하게 어떤이의 일상을 담듯 종일 , 사건만 생기지 않는다는 설정 ㅡ 카메라 밖의 풍경까지 책에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이 아닌가 했어요 .
덕분에 몰입도는 떨어지고 , 그 와중에도 챙겨가는 몰입지점이 있고 그게 높을 수록 좋은 책인냥 보인다는것 .ㅎㅎㅎ
 
사신의 술래잡기 모삼과 무즈선의 사건파일
마옌난 지음, 류정정 옮김 / 몽실북스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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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13.67’의 찬호께이, ‘사악한 최면술사의 저우하오후이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나는 중국어권 작가입니다. 최근 개성 강한 중국어권 장르물들이 눈에 들어오곤 했는데, ‘사신의 술래잡기역시 독특한 설정과 기발한 캐릭터, 흥미로운 연작 구성에다 이야기를 완결시키지 않은 덕분에(그래도 찜찜함 같은 건 없습니다) 후속작을 안 보려야 안 볼 수 없게 만들고 있습니다.

 

사신의 술래잡기를 이끌어가는 두 주인공 모삼과 무즈산은 조금은 비현실적인 캐릭터입니다. 두 사람 모두 있는 집 자식인데다 거의 초인간적인 재능을 타고났습니다. 모삼은 심리 수사와 현장 수사, 프로파일링에 모두 탁월한 천재적 탐정입니다. 굳이 비유하자면 정확도 99.9%의 프로파일링을 장착한 채 21세기에 부활한 셜록 홈즈랄까요?

무즈산은 공교롭게도 셜록 홈즈의 동료 왓슨 박사처럼 의학 분야의 천재입니다. 그는 법의학의 모든 영역을 꿰뚫은 천재이면서 모삼 못잖은 추리 능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캐릭터가 이러하다 보니 그들의 사건해결능력은 중국 경찰에겐 신화처럼 여겨집니다.

 

하지만 모삼은 전대미문의 연쇄 토막살인범에게 습격을 받아 약혼녀를 잃은 것은 물론 본인도 죽음 직전까지 이른 적이 있습니다. 두 사람은 그 살인범을 L이라 부르며 그의 행방을 캐내려 하지만 오히려 L은 두 사람에게 위협적인 메시지와 함께 게임을 권해옵니다. 자신이 낸 문제를 풀지 못하면 3일 이내 또 다른 토막 희생자를 만들 것이며, 풀어낸다면 예비 희생자 1명을 살려주겠다는 조건을 붙입니다. 추가적인 L의 희생자를 막기 위해 두 사람은 게임을 받아들이지만 그가 낸 문제들은 하나같이 기이한 미제 사건 또는 수사가 진행 중인 사건이었고, 두 사람은 기일 내에 사건의 진상을 밝히기 위해 전력을 다 해야 하는 묘한 처지에 놓입니다.

 

모삼과 무즈산 못잖게 L 역시 비현실적인 캐릭터이긴 합니다. 그는 희생자를 1,000여 조각으로 토막낸 뒤 전시하듯 늘어놓는 상상불허의 연쇄살인마입니다. 한 번도 그 실체가 등장하진 않지만 그는 단순한 사이코패스가 아니라 모삼과 무즈산을 능가하는 천재적인 두뇌를 지닌 것으로 그려집니다. 그의 메시지를 분석해보면 잔혹한 연쇄살인마의 면모 외에 인문학적 지성과 섬세한 감수성까지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대부분 여대생인 희생자들이 순순히 그에게 이끌렸던 것을 보면 매너와 외모를 겸비한 상남자라는 점도 어렵잖게 추측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인지 분명 이야기는 현실에 바탕을 두고 전개되는데, 세 천재의 대결은 마치 가공의 세상에서 벌어지는 것 같은 판타지의 느낌마저 풍깁니다.

 

세 천재의 악연을 먼저 소개한 작가는 이어 L이 낸 문제를 모삼과 무즈산이 해결하는 개별 에피소드를 연작 단편으로 구성합니다. 거대한 물통 속에 잠긴 채 썩어가는 여러 구의 시체들, 새로 인테리어 한 집에서 나타나는 기현상과 귀신들, 자살인지 타살인지 알 수 없는 목 졸린 연쇄 희생자 등 모삼과 무즈산 앞에 떨어진 L의 문제는 예외 없이 기이한 사건들입니다. 일반적인 상식과 경험만으로는 결코 풀 수 없는 미스터리들이지만, 모삼과 무즈산은 탁월한 추리 능력과 지식을 기반으로 L의 난제들을 헤쳐나갑니다.

문제는 과연 언제까지 L의 수수께끼를 풀어야 하느냐,입니다. 특히 모삼에겐 약혼녀를 살해하고 자신에게 치명상을 입힌 L은 반드시 복수해야 할 적입니다. 무즈산 역시 절친인 모삼의 입장을 알기에 L의 체포를 최고의 과제로 여깁니다. 하지만 얼굴도, 이름도, 그 어떤 정보도 없는 상태에서 L에게 모든 것이 노출된 두 사람은 당분간은 L의 요구를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습니다. 모삼과 무즈산이 L과 벌이는 맞대결은 후속작에서나 볼 수 있겠지만, ‘사신의 술래잡기는 연작 단편 하나하나의 재미만으로도 충분히 읽을 맛이 나는 작품입니다.

 

워낙 천재들의 대결이다 보니 간혹 모호하거나 작위적인 대목이 보이기도 하고, 세 천재의 재능을 강조하기 위해 사족 같은 설명이 반복되기도 합니다. 또 때론 신인작가의 미숙함이 드러나는 문장들도 발견되곤 하는데, 어지간한 미스터리 마니아라면 별로 놀라지 않을 발견과 추리를 조연들의 리액션을 통해 마치 대단한 것처럼 강조하는 것이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작가가 이 작품을 위해 얼마나 방대한 자료조사와 스터디를 했는지도 곳곳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비범한 세 천재를 그리려면 작가부터 천재에 가까운 지식을 갖춰야 했을 테니 당연히 필요한 노력일 수밖에 없겠지만, 이 작가가 후속작에서 또 어떤 기발한 결과물을 보여줄지 기대하게 하는 근거이기도 합니다.

 

독자에 따라 L의 범행 수법을 읽으며 굉장히 불편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애정하는 테스 게리첸의 의사 3부작이후 이렇게 끔찍한 묘사를 본 적이 없었는데, 세밀하게 긴 분량으로 서술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습니다. 초반에 그런 묘사가 등장해서 그 자리에서 거부감을 느낄 독자도 있겠지만, 이 작품 전체가 그런 톤으로 전개되진 않으니 거북해도 꼭 견디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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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벌
기시 유스케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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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읽은 검은 집악의 교전외에

8권이나 되는 기시 유스케의 작품을 읽지도 않고 책장에만 모셔놓은 것은

맛있는 반찬은 나중에라는 심리 때문이었습니다.

나중이란 게 이런저런 이유로 기약 없이 뒤로 밀리면서 난감하던 중에

우연히 손에 넣은 최신간 말벌을 먼저 읽게 돼서

책장에서 먼지만 쓰고 있던 전작들에겐 더욱 면목 없는 일이 돼버렸습니다.

 

말벌에 대한 호기심이 강하게 일었던 것은 아주 단순한 이유였습니다.

작품을 통해 심연의 공포를 생생하게 발산시키는 기시 유스케라는 작가와

이름만 들어도 저절로 소름이 돋는 말벌이라는 곤충과의 조합에 대한 호기심이 그것입니다.

아마 다른 작가가 말벌이라는 제목의 미스터리를 출간했더라도 관심이 갔겠지만

기시 유스케가 쓴 말벌은 도저히 뒤로 미뤄놓을 수 없는 호기심을 자극했기 때문입니다.

이야기는 예상대로 파격적인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 ● ●

 

폭설이 내린 깊은 산속의 산장에서 숙취와 함께 잠을 깬 미스터리 소설가 안자이 도모야는

산장 전체를 점령한 말벌 떼의 습격을 받고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구조 요청을 시도했지만 외부와의 통신은 모조리 두절됐고 자동차 키마저 사라진 상태입니다.

안자이는 추리 끝에 갑자기 산장에서 사라진 아내 유메코와

언젠가 출판사 파티에서 만난 적 있는 수상한 곤충학 교수 미시와를 의심합니다.

두 사람이 통신과 교통을 두절시키곤 말벌 떼를 풀어놓았다고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는 아내와 곤충학 교수가 자신의 죽음을 확인하기 위해 산장으로 돌아올 것이라 예상하곤

그들에게 역습할 기회를 노리며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말벌 떼와 전쟁을 벌입니다.

하지만 말벌 떼는 끝도 없이 몰려들며 안자이를 괴롭히고,

철저하게 준비한 역습 시도마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딪히면서

안자이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집니다.

 

● ● ●

 

230여 페이지에 불과한 중편 분량의 이야기지만

폭설로 고립된 산장에서 벌어지는 한 남자와 말벌 떼의 처절한 싸움은

읽는 내내 손에 땀을 쥐게 할 정도로 생생하고 긴장감 넘치게 전개됩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식인상어나 거대 악어를 주인공으로 삼은 영화들처럼

정말 말벌 대 인간의 대결을 그린 작품이란 뜻은 아닙니다.

중반부까지만 해도 그런 의심(?)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트릭의 진실이 밝혀지는 그 순간까지

기시 유스케는 말벌의 공포를 극적으로 활용하면서 독자의 시선을 강하게 끌어당깁니다.

 

사라진 아내, 통신과 교통의 두절, 명백한 살해음모 등 미스터리의 기본 코드들이

기시 유스케 특유의 서사로 묘사된 말벌의 공포와 함께 전개되면서

독자는 과연 안자이는 말벌과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지,

그 이후 자신을 살해하려는 아내와 곤충학 교수에게 복수할 수 있을 것인지,

그렇지만 어딘가 위화감이 드는 세 사람의 관계의 진실은 무엇인지에 몰입하게 됩니다.

말하자면 두 개의 축 - 말벌의 공포와 위화감 가득한 미스터리 을 동시에 맛보면서

이 두 축이 어디에서 접점을 갖게 될지 끊임없이 궁금해 하며 책을 읽게 됩니다.

 

독자의 의문과 추리욕구를 부추기는 또 하나의 대목은

이야기 중간중간에 끼어드는 별개의 서사들입니다.

, 그림책 작가인 아내 유메코의 (의인화된 벌과 곤충이 주인공인) 작품이 언급되는가 하면,

소설가가 되기 전 안자이가 보낸 혹독한 직장 생활의 단면들이 언급되기도 합니다.

겉으로는 아내에 대한 의심현실에 대한 안자이의 반감에 대한 부연설명이지만

미스터리를 좋아하는 독자라면 이 내용들을 읽으면서

분명 기시 유스케가 일부러 흘려놓은 힌트라고 추정하게 됩니다.

저 역시 그렇게 해석하고 나름 열심히 들여다봤지만 결국 밝혀내진 못했는데,

모든 트릭과 진실이 밝혀진 뒤에도 이 대목들에 대해 선뜻 고개가 끄덕여지진 않았습니다.

 

워낙 임팩트가 강한 내용이라 서평에서는 쉽게 언급하기가 어렵지만

독자에 따라 마지막 반전에 대해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그의 작품답게 호러의 색채가 강한 반전과 엔딩이 마지막 몇 페이지에 걸쳐 묘사되는데

역시!’라는 감탄과 ...?’라는 의문투성이 반응이 동시에 나올 수 있는 지점입니다.

앞서 펼쳐진 말벌의 공포에 비하면 드러난 진실의 충격은 상대적으로 왜소했기 때문입니다.

그가 다른 작품에서도 이런 식의 트릭을 쓴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개인적으로는, 납득은 돼도 제 나름의 기대를 충족시키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달리 말하면, 호러는 살았는데, 논리적으로는 부실해 보인다고 할까요?

(하긴 호러와 논리를 함께 요구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이긴 하지요.^^;)

재미있게 읽고도 평점에서 별 다섯 개를 주지 못한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기시 유스케를 이 작품으로 처음 만난 독자라면 그의 명성에 의문을 가질 수도 있지만

혹 그런 경우라면 일단 검은 집을 읽어보기를 꼭 권하고 싶습니다.

기시 유스케의 팬이면서도 정작 대부분의 작품은 책장에만 모셔놓은 게으른 독자지만

검은 집한 편만으로도 누구나 그에게 빠져들 것이 분명하다는 것은 확신할 수 있으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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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곽 안내서 - 제137회 나오키 상 수상작
마쓰이 게사코 지음, 박정임 옮김 / 피니스아프리카에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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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의 에도 최대의 유곽인 요시와라(吉原)의 고급 기루 마이즈루야에 희대의 소동이 벌어집니다. 요시와라를 통틀어 최고의 오이란(花魁, 몸을 파는 유녀)으로 꼽히던 가쓰라기가 홀연히 사라진 것입니다. 곳곳에 감시의 눈이 있어 쉽사리 요시와라를 벗어나기도 힘들뿐더러, 오이란으로서 절정의 시기를 누렸던데다 곧 낙적(손님이 돈을 내고 오이란을 유곽에서 꺼내주는 것)을 통해 요시와라를 떠날 예정이던 가쓰라기가 사라진 것은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석달 후, 정체불명의 인물이 요시와라에 나타납니다. ‘는 유곽 주인, 시중꾼, 거간꾼 등 가쓰라기 주변 인물들을 만나 탐문을 하지만 모두 모르쇠로 일관하며 가쓰라기에 대해 소소한 정보만 흘릴 뿐입니다. 하지만 는 집요한 조사를 통해 가쓰라기 실종 사건의 진실에 점점 다가서게 되고, 마지막에 이르러 가쓰라기의 정체와 사건의 전모를 파악해냅니다.

 

작년(2015) 이맘때쯤 미야기 아야코의 화소도중(花宵道中)’이란 작품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작은 기루 야마다야를 무대로 오이란의 다채로운 삶과 감정들을 다룬 작품인데, 유곽에 대한 상세한 정보는 물론 그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희로애락을 잘 그려내서 무척 깊은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덕분에 유곽 안내서의 출간 소식에 큰 기대를 걸었는데, 홀연히 사라진 오이란을 찾는 미스터리와 함께 유곽의 속살을 디테일하게 묘사한 감칠맛 나는 문장들 때문에 화소도중과는 또 다른 재미와 여운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메인 스토리는 가쓰라기 실종사건의 진실 찾기지만, ‘유곽 안내서라는 제목답게 작가는 가 탐문하는 수많은 직종의 사람들을 통해 유곽 요시와라가 어떻게 유지되고 굴러가는지를 상세하게 설명합니다. 고급 유녀인 오이란, 예비 오이란인 가무로, 오이란의 시중을 드는 신조, 오이란의 매니저인 반토신조, 오이란을 관리하고 교육하는 야리테 등이 그들인데, 작가는 그들의 입을 통해 각자 맡은 일은 물론 돈과 육체와 사랑과 거짓말이 한데 뒤섞인 요시와라의 복잡한 인간관계도 디테일하게 설명합니다.

 

요시와라를 떠받치는 가장 중요한 진리(?)돈이 떨어지면 사랑도 없다.”입니다. 오이란을 사기 위해 남자들은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듯 돈을 쏟아 붓습니다. 심지어 시중꾼, 잡일꾼, 매니저 등에게도 적잖은 돈을 뿌려야 합니다. 하지만 돈만 있다고 오이란을 품을 수는 없습니다. 몇 달 전부터 예약을 해야 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야만 합니다.

손님들 대부분의 목적은 욕망 해소지만, 그중엔 마음에 든 오이란에게 특별한 감정을 품는 자들도 꽤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감정이란 주머니에 돈이 남아있을 때까지만 유효한 것입니다. 하다못해 잡일꾼에게마저 돈 떨어진 단골은 백해무익한 존재입니다. 물론 거꾸로 오이란이 손님에게 감정을 품는 경우도 있지만 그것은 무척이나 위험한 일입니다. 대부분 돈만 뜯긴 채 빚더미에 올라앉거나 몸과 마음을 망친 채 불행해지기 쉽기 때문입니다.

 

네모난 달걀이 없듯 오이란의 진심 같은 건 이 세상에 없다.”라는 말이 여러 번 반복되는데 미야기 아야코의 화소도중에도 비슷한 맥락의 표현이 등장합니다. , “마음을 주지 않는 여자가 요시와라에서 출세한다.”라는 것인데, 하루에도 여러 남자의 품에 안겨야 하는 오이란에게 있어 진심이나 마음 같은 것은 스스로를 망치는 독이 될 수도 있다는 뜻입니다. 대부분 어린 나이에 부모에 의해 푼돈에 팔린 참담한 운명도 기구하지만, 누구에게도 진심이나 마음을 줘선 안 된다는 불문율은 그녀들에게는 금언이자 동시에 날카로운 비수이기도 합니다.

 

가쓰라기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능력과 함께 최고의 부자마저 내키는대로 희롱하는 담대함을 갖춘 것은 물론 누구에게도 진심이나 마음 같은 걸 준 적이 없습니다. 물론 상대방은 그녀의 접대용 거짓말에 놀아난 끝에 큰 상처를 받거나 상사병에 걸리고 말지만 가쓰라기에겐 눈 하나 깜짝할 일도 아닙니다. 바로 이런 점이 가쓰라기를 최고의 오이란으로 만든 것입니다. 또 가쓰라기에 관해 묻고 다니는 에게 유곽 사람들이 좋은 말만 입에 담는 것을 보면 가쓰라기는 매력적인 오이란이면서 동시에 뛰어난 인맥관리자였음을 눈치 챌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이란으로서 절정의 시기를 구가하는 중이었고, 엄청난 부자 덕분에 곧 자유로운 몸이 될 예정이던 가쓰라기가 무슨 이유로 수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유곽에서 사라진 것일까요? 는 대체 누구이며, 무슨 이유로 가쓰라기 실종사건을 파헤치고 다니는 것일까요? 그 사연은 가 유곽 안팎의 여러 사람들을 만나면서 점차 밝혀지긴 하지만, 결정적인 단서가 폭로되는 과정은 기대했던 것만큼 충격적이거나 반전을 내포하진 않습니다.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운 대목이기도 한데, 다른 독자는 어떻게 받아들일지 궁금합니다.

 

미스터리와 유곽 안내서라는 두 가지 기능을 절묘하게 조합한 작가의 필력도 놀라웠지만, 에도 시대의 유곽이라는 호기심을 발동시키는 무대를 매력적으로 그려낸 것도, 또 화려한 의상과 소품은 물론 흥과 멋이 함께 하는 오이란의 행렬과 연회 장면 등 일본 특유의 비주얼을 눈앞의 풍경처럼 그려낸 것도 이 작품의 미덕 중 하나입니다.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가 큰 독자에게는 추천하기 어렵지만 19세기의 에도 유곽의 속살이 궁금한 독자라면 충분히 재미있는 책읽기가 되리라 확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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