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브 바이 나이트 : 밤에 살다 커글린 가문 3부작
데니스 루헤인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커글린 가문 3부작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첫 작품인 운명의 날1919년 보스턴 경찰 파업 당시 커글린 가문의 흥망을 그렸다면

이 작품은 그로부터 7년 후인 1926년부터 1935년까지,

즉 금주법의 여파가 미국 전역을 몰아쳤던 혼란기를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운명의 날이 커글린 가문의 장남이자 보스턴 경찰이던 대니 커글린의 이야기였다면

이 작품은 가문의 막내 조 커글린의 파란만장한 삶을 그리고 있습니다.

 

리브 바이 나이트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영화 대부를 연상시키는 무정한 밤의 세상에서

피비린내 나는 삶과 죽음의 고비를 넘긴 한 남자의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실 운명의 날을 읽기 전 이런 톤의 이야기를 기대했었는데,

그 작품에서 두 형과 나이 차이가 많이 났던 어린 꼬마 조 커글린이

후속작에서 폭력이 난무하는 밤의 이야기를 이끌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 ● ●

 

보스턴 경찰 파업이 무위로 돌아간 후 7.

보스턴에서 벌인 은행강도와 경찰 살해 사건으로 교도소에 간 18살의 조 커글린은

지옥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 동시에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할 악마 같은 인물을 만나게 됩니다.

밀주업계의 양대 산맥 중 하나인 페스카토레의 지시와 배려 속에

조는 출소 후 남부 템파를 관할하는 보스 역할을 맡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자신이 지닌 재능과 폭력을 적절히 버무려 엄청난 성공을 거둡니다.

그 와중에 쿠바 출신의 여인과 사랑에 빠지면서 조는 부와 안락한 삶을 향유합니다.

하지만 완벽하게 밤과 폭력의 인간이 될 수 없었던 조는 결국 큰 위기를 맞이하게 됩니다.

 

● ● ●

 

금주법이 지배하던 암울하고 비밀스러운 20세기 초반의 미국에는 두 개의 규칙이 존재합니다.

스스로 약자임을 인정하며 조용하고 평범한 삶을 사는데 필요한 낮의 규칙이 있는가 하면,

부와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냉정하고 잔인한 폭력을 행사함으로써

먹이사슬의 최정점에 서려는 인간들이 지켜야 할 밤의 규칙이 있습니다.

누구든 자신이 추구하는 삶을 살려면 어느 한쪽의 규칙을 고수해야 되는데,

조의 불행은 두 개의 규칙 사이에서 어중간한 태도를 취했기에 벌어진 일입니다.

 

일찍이 밤의 규칙에 인생을 내맡기며 우여곡절 끝에 먹이사슬의 정점에 설 수 있었지만,

조에게는 스스로 거역할 수 없는 운명, 낮의 규칙의 피가 흐르고 있던 것입니다.

순수한 사랑에 대한 갈망, 살인에 대한 거부감, 약자에 대한 동정심 등

밤의 규칙의 신봉자들이 폐기처분해야 했을 덕목들을 조는 끝까지 버리지 못한 것입니다.

그 덕분에 그는 위기를 자초하고, 목숨이 경각에 달리는 위기를 수없이 맞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우정을 나눈 친구를 잃고, 증오와 배신에 시달리는 그의 불행은

모두 낮의 규칙을 버리지 않은 대가였던 것입니다.

 

낮의 규칙에 대한 조의 미련과 연민은 타고난 성정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그가 나눈 두 여인과의 로맨스에 기인한 탓일 수도 있습니다.

에마 굴드는 조가 제거하려 했던 악당의 정부였지만,

동시에 조로 하여금 어떻게든 살아남겠다고 결심하게 만든 지순한 사랑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남부 템파로 내려와 보스로서의 삶을 살게 된 후 만난 쿠바 여인 그라시엘라는

그에게 낮의 규칙의 진정한 미덕이 무엇인지 가르쳐준 여인입니다.

살인과 폭력이 날뛰고, 밀주업계의 잔혹한 대결이 이야기의 주를 이루지만,

조와 두 여인의 로맨스는 달콤하면서도 독약 같은 긴장감을 지니고 있어

독자에게 아슬아슬한 줄타기의 느낌을 시종 전해주고 있습니다.

 

한편, 이미 운명의 날에서 붕괴의 조짐을 확실히 보여줬던 커글린 가문은

리브 바이 나이트를 통해 비극의 정점을 찍게 됩니다.

파업 때문에 경찰 옷을 벗어야 했던 장남 대니는 집을 나가 소식이 끊긴지 오래이고,

차세대 검사로 지목받던 차남 코너는 맹인이 된 후 밑바닥 삶을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 토머스는 지금까지는 경찰에서 고위직을 지키고 있었지만,

형들과 달리 어려서부터 폭력의 세계에 발을 담근 막내 조 때문에

결국 불명예스러운 말년을 맞이하게 됩니다.

 

하지만 데니스 루헤인은 커글린 가문을 몰락시키진 않습니다.

오랜만에 돌아온 장남 대니는 할리우드에서 영화인으로서의 새로운 삶을 시작합니다.

조는 그라시엘라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에게 아버지 토머스의 이름을 부여합니다.

차남 코너의 이야기는 없지만, 어쨌든 커글린 가문은 소멸을 피하고 대를 잇게 됐으며

이제 그 마지막 이야기는 세 번째 작품인 무너진 세상에서를 통해 소개될 것입니다.

대하역사소설의 풍미를 선보인 운명의 날

피비린내 나는 누아르의 품격을 자랑한 리브 바이 나이트에 이어

무너진 세상에서가 어떤 스타일의 서사를 들고 나올지 기대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수면의 감옥
우라가 가즈히로 지음, 이연승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5월
평점 :
절판


5년 전, 뜨거운 밀회를 마친 뒤 계단에서 굴러 떨어지는 사고를 당한 우라가와 아야코.

우라가는 가벼운 부상만 입었지만, 아야코는 의식불명의 혼수상태에 빠진다.

그로부터 5년 후, 미스터리 소설가가 된 우라가는 아야코의 오빠의 연락을 받고

사고 현장에 함께 있었던 요시노, 기타자와와 그를 방문하지만 밀폐된 지하실에 갇히고 만다.

지하실에서 나갈 수 있는 조건은 셋 중 누가 아야코를 밀쳤는지 고백하는 것.

동시에 지하실 밖에서는 메일 교환을 통한 완벽한 알리바이의 교환 살인이 진행된다.

과연 교환 살인의 목적은 무엇인가? 그리고 예측 불가능한 경악의 결말은 무엇일까?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하였습니다)

 

● ● ●

 

무척 독특한 일본 미스터리 작품을 만났습니다.

분량도 짧고, 이야기도 간결한데다, 지극히 쉽고 평이한 문장들로 쓰였지만

독자로 하여금 끊임없이 위화감을 갖게 만드는 매력적인 구성과

제대로 뒤통수를 치는 예상 밖의 반전 덕분에

한국에 처음 소개되는 작가임에도 불구하고 의외의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출판사 책 소개를 보면 두 이야기가 별개의 것처럼 전개되는 이중 구조라든가,

밀실 트릭, 교환 살인 등 다채로운 코드를 맛볼 수 있다고 홍보하고 있지만,

사실 엄밀히 말하면 그 코드들이 복잡하거나 심도 있게 묘사된 것은 아닙니다.

일본 미스터리의 마니아라면 너무 싱거워!’ 소리가 저절로 나올 정도로

중반부까지의 이야기 전개는 단선적이고 평면적으로만 그려질 뿐입니다.

하지만 이런 심플-단선-평면적인 흐름 탓에 독자는 이게 뭐지?’라는 위화감을 갖게 되는데,

바로 그 점이 작품 후반부에 이르러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요인이 됩니다.

꽤 충격이 큽니다. 방심하고 있다가 맞는 매가 더 아프고 놀랍듯이 말이죠.^^

 

마지막 장을 덮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작가가 꽤 많은 힌트를 줬음을 깨닫게 됩니다.

하지만 잘 짜인 미스터리 작품이 그렇듯이 힌트는 잘 위장돼있었고,

대부분의 경우 대수롭지 않게 여긴 채 다음 페이지로 넘어가게 만들곤 했습니다.

어쩌면 잘 위장된 힌트야말로 이런 종류의 미스터리를 맛깔나게 하는 덕목일지도 모릅니다.

물론 독자에 따라 일찌감치 힌트를 눈치 채고 결말을 예상할 수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론 그렇게 똑똑한 독자가 별로 부럽진 않습니다.

미스터리를 읽는 재미란 게 정답 맞추기보다 뒤통수 맞기에 더 기인하기 때문이죠.

그런 점에서 수면의 감옥은 작가에게 당하고도 짜릿함을 느낄 수 있는 작품입니다.

 

번역하신 이연승 님은 우라가 가즈히로의 작품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파격입니다.

세간에서 금기시하는 소재를 과감히 도입해 현실 세계를 비판하는 동시에

인간의 어두운 일면을 예리하게 파고든 작품들을 써내며...”라고 소개하시면서

그래서인지 일본에서도 주변에 추천하기 힘든 작가 중 한 명이라고 언급하셨습니다.

더더욱 기대와 호기심이 발동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입니다.

심술꾸러기 악동 같은 천재라는 우라가 가즈히로의 작품이 좀더 많이 소개되기를 바라면서

특히 출간된 지 10여년 만에 재평가와 함께 돌풍을 일으켰다는 그녀는 존재하지 않는다

이 작품의 뒤를 잇기를 살짝 기대해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스토리콜렉터 49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에이머스 데커는 과잉기억증후군에 걸린 전직 경찰입니다. 보고 듣고 느낀 모든 것을 생생히 기억한다는 뜻입니다. 경찰이 된 후 그 특별한 능력 덕분에 최고 검거율을 자랑하는 형사가 됐지만, 어느 날 가족이 처참하게 살해된 이후 그는 끝없이 추락하고 맙니다. 16개월 후, 노숙자나 다름없는 삶을 살던 데커는 상관이었던 경찰서장 덕분에 인근 고교에서 발생한 총기난사 사건에 공식 컨설턴트로 참여합니다. 극심한 혼란 속에서도 데커는 수많은 단서를 찾아내지만 사건은 미궁으로 빠져들 뿐이고, 오히려 동일범에 의한 소행으로 보이는 사건이 연이어 발생합니다.


 

뭔가를 잊을 수 있다면 좋겠어요. 사람들이 그러는 것처럼. 나도 좀 잊고 싶어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은 양날의 검입니다. 그 능력을 이용하여 부와 권력과 명예를 거머쥘 수도 있겠지만,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들까지 평생 기억해야 한다면 그것은 저주나 다름없기 때문입니다. 참혹하게 살해된 아내와 딸의 시신을 두 눈으로 목격했다면, 그래서 그 모습을 평생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기억하며 살아야 한다면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에이머스 데커는 기억력을 제외하곤 일반적인 스릴러 주인공과는 거리가 먼 캐릭터입니다. 대사증후군의 표본으로 삼아도 손색없는 초고도비만의 몸매는 말할 것도 없고, 추레한 행색과 꺼칠한 얼굴 등 누구라도 기피할 것 같은 외양 때문입니다. 더구나 가족을 잃은 상실감으로 자살 직전까지 갔던 그는 마음마저 피폐해진 탓에 말 그대로 하루하루 죽지 못해 살고 있는 보기 흉하게 망가진 중년남의 신세입니다.

그런 그가 고등학교 총기난사 사건 수사에 합류하면서 발휘하는 유능한 형사로서의 모습은 비호감에 가까운 비주얼 때문에 때론 위화감을 주기도 하지만, 고된 수사를 마치고 홀로 머물고 있는 좁은 여관방으로 돌아와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흉측한 모습을 보며 자기학대 또는 자기연민에 빠지는 모습을 보면 어떤 대목에서는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을 자아낼 정도로 안쓰럽고 애틋해 보이기도 합니다. 물론 작가가 마음만 먹었다면 비주얼만큼은 해리 보슈나 해리 홀레처럼 어딘가 스산함과 애수가 깃든 멋진 중년으로 포장할 수도 있었겠지만 만일 그랬다면 데커의 매력은 훨씬 덜 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선명한 캐릭터와 잔혹하면서도 흥미를 유발하는 사건들 덕분에 페이지는 정말 잘 넘어가지만, 중반부쯤에 이르렀을 때 이런 의문이 든 독자가 꽤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모든 것을 기억하는 데커의 능력과 이 일련의 사건들이 무슨 관계가 있을까?” , 데커의 캐릭터가 과연 사건의 진상과 어떻게 이어질 것인지 궁금해지는 것입니다. 그의 기억력이 수사에 큰 진척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그 외에 사건의 진실을 찾는 큰 줄기는 지극히 일반적인 스릴러의 서사대로 흘러가고 있기에 혹시 이러다가 그의 기억능력과는 무관하게 덜컥 범인을 잡는 것은 아닐까, 의심하게 됩니다.

단지 독특한 주인공을 창조하기 위해 데커를 희귀한 기억능력자로 포장했더라면 아마 이 작품에 세 개 이상의 별을 주지 못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작가는 매끄러운 전개와 구성을 통해 그의 모든 것을 기억하는 능력과 현재의 사건들을 연결시킵니다. 물론 그 과정이 감탄을 자아낼 만큼 완벽하진 않았지만, 점차 데커의 기억 속에서 윤곽을 드러내는 범인의 정체와 그 동기를 지켜보면서 데이비드 발다치라는 작가의 명성이 공연한 것이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수많은 인물들과 사건들을 정교하게 직조한 것은 물론 그 안에 희귀한 기억능력자의 매력을 자연스럽게 녹여낸 필력은 감탄을 자아낼 만 했습니다.

 

주인공인 데커 외에 작가는 조연들에게도 매력적인 캐릭터를 부여했는데, 경찰 시절 그와 찰떡궁합을 발휘했던 유능한 파트너 메리 랭커스터, 갈등과 협조의 상대인 연방정보국 특수요원 로스 보거트, 언제나 얄밉게 등장하기 마련인 집요한 저널리스트 알렉스 재미슨 등이 그들입니다. 어느 스릴러에서나 볼 법한 상투적인 관계들이지만 작가가 창조한 그()들의 캐릭터와 말빨은 그런 상투성을 전혀 느끼지 못하게 만듭니다. 작품 후반부에서 이들이 이후 한 배를 타게 될 것 같다는 암시를 준 덕분에 에이머스 데커 시리즈에 대한 기대감이 더욱 높아졌는데, 부디 그들의 팀플레이를 꾸준히 만날 수 있기를 바랄 뿐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유리 갈대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3
사쿠라기 시노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엄마는 스무 살에 술집 손님이던 거친 뱃사람과의 하룻밤 정사로 나를 가졌어.

난 엄마에게 매를 맞으며 자랐고, 엄마의 강요로 술집 손님들을 상대로 매춘에 내몰렸지.

사랑 따위, 마음 따위, 웃음이나 눈물 따위는 애초부터 내 인생에 없었던 것 같아.

러브호텔 호텔 로열의 사장이자 엄마의 애인이던 30년 연상의 남자와 결혼한 것 역시

단지 그가 돈과 여유를 줄 테니 마음대로 살아보라.”고 프로포즈 했기 때문이야.

그는 좋아하니 어쩌니 하는 말도, 마음을 시험하지도, 대가를 요구하지도 않았어.

 

무색무취한 날들이지만, 딱히 싫지도, 심심하지도 않았어.

그런 날들에서 도망치거나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도 해본 적 없고...

그냥 이렇게, 중력이든 인력이든 나를 끌어당기는 쪽으로 흘러가면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일까?

내가 쓴 유리 갈대라는 단가(短歌) 축축한 땅 위, 도도하게 선 저 유리 갈대.

대롱 속에는 바슬바슬 모래가 흘러가네.” - 처럼, 어쩌면 내 몸에 흐르는 것은

빨간 피가 아니라 마른 모래가 아닐까 생각해본 적도 있어.

누군가 내 마음을 흔드는 것도 싫고, 누군가의 마음을 흔드는 것은 더 싫고,

누군가에게 의지하는 것도, 속박당하는 것도 싫은 나...

 

그래도 내 어느 한구석엔가 마음의 조각이란 게 남아있기 때문이었을까?

러브호텔의 세무를 맡은 사와키와 간간이 몸을 섞으며 절정과 위안을 얻기도 하고,

내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매 맞는 소녀를 만난 뒤론 냉정한 분노에 휩싸이기도 했어.

엄마가 여전히 내 남편과 몸을 섞는다는 것을 알았을 때는 나답지 않게 폭발하기도 했고,

전적으로 내 의지에 의해 몇 번이고 손에 피를 묻히기도 했지...

 

하지만 그런 것들이 다 무슨 소용일까?

역시 나는 유리 갈대이거나, 그 안을 흘러가는 가슬가슬한 모래야.

깨지기 쉬운 유리이거나, 절대 꺾이지 않고 출렁대기만 할 뿐인 갈대거나,

또는 모든 것을 타인의 의지나 무정한 세상에 내맡긴 채 이리저리 떠다니는 모래...

이런 삶은 무슨 색일까? 의미란 게 있을까? 더 존재할 이유가 있을까?

여름조차 서늘한 훗카이도 동부의 대기와 호텔 로열앞에 펼쳐진 광대한 습원의 습기,

그리고 바다에서 무시로 몰려오는 축축한 안개 속에서

유리 갈대이자 그 대롱 속을 흐르는 모래인 나는 그럭저럭 오늘을 살아가고 있어...

 

● ● ●

 

어떻게 서평을 시작해야 되나, 고민하다가

느닷없이 주인공 세쓰코의 독백 같은 것을 쓰고 말았습니다.

사실 유리 갈대에는 여러 가지 파격적이거나 충격적인 사건들이 많이 묘사되지만,

결국 이야기의 중심은 세쓰코라는 한 여자의 유리 같거나, 갈대 같거나 모래 같은 삶입니다.

그래서 상투적인 줄거리 정리보다는 멋대로 세쓰코가 되어 멋대로 독백해보기

서평의 오프닝을 삼고 말았습니다.

 

작품 내내 세쓰코를 지켜보는 것은 무척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타고난 허무주의자 같기도 하고, 학습된 냉소주의자 같기도 한 세쓰코의 캐릭터도 그렇고,

엄마의 애인과 결혼한 일이나 그 엄마의 피를 물려받아불륜을 저지르는 일도 그렇고,

끝내 몇 번씩 손에 피를 묻히게 되는 기구한 운명도 모두 안쓰럽고 안타까울 뿐입니다.

세쓰코의 유리 갈대 또는 모래 같은 삶은 도대체 어디에서 종장을 맞이할지,

또 그 종장은 얼마나 비극적이거나 허망할지를 떠올려보는 일도 마음 편한 일이 아닙니다.

 

세쓰코의 많은 것을 알면서도 그녀와 간간이 몸을 섞는 중년남자 사와키는

독자들의 이런 편치 않은 감정들을 대신 발산하는 역할을 맡고 있습니다.

이미 10년 전부터 세쓰코와 인연을 맺어온 사와키는 그녀의 마음을 얻고 싶으면서도

결국 자신은 그녀에게 버스정류장이나 주유소이상의 의미가 될 수 없음을 잘 압니다.

그래서 언제나 위성처럼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녀를 지켜볼 뿐입니다.

살은 섞지만, 마음은 절대 섞지 않는 두 사람의 평행선 같은 관계는

마지막 페이지에 이를 때까지 독자의 마음을 한없이 무겁게 만듭니다.

 

이야기의 소재나 캐릭터, 사건만 놓고 보면 막장 드라마의 완결판처럼 느껴지지만,

사쿠라기 시노는 섬뜩할 정도의 담담한 문장들로 이 난감한 막장의 요소들을 요리합니다.

무엇보다 간결한 표현으로 인물들의 심리를 세밀하고 적확하게 묘사한 대목들은

막장마저 공감하게 만드는 힘을 발휘하고 있습니다.

연작단편집 호텔 로열’ (149회 나오키상 수상작)에서도 비슷한 대목들을 여러 번 목격했는데,

이런 묘사의 힘이야말로 사쿠라기 시노의 가장 큰 매력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스산하게만 느껴지던 구시로 습원의 이미지와 호텔 로열의 풍경은

마지막 장을 덮은 후에도 여운처럼 계속 머릿속에 남습니다.

인터넷으로 찾아보니 의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돼있는 광대한 습원이었습니다만,

잠깐이라면 모를까, 낮밤으로 그 풍경을 보고 있자면,

(더구나 바다에서 몰려온 안개까지 곁든 풍경이라면)

누구나 세쓰코처럼 자신을 유리 갈대나 모래처럼 여길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재미있게 읽었던 단편집 호텔 로열과의 접점을 찾아보려 했는데,

같은 무대이되 전혀 다른 히스토리를 지닌 것으로 설정되어 무척 아쉬웠습니다.

다만 기시감 같은 묘한 공통점이 일부 있는데,

호텔 로열을 세운 남자가 모두 간판과 관련 있는 일을 했다든가,

본처와 이혼한 뒤 자신의 절반밖에 안 되는 나이의 젊은 여자와 재혼했다는 점이 그것입니다.

유리 갈대를 인상 깊게 읽은 독자라면

호텔 로열을 통해 사쿠라기 시노의 단편의 매력을 꼭 만나볼 것을 권하고 싶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1 에도가와 란포 결정판 시리즈 1
에도가와 란포 지음, 권일영 옮김 / 검은숲 / 2016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일본 미스터리를 좋아하면서도 그 원조(?)라고 할 수 있는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은

지금까지 만나본 적이 없습니다.

책장에 외딴 섬 악마가 꽂혀있지만 매번 다음에 읽어야지하면서 뒷전으로 밀리는 바람에

몇 년째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는 신세입니다.

그러다가, 이번에 결정판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나온 그의 선집을 만나게 됐습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3편의 단편과 1편의 장편으로 구성된 결정판 1’

저처럼 에도가와 란포에 입문하는 독자에겐 더없이 좋은 텍스트입니다.

그의 작품 세계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코드들,

즉 극단적인 고통과 쾌락, 엿보기, 성적 도착, 괴기와 잔학, 환상 등이 골고루 녹아있는데다

20세기 초반의 날것 같은 정서들도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지독한 사랑에 빠진 나머지 액자 속 인형이 돼버린 남자의 이야기 (오시에와 여행하는 남자),

전쟁으로 인해 목소리와 청각은 물론 사지까지 잃어버린 전직 군인과

그의 곁에서 자학과 욕정에 번민하며 살아가는 젊은 아내의 이야기 (애벌레),

엿보기에 심취한 끝에 죄의식 없는 살인에 이르는 한 남자의 이야기 (천장 위의 산책자),

그리고 49명의 여자를 일시에 납치, 살해하려는 희대의 소시오패스 이야기 (거미남)

현대를 배경으로 했을 때는 도저히 쓰기도, 읽기도 어려운 기이한이야기들이 실려있습니다.

 

요즘의 눈높이로 보면 사건이나 캐릭터가 조금은 거칠고, 덜 세련돼 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에도가와 란포가 살던 시대의 원시성에 기인한 것이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는 전혀 무관한 것입니다.

, 1920년대의 100% 아날로그적인 원시성이 투사된 사건과 캐릭터들은

오늘날의 독자에게는 낯설고 투박하게 느껴질 여지가 많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낯섦투박함이야말로 에도가와 란포의 매력이라는 생각입니다.

마치 요코미조 세이시나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을 읽을 때와 마찬가지로 말이죠..

 

에도가와 란포가 선호하는 코드들 역시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는데,

원색적인 나머지 호러 또는 엽기의 느낌까지 나는 그의 코드들이 불편하게 여겨지는 것은

단순히 취향의 문제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누구나 의식 혹은 무의식 속에 조금씩은 갖고 있는 본능이라 그런 것일지도 모릅니다.

말하자면 쾌락, 엿보기, 성적 도착, 괴기, 잔학 등 나만의 내밀함이라 여긴 본능들이

활자를 통해 가감 없이 적나라하게 묘사된 것을 지켜보며

마치 거울을 보는듯한 부끄러움을 느낀다고 할까요?

 

클래식으로서의 품격이나 일본 추리소설의 아버지라는 명성에 큰 기대를 한 입문 독자라면

약간의 아쉬움과 이질감을 느꼈을지도 모르지만

요코미조 세이시나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을 좋아하는 제 입장에선

좀더 다양한 에도가와 란포의 작품을 접하고 싶다는 기대를 갖게 해준 결정판 1’이었습니다.

물론 책장에서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외딴 섬 악마도 빨리 구출(?)해줘야할 것 같구요.^^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