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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의 6일 ㅣ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평점 :
절판
어느 날 암살자들이 CIA의 지부인 미국문학사협회를 습격한다.
이 협회에서 말콤과 동료들은 현실 세계의 외교 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르는 단서를 찾아
미스터리 소설들을 샅샅이 검토한다.
말콤의 동료가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를 알게 되었고,
CIA에 침투한 사악한 음모 세력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대학살을 자행한다.
우연히 샌드위치를 사러 외출했다가 대학살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말콤은
구조를 청하기 위해 CIA 본부에 전화를 걸지만
오히려 그의 목숨을 노리는 또 다른 음모에 휘말린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신한 말콤, 즉 ‘코드네임 콘돌’은
인생 최대의 고비인 6일 동안의 위험 속으로 질주하는데...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수정, 인용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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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영화를 통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 스파이나 비밀요원을 접해온 21세기 독자에게
1974년에 탄생한, 그것도 백면서생 같은 주인공을 앞세운 첩보물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극한의 냉전기였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치열함과 긴장감은 지금보다 훨씬 강했겠지만
아무래도 첩보 픽션을 이끄는 힘은 ‘멋있고 능력 있는 원톱 주인공’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독자의 기대나 눈높이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그레이디가 창조한 주인공 로널드 말콤(코드명 콘돌)은
미국문학사협회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위장된 CIA 지부에서
하루 종일 미스터리와 스릴러 소설을 읽고 분석한 뒤 보고서를 쓰는 ‘먹물’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료들이 살해당하고, 스스로도 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콘돌은 CIA, FBI, 워싱턴 경찰 등 온갖 공권력의 사냥감이 되고 맙니다.
사격훈련은 물론 현장요원 훈련조차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콘돌이지만,
그는 거의 본능과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헤쳐 나갑니다.
이런 아날로그적인 캐릭터와 추격전은 단순하다는 단점은 있어도
독자의 오감을 집중시키는 데 있어서는 오늘날의 세련된 최첨단 서사보다 강점이 있습니다.
‘본 시리즈’의 쫓고 쫓기는 도심 추격전이라든가,
몸뚱아리 하나 믿고 거친 싸움에 뛰어드는 ‘다이 하드 시리즈’의 명장면이 그렇듯 말입니다.
도주 중인 콘돌 못잖게 독자의 눈을 끄는 부분은
콘돌을 (죽이기 위해서든, 돕기 위해서든) 쫓는 정보기관들의 두뇌 싸움입니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복잡한 구도 속에서
정보기관들은 거침없이 의심과 배신, 비밀과 거짓말, 쉴 새 없는 반전을 주고받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액면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될 정도로 중의적이거나 덫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무기는 불과 1초 전까지만 해도 동지이던 자의 몸을 산산조각 내기도 합니다.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쉽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콘돌의 6일’은 비록 까마득한 1974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위기를 극복해가는 주인공의 캐릭터, 매력적인 조연, 극적으로 전개되는 사건 등
첩보전의 미덕은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견이지만, ‘본 시리즈’에서 디지털의 이기(利器)와 싸움꾼으로서의 능력만 덜어낸다면
바로 콘돌의 이야기와 (재미나 긴장감 면에서) 비슷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어딘가 올드한 느낌이 드는 번역입니다.
물론 원작 자체가 1974년産이다 보니 ‘구조적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딘가 고지식하고 경직된 느낌을 주는 번역 문장들이 수시로 눈에 거슬린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1974년의 작품을 1974년의 문장으로 번역했다고 할까요?
어쩌면 버티고 시리즈의 작은 글씨 크기도 그런 올드함에 한몫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1975년에 제작된 영화의 줄거리는 원작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제목도 ‘6일’이 아니라 ‘3일’로 줄었더군요.
이왕 원작도 재출간됐으니 영화로도 리메이크된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21세기에 맞게 각색되더라도 캐릭터나 스토리가 워낙 좋아서
이 작품 고유의 맛은 그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