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5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0
도진기 외 지음 / 황금가지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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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으로 만나는 미스터리나 스릴러의 묘미는 소재의 의외성과 응집된 이야기의 힘입니다.

, 널리 알려진 기성작가에게는 장편에서 보지 못한 참신한 서사를 기대하게 되고,

새로 만나게 되는 신인작가에게는 무모해 보일지라도 도전적인 서사를 기대하게 됩니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5’에는 모두 10편의 작품이 실려 있고,

도진기, 송시우, 정해연, 박하익 등 익숙한 이름들과 함께

이력이 없는 신인작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라인업이 포진하고 있습니다.

덕분에 참신한 서사와 도전적인 서사를 모두 맛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하고 있습니다.

 

깔끔하고 정교한 미스터리로 정평이 난 도진기 작가는

타임루프라는 의외의 소재를 통해 장편에서 맛보지 못한 독특한 이야기를 선보입니다.

라일락 붉게 피던 집을 통해 가족 같던 이웃들이 숨겨온 어두운 진실을 그린 송시우 작가는

이번에도 가족과 이웃들을 등장시킨 잔혹동화로 그녀만의 매력을 발휘합니다.

더블악의로 만났던 정해연 작가는 정통 미스터리 속에 애틋한 심리를 잘 녹여냈는데

새 작품을 만날 때마다 점점 진화하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반가웠습니다.

아직 작품으로 만난 적이 없는 박하익 작가는 판타지에 가까운 작품을 내놓았는데

원래 성향을 잘 몰라서 그런지 조금은 낯선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외에는 거의(혹 단편이라도 읽은 적이 있을지 몰라서) 처음 만난 작가들의 작품이었는데,

개인적으로는, 치명적인 멜로와 미스터리를 엮은 네일리스트’(이경민),

안개 속에 잠긴 해무 마을을 배경으로 구원(舊怨)의 이야기를 다룬 해무’(전건우),

짧은 분량 속에 극단적인 공포심을 잘 버무린 그렇게 밤은 온다’(김주동)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 외의 작품들도 나름 미덕을 지니고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높아진 국내 장르물 독자들의 눈높이를 충족시키기엔 아쉬운 점이 있었습니다.

 

사실 장르물에 대한 편견이 여전히 존재하는 한국 시장에서

단편집을 낸다는 것 자체가 비즈니스라는 측면에서만 보면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경로를 통해 새로운 작가의 진가가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또 그를 발판 삼아 좀더 완성도 높은 장편 작품의 출간으로 연결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은 충분히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생각됩니다.

너무 큰 기대는 오히려 실망감만 안겨줄 수도 있지만,

약간의 애정과 따뜻한 응원의 마음으로 한 작품씩 읽어나간다면

그리 긴 시간을 투자하지 않고도 각자 취향에 맞는 의외의 수작들을 만날 수 있을 것입니다.

 

기성작가들 외에 아직은 낯설기만 한 작가들이

다음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이든 아니면 완성도 높은 장편을 통해서든

다시 한 번 저에게 강하게 어필할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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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돌의 6일 버티고 시리즈
제임스 그레이디 지음, 윤철희 옮김 / 오픈하우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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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암살자들이 CIA의 지부인 미국문학사협회를 습격한다.

이 협회에서 말콤과 동료들은 현실 세계의 외교 문제를 해결할지도 모르는 단서를 찾아

미스터리 소설들을 샅샅이 검토한다.

말콤의 동료가 알아서는 안 될 무언가를 알게 되었고,

CIA에 침투한 사악한 음모 세력은 그것을 은폐하기 위해 대학살을 자행한다.

우연히 샌드위치를 사러 외출했다가 대학살을 피해 겨우 살아남은 말콤은

구조를 청하기 위해 CIA 본부에 전화를 걸지만

오히려 그의 목숨을 노리는 또 다른 음모에 휘말린다.

아무도 믿을 수 없는 상황에서 사냥감에서 사냥꾼으로 변신한 말콤, 코드네임 콘돌

인생 최대의 고비인 6일 동안의 위험 속으로 질주하는데...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수정, 인용하였습니다)

 

● ● ●

 

책과 영화를 통해 더 이상 완벽할 수 없는스파이나 비밀요원을 접해온 21세기 독자에게

1974년에 탄생한, 그것도 백면서생 같은 주인공을 앞세운 첩보물은 낯설 수밖에 없습니다.

물론 극한의 냉전기였던 시대 상황을 감안하면 치열함과 긴장감은 지금보다 훨씬 강했겠지만

아무래도 첩보 픽션을 이끄는 힘은 멋있고 능력 있는 원톱 주인공이기 때문에

오늘날의 독자의 기대나 눈높이를 충족시키기가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제임스 그레이디가 창조한 주인공 로널드 말콤(코드명 콘돌)

미국문학사협회라는 이름으로 그럴듯하게 위장된 CIA 지부에서

하루 종일 미스터리와 스릴러 소설을 읽고 분석한 뒤 보고서를 쓰는 먹물입니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동료들이 살해당하고, 스스로도 영문도 모른 채 쫓기는 신세가 되면서

콘돌은 CIA, FBI, 워싱턴 경찰 등 온갖 공권력의 사냥감이 되고 맙니다.

 

사격훈련은 물론 현장요원 훈련조차 제대로 받아본 적 없는 콘돌이지만,

그는 거의 본능과 임기응변으로 위기를 헤쳐 나갑니다.

이런 아날로그적인 캐릭터와 추격전은 단순하다는 단점은 있어도

독자의 오감을 집중시키는 데 있어서는 오늘날의 세련된 최첨단 서사보다 강점이 있습니다.

본 시리즈의 쫓고 쫓기는 도심 추격전이라든가,

몸뚱아리 하나 믿고 거친 싸움에 뛰어드는 다이 하드 시리즈의 명장면이 그렇듯 말입니다.

 

도주 중인 콘돌 못잖게 독자의 눈을 끄는 부분은

콘돌을 (죽이기 위해서든, 돕기 위해서든) 쫓는 정보기관들의 두뇌 싸움입니다.

누구 말을 믿어야 할지 전혀 감조차 잡을 수 없는 복잡한 구도 속에서

정보기관들은 거침없이 의심과 배신, 비밀과 거짓말, 쉴 새 없는 반전을 주고받습니다.

그들의 대화는 액면 그대로 해석해서는 안 될 정도로 중의적이거나 덫으로 가득 찼고,

그들의 무기는 불과 1초 전까지만 해도 동지이던 자의 몸을 산산조각 내기도 합니다.

덕분에 마지막 페이지, 마지막 줄에 이르기까지 독자는 쉽게 마음을 내려놓지 못합니다.

 

콘돌의 6은 비록 까마득한 1974년을 배경으로 한 이야기지만,

위기를 극복해가는 주인공의 캐릭터, 매력적인 조연, 극적으로 전개되는 사건 등

첩보전의 미덕은 빠짐없이 갖추고 있는 작품입니다.

사견이지만, ‘본 시리즈에서 디지털의 이기(利器)와 싸움꾼으로서의 능력만 덜어낸다면

바로 콘돌의 이야기와 (재미나 긴장감 면에서) 비슷해지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을 꼽자면, 어딘가 올드한 느낌이 드는 번역입니다.

물론 원작 자체가 1974이다 보니 구조적으로어쩔 수 없는 일일지도 모르겠지만,

어딘가 고지식하고 경직된 느낌을 주는 번역 문장들이 수시로 눈에 거슬린 것은 사실입니다.

말하자면 1974년의 작품을 1974년의 문장으로 번역했다고 할까요?

어쩌면 버티고 시리즈의 작은 글씨 크기도 그런 올드함에 한몫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작품을 바탕으로 1975년에 제작된 영화의 줄거리는 원작과는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제목도 ‘6이 아니라 ‘3로 줄었더군요.

이왕 원작도 재출간됐으니 영화로도 리메이크된다면 괜찮겠다는 생각입니다.

21세기에 맞게 각색되더라도 캐릭터나 스토리가 워낙 좋아서

이 작품 고유의 맛은 그대로 즐길 수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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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여 마땅한 사람들
피터 스완슨 지음, 노진선 옮김 / 푸른숲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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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푸른숲이 길리언 플린 이후 최고의 이야기꾼을 발굴한 것 같네요.

올해 읽은 장르물 가운데 단연 손에 꼽을 만한 작품이며,

마지막 페이지까지 독자의 뒤통수를 치는 작가의 필력이 정말 매력적인 작품입니다.

 

주인공 릴리 킨트너는 살인에 관해 이런 철학을 갖고 있는 20대 후반의 여성입니다.

살인을 죄악시 하는 가장 큰 이유는 남겨진 사람들 때문이다. 죽은 이를 사랑하는 사람들.

하지만 만약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이었다면?

더구나 권력을 남용하고 자신을 향한 상대의 사랑을 남용하는 사람이었다면?”

이 자문에 대한 릴리의 대답은 그들은 죽여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그녀는 이 세상에는 생명이 너무 많으며, 살인은 비도덕적인 일이 아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그녀는 13살 때부터 자신의 철학대로 삶을 꾸려왔습니다.

 

여러 화자들의 1인칭 시점 서술이 번갈아 한 챕터씩 전개됩니다.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일말의 머뭇거림도 없이 죽이는 릴리,

불륜에 빠진 아내를 죽이고 싶어 하는 테드,

사랑 따윈 애초에 없었던, 그저 돈에 눈이 멀어 결혼을 감행한 미란다 등이 그들입니다.

 

이들은 화려한 전과도, 무시무시한 문신도, 밑바닥의 삶을 살던 이력도 없는데다

지극히 평범하고 적어도 중류 계층 이상의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이들은 하나같이 자신의 욕망과 집착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캐릭터들입니다.

그런 캐릭터 탓에 지극히 단순명료한 이유로 상대를 죽이겠다고 결심합니다.

나를 배신했으므로, 나를 아프게 했으므로, 너의 것을 갖고 싶으니까...

 

작가는 그들의 분노나 탐욕을 절대 과대포장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단순하게 묘사합니다.

하지만 그런 단순한 묘사 덕분에 연이은 살인행각이 더욱 서늘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진정한 소시오패스란 요란하게 피범벅이 된 채 토막 살인을 저지르는 미치광이가 아니라

자신의 철학에 따라 조용하고 깔끔하게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죽이는 자가 아닐까요?

경찰의 추적은 두렵지만, 죄책감이라곤 전혀 느끼지 못하면서 말이죠...

 

살인자의 행위를 변호하는 듯한 뉘앙스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

작가는 독자로 하여금 살인자를 응원하게끔 이야기를 끌고 갑니다.

실제로 죽여 마땅한 사람들을 죽이는 살인 장면에서는 쾌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다보니 읽는 내내 어떤 엔딩이 기다리고 있을지 너무 궁금해지게 됩니다.

아무리 감정이입이 된 주인공이라 한들 살인에 대한 응분의 대가를 치러야 할 것 같지만

솔직한 심정은 제발 잡히지 말았으면..’ 하는 쪽으로 확실히 기울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주인공이 벌을 피하는 해피엔딩도 찜찜하고, 그 반대도 찜찜하긴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작가는 정말 얄미울 정도로 이 두 가지 감정을 갖고 독자를 희롱합니다.

400여 페이지를 달리는 동안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 함정을 만들어놓곤

주인공은 물론 독자마저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위험한 롤러코스터에 태웁니다.

그리곤 그것도 모자라 마지막 페이지의 단 몇 줄을 통해서까지 기어이 뒤통수를 때립니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탄식을 터뜨린 독자라면, 혹은 멍 때리는 경험을 하게 된 독자라면

반드시 번역하신 노진선 님의 후기를 읽어보시기 바랍니다.

진짜 반전은 어쩌면 거기에서 터질지도 모르니까요.^^)

 

사실 너무 노골적인 제목 때문에 읽기를 주저했던 작품이었지만

(개성 없이 기성품에서 고른 듯한 표지도 한몫 했구요)

결과적으론, 이야기와 캐릭터, 구성과 반전 등 모든 면에서

5개가 모자랄 정도로 만족스런 책읽기를 전해준 작품으로 기억하게 됐습니다.

이 작품이 작가의 두 번째 장편소설이라고 하는데,

이어지는 작품에서도 독자를 마음껏 희롱하는 매력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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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
요시다 슈이치 지음, 서혜영 옮김 / 은행나무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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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 출간된 요시다 슈이치의 많은 작품 가운데 정작 읽은 것은 몇 권 안 되지만,

그의 작품의 공통점은 줄거리는 희미해져도, 그 느낌만은 절대 잊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래 전에 읽어 줄거리나 인물은 그 윤곽 밖에 기억나지 않더라도,

그 안에 배어있던 정서나 냄새(?)는 지금 막 책장을 덮은 것처럼 생생히 떠오른다는 뜻입니다.

악인분노를 제외하곤 대체로 순하거나 애틋한 느낌들이었는데,

현란하지도, 과한 수식도 없는 문장들이 전해준 그 느낌들은 무척이나 따뜻했습니다.

악인분노는 그와는 정반대로 적나라하게 그려진 악의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스토리 자체보다 다 읽은 후에 느낀 섬뜩함으로 기억되는 작품들입니다.

 

이처럼 늘 느낌으로 어필했던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이라

태양은 움직이지 않는다역시 아무런 사전정보도 없이 첫 페이지를 열면서

(단지 제목 때문에) 덴카와 아야의 태양의 노래같은 애틋-따뜻 스토리를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작품이 맷 데이먼의 본 시리즈를 뺨치는,

그야말로 초인적인 캐릭터와 비현실적인 스토리로 버무려진 첩보물임을 깨닫곤

책 표지에 적힌 작가의 이름을 새삼 다시 확인해야 했습니다.

 

솔직히 할리우드의 정교하고 거대한 스케일의 첩보전에 익숙해진 상황에서

동아시아를 무대로 최첨단 우주 태양광 발전 시스템을 둘러싼 국제 첩보전이라는 카피는

아무리 요시다 슈이치의 팬이라 하더라도 일단은 주저하게 만들 만한 황당한문구입니다.

중국과 일본이 주연이고 한국도 조연으로 등장하긴 하지만,

총도 맘대로 못 쏘는 아시아를 무대로 무슨 대단한 첩보전이 가능하겠어?’라는

일종의 선입견이 들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하지만 요시다 슈이치가 만들어낸 한중일 합작 아시아 판 첩보전

본 시리즈처럼 요란한 총격전과 액션 장면 없이도 충분한 재미와 긴장감을 선사합니다.

빈틈없이 정교한 설계도, 초인적이지만 분명 어딘가 존재할 것 같은 리얼한 캐릭터,

말빨만으로도 상대를 제압하는 순도 100%의 정보전, 적절하고 매력적인 반전 등

첩보물의 미덕도 골고루 갖추고 있습니다.

우주 태양광 발전 시스템이라는 소재도 알고 보면 눈앞에 다가온 현실적인 소재라

결코 공상 속의 이야기로 보이진 않습니다.

물론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는 놀라운 공간 이동이라든가,

앉은 자리에서 사방의 정보를 습득하는 만능 첩보 능력,

, 거의 슈퍼맨 급 스펙을 갖춘 요원들의 다재다능함은 가끔씩 위화감을 줍니다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는 부분이라는 생각입니다.

 

첩보물이라는 외양에도 불구하고 요시다 슈이치만의 힘도 분명 살아있는 작품입니다.

그 힘은 그저 총 잘 쏘고, 발차기 잘하는 액션 히어로 대신

그만의 정서가 고스란히 녹아든 상처투성이 캐릭터들을 만들어냈다는 점에 근거합니다.

부모에게 비참하게 버려진 후 조직에 의해 피도 눈물도 없는 요원으로 키워진 첩보원들,

약자로만 살아온 과거를 버리고 강하게 살기 위해 첩보원이 되기를 꿈꾸는 여자,

작전을 위해 위장된 사랑을 택했지만, 그로 인해 평범한 행복이 무엇인지 알게 된 스파이 등

독자에게 애틋하거나 응원하고 싶은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캐릭터들이 이야기를 끌어나갑니다.

요시다 슈이치는 이 작품에 관해 목소리(캐릭터)를 희생하고 스토리를 살렸다라고 말했지만

실제로는 스토리만큼이나 캐릭터가 분명히 살아있는 작품이란 것이 제 생각입니다.

 

낯설긴 했지만 이야기꾼 요시다 슈이치의 새로운 면모를 만난 것 같아 반가웠고,

이만한 캐릭터와 배경 설정이라면 시리즈로 만들어도 괜찮겠다는 기대감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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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공의 벌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김난주 옮김 / 재인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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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자위대에 납품할 최신예 거대 전투 헬기 B’가 최종 시험 비행을 앞두고 피랍된다.

B’는 대량의 폭발물을 실은 채 천공의 벌을 자처하는 범인의 무선 원격 조종에 의해

후쿠이 현 쓰루가 시의 원전 바로 위 800미터 상공을 선회한다.

범인은 일본 전역의 원전을 모두 폐기하지 않으면 헬기를 추락 시키겠다고 협박한다.

그리고 자신의 요구 사항과 현장 상황을 TV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할 것을 요구한다.

남은 시간은 8시간. 일본 열도는 순식간에 일촉즉발의 공포에 휩싸인다.

헬기의 연료는 시시각각으로 소진돼 가고, 원전 주변 주민들의 엑서더스가 벌어지는 가운데

정부와 자위대, 경찰, 원전 관계자들이 우왕좌왕하며 범인의 요구에 대책 없이 끌려 다닌다.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편집, 인용했습니다)

 

● ● ●

 

원전을 소재로 해서 그런지 남의 이야기처럼 그저 재미로만 읽히지는 않는 작품입니다.

이 작품이 집필된 1995년에만 해도 이 이야기는 일본에서조차 공상으로 치부됐을지 모르지만,

세상은 2011년 동일본 대지진 당시 후쿠시마 원자로의 종말을 똑똑히 지켜봤고,

올해 경주 지진으로 한국에서도 원전에 대한 두려움이 생생한 현실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만일 누군가 원전을 볼모삼아 다른 원전의 폐기를 주장한다면

과연 사람들은 그 누군가를 지지할까요, ‘안전한 원전을 외치는 정부를 지지할까요?

이 딜레마가 천공의 벌전체를 지배하는 주제입니다.

 

히가시노 게이고는 원전에 대한 찬반론을 비교적 중립적인 위치에서 조망합니다.

당연히 원전은 이고 원전은 이라는 이분법 따윈 전개하지도 않습니다.

세상에는 없으면 곤란하지만 똑바로 바라보기는 싫은 게 있어.

원전도 그런 것들 중 하나야.”라는 문장은 이런 관점을 잘 설명하는 대목입니다.

 

하지만 아무래도 원전 자체가 가진 부정적 이미지 때문에 그런지,

독자는 천공의 벌을 읽는 내내 고민에 빠지게 됩니다.

원전을 볼모로 삼은 범인을 응원해야 할지,

그 범인을 잡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을 응원해야 할지, 말이죠.

 

사실 범인을 잡기 위해 분투하는 자들모두가 원전 세력은 아닙니다.

그들은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를 불상사를 막기 위해,

즉 헬기의 추락으로 원전이 파괴되고 사람들이 다치는 것을 막기 위해 애쓸 뿐,

원전에 대한 찬반의 철학까지 작가로부터 부여받진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심정적으로는 원전에 반대할 수도 있지만,

현실에선 참극을 막아야한다는 사명감으로 바쁘게 움직인다고 할까요?

독자는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깊이 이입되어 이야기를 따라가게 됩니다.

 

더불어, 마지막 장까지 독자를 궁금하게 만드는 것은 범인들의 의도입니다.

일찌감치 정체를 드러낸 범인들은 아무리 봐도 원전의 투사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일 투사로 설정됐다면 이야기의 힘도 떨어지고, 뻔한 블록버스터에 머물렀겠지만,

히가시노 게이고는 원자로는 인류에게 미소를 보내는가 하면 송곳니를 드러낼 수도 있다.

미소만을 요구하는 것은 인간의 오만이다. 침묵하는 군중이 원자로를 잊도록 해서는 안된다.”

라는 메시지를 통해 범인들의 캐릭터와 의도를 훨씬 고급스럽게설정하고 있습니다.

 

원전에 관한 전문적 지식이 꽤 많이 등장하지만 그리 골치 아프진 않습니다.

700페이지에 가까운 분량이지만 금세 완독이 가능한 작품입니다.

히가시노의 작품답게 쉽고 간결한 문장들과 선명한 캐릭터로 이뤄져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적잖이 무거운 주제를 다루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이유 때문에 얕고 가볍게 읽히는 점은 아쉬움으로 남았습니다.

물론 그것이 히가시노 작품의 특징이긴 하지만,

(또 이 작품이 거의 20년 전에 집필된 점을 감안하더라도)

좀더 묵직한 여운이 남았더라면 작품의 의미가 더 커지지 않았을까요?

어쩌면 그런 여운을 느낄 틈도 없이 이야기를 (과할 정도로) 급하게 마무리한 것도

아쉬움을 남기게 한 큰 이유일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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