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의 파수꾼
켄 브루언 지음, 최필원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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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을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라 지칭한 출판사의 소개글은 충분히 공감이 갑니다.

아일랜드, 하면 떠오르는 어딘가 불온하거나 음울한 기운이 작품 전반에 녹아있고,

주인공 잭 테일러의 캐릭터는 냉소적이다 못해 신랄하기까지 합니다.

얄미울 정도로 톡톡 쏴대는 비아냥 섞인 말투는 상대에게 말할 수 없는 모욕감을 주지만

독자에겐 짜릿한 승리감 같은 기분을 선사하여 이내 호감을 자아내게 만듭니다.

 

조금은 수다스럽고 경망스럽기도 한 잭 테일러를 정통 하드보일드 캐릭터로 볼 순 없지만,

그의 언행이나 그가 처한 환경,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지켜보면

묘하게도 알코올중독에 걸린 필립 말로가 연상되곤 합니다.

누아르라는 부분 역시 독자에 따라 의견이 갈릴 수 있는데,

작품 전체를 놓고 보면 분명 그런 냄새가 물씬 풍기지만,

문장 하나하나, 챕터 하나하나를 뜯어놓고 생각해보면

과연 누아르라 불릴 만한가, 라는 점에서는 의문이 드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일단 초반부는 경쾌한 속도감과 함께 잭 테일러의 매력이 마구마구 발산됩니다.

냉소와 비아냥을 입에 달고 살면서도 여자라면 무조건 들이대고 보는 한량 기질,

고위공직자를 눈 하나 깜짝 않고 엿 먹이는 과도한 정의감,

술에 관대한 아일랜드 경찰마저 두 손 들게 만드는 두주불사,

그리고 결국 술로 인해 웬만해선 잘리지 않는다는 아일랜드 경찰에서 쫓겨난 뒤

단골 술집에서 의뢰인을 찾는 사립탐정이 된 발군의 반골 캐릭터가 잭 테일러입니다.

 

그런 그에게 딸의 죽음이 자살이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달라는 미모의 의뢰인이 찾아옵니다.

드디어 본격적인 사건이 시작되는구나, 싶었는데,

왠지 이야기는 자꾸 외곽으로만 돌뿐, ‘탐정 잭 테일러의 활약은 좀처럼 전개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잭 테일러 주변 인물들에 대한 묘사가 늘어나고,

사건은 점점 이야기의 중심에서 벗어나기 시작하며,

알코올중독의 진창에서 잠시 헤어났다가 다시 그 진창 속으로 빠져드는 이야기가 반복됩니다.

 

어딘가 수상쩍기만 한 잭의 술친구 서튼,

딸의 죽음의 진상을 밝혀달라면서 잭과 묘한 관계로 발전하는 의뢰인 앤,

길거리 노숙자면서 잭과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패드릭,

잭에게는 큰형 또는 아버지 같은 존재인 술집 바텐더 숀 등

잭의 주변은 어딘가 음흉하거나 묘하거나 이방인 같은 존재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무엇보다 작품을 읽는 동안 여러 번 들었던 생각은

이 작품이 스릴러 또는 출판사 소개대로 아이리시 하드보일드 누아르라는 장르물이라기보다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를 연상 시키는 작품이라는 느낌이었습니다.

경찰에서 쫓겨난 뒤 푼돈 수준의 수임료로 사건을 맡아 생계를 이어가고,

그나마 안식을 주던 집에서도 주인에게 쫓겨나는가 하면

힘겹게 끊은 술의 유혹에 다시 넘어가 폐인이 되기를 자처한 끝에

사건은 엉뚱한 방향으로 전개되면서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는 지경에 이릅니다.

 

물론 영화 라스베가스를 떠나며의 주인공 니콜러스 케이지가

죽기 위해 술병을 들고 라스베가스를 찾는 것과는 반대로

잭은 살기 위해 아일랜드를 떠나 런던으로 갈 생각을 하기도 하지만,

어쨌든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정서와 분위기는 냉소적인 잭이라는 차이점만 빼곤

거의 비슷한 느낌을 내뿜고 있었습니다.

 

아일랜드 스릴러에 대한 기대감이 컸기 때문이었는지

개인적으론 저와는 궁합이 맞지 않는 작품이었지만,

켄 브루언이 창조한 잭 테일러 이야기가 이 작품을 시작으로 11편이나 집필된 걸 보면

이후 잭이 알코올에서 벗어나 제대로 된 탐정이 됐나 보다,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이제 첫 편이 소개된 터라 앞으로도 국내에 후속작들이 계속 소개될지 모르겠지만

잭 테일러가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며 좀더 사건에 집중하는 탐정으로 활약한다면

첫 편에서의 아쉬움을 털어낼 수도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켄 브루언의 대표작 런던대로를 오래 전 구매해놓고 책장에만 고이 모셔두고 있었는데,

밤의 파수꾼으로 첫 인연을 맺었으니, 이제 조만간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 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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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넥스트 도어
알렉스 마우드 지음, 이한이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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런던 남부의 허름한 아파트 23번지.

그곳에는 고독한 독신남 토머스, 친절한 이란인 망명자 호세인, 은둔형 외톨이 제라드,

가출 소녀 셰릴, 그곳에서 칠십 평생을 산 베스타, 그리고 도망자 콜레트까지 6명이 산다.

우연히 그곳에 이사 오게 된 콜레트는 첫날부터 음침한 기운을 느끼며 떠나려 하지만,

뜻하지 않게 살인사건에 연루되며 정체를 알 수 없는 이웃들과 한배를 타게 된다.

그런데 이들 중 한 명은 자신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슨 짓이든 할 연쇄 살인마!

그 누구도 믿을 수 없고, 그 무엇도 예측 불가능한 상황 속에서

과연 이들은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일부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내 옆집에 사는 연쇄살인마라는 설정만으로도 일단 눈길을 끄는 작품입니다.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살면서도 이웃의 이름은 물론 얼굴조차 모르는 세태 속에

낯선 이웃이 연쇄살인마로 밝혀진다면 그야말로 식은땀이 날 수밖에 없는 상황이죠.

 

하지만 작품 속 허름한 아파트에 함께 사는 이들은 의외로 잘 어울리는 이웃들입니다.

(물론 등장만 할 뿐 얼굴 한 번 제대로 안 비치는 기이한 인물이 있긴 합니다만..)

친근함과는 거리가 멀지만 나름 서로에게 관심 정도는 갖고 있다고 할까요?

이들에겐 세상과 거리를 두려 하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본의 아니게 사장의 돈을 들고 도망친 끝에 런던 남부에 숨어든 주인공 콜레트,

망명을 신청했지만 아직 받아들여지지 않은 중동 출신 이방인 호세인,

종일 클래식 음악을 크게 틀어놓은 채 한 발짝도 집에서 나오지 않는 제라드,

청소년보호소를 빠져나와 15살의 나이를 숨긴 채 좀도둑질로 연명하는 셰릴,

그리고 자신이 태어난 임대아파트에서 하루하루 늙어가는 노파 베스타 등...

 

이야기는 크게 두 개의 축으로 전개됩니다.

제목대로 이 6명 안에 숨어있는 연쇄살인마의 잔혹하고 엽기적인 범죄행각이 하나이고,

치매에 걸린 노모 때문에 추격의 위험을 무릅쓰고 런던으로 돌아온 콜레트가

이웃들과 함께 살인사건의 공범으로 전락하는 어이없는 사건이 또 하나입니다.

, 자신이 수집한 희생자들을 엽기적인 방식으로 사랑하는 연쇄살인마의 이야기와

경찰과 마주쳐선 안 되는 입장 때문에 살인사건의 공범을 자처한 이웃들의 이야기가

어딘가 불온한 기운을 내뿜는 아파트를 무대로 펼쳐집니다.

 

사실 연쇄살인마와 이웃들의 이야기는 별개의 이야기처럼 전개됩니다.

물론 후반부에 가서 두 이야기가 접점을 갖긴 하지만

개인적으론 어딘가 자연스럽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분량 면에서도 이웃들의 이야기에 좀더 많은 양이 할애됐고,

연쇄살인마의 살인동기나 이웃들과의 긴장감이 명쾌하게 묘사되지 않은 탓도 있는데다

결정적으로는, 작가가 챕터마다 여러 이웃들의 시점을 번갈아 사용하면서

그들의 기구한 사연들에 초점을 맞춘 나머지 연쇄살인마를 앞세운 스릴러라기보다

런던 남부의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이방인들의 이야기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협소하고 허름한, 일종의 밀실의 느낌까지 풍기는 아파트에서 벌어지는

온갖 잔혹하고 기이한 사건들에 대한 세부적 묘사라든가

감당하기 힘든 사건에 말려든 여러 캐릭터의 불안정한 심리묘사는

이 작품의 스릴러로서의 미덕을 충분히 살려주는 요소들이기도 합니다.

 

다만, 이 작품에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은 아무래도 번역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2015 매커비티 상 최고의 미스터리 소설 수상작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이야기의 밀도나 캐릭터의 매력 모두 괜찮았지만,

읽는 내내 직역 또는 비문처럼 읽힌 문장들 때문에 책장을 넘기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분명 한국말인데 아무리 읽어도 무슨 뜻인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특히 공간 설명이나 심리묘사에서 그런 경우가 많았는데,

출간 전에 좀더 꼼꼼하게 교정을 했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많이 남았습니다.

 

띠지에는 이 작품의 영화화가 결정됐다고 하는데,

밀실 같은 허름한 아파트에 사는 이웃들의 이야기와 엽기적인 연쇄살인마의 이야기가

왠지 책보다는 영상에서 좀더 제대로 힘을 발휘할 것 같다는 기대가 듭니다.

예정대로 제작되고 국내에도 개봉된다면 꼭 찾아봐야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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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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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피 냄새에 잠에서 깬다. 발작이 시작되기 전 그에겐 늘 피비린내가 먼저 찾아온다.

유진은 매일 먹어야 하는 ''을 며칠간 끊은 상태였고,

늘 그랬듯이 약을 끊자 기운이 넘쳤고, 그래서 전날 밤 '개병'이 도져 외출을 했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난 유진은 피투성이인 방안과, 피범벅이 된 자신의 모습을 확인한다.

핏자국을 따라, 아파트 복층에 있는 자기 방에서 나와 계단을 지나 거실로 내려온 유진은

끔찍하게 살해된 어머니의 시신을 보게 된다.

(출판사 책 소개글 인용)

 

● ● ●

 

정유정의 작품을 읽은 적이 있는 독자라면

이 작품의 정보를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원고 형태로 읽었더라도

금세 .. 정유정이겠군이라고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언제나처럼 세고, 독하고, 불편합니다.

특히 종의 기원이라는, 어딘가 음모론적인 냄새를 풍기는 제목은 평범한 진화이상의 것,

즉 피로 얼룩진 진화에 관한 이야기라고 강하게 암시하고 있습니다.

 

26살의 청년 한유진은 어머니와 이모라는 두 여자의 궁둥이에 깔린 방석처럼 살아왔습니다.

의사인 이모는 7살의 유진으로부터 평범하지 않은 면모를 발견했고,

어머니는 이모의 강요(?)에 의해 유진의 성장기를 전방위적으로 통제해왔습니다.

간질 발작을 억제하는 약 때문에 유진의 삶은 엉망인 채 영위됐고,

어릴 적 가족 여행 때 아버지와 형을 잃은 상처는 내내 그의 무의식 속에 잠재해있습니다.

그는 자신만의 탈출구, 즉 수시로 옥상의 비상계단으로 빠져나가

미친 듯 거리를 달리는 방식으로 자신만의 해방구를 만듭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깊숙한 곳에 내재돼있던 의 기운을 발견합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갈래로 전개됩니다.

피웅덩이 속에서 발견한 어머니의 시신을 처리하며

유진 스스로 누가?’, ‘?’라는 질문의 해답을 찾는 현재의 이야기가 한 축이고,

어머니의 일기를 통해 의식과 무의식 속에 숨어있던 과거사를 회상하는 것이 또 한 축입니다.

그 과정에서 현재와 과거에 걸쳐 수많은 피의 향연이 벌어지고,

유진은 때론 긍정하고, 때론 부정하거나 분노하며 자신의 진화에 혼란을 느낍니다.

 

작가 스스로 고백했듯, 예전의 작품들에서 이 조연에 머물렀다면

악의 기원에서의 은 주연의 자리에 등극하여 좀더 강한 이입감을 전해줍니다.

작가는 내 안의 악이 어떤 형태로 자리 잡고 있다가, 어떤 계기로 점화되고,

어떤 방식으로 진화해 가는지 그려 보이기 위해라고 1인칭 을 선택한 이유를 설명합니다.

작가의 의도대로 주체로 설정된 은 예전의 객체였던 들과는 무게감이 전혀 다릅니다.

 

다만, 두 가지 점에서 아쉬움이 느껴졌는데,

우선은 전작들에 비해 정유정 식 스토리텔링이 파괴력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심플하게 이야기하자면 의도에 너무 힘을 준 스토리가 힘을 얻지 못했다고 할까요?

악인은 특별한 누군가가 아니라 나를 포함한 누구나일 수 있다.”라든가

피식자에서 포식자로 변화해가는 과정, 즉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는 작가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하지만,

그 의도에 함몰되어 독자들이 기대한 정유정 식 스토리의 재미가 반감됐다는 느낌입니다.

결과적으로, 주인공 유진의 복잡다단한 심리를 묘사하기 위해 너무 많은 분량이 할애됐고,

그 때문에 지금껏 정유정의 작품을 읽으면서 한 번도 느끼지 못했던 지루함이

몇 번씩이나 거듭되곤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의도 자체에 대한 애매모호함인데,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을 그린 악인의 탄생기라는 의도와

악은 우리 유전자에 내재된 어두운 본성이라는 의도가 상충하는 게 아닌가, 하는 점입니다.

개인적으로는 후자, 즉 한유진의 악은 타고난것이라는 느낌이 강했는데,

천천히 복기해보면 작가는 평범했던 한 청년이 살인자로 태어나는 과정’,

, 어떤 계기로 내재된 이 발현되기 시작했다는 점을 작품 곳곳에서 강조하고 있었고,

그래서 어딘가 위화감 또는 애매모호함이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작가는 종종 유진에게 자신의 행동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는 망각을 부여하곤 하는데,

어쩌면 이런 모호함 유진의 이 타고난 것인지 발현된 것인지 을 뭉뚱그리기 위한

일종의 의도적 장치였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랜만에 만난 정유정의 작품이라 반갑기도 했지만,

이런저런 아쉬움도 많이 남는 작품이었습니다.

독자들이 기대했던 정유정 작품의 미덕 세고, 독하고, 불편한 정서 은 살아있지만

손에 진땀나게 하는 극강의 스토리는 찾아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일반 독자의 지나친 기우일지도 모르겠지만,

작품 곳곳에서 전작보다 심오하게 을 다뤄야 한다는 부담감이 느껴진 것도 사실입니다.

정유정의 신작이라면 언제든 무조건 찾아 읽겠지만

그녀만의 스토리텔링의 힘이 느껴지는, 그런 작품으로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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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의 사각 1 다카기 아키미쓰 걸작선 3
다카기 아키미쓰 지음, 김선영 옮김 / 검은숲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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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문신살인사건파계재판에 이어 만난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입니다.

그의 집필 시기가 일본의 패전 직후부터 1960년대에 이르다 보니

정서적으로 낯설고 어딘가 날것 같은 느낌을 자주 받을 수밖에 없지만,

동시에 아날로그 풍의 시대극을 읽는 재미도 함께 느낄 수 있습니다.

대낮의 사각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천재적인 경제 사기범의 이야기입니다.

 

● ● ●

 

쓰루오카 시치로를 비롯 도쿄대 재학생 4명은 패전 직후의 경제적 혼돈 속에서

실현 불가능한 부를 손아귀에 넣고자 사금융회사를 차립니다.

애초 리더였던 스미다가 지나친 천재성과 이기적 리더쉽으로 막장으로 치닫는 것은 물론

주색에 빠져 판단력이 흐려지자 쓰루오카는 독립을 선언하고 본격적인 사기행각에 나섭니다.

완벽한 작전 계획, 적절한 먹잇감 확보, 거침없는 실행능력을 앞세운 쓰루오카는

기업, 은행, 외국공사관 등을 상대로 무패의 사기극을 벌입니다.

경찰과 검찰은 번번이 쓰루오카에게 무릎을 꿇고, 야쿠자마저 그의 언변에 말려듭니다.

 

● ● ●

 

요즘의 디지털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쓰루오카의 사기극은 오히려 애교에 가깝습니다.

전략과 전술은 아날로그적이며, 그의 진짜 무기는 상대를 휘어잡는 심리전일 뿐입니다.

상대는 항상 어수룩하거나 썩은 동아줄이라도 잡아야 하는 위기에 빠져있고,

쓰루오카가 만들어놓은 무대 위에서 그의 각본대로 움직여주기 바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초점은 얼마나 치밀하고 완벽한 사기극을 벌였는가?’가 아니라,

패전 직후의 혼란, 즉 경제적 가치관은 제대로 정립되지 못했고,

법은 사방에 허점과 사각지대를 노출한 상태에서

채 서른도 안 된 젊은이들이 추구했던 탐욕과 그들 나름의 정의에 맞춰져 있습니다.

 

쓰루오카에겐 남의 돈을 부당하게 빼앗는다는 죄책감도 없고,

딱히 그 돈으로 뭘 하겠다는 목표도 없습니다.

오히려 힘 있는 자들을 위한 법을 혐오하며, 자신 역시 힘으로 법을 짓밟겠다고 공언합니다.

또한 성공한 재벌에겐 누구도 축재 과정의 악행을 비난하지 않는다며 자신을 정당화 합니다.

부도 직전의 회사를 상대로 거액의 사기를 벌이면서도 연민 따위는 느끼지 않습니다.

피해를 당한 회사의 간부가 자살을 해도 그다지 동요하지 않습니다.

말하자면 사기에 관한 한 타고난 사이코패스라고 할까요?

 

쓰루오카가 처음부터 사이코패스였던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초대 리더였던 스미다의 일그러진 천재의 폭주를 비난했던 쓰루오카였지만,

그로부터 독립한 후 연이어 사기에 성공하면서

쓰루오카는 어느새 스미다의 일그러진 면모를 닮아가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지만 그는 반성 대신 이것이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자신을 채찍질합니다.

그러면서 점점 더 진화하는 모습을 보여주게 됩니다.

 

이런 쓰루오카의 진화를 작가는 개인의 문제와 함께 사회의 책임으로도 묘사합니다.

그래서 수시로 당시의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상황에 대한 설명을 부연하곤 합니다.

물론 그런 설명이 결코 쓰루오카에게 면죄부를 주기 위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비정상적인 시대가 어떻게 비정상적인 천재를 폭주시키는지를

작가는 쓰루오카 본인을 비롯한 주변 인물과 상황들을 통해 강조하는 것입니다.

 

대낮의 사각의 주인공은 쓰루오카지만

사실 주변 인물들의 역할 역시 분량이나 재미 면에서 만만치 않습니다.

거짓말과 배신, 사랑과 증오가 난무하고 비극적인 죽음들이 쓰루오카를 둘러싸게 됩니다.

어쩌면 쓰루오카의 사기극보다 그의 폭주 속에 개입된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가

더욱 독자의 관심을 끌지도 모를 일입니다.

 

주간지에 연재됐던 작품을 편집하다 보니 2권으로 된 적잖은 분량이 됐지만,

웬만한 책 한 권 정도와 비슷한 시간이면 충분히 완독할 수 있습니다.

가끔 반복되는 사기행각이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고,

다카기 아키미쓰의 팬이라면 전작들에 비해 재미 면에서 소소하다고 느낄 수도 있지만

앞서 말한대로 사건 자체보다 심리에 초점을 맞춘다면 꽤 재미있는 책읽기가 돼줄 것입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에서 여성에 대해 비하하는 대목들이 상당 부분 나오는데,

남자인 제가 봐도 지나치다는 느낌이 드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 점은 다카기 아키미쓰의 작품에서 매번 느끼는 점인데,

그 때문인지 출판사에서 작품 서두에 이런 문구를 미리 실어놓았습니다.

 

이 작품에는 오늘날 인권 보호 견지에 비추어 부적합한 어구나 표현이 있습니다만,

작품 발표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문학성을 고려하여 원문대로 살려두었음을 밝힙니다.”

 

부적합한 어구나 표현이 꽤 많은 편인 작품이지만

그 점 때문에 작품 자체의 가치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란다는 문구입니다.

저 역시 충분히 공감하며, 혹 일부러 요즘 정서에 맞춰 번역됐더라면

오히려 당시의 시대상이나 성적 차별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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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걸스
에마 클라인 지음, 정주연 옮김 / arte(아르테)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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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과 약물, 반전운동이 열병처럼 번지던 1969년 남부 캘리포니아.

부모의 이혼으로 촉발된 외로움과 분노, 혼란스러운 감정에 힘들어하던 열네 살 소녀 이비는

공원에서 히피 소녀 무리를 목격한다.

그녀는 소녀들의 야하고 경박한웃음소리, 자유로운 행동과 옷차림에 시선을 빼앗기고,

특히 수전이라는 소녀에게 맹렬히 이끌린다.

수전과 소녀들은 버려진 목장에서 공동생활을 하며 러셀의 지휘에 따라 살아가고 있었다.

이비는 수전에 대한 동경과 사랑 때문에 소녀들과 행동을 함께 하고,

태어나 처음으로 겪는 자유와 우정에 취해 범죄를 저지르면서

자신도 그들 중 하나가 되기를 갈망한다.

하지만 러셀을 중심으로 한 소녀들의 일상이 위태로워지면서 불안한 공기가 떠돌고,

수십 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끔찍한 기억으로 남은 그날 밤이 찾아온다.

(출판사 책 소개글을 인용했습니다)

 

● ● ●

 

아무리 학교와 학원과 부모의 억압으로 인해 통제된 삶을 살았더라도,

10대로 보낸 시간들은 대체로 억압과 관련된 쪽으로 기억되기 마련입니다.

자유와 구속, 혼란과 일탈, 비밀과 거짓말,

그리고 두려움과 주저 속에 정작 실행에 옮기지 못했던 이 모든 것들에 대한 로망...

 

더 걸스의 주인공 이비는 () 14, 우리로 치면 그 무서운(?) ‘2’의 나이입니다.

14살의 이비가 살던 1969년과 지금의 2016년 사이에는 무려 50년에 가까운 간극이 있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은 10대의 정체성은 거의 변하지 않았습니다.

어떤 식으로든 폭발하지 않으면 도저히 못 견딜 것처럼 불안해지거나,

(아무런 근거도 없지만) 세상의 모든 것이 불온하고 불공정하다고 확신하거나,

스스로 세상의 중심이 되기 위해 그 어떤 극단적인 방법도 기꺼이 선택하고 싶어 하는,

그런 불순(?)하고 불안정한 욕망들 말이죠...

 

구속에서 벗어난 자유를 갈망했고, 혼란 속에서도 일탈을 꿈꾸던 14살의 이비의 눈에

공공장소에서 가슴을 드러내고, 태연히 쓰레기통에서 음식을 찾는 반사회적 소녀 집단

그야말로 자신의 로망을 구현시켜줄 롤 모델처럼 비칩니다.

그녀들이야말로 자신이 갖지 못했던, 또는 두려움 때문에 실행에 옮기기를 주저했던

모든 욕망들을 온몸으로 발산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기존의 가치관을 부정하는 터질 것 같은 자신감,

모두가 옳다라고 말하는 것들에 대해 가차 없이 냉소를 던질 수 있는 우월감,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겠다는 무제한의 자유로움 등...

 

물론 이비의 판타지는 폐 목장에서의 공동생활 속에서 얼마 못가 산산이 부서지고 맙니다.

소녀들은 몸과 마음 어느 것도 완성되지 않은 말 그대로 소녀들일 뿐이었고,

그녀들의 자신감과 우월감은 대부분 술과 마약의 힘을 빌었던 것이며,

무제한의 자유란 무분별한 폭력, 문란한 성관계, 대책 없는 게으름과 같은 뜻일 뿐이었습니다.

가족과 친구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과 존중을 기대했고,

무한한 자유와 즐거운 일탈, 그리고 용서받을 수 있는 방종을 통해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를 바랐던 이비의 판타지와는 거리가 먼 일상이 이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비는 어떻게든 그녀들이 되고자 발버둥쳤지만,

끝내 감당하기 힘든 비밀과 거짓말만을 끌어안은 채 그해 여름의 종장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실 더 걸스의 이야기를 아주 거칠고 낮은 수준으로 정리하자면,

범생이도, 문제아도 아닌 채 어정쩡하게 경계선에 서서 세상을 증오하던 한 10대 소녀가

껌 좀 씹는 애들과 한 패가 되고 싶었지만, 자의반 타의반으로 그 꿈을 이루지 못한 채

평생 짊어지고 갈 상처만 가득 안게 된 이야기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비가 만난 껌 좀 씹는 애들가운데에는 정말 무뇌아 같은 캐릭터도 있지만,

반대로, 세상의 모든 희로애락을 겪은 듯한, 그 또래답지 않은 캐릭터도 있습니다.

 

이비가 진심으로 꽂혔던 수전이 바로 그런 캐릭터인데,

이비를 그녀들속으로 끌어들인 것도, 이비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준 것도,

끝내 이비를 그녀들에게서 축출한 것도 수전이었습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야기는 수전을 향한 이비의 감정 또는 심리의 변화를 따라갑니다.

이비는 공동생활을 시작한 이래 수전에게 몸과 마음 모두 급속히 빠져들지만,

동시에 수전 자체가 지극히 위험한 금단의 영역이라는 것도 금세 깨닫게 됩니다.

애초 이비의 눈을 멀게 했던 수전의 자신감과 자유로움이

이비의 몸과 마음에는 너무 크거나, 너무 꽉 끼는, 안 맞는 옷이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든 그 을 자신에게 맞춰보려고 애썼지만,

그럴수록 이비의 몸은 엉망이 되고, 마음은 황폐해져 갔습니다.

 

사실, 수전을 향한 이비의 사랑, 집착, 원망, 아쉬움은

세상을 향한 이비의 혼란스러운 감정을 고스란히 반영하고 있습니다.

이혼한 부모를 증오하고, 통제된 기숙학교를 거부하고, 자신을 내친 친구를 원망하면서도

그 대척점에 서있는 자유로운 수전에게도 모든 것을 걸 수 없는 이비의 혼란은

그녀가 아직 어른이 되지 못한’ 10대 소녀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보수적인 가족주의가 지배적 가치관으로 작동하면서도

동시에 반전, 히피, 폭력, 약물이 범람하던 1969년의 미국의 사회상에 기인하기도 합니다.

이 작품이 단지 철없는 소녀의 불장난 이야기가 아니라

사회적 맥락에서 읽히게 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 때문입니다.

 

이비의 삶을 가장 아이러니하게 만드는 사건은

이젠 중년이 된 이비가 10대 시절의 자신을 꼭 빼닮은 새셔라는 소녀를 만난 일입니다.

더구나 자신이 수전 일당의 광란의 살인극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알곤

일종의 경외감까지 드러내는 새셔를 지켜보는 일은 이비에겐 너무나도 힘든 일입니다.

그러다 보니 새셔를 통해 과거를 되돌아보며 회한에 젖는 이비를 지켜보는 독자 역시

무척이나 안쓰럽고 애틋한 마음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10대를 먼 옛날의 이야기로밖에 떠올릴 수 없는 나이의 독자라 하더라도 말입니다.

 

사족으로 아쉬움 한 가지만 지적하자면,

원작과 번역 중 어느 쪽에 기인한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쉽게 읽히지 않는 문장들과 수식이 과한 문장들이 종종 눈에 띄었습니다.

400페이지 정도의 분량임에도 마지막 장까지 꽤 오랜 시간이 필요했던 것은

몇 번씩 되읽어도 그 의미가 잘 이해되지 않거나,

수식과 비유가 너무 지나쳤던 문장들 때문이었습니다.

사건이 아니라 심리를 더 강조한 작품인 점을 감안하더라도

난독은 비단 저만의 경험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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