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증명 - 추억이 만들어지는 시간 증명 시리즈
정석화 지음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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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서울경찰청 보안 4는 경찰이면서 경찰이 아닌 독립적인 조직입니다.

경찰청장은 물론 국정원 등 그 누구의 지시도 받지 않으며 고유의 임무를 수행할 뿐입니다.

그들의 목표는 프레데터, 즉 인간사냥꾼이라 불리는 특급 연쇄살인마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수사 과정에 기괴한 살인사건들이 끼어들면서 수사는 혼선을 겪게 됩니다.

장기가 모두 사라진 채 살해된 사람들,

참혹하게 토막살해 됐지만 피 한 방울 발견되지 않은 변사체들,

지문과 기억이 사라진 채 외진 국도에서 발견된 여자,

그녀를 보호하면서 사랑에 빠지지만 그로 인해 보안 4과에 의해 프레데터로 지목받는 남자...

밑그림이 다른 수많은 퍼즐 조각들이 한데 뒤섞인 것처럼 혼돈 그 자체이던 인물과 사건들은

수사가 진행되면서 점차 그 끔찍한 악연의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 ● ●

 

제가 봐도 참 모호한 줄거리입니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모티브를 공개적으로 언급할 수 없다 보니

이렇게 앞뒤 맥락도 없는 어정쩡한 줄거리가 나오고 말았습니다.

 

사실 그 모티브를 언급한다 하더라도 이 작품의 인물과 사건은

일반적인 서평을 쓰기에는 거의 곤란할 정도로 무척 복잡한 구조를 지니고 있습니다.

인물의 경우 크게 보면,

프레데터를 쫓는 보안 4과의 멤버들,

지문과 기억을 잃은 채 사라라는 이름을 불리게 된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게 됐지만 그로 인해 보안 4과의 레이더에 걸린 중혁,

보안 4과가 쫓는 프레데터와 거대한 어둠의 조직등으로 나눌 수 있는데,

이들이 쫓거나, 연루되거나, 일으키는 사건들은 단지 현재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수십 년 전의 비극과도 닿아 있어서 이야기 구조를 더욱 복잡하게 만듭니다.

 

단순히 겉멋을 부리기 위해 뒤엉키게만든 수준이 아니라,

어떻게 이렇게 연결시킬 생각을 했을까?”라는 감탄이 나올 정도로

정교하고 빈틈없이 설계됐다는 뜻입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뒤엉킨 가닥들이 하나씩 풀리면서 일으키는 반전들은

(때론 작위적인 대목도 분명 있지만) 단순한 반전 이상의 느낌을 전해주기도 합니다.

특히 인물들의 관계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밝혀지는 부분은 압권이었습니다.

또한 더는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기 어려울 것 같은 소재임에도 불구하고

전작들과는 다른 낯선 방식으로 접근한 참신한 아이디어도 호평을 받을 만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아쉬운 부분도 분명 있습니다.

사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가장 힘든 부분은 초반부입니다.

인물 소개나 사건 묘사 과정에서 조금은 설익은 느낌의 문장들이 툭툭 튀어나오기도 했고,

국정원도 못 건드린다는 보안 4과 멤버들의 수준은 평범한 형사와 별 다를 바 없었으며,

별로 중요하지도 놀랍지도 않은 상황에 대해 작가 혼자 심각해하는모습이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의 스케일을 키우기 위한 전략이었겠지만

중후반부에 밝혀지는 어둠의 조직의 실체라든가 일부 인물들의 정체 폭로 과정 역시

작위적이거나 허술해 보인 것은 물론 지나치게 과대 포장된 나머지 현실감을 잃었습니다.

종합하자면, 아이디어와 구성은 훌륭한데 그것을 글로 구현하는 과정이 부족했다고 할까요?

 

소재라든가 문장에 대한 취향 때문에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겠지만,

몇몇 약점들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인 면에서는 분명 장점이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작가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춤추는 집을 아직 읽지 못했는데

어떤 번득이는 아이디어가 담긴 작품일지 일단은 궁금해집니다.

한국추리문학상 대상까지 받은 작품이라니 더욱 기대가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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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나지 않는 여름 스토리콜렉터 43
넬레 노이하우스 지음, 전은경 옮김 / 북로드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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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품은 2015년에 출간된 여름을 삼킨 소녀의 후속작입니다.

여름을 삼킨 소녀가 세 번의 여름을 거치는 동안 무자비하고 잔혹한 성장통을 겪었던

셰리든 그랜트에게 나름 희망을 품은 엔딩을 주며 마무리됐다면,

끝나지 않은 여름은 제목에서 연상되는 그대로 여전히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

셰리든의 그 후의 이야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 ● ●

 

셰리든은 사랑하는 가족들과 그랜트 저택을 뒤로 한 채

끔찍한 유년의 추억만을 남겨준 고향 페어필드를 떠나 뉴욕으로 먼길을 떠납니다.

하지만 그녀가 떠난 직후 그랜트 저택에서 끔찍한 총기살인사건이 벌어집니다.

네 명이 죽고 두 명이 큰 부상을 입은 그 사건으로 인해 셰리든은 경찰에 체포됩니다.

남자에 환장한 창녀, 근친상간을 일삼은 미성년자 등 갖은 오명을 쓴 채

그랜트 저택으로 돌아온 셰리든은 또다시 악몽 같은 나날들을 보내게 됩니다.

우여곡절 끝에 겨우 그랜트 저택을 빠져나올 수 있었지만

신은 그녀에게 결코 순탄한 삶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끔찍한 만남과 이별, 폭력과 도주, 노숙에 가까운 참담한 생활 등

셰리든은 제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지옥과도 끝나지 않는 여름을 겪게 됩니다.

 

● ● ●

 

전작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지 않은 독자라도 대략의 정황을 이해할 수 있도록

넬레 노이하우스는 친절한 설명을 곳곳에 배치해놓았지만

사실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지 않은 독자는 셰리든과 그 주변 인물들에게

감정적으로 이입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왜 셰리든은 홀로 멀고 먼 뉴욕으로 떠나려 했던 것인가?

그랜트 집안에서 벌어진 총기살인사건의 실체와 동기는 무엇인가?

또다시 집을 떠난 셰리든이 미국 전역을 떠돌며 갖은 고생을 감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왜 그녀에게는 제대로 된 친구, 제대로 된 사랑이 찾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녀는 왜 자꾸 같은 실수를 반복하고, 같은 오판을 반복하는가?

 

아마 여름을 삼킨 소녀를 건너뛰고 이 작품을 먼저 읽은 독자는

이런 모호한 의문들과 더불어 셰리든을 이상한 소녀로 오해할 가능성이 높을 것입니다.

또 셰리든 가까이에서 애증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인물들의 진심이나 속내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정이 허락한다면 여름을 삼킨 소녀를 읽은 후에 이 작품을 읽으시기 바랍니다.

 

미성년자인 채 작품에 등장한 셰리든은 작품 말미에는 21살에 이릅니다.

페어필드와 그랜트 저택을 떠난 후 그녀는 겨우겨우 삶을 이어가며 많은 사람들을 만납니다.

하지만 셰리든에게 좋은 사람을 만나는 행운 따위는 여전히 주어지지 않습니다.

소녀 시절에도 그랬듯 그녀 주위엔 겉과 속이 다르거나, 포악하거나,

그녀의 몸을 탐내기만 할 뿐인 저속하고 나쁜 사람들로 가득합니다.

 

그녀의 여정을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무척이나 마음이 무거워집니다.

성장통이라 치부하기엔 너무 가혹하고, ‘픽션이니까하고 넘기기엔 너무 리얼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넬레 노이하우스가 셰리든을 무조건 보호받아야 하고

동정 받아야 할 캐릭터로 그린 것은 아닙니다.

그녀는 늘 손가락질 받는 사랑, 허락되지 않은 사랑,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에만 집착했고,

이전의 사랑에서 배운 교훈을 깡그리 무시하고 늘 감정이 가는 대로 자신을 내맡겨왔습니다.

언제나 온몸에 가시를 곤두세운 채 기꺼이 싸움을 받아들였고,

때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하기도, 진실을 은폐하기도 해왔습니다.

그런 그녀가 조금씩 자기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고, 보호할 줄 알게 되면서 성장하는 과정이

끝나지 않은 여름의 큰 줄기입니다.

 

후반부에 이르러 그녀 스스로 이렇게 자기 암시를 겁니다.

네 행복은 네 손에 달려 있어. 목표를 세우고 그걸 따라가. 언젠가는 이루어질 테니!”

굉장히 상투적이고 진부한 자기 암시입니다만,

여름을 삼킨 소녀부터 셰리든을 지켜봐온 독자 입장에선

이 상투적이고 진부한 말이 셰리든의 입에서 나왔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가슴이 뭉클해집니다.

과연 셰리든이 행복을 이루어내는지는 마지막 페이지까지 읽어야 알 수 있겠지만 말입니다.

 

아쉬운 점이라면...

롤러코스터 같은 스토리가 강점이었던 여름을 삼킨 소녀가 본방이었다면

끝나지 않은 여름은 그 인기에 힘입어 긴급 편성된 스페셜같은 느낌이었다는 점입니다.

초반 총기살인사건 직후 셰리든이 그랜트 저택에서 고난을 겪을 때만 해도 몰입도가 높았는데

그녀가 저택을 떠난 후로는 약간은 동어반복 같은 느낌을 자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인지 여름을 삼킨 소녀를 다시 한 번 읽고 싶다는 생각이 여러 번 들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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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45
우타노 쇼고 지음, 권남희 옮김 / 비채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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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지방 소도시의 대형 슈퍼마켓 보안책임자 히라타 마코토는

어느 날 물건을 훔치는 이십대 여성 스에나가 마스미를 붙잡는다.

평소라면 이유 불문하고 바로 경찰에 넘기겠지만,

신분증을 확인하고는 웬일인지 마음이 움직여 좀도둑을 눈감아주게 된다.

이 사건을 계기로 두 사람은 친구가 되고, 서로의 마음속 얘기를 털어놓는다.

하지만 두 사람을 잇는 운명의 실타래는 잔혹한 결말로 치닫는데...

(출판사 책소개를 수정, 인용하였습니다)

 

● ● ●

 

우타노 쇼고의 작품이라는 타이틀은 그 자체로 많은 선입관을 줍니다.

아마 그중에서도 반전이 끝내주는 미스터리라는 기대 섞인 선입관이 가장 클 것입니다.

번역하신 권남희 님의 후기를 보면 이 작품의 일본 원서 띠지에는

마지막 5페이지에서 세계가 반전한다!”라는 자극적인 카피가 있다고 합니다.

우타노 쇼고의 반전 섞인 미스터리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고조시킬 대목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런 기대감에 고양된 독자들에겐 약간의 배신감(?)만 던져줄 뿐입니다.

중후반부까지 이 작품의 메인 스토리는 비극적인 사고로 가족을 잃은 뒤

허무감에 빠져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한 중년 남성의 자조 섞인 독백 같기 때문입니다.

분명 어디쯤인가부터는 우타노 쇼고의 진면목이 등장할 것 같은데

분량이 얼마 남지 않은 지점까지도 도무지 반전과 미스터리의 흔적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원서의 띠지대로 마지막 5페이지를 남겨놓고서야 우타노 쇼고 식 반전이 급전개됩니다.

다만 이전의 작품들과 다른 점이라면 깔끔하게 뒤통수를 치는 반전이 아니라,

마음을 무척이나 착잡하게 만드는 양날의 검 같은 반전을 선사했다는 점입니다.

우타노 쇼고 스스로도 인터뷰를 통해 이 특이한 반전에 대해 고백하고 있습니다.

 

보는 각도에 따라 어느 쪽일 수도 있는 결말을 시도해보았습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반응을 기다리는 저의 감정 역시 이렇기도 하고 저렇기도 합니다.

저는 즐거운 것일까요, 두려운 것일까요?”

 

과거의 비극에 얽매여 현재를 포기한 채 살아가는 중년 남자가

어느 날 눈앞에 나타난 딸 또래의 여자를 만나 잠시 온기를 회복하지만,

그 애틋한 인연이 우연과 운명에 의해 악연으로 변질된다는 스토리는

사실 상투적이다 못해 평범하고 빈약하기 이를 데 없는 클리셰입니다.

하지만 우타노 쇼고는 거기서 딱 한발을 더 나아갑니다.

, 독자들이 .. 그렇게 된 스토리군.’하며 마음을 놓을 즈음

예상 밖의 전개를 통해 뒤통수를 치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 어느 쪽도 옳다고 할 수 없는 딜레마를 툭 던져놓은 채 이야기를 마무리함으로써

독자에게 깊고 진한 여운을 남겨놓습니다.

그제야 , 우타노 쇼고답군!’이라는 안도(?)가 천천히 밀려들어옵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책을 막 덮었을 때보다 하루나 이틀쯤 지난 뒤에

진짜 여운과 먹먹함이 찾아온다는 점입니다.

비밀과 거짓말, 오해와 회한, 돌이킬 수 없는 시간 등

히라타와 스에나가를 힘들게 한 그 모든 것들이

마치 나의 일인 것처럼, 내 가까운 사람의 일인 것처럼 느껴지면서 말이죠...

 

개인적으로는 그의 작품 중 집의 살인 시리즈밀실살인게임등의 미스터리보다

늘 그대를 사랑했습니다’, ‘세상의 끝, 혹은 시작을 좋아하는데,

담백하거나 또는 심연 같이 어두운 사람의 마음을 잘 포착한 서사가 좋았기 때문입니다.

봄에서 여름, 이윽고 겨울역시 좋아하는 목록 상단에 오르긴 하겠지만,

유일한 아쉬움이라면 앞부분의 장황하고 중복되는 묘사를 줄여

중편 정도로 발표했더라면 훨씬 더 단단한 작품이 됐을 것이라는 점입니다.

꽤 오랫동안 책장에서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작품이었는데,

마침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지는 가을에 읽은 덕분에 더욱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사족으로..

우타노 쇼고의 반전이 끝내주는 미스터리를 기대했다가 실망한 독자들을 위해

번역하신 권남희 님의 후기 중 한 대목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할까 합니다.

 

소설을 읽을 때는 작가에 대한 아무 선입견 없이, 작품에 대한 희망사항 없이,

머릿속을 깨끗이 비운 상태에서 읽는 게 좋지 않을까 싶다.

띠지의 카피 따위 당연히 무시하고.

나는 (중략) 우타노 쇼고에 대해 아직 그닥 정통하지 않아서인지,

뭐 이렇게 재미있는 소설이 다 있나 하며 진심으로 즐겁게 작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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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아드네의 탄환
가이도 다케루 지음, 권일영 옮김 / 예담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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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환자들의 하소연 들어주기가 주된 업무인 도조대학병원 신경내과의사 다구치 고헤이는 언제나처럼 다카시나 원장의 꼬임에 넘어가 신설되는 Ai(사후 화상 진단)센터의 센터장으로 임명된다. 방사선을 통한 사체 훼손 없는 해부 방식인 Ai를 도입하자는 취지로 설립되는 Ai센터. 그러나 이를 막으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은 도조대학병원에 위협을 가하며 음모를 꾸민다. 그러던 중 병원 내에서 의문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고, 다카시나 원장이 뇌물 수수와 살인 용의자로 체포된다. 다구치의 초대로 Ai센터 옵서버로 참여한 후생노동성 서기관 시라토리는 다구치를 도와 Ai센터를 무력화하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의 음모를 밝혀내는 것은 물론 살인사건의 진상과 진범 찾기에 앞장선다. (출판사 소개글을 일부 수정 후 인용했습니다.)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일본출간 기준) 여섯 번째 작품입니다. 최근에 읽은 가이도 다케루의 작품은 (이 시리즈가 아닌) ‘나니와 몬스터였는데, 관료체제와 사법기관에 대한 작가의 과도한 증오심과 의료입국에 관한 혁명적이고 무모한 이상론에 심하게 질렸던 터라 도조대학병원 무대로 한 다구치-시라토리 콤비의 신작이 너무나 반가웠습니다.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 ‘나이팅게일의 침묵’, ‘제너럴루주의 개선으로 이어진 시리즈는 메디컬과 미스터리가 매끄럽게 조합된 매력적인 이야기들이었고, 이번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이 가장 기대된 게 사실입니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이 작품은 기존의 다구치-시라토리 콤비의 메디컬 엔터테인먼트에 나니와 몬스터의 주제인 의료입국사법에 대한 의료의 우위가 혼재된 이야기입니다. , 가이도 다케루는 의료체계를 자신들의 발밑에 두려는 경찰과 사법기관의 만행(?)을 고발하면서 투명하고 공정한 사인 검사를 위해 Ai라는 독립된 시스템을 강조합니다.

양측의 입장을 요약하면, 경찰과 사법기관은 자신들이 관장하는 메스를 이용한 사법 해부가 최우선이며, 도조대학병원의 Ai는 보조적 역할에 그치되 반드시 경찰이 통제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하지만 도조대학병원은 사법 해부가 경찰의 입맛에 맞게 조작될 수 있다는 주장과 함께 메스 없이도 사인을 밝힐 수 있는 Ai를 병원이 독립적으로 관할해야 한다고 반박합니다.

그 과정에서 도조대학병원과 Ai시스템을 붕괴시킬 계획을 세운 경찰 내 과격파는 Ai센터 준비위원회에 부센터장 자격으로 참여하면서 음모를 진행시킵니다. 한편, Ai센터장인 다구치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시라토리를 비롯하여 Ai시스템의 능력자들을 병원으로 끌어들이지만 병원 내에서 연이은 살인사건이 벌어지면서 위기에 봉착합니다.

 

의료와 사법의 갈등과 대립이 전반부라면, 시라토리가 이끄는 미스터리 해법이 후반부인데 분량상으로도 딱 1/2씩 할애됐습니다. 말하자면 전반부는 나니와 몬스터의 재판(再版) 같았고, 후반부는 앞선 다구치-시라토리 시리즈의 전형이었습니다.

경찰의 통제 하에 이뤄지는 메스를 통한 사법 해부와 의료진에 의해 독립적으로 운용되는 Ai 간의 논쟁은 어느 쪽이 더 합리적이고 정의에 가까운지 판정 내리기 어려울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됩니다. 작가의 노선은 너무나도 명확해서 경찰과 사법기관을 으로 규정하고 있지만, 독자 입장에선 때론 경찰과 사법기관의 주장이 옳은 것 같기도 하고 때론 경찰의 통제를 벗어난 Ai가 정의롭게 보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속도감과 긴장감을 겸비했고, 밀실과도 같은 MRI실에서 벌어진 사건은 끝까지 진상을 예측하기 어려웠습니다. 주인공 다구치가 상대적으로 무력해 보인 점만 빼곤 캐릭터의 매력 역시 생생했습니다. 시라토리의 괴물 같은 추진력과 추리는 전광석화와도 같았고, 다구치가 끌어들인 Ai 진영은 소위 능력자들로 구성된 지구방위대같았습니다. 덕분에 한 번도 쉬지 않고 한나절 만에 마지막 장까지 달릴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니와 몬스터의 트라우마(?)를 떠올리게 한 의료 사법의 과도한 갈등 묘사 때문에 애초의 기대감이 제대로 충족되진 못한 게 사실입니다. 물론 병원 내에서 벌어지는 암투나 갈등에 머물지 않고 첨예한 사회적 문제를 끌어들인 가이도 다케루의 의도는 충분히 이해되지만, 어딘가 다분히 작위적인, 그래서 목적극 같은 냄새가 진하게 풍겼기 때문입니다. , 앞서 언급한대로 Ai 시스템이 왜 필요하며, 왜 사법 해부보다 정의로운 방법인지에 대해 독자를 완벽하게 설득하지 못한 점은 초반부의 책읽기를 난해하게 만든 주된 원인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이전 작품들에 비해 그 캐릭터가 왜소해진 다구치가 안쓰러웠고, 시라토리의 추리는 슈퍼울트라 급으로 폭주한 것이 오히려 비현실적으로 보였습니다. 두 주인공이 너무 극과 극의 위치에서 이야기를 끌어갔다고 할까요?

 

아마도 가이도 다케루의 신작이 나온다고 하면 여지없이 찾아 읽을 것 같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도조대학병원 안에서 벌어지는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를 기대하고 싶습니다. 병원을 둘러싼 사회적 문제를 소재로 삼는 것은 두 손 들어 환영할 일이지만, 이젠 가이도 다케루가 경찰 및 사법기관과 더는 각을 세우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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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쟁이가 사는 저택 밀리언셀러 클럽 - 한국편 32
황태환 지음 / 황금가지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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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성 왜소증 환자인 성국은 좀비로 인해 세상이 멸망한 뒤

자신이 근무하던 병원 건물에 갇힌 채 1년째 힘겹게 생존을 이어가고 있다.

사방이 좀비에게 둘러싸인 상태에서 무엇보다 식량이 가장 큰 문제였는데,

어느 날, 추락한 구조 헬기의 생존자들이 병원 건물로 들어오면서

먹고 사는 문제가 좀비보다 더욱 큰 위기를 불러일으키게 된다.

절체절명의 상황에서 목숨을 빚졌으면서도 사람들은 작은 체구의 성국을 무시하고 깔보지만

이내 그가 식량의 루트인 좁은 통로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인물이란 걸 파악하곤

그에게 모든 권력을 넘겨주고 복종하게 된다.

하지만 점차 먹는 입이 늘어 가고, 생존자들의 갈등이 원시적인 폭력으로 발현되면서

식량을 움켜쥐고 있던 성국의 권력은 위태로워진다.

 

● ● ●

 

좀비를 소재로 한 작품이지만, 좀비 자체보다는 위기에 처한 인간 군상들의 다양한 민낯,

즉 공포에 잠식당한 상태에서 권력과 폭력, 배신과 거짓말로 자신만의 생존을 갈구하는

그야말로 날것 그대로의 본능의 밑바닥을 그린 작품입니다.

물론 병원 건물에 갇힌 인물들을 공포와 위기로 몰아넣은 외부의 적은 좀비였고,

좀비를 상대로 한 처절한 싸움이 간간이 그려지긴 하지만,

그보다 더 절실한 문제는 식량을 구하고, 허기진 배를 채우는 것이었습니다.

좀비에게 먹히기 전에 굶어 죽을 가능성이 훨씬 높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먹는 문제가 인간을 본능의 수준에서 서로 투쟁하도록 부추겼던 것입니다.

 

주인공인 성국은 왜소한 체구 때문에 세상이 멸망하기 전이나 현재나

주위 사람들에게 무시당하고 폭력에 속수무책으로 노출되는 인물입니다.

그 덕분에 소심하고 내향적인 인물이었던 그는 선의로 많은 사람들을 구해주지만

막상 좀비의 이빨에서 벗어난 자들은 언제 그랬냐는 듯 성국을 괴롭히기 시작합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작은 체구 덕분에 유일하게 식량을 구해올 수 있는 인물로 판명나자

사람들은 성국 앞에 무릎 꿇게 되고, 그는 일약 권력자로 발돋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권력은 수시로 요동치면서 성국에게 안락함과 위기를 번갈아 전해주곤 합니다.

 

처음엔 왜 주인공 성국을 굳이 왜소증 환자로 설정했는가, 싶었는데

작가는 여러 국면을 통해 성국의 왜소증을 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왜소증은 성국의 심신을 피폐하게 만들지만, 동시에 유일한 생존 무기가 되기도 합니다.

또 소심하고 내향적이던 그가 식량을 매개로 권력을 쥔 뒤

복수심에 사로잡힌 캐릭터로 변해가는 과정 역시 왜소증 덕분에 설득력을 얻게 됩니다.

그가 상대하는 인물들은 모델처럼 잘 빠진 바람둥이, 신체 건장한 군인,

자기 살 길만 모색하는 엘리트, 간호사였던 미녀 등 왜소증과는 대척점에 선 인물들입니다.

그래서인지 성국이 복수심에 사로잡힌 지독한 이기주의자로 변모하는 과정은

통쾌하면서도 때론 애틋한 마음까지 갖게 만들곤 합니다.

 

영상이든 문학이든 좀비라는 소재와 별로 친하지 않은 취향임에도 불구하고

아이러니와 반전을 통해 인간의 민낯을 그린 매력적인 설정 덕분에

(분량도 길지 않아서) 책을 편 뒤 한 번에 끝까지 읽을 수 있었습니다.

 

한 가지 아쉬움이라면, 약간은 거칠고 투박한 문장들이 자주 목격된다는 점입니다.

성국이 위기를 모면하는 장면은 때론 너무 쉽고 안이하게 처리되고,

일부 인물의 캐릭터가 변하는 장면 역시 개연성이 부족한 경우가 종종 보였습니다.

전체적으로 뼈대만 있고 살집은 허약하다는 느낌을 받은 것을 보면

작가의 문학적 고민이 부족하지 않았나, 라는 생각을 피할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인지 매력적인 소재와 뛰어난 구성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의 깊이는 얕고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여러 면에서 영상화의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좀비에게 둘러싸인 채 폐허가 된 병원이라는 밀폐된 공간에서

여러 인물이 본능에 따라 서바이벌 게임을 벌이는 듯한 설정은

비주얼 면에서 꽤나 매력적이기 때문입니다.

아직 보지 못했지만 영화 부산행의 성공을 비춰보면

조만간 이 작품의 영상화 소식이 들려올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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