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의 구애 - 2011년 제42회 동인문학상 수상작
편혜영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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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혜영 순서대로 읽기를 시작한 게 2014년인데,

이제 세 번째 작품을 읽었으니 꼭 1년에 한 편씩인 셈입니다.

사실 출간 순서대로 치면 저녁의 구애전에

장편 재와 빨강이 있지만 어떻게 하다 보니 순서가 바뀌었습니다.

두 번째 단편집인 사육장 쪽으로아오이 가든에 비해 순화(?)된 느낌을 줬다면,

저녁의 구애는 좀더 일상성이 강조된, 즉 좀더 현실적인 이야기로 구성돼있습니다.

 

캐릭터 면에 있어서는 사육장 쪽으로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주인공들은 어딘가 마이너의 성향이 강하거나 또는 일부 문제적 인간들로 보이지만

실은 상실감과 익명성, 단절과 고립이 몸에 배어버린 대다수 현대인의 자화상입니다.

어느 쪽이 됐든 그들은 그 뒤로도 여전히 불행할 것이 분명하다.”는 암울한 인상을 남깁니다.

사육장 쪽으로의 인물들은 닭장이나 사육장처럼 도망칠 수 없는 갇힌 환경에 처한 채

출구 없는 먹먹한 삶을 살다가 잠시 희망에 들떠 모종의 일을 벌이지만

어이없는 실수로 망가지거나 진창을 헤매며 끝없는 늪으로 사라져버립니다.

그에 비해 저녁의 구애의 인물들은 오전과 다를 게 없는 오후, 어제와 다를 게 없는 내일 등

다람쥐 쳇바퀴 같은 동일성의 지옥에 빠진 채 무의미한 현재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수록작 동일한 점심

이런 주제 의식을 가장 선명하고 이해하기 쉬운 텍스트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지하 복사실을 운영하는 는 매일 정오 구내식당에서 늘 비슷한 메뉴로 점심을 해결합니다.

매일 아침 똑같은 시간의 전철을 타고, 새로울 것 없는 복사로 하루를 보냅니다.

누구도 에게 복사에 관한 주문 외엔 말을 건네지 않으며,

역시 누구에게도 2m 이내의 거리를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런 그의 복사된 일상을 깨뜨리는 사건이 벌어진 날, 그는 패닉 상태에 빠집니다.

 

그 외에도 매일 무의미한 서식만 작성하는 남자 (토끼의 묘),

낯선 도시에서 길을 잃고 계속 같은 자리로 돌아오는 남자 (정글짐),

컨베이어 벨트 앞에서 기계적으로 통조림을 밀봉하는 사람들 (통조림 공장)

소통과 관계가 단절된 채 동일하게 반복되는 복사된 삶에 매몰된 인물들의 비극은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특이하고 이상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더는 아닙니다.

물론 누군가는 내겐 미래가 있고, 지금의 삶 역시 변화무쌍하며 의미 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야말로 특별한 소수아닐까요?

그런 면에서 저녁의 구애아오이 가든에 비해 한층 순화된 듯 보이지만

현실을 직시하는 면에 있어서는 오히려 더 많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작품집입니다.

 

동일하게 복사되는 무의미하고 반복적인 삶저녁의 구애의 대표 정서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의반, 타의반으로 찾아온 불행을 다룬 작품들도 눈에 띕니다.

반복적이고 무의미하지만 나름 무탈하게 유지돼온 일상들은

입과 귀로 파고드는 하루살이 떼, 내 곁에서 벌어진 갑작스런 자살이나 실종이나 교통사고,

낯선 이국땅에서 길을 잃은 당혹감, 사소한 자동차의 고장 등에 의해 순식간에 파열됩니다.

상사의 지시에 따라 정체불명의 자루를 운반하는 두 남자의 이야기 (관광버스를 타실래요?),

세든 집의 덩치 큰 개, 불온한 숲의 멧돼지의 울음, 만삭의 아내에게 둘러싸인 남자 (산책),

본사 발령을 받고 서울로 오는 길에 폭우와 폭력에 노출된 남자 (크림색 소파의 방)

전작인 사육장 쪽으로의 수록작들을 연상시키는 작품들이 그것입니다.

 

말미에 수록된 평 가운데 저녁의 구애의 두 가지 미덕을 한마디로 잘 정리한 대목이 있는데,

편리하고 안온한 일상이 소름 끼치는 불안과 암흑,

그리고 끝 모를 공포로 탈바꿈해가는 순간을 집요하게 파고든다.”라는 부분입니다.

편혜영의 작품들이 서사의 힘과 현실감을 동시에 획득하는 이유를 잘 설명한 평이 아닐까요?

 

다만, 몇몇 작품에서는 이런 주제의식을 위해 다분히 의도적으로 설정된 장치들 때문에

오히려 현실감보다는 작위적인 느낌, 즉 멋을 부린 듯한 개운치 않은 느낌도 받게 됩니다.

또 누군가의 분석이나 설명 없이는 작가의 의도를 납득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습니다.

전작에서도 이런 느낌은 분명 있었지만,

저녁의 구애의 경우 전작보다 현실감이 강한 수록작들이 많아서 그런지

역설적으로 위화감 역시 강하게 느껴진 탓일 수도 있습니다.

 

1년에 한 편 꼴로 읽고 있는 상황에서 편혜영의 다음 작품을 언제쯤 읽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조금씩 색깔을 바꿔 가며 독자를 당혹시키는 그녀의 글이

다음 작품에선 어떤 모양새로 제 앞에 나타날지 궁금해집니다.

기대 반, 우려 반의 심정으로 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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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드 트랙 발란데르 시리즈
헨닝 망켈 지음, 김현우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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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뛰어난 스펙이나 추리력보다는 성실함과 진정성이 돋보이는 평범한 수사반장발란데르는

스웨덴 남부 말뫼에서 위스타드에 걸쳐 벌어지는 끔찍한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됩니다.

누군가 도끼로 희생자들의 머리를 쪼갠 뒤 머리가죽을 벗겨가는데

희생자들 대부분은 부패하고 부정한 부와 권력을 누렸던 고령의 인물들이지만

딱히 어떤 연결고리가 있다고 볼 수 없다는 점이 발란데르의 가장 큰 고민입니다.

그 와중에 전혀 다른 성격의 희생자가 등장하면서 수사는 미궁에 빠집니다.

연쇄살인사건들이 일어나기 직전 우연히 목격하게 된 유채밭 소녀 분신자살은

발란데르의 머릿속 한구석에 불편하게 남아 수사에 전념하는 것을 방해하기도 합니다.

 

사건만으로도 숱한 불면의 밤을 보내야 하는 발란데르에게는

재혼을 꿈꾸는 상대 바이바, 예민한 시기의 딸 린다,

치매 징조를 보이기 시작한 고령의 아버지 등 개인적인 문제까지 산적해있습니다.

또한 중년의 우울함과 경찰로서의 피폐한 삶에 회의까지 몰려와

발란데르는 짓눌린 듯한 압박감 속에서 사건수사에 임하게 됩니다.

무수한 탐문과 과학수사, 프로파일링까지 동원한 발란데르의 집념 덕분에 사건은 해결되지만

사건의 이면에는 발란데르를 또다른 절망에 빠뜨리는 비참한 진실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 ● ●

 

스웨덴 작가 헨닝 망켈의 10편의 발란데르 시리즈가운데 5번째 작품입니다.

인터넷 서점을 찾아보니 과거에 여러 출판사에서 6편의 작품이 출간됐는데

지금은 대부분 절판 상태이고 웅진에서 새롭게 시리즈 출간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처음 만난 작품이 시리즈 5번째 작품이다 보니

주인공인 발란데르의 과거사라든가 캐릭터에 한껏 몰입하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적잖은 분량에 할애된 그의 개인사덕분에

발란데르가 어떤 삶을 살아왔고,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 파악하긴 어렵지 않았습니다.

특히 혹독한 형사로서의 삶을 살아온 45세의 중년남자가

아버지, , 이혼한 아내, 새로 만난 연인 등 가까운 인물들과 유지하고 있는 불안정한 관계,

또 자신을 신뢰하는 동료, 선후배들과 나누는 업무적인 관계 등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를 통해

처음 만난 주인공임에도 불구하고 친숙함과 안쓰러움을 함께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사건 자체는,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심플한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자신의 가족을 파괴한 부당한 권력과 폭력에 대한 복수심,

그리고 그 복수심이 자아낸 다분히 사이코패스적인 연쇄살인이 주축인데,

작가는 초반부터 범인의 정체와 동기를 고스란히 드러내놓고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자연히 이야기는 반전보다는 심층묘사, 결과보다는 과정, 외양보다는 심리에 방점이 찍히는데

이런 심플한 구조는 독자에 따라 호불호가 갈릴 수도 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작가는 곳곳에서 복지국가 스웨덴의 참담한 민낯이라든가, 까마득히 벌어진 빈부 격차,

지독한 개인주의와 이기심이 빚어낸 일그러진 폭력의 실상 등을 묘사하는데

사건 자체와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지점이 부족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작품 성격을 강조하기 위해 동원된 작위적 설정처럼 느껴집니다.

부당하게 권력과 부를 손에 넣은 자들이 자신들의 과오 때문에 살해되고,

등장인물 대부분이 외롭게 혼자 살거나 복지와는 거리가 먼 삶을 영위하고 있지만

그런 설정을 연쇄살인사건의 사회적 배경이라고 칭하기엔 곤란하다는 생각 때문입니다.

 

오히려 이 작품의 매력은 사건과 수사보다는 발란데르의 캐릭터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산전수전 다 겪은 닳고 닳은 중년의 형사 발란데르는

이전에 접한 몇몇 같은 연배의 주인공들과 겹치는 상투적인 면모를 갖고 있으면서도

훨씬 더 사실적인, 즉 실제 존재할 것 같은 매력을 지닌 인물입니다.

일과 가족과 사랑에 치여 우울한 중년의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그는 알코올중독자도, 비관주의자도, 무기력증에 빠진 환자도 아닙니다.

오히려 미련하게 보일 정도로 자신 앞에 닥친 문제들을 진지하게 대합니다.

열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그의 성실함과 진정성은 작품 내내 돋보입니다.

 

그래선지 번역가 김현우 님 역시 미련한 남자의 초상이라는 부제를 단 옮긴이의 말을 통해

대부분 발란데르의 캐릭터에 대해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중에서도 발란데르를 좋아할 수밖에 없는 이유100% 공감 가는 대목이었습니다.

 

자신감 없고, 정답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포기하지 않았다는 것.

계속 옆으로 새면서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 힘을 다해 자신을 던지고 있다는 것.

부담스럽다는 이유로, 그래서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을 가지면서도

손을 놓아버린다면 자신이 지키고 싶은 어떤 가치를 저버리는 것이기에 차마 놓아버리지 못하는 마음.“

 

사실 스릴러에서 주인공의 캐릭터가 사건의 재미를 능가하는 경우가 종종 있긴 하지만,

발란데르는 유독 그런 면에서 압도적인 캐릭터가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래서 설령 스릴러로서의 미덕이 조금 아쉽게 느껴질지라도

사이드 트랙앞의 4개의 작품은 물론 이후의 5작품이 기대되고 궁금해지는 것 같습니다.

물론 어둡고 무거운 주인공 캐릭터를 500페이지 넘게 감내하며 읽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지만 어설프게 잔혹함과 폭력만을 내세우며 허술한 캐릭터 플레이를 하는 작품들보다는

(씁쓸하든 촉촉하든 기운을 북돋든) 이런저런 여운을 남기는 작품이 더 매력적이지 않을까요?

그런 면에서 발란데르 시리즈가 앞으로도 계속 출간됐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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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HhH
로랑 비네 지음, 이주영 옮김 / 황금가지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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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단, 메인 줄거리를 짧게 요약하자면...

독일 나치 친위대 정보기관의 책임자이자 유태인 말살 계획을 입안하고 추진했으며,

체코슬로바키아 총독으로 군림하며 프라하의 도살자라 불린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의 삶과

그를 제거하기 위한 체코슬로바키아 두 공수부대원의 영웅적인 암살 시도를 그린 작품입니다.

 

일단이란 단서로 줄거리를 요약한 이유는

이 작품은 앞서 언급한 이야기를 소재로 한 단순한 픽션 또는 역사소설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작가 스스로 인프라 소설이라고 지칭하기도 한 이 작품은 말하자면

실화가상의 내러티브의 조합에 작가의 생각이 가미된 소설입니다.

비유하자면, 한 편의 영화 속에 메이킹 필름이 중간중간 삽입된 상태라고 할까요?

3인칭 시점으로 2차 대전 당시의 상황이 전개되다가

느닷없이 작가의 1인칭 시점으로 돌아와 집필 과정이나 자료조사 상황이 묘사됩니다.

 

작가는 거의 강박에 가까울 정도로 픽션을 배제하려 합니다.

등장인물들의 심리상태는 물론 대화 한마디조차 실제 자료를 바탕으로 서술하려고 애씁니다.

부득이 상상력에 의존해야 할 경우 반드시 (자신이 화자가 되는) 다음 챕터에서

이것은 상상에 의한 것이다.’라고 반드시 짚고 넘어갑니다.

, 집필 도중 발견한 자료나 단서가 있으면

마치 일기장에 쓰듯 전에 쓴 것은 오류다.’라고 고백하기도 합니다.

메인 줄거리와 무관한 내용이더라도 당시 상황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에피소드가 있으면

과감하게 한 챕터를 할애하여 정보 설명을 늘어놓는가 하면,

심지어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등장시킨 영화나 소설에 대해 언급하면서

허구적으로 조작된역사적 사실에 대해 통렬히 비판하기도 합니다.

 

처음엔 이런 식의 서사가 너무 낯설어서 뭐지?’하며 의아한 느낌이 강하게 들지만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암살 스토리만큼 메이킹 필름의 재미를 맛볼 수 있게 됩니다.

그래서인지 다큐멘터리와 드라마를 합쳐놓은 듯한 인상을 받게 되는데,

덕분에 드라마의 리얼리티가 손에 잡힐 것처럼 생생하게 느껴지는 묘한 경험을 하게 됩니다.

2차 대전 발발 직전의 독일의 상황과 히틀러 후계자들의 치열한 권력투쟁,

나치에게 유린당한 체코슬로바키아의 비극과 유태인 말살 계획의 입안과정 등

그동안 피상적으로만 알고 있던 역사적 사건의 진실을 새롭게 들여다본 듯한 느낌이랄까요?

 

하지만 아무래도 엔딩만큼은 작가도 나름의 상상력을 발휘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희대의 도살자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에 대한 암살 시도가 어떻게 마무리됐는지,

, 목숨을 건 암살에 나선 체코슬로바키아의 두 영웅은 어떤 결말을 맞이하게 되는지 등

가장 극적인 부분에서는 작가 역시 상상력만으로 집필된 짧은 소설적 구성을 택합니다.

앞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온 리얼리티의 힘 때문인지

마지막 엔딩은 독자를 한순간 울컥하게 만드는 묵직한 감동을 전해줍니다.

특히 일제 강점기를 겪은 한국 독자들에게는 더욱 강렬하게 다가올 수밖에 없는 엔딩입니다.

 

줄거리를 상세하게 정리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을 것 같아

주로 형식에 대해 많이 언급한 서평이 되고 말았습니다.

하지만 내용 면에서도 2차 대전 당시의 독일의 정세라든가

히틀러와 나치 수괴들을 다룬 그 어떤 역사서나 픽션보다

긴장감과 재미, 리얼리티와 서사의 힘을 겸비한 작품임에 분명합니다.

작가의 또다른 작품으로 프랑스 대선 과정을 그린 소설이 있다는데

비밀과 거짓말, 거래와 타협, 우아함과 추악함이 공존하는 대선이라는 과정이

어떤 식으로 그려졌을지 사뭇 궁금해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족으로...

이 작품의 제목인 ‘HHhH’“Himmlers Hirn heißt Heydrich.”의 약자입니다.

직역하면 히믈러의 두뇌는 하이드리히라고 불린다.”인데,

히믈러는 당시 나치 친위대의 수장으로 막강한 권력을 휘둘렀으며,

괴링, 보르만, 괴벨스 등과 함께 히틀러 후계자 자리를 놓고 경쟁을 벌이던 인물입니다.

하이드리히는 히믈러의 오른팔이자 나치 친위대의 2인자로서

폴란드 침공, 학살 전문부대 창설, 유태인 학살 등을 자행한 실질적인 설계자였습니다.

그래서 당시 독일에서는 히믈러의 두뇌가 하이드리히라는 말이 공공연히 떠돌았던 것입니다.

그의 별명 중 하나가 독일 3제국에서 가장 위험한 사나이였던 것을 보면

‘HHhH’라는 약자는 겉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지녔던 것이 분명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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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종자 1 - 식죄 타카시로 시리즈
도바 순이치 지음, 한성례 옮김 / 태동출판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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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책장에서 한참을 먼지만 뒤집어쓰고 있던 도바 슌이치의 실종자 1’을 꺼냈습니다. 이 작품의 원제는 식죄(蝕罪, 죄로 인해 썩어 들어간 상처)인데, 우리나라에서는 잘 안 쓰는 말이라 그런지 부제로만 활용하고 본제목은 실종자 1’로 출간됐습니다.

 

45세의 경감 타카시로 켄고는 경찰청 실종자 수사과 3분실(分室) 형사입니다. 이름은 그럴 듯하지만 사실 실종자 수사과는 전시 행정을 위해 만들어진 조직일 뿐입니다. 아무도 가기 원치 않는 이곳은 각 경찰서에서 소위 낙오자로 찍힌 자들로 구성돼있습니다. 미팅과 치장에만 정신 팔린 있는 집, 사건만 나면 떨기부터 하는 무능한 겁쟁이, 늘 몸이 먼저 반응하는 운동선수 출신 과격파, 지병 때문에 서류 작업만 가능한 말년 형사, 최고책임자지만 기회만 되면 실적을 올려 조직 내 주류로 올라설 궁리만 하는 실장이 그들입니다.

 

이곳에 좀 특이한 이력을 지닌 두 사람이 배속됩니다. 타카시로 켄고는 한때 경시청 수사1과 최고의 형사였지만, 7년 전 비극적인 사고를 겪으면서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 이젠 경찰 내부에서도 골칫덩이가 된 자입니다. 술과 담배와 커피에 찌든 채 월급을 받기 위해 경찰로 살아간다.”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다닐 정도로 그에겐 야망도 승부욕도 사라진 상태입니다.

다른 한 사람은 타카시로와는 성별도 나이도 성격도 다른 27세의 묘진 메구미입니다. 수사1과로의 승진을 코앞에 뒀던 열혈 여형사 메구미는 엉뚱하게도 남의 문제에 휘말려 좌천 아닌 좌천을 당해 실종자 수사과에 오게 됐습니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다가도 부당하거나 불합리하다고 판단될 때는 대선배 타카시로마저 꼼짝 못하게 만드는 돌직구 캐릭터입니다.

 

서류작업이나 하면서 대충 출퇴근만 해도 되는 실종자 수사과에 발령받은 타카시로는 성실한 직장인이 결혼을 코앞에 두고 갑자기 증발한 특이한 실종사건 조사를 지시받습니다. 의욕 같은 건 진작 개나 줘버렸던 타카시로는 자신도 모르게 이 사건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리고 새카만 후배 메구미와 번번이 충돌하며 사라진 남자의 흔적을 추적하기 시작합니다. 조사를 할수록 남자의 과거에 의문점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하고, 타카시로는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집요할 정도로 수사에 임합니다.

 

타카시로 시리즈의 첫 편이라 그런지 캐릭터 소개에 꽤 많은 분량이 할애된 작품입니다. 실종자 수사라는 본 스토리에 충실하면서도 그 안에 자연스럽게 타카시로의 과거와 현재를 설명하고 있고, 앞으로 콤비로 활약할 것으로 보이는 메구미와의 관계 설정도 매력적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왕년의 스타 형사였지만, 지금은 숙취와 두통을 달고 사는 무기력한 타카시로와 실종자 수사과에서 실적을 올려 수사1과로 승진하려는 야심찬 메구미의 조합은 지금껏 봐온 남녀형사 커플 중 단연 독특하면서도 재미있는 설정입니다.

 

사건 자체는 무척 심플합니다. 실종된 남자의 주변을 조사하고 그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하지만 (출판사 책 소개에도 있듯) 실종은 죽음보다 더 잔혹한 공중에 매달린 상태라서 주변 사람들에게 더욱 큰 상처를 주는 사건입니다. 무기력하게 인생을 소모하던 타카시로가 처음 투입된 실종수사에서 마음을 고쳐먹고 전력을 다 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물론 이 사건은 그저 단순한 실종이나 납치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사라진 남자의 과거를 캐면서 그가 실종될 수밖에 없었던 사건성이 드러납니다.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이기도, 또 사회적인 문제이기도 합니다. 다만, 어느 정도 예상된 흐름대로만 이야기가 전개되기도 하고, ‘의 비중 역시 소소한데다 실종의 계기도 조금은 심플하게 처리돼서 팽팽한 긴장감이나 대단한 반전을 주는 작품은 아닙니다.

하지만, 타카시로 시리즈의 첫 편이라는 점에서 보면 분명 매력적인 출발을 알린 작품입니다. 스토리만큼이나 기대되는 타카시로와 메구미 사이의 케미가 여중생 실종사건을 다룬 시리즈 2편에서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지는 것은 물론, 단역 또는 미약한 조연에 머물렀던 실종자 수사과의 다른 멤버들도 뭔가 제대로 된 밥값을 하지 않을까, 기대되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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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잉 라이트 형사 로건 맥레이 시리즈 2
스튜어트 맥브라이드 지음, 박산호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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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버딘의 홍등가에서 매춘부 로지 윌리엄스가 구타를 당한 채 알몸으로 발견된다.

도시 반대편에서는 밖에서 창문이 잠긴 채 불에 탄 여섯 구의 시체들이 발견된다.

연쇄살인의 냄새를 풍기는 사건에 긴장한 형사 로건 맥레이.

게다가 자신이 지휘한 작전의 실패로 총에 맞은 경관이 사망하면서 주위의 눈총에 시달리고

꼴통들만 모인 팀으로 보내지는 등 최악의 사건들이 연달아 일어난다.

맥레이는 꼴통 팀을 벗어나기 위해 매춘부 살인사건은 물론 화재 사건까지 파헤치지만

용의자의 윤곽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고,

곧이어 새로운 시체가 발견되면서 사건은 미궁 속으로 깊이 들어간다.

(출판사 책 소개 수정 인용)

 

● ● ●

 

스코틀랜드의 화강암 도시 애버딘을 배경으로 한 로건 맥레이 시리즈의 두 번째 작품입니다.

첫 작품인 콜드 그래닛이 대단히 만족스런 작품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두 번째 작품까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에 근 1년 반 만에 다잉 라이트를 펼쳤습니다.

 

사실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은 주인공 로건 맥레이의 캐릭터입니다.

형사로서 그의 재능은 사실 평범한 쪽에 더 가깝습니다.

번득이는 추리력이나 천재적인 발상 같은 건 아예 없습니다.

다잉 라이트에서는 거기에 더해 좀더 인간적인 면모를 강조합니다.

, 인사위원회에서 해고당하지 않기 위해 때론 비굴한 태도를 취하기도 하고,

갈등 중인 두 상사의 틈바구니에 낀 채 아슬아슬 양다리를 걸치기도 하며,

심지어 화난 여자 친구를 달래기 위해 욕을 먹으면서도 정시 퇴근을 감행하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썰렁하기도, 촌철살인 같기도 한 블랙유머를 입에 달고 삽니다.

 

하지만 그런 로건 맥레이 앞에 벌어지는 사건은 결코 평범하지 않은 사건들입니다.

콜드 그래닛에서도 연쇄 소아성애 살인, 유아 납치, 무릎뼈가 사라진 변사체 등

연이어 벌어진 참혹한 사건들을 상대했던 로건 맥레이는

이번에도 매춘부 연쇄살인, 살인을 목적으로 한 연쇄방화, 동물 유기살해, 실종 등

애버딘 곳곳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진 끔찍한 사건들과 직면합니다.

 

더구나 그는 여러 가지 난감한 상황에 빠져있습니다.

동료를 죽음에 이르게 한 무모한 작전 때문에 인사위원회에 회부됐고,

그 페널티로 소위 꼴통팀으로 불리는 스틸 경위의 팀으로 발령받은 상태입니다.

공적 쌓기에 혈안이 된 이기적 욕심쟁이 스틸 경위 아래에서

로건은 밤과 낮을 가리지 않고 혹사당하게 되고,

그로 인해 여자친구인 왓슨 여경과도 트러블을 겪습니다.

 

이런 배경들 자체는 무척 매력적입니다.

연이어 벌어지는 다양한 사건들은 궁금증과 긴장감을 제공하고 있고,

로건의 사적인 문제들도 흥미진진합니다.

하지만, ‘다잉 라이트는 전작 콜드 그래닛에서 느꼈던 아쉬운 점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고,

고백하자면, 그 때문에 몇 번이고 중도 포기를 할까 고민하게 만들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 너무 많은 사건들이 등장하면서 속도감과 집중도가 떨어진다는 점입니다.

완전히 별개의 것으로 보이는 사건들은 완만하고 띄엄띄엄 발생하고,

그것을 수사하는 과정 역시 느리고 산만하기만 합니다.

정치적으로 가치가 떨어진다는 판단 때문에 로건과 꼴통팀이 떠맡게 된 매춘부 살인사건,

꼴통팀에서 벗어나기 위해 공적을 세울 심산으로 참견하게 된 연쇄 방화살인사건,

그야말로 우연히 관심을 갖게 된 동물 유기살해와 실종사건 등

로건은 한 개의 몸으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사건들에 모두 관여합니다.

거기에 덧붙여 로건의 사적인 문제들까지 언급되면서

독자들은 어떤 사건, 어떤 인물에 집중하면서 이야기를 따라가야 할지 헷갈리게 됩니다.

 

콜드 그래닛의 서평을 다시 찾아 읽어보니

이야기가 곁가지가 너무 많은 느낌을 받았다라든가,

굳이 600페이지라는 분량이 필요했을까?’라고 지적해놓았는데,

이 역시 다잉 라이트에서 똑같이(아니, 오히려 더 크게) 느낀 아쉬움이었습니다.

물론 사건들은 점차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거나 명쾌한 방식으로 해결되긴 하지만,

500페이지라는 분량조차 길게 느껴질 만큼 이야기는 전반적으로 만연체의 느낌이었습니다.

 

20151월에 이 작품이 출간된 후 아직 후속작 소식은 들려오지 않지만,

로건 맥레이의 캐릭터만 믿고 후속작들을 계속 읽어야할지,

두 작품을 통해 느낀 취향의 문제를 절감하고 더 이상의 읽기를 포기해야 할지

아직은 어느 쪽으로도 확신이 들지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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