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드 럭
야쿠마루 가쿠 지음, 민경욱 옮김 / 북홀릭(bookholic) / 2015년 11월
평점 :
품절


야쿠마루 가쿠의 작품을 처음 접한 것은 5년 전쯤 천사의 나이프를 통해서였습니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방황하는 칼날을 읽고 소년범죄에 관심이 있어 찾아본 작품이었습니다.

서평을 쓰지 않던 시절이라 정확한 기억은 없지만

차분한 문장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의 심리를 잘 그려냈다는 인상을 받은 기억이 있습니다.

사건을 풀어가는 솜씨 역시 현란하진 않지만 무척 리얼했던 것 같구요.

 

하드 럭은 야쿠마루 가쿠와 두 번째로 만난 작품인데

이야기는 전혀 다르지만 받은 인상은 천사의 나이프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사실감 넘치는 사회파 스타일의 소재, 피해자이면서 동시에 가해자가 된 주인공의 상황,

정통 미스터리이면서 사건 못잖게 인물들의 심리를 지켜보게 만드는 서사의 힘 등

미스터리에 문외한이라도 한번 잡으면 마지막 장까지 달리게 하는 필력을 갖춘 작품입니다.

 

● ● ●

 

주인공 아이자와 진은 그야말로 사회의 밑바닥을 전전하는 절망적인 청춘입니다.

그런 그가 마지막 한탕을 위해 일면식도 없는 자들을 동료 삼아 범죄를 기획합니다.

하지만 거사(?) 당일 모든 계획이 틀어지고 맙니다.

실명도 모르던 동료들은 모두 현장에서 사라졌고,

눈앞에서는 세 구의 시신과 함께 저택이 불타오릅니다.

누군가 자신들의 계획에 끼어들어 모든 것을 망쳐놓은 것입니다.

유일하게 실명과 얼굴이 노출된 자신은 살인강도에 방화범으로 몰리는 신세가 되고 맙니다.

아이자와 진은 경찰에 쫓기게 되지만, 끝까지 진범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합니다.

 

● ● ●

 

전형적인 사기부터 음험한 범죄중개, 개인정보 매매 등 다양한 범죄가 등장하지만

야쿠마루 가쿠는 그 현상 자체에 매몰되지 않습니다.

물론 나름 빈부의 문제, 가족의 문제 등 일본의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내긴 하지만,

그것을 교훈적이거나 선언적인 투로 강요하진 않습니다.

즉 사회적인 병폐와 그로 인해 파생되는 범죄 등 구조적인 문제를 강조하기보다는

철저하게 개인 하나하나의 행동과 심리와 동기에 천착하면서 이야기를 전개시킵니다.

그래서인지 (경찰 외에) 선한 인물이라곤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상황에서

악인들마저 악인처럼 보이지 않는 묘한 분위기가 형성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자들은 한때는 선한 시민이자 억울한 피해자였지만

결국엔 남의 돈을 탐낸 명백한 범죄자로 전락하는 주인공의 삶을 지켜보면서

구조의 문제개인의 문제라는 두 가지 차원의 담론을 혼돈 없이 받아들이게 됩니다.

어떻게든 살아보려 했지만 결국 탈출구는 범죄밖에 없었다는 참혹한 구조적현실,

그렇지만 사람을 죽이지는 않았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경찰의 눈을 피해 도망치면서 사건의 진실을 캐야만 하는 아이러니한 개인의상황이

정교하게 직조되어 독자들의 시선을 사로잡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발 잡히지 말고 진범을 찾아내줘!”라고 응원하다가도,

, 이 친구는 어쨌든 범죄를 저질렀잖아?’라는 자문과 맞닥뜨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야기의 나머지 한 축으로 등장하는 경찰들의 활약은 상대적으로 좀 심심합니다.

하지만 그들의 역할은 애초부터 주인공의 진실 찾기를 위한 조연으로 설정된 바,

그 나름대로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점에서는 크게 일조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절한 분량 속에 현실적인 소재와 미스터리 구성을 잘 버무린 하드 럭

재미와 함께 생각할 여지를 많이 남기는 작품입니다.

좀더 현란한 문장과 자극적인 설정을 갖고 왔다면

야쿠마루 가쿠는 진작에 더 큰 이름을 얻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조금은 담담한 느낌이 들면서도 알차고 차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필력은

오히려 그의 다른 작품들을 찾아 읽고 싶게 만드는 매력의 근원이 아닐까 생각해봅니다.

그런 점에서 악당어둠 아래등 아직 읽지 못한 그의 작품들이 더욱 기대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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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 7 7 시리즈
케리 드루어리 지음, 정아영 옮김 / 다른 / 2016년 9월
평점 :
절판


법정에서 피고인을 재판하는 사법 제도가 폐지되고, 국민이 직접 재판하는 제도가 도입된다.

특히 살인을 저지른 피고인은 7일 동안 TV 뉴스쇼에 신상이 공개되고,

시청자들은 전화, 문자, 인터넷을 이용해 무죄 혹은 유죄에 투표한다.

그리고 7일째 날 최종 집계 결과 유죄가 나오면 즉시 사형을 집행한다.

빈민가 출신의 열여섯 살 소녀 마사 허니듀가 전 국민의 사랑을 받던

유명인 잭슨 페이지를 살해한 혐의로 체포되어 1번 수용실에 수감된다.

마사는 최초의 10대 여성 수감자, 투표가 이루어지는 7일 동안

매일 수용실을 옮기며 전기의자가 있는 7번 수용실로 향한다.

마사는 자신이 잭슨 페이지를 죽였다고 자백하여 사실상 사형이 확실시되지만,

마사의 상담을 맡은 이브 스탠턴은 마사가 뭔가 감추고 있음을 직감하고 비밀을 추적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브는 소름끼치는 음모를 마주하게 된다.

(출판사 줄거리를 일부 수정하여 인용하였습니다)

 

● ● ●

 

중세의 마녀사냥 이래 대중의 광기는 시대를 막론하고 가공할 독성을 지녀왔습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인터넷이나 미디어의 힘과 뒤섞여 거친 화학반응을 일으킬 경우

대중의 광기는 그 어떤 합리적 논리와 이성적 판단까지도 마녀로 몰아세울 수 있게 됐습니다.

7’은 그 광기가 사법의 영역까지 장악한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고 있습니다.

법정은 문을 닫았고, 법조인들은 다른 직업을 찾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목격자도, 증거도 필요 없고 단지 대중의 증오심만으로 인명을 빼앗는 시대가 도래합니다.

미디어는 끊임없이 도발적인 영상과 멘트로 용의자의 흉포함을 강조하고,

대중은 비디오게임처럼 미친 듯 유료투표를 하며 무자비한 사형집행을 갈망합니다.

 

정치권력은 이런 사법제도를 통해 조지 오웰의 빅 브라더를 능가하는 힘을 갖게 됩니다.

대중은 누군가의 죽음을 갈망하면서 희열을 느끼지만,

동시에 자신이 그 쇼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다는 공포와 함께 살아가야 하기 때문입니다.

권력에 반하는 말과 행동은 금지되며, 독재자에게는 무한한 애정만을 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언제든 사형당할 확률이 99%’1번 수용실로 끌려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16살의 소녀 마사는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 체제를 붕괴시키기로 마음먹습니다.

문제는, 그 방법이 스스로 사형수가 되는 길이었다는 점입니다.

독자는 체제에 대한 정면 공격이 아니라 스스로 사형수가 되는 것

어떻게 이 견고한 디스토피아를 무너뜨리게 될까 궁금히 여기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작가는 수용실에 갇힌 마사의 최후의 1주일과 살인이 일어나기 전 과거의 사건들을

주요 인물들의 관점을 통해 교차 편집하듯 보여줍니다.

그를 통해 마사가 감추고 있는 비밀을 조금씩 흘리는 것과 동시에

어처구니없는 사법제도를 둘러싼 다양한 개인/집단 간의 극단적 갈등을 세세히 묘사합니다.

 

새롭고 독특한 소재인데다, 선명한 스토리 때문에 페이지는 쉽게 넘어갑니다.

우울한 디스토피아를 그리기 위해 현학적인 문장들이나 모호한 철학을 동원하지도 않습니다.

사형수가 된 마사, 그녀를 도와주려는 상담사 이브, 직업을 잃은 전직 대법관,

피에 굶주린 듯한 쇼의 진행자 등 다채롭고 호기심 넘치는 캐릭터들도 쉽고 매력 있습니다.

적절한 미스터리와 반전, 교훈적이지도 이분법적이지도 않은 엔딩 역시 괜찮은 미덕입니다.

 

다만, 이런 심플함7’의 장점이면서 동시에 단점이기도 합니다.

7’이 그린 디스토피아는 조금은 과장되거나 단순하게 도식화된 면이 분명 있습니다.

그런 세상이 오게 된 과정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 보니 사실감이 떨어지기도 하고,

마사를 죽이기 위해 혈안이 된 미디어나 대중의 광기 역시 쉽게 공감하기 어렵게 됩니다.

디스토피아 이야기가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전제 조건은

안 살아봤지만 직접 살아본 것처럼 생생히 느껴지는 어떤 세상에 대한 공포의 공유입니다.

그런 점에서 마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한 좀더 깊고 세세한 설명이 있었다면,

그 세상에 만연한 대중의 광기가 내뿜는 공포에 대해 좀더 독자의 공감을 끌어냈더라면

위에서 언급한 아쉬움들이 많이 덜어질 수 있었을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한, 견고한 체제를 전복시키려는 주인공이 10대이다 보니

사건의 규모나 극성(劇性)은 물론 철학적인 깊이가 얕아질 수밖에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이런 한계는 후반부에 이야기가 급물살을 타기 전까지 내내 느껴지곤 했는데,

그래서인지 또래의 주인공들이 등장했던 헝거 게임이나 배틀 로열처럼

좀더 독한 설정이 첨가됐으면 어땠을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랬다면 재미와 함께 철학적인 의미도 획득할 수 있었을 테니까요.

(물론 이 작품을 쓴 의도와는 거리가 먼 얘기일 수도 있지만요..)

 

7’의 뒷이야기를 다룬 데이 7’이 출간될 예정이라고 하는데,

후속작에서는 좀더 피부에 와 닿는 디스토피아의 진면목이 그려지기를 기대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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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우 - 비밀을 삼킨 여인
피오나 바턴 지음, 김지원 옮김 / 레드박스 / 2016년 6월
평점 :
절판


4년 전 유괴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되던 글렌이 교통사고로 사망하면서

그의 아내 진은 다시 한 번 세상의 주목을 받는다.

그녀라면 뭔가 알고 있지 않을까? 아니면 그녀 역시 희생자일까?

수많은 언론사의 제의를 뿌리치며 침묵을 지키던 진이

어느 날 베테랑 여기자 케이트의 독점 인터뷰에 응하면서

베일에 싸여 있던 남편과 결혼 생활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는데…….

(출판사 소개글 인용)

 

● ● ●

 

최근 들어 가족에게 닥친 비극 또는 부부간의 심연처럼 깊은 갈등을 다룬 작품들은

예외 없이 길리언 플린의 나를 찾아줘나 폴라 호킨스의 걸 온 더 트레인를 언급하며

독자들에게 자신의 가치를 어필하곤 합니다.

이 작품도 마찬가지인데, 특히 스티븐 킹은 “‘나를 찾아줘걸 온 더 트레인을 좋아한다면

이 책도 읽고 싶을 것이다.”라는 추천사를 썼습니다.

솔직히 지금까지 나를 찾아줘를 빗대어 홍보한 작품 가운데

100% 공감할 수 있었던 작품은 별로 없었습니다.

오히려 그 홍보글 때문에 나를 찾아줘의 판매고만 더 올라가지 않았을까요?

 

위도우, 비밀을 삼킨 여인나를 찾아줘를 홍보 포인트로 삼은 작품 가운데

그래도 만족도가 꽤 높은 작품이었습니다.

사실 반전이나 충격은 그리 센 작품은 아닙니다.

진실 자체보다 그것이 드러나는 과정, 즉 심리적인 묘사에 주력한 작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이 마지막 장까지 매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구성의 힘이 아닐까, 라고 생각해봅니다.

 

우선, 네 명의 화자가 등장합니다.

유괴 용의자 글렌의 아내 진, 담당 형사 밥 스파크스, 베테랑 여기자 케이트 워터스,

그리고 유괴된 3살 소녀의 엄마 던이 그들입니다.

이들의 시선을 통해 독자는 동일한 사건을 다양한 방식으로 들여다보게 됩니다.

네 화자의 치열한 공격과 수비는 얼핏 단순해 보이는 유괴사건의 진상을

점점 더 모호하고 복잡하게 만들어갑니다.

 

이외에도 작가는 과거와 현재를 교묘히 교차시킴으로써 독자의 호기심을 자극합니다.

사건이 일어났던 2006년을 배경으로는 초동 수사과정과 언론의 집요한 취재는 물론

용의자로 지목된 글렌과 아내 진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그리고 있습니다.

이어 현재 시점인 2009~2010년을 배경으로는 거의 미제에 그칠 뻔 했던 사건이

새로운 단서와 함께 재점화되는 과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이렇듯 네 명의 화자, 과거와 현재의 교차 편집은

단순히 복잡하게 꼬아놓았다는 것 이상의 힘을 지니게 됩니다.

상대적으로 기자와 경찰의 역할은 전형적인 모습을 보일 뿐이지만

딸을 유괴당한 던과 용의자의 아내로 전락한 진의 심리나 행동의 변화는

이런 구성의 힘 덕분에 훨씬 더 생생하고 긴장감 있게 그려집니다.

특히 이야기의 중심인 진의 캐릭터나 그녀가 위기에 대처하는 방식은

실제로 나를 찾아줘걸 온 더 트레인을 연상시킵니다.

 

부제인 비밀을 삼킨 여인은 말할 것도 없고,

훌륭한 아내, 그게 이제 내 역할이다. 남편 곁을 지키는 훌륭한 아내라는 뒷 표지 카피는

언뜻 진을 남편의 공범으로 예단하게 만들기도 하지만,

동시에 거꾸로 혹시 그녀는 희생자인가?’라고 의심케 만드는 카피이기도 합니다.

네 명의 화자, 과거와 현재의 교차라는 구성의 힘은

마지막 장까지 그녀를 가해자와 희생자 중 어느 쪽으로 분류해야 할지 혼란스럽게 만듭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 작품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굳이 이 작품의 아쉬운 점을 꼽자면 분량의 문제입니다.

워낙 어마어마한 분량의 작품이 쏟아지는 요즘이라

겨우(?) 444페이지면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는 분량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중간중간 동어반복으로 보이는 대목들이 등장하면서 좀 느슨해진 느낌을 피할 수 없었습니다.

그런 부분들이 조금만 정리됐더라면 훨씬 더 몰입도도 높아졌을 것이란 생각입니다.

 

올해의 기자상까지 받았던 기자 출신 작가의 데뷔작이 이 정도라면

이후에도 사실적이고 긴장감 넘치는 픽션을 자아내리라 기대해봅니다.

피오나 바턴이라는 이름이 과연 길리언 플린을 넘어설지 궁금해지도 하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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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산 형사 베니 시리즈 1
디온 메이어 지음, 송섬별 옮김 / artenoir(아르테누아르) / 2016년 10월
평점 :
품절


남아공의 스릴러 작가 디온 메이어와는 지난 해 봄 오리온을 통해 처음 만났습니다.

극심한 분노조절장애를 겪는 경찰 출신의 초보 사립탐정 판 헤이르던을 앞세운 오리온

남아공의 비극적인 역사와 판 헤이르던의 개인사를 잘 조합한 속도감 넘치는 스릴러였다면,

악마의 산은 아동 상대 범죄와 전통 무기를 이용한 연쇄살인이라는 잔혹한 사건과 함께

자의반, 타의반으로 심신이 붕괴된 인물들의 심리를 좀더 강조한 묵직한 작품입니다.

 

악마의 산은 크게 세 인물의 이야기로 정리됩니다.

우선, 알코올중독으로 인해 가족에게 내쫓긴 후 술독에 빠진 자신과의 전쟁을 벌이며

아동성폭행범만 골라 죽이는 연쇄살인마 체포에 나선 중년 경찰 베니 그리설이 주인공입니다.

그리고 오리온에서 주인공을 돕는 역할로 특별출연(?)한 뒤

후속작인 프로테우스에서 주인공을 맡았던 코사족 출신의 흑인 토벨라 음파이펠리는

좀도둑들에게 ()아들을 잃은 뒤 연쇄살인마로 변신하여 피의 향연을 벌입니다.

마지막으로, 강압적인 부모에게서 벗어나 자유를 갈망하던 크리스틴은

불장난 같은 사랑의 결과로 얻은 딸과의 생계를 위해 몸을 팔며 살아가던 중

악마와도 같은 마약상을 만나면서 파국의 길을 걷게 됩니다.

 

디온 메이어는 과거와 현재를 오가는 구성을 통해 세 인물의 행로를 찬찬히 보여줍니다.

각각 별개의 것처럼 보이던 세 인물의 이야기는 점점 한 방향으로 수렴되다가

베니 그리설이 개인의 복수로 보이는 참혹한 연쇄살인사건을 맡게 되고,

크리스틴과 그녀의 딸이 그 사건에 연루되면서 한길로 모입니다.

중반부에 좀 못 미친 지점까지 세 인물의 과거와 현재가 비교적 밀도 있게 묘사된 탓에

독자에 따라서는 서설이 너무 길고 장황하다라고 느낄 수도 있는데,

그 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왜 작가가 긴 서설을 택했는지 쉽게 이해하게 됩니다.

 

범인은 초반부터 노출되고, 이야기 역시 충격과 반전보다는 예정된 순리(?)대로 전개되지만

이는 속도보다는 깊이, ‘누가?’보다는 ?’에 초점을 맞춘 작가의 의도 때문입니다.

뛰어난 능력과 발군의 수사력 덕분에 장래가 촉망되던 형사였지만

늘 죽음을 가까이에서 지켜봐야 하는 스트레스로 인해 알코올중독에 빠진 베니 그리설은

가장이자 중년남자로 살아가야 하는 개인의 고민은 물론

남아공에서 백인 경찰로 살아가야 하는 스트레스까지 고스란히 드러냅니다.

또 한때 비밀 암살요원으로 암약했던 토벨라는 비극적인 사고로 ()아들을 잃으면서

평범한 소시민으로서의 삶을 포기하고 복수를 위해 또다시 손에 피를 묻히기로 결심하지만

복수가 거듭될수록 자신의 행위에 대해 고뇌와 갈등에 사로잡히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반항적인 소녀 크리스틴이 생계를 위해 콜걸로 변신하는 과정과

악마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모습은 빈부, 마약, 성매매 등

남아공에 만연한 사회적 문제를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기대했던 것만큼 크게 부각되진 않았지만 사적 복수의 문제역시 중요한 테마입니다.

사법체계에 대한 불신과 증오가 야기한 사적 복수에 대해

디온 메이어는 어느 한쪽의 주장보다는 찬반론을 공정하게 배분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경찰 내에서조차 사적 복수를 감행하는 연쇄살인마를 놓고 지지와 증오로 갈리는 장면이나

사적 복수에 나선 토벨라가 매번 과거의 살인기계답지 못한 소심함과 갈등을 겪는 장면,

또 사적 복수에 반대하던 베니 그리설이 정작 자신의 문제가 됐을 때 겪는 혼란 등을 통해

디온 메이어는 독자 개개인의 판단을 묻는 듯한 태도를 보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이 테마가 좀더 크게 다뤄지기를 바랐지만,

디온 메이어가 보여준 색다른 엔딩 덕분에 그나마 아쉬움을 덜어낼 수 있었습니다.

 

스릴러로서의 미덕과 매력을 모두 겸비했으면서도

악마의 산은 가해자와 피해자, 경찰과 범인, 남과 여 등 다양한 개개인의 심리는 물론

남아공 특유의 사회적 이슈들까지 깊이 있게 다룬 작품입니다.

앞서 읽은 오리온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는데,

그러고 보면 디온 메이어는 단순한 이야기꾼 이상의 필력을 지닌 작가임이 분명한 듯 합니다.

 

주인공 베니 그리설이 알코올중독의 진창에서 제대로 빠져나왔는지 분명히 그려지진 않았지만

이 작품이 시리즈 첫 편인 것을 감안하면 이후에는 좀더 사건에 매진(?)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그런 점에서 후속작인 ‘13시간에서의 베니 그리설의 활약을 기대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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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관의 조건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0
사사키 조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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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좋아하는 사사키 조의 경찰소설이지만 별 세 개라는 야박한 평점을 줬습니다. 약간은 스포일러가 될 수 있는 내용이 포함돼있으니 감안하고 읽으시기 바랍니다.)

 

사사키 조의 대표작 경관의 피’, 9년 후의 이야기를 그린 작품입니다. 경찰소설의 대가답게 이번에도 사사키 조의 문장은 거침없으면서도 사실적이고 독자의 몰입감을 최대한으로 끌어내는 힘을 발휘합니다. 수많은 인물들이 등장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 명확한 캐릭터와 역할을 지니고 있어서 굳이 정리하려 노력하지 않아도 머릿속에 선명하게 각인됩니다.

주인공 안조 가즈야의 캐릭터나 안조 가문 3대에 걸친 경관의 내력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전작인 경관의 피를 먼저 읽는 것이 바람직하겠지만, 작가는 그런 수고 없이도 안조 가즈야에 대해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끔 여러 가지 정보와 설명을 제공합니다. 이야기는 경관의 피마지막 장면이 다시 한 번 리플레이 되면서 시작됩니다.

 

문제 경찰을 내사하라는 지시를 받고 조사를 진행해온 안조 가즈야는 고민 끝에 자신의 상관이자 전설적인 조폭 전문 형사 가가야 히토시를 상부에 고발합니다. 결국 가가야는 제복을 벗고 시골로 내려가 낚싯배를 운영하며 살아갑니다. 9년이 지난 현재, 도쿄의 각성제 판매 양상이 급변하면서 경시청에 비상이 걸립니다. 조직범죄대책부 1과 계장이 된 가즈야는 업무가 겹치는 5과와 치열한 경쟁을 벌이며 각성제 시장의 혼돈을 수사하던 중 불의의 사고를 일으킵니다. 이를 계기로 정보 수집의 한계를 느낀 경시청은 가가야를 5과의 계장으로 복직시킵니다. 가즈야의 1과가 난맥상처럼 꼬인 정보 탓에 헤매는 동안 5과는 가가야의 활약으로 혁혁한 공을 세우면서 1과를 압도합니다. 그리고 사건의 진상이 드러나는 절정부에 이르러 가즈야와 가가야는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3대 경관이라는 타이틀이 명예이면서 동시에 트라우마인 안조 가즈야는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그랬듯 평탄치 못한 경찰의 길을 걷습니다. 이른 나이에 승진시험에 통과하여 경부가 된 영광도, 조직범죄대책부의 계장에 오른 기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할 만큼 따가운 눈길에 휩싸입니다. 누군가는 그의 영광과 기쁨이 선대의 후광이라고 시기하고, 누군가는 그가 상사였던 가가야를 고발한 대가로 그 영광과 기쁨을 누린다고 비난합니다.

 

독자를 가장 기대하게 만드는 대목은 9년 전 가즈야의 고발로 제복을 벗었던 가가야가 그를 내쳤던 경시청의 간청에 의해 복직을 결심하는 장면입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복직 시점은 가즈야가 최대의 위기에 빠진 때였고, 두 사람은 9년 만에 라이벌인 1과와 5과의 계장으로 맞닥뜨리게 된 것입니다. 가즈야가 아직 새내기 계장으로 정보 수집에 애를 먹는 반면, 가가야는 복직과 동시에 거물들과의 접촉을 통해 자신의 위상을 과시합니다. 이래저래 독자들이 기대하던 최고의 빅 매치가 성사된 셈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에 밀려든 아쉬움이 너무 컸다는 점입니다. 좀더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왜 이 작품에 경관의 조건이라는 제목을 달았는지, 굳이 안조 가즈야의 9년 후의 이야기를 이런 식으로 그릴 필요가 있었는지 약간의 실망과 적잖은 허탈감까지 느꼈습니다. ‘경관의 피3대라는 장구한 시간 속에 벌어졌던 사건들과 함께 경찰로서의 자부심과 고뇌, 부자간의 갈등과 화해 등을 극적으로 그려냈다면, ‘경관의 조건은 단지 사건에만 매몰된 작품으로 보였기 때문입니다.

 

가즈야의 위기와 가가야의 복직은 이 작품의 가장 큰 변곡점입니다. ‘경관의 피에서 미처 다 그려지지 못한 두 사람의 갈등, 즉 정보 수집을 위해서라면 어둠의 세력들과 공존하는 것도 마다하지 않던 가가야와, 경찰의 본분과 정도를 지키기 위해 상사를 고발했던 가즈야의 갈등이 9년 만의 재회 이후 어떻게 펼쳐질 것인지가 너무 궁금했던 것입니다. 이들의 갈등은 개인적인 부분도 있지만, 경관의 조건에 대한 서로 다른 가치관을 극적으로 묘사할 수 있는 매력적인 설정이었습니다.

하지만 사사키 조는 별로 대단해 보이지 않는 사건에 올인한 나머지 정작 가즈야와 가가야의 갈등을 (제대로 된 충돌 한 번 없을 정도로) 이야기의 주변부로 몰아냈습니다. 적어도 후반부엔 한번쯤 두 사람의 충돌이 세고 진하게 묘사되리라 기대했지만 사사키 조는 엉뚱한 사건과 인물들에게 분량을 할애하면서도 정작 두 사람의 정면 대결은 엔딩에 이르기까지 회피했습니다. ‘경관의 피3대에 걸쳐 경관이 가야할 길, 경관의 도덕과 가치관에 관한 이야기였다면, ‘경관의 조건은 동시대에 서로 다른 도덕과 가치관을 지닌 두 경찰의 이야기여야 했습니다. 그래야 경관의 조건이라는 제목도 나름의 의미를 지니게 되는 것 아닐까요?

 

기대가 컸기 때문에 아쉬움도, 실망도 컸던 것 같습니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서점의 서평을 살펴봤더니 대부분 호평 일색입니다. 어쩌면 제가 잘못 읽은 탓일 수도 있지만 경관의 피가 선사했던 거대한 서사의 힘을 경관의 조건에서는 거의 느낄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전작의 성공에 편승한 후속작이라는 혹평이 더 어울려 보였습니다. 사사키 조가 경찰소설의 대가라는 점에 대해서는 이의가 없지만, 적어도 이 작품에 관해서만큼은 제목도, 주제도 그답지 않았다는 것이 저의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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