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버스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71
미나토 가나에 지음, 김선영 옮김 / 비채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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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카세 가즈히사는 스스로를 색이 없는 공기 인간이라 여깁니다.

유년기부터 또래들의 무시와 냉대, 투명인간 취급에 익숙해진 나머지

성인이 된 지금도 누군가와 어울리는 것은 물론 주인공으로 대접받는 일에 서툰 남자입니다.

다만, 누군가가 후카세도 같이 갈래?” “후카세는 어떻게 생각해?”라고 물어오기라도 하면

온몸이 경직되고 식은땀부터 흘릴 정도로 열등감과 자괴감에 사로잡히면서도

그렇게 말해준 누군가가 너무 고마운 나머지

잠시나마 투명인간에서 벗어날 용기를 내기도 합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중소 사무기기 업체에서 일하는 그가 누리는 소소한 행복은

직접 내려 마시는 진한 향기의 커피와 3개월 된 사랑스런 여자 친구 미호코가 전부입니다.

하지만 그 행복은 어느 날 미호코가 갖고 온 편지에 의해 산산조각 나고 맙니다.

후카세 가즈히사는 살인자다.”

후카세는 몇 년 전, 대학 친구들과의 여행길에 벌어진 비극적인 사고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임을 깨닫곤 자책감과 함께 의문의 편지의 발신자를 찾아 나섭니다.

 

● ● ●

 

리버스(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이니 당연히) 미스터리로 분류되는 작품이지만

제겐 색이 없는 공기 인간의 일그러진 삶을 그린 심리물에 더 가깝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출판사 책 소개대로 데뷔 이래 천착해온 테마인 복수와 속죄가 바탕에 깔려있고

한 친구를 죽음에 이르게 만든 우발적인 사고의 진실을 찾는 이야기가 메인으로 전개되지만

작가는 범인은 누구?’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후카세의 번민에 더 초점을 맞춥니다.

 

그래선지 미나토 가나에의 여느 작품보다 중반에 이르기까지 속도가 잘 안 나는 작품입니다.

후카세가 공기 인간으로 살아온 여정을 확인해야 되고,

성인이 된 현재까지 그 강박과 스트레스에서 벗어나지 못한 점을 재확인해야 하고,

사건이 일어났던 당시는 물론 그 이후의 대처 과정에서도

전혀 자신의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후카세의 번민을 들여다봐야 하기 때문입니다.

 

중반부, 그러니까 한 친구의 죽음과 나머지 네 친구의 사고 당시의 비밀이 드러나고

후카세가 스스로를 다그쳐 편지의 발신자를 찾겠다고 나선 이후부터 이야기는 속도를 내지만

후카세의 여정은 여전히 탐정이나 경찰의 조사와는 거리가 먼 행보를 보입니다.

, 그의 조사는 진상 찾기가 아니라 죽은 친구의 과거를 훑어 올라가는 일이었습니다.

그 친구는 공기 인간이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주던 유일한 사람이었지만

정작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이었는지에 대해 후카세는 거의 모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친구의 고향을 찾아가 부모와 동창들을 만나면서

후카세는 그 친구가 왜 사건 당시 아무도 나서지 않는 위험을 무릅썼는지 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친구가 왜 공기 인간이던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줬는지도 알게 됩니다.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책과 회한에 잠겼던 후카세는 돌아오기 직전

자신을 포함, 여행에 동행했던 모든 이들에게

‘OOO는 살인자다.’라는 편지를 보낸 자가 누구인지 알게 됩니다.

하지만 후카세를 기다리고 있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던 충격적인 진실입니다.

 

이야기가 이런 식으로 흘러간 덕분에 미스터리보다는 심리물에 가깝다는 인상을 받은 셈인데

내용은 다르지만 미나토 가나에의 단편집 왕복서간에 수록된 십 년 뒤의 졸업문집에서도

비슷한 인상을 받았다는 느낌이 문득 들기도 했습니다.

과거의 학창시절을 배경으로 삼아서 그런 것인지,

친구들 사이에 존재했던 위험한 비밀이라는 소재 때문인지 모르겠지만,

그때에도 세밀한 심리묘사와 반전 덕분에 아슬아슬한 긴장감을 만끽한 기억이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아쉬운 점을 한 가지 꼽자면 왠지 쉽게 이입되지 않는 캐릭터의 문제입니다.

후카세처럼 공기 인간으로 살아본 적도 없고,

후카세의 친구처럼 누군가를 따뜻하게 배려하며 살아본 적도 없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이야기에 맞춰 캐릭터가 과대포장 또는 작위적으로 설정됐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주변에서 쉽게 볼 수 있거나 공감할 수 있는 캐릭터가 아니라

작가의 의도에 맞게 너무 극단적으로 묘사됐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마음을 해부하는 예리한 관찰력의 소유자'라는 미나토 가나에에 대한 찬사는

(100%는 아니더라도) 거의 매 작품에서 어느 정도는 공감해왔지만,

리버스만큼은 해부와 관찰 대신 의도적 설정이 더 강했던 작품이라는 생각입니다.

 

한국에 소개된 그녀의 작품 중에 이제 딱 절반(6)을 읽었습니다.

그녀의 명성에 비하면 의외로 적게 읽은 편인데

아마도 두 번째로 읽은 야행관람차의 충격(?)이 컸던 탓으로 여겨집니다.

제게 리버스고백꽃사슬에 이어 왕복서간과 함께 공동 3위 정도랄까요?

고백을 뛰어넘는 작품을 기대하다가 만족보다는 실망을 느낀 일이 많으면서도

미나토 가나에의 신작 소식이 들리면 아직도 설레는 것이 사실입니다.

초기에 비해 출간편수가 많이 줄긴 했지만

내년에도 한편쯤은 미나토 가나에의 작품을 꼭 만나볼 수 있기를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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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파이
파울로 코엘료 지음, 오진영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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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연금술사’, ‘베로니카, 죽기로 결심하다를 읽은 뒤로

파울로 코엘료는 저의 취향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했지만

스파이가 마타 하리의 이야기, 그것도 그녀의 잘 알려지지 않은 삶을 다뤘다는 카피를 보곤

오랜만에 큰맘(?) 먹고 파울로 코엘료를 다시 만나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이야기는 크게 두 부분, 즉 마타 하리가 처형되기 직전에 변호사에게 쓴 장문의 편지와

그 변호사가 마타 하리에게 쓴 중편 정도의 편지로 구성돼있습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편지 형식을 통해 마타 하리의 출생과 성장, 결혼과 독립,

무희로서의 파격적인 삶, 독립적이며 자유를 갈구하는 여성으로서의 삶 등

그녀의 지극히 개인적인 삶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 ● ●

 

19세기 말에서 20세기로 넘어오던 유럽은 전운이 감도는 위험한 기운과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산업과 과학의 힘이 공존하는 시대였지만,

동시에 여성에게는 전근대적인 억압과 차별이 여전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가부장적인 남편, 희생만을 강요하는 가족제도, 도구화된 여성성에 억눌려 살던 마타 하리는

꿈에 그리던 파리에 정착하면서 이국적인 외모와 관능적인 춤을 앞세워

당시 유럽의 내로라하는 무대에서 큰 이름을 얻게 됩니다.

그녀의 치명적인 매력은 부유층과 고위 관료들을 사로잡았으며

널리 알려진 대로 그들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으면서 화려한 삶을 구가했습니다.

 

사교계를 장악하고 남성들을 희롱하며 자신만의 이상을 실현했던 마타 하리의 삶은

1차 대전의 발발을 전후하여 순식간에 나락으로 떨어집니다.

마타 하리를 추앙했던 파리는 어느 새 그녀의 춤을 지겨워하기 시작했고,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이루려던 그녀의 꿈은 1차 대전의 발발과 함께 무산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 무렵, 그녀와 프랑스 고위 관료들과의 내밀한 관계를 주시하던 독일이

마타 하리를 다른 용도로 활용할 계획을 세우기에 이릅니다.

그것이 사후 100년이 다 된 지금까지 그녀를 스파이로 기억하게 만든 단초가 됐습니다.

 

● ● ●

 

스파이는 마타 하리를 앞세운 정통 스파이물도, 스릴러도 아닙니다.

파울로 코엘료는 다양한 사실 자료와 적절한 분량의 상상력을 통해

한때 유럽을 사로잡고 가부장적인 남성들을 굴복시켰던 파격적인 여성성과 함께

이중스파이로 낙인찍힌 채 독일과 프랑스로부터 버림받은 그녀의 삶을 담담히 변호합니다.

특히 파울로 코엘료는 그녀가 참혹하게 처형당한 이유를 스파이라는 죄목이 아니라

국가권력과 남성으로 상징되는 당시의 지배적 가치관과 도덕관념에 있다고 주장합니다.

 

나는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이고, 무엇도 그 사실을 바꿀 수 없을 것입니다.

(중략) 나는 희생자가 아니라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치러야 할 대가를 당당히 치른 사람으로 기억되길 바랍니다.” (29페이지, 마타하리의 편지 )

 

마타 하리는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로 남성들의 요구에 저항하며

관습에 얽매이지 않는 독립적인 삶을 택했다.” (작가 인터뷰)

 

말하자면 출판사 책 소개대로

마타 하리는 여자라는 죄로, 대중 앞에서 옷을 벗었다는 죄로,

평판을 유지해야 하는 남자들과 관계를 가졌다는 죄로 부당하게 처형되었다.

그녀는 도덕적 관습에 겁 없이 저항하였기 때문에 용서받지 못했다.”는 것이

마타 하리에 대한 파울로 코엘료의 변론의 핵심인 것입니다.

 

아무튼..

지금껏 알던 마타 하리에 대한 통념을 뒤집게 만든 흥미로운 책읽기였던 것은 분명하지만,

파울로 코엘료가 쓴 마타 하리에 대한 이야기에 이끌려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정말 파울로 코엘료의 광팬이 아니라면) 어딘가 허전함을 느낀 경우가 많았을 것입니다.

시대를 잘못 태어난 여자’, ‘용기 있게 앞으로 나아간 사람’, ‘시대를 앞선 페미니스트

마타 하리의 참모습을 지칭하는 수식어들이 여기저기서 등장하지만

정작 이야기 속에서 그런 모습을 발견하기는 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좀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자신의 욕망에 충실한 채 부와 명예를 좇은 여자라는,

지극히 상투적인 이미지가 더 강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 이야기의 상당 부분을 사실 자료에 근거한 탓이겠지만,

평범한 다큐처럼 나열식으로 전개된 이야기 속에서 극성(劇性)을 발견하기도 어려웠습니다.

그녀를 스쳐간 여러 남자가 등장하지만, 그들의 개성은 거의 드러나지 않습니다.

대부분 그녀 앞에 툭 나타났다가, 휙 사라져버릴 뿐입니다.

그녀가 자의반, 타의반으로 걷게 된 스파이의 길 역시 전혀 흥미롭지 않습니다.

신문기사 같은 팩트만 나열될 뿐, 작가의 상상력은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처음부터 자극적인 흥미에 꽂혀 이 작품을 선택했던 것이 사실이고,

그 기대감이 충족되지 않은데 대한 불만이 이런 혹평의 이유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인물 평전소설의 경계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못한 애매한 정체성은

아무리 제가 파울로 코엘료와 궁합이 맞지 않는다는 점을 제외시켜놓고 생각해봐도

이 작품의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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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
나나카와 카난 지음, 박춘상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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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부모의 사망이나 이혼, 학대 등 가정의 품속에서 살 수 없는 사정이 있는

두 살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의 아이들이 생활하는 아동양호시설 나나미(七海)학원.

그곳에서는 '일곱 바다'라는 한자 이름에 어울리게 일곱 가지 괴담이 전해 내려온다.

여러 소녀와 얽힌 그 괴담들은 지금도 학원에서 벌어지고 있는 새로운 사건에

불가사의한 수수께끼를 던지고 있다.

보육사 키타자와 하루나는 아동복지사 카이오와 함께 여러 수수께끼를 풀면서

아이들의 고민을 해결해주려 노력한다.

(출판사의 책 소개글을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크고 작은 곶 덕분에 마치 일곱 개의 바다가 옹기종기 모여 있는 듯한 풍광을 자아내는

나나미 해변 언덕의 아동양호시설을 배경으로

성장 스토리와 소프트한 미스터리가 전개되는 나나카와 카난의 단편집입니다.

소프트라는 표현을 썼지만 작품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들이 맞닥뜨린 미스터리는

어쩌면 일반적인아이들과는 달리 시설에서 유년기~청소년기를 보내야만 하는

그들만의 깊은 상처만큼이나 단단하고 두려운 존재였을지도 모릅니다.

더구나 그 미스터리는 나나미 학원에 전해 내려오는 7개의 오랜 괴담과 연결돼있어

이제 2년차 보육사로서 아이들의 고민과 상처를 돌봐야할 24살 하루나에게도

적잖은 무게의 부담으로 다가옵니다.

 

딱히 감동적인 결말을 끌어내려 애쓰지 않은 작가의 담담한 문장도 좋았고,

비록 현실에는 존재하지 않을 것 같지만 아이들을 위해 진심을 다하는

보육사 하루나와 아동상담사 카이오의 캐릭터도 무척 매력적이었습니다.

7개의 단편에 등장하는 소년, 소녀들은 가족과 사회로부터 깊은 상처를 받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자신의 삶을 방어하고 키워가는 지혜를 보여줍니다.

그리고 그런 지혜를 발휘하여 나나미 학원에서 일어난 미스터리를 극복해 나갑니다.

 

미스터리의 해결은 대부분 보육사 하루나와 아동상담사 카이오의 몫이지만

그 과정에서 소년, 소녀들은 과거의 상처 덕분에 얻게 된 조숙함과 어른스러움을 통해

미스터리의 진실과 결과를 자신들만의 방식으로 받아들이고 소화해냅니다.

물론 소설이니까 가능한작위적인 해피엔딩도 간혹 보이긴 하지만

작가는 가능한 한 판타지와 리얼리티의 경계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려 애쓰고 있습니다.

 

사실 아동양호시설에 수용된 아이들의 사연이라고 하면

사토 세이난의 어느 소녀에 얽힌 살인 고백에 등장하는

지독하게 학대받은 소녀 아키가 생각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 아이들의 상처란 아무리 뛰어난 보육사나 상담사가 노력한다 해도

지워지지 않는 낙인처럼 마음속 어딘가에 영원히 뿌리내릴 것이라 생각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 이유로 누군가는 나나미 학원 자체를 현실감 없는 판타지라고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나나미 학원의 아이들처럼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어떻게든 짜낸 긍정의 힘으로

자신의 상처를 보듬으며 성장하는 아이들도 분명 어딘가에는 존재할 것입니다.

번역하신 박춘상 님께서 이 작품을 희망 미스터리라 지칭한 것도 그런 면 때문일 것입니다.

 

수록작 별로 (감동 또는 미스터리라는 면에서) 약간의 편차가 있긴 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자신의 의지로 세상과 적극적으로 맞서려는 주인공이 등장한

지금은 사라져버린 별빛도절대 반지가 가장 매력적으로 읽혔습니다.

예상치 못한 반전을 전해준 마지막 수록작 일곱 바다를 비추는 별도 괜찮았구요.

 

잔혹하고 리얼하고 독한 미스터리에 익숙한 독자에겐 말랑말랑한 동화처럼 읽힐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1년에 한두 편쯤 이런 해독제같은 작품도 정신건강을 위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설령 판타지라 하더라도 험하고 모난 세상 어딘가에

아주 작지만 따뜻함이나 희망이란 게 아직 남아있다고 위안 받는다면

그 역시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일 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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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피
마에카와 유타카 지음, 이선희 옮김 / 창해 / 201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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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쿠라는 범죄심리학을 가르치는 마흔여섯 살의 교수로 아내와 둘이 한적한 주택가에 산다.

어느 날, 고등학교 때 같은 반이었던 경시청 형사 노가미가

8년 전에 일어난 일가족 행방불명 사건에 대해 자문을 구한 후로

다카쿠라의 주변에서 이상한 사건이 잇달아 발생한다.

형사 노가미의 실종, 스토킹을 당하는 제자, 앞집에서 일어난 화재와 의문의 사체,

그리고 옆집 소녀가 내뱉은 기이한 한마디 등...

하지만 그것은 진정한 공포의 서막에 불과했다.

(책 뒷면에 소개된 줄거리를 수정, 인용했습니다)

 

● ● ●

 

나름의 줄거리를 정리하지 못하고 책 뒷면의 소개글을 수정, 인용한 것은

그만큼 이 작품이 깔끔하게 줄거리를 정리하기 어려운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설 만큼 오싹한, 섬뜩할 정도로 기이한이라는 뜻을 가진 제목만큼이나

이 작품은 스토리보다는 분위기에 의해 독자를 압도하고 있습니다.

 

그 수를 단정 지을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희생자를 낸 악인이 등장하고,

일찌감치 그의 정체가 독자에게 공개되지만

실상 그의 동기나 범행 자체는 작품 안에서 그리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

타고난 사이코패스의 성정 때문인지, 돈 때문인지, 성욕 때문인지 모호할 뿐입니다.

오히려 작가는 범인의 존재와 그가 저지른 범행으로 인해

주위 사람들이 어떤 방식으로 공포심을 느끼고 벌벌 떨게 되는지,

또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게 될까 노심초사하는 모습을 상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탐정 역을 맡은 범죄심리학 교수 다카쿠라는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는 역할과 함께

그 자신과 가족이 범인의 먹잇감으로 전락하는 역할도 맡고 있습니다.

그래서 독자들은 화자인 다카쿠라의 행동이나 심리를 지켜보면서

말할 수 없는 긴장감과 두려움을 공유하게 됩니다.

동시에 모든 범죄가 나란히 선 옆집의 낯선 이웃의해 벌어진다는 설정은

옆집 사람의 얼굴조차 제대로 기억 못하는 작품 속 다카쿠라는 물론

대다수의 독자들에게 더욱 섬뜩한 느낌을 갖게 만듭니다.

 

누군가 내 옆집에 침입하여 그 집의 가장을 살해하곤

나머지 가족을 장악한 채 뻔뻔히 가장 노릇을 하며 살아간다면,

그런데, 정작 옆집에 사는 나는 그 자가 진짜 가장이라고 무심결에 넘기고 살아간다면,

그리고 그 자가 수도 없이 그런 짓을 이곳저곳에서 반복한다면...

언뜻 너무 작위적인 설정이라 느낄 수도 있지만,

지금 당장 내 앞집 또는 옆집 가족의 얼굴 하나라도 제대로 기억하는 독자가

얼마나 될지 생각해보면, 그리 무리한 설정은 결코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마지막 장을 덮고도 내가 지금 무슨 이야기를 읽은 것인가?’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 이유는, 폭주하는 사이코패스의 살인과 범인을 쫓는 탐정 이야기는 물론,

낯선 이웃에 대한 두려움, 비극적인 가족사, 남녀 간의 치명적인 애증 등

쉽사리 엮이기 어려운 다양한 코드들이 범벅이 돼있는 작품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런 덕분에 줄거리는 머릿속에서 뒤엉키고, 남은 것은 크리피한분위기뿐이었습니다.

 

마에카와 유타카는 시체가 켜켜이 쌓인 밤으로 먼저 만났는데

그 작품 역시 뭔가 논리적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기이한 사건과 인물들로 꽉 차있습니다.

다만 시체가~’가 비교적 명료한 줄거리를 지녔고, 주인공에게 몰입할 수 있는 설정이었다면

크리피는 사건과 인물 대신 분위기에 압도당하는 작품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선명하고 깔끔한 줄거리와 엔딩을 좋아하는 독자들에겐 꽤나 당혹스러운 작품들이지만,

빈틈없는 논리 속에 괴기스러운 분위기를 믹스한 독특한 작품들이라

의외로 마니아층을 확보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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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1-24 08: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영화로 인상깊게 봤어요 . 제대로 짚어내는 말들이라 반박불가~! ㅎㅎㅎ잘 읽고 갑니다!
 
모든 죽은 것 찰리 파커 시리즈 (오픈하우스) 1
존 코널리 지음, 강수정 옮김 / 오픈하우스 / 201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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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쯤, ‘무언의 속삭임이라는 작품으로 존 코널리를 처음 만났습니다.

이라크전쟁에서 돌아온 퇴역 군인들의 연이은 자살 사건이 벌어지고,

그 안에 전쟁 중 이라크 박물관에서 약탈된 신비한 궤(?)의 이야기가 뒤섞인 작품입니다.

주인공 찰리 파커는 아내와 딸을 잃은 트라우마로 만신창이가 돼있어서 너무나 안쓰러웠고,

퇴역 군인들의 자살 사건은 어딘가 비현실적인 영매의 영역처럼 다뤄지면서

무척이나 페이지를 넘기기 힘들었던 끝에 결국 중도 포기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 개운치 않은 첫 만남 덕분에 그 이후로 존 코널리의 작품은 제 관심에서 벗어났습니다.

 

예전에 알라딘에서 중고서적을 한꺼번에 주문한 적이 있는데,

그때 저도 모르게 집어 들었던 것이 찰리 파커 시리즈의 첫 편인 모든 죽은 것입니다.

무언의 속삭임의 기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시리즈 첫 편에 대한 호기심과 기대감 때문에 저도 모르게 장바구니에 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책장에서 꺼내 읽게 됐는데,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역시 존 코널리는 내 취향은 아니군.’이었습니다.

 

공포의 극한을 즐기고 싶은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어라.”는 띠지의 홍보카피대로

이 작품에서 그려지는 잔혹함과 공포감은 역대 최강급입니다.

떠돌이라 지칭된 연쇄살인범은 출판사 홍보글대로 - 인간의 몸을 캔버스 삼아

붓 대신 메스를 휘두르며 잔혹하게 살해한 뒤 희생자들의 얼굴을 전리품으로 챙깁니다.

그는 약품으로 희생자를 취하게 한 뒤 산 채로 몸과 장기를 분리하는 것은 물론

그 모습을 (아직 멀쩡히 살아있는) 희생자로 하여금 직접 지켜보게 만듭니다.

수없이 많은 희생자들이 등장하고, 그 묘사는 아무리 반복해 읽어도 소름이 돋습니다.

심지어 희생자들 가운데에는 주인공 찰리 파커의 아내와 딸도 포함돼있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미덕(?)이라면 극한으로 치닫는 잔혹함과 공포가 전부입니다.

 

뜬금없는 사건과 인물들이 별다른 개연성도 없이 메인 스토리 속으로 스리슬쩍 끼어드는 점,

주인공이 우연히 접하거나 얻은 정보를 연쇄살인범과 (과할 정도로) 밀접히 관련시키는 점,

드러난 연쇄살인범의 실체가 반전을 위한 반전으로밖에 보이지 않는 점,

600페이지가 넘는 분량 가운데, 최소한 100페이지 정도는 딴 소리를 하고 있다는 점,

출판사가 홍보한 심오한 문학성은 오히려 이야기에의 몰입을 방해하기만 한다는 점 등

이런저런 아쉬운 점들로 가득한 작품이었습니다.

 

요 네스뵈, 테스 게리첸, 마이클 코넬리, 제프리 디버 등

발표하는 작품마다 방대한 페이지를 자랑하는 일군의 작가들의 매력은

그 많은 분량에도 불구하고 스토리 전개와 인물들의 행태가 한 방향으로 수렴되어

독자들로 하여금 긴장감을 유지하게 하고 을 잃지 않게 만든다는 점입니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도 애써 메모나 기억에 의존할 필요 없게끔 캐릭터를 잘 살려놓고,

분위기 설명을 위한 주변 풍광의 묘사 역시 적절한 선에서 그칠 줄 압니다.

벌어지는 사건들은, 때론 무관해 보이면서도, 분명 하나의 궤도 안에서 벌어지고 있고,

반전은, 그것이 진범의 정체든 사건 뒤에 감춰진 진실이든, 납득 가능한 수준으로 설명됩니다.

하지만 모든 죽은 것은 아내와 딸을 잃고 한때 알코올에 중독됐던 찰리 파커의 정신처럼

계속 갈지자걸음을 걷거나 엉뚱한 설명을 하고 있거나 무리한 설정에 함몰돼있습니다.

 

스토리도, 서사도, 캐릭터도 필요 없고 오직 잔혹함만 즐기고 싶은 독자에게는

모든 죽은 것은 상상 이상의 재미를 선사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재미를 위해 인내해야 할 페이지가 너무 많습니다.

만일 이 작품이 (개연성은 좀 떨어지더라도) 사건에만 충실했더라면,

즉 불필요한 인물을 배제하고 현란한 수사(修辭)를 어떻게든 조금만 자제했더라면

그나마 잔혹함에 관한 한 최고라는 영예를 얻었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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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6-11-24 09: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런 식의 소설이 너무 많아요 . 그게 마치 카메라 위크가 불안정하게 어떤이의 일상을 담듯 종일 , 사건만 생기지 않는다는 설정 ㅡ 카메라 밖의 풍경까지 책에 드러내려는 욕심 때문이 아닌가 했어요 .
덕분에 몰입도는 떨어지고 , 그 와중에도 챙겨가는 몰입지점이 있고 그게 높을 수록 좋은 책인냥 보인다는것 .ㅎㅎㅎ